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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의 고추장
1751년 여름 음력 윤5월 18일 아침에 약방의 도제조 김약로(金若魯, 1694~1753)가 영조(英祖, 1694~1776)에게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1) “고추장은 요사이도 계속 드시옵니까?” 그러자 영조는 그렇다고 하면서 “지난번에 처음 올라온 고추장은 맛이 매우 좋았다”고 했다. 이에 김약로는 “그것은 조종부 집의 것입니다. 다시 올리라고 할까요?” 하고 말했다. 그러자 영조는 “그러게. 종부는 나이는 어리지만 사람됨이 매우 훌륭한데 누구의 자식인가?” 하고 물었다.
이에 김약로는 “조언신의 아들입니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영조는 “내가 믿었다가 기만당하기 일쑤였는데, 이 사람은 외모로 보자면 기괴한 일을 할 것 같지는 않구나”라고 말했다. 이렇게 영조는 고추장 맛을 보면서 그 출처에 대해서 궁금해했는데, 마침 그 인물이 당파심 때문에 영조로부터 미움을 산 적이 있던 조언신(趙彦臣, 1682~1731)의 아들 조종부(趙宗溥, 1715~?)였다. 당시 영조는 외모로 보자면 조종부를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후 1754년 음력 11월 20일자 《승정원일기》를 보면, 이날 다시 조종부가 화제가 되었다. 미시(未時, 오후 1~3시)에 영조가 숭문당(崇文堂, 창경궁의 명정전 서쪽에 있던 전각)에 나아가니, 대소 신료들이 입시했다. 이날 신하들은 조종부가 올린 영의정 이천보(李天輔, 1698~1761)에 대한 탄핵 상소를 논의하기 위해서 모였다. 영의정의 탄핵 상소이니 분위기는 사뭇 무거웠을 것이다.
영조는 탄핵 당사자인 영의정이 처분을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좌의정과 세자까지 불러들었다. 그리고 이런 말을 했다. “조종부는 괴이한 사람이 아니니 그가 쓴 (영의정을 탄핵하는) 글을 보면 알 수 있다. 일찍이 조종부 집안의 고추장 맛이 좋은 것은 알고 있었다만, 그가 고추장을 지나치게 먹어서 고추의 화신이 된 것은 아닌가 싶다. (탄핵하는 글이) 아주 심하게 맵구나”2)라고 말했다. 조종부가 올린 상소문에는 영의정 이천보가 강(姜)씨의 아내를 빼앗았고, 항의하는 강씨를 죽이라고 포도대장에게 지시했지만 따르지 않자 거듭 사람을 시켜 강요하는 바람에 결국 무고한 강씨가 죽음에 이르렀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탄핵 상소를 다시 살피고 난 뒤 영조는 앞서와 달리 이렇게 말했다. “나는 처음에는 (탄핵하는 글이) 고추장처럼 하찮은 일에 불과하다고 여겨 내버려두려 했는데, 이는 전적으로 당심(黨心)에서 비롯된 일이로구나.”3) 영조의 이런 판단은 정확한 것이었다. 이천보와 당파가 다른 조종부가 단지 풍문만을 듣고 탄핵을 요구한 것임이 판명되었기 때문이다.4) 이처럼 탕평책으로 당파의 색을 옅게 만들려고 애를 썼던 영조의 심기를 조종부가 불편하게 했지만 그렇다고 조종부 집의 고추장까지 탓하지는 않았다. 그 집의 고추장 맛이 꽤나 좋았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영조의 수라에는 어떤 고추장이 올랐을까? 마침 영조 때의 의관 유중림(柳重臨, 1705~1771)이 쓴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1766)의 〈치선(治膳)〉에 ‘조만초장법(造蠻椒醬法)’이란 제목의 고추장 담그는 법이 나온다.5)
“콩을 꼼꼼하게 고르고 물에 일어 모래와 돌을 없애며 보통 방법대로 메주를 만든 뒤에, 바싹 말려서 가루로 만들고 체에 쳐서 받는다. 콩 1말마다 고춧가루 3홉, 찹쌀가루 1되의 비율로 넣고, 여기에 맛좋은 청장(淸醬)을 휘저어 뒤섞으면서 반죽하여 아주 되게 만들어 작은 항아리에 넣은 뒤 햇볕에 쪼이면 된다.”
요사이의 고추장 담그는 법과 비슷하지만 조청을 넣지 않았기 때문에 맛은 크게 달지 않았을 듯하다.
아마도 이 고추장 요리법이 당시의 표준 제법이었던 모양이다. 유중림은 이어서 민간에서 고추장 담그는 법을 소개하는데, 먼저 민간의 잘못된 요리법부터 지적했다. 즉, 고추장에 “볶은 참깨가루 5홉을 넣기도 하는데 맛이 느끼하고 텁텁해서 좋지 않다”고 했다. 아마도 고추장에 고소한 맛을 보태려고 참깨가루를 넣는 집들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유중림은 참깨가루를 너무 많이 넣으면 고추장 맛이 상큼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또 “찹쌀가루를 많이 넣으면 맛이 시큼하여 좋지 않다”는 지적도 했다. 아마도 고추장 맛을 더욱 달게 하려고 사가(私家)에서 했던 방법으로 보인다. 또 “고춧가루를 지나치게 많이 넣으면 너무 매워서 좋지 않다”고 했다. 이런 지적으로 보아 당시 민간에서 고추장 담그기가 유행하여 여러 제조법이 나오고 있었던 모양이다.
유중림은 이렇게 문제점을 지적한 뒤에 민간의 고추장 요리법 중에 추천할 만한 것을 소개했다. “콩 1말로 두부를 만들고 꼭 짜서 물기를 빼고 나서, 여러 재료들과 함께 섞어 익히면 아주 맛있다. 일반적으로 서로 버무릴 때에 소금물을 써도 되지만 맛좋은 청장만큼 맛있지는 않다. 또 다른 방법으로는, 말린 물고기의 머리와 비늘을 없애고 납작한 조각으로 썰며 또 다시마〔昆布〕와 다사마〔多絲麻, 작은 다시마〕 따위도 함께 넣어 익기를 기다렸다가 먹으면 그 맛이 아주 좋다(마른 청어를 쓰면 더욱 맛있다).”
유중림은 숙종 때의 두의(痘醫, 천연두 전문의)였던 유상(柳瑺, 1643~1723)의 아들로 영조 때 태의원의약(太醫院醫藥)을 지낸 인물이다. 그는 1744년(영조 20)부터 주문도(注文島) 첨사(僉使)가 되어 왕실을 떠난 1762년(영조 38) 2월 4일까지 주로 ‘두의’로서 영조를 가까이에서 모셨다. 영조 연간인 1766년에 《증보산림경제》를 편찬하면서 앞에서 소개한 ‘여러 가지’ 고추장 요리법을 책에 적어둔 것으로 보아 당시 민간에서 고추장이 꽤나 유행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영조가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조종부 집의 고추장 요리법은 숙종 때 어의였던 이시필(李時弼, 1657~1724)이 지은 《소문사설(謏聞事說) · 식치방(食治方)》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쑤어놓은 콩 두 말과 흰 쌀가루 다섯 되를 섞고, 고운 가루가 되도록 마구 찧어서 빈 섬에 넣는다. 1, 2월에 이레 동안 햇볕에 말린 뒤 좋은 고춧가루 여섯 되를 섞고, 또 엿기름 한 되, 찹쌀 한 되를 모두 가루로 만들어 진하게 쑤어 빨리 식힌 뒤, 단간장을 적당히 넣는다. 또 좋은 전복 다섯 개를 비스듬히 저미고, 대하(大蝦)와 홍합(紅蛤)은 적당히, 그리고 생강은 조각내어 항아리에 넣은 뒤 보름 동안 삭힌다. 그런 뒤 시원한 곳에 두고 꺼내 먹는다.”6)
이 요리법은 유중림이 맛있다고 한 마른 청어를 넣는 제법과 비슷하게 해산물이 들어갔다. 더욱이 이시필은 이 요리법의 이름을 ‘순창 고추장 만드는 법〔淳昌苦草醬造法〕’이라고 적었다. 순창은 요사이 고추장으로 이름난 고장이다. 얼핏 생각하면 이시필이 소개한 고추장과 지금의 순창 고추장이 어떤 연관이 있을 듯하다. 그러나 숙종과 영조 때의 문헌 중에서 순창이 고추장으로 유명하다는 기록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이시필이 말했던 순창은 바로 순창 조씨인 조언신의 집을 두고 한 말이 아닐까 추정된다. 영조가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조종부 집의 고추장도 유중림의 표준 고추장 요리법보다는 이시필의 ‘순창 고추장 만드는 법’과 같은 방법으로 담근 것일 가능성이 많다.
그렇다면 영조는 고추장을 언제부터 먹기 시작했을까? 1752년 음력 4월 10일자 《승정원일기》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7) 이날도 도제조 김약로가 “조종부의 장은 과연 잘 담갔다고들 합니다”라고 아뢰었다. 그러자 영조는 “고추장은 근래 들어 담근 것이지. 옛날에도 만약 있었다면 틀림없이 먹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우부승지(右副承旨) 김선행(金善行, 1716~1768)이 “지방의 여염집에서는 성행했습니다”라고 했다. 이 대화로 미루어보면 영조 때 들어서야 왕실에서 고추장을 수라에 올렸던 듯하다. 그러나 서울이나 지방의 사가에서는 그전에 이미 고추장이 유행했음을 김선행의 말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유중림의 글에서도 보았듯이 민간의 문헌에서는 고추장을 ‘만초장(蠻椒醬)’이라고 적었다. 여기에서 ‘만(蠻)’은 남방의 오랑캐를 뜻한다. 즉, 남방에서 전해진 ‘초(椒)’로 만든 장(醬)이란 말이다. 이에 비해 《승정원일기》에는 고추장을 한자로 ‘초장(椒醬)’ 혹은 ‘고초장(苦椒醬, 古椒醬, 枯椒醬)’, 심지어 ‘호초장(胡椒醬)’이라고도 적고 있다. 실제로 《승정원일기》에서 고추장과 관련된 이 단어들을 검색하면 영조대에서만 22건이 검색된다. 이로 미루어보아 영조야말로 조선 국왕들 중에서 가장 고추장을 즐겨 먹은 왕이 아니었을까 싶다.
심지어 75세의 영조는 스스로 “송이(松茸) · 생복(生鰒) · 아치(兒雉, 어린 꿩) · 고초장(苦椒醬) 이 네 가지 맛이 있으면 밥을 잘 먹으니, 이로써 보면 입맛이 영구히 늙은 것은 아니다”8)라고 할 정도로 고추장을 즐겨 먹었다. 더욱이 “옛날에도 만약 있었다면 틀림없이 먹었을 것이다”라고까지 말하지 않았던가? 영조는 왜 고추장을 이토록 좋아했을까?
영조의 초상화. 영조는 생전에 일곱 차례나 초상화를 그려서 도합 12본의 어진을 제작하게 했다. 그러나 현재는 연잉군 시절인 21세 때와 51세 때 초상화 두 점만 전한다. 그중 51세 때의 영조 어진은 이모본으로 1900년에 다시 제작된 것이다. <출처: 국립고궁박물관>
영조 스스로 이에 대한 답변이 될 만한 글이나 기록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분명한 이유를 알기는 어렵다. 다만, 몇 가지 추정은 가능하다. 영조는 44세였던 1737년 음력 9월 27일 영의정 이광좌(李光佐, 1674~1740)의 문안을 받는 자리에서 “얼마 전부터 비위(脾胃)가 허약하여 담음(痰飮)이 자주 생기곤 했다”9)고 스스로 밝혔다. 여기에서 ‘담음’은 여러 가지 원인으로 인해서 몸 안의 진액이 제대로 순환하지 못하고 일정 부위에 몰려서 생긴 병의 증상이다.
‘담음’은 ‘구담지환(口淡之患)’, 즉 ‘입이 싱거워 맛을 느끼지 못하는 증상’을 동반한다. 영조가 56세이던 1749년 음력 7월 24일에 제조 김상로(金尙魯, 1702~?)와 나눈 대화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영조는 “콩밥을 먹을 때마다 ‘구담지환’의 증세가 있었는데, 보리밥에는 입맛을 잃지는 않았지만 이 또한 몇 술밖에 먹지 못하였다. 예전에 수라를 올릴 때, 반드시 짜고 매운 음식을 올리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지금 나도 천초가 들어간 음식과 고추장을 즐겨 먹는다. 내 식성이 이런데, 갈수록 젊을 때와 달라지니 이것도 소화 기능이 약해져서 그런 것인가?”10)
영조는 아버지 숙종과 형 경종의 밥상에도 짜고 매운 음식이 오른 것을 보았다며 자신도 매운 음식에 끌린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따라서 영조의 고추장 애호는 위장 장애로 입맛을 잃으면서 생긴 취향일 가능성이 많다.
영조의 어머니는 무수리 출신으로 알려진 숙빈(淑嬪) 최씨(崔氏, 1670~1718)이다. 아버지 숙종은 첫 왕비와 계비로부터 아들을 얻지 못하고 훗날의 희빈(禧嬪, 1659~1701)이 된 나인 장씨와의 사이에서 경종(景宗, 1688~1724)을 낳았다. 그 후 숙종은 희빈에게 불만을 느꼈고, 그즈음 무수리였던 숙빈 최씨가 숙종의 총애를 얻기 시작했다.
이런 정국 속에서 영조는 1694년(숙종 20) 음력 9월 13일 새벽에 창덕궁 보경당(寶慶堂)에서 태어났다. 6세 때 연잉군(延礽君)에 봉해진 영조는 커가면서 왕실에서 본인이 처한 위태로운 위치를 알기 시작했다. 더욱이 연잉군은 몇 차례 잘못된 행동 때문에 숙종으로부터 질책을 받아 눈 밖에 났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숙종 사후에 소론의 지원을 받은 경종이 왕위에 올랐고, 노론의 후원을 받은 연잉군은 1721년(경종 1) 음력 8월에 세제(世弟)로 책봉되었다. 1724년(경종 4) 음력 8월 병약하던 경종이 갑작스럽게 숨을 거두자 왕위를 물려받게 되었다.
이와 같이 영조는 연잉군 시절부터 왕실의 정치적 암투 속에 생존을 도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보니 위장 장애가 생겼을지도 모른다. 앞에서도 소개했듯이 왕위에 오른 뒤에도 비위가 허약한 탓에 담음에 자주 시달렸다. 한의사 김민호는 《영조실록》에 나타난 몇몇 기사를 통해서 영조가 ‘심화(心火)’라는 질병도 가지고 있었다고 보았다.11) 심화는 마음속의 울화로 몸과 마음이 답답하고 몸의 열이 높은 병을 가리킨다. 심화에 걸리면 아주 사소한 일에도 조바심을 내고 불안감이나 초조함에 시달린다. 영조가 그랬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의문점이 한 가지 생긴다. 몸 자체가 지병 덩어리였을지도 모를 영조가 어떻게 조선의 27명 왕 중에서 83세의 성수(聖壽)를 누렸을까?
영조의 나이 65세였던 1758년 음력 12월 11일, 조정의 상황은 매우 긴박했다. 약방의 제조 세 명이 모두 시강원(侍講院)에 입직(入直)하고, 의관들도 모두 대령했다. 심지어 조정 대신들도 모두 대궐 뜰에 모였다. 영조가 앓아눕자 혹시나 모를 변고가 생기지 않을까 걱정해서였다. 진맥이 끝난 후 약제가 올라갔다.
12일에 약방에서는 이중탕(理中湯)을 달여서 올렸다. 그래도 차도가 없자 다음 날인 13일에 약방에서 오적산(五積散)을 달여서 올렸다. 그다음 날인 14일에는 인삼양위탕(人蔘養胃湯)을 끓여서 올렸다. 12월 15일에는 인삼양주탕(人蔘養胄湯)을 달여 올렸다. 16일, 17일, 18일, 19일에는 연이어 이중탕을 올렸다. 병이 난 지 열흘이 지난 음력 12월 21일 영조의 병에 조금씩 차도가 있었다. 이른바 ‘사직의 위기’를 넘긴 것이다. 그러자 영조는 “이것은 이중탕의 공(功)이다. 이중탕의 이름을 ‘이중건공탕’(理中建功湯)이라고 하사하겠다”고 했다.12)
본래 이중탕은 명나라 때의 의서인 《만병회춘(萬病回春)》, 《보유방(補遺方)》, 《의학입문(醫學入門)》 등에 그 처방이 나온다. 조선의 의서인 《동의보감(東醫寶鑑)》, 《제중신편(濟衆新編)》, 《방약합편(方藥合編)》 등에도 처방이 실려 있다. 이중탕은 인삼 · 백출 · 건강포(乾薑炮) · 감초 네 가지 생약으로 처방된다. 여기에서 인삼 · 백출 · 감초는 원기를 돋우는 약이고, 말린 생강인 건강은 체온을 올려 추위를 쫓아주는 약으로, 위장 기능이 허약하여 수족이 차고 구토를 하거나 복통에 시달릴 때 먹으면 좋다.
자주 복통에 시달렸던 영조는 이후에도 이중탕의 덕을 많이 보았다. 1761년 음력 3월 24일에 영조는 “이중건공탕을 날마다 두 번씩 달여서 들이도록 명”13)하였다. 영조와 신하들은 이중건공탕의 이름도 아예 ‘건공탕(建功湯)’이라고 줄여 불렀다. 1762년 1월 20일에는 영조가 다시 아랫배가 살살 아픈 병에 들자 약방에서 “하루에 건공탕을 네 차례 올렸다.”14) 결국 영조는 1773년 음력 5월 16일에 시를 잘 짓는 정범조(丁範祖, 1723~1801)에게 이중탕을 칭송하는 〈건공가(建功歌)〉를 짓도록 명하기까지 했다.15)
그러나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했던가? 아무리 몸에 좋은 약도 남용하면 그 약효가 떨어지게 마련이다. 그럼에도 의관들은 영조가 복통을 호소할 때마다 계속해서 ‘건공탕’을 올렸다. 결국 영조는 〈어제건공가증(御製建功可憎)〉, 즉 “건공탕이 가증스럽다”는 글을 통해서 ‘건공탕 만능주의’를 탓했다.
“가증스러운 건공탕을 하루에 세 첩이라니. 신농이 명했나, 편작이 처방했나? 조선의 대소 신료들에게 물어보아도, 모두 헷갈려 하네. 또 그리 해야 할 까닭을 물어도 그때그때 몸의 상태에 따른 것이라 하네. 비록 이렇기는 하지만 (복용하면) 볼 수 있고, 걸을 수 있네. 아아! 늘그막에 너무 괴롭고 고달퍼라. 모두 말하기를 신령스러운 단약이라 하지만 나는 지지대(쓰러지지 않게 겨우 지탱시키고 있는 것)라고 하네.
처방전을 볼 때마다 먼저 저절로 눈썹이 일그러지네. 녹용을 더하여 넣으면, 과연 기(氣)와 혈(血) 둘 다 보할 수 있나? 나는 절로 비웃음만 나오지만, 뭇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믿네. 이처럼 임금은 괴롭고 신하는 헷갈리지만, 근본을 바르게 하려면 이 마음을 밝혀야 하리. 건공탕아! 건공탕아! 매우 고달프고도 고달프구나, 영단아! 영단아! 다만 괴롭고 괴로울 뿐. 이 탕을 밤낮으로 증오할 수밖에 없네. 그리하여 이 처방전을 깊이깊이 감추고 싶네.”16)
하지만 영조는 사망 바로 이틀 전인 1776년 음력 3월 3일에도 이중건공탕을 복용했다.
그렇다고 영조의 83세 장수가 오로지 이중건공탕 덕분이라고 보면 안 된다. 영조는 평소에도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각종 ‘다음(茶飮)’을 음료처럼 마셨다. ‘다음’은 탕제처럼 처방에 따라 종류를 가려야 하지만 다른 보약보다 음료로 마시기에 좋았다. 영조는 허리와 다리에 담이 오면 송절차(松節茶, 소나무 지상부인 줄기와 가지에서 마디를 이루고 있는 부위를 잘라서 썰어 말린 송절에 오가피 · 우슬 등을 넣고 끓인 차)를 마셨고, 갈증과 심화가 생기면 강귤차(薑橘茶, 생강과 귤껍질 등 넣고 달인 차) · 계귤차(桂橘茶, 육계와 귤껍질 등을 넣고 달인 차) · 향귤차(香橘茶, 귤껍질을 넣고 달인 차) 같은 ‘다음’을 마셨다.
이뿐이 아니다. 영조는 그 어느 왕보다 자신의 건강 상태를 의관들과 자주 의논했다. 영조 이후에 편찬된 승정원의 업무 지침서인 《은대조례(銀臺條例)》(1870)에는 승지가 내의원의 의원과 함께 왕을 만나 건강 상태를 세밀하게 점검하는 ‘문안진후(問安診候)’에 대한 규정이 나온다. 이 규정에 의하면 승지들과 의원들은 5일에 한 번씩 ‘문안진후’를 하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영조대의 《승정원일기》를 보면, 재위 52년 동안 무려 7,284회나 ‘문안진후’를 한 것으로 나온다. 즉, 평균 2.6일에 한 번씩 문안진후를 받은 셈이다. 재위 초기에는 ‘문안진후’의 횟수가 잦지 않다가 날이 갈수록 그 횟수가 빈번해졌고,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 4년 동안에는 하루 평균 1.2회의 입진을 받았다.
‘문안진후’의 횟수도 중요하지만 영조가 의관들과 나눈 대화를 보면 그가 상당한 의학 지식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영조는 아버지 숙종의 병간호를 하면서 의관들과 처방과 약제에 대한 토론을 거침없이 전개했다. 형 경종의 임종을 앞두고도 마찬가지였다. 영조의 장수 비결은 해박한 의학 지식을 갖추고 스스로 자신의 몸을 살필 수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또 다른 장수의 비결은 부지런함이다. 영조는 숨을 거두기 열흘 전까지도 신하들과 강연(講筵)을 하였다. 여기에 더하여 영조가 직접 지은 어제(御製)는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장서각 소장본만 무려 5,400여 건이나 된다. 재위 기간이 가장 길었기 때문에 어제의 양을 두고 다른 국왕들과 직접 비교하기는 어렵다. 그래도 영조만큼 많은 글을 지은 왕은 없었다. 영조의 어제를 연구한 역사학자 노혜경은 영조의 글이 대부분 과거를 회상하는 내용이라는 점을 밝혔다.17) 영조는 지난 일을 떠올리며 기억을 되새기고, 추억의 장소를 찾아가는 등 어제 집필을 통해서 마음속에 맺힌 응어리를 풀었다. 오늘날 말로 하면 영조는 노년에 오히려 활발한 집필활동을 통해 정신 건강을 유지하고 심리를 안정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1765년(영조 41) 10월 11일, 영조가 72세가 되고, 즉위한 지 만 40년이 넘은 것을 경축하여, 경희궁의 경현당(景賢堂)에서 열린 잔치를 거린 기록화이다. 다른 왕의 진연 · 진찬 기록화에서는 매우 많은 음식이 왕을 위해 차려졌지만, 여기에서는 그렇지 않다.
《영조을유기로연(英祖乙酉耆老宴) · 경현당수작연도병(景賢堂受爵宴圖屛)》 중 5 · 6 · 7첩, 1765년, 보물 제1531호, 비단에 채색, 122.5×444.6㎝(8폭), 서울역사박물관 소장.<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여기에 영조가 실천했던 ‘절음식(節飮食, 음식 절제)’을 장수 비결 중 하나로 보탤 수 있다. 서명응(徐命膺, 1716~1787)은 〈영종대왕행장(英宗大王行狀)〉에서 “국법에는 내선부(內膳夫)가 하루에 다섯 번 왕의 찬선(饌膳)을 바치게 되어 있으나 왕께서는 하루에 세 번 찬선을 드시고 찬선도 배불리 드신 적이 없으므로 궁중에서 드디어 낮과 밤 두 번의 찬선을 폐지하였다”18)고 적었다. 즉, 영조는 하루에 죽수라 · 조수라 · 석수라 세 차례 식사만을 했던 것이다. 여름이면 콩밥이나 보리밥에 반찬 몇 가지만 놓인 수랏상 받기를 좋아했던 영조. 평소의 식사나 잔치 때를 가리지 않고 행했던 ‘절음식’의 신조는 백성을 먼저 생각하는 성왕(聖王)의 자세였으며, 동시에 자신의 체질에 알맞은 장수 비결이었다.
《승정원일기》 영조 27년(1751) 윤5월 18일자 기사 : 若魯曰, 苦椒醬近日連爲進御乎? 上曰, 連進御矣. 向日初入之苦椒醬, 甚好矣. 若魯曰, 此趙宗溥家物也. 更入之乎? 上曰, 唯. 宗溥年少而爲人頗佳, 誰子乎? 若魯曰, 趙彦臣之子也. 上曰, 予每信之而見欺, 然此人以外貌觀之, 似不爲奇怪之事矣.
《승정원일기》 영조 30년(1754) 11월 20일자 기사 : 趙宗溥非怪異之人矣. 而見其書可知矣. 曾見宗溥椒醬味好矣. 渠無乃過喫椒醬, 全身化爲椒乎? 甚酷烈矣.
《승정원일기》 영조 30년(1754) 11월 20일자 기사 : 上曰, 予初以爲不過如椒醬而止矣. 此則專出於黨心矣.
《영조실록》 영조 30년(1754) 11월 20일 2번째 기사.
유중림(柳重臨),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 제8권, 〈치선(治膳)〉, ‘조만초장법(造蠻椒醬法)’: 大豆精揀淘去砂石, 如法作末醬令極乾作末篩過. 每一斗用蠻椒末三合,糯米(卽粘米)末一升, 右三味用好清醬搜打極稠, 入小瓮晒之. 俗方則其內加芝麻炒末五合, 則膩乾不好. 又糯米末多入, 則味酸不佳好. 蛮椒末過多, 則辣甚不好矣. 一方大豆一斗作豆腐, 絞去水氣并諸物同打成, 熟極美. 凡打合時塩水亦可, 而然不如味好清醬矣. 一方乾魚去頭鱗切作尾,又昆布多絲麻(卽海帶也)之屬同入, 持熟食之極美(乾青魚尤佳).; 농촌진흥청, 《증보산림경제Ⅱ》, 농촌진흥청, 2003, 200~201쪽.
이시필 지음, 백승호 · 부유섭 · 장유승 옮김, 《소문사설, 조선의 실용지식 연구노트》, 휴머니스트, 2011, 114~115쪽.
《승정원일기》 영조 28년(1752) 4월 10일자 기사 : 若魯笑曰, 趙宗溥之醬, 果善沈云矣. 上曰, 苦椒醬, 乃近來所沈, 昔年若有之, 則必當進御矣. 善行曰, 方外閭閻家則盛行矣.
《영조실록》 영조 44년(1768) 7월 28일 계축 4번째 기사 ; 內局入侍. 上曰: “松茸 · 生鰒 · 兒雉 · 苦椒醬, 有此四味則善飯, 以此觀之, 則口味非永老矣.”
《승정원일기》 영조 13년(1737) 9월 27일자 기사 : 上曰, 自頃以來, 脾胃虛弱, 痰飮用事, 近似有漸勝, 而起動則甚難矣.
《승정원일기》 영조 25년(1749) 7월 24일자 기사 : 而水剌, 則豆飯常有口淡之患, 麥飯則不淡, 而所進, 亦每不過數匙矣. 嘗見昔年進水剌時, 必進鹹辛之物, 今予亦常嗜川椒之屬及苦椒醬. 此乃食性, 漸與少時不同者, 其亦胃氣之漸衰耶?
김민호, 〈사상의학(四象醫學)을 통해 본 조선시대 어진(御眞) 연구〉, 고려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청구논문, 2011, 57쪽.
《영조실록》 영조 34년(1758) 12월 21일자 기사.
《영조실록》 영조 37년(1761) 3월 24일자 기사.
《영조실록》 영조 38년(1762) 1월 20일자 기사.
《영조실록》 영조 49년(1773) 5월 16일자 기사.
영조(英祖), 〈어제건공가증(御製建功可憎)〉 ; 建功可憎一日三貼, 神農命乎扁鵲劑乎, 若問朝鮮大小皆迷, 且問其由其皆時體, 其雖若此能視能步, 嗟哉暮年猶苦猶困, 咸曰靈丹予云支撑, 每見鎻鈔先自蹙眉, 加入鹿茸其果雙補, 予自一哂衆皆其信, 君與其臣日困日迷, 其欲端本宜暁此心, 建功建功何困何困, 靈丹靈丹徒苦徒苦, 可憎此湯於晝於夜, 其將鎻鈔深藏深藏. 歲同年同月日朝來呼書.
노혜경, 〈영조어제첩에 나타난 영조노년의 정신세계와 대응〉, 《장서각》 제16집 2006, 142쪽.
《영조실록》, 〈영종대왕행장〉 ; 國典內膳夫日五進王膳, 而王一日三膳, 膳亦未嘗飽, 故宮中遂廢午夜二膳.
발행일 : 2018. 04. 27.
저자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음식으로 역사와 문화를 읽어내는 ‘음식인문학자’. 서강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양대 대학원 문화인류학과에서 〈김치의 문화인류학적 연구〉로 석사학위를, 중국 중앙민족대학교 대학원에서 〈중국 쓰촨성 량산 이족의 전통칠기 연구〉로 민족학(문화인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문화예술학부 민속학 담당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 《음식전쟁 문화전쟁》, 《음식인문학》, 《식탁 위의 한국사》, 《한국인, 무엇을 먹고 살았나》, 《한국인은 왜 이렇게 먹을까?》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중국음식문화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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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ë¤ì´ë² ì§ì백과] 지난번에 처음 올라온 고추장은 맛이 매우 좋았다 - 영조의 고추장 (조선의 미식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