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로이드존스를 처음 만난 것은 신학교 1학년 때였습니다. 우연히 기독교 서점에 들렀다가 그의 산상설교집을 집어들고 훑어보게 되었는데, 손에서 다시 놓을 수 없을 만큼 매료당한 나머지 외상으로까지 구입하여 단숨에 읽어버린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 이후로 산상설교, 에베소서, 로마서, 목사와 설교 등의 로이드존스의 강해서들은 거의 다 빼놓지 않고 섭렵하였습니다.
그 당시 로이드존스에게서 받은 새로운 깨우침이자 나에게 큰 도전이 되었던 것은 무엇보다 인간을 진단하는 그의 분석력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죄의 정체를 정확하게 짚어준 것이었는데 ‘죄가 성향이다’라는 언명은 나에게는 일종의 충격이었습니다. 죄를 본질과 성향의 차원에서 생각하지 않고 행위와 규범의 차원에서 생각하는 실수를 범하는 자체가 이미 하나님과의 관계를 떠나 인간 중심적으로 죄를 생각하는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로이드존스 저, 서문강 역, 에베소서 강해 2권: 영적 화해, 기독교문서선교회, 1982.
. 나아가 ‘죄가 성향’ 이라는 언명은 신앙의 실천에 있어서 정말 놀라운 통찰을 제공하였습니다. 이는 죄가 어떻게 거룩한 모습으로 위장될 수 있는가를 폭로하는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6장에서 예수님께서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고 경고하셨을 때, 예수님은 죄가 인간 본성에 깊게 뿌리박힌 성향이라는 것을 얼마나 기막히게 꿰뚫어 보신 것입니까!
신학과 설교
로이드존스에 의해서 도움을 받은 중요한 내용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기독교의 본질을 오도하는 신학조류 및 신앙 행태에 내재된 허점을 날카롭게 찌르는 분석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인간이성에 근거하여 진리기준을 세우려는 자유주의나 사회복음주의의 신학 조류가 성경해석을 얼마나 피상적으로 만들었는가를 지적할 때, 신학의 영향력을 실감케 하였습니다.(로이드존스 저, 문창수 역. 산상설교집 (상), 정경사, 2000)
또한 인간이 자기 의식이나 감각을 기준으로 신앙을 점검하려는 실존주의적 시도들로 인하여 기독교가 증상 치료의 수단으로만 인식될 수도 있음을 예시할 때, 인간의 필요를 넘어선 참된 기독교의 내용을 전한다는 것이 설교자에게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임무인가? 하는 것을 깊이 깨우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기독교는 마치 일반 종교처럼 인간이 자신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초월적인 능력으로 자주 오용되곤 합니다. 사람들은 신(神) 앞에 대가를 치루고 자기 소원을 이루려는 방법으로 종교를 종종 사용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라는 것은 하나님이 유일한 창조주시고 통치자시며 그분으로부터만 의와 진리와 거룩에 속한 가치와 질서가 나옵니다. 우리는 그에게 의존하며 그의 은혜와 인도하심 없이는 어떤 가치나 질서나 소망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독교 신앙에서 우리의 필요에 의한 답을 찾으려는 시도보다 하나님의 요구와 명령과 말씀하심을 필연적으로 앞세워야만 합니다. 이는 우리가 누구인가를 알고,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 때 선택의 여지가 없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너무도 당연한 관계질서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로이드존스는 현대 기독교사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전적 타락’이라는 개혁주의 신학의 두 축을 근간으로 기독교 신앙의 진수를 견지해내는 사명을 다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을 일차적 책임으로 삼는 설교는 먼저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전제로 합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시며 인간을 포함하여 온 우주만물에 생명과 의미를 부여하시며 인간의 모든 문제에 대하여 해답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합니다. 왜 하나님만이 답을 가지고 계시는가? 그 이유는 하나님이 창조주시며 우리는 그의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의 형상대로 만드셨으며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완성을 요구하시며 이러한 완성을 위하여 필요한 것들을 하나님이 채우시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또 전하는 것입니다.
설교의 원리
설교가 기독교의 핵심 내용을 전해야 한다는 점에서 볼 때, 설교자들이 종종 성도들을 감동시키려는 의욕이 앞서는 것은 위험합니다. 설교란 스타일이나 테크닉이 아닐 뿐더러 감동이나 동의를 얻어내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설교는 하나님이 말씀하셨고 하나님이 필요하다고 하시며 하나님이 강조하시는 모든 것을 모두 전하는 데 일차적인 책임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설교에 부차적으로 따를 수 있는 감동도 단지 인간의 필요를 채워주는 해답을 줌으로써 일어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뜻과 목적하심에 순종해야 하는 인간의 처지를 이해하고, 하나님의 요구가 참다운 은혜이며 복이라는 것을 깨닫는 차원에서 일어나는 것이어야 합니다.
저는 성경본문을 설명하는 것에 초점을 둔 강해 설교를 주로 하고 있습니다만 이는 강해 설교를 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듯 단지 제목 설교보다 더 나은 설교형태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설교를 통하여 내가 하고 싶은 말이나 또는 성도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을 하기보다는 더 근본적으로는 우리 모두는 먼저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차원에서 강해 설교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에게 만약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부분적이거나 편중되어 있으면 제대로 된 신앙을 가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제대로 된 설교를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것은, 성경이 설명하고 있는 하나님을 전체적으로 균형 있게 보게 하는 안목, 한 마디로 신학을 요구합니다. 신학은 자기가 경험한 하나님, 자기가 필요한 하나님만을 보게 되는 한계를 넘어서서 성경에서 설명한 하나님을 전체로 다 보게 해 줍니다. 따라서 신학이 필요하다는 것은 어떤 신앙적인 노선이나 주장을 갖자는 얘기가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 전체를 조감하며 종합하는 것으로서, 그리하여 성경을 보는 안목에 균형을 갖게 하는 것으로서 신학의 가치와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신학이 그 전문성과 경직됨으로 오해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만, 적지 않은 설교자들이 신학의 필요성을 숙지하지 못하고 부정적 견해를 갖는 것은 잘못된 태도입니다.
설교의 해석학적 원리
로이드존스 목사의 에베소서 강해설교집 5권(로이드존스 저, 지상우 역, 에베소서 강해집 5권: 영적 연합, 기독교문서선교회, 1983.)의 첫 장에는 신약성경에서 제일 중요한 단어라는 ‘그러므로’란 제목이 붙여져 있습니다. ‘그러므로’를 통하여 그는 앞의 서술과 뒤따라 나오는 명령을 연결하여 성경을 볼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볼 때 성경의 말씀들이 일종의 격언이라고 생각하면서 교훈적인 문구를 찾는 데 집중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그 결과 성경의 문맥 속에서 전체의 뜻을 추적하여 말씀 속에 녹아 있는 하나님의 인격성을 이해하는 것을 놓칠 때가 적지 않습니다. ‘그러므로’에 대한 로이드존스의 강조를 통하여 성경을 전체 문맥 속에서 살피는 안목과 이러한 안목에 기초하여 사고하는 법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고력의 결실로 나타난 것의 한 예로 마태복음 6장 33절에 대한 저의 해석을 들 수 있습니다 박영선 저, 마태복음 강해 2권, 세움출판사, 2002.
. 우리는 보통 33절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을 문맥적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그러할 때 이 명령은 어떤 영웅적인 일을 해야하는 것으로 들립니다. 그러나 34절 ‘그러므로 내일 일은 염려하지 말라’의 결론과의 연결 속에서 33절을 이해할 때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은 어떤 위대한 사건으로서가 아닌, 매일 매일의 일상 속에서 이루어 나가야 하는 신앙적인 결단이요, 책임이요, 인내요, 충성인 것임을 알 수 있게 됩니다.
맺음말
로이드존스 목사님은 그의 사역 기간동안 내내 자유주의 신학의 도전 앞에서 기독교 신앙을 지켜내는 일을 하였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부정하고 피조물인 인간이 감히 하나님의 자리에 서서 그 권위와 심판권을 행사하고 있음을 인식하고 그 잘못과 허구를 지적하고 경고하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일을 어떤 시대와 사회에 한정된 특별한 문제가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의 최대의 적은 언제나 인간 자신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을 부인할 뿐만 아니라 그를 대적하여 그의 자리를 넘보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동일한 싸움이 그 형태만 달리할 뿐 우리 주변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이성에 근거하여 판단하는 형태로, 잘못된 신비주의나 자연주의(理神論)가 성령운동이나 성경공부 등의 신앙적 명분을 내걸고 등장하는 것입니다.
로이드존스의 업적과 가치는 전쟁영웅식으로 어떤 역사적 사건의 해결자로 남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기독교의 근거와 본질을 분명히 지켜낸 그의 신학 원칙과 설교 자세라는 차원에서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바울을 본받는 것으로 표현될 때, 이는 결코 바울이라는 한 개인을 영웅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생애로 드러난 기독교 신앙의 본질과 원칙에 대한 이해와 표현 그리고 적용을 본받자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로이드존스의 업적도 어느 시대, 어느 환경에서나 변함 없이 지켜져야 할 신앙의 정당한 이해와 본질을 지켜내었다는 점에서 모든 하나님의 종들에게 귀감이 되는 것입니다.
박영선 / 남포교회 담임목사
마틴 로이드 존스와의 인터뷰:
“장차 올 진노에서 피하라”
칼 헨리 / 「크리스처니티 투데이」 창간 겸 편집자
질문 : 박사님은 젊은 시절 , 장래가 매우 촉망되는 의사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설교자로 나서게 되셨나요? 그 과정에서 어떤 내면적인 깊은 갈등은 없었습니까?
대답 : 예, 매우 큰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 갈등은 의사로서의 길을 정리하기까지 열여덟 달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그 당시 제 몸무게가 실제로 20 파운드 이상 줄었습니다. 친구들은 의사 일을 계속하면서 때때로 설교를 하면 어떻겠느냐고 말했습니다.
저도 그렇게 해보았지만 만족이 없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사람들의 육체적 질병보다 사람들 그 자체에 더 관심이 많았던 거죠. 제가 상대 하는 환자들 대부분이 장기 (organic) 질환이 아닌 기능 (functional) 장애를 입고 있다는 사실에 점차 마음이 이끌렸습니다.
질문 : 목사님의 그러한 결정에는 어떤 분들이 영향을 주었습니까?
대답 : 제가 소속한 교회는 런던의 한 웨일즈 장로교회였으나 제가 개인적으로 큰 매력을 느끼던 분은 존 허튼 (John A. Hutton) 박사였습니다. 이 분은 후에 「브리티쉬 위클리」(The British Weekly)지의 편집자가 되었습니다만 당시는 제가 가끔 출석하던 웨스트민스터 채플의 목사였습니다. 그분은 강해설교자가 아니었지만 설교를 매우극적으로 했으며, 저에게는 인간의 삶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권능을 느끼게 할 정도로 깊은 감동을 주는 설교였습니다. 마침내 저는 의사로 살면서 가끔씩 설교자 노릇하는 생활을 중단 하고 , 반대로 의사 노릇은 가끔씩 하고 설교를 주로 히는 설교자로 살기로 결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제가 왕실주치의인 호더(Horder)경과 함께 왕실에 소속된 의사였기 때문에 저의 결정은 언론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저도 놀랐지요.
질문 : 제가 듣기로는 1930년대 초에 이미 박사님께 영적 질병을 진단해내는 지혜의 은사가 있었고 박사님께서 과학적인 성경강해를 하신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 있었다고 하던데요.
대답 : 저는 의도적으로 남부 웨일즈의 한 작은 선교센터로 가서 개척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교인이 93명이었던 이 교회는 웨일즈 장로교 소속이었는데 , 광산지역과 철강산업의 중심지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교인들 가운데 다수는 부두노동자였습니다 . 교회는 제가 부임하지 마자 처음부터 사람들로 가득 찼습니다 . 언론의 광범위한 보도도 그 국부적인 이유였습니다. 일부 언론은 저를 크게 괴롭히기도 했지만요. 어쨌든 그 곳에서 놀랄만한 회심이 일어났습니다. 11년 6개월의 목회 기간에 교인 수는 530 명으로 늘어나고 출석수는 약 850 명에 달하게 되었습니다.
질문 : 목사님은 캠벨 몰간(G . Campbell Morgan)의 후임으로 웨스트민스터 채플을 맡게 되셨는데요, 이 분을 처음 만난 때는 언제 입니까?
대답 : 그 분이 스완시(Swansea)에서 집회를 하고 계실 때 제가 그 분의 설교를 들으려고 갔었는데, 그때 집회에 참석한 그의 친구 한 분이 저를 그 분에게 소개해주었습니다 . 그 뒤 1935 년 12월 초에 다시 몰간 목사님을 만나게 되었는데요, 안개가 지독히도 자욱이 꼈던 어느 날 밤 런던에서 가장 큰 강당이었던 앨버트 홀 (Albert Halll) 의 바이블 위트니스 (Bible Witness) 집회에서 제가 설교를 하던 때였습니다. 캠벨 몰간 박사도 이 집회에 참석했던 거죠. 그리고 거의 그다음 날 저는 그분에게서, 1935년도의 마지막 주일에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 설교를 해달라는 내용의 초청 편지를 한통 받았습니다.
그 후에 또 1937년 당시 미국연합장로교 (북장로교) 총회 전 (前) 전도 집회에서 설교를 하기 위해 제가 미국에 가있을 때, 순회여정으로 필라델피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거기에서 사회를 보시는 목사님으로부터. 전날 밤 영국에서 캠벨 몰간 박사가 이 곳에 도착해 집회에 참석하실 것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그분이 앞쪽에 앉아 있는 것이 강단에서 보였습니다. 제가 설교를 시작하자 그는 손목에서 시계를 풀었습니다. 설교시간을 재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모종의 이유로 인해 이것이 저에게 자극을 주었습니다. 집회는 은혜롭게 끝났습니다.
집회 후 구내에서 저에게 처음으로 인사 한 사람이 캠벨 몰간이었습니다. 이어서 사람들이 제게 몰려들자 그는 슬그머니 자리를 빠져 나갔습니다. 직감적으로 저는 그가 저를 지신의 동역자로 초빙하는 문제에 대해 심사숙고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습니다.1937년 6월의 그 밤에 몰간박사는 저를 웨스트민스터 채플에 초빙하기로 결정했던 것입니다.
그 후 몰간 박사는 , 제가 이듬해에 웨일즈의 한 신학대학에서 교수직을 가질 예정으로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 당분간 (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 자신과 설교사역을 교대로 행하자고 요청했습니다. 그의 요청을 받고 제가 간 떼가 1938년 9월입니다 .그로부터 6주 뒤 저는 동역목사로 시무해달라는 만장일치의 청빙을 수락했습니다.
질문 : 그런 거장의 그늘 아래 일 해보셨는데, 어떠했습니까?
대답 : 그는 위대한 강단의 거장이었습니다. 많은 면에서 제가지금까지 본 설교자들 중에 가장 위대한 설교자였습니다. 그는 또한 매우 친절하고 관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언제나 제 나름대로의 독특성을 살리고 싶었습니다. 결코 그 분 이나 다른 어떤 설교자를 모방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저의 주된 관심사는 저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해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우선은 메시지를 믿었고, 또 하나님께서 저의 노력에 응답하시리라 믿었습니다. 우리 두 사람은 매월 낮예배와 저녁예배를 번갈아 인도했습니다. 회중의 수는 전쟁(제2차 세계대전) 이전 우리가 함께 사역하던 한 해 내내 거의 동일했습니다.
질문 : 제2차 세계대전이 어떤 영향을 끼쳤습니까?
대답 : 전쟁은 대단히 파괴적이었습니다. 지금도 1939년 9월 3일 주일 오전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오전 11시에 라디오 뉴스 속보가 있을 예정이었으므로 우리는 그 불안한 발표가 있기까지 예배를 미루었습니다. 소식의 내용은 ‘전쟁 발발’ 이었습니다! 즉시로 모든 사람은 런던에 공습이 있을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우리의 예배당에는 인명대피 시설이 없었으므로 우리는 회중을 해산해야 했습니다. 사실 바로 그날에 공습경보가 울렸습니다만 이는 잘못된 경보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런던을 빠져나갔습니다. 우리의 회중 수는 점차 감소해 약 300명으로 내려갔습니다. 우리는 교회 유리창을 등화관제하고 저녁예배를 오후 중반으로 옮겼습니다. 1944년 6월에는 비행기 폭격으로 길 바로 건너편에 폭탄이 투하되어 웨스터민스터 예배당의 지붕을 반이나 날려버렸습니다. 그래서 l4주간 동안 약 150 명의 교인과 함께 홀을 빌려 예배를 드렸습니다. 캠벨 몰간의 거대 한회중이 고작 일 이백 명밖에 남지 않은 것 입니다. 캠벨 몰간 박사님은 1943 년에 사임 하고 1945 년 소천 하셨습니다.
질문· : 박사님도 설교 사역을 보류하고 싶을 정도로 낙심한 적이 있습니까?
대답 : 아뇨.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전쟁 중 일 때도 저는 최소한 일주일에 이틀씩 영국 곳곳으로 여행하며 연합 집회나 특별예배에서 설교를 했습니다. 1947년에 많은 사람들은 저에게 웨일즈 장로교 전진운동 (Forward Movement) 의 회장 직을 맡아달라고 강권하였으나 저는 전쟁으로 할퀸 런던에 머물렀습니다. 회중은 다시 서서히 늘어나기 시작해 전쟁이 끝날 즈음에는 대충 500명 정도의 사람이 꽤 정규적으로 참석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질문 : 독일 나찌당이 격퇴당한 뒤에는 어떠했습니까?
대답 : 사람들이 다시 런던으로 돌아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교인들 중 대다수를 잃은 상태였습니다. 아직 남아 있던 전쟁 전의 교인들은 주로 중년과 노년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전후 (戰後) 에 사실상 새로운 회중 층이 형성되고 있었습니다. 1948년 출석수가 1,300내지 1.400명에 도달하자 교회의 회랑을 개방했습니다. 951년 전국 100주년 박람회의 물결을 타고 수많은 사람들이 런던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캠벨 몰간 시절 이후처음으로 예배당은 다시 가득 메워졌습니다. 때로는 2500명 정도의 사람들이 청중석과 회랑, 발코니까지 가득 들어갔습니다.
질문 : 회중의 수 이외에 다른 어떤 면에서 그러한 거대한 강단사역의 효과가 측정될 수 있을까요?
대답 : 한 가지 예로 , 예배시의 고양된 영적 분위기를 들 수 있습니다. 우리는 회중들이 앉은자리에 예배 후 언제나 목사와 개인면담을 할 수 있다는 알림의 글을 놓아두었습니다. 저는 예배가 끝나고 나면 그때마다 회심이나 상담을 원하는 사람들과 면담하느라 족히 1시간 이상을 보내곤 했습니다.
질문 : 목사님께서 성경에 정통할 뿐만 아니라 의학과 과학, 역사에도 일가견이 있으시기 때문에 복음주의 밖의 지성인들이 목사님 의 설교에 매력을 느낀다는 그런 소문이 미국에까지 퍼졌지요.
대답 : 1936년에 저는 미국 IVF (Inter-Varsity Fellowship) 대회에 연사로 초청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전쟁 중에는 제가 이 모임의 회장 일을 보았습니다. 학생들이, 특히 전후 (戰後) 에 우리 교회로 대거 몰려왔습니다. 신약신학자 타스커 (R. V. G. Tasker) 교수는 주일 저녁마다 우리 교회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그리고 자유주의를 버렸습니다. 그분이 제게 들려준 말로는, 저의 설교를 들으면서 원죄와 하나님의 진노를 확신하게 되고 이로 인해 자신이 완전히 변화되었다고 합니다. 그것 말고도 저의 설교를 듣고 복음주의 신앙을 다시 회복한 사람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질문 : 제가 기억하기로 , 박사님과 저는 1966년 장차 있을 (빌리 그레이엄) 베를린 세계 복음전도대회에 관해 의논하기 위해 만났습니다만, 당시 박사님은 이 대회의 참가자나 업저버가 되기를 사양하셨지요. 또한 박사님은 런던의 큰 교회 목회자들 가운데 아마도 빌리 그레이엄 전도대회에 협력하지 않은 유일한 목사였지요? 그러한 방관자적 입장을 취한 이유가 어디에 있었습니까?
대답 : 사실 그것은 저에게 매우 중차대하고도 어려운 문제입니다. 저는 평소 부흥 외에 어떤 것도 교회와 세계의 상황을 해결할 수 없다고 믿어왔습니다. 부흥이란 성령이 찾아오시는 사건으로서 복음전도캠페인과는 다른 것이죠. 웨일즈 장로교회는 18세기의 복음주의 대 부흥에 뿌리를 두고 있었습니다.
대 부흥 당시 하나님의 권능이 설교자들과 교회들에 강하게 임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회심 하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저는 조직화된 전도운동에 대해 탐탁하게 여긴 적이 없습니다. 1820년대에, 특별히 미국에서 에이저헬네틀튼 (Azahel Nettleton) 의 부흥운동으로부터 찰스 피니 (Charles G. Finney) 의 전도운동에 이르기까지 매우 미묘하고 불행한 변화가 발생 했습니다.부흥에 관해서는 두 가지 입장이 있습니다. (교회와 사회의) 상황이 좋지 않게 진행 되고 있을 때, 옛날의 접근법은 목회자들과 집사들이 금식과 기도의 날을 선포하고 하나님께서 권능으로 임해 달라고 간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의 대안은 복음전도 캠페인입니다. 목사들은 “우리가 누구를 전도자로 세울 수 있을까? 라고 묻습니다. 그 다음에는 조직을 만들고 여기에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저는 이둘 옛 학파에 속 해있습니다.
질문 : 목사님은 현대의 복음전도운동 그 자체에 대해 특별히 어떤 점들을 염려하고 계시는가요?
대답 : 한마디로 말하자면 조직화된 캠페인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결신하고 싶은 사람들을 앞으로 나오게 하는 초청제도는 더욱 그렇습니다. 제 이야기를 잘 들어 보십시오. 저는 빌리 그레이엄이 지극히 정직하고 신실하며 순전한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그는 1963년에 저에게 제1 차 (빌리 그레이엄) 전도대회의 회장을 맡아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습니다. 그 대회는 베를린이 아닌 로마에서 열리기로 예정되어 있었던 집회였습니다. 저는 그와 협상을 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만일 그가 전도대회를 위해 여러 부류의 사람들로부터 후원받는 것을 중단하고, 결신자들을 앞으로 나오게 하는 초청제도를 없앤다면, 저도 마음을 다해 그를 후원하고 집회의 회장직을 맡겠노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약 세 시간동안이나 이야기를 나누였습니다만 결국 그는 이 조건들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대회나 캠페인이 실제로 상황을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에 저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현실이 저의 견해를 실증해주고 있다고 생각되는군요. 지난 20년 내지 25년 동안 해온 이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영적 상황이 호전되기보다는 악화되지 않았습니까? 교회와 목회자들이 무릎을 꿇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간구하는 길 외에 아무것도 소용이 없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우리가 계속하여 조직하는 일에 매달리는 한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자신들에게 임하여 자신들을 치유해달라고 간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캠페인식 접근법은 궁극적으로 성령의 권능보다 기교를 신뢰하는 것 같습니다. 그레이엄은 확실히 복음을 설교합니다. 그 점에 관해서는 결코 그를 비평하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비평했던 점은, 일례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글래스고우 전도대회 때에 그레이엄은 존 서덜랜드 보넬 (John Suther-landBonnell) 로 하여금 목회자들의 모임에서 설교를 하게 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거기에 이의를 제기했죠. 그레이엄은 대답했습니다. “저는, 많은 복음주의 목사님들 보다 존 서덜랜드 보넬과 오히려 더 많은 교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이렇게 답했습니다. “아마도 보넬이 로이드 존스보다는 더 훌륭한 사람이겠죠. 이 점을 논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인 교제는 다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자신은 나와 동일한 기본 진리를 소유하지 않은 사람과 진정한 교제를 나눌 수 없을 것 같군요.”
질문 : 박사님은 케직 사경회의 팬도 아니시죠?
대답 : 거기에서 설교하는 것을 거절했습니다. 이른 바, 성화(聖化)에 관한 케직 메시지라는 것에 대해 저는 탐탁치 않게 여겼습니다. 그 메시지가 비성경적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리고 로마서 16장과 8장을 강해한 저의 책에서 나름대로 그 이유를 설명해 보았습니다. 저는 성화가 하나의 과정이라고 봅니다. 케직의 공식 문구인 “하나님을 놓아드려 하나님이 하시도록 하라” (Let go and let God) 는 비성경적입니다. 오늘날 케직은 더 이상 설교자들에게 수정된 완전주의 교리를 고수하도록 요구하지 않습니다.
질문 : 복음주의자들이 지나치게 소홀히 하는 것으로는 어떤 중요한 요소들이 있을까요?
대답 : 제가 보기에, 현대 복음주의의 낙장(落張)은경건의 문제, 곧 한때는 영성이라고 하던 것에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복음주의자들은 너무 잘난체하고 자기만족이 너무 강하며 힘이 너무 강해졌습니다.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서 겸손해야 한다는 관념은 사라졌습니다. 우리는 가짜 지성주의의 영역 속에 지나치게 들어가서, 그리고 의지를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가슴(heart)은 무시되고 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역설했던 이 위대한 요소로 돌아가기 전에는 소망이 없다고 봅니다. 에드워즈는 명석한 지성인이자 걸출한 철학가였지만 가슴(heart)에 궁극적인 강조점을 두었습니다.
제가 말하는 가슴이란, 감정적인 요소가 특별히 강조되는 전인 (全A) 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모호한 감상주의가 깊은 감정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겸손을 잃어버렸습니다. 주님에 대한 경외심이 거의 없습니다. 현대의 복음주의는 18세기의 복음주의나 청교도들의 복음주의와 매우 다릅니다. 저는 이점을 불행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복음주의는 예전의 그 복음주의입니다.
질문 : 예전의 그 복음주의는 지성적으로도 신학적으로도 강력하지 않았습니까?
대답 : 예. 엄청나게 강력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신학적으로 천박한의사(疑似) 지성주의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명석한 신학적 이해와 뜨거운 가슴, 이 양자가 다 필요합니다. 제가 처음 잉글랜드에 와서 보니, 복음주의는 비신학적이었으며 경건 주의적이고 감상주의적이었습니다. 저는 지성을 최대한 발휘할 것을 역설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많은 복음주의자들은 자기 지성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기독교의 예술관, 드라마관, 정치관같은 이차적인 것들에만 사로잡혀 있습니다.
질문 : 박사님은 기독교의 지성적 차원이 보다 강력해져서, 위대한 계시 진리에 대한 온갖 사변 적 대안들의 천박성이 백일하에 폭로되기를 분명히 바라고 계시죠?
대답 : 물론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현대의 설교와 관련하여 생각해 볼 때 성경의 가장 중요한 장은 고린도전서 2장입니다. 성령의 권능의 현현이 없으면 모든 신학은 무위로 돌아가고 맙니다. 어떤 의미에서 저의 핵심 구절은 로마서 6장 17절입니다.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 (heart)으로 순종하여 진리는 일차적으로 지성을 향해 다가오지만 그 진리는 동시에 가슴 (heart) 을 움직여야 합니다. 그러면 다음으로 진리가 의지를 움직이게 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훈의 본’ (교리)을 가지는 선에서 더 이상나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반면 어떤 사람들은 결단 (의지) 에 강조점을 두고 있습니다. 이 접근법들이 둘 다 가슴(감정)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질문 : 영국 국교회와 비국교회 안에서 복음주의가 얻은 이득이나 입은 손실이 있다면 어떤 것들을 주목할 수 있을까요?
대답 : 현재의 주된 문제는 대 혼돈입니다.
질문 : 국교회는 물론 비국교회들에서도 그렇습니까?
대답 : 예. 특히 국교회 안에서 그렇지만 비국교회도마찬가지입니다.
질문 : 왜 그럴까요?
대답 : 언어학과 교회론의 ‘전문가’들이 신학자들에게서 통제권을 빼앗아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학문이라는 것에 통제권이 양도되었습니다. 성경과 특정 교리들에 대해 자유주의적 견해로 기울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제임스 바 (James Barr) 가 그의 저서「근본주의」(Fundame -ntalism) 에서 이 나라 (영국)의 일부저명한복음주의자들이 고등비평에 입지를 양보함으로써 포착하기 어렵게 조용히 선을 넘어가고 말았다고 묘사하고 있는데, 이것이 옳습니다. 문제는 성경의 완전영감과 완전무오성 교리를 상실했다는 점입니다.
질문 : 복음주의의 출애굽, 곧 제임스 패커 (James Packer) 가 캐나다로, 콜린 브라운 (Colin Brown) 이 미국으로 이주하고 존 스토트(John Stott) 가 힘겨운 해외 사역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영국이 입은 손실과 관련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대답 : 저는 이 사람들을 대단히 존경하고 있습니다. 한 국가가 복음주의 학자들과 지도자들을 잃는다는 것은 대단히 슬픈 일입니다. 그분들은 여기 영국에 머물며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교파적 상황이 매우 복잡하기 때문에 문제를 싸움으로 해결하기는 어렵습니다. 영국 국교회의 복음주의는 오늘날 주체성 (identity)의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교단 내 다수지도자들과 교수들이 기독교의 기본 교리들을 버리는 그러한 상황이며, 기타 타협적인 교단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헌신적인 복음주의자들이 그러한 교단 내에서 일한다는 것은 결국, 이런 진리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오늘날 교회론을 새로이 부각시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제도적인 조직체를 교회로 간주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저는 ‘복음주의의 연합’ 이 옳은 일이라고 믿습니다. 복음주의자들이 세력을 규합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새로운 교단을 만들기 위해서가아니라 연대와 협력을 위해서 말이에요. 그렇게 상호간에 힘을 실어주는 것은 미래로 나아 갈 수 있는 희망찬 길입니다.
질문 : 친구분들의 말을 들어보면 목사님은 유머감각이 대단하시다고 하던데요, 강단에서는 좀처럼 유머를 사용하시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대답 : 제 경우에는 강단에서 유머스럽게 말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것 같습니다. 강단에서면 언제나나 자신이, 지옥에 갈지도 모를 영혼들과 하나님, 이 양자의 중간이라는 무시무시한 입장에 서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이런 입장이 저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므로 감히 유머를 사용하지 못합니다.
질문 : 작년에 있었던 입원 가료와 건강 회복 때문에 현재 4개월간의 설교 약속을 취소하신 것 으로 들었습니다. 목사님의 건강에 대해 저의 친구들이 몇 마디 말씀을 듣고 싶어 합니다.
대답 : 저는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늘 강제로 일을 시키시지 않으면 안 되었던, 그런 죄인입니다. 목회를 처음 시작하기 전에도 1년 반이나 깊은 갈등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1968년도에는 당연히 은퇴를 생각했었습니다. 그때 제 나이 68살이었으니까요. 그 해에도 목회를 계속하다가 3월에 이르러 큰 수술을 받게 되었는데요. 이때 하나님은 제게 웨스트민스터채플을 떠나 설교를 출판하고 영적회고록을 준비하도록 분명한 신호를 보내셨습니다. 그런 신호는, 이 수술이 심각하고 위중하지만 그럼에도 분명 성공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보장이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순회 설교를 줄이고 저술에 집중할 생각입니다.「로마서 강해」 12권 가운데 나머지 6권과「에베소서 쐐」 8권 가운데 마지막 두 권이 곧 출판될 예정입니다. 그리고 영적 자서전집필을 시작할 준비도 되어 있습니다.
질문 : 오늘의 경제상황에 대해 기독교가 무슨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대답 : 우리가 전해야 할 위대한 메시지는 인간과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죄인이기 때문에 인간적인 모든 대책은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유일한 희망은 그리스도의 재림입니다. 그 외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복음주의자들이 갑자기 정치에 이토록 관심을 기울인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50년 전이나 100년 전에는 그런 관심이 의미가 있었겠지만 지금은 그러한 노력이 제가보기에 어리석은 짓 일뿐 입니다. 지금의 세계는 해체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평생 (재림에 관한) ‘때와 기한’ 의 설정에 반대해 왔으나 지금이 마지막 때 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점차 드는군요.
질문 : 그러한 신념을 뒷받침해준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대답 :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전 지역을 모두입니다. 목회를 처음 시작하기 전에도 1년 반 점령한 1967년을 저는 매우 중대한 시점으로 보았습니다. 누가복음21장24절은 지극히 의미심장한 구절입니다. 거기에 보면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 방언들에게 밟히리라” 고 씌어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 일이 1967년도에 발생한 것 같습니다. 이는 2천년 동안 일어나지 않았던 극히 중차대한 사건입니다. 누가복음 21장24절은 하나의 고정된 사실입니다. 그러나 종말이 이르기 전 유대인들 가운데서 커다란 영적 회심이 있을 것에 대해 말하는 로마서 11장도, 마찬가지로 저에게 깊은 감동을 주는 대목입니다. 로마서 11장의 이 언급은 점진적 발전을 의미한다고 생각되지만 가일층 굉장한 어떤 사건을 가리키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때로 원근법이 들어간 그럼처럼 사건들의 간격을 축소시키는 경향이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종말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느낌은 지울 수가 없습니다.
질문 : 우리에게 설령 24시간이나 48시간 밖에 안아있지 않다 하더라도 정치 분야 혹은 기타 어떤 분야에서든 기독교적 증언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을 회피하는 짓이며 하나님의 섭리를 불신하는 것이라는 그런 견해에 목사님은 동의하십니까? 하나님은 최후의 몇 시간 안에도 일찌기 하시지 않았던 어떤 일을 이루실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가 종말에 가까이 다다를수록 공공양섬에 호소하는 일이 더욱더 중요해지지 않을까요? 또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그리스도가 요구하는 바를 역설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지 간에 재림하실 왕께서 인간과 열방을 심판하실 때 사용하실 기준에 대해 우리가 그들에게 상기 시켜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대답 : 아니오. 동의하기 어려울 것 같군요. 제가 생각하기에, 주님 자신이 역설하신 바는 이와 전혀 다르고 오히려 상반되기까지 히는 것 같습니다. 누가복음 17장을 보세요. 거기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째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나서…” 우리가 세상을 개혁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창세기 1장 28절에 근거한, ‘사회 명령과 문화명령’ 에 관한 가르침에 전혀 동의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창세기 3장에 기록된 인간의 타락을 완전히 망각한 것이라고 봅니다. 우리가 세상을 기독교화 할 수는 없습니다. 종말의 때는 노아홍수의 때와 같을 것입니다. “장차올 진노에서 피하라!” 이것이 우리가 전보다 더욱 열심히 전해야 할 메시지입니다. 현대 세계의 상황이 우리가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지금은 중요한 시국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마땅히 정치에 관여하고 사회적인 일에 개입해야한다고 믿습니다만, 그러나 교회는 아닙니다. 교회가 수행해야 할 하나님 나라의 임무는 인간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해 장차올 진노에서 구원받게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제가 믿는 바이며 또 강조하는 것입니다. 정치와 문화 및 이와 유사한 모든 것들의 주요 기능은 악을 억제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어떤 궁극적인 긍정적 사역을 결코 이룩할 수 없습니다. 확실히 세계의 역사가 이를 실례로 보여줍니다. 세상을 결코 기독교화 할 수는 없습니다.
질문 : 중생한 교회가 새로운 사회이며 영원히 지속할 유일한 사회라는 사실, 또 세상 그 자체는 결코 기독교화 될 수 없고 새로운 사회로 바뀔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중생을 떠나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길이 없다는 사실 등은 우리가 그대로 인정합니다. 그렇다 치더라도, 교회는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해야 하지 않을까요? 제도적인 교회가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 할지라도 그리스도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을 사회 제도 속에 침투시켜 경건과 정의를 보여주도록 함으로써, 악과 죄 및 지신의 대의를 파괴시킬 온갖 세력을 향해 승리의 영역을 확장시키시고 싶지 않을까요? 그리스도인들이 사회를 기독교 화하는 것은 바랄 수 없다 하더라도 선한법과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일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대답 : 물론입니다. 그러한 노력이 세상의 부패를 막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전적으로 소 극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를 적극적인 사역으로 간주하고 싶지 않습니다.
질문 : 어느 곳에서 어느 시점에, 그리스도인의 노력을 통해 ‘기독교문화’ 라 할 수 있는 것이 나 타나는 것은 불가능할까요?
대답 : 예, 결코 그러한 것은 오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성경이 그와 상반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불가능 합니다. 세계의 현재 상황을 보면 모든 문명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도덕적인면, 정치적인면, 그리고 기타 모든 면이 붕괴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확실히 이보다 더 위험한 고비는 일찌기 없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가 전해야할 가장 긴급한 메시지는 ‘장차 올 진노에서 피하라!”는 것이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질문: 그렇다면 젊은이들에게 다른 어떤 직업에 대한 소명보다도 목회사역이나 선교사로서의 소명을 먼저 고려해 보라고 권하시겠습니까?
대답 : 아니오. 지금까지 결코 그런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문제에 관한 결정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개인적 소명에 따라야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중대한 위험을 목도하고 있는 우리로서는 확실히 사람들에게 진노를 피하라고 강권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이든 현 시대에 그 밖의 다른 문제에 더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놀랄 일입니다.
질문 : 목사님의 사위 프레드 캐더우드(Sir Fred Catherwood)가 현재 유럽 의회에서 정치적인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만, 그가 그일 말고 영적인 사역에 종사하고 있다면 목사님은 더 좋으시겠습니까?
대답 : 아뇨. 그렇지 않을 겁니다. 사실 목회를 하라는 압력이 그에게 들어왔을 때 그가 이를 거부한데 대해 저는 기쁘게 생각했습니다. 저는 언제나 사람들에게 목회를 하지 말라고 말려온 입장입니다. 제 개인적인 견해로는, 사람이 목회의 길을 피할 수 없는 경우에만 목회에 들어서야 한다고 봅니다.
질문 : 사위에게 정치 분야에서 이룩할 수 있는 괄목할만한 공헌에 대해 직접 조언을 해주셨나요?
대답 : 예.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입장에 서서 ‘이것이 기독교적인 정치관’ 이라는 따위의 주장을 해서는 결코 안 된다는 이야기도 아울러 해주었습니다. 그러한 접근법이 아브라함 카어퍼의 실수였습니다. 키어퍼는 타협적인 입장에 섰습니다. 기독교 성직자로서 수상이 된 다음에는 로마가톨릭 교도들과 유대관계를 형성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찬성하는 특정의 정치적 입장을 주장하였던 겁니다.
질문 : 목사님의 초창기 설교에서 복음주의 교리에 관해 어떤 모호한 점은 없었습니까?
대답 : 사역 초기에 저는 중생을 주된 메시지로 삼고 이에 관해 설교했습니다. 그러나 칭의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지 못했지요. 아시다시피 조지 횟필드도 저와 같이 한동안 그러했습니다. 저는 제가 확신하는 것을 설교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속죄에 관해서는 소홀히 다루었으나 대략 2년 내에 저는 이런 식의 설교가 불완전한 메시지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질문 : 박사님은. 오늘날의 복음주의 설교가 속죄와 칭의 교리를 지나치게 소홀히 다루는 반면에 중생의 필요성을 강조함으로써 부지불식간에 하나님이 죄를 묵인하신다는 인상을 심어주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대답 : 예, 맞습니다.
질문 : 잉글랜드에서 복음주의가 부흥할 가망이 있다고 보시나요?
대답 :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이 크게 쏟아 부어지는 것 - 제가 말하는 부흥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외에 어떤 것도 지금의 상황을 만회 할 수 없습니다.
질문 : 목사님은 향후 20년간의 세계 역사가, 그 안에 종말이 오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려 질 것이라고 보십니까? 어떤 것이 사라지고 어떤 것이 남아있을까요 ?
대답 : 붕괴 외에는 아무것도 목도하지 못할까 걱정됩니다. 민주주의는 정치적으로 마지막 대안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인류는 기타 갖가지 정치 형태를 겪어 보았습니다. 그러나 민주주의 밖에서는 현재 독재정치 혹은 완전한 혼돈이 희미하게 등장하고 있습니다.
종말이 더욱 가까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666은인간의 수입니다. 민주주의가 바로 이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을, 그리고 자신의 형상을 예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향후 20년이 보장 되리라는 확신이 전혀 없군요. 전에는 없었던 여러 요인들이 오늘날 출현 하였습니다. 과거에는 세계 여러 지역의 찬란한 문명들이 때에 따라 붕괴되곤 하였지만 그러한 때에도 세계의 나머지 다른 지역은 황폐화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세계가 거대한 하나의 집단이 되었습니다. 한 지역에서 일어나는 일이 모든 곳에서 발생합니다. 현재, 정치가 몰락해가고 있다고 생각 됩니다 . 전 세계가 그런 것 같아요. 문명이 붕괴하고 있는 거죠.
질문 : 끝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세속적인 사람들을 위해 한 말씀해주시겠습니까 ?
대답 : 제가 할말은 이것뿐입니다. “장차올 진노에서 피하라.”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작금에 일어나고 있는 모종의 사건들은 모든 크리스천 지성인들로 하여금 불가피하게 로마 카톨릭주의가 무엇인지를 알지 않으면 안되게끔 만들고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주의(主義)와 프로테스탄티즘 사이에 화해(和解)를 도모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서 여러 운동들이 일어나고, 숱한 회의들이 개최되는가 하면, 이같은 일을 환영하는 자들은 우리(로
마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가 다시 가까워지기 시작했고, 상호존중(相互尊重) 하에 협력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 자체가 놀라운 일이 아니며, 크리스천 정신의 경이로운 구현(具現)이 아니냐고 말합니
다. 바로 이같은 일련의 움직임 때문에, 현 국면(局面)을 바르게 파악해야 할 당위성(當爲性)이 있
는 것이며; 앞 날을 내다볼 때 사태의 긴박성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반드시 직면하게 될 모종
의 개연성(蓋然性) 때문인 것입니다. 통계적으로 볼 때 현재의 상황이 지속될 경우, 머지않아 카톨
릭의 비중이 절대다수(絶對多數)를 차지하게 될 국가들은 전세계적으로 상당수에 달할 것이며; 그럴
경우, 로마 카톨릭은 '다수결 원칙'(多數決 原則)을 따르고 있는 민주주의(民主主義) 국가 내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점유(占有)하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로 인해 야기될 모종(某種)의 개연성을 예상(豫想)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나라
(영국)라고 해서 수년 내에 그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保障)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현실을 감안해 볼 때, 우리가 이같은 입장을 점검해 보고, 우리가 직면하게 될 엄청난
사실을 예의주시하는 것은 필요불가결한 것입니다.
이 일은 싫고 좋고를 떠나서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본인은 개인적으로 전에 이런 일을 해본
적이 없을 뿐 아니라, 그러한 성격의 어떤 '프로테스탄트 단체'에 소속된 적도 없고, 그같은 주제로 강
단에서 설교해 본 적도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나는 로마 카톨릭주의와 싸울 수 있는 유일한 대안(代
案)은 기독교의 진리와 위대한 개혁 교리를 적극적으로 선포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 외
에 이 문제를 능히 다룰 수 있는 것은 전무후무(前無後無)하기 때문입니다. 내게 있어, 소극적인 프
로테스탄트는 별 의미가 없다고 여겨집니다. 지금껏까지는 프로테스탄티즘이 여러 해 동안 꾸준히 성
장세를 유지해 온 것도 사실이지만, 최근 들어 로마 카톨릭 교세(敎勢)가 각 나라에서 실질적인 증가
추세를 보이는 반면, 소극적인 프로테스트의 온갖 노력들은 무기력해 보입니다. 본인은 로마 카톨릭주
의의 이러한 확산이 자기의 믿는 바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프로테스탄티즘의 무지(無知)함과 무기력
(無氣力)함에 전적으로 기인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바입니다. 본인이 시간을 투자해서 적극적으로 사
람들을 가르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말씀으로 인해 부득불 본인은
이 문제-곧 주권과 권능,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 및 높은 곳들에 있는 영적 사악함의 활동들인,
'마귀의 속임수'에 대해 다루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어쨋든 좋습니다, 우리는 무엇부터 시작하기로 할까요? 여기에서 본인은 개개인에 관해서는 고려치
않음을 분명히 해 두고자 합니다. 물론, 카톨릭 신자이면서 동시에 크리스천인 개개인들도 존재합니
다. 즉 여러분이 카톨릭 교인이면서도 크리스천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본인의 전반적인 의도는, 카
톨릭 내에서 크리스천이 된 사람들은, 그들이 속해 있는 체제(體制) 때문이 아니라 그 체제에도 불
구하고, 크리스천이 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함입니다. 하지만 분명히 해야 할 점은; 로마 카톨
릭 교회 내에서도 개인(個人)이 크리스천이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본인은 개인에 대해
서는 고려치 않을 것이며, 또한 정치적 관점에서도 이 문제를 고려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
서 정치적 측면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본인은 지금껏 그것이 엄청 중요할 수 있다
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를 제시해 왔습니다. 우리는 카톨릭 체제에 대한 역사기록을 알고 있고, 정치
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리고 카톨릭의 주장들이 정치적인 힘으로 발전된다는 사실도
알며, 따라서 이러한 측면에서만 보더라도 정치적 측면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부분
에 대해 고려하고 싶지 않습니다. 적어도 내게는, 그것이 기독교 평신도들과 기독교 정치인들의 소관
(所關)으로 보입니다. 본인으로서는 오히려 영적인 측면에 관심이 있는데,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우
리 앞에 제시하고자 하는 관건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I·로·마·카·톨·릭·체·제
자,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살펴보는 것이 좋을까요? 우선 '하나의 체제'란 관점에서 살펴볼 때; 본인
으로서는 로마 카톨릭주의로 알려진 이 체제야말로, '마귀의 가장 위대한 걸작품'이라고 단언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이 체제는 크리스천의 믿음과 성경의 가르침에서 심하게 이탈(離脫)된 종교단체
이므로, 본인은 주저없이 16세기의 종교개혁자들과 더불어, 이 체제를 '배교집단'(背敎集團)이라 단
언하는 바입니다. 이제 이 점에 대해 분명히 하도록 합시다. 우리는 배교를 기독교의 진리로부터 전
적으로 이탈한 기독교라고 정의합니다. 혹자는, "글쎄요, 당신은 직접적으로 로마 카톨릭을 지칭하는
겁니까?" 라고 반문하겠지만, 여기에 대해선 무척 신중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만일에 카톨릭을 배교
집단이라고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진실 그 자체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본인은 이 문제
를 이렇게 설명하고자 합니다. 이 경우엔 진리에 대한 '부인'(否認)의 문제라기 보다는, 차라리 진리
에 대한 '첨가'(添加)로 말미암아, 마침내 진리로부터 이탈하게 된 경우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설
명하자면 --- 이것(진리에 대한 첨가)이야말로 온갖 교활함이 들어오는 곳이요, 마귀의 속임수가 들
어오는 곳이란 말입니다. 어떤 면에서, 무심코 바라보게 되면, 세상에서 로마 카톨릭 교회만큼 정통
(正統)인 교회가 없다는 생각을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가령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人格)과 같은 교리적 측면을 고려해 볼 때는, 로마 카톨릭의 정통성에
문제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로마 카톨릭은 나사렛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드님이
시라고 믿으며; 예수님의 처녀탄생(處女誕生)을 믿으며; 예수님의 성육신(聖肉身)을 믿으며; 예수
님께서 행하신 기적들을 믿으며; 십자가 위에서의 그분의 대속(代贖) 사역과 그분의 육체적 부활(復
活)을 믿습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승천(昇天)하셔서 하늘
나라에 앉으신 사실도 믿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의 인격적 측면에 대해 로마 카톨릭은 절대적으로 정
통이며 --- 애석하게도, 로마 카톨릭이 종종, 대부분의 개신교보다 훨씬 더 정통이라고 생각하는 사
람이 있을 정도니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로마 카톨릭의 입장을 그토록 소름끼치게 만드는 이유입니
다. 마찬가지로, 우리 주님의 사역에 대한 측면을 가지고 카톨릭을 보더라도, 카톨릭의 정통성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또한 같은 방식으로 '은혜(恩惠)의 원리'에 대해 고려해 보면, 그것이 그들
의 중심 교리(敎理) 중의 하나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의 영감(靈感)과 권위(權威)에 대해서도
그들은 같은 입장을 고수하며,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애석하
게도, 대부분의 개신교보다 더 나았으면 나았지 못하지는 않다는 사실입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카톨
릭을 단지 일반적인 접근방식으로 바라본다면, 카톨릭은 세계에서 가장 정통적 교회라는 결론에 도달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점에서 교활함이 들어오고 어려운 문제들이 야기됩니다. 카톨릭
은 이 모든 것에다 '저주받을 더하기'로써, 전적으로 비(非)성경적인 것들과, 사실상 성경을 부정하는
결과가 되는 것들을, '첨가'(添加)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카톨릭이 가르치는 바를 그
대로 받아들일 경우, 결국에 가서는 우리가 거짓말을 믿는 위치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카톨릭의 교리는 일종의 모조품(模造品)이며, 성경에 명시된 대로, 카톨릭은 다름아닌 '매춘부'(賣春
婦, 음녀) 그 자체입니다. 과연 이 문제가 지극히 교활한 것이지만, 다행히도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주제도 '교활함', 즉, 마귀의 속임수에 대한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교활함이 어떤 것인지 진정으로
알고 싶다면, 반드시 로마 카톨릭 교회의 문서를 읽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은 모든 사람
에게 어떠한 모습으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카톨릭 체제는 무척 방대하고, 그녀의 교활함은 실로
커서 거의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요새와도 같습니다. 무작위로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틀림없이
여러분이 여러 번 접한 경우일 것입니다. 여러분이 들어온 바에 의하면, 로마 카톨릭 교회는 이혼(離
婚)을 용납하지 않으며, 카톨릭 교인 중 누가 이혼했을 경우, 그는 교회로부터 제명(除名)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신문 지상에서 돌연 일부 독실(篤實)한 카톨릭 신도들의 이혼 소식을 접
하고는,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지?" 라고 반문하게 됩니다. 글쎄요, 그것을 설명하는 것은 별
로 어렵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결코 진실된 결혼이 아니었다"고! ... 그들은 어떤
것이든지 해명해낼 수 있고, 어려울게 하나 없습니다.
그들의 견강부회(牽强附會)의 체계가 그러하며, 고도의 논법들이 그러하듯이, 그들은 동시에 모든
방향에서의 대응이 가능한 것처럼 보입니다. 혹은 달리 얘기해서, 로마 카톨릭이 실상으로 얼마나
많은 얼굴들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것입니다. 이 나라(영국) 안의 카
톨릭을 살펴 보십시오. 또 아일랜드와 남아일랜드의 로마 카톨릭을 살펴 보십시오. 여러분이 미합중
국에서의 카톨릭을 살펴 본 다음, 남아메리카에 있는 몇몇 라틴 국가들의 카톨릭을 살펴보게 되면,
그들이 동일한 체제라고 믿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스페인과 이탈리아 및 기
타 유사한 국가들의 카톨릭 교회를 살펴 보고, 독일이나 그 주변 국가들의 카톨릭 교회와 대조해 보
면, 상당히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결코 같은 카톨릭 체제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데도, 사실은
같은 카톨릭 체제입니다. 카톨릭은 얼마든지 그 색깔과 모습, 형태를 바꿀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어
디서든 모든 사람들에게 모든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이 카톨릭입니다, 흡사 카멜레온과 같이
......여러분은 마귀가 자신을 광명(光明)의 천사로 변모(變貌)시킬 수 있는 것이 마귀의 특징(特
徵) 중의 하나라고 우리에게 알려 준, 사도 바울의 말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카톨릭 교회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카톨릭의 '위장술'(僞裝術)에는 끝도 없고, 한계도 없습니다. 이 나라에서는 카톨릭
이 고도의 지성적인 형태로 나타나서, 카톨릭 교도들에게 성경을 읽도록 권장합니다만; 다른 나라에
서는 그렇게 하는 것을 금하며, 비(非)지성적일 뿐만 아니라, 고의적으로 미신(迷信)을 조장하기도
합니다. 또한 이 나라에서는 관용적이고, 기꺼이 들어주며, 토론도 하고 양보도 하며, 매우 친근한 모
습을 취합니다만; 그러나 다른 후진 국가에서는 아주 완고하며, 이교(異敎)에 대해 사악하고도 비열
한 방법으로 핍박을 가하곤 합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동일한 로마 카톨릭 교회요, 동일한 카톨릭 체
제이며, 동일한 카톨릭 교도들로서 존재합니다. 나는 이러한 증거들을 통해 카톨릭 교회가 마귀의 걸
작품(傑作品)임에 틀림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 한 거대한 조직과 체제가 있어, 수십세기
동안 간간이 -- 그리고 여전히 지금도 바로 이 일을 행하고 있으니 -- 곧 온갖 교활함과 속임수 가운
데서, 성경의 표현대로 "온갖 불의의 속임수로써", 마귀의 속임수를 그대로 드러내 왔습니다. 이 모두
가 성경에 분명히 예언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인들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
두 번째 장에서 이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비록 이 내용이 이 예언에 대한 유일한 설명구절은 아
니지만; 그 중의 하나라고는 말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서 여러분은 이 체제가 '발흥(發興)한', 말하자
면, 권력을 장악하게 된 사실을 확인하게 되겠지만, 그것은 이미 이 조직이 활동해 오고 있었다는 것
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또한 여러분은 그것이 계시록 13장의 두 번째 짐승으로 묘사되어 있고; 계시
록 17장의 일곱 언덕 위에 앉아 있는 '거대한 음녀(淫女)'의 그림으로 제시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듯이, 바로 로마 카톨릭이 그러하며 언제나 그같이 행해 왔습니다. 이 모든 사실은 역사 속에서 그
대로 재현되어 왔으니, 이런 식으로 이렇게 성취되어 왔습니다. 여기 은밀히 유입되어 들어와 한 때
기독교 전체를 실질적으로 장악했던 어떤 체제가 있습니다. 바로 로마 카톨릭이 천천히, 교활하게 스
며들어와, 자신의 방식으로 변질시켰고, 그 결과 카톨릭의 영향력은 거의 보편적이 되어 버렸습니다.
II·로·마·카·톨·릭·의·중·대·한·오·류·들
로마 카톨릭이 행한 일은 어떤 것입니까? 여기에 대해 적절히 다루자면 여러 달이 걸릴 것입니다.
이 한 설교에서 필자가 규명하고자 하는 관심사의 전부는 본인의 주장이 진실임을 보이기 위한 몇몇
머리글들을 제시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필자는 본 내용을 세 가지 주요 표제글로 나누고자 합니다.
1. 첫째는 로마 카톨릭이 어떻게 우상숭배와 미신행위를 도입하는 죄를 범해 왔는지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우상숭배(偶像崇拜)만큼 신랄하게 정죄받는 행위도 없습니다. 우리는 결코 '조각한 형상'
을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그럼에도 로마 카톨릭은 형상(形象)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카톨릭은 신도들
에게 형상들을 숭배하도록 가르치고 있으며; 그들은 동상들과 조형물들과 초상화들을 숭배합니다. 여
러분이 거대한 천주교 성당에 가보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로마에 있는 성 베드로 성당에 가보십시오. 거기에 사도(使徒) 베드로를 기념하는 동상(銅像)이 있
는데, 그 동상의 발가락 부분을 보면, 그 부분이 많이 닳아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
구요? 로마 카톨릭의 그릇된 가르침에 희생된 수많은 가련한 희생자들이 그 발가락에 입을 맞추기 때
문입니다! 그들은 경외심을 가지고 절하면서, 형상들과, 동상들과 유물들을 숭배합니다. 그들은 자신
들이 어떤 성인의 유물들과, 뼈 조각들과, 사용했던 물건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것을 어떤
특별한 장소에 안치하여, 그것을 숭배하며 그 앞에 절을 합니다. 이 정도는 그들이 행하는 우상숭배
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2. 두 번째 커다란 오류는 카톨릭의 전 체제와 가르침이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를 차단하고 있다는 데 있습
니다. 이것이야말로 수많은 오류들 중 가장 끔찍한 오류입니다.
예를 들어 로마 카톨릭 교회 자체가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끼어 들어오고 있습니다. 로
마 카톨릭은 카톨릭 교회 자체가 구원을 얻기 위한 필수 조건이라고 주장합니다. 교회 밖에서는 ---
"extra ecclesiam", 결코 구원이 있을 수 없다. --- "nulla salus". 즉 카톨릭 교회가 절대적인
필수요건이란 말입니다.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혼 사이에 카톨릭 교회를 끼워 넣고 있습니
다. 카톨릭은 그녀 자신이 그리스도의 대리자(代理者)가 됨을 사칭(詐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신약 성경의 어디에서도 그같은 근거를 찾아볼 수 없으되; 단지 로마 카톨릭주의 안에서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은 그녀 자신만이 진리가 무엇인지 안다고 주장합니다. 그녀가 진리를 묘사하
고, 그녀만이 진리에 대해 정의내리며 진리를 해석할 수 있다고 합니다. 프로테스탄티즘에서는 당연
히 그와 정 반대로, '전(全) 신자의 보편적 성직자(聖職者) 체제'를 가르치며, 각 사람마다 스스로
성경을 읽을 권리가 있고, 성령님의 조명(照明) 하에서 그것을 해석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로마 카톨릭은 그 사실을 절대적으로 철저히 부정합니다. 로마 카톨릭, 오직 로마 카톨릭만이, 성경
을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으며, 무엇을 믿어야 할지를 우리에게 말해 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녀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그녀가 스스로 '지속적인 계시(啓示)'를 받아왔노라고 주장하기 때
문입니다. 카톨릭은, 참 프로테스탄트 크리스천들이 믿는 바와는 달리, 계시가 신약성경과 함께 끝났
다고 믿지 않습니다. 그녀는 아직도 계시가 계속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성경의 진리에다 첨
가해야 옳다고 서슴없이 말합니다. 물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하는 반면, 카톨릭이 덧붙인
카톨릭의 전통(전승, 傳承)도 성경과 동일하게 권위가 있고, 구속력(拘束力)을 지닌다고 주장합니
다. 이것이 바로 성경으로부터 이탈하게 만드는 카톨릭적 방식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성경의 가르
침을 부인하고, 성경에서 이탈하게 만드는 것을 카톨릭의 전통(전승)에다 첨가시킨 다음, 거기에 근
거(根據)하여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활함이 기어들어오는 곳이 이 부분입니다.
마침내 종착역에 도달하게 되면 카톨릭은 우리에게 전체주의적(全體主義的) 충성을 강요합니다.
그녀는 우리가 믿는 것, 행하는 것까지 지배하려 듭니다. 그녀는 스스로 우리의 영혼과 구원(救援)을
책임지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로마 카톨릭 교회가 일러준 대로, 가르쳐 준 대로 절대
적으로 철저히 굴복(屈伏)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로마 카톨릭은 전체주의적 체제를 이루고 있습니다.
공산주의가 인권을 유린(蹂躪)하는 것이나, 히틀러가 그의 잔혹한 체제 안에서 했던 행위만큼이나,
카톨릭이 신도들의 혼을 절대적으로 얽어매고 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것이 전체주
의적 체제입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가 절대권위(絶對權威)를 행사하며 그리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버티고 서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드러난 두 번째 증거로서는,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기도 하지만, 로마 교황(敎皇)과
교황에 대한 온갖 가르침들을 들 수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대리자(代理者)'로 일컬어집니다.
그는 사도 베드로의 영적인 직계 후손으로서, 사도적 계승(使徒的 繼承)을 통해 사도 베드로의 모든
권위를 이어받았다고 말합니다. 나 자신 베드로 수위권(首位權)에 의문을 제기함으로 곁길로 빠지고
싶진 않지만, 그것이 그들의 주장 그대로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로마 교황을 '거룩한 아버지'(성
부, 聖父), 곧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부릅니다. 비록 성경은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땅 위의 어떤
사람도 '아버지'(Father)라 부르지 마라.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아버님뿐이다."고 말씀
하는데도 말입니다. 그들은 추기경(樞機卿) 회의에서 '권좌(權座)로부터' 선언한다고 하면서 교황이
"절대무오(絶對無誤)하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1870년에 교황의 절대무오성 교리를 규정했지만; 이
미 오래 전부터 그것을 믿어 왔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렇게 규정됨으로써, 그가 선언하는 것들은
절대무오하다고 주장할 수 있게 되었으니, 곧 하나님의 말씀처럼 절대무오하고, 그리스도 자신처럼
절대무오한 것은, 그가 그리스도의 대리자요 대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여러분이 알다시피, 교회
의 권력은, 데살로니가후서 2장에서 말씀하듯이, "하나님처럼" 말하는 이 한 사람의 권위 아래로 모아
지게 됩니다. 그는 사람들의 숭배를 받고 있고; 그들은 그 앞에서 절하며,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주어질 수 없는 경의(敬意)를 그에게 표시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드러난 증거는 사제직(司祭 職)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의 사제들은 특별
한 존재들입니다. 그들은 모든 신자들의 보편적 성직체계를 믿지 않습니다. 성직자(사제)가 될 수 있
는 자격은 오직 카톨릭 교회에서 훈련받고, 교회의 성직수임(聖職受任)을 받아, '사도적 계승'에서
나오는 권위를 부여받은 사람이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전서 2장 9절 말씀은 우리 모두가 성직
자들이라고 알려 줍니다: "여러분은 선택받은 세대요, 왕가의 성직자 체계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
직자들의 왕국(王國)'이란 말입니다. 로마 카톨릭에서는 전혀 "아니올시다"입니다. "당신들은 단지
평신도(平信徒)일 뿐, 결코 성직자가 아니며, 오직 카톨릭에서 수임을 받은 사람만이 성직자(사제)
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사제들에게 기적을 행하는 것과 같은 독특한 권능을 부여
해 줍니다. 바로 여기에서 심각하고 중차대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들은 사제가 하나님의 은혜가 물
에 임하도록 세례(洗禮)에서 사용되는 물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말합니다. 또한 그들은 주님의 만찬
(晩餐)에서 빵과 포도주와 연관된 기적을 행할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는데, 그들의 그같은 능력을 '화
체'(化體)라고 부릅니다. 빵은 더이상 그냥 빵이 아니며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한다고 그들이 말하는
데; 겉모습과 색깔은 잔상(殘像)으로 남지만, 내용물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화체(化體)된다고 하며,
이러한 기적(奇蹟)은 그러한 기적을 일으킬 권능을 소유한 사제에 의해서라야 수행될 수 있다는 것
입니다. 그같은 주장은 당연히 성례전(聖禮典, 성사)에 관한 교리 전체로 이어집니다. 카톨릭엔 일
곱 성사(성례전)가 있지만, 본인은 이 중 특히 세례성사(洗禮聖事)와 성체성사(聖體聖事) 대해 관
심이 있으며, 그들은 이 두 성사에 기적이 역사한다고 서슴없이 가르칩니다. 그들의 이론은 이러하니,
즉 사제의 역할에 의하여 물과, 빵, 포도주에서 기적이 역사하게 되며, 그 결과 이것들에 특별한 방
식으로 하나님의 은혜(恩惠)가 부여되는데, 그같은 기적적인 역사는 거의 자동적(自動的)으로 이루
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같은 현상을 그들은 "ex opere operato"를 이룬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더이상 그냥 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부여된 물이므로, 그 물을 어린아이 위에 부으면,
어린아이 안에서 기적이 역사(役事)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혹은 성찬식(聖餐式)에서 여러분이 빵을
취하게 되면 --- 거기에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는, 포도주는 마시지 못하게 하지만 --- 여러분은 실제
적으로 그리스도 자신의 몸을 먹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이것은 마귀의 교활한 속임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첨가'된 것으로서, 거기에 대해 신약 성경에 단 한 단
어의 언급조차 없습니다. 그러나 사제에 대한 언급을 마치기 전에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이것
이니, 곧 로마 카톨릭의 사제는 우리가 그 앞에 나아가 우리 죄들을 고백해야 할 대상이라는 것입니
다. 카톨릭에서 사제는 면죄(免罪)를 선언하고, 우리에게 죄사함을 베풀 수 있는 권세를 가졌기 때문
입니다. 어느 누구도 이 특별한 능력을 할당받은 사제직(司祭職)에 속한 사람들 외에는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들에게 가서 죄를 고백하도록 교육을 받습니다.
성경에는 그렇게 하라는 말씀이 단 한 마디도 나오지 않지만 말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우리의 죄(허
물)를 하나님께 고백해야 하고, 거듭난 크리스천들의 교회 안에서 서로에게 고백해야 한다고 가르치
지만, '사제들'에게 고백하라는 말씀은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또 하나의 드러난 증거가 있습
니다. 본인은 카톨릭 체제가 어떻게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교묘히 끼어 들어왔는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나는, 크리스천으로서, 죄를 고백하기 위해 주님께 나아가지만, 카톨릭 교도
들은 사제들에게 갑니다.
네 번째의 증거로 들어 가겠습니다. 이 부분은 우리를 가장 경악스럽게 하는 터무니 없는 궤변(詭
辯) 중의 하나입니다. 로마 카톨릭주의의 마리아 숭배가 놀라울 정도로 급격히 증가하고 있습니다.
카톨릭에서 마리아는 '하늘의 여왕'으로 일컬어지며, 그녀는 우리가 일차적으로 찾아가야 할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많은 성당들 가운데서 성모(聖母) 마리아 상(像)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 자리하고 있
는 모습을 볼 수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마리아에 의해 가려져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습니다. 왜 그
렇게 되었습니까? 여기에 대해 그들은 이렇게 답변합니다. "인간적인 모습을 지닌 성모 마리아가 예
수 그리스도보다도 훨씬 사랑스럽고 부드럽게 다가오며; 예수 그리스도는 위대하고 강력하며 권위 있
으신 반면; 너무 엄격하십니다" --- 이것이 그들의 가르침이며, 마리아 숭배에 대한 설명의 전부입니
다 --- 예수 그리스도는 너무도 엄격하기에 우리는 그에게 직접적으로 다가갈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성모 마리아가 거기에 함께 계시는데 그녀는 사랑이 넘치시며; 더욱이 그녀는 예수님의 어
머니가 되시기 때문에 예수님께 영향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대신해서 중
보(仲保)해 주시도록 성모 마리아에게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바로 우리 영혼의 구
주이신 하나님의 아드님과 우리 사이에 위치하고 계십니다. 로마 카톨릭은 점증적으로 마리아의 권능
에 뭔가를 '첨가'해 왔습니다. 카톨릭 교회는 1854년에 마리아의 '무염시태설'(無染始胎說)을 교리
로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마리아의 무염시태설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없이 태어나셨듯이, 성모
마리아도 또한 그렇게 태어나셨다는 것입니다. 최근에는 '마리아의 몽소승천'(蒙召昇天)의 교리를 발
표했는데, 그 의미는 마리아가 여타의 일반인들과는 달리 결코 죽지 않았고 묻히지도 않았으며, 그녀
의 아드님처럼 문자 그대로 하늘로 승천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같은 가르침은, 여러분도 알다시피, 성
모 마리아의 이미지를 세워주며, 그녀를 두드러지게 부각시킴으로 그리스도 자신은 아예 시야에서 가
려지게 만들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마리아 숭배에 뒤이어 '성인'(聖人)들 숭배가 추가됩니다. 로마
카톨릭 교도들은 성인들에게 기도하도록 가르침을 받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어떻게 나오게 되었습
니까? 자, 그들의 가르침은 이렇습니다. 그들은 현세에서도 완전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고 믿으며,
일부의 성인들이 현세에서 그렇게 완전한 삶을 살았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산 결과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 필요한 양보다 훨씬 많은 양의 '공덕'(功德)을 획득하고 쌓아올리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그들은
공덕을 과다히 보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여러분과 내가, 공덕이 아무리 턱없이 모자라고
부족하다 할지라도, 성인들에게 가서 기도하여 간청하면 그들의 과다량의 상당부분이 우리에게 주어
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바로 이것을 '적공'(積功, 공을 쌓는 일)이라 칭하는데, 곧 성인들이
우리를 위해 중보할 수 있고, 우리가 부족하거나 결핍되어 있음이 발견되면 그 부분을 보충하기 위해
공덕의 잉여분을 우리에게 전가(轉嫁)해 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들의 말대로라면 여러분은 성인들을 숭배하고, 성인들에게 기도하며, 그들을 의지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덕만으로는 충분치가 않고, 여분(餘分)으로 상당량의 공덕이 추가로 보충(補充)
되어져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상으로 카톨릭의 전반적 체계 및 제도가 어떻게 주 예수 그리스도와 믿는 자 사이에 교묘히 끼어
들어오는지에 대해 간단히 다섯 가지 요점만 정리해 보았습니다.
명심해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 완전한 신성을 부여하고 성육신, 동정녀 탄생 및 정통교리들에 대해
명확히 알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이같은 일들이 행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귀의 온갖 속임수가
들어오는 곳이 바로 여기입니다. 한편으로는 로마 카톨릭이 뭐든지 옳은 것만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
니다만; 문제는 그 다음에 '첨가'(添加)시키는 이 모든 것들이 너무도 그릇된 나머지, 도대체 옳은 것 중에
서 남아있는 것이 무엇인지 의아하게 만들 정도입니다.
3. 계속해서 세 번째 오류는, 로마 카톨릭이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심을 강탈할 뿐만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 우리에게 주시는 위대한 구원의 영광과 완전성(完全性)과 충분성(充分性)을 훼손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칭의(稱義) --- 곧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문제와 관련된 그들의 가르침에 대해, 첫 번째 예를
들어봅시다. 루터가 말했듯이 이것은, "교회가 일어설 것인지 넘어질 것인지의 테스트"요 --- 프로테
스탄티즘을 존재하게 만든 동인(動因)으로서 프로테스탄티즘의 영광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제 의롭다함에 관한 그들의 가르침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우리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지요? 나는 이따금씩 우리 곧 프로테스탄트들이 과연 우리 것
을 제대로 알고 있는지 의아해합니다. 프로테스탄트들이 의롭다함의 의미를 바로 알지 못할 때, 로마
카톨릭주의가 성장해 간다는 사실은 그리 놀랄만한 일이 못됩니다.
프로테스탄트들이 단지 선한 삶을 사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동안에 카톨릭주의는 성공(成
功)을 보장받게 되어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주의가 전 세계를 휩쓸고 있다는 사실이 그래서 놀랄만한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
로마교의 가르침은 사람이 의롭다함을 받는 데 있어 스스로 기여할 부분이 있으므로, 죄투성이인
인간이라도 선행이나 공적을 쌓는 행위가 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들은 그렇게 믿고 있고 또 그렇게 가
르칩니다. 우리 프로테스탄트는 "의인(義人)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우리의 모든 의는 더러운 누더
기와 같으며", 혹은,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에 기록하였듯이, "배설물"(똥)과 같아서 거부해야 할 것이
요, 무가치한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로마 카톨릭은 그것을 극구 부인하며, 사람의 의는 가치
가 있고 중요하며 유익을 끼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것은 카톨릭이 궁극적으로는 세례(洗禮)를 통해 의롭게 된 다고 가르친다는
사실입니다. 세례는 다른 모든 교리와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세례는 여러분의 죄를 사해줄 뿐
아니라, 여러분 안에 의를 주입시켜 주므로, 여러분이 세례에 의해 의롭게 된다고 그들은 가르칩니다.
비록 의식(意識)이 없는 영아라 할지라도 전혀 문제되지 않으며, 그들도 세례로 의롭게 되고, 그들의
원죄가 세례로 말살(抹殺)되며, 그들에게 이같은 적극적인 의가 주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
면, 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한 의가 아니며, 그들의 가르침에 따르면, 세례받은 자들을 위해 하나님께
서 베푸시는 의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로 옷입지 않고서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된다고 믿습니
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단지 믿음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프로테스탄트의 가르침을 위험한 이
단(異端)교리라고 비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살펴보셨듯이 카톨릭의 가르침은 모든 것을 교회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안되게끔 만들어
버립니다. 회개(悔改)하고 그리스도께로 가서 그분을 믿음으로, 구원(救援)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
하십니까?
천만에, 오직 사제가 베푸는 세례(洗禮)를 통해서만이 구원의 역사가 가능합니다. 따라서 모든 것
에서 교회와 사제의 권위가 절대적이며 필수적이 됩니다. 그들 없이는 여러분이 아무것도 할 수가 없
으며, 여러분의 운명은 오직 그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리스도께 직접 나아갈 수 있는 길은 없으며,
반드시 이들 중보자들을 통해서만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오직 한 분의
중보자(仲保者)가 있을 뿐이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말씀합니다. 하지만 로마 카톨릭은
그렇지 않습니다. 마리아, 교황, 사제들 및 모든 고위 성직자와 하위 성직자들, 이들 모두가 필요하다
고 그들은 가르칩니다.
그리하여 이토록 중차대한 칭의(稱義, 의롭다함)의 교리에 있어서 그들은 거짓말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크리스천 생활의 문제는 어떻습니까? 여기에 또 다른 심각한 문제가 있으니; 곧 경건한
삶보다는 의식(儀式)과 의례(儀禮)의 준수에 더 역점을 두는 것입니다.
카톨릭은 거룩을 추구하고 성화(聖化)에 대한 신약성경의 가르침을 이해하려 애쓰는 것보다는, 미
사에 참석하고 사제들에게 가서 죄를 고백(告白)하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야 할 책임과 사람들이 성경의 가르침에 착념(着念)하여 그대로 실행하도록
권면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가르침은 교회의 규율(規律)에 전폭적으로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각종 의식을 지켜야 하고, 그들이 하라고 일러준 대로 행해야 합니다: 특정한 절기에는
금식(禁食)해야 하고, 이것은 하고 저것은 하지 말아야 하며, 사제 앞에 나아가서 죄를 고백해야 합
니다. 일단 미사에 참석한 다음에는 여러분이 하고 싶은 대로 행해도 됩니다. 여러분의 죄는 덮어졌
고, 다시 올바르게 교정되었으니 계속 여러분의 길을 가십시오.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거룩한 삶
의 간단 명료함 대신에, 여러분에게는 의식(儀式)들과 의례(儀禮)들과 절기(節氣)들이 있습니다.
또다른 심각한 오류(誤謬)는 카톨릭이 '구원의 확신'(구원의 보장성)의 교리를 전적으로 부정(否
定)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구원의 확신(確信)의 교리만큼 영광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로마서 8
장 16절에서도 중요한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친히 우리 영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자
녀들임을 증거하십니다." 그 의미를 이해하시겠습니까? 그보다 더 놀라운 일이 없는데도; 로마 카톨
릭은 그것을 전적으로 부정합니다. 이 땅에서의 삶에는 확실성(確實性)과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습
니다.
그런데도 무슨 구원의 확신(보장성)이란 말입니까? 이것이 그들의 반박이며, 이는 매우 논리적인 것
처럼 보입니다(로마 카톨릭 체제가 마귀적으로 드러나게 되는 부분이 바로 여기이며; 적어도 이같은
비범한 천재성으로 이 모든 일을 성사시킬만한 존재는 마귀 외엔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이런
식으로 적용됩니다. 여러분이 세례를 받을 때 여러분의 원죄(原罪)가 말소되고 의롭게 되어 하나님
과 올바른 관계가 됩니다. 아 좋습니다, 그렇다면 세례 후 죄 문제, 즉 세례받은 이후에 범한 죄들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여러분이 받은 세례는 세례 후에 지은 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거기에 대해 어떡하
시겠습니까?
바로 그것이 문젭니다. 프로테스탄트의 가르침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여전히 우리를 모든 죄와 불의
에서 깨끗케 하시며; 그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은 나의 과거의 죄들, 현재의 죄들, 미래의 죄들을
덮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즉 주님의 단 한 번의 행동으로 충분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로마교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만으론 충분치 않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의 세례 후 죄 문제는 전혀 다른
성격의 문제입니다. 거기에 대해 내가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나는 사제에게 가서 죄를 고백해야만
하며; 오직 그만이 이 문제를 다룰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제라고해서 이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내 생의 마지막 순간에 도달하게 되면, 이들 세례 이후의 죄 문제와 함께 지옥과 처벌
의 위협을 받게 됩니다. 그 때 난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아무 문제 없습니다, 라고 그들은 말합니다,
여기에 고해성사(告解聖事)가 있습니다. 사제 혼자서 여러분을 위해 그것을 베풀 수 있으며, 그는 능
히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고해성사를 받게 되고, 사제에게 특별 고백을 하게 되며 여러분은
면죄를 받게 됩니다.
그것으로 내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그것만으로도 안됩니다! 거진
다 왔지만, 여전히 용서받지 못한 죄가 남아있게 됩니다. 그것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 다행스럽게도, '연옥'(煉獄)이라고 불리우는 곳이 있습니다, 라고 그들은 말합니다. 그래서 용서
받지 못한 세례 후의 죄가 남아 있는 사람들은 그 죄를 씻기 위해 그곳으로 가게 됩니다. 거기서는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자, 여전히 남아있는 나의 친척들이 나를 위해 기도를 하며 그렇게 하면
서 돈을 지불합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에게는 온갖 '면죄부'(免罪符)들과 온갖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
들'과 온갖 촛불들과 지불한 돈이 있게 됩니다. 돈을 더 많이 낼수록 이러한 죄들이 연옥에서 더 빨리
처리되며 이 사람은 연옥에서 더 빨리 나갈 수 있게 됩니다.
여러분은 그같은 주장을 성경에서 발견한 적이 있습니까? 물론 전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카톨릭
이 지금까지 주장해 온 추가계시(追加啓示)의 일부분이며, 이것이야말로 첨가 그 자체입니다. 로마
카톨릭은 그리스도의 사역이 충분치가 못하고, 이 모든 방식들에 의해 보충되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런즉 내가 이같은 로마 카톨릭을 배교집단(背敎集團)이라고 말한다 해서 지나쳤단 말입니까?
III·결·론
이 모든 것들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카톨릭 교도들은 무지 속에 감금되어 있으며 미신행위에 빠져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 결과 이 나라에서 이따금씩 칭하는 바 '대륙의 일요일' 중심의 생활방식에
점차 젖어들게 되는데, 그 의미는 여러분이 일요일 아침에 성당에 가서 미사만 드리면, 그 나머지 시
간은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미사 시간만 끝나면 다른 날과 마
찬가지로 스포츠와 행락으로 그날을 즐길 수 있다는 말입니다. 자연히 그렇게 될 수밖에 없고, 또 그
렇게 한다 해서 놀랄만한 일이 못되는 것은, 개인은 고려하지 않아도 되며 관심 밖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교회가 일러준 대로 순종하고, 그 자신을 내맡기기만 하면, 그가 해야 할 일을 다한 것이요, 나
머지는 교회가 책임지고 그들의 영혼을 돌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의 결과는 마침내, 그들
이 진리의 길을 걷는 자들에 대해 잔혹한 핍박을 가하게 되는 것이며, 그것이 역사를 통해 로마 카톨
릭 체제의 두드러진 특징이 되어 왔습니다. 그들은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를 뿌렸고, 여전히 도처에서
기회만 주어지면 그런 일들을 감행하고 있습니다.
이야기를 마치며, 여러분에게 묻고자 합니다: 우리는 지금껏 시간낭비를 해왔을까요? 꼭 이 모든
것에 관심을 가져야 만 했을까요? 마땅히 로마 카톨릭주의에 대해 새로운 접근방식이 있다는 사실에
기뻐해야 하지 않았을까요? 우리(프로테스탄트와 카톨릭) 모두가 크리스천으로서 함께 공산주의에
맞설 수 있다는 그 사실에 기뻐해서는 안된단 말인가요? 여러분이 직면해야만 하는 질문이 바로 이것
입니다. 나 자신은 여기에 대해 답하는 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로마 카톨릭 체제가 전적으로 공산주
의보다도 훨씬 위험한 체제인 것은, 그 체제가 기독교로 날조(捏造)된 체제이면서도, 모든 일을 그리
스도의 '이름'으로 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주빛 여자'이며, 가장 끔찍하고도, 더럽기
짝이 없는 속임수인 것은, 그녀가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또다른 얼굴은
공공연하고도 명명백백한 무신론적 불신앙(不信仰)입니다.
프로테스탄트 개혁자(改革者)들은 결코 고집스런 열심당원들이 아니었으며, 결코 바보들이 아니었
습니다. 이 사람들은 성령님께서 열어주신 양눈을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루터가 그러했고, 칼빈이 그
러했으며, 낙스도 그러했고, 개혁자들 모두가 그러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눈이 열리면서, 보았습니다. 바로 성경에서 경고하면서 묘사하고 있는 이 끔찍한 괴물
을 보았으며, 죽음의 위기(危機) 속에서도 이 괴물에 맞서서 프로테스트했습니다.
그들은 그 괴물이 진리(眞理)가 아니라고 말했고, 그리하여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과, 성경
이 절대적이고, 최종적(最終的)이며, 정확한 권위임과, 모든 믿는 자들의 성직자 체계 등을 주장했
습니다. 그들은 그같은 진리를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었고, 실제로 많은 자들이 그 진리를 위해
순교(殉敎)당했습니다! 여러분에게 엄숙히 경고하는 바, 여러분이 만일 로마교를 인정하는 접근을
더 기뻐하신다면, 여러분은 순교자들의 흘린 피를 부정하는 것이 됩니다. 여러분이 로마교의 가르침
을 수용(受容)한다면 결코 스미스필드 근처에 가지 마십시오. 그곳 스미스필드에서 프로테스탄트들
이 화형에 처해졌기 때문입니다. 존 브래드포드와 그 외의 많은 프로테스탄트들이 로마 카톨릭주의를
부인한 이유 때문에 화형을 당했습니다. 여러분은 그들을 부인하고 있고, 그들에 대해 등을 돌리면서,
그들이 잘못한 것이었어, 그들의 실수였어, 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이 무엇을 행하고 있는지를 깨달으
십시오, 그리고 이들의 허울좋은 논쟁(論爭)에 말려들지 마십시오.
문제가 더욱 심각해지는 이유는 무선통신과 텔레비전 때문입니다. 매스 미디어에 비치는 이들의 모
습은 무척이나 공손하고, 친절하며, 또한 훌륭한 인품을 자아내며, 무척 융통성 있어 보입니다. 그들의
모습은 종종 프로테스탄트보다 훨씬 멋있어 보이기까지 합니다! 어리석고 무식한 프로테스탄트들은 저
질적으로 비난하고,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듯하지만 말입니다!
여러분은 또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아, 그렇지만, 로마 카톨릭 교회가 달라지지 않았습니까?
당신은 단지 카톨릭의 과거만 들춰내려 하고, 마치 16세기에 살고 있는 것처럼 말씀하시는데 --지금
당신은 20세기에 살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십니까? 본인의 답변은 간단합니다. 로마 카톨릭의 거만한
허풍(虛風)이 바로 이것이며, 로마 카톨릭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Semper eadem." 어떻게 로마
카톨릭이 달라질 수 있겠습니까? 만약 그녀가 달라진다면, 그녀 스스로 과거의 잘못을 시인하는 셈이
되겠지만, 오히려 그녀는 여전히 말하기를, 로마 카톨릭 교회는 절대무오(絶對無誤)하며 교황은 바로
그리스도의 대리자요 결코 실수를 할 수 없으신 분이시다, 고 합니다. 만일에 로마 카톨릭이 추호라도
변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카톨릭의 핵심주장을 부인하는 셈이 됩니다! 그녀는 결코 변
하고 있다고 말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앞으로도 결코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혹 달라진 것이 있다면, 오히려 상태가 더 나빠진 것뿐입니다. 그녀는 16세기에
그녀가 가르쳤던 교리에서 교황의 절대 무오성과 같은 교리들을 오히려 추가시켰습니다. 다시 말하거
니와, 로마 카톨릭 교회는 결코 달라지지 않습니다. 만일 이 지구상에 하나의 거대한 세계교회가 존재
해 왔다면, 그것은 로마 카톨릭 교회가 나머지 모든 교회들을 흡수하고, 무지한 상태에 있는 그들을 집
어 삼켜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어려울게 하나도 없으니; 로마 카톨릭 교회는 기독교 모
조품이요, 가짜이며; 가장 사악한 매춘부요 가장 마귀적인 집단입니다. 실로 적(敵)그리스도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마땅히 거절해야 하고, 고발해야 하며, 무엇보다도 대적해야 할 대상입니다. 그녀를 대적
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서두(序頭)에서 말했듯이, 성경적인 교리(敎理) 위에 서 있는 기독교입
니다. "그리스도께로 나오라" 혹은 "예수님께로 나오라" 라고만 설교하는 기독교의 모습으로는 잠시라도
로마 카톨릭 교회와 맞설 수가 없습니다. 아마도 궁극적으로는 로마 카톨릭의 숫자만 불리워 주는 결과
만을 초래할 것입니다. 복음전도자들이 전도집회를 할 때 "아, 당신은 로마 카톨릭 신자시군요, 당신의
교회로 돌아가십시오." 라고 말한다면, 그들은 신약성서의 가르침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그들에게 경고해 주어야만 합니다. 이 소름끼치는 모조품(模造品)에 대항해서 맞설
수 있는 단 하나의 가르침과, 단 하나의 권능이 있으니; 성경의 오늘 본문말씀에서 칭하고 있듯이
"하나님의 전신갑주"입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란 신약성경의 진리를 성경적이고 교리적이며 신학적으
로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16 세기에도 동일하게 사용했던 무기입니다. 루터는 단지 피상적인 복
음전도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막강한 신학자였고; 또한 칼빈도 그러했으며; 그들 모두가 그러했습
니다. 로마 카톨릭을 침식시키고 로마 교회 전체를 뒤흔들어 놓았던 것이 바로 사람들에게 구체적으
로 제시되고 역사(役事)된 위대한 진리의 체계였던 것입니다. 현 상황에 대처하는 적절한 방법으로
서 이것 이상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여, 여러분의 책임(責任)이 막중합니다. 여러분은 진
리를 알아야만 하며, 진리를 이해해야만 하며, 거짓된 가르침을 대항할 수 있어야 합니다. 로마 카톨
릭과 같은 거짓 기독교에 미혹(迷惑)되고 있는 순진한 사람들에 대해 바로 여러분이 책임이 있으니,
그들의 눈을 열어주며, 그들을 바른 길로 인도해 주십시오. 그뿐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를 위
해 견고하게 설 때에야 비로소, 성령님의 복이 우리 위에 임하시도록 열정(熱情)과 확신(確信)을 가
지고 기도할 자격이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 위에 굳게 서고, 성경의 진리 위에 굳게 설 때, 본인이 믿기로는, 하나님의 영님께서
우리 위에 강력한 부흥(復興)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그같은 강력한 부흥만큼 이 가증한 체제, 곧 스
스로 로마 교회라 칭하는 저 큰 '매춘부'(賣春婦)를 쓰러뜨릴만한 것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시여, 우리에게 빛을 주사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시대를 분별(分別)하게 하시며, 너무 늦기
전에 우리를 흔들어 깨워 주소서
제가 이 본문에 주목할 것을 요구하는 데는 그럴 만한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들 가운데 한 가지는 제가 이 교회에 방문한 첫 주일 저녁에 설교했던 본문이 바로 이 구절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본문을 택한 이유는 단순히 그것 때문만은 아닙니다. 저의 결정에 따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주셨기에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이 본문을 택했습니다. 제가 이 본문으로 설교했을 당시 어떤 내용을 전했는지 자세히 기억하지 못합니다. 저는 원고를 작성하지 않았습니다. 이 본문으로 설교했던 그때도 이 말씀이 삶에 대한 나의 태도를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또다시 이 본문을 선택한 이유도 그때와 똑같습니다. 이 말씀이야말로 현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리고 교회의 구성원들이 살아가면서 행하는 모든 노력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기억하시는 대로, 바울은 고린도전서 첫 장에서 고린도교회의 상황을 다루고 있습니다. 또한 그들에게 자신이 어떻게 처음 고린도교회를 방문했는지 되짚어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그곳에 가서 복음을 전하기까지는 고린도에 교회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말씀을 전한 결과 고린도교회가 세워지게 된 것입니다.
바울이 세운 고린도 교회는 매우 큰 교회, 번창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다른 요소들이 고린도교회에 들어오게 되었고, 사도가 이 서신을 보낼 무렵 고린도교회는 매우 어지럽고 불안정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바울이 이 서신을 쓰게 된 것입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 사이에 떠돌아 다니는 말과 그들 가운데 일부 사람들이 확신하고 있는 것들이 복음의 기초를 공격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바울은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처음에 그들에게 전했던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그들에게 전했는지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제가 이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라고 요구한 것은 그것이 지금 시대에도 똑같이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밤 저는 세상의 상태를 알려주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 않겠습니다. 우리는 위기와 재난의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내일 아침 조간신문에 어떤 소식이 실려 있을지 절대로 알 수 없습니다. 이 세계는 거의 모든 면에서 붕괴되고 있습니다. 고통의 시대요, 매우 혼란한 시대입니다.
이런 때 대두되는 질문이 바로 '이 시대에 교회는 답변할 말을 가지고 있는가? 교회는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 오늘날 세상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각 개개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제가 느낀 바로는, 사도 바울이 이 본문을 통해 바로 이런 질문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에 의해 선포된 이 위대한 선언에 주의를 기울이기를 여러분에게 요청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의 못 박히심'외에는 그 어떤 것도 알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이것은 하나의 결단입니다. 매우 의도적인 결단입니다. 아무렇게나 내린 결단이 아닙니다. 모든 상황을 살핀 후에 이 결론에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히심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결단한 것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사도 바울이 과거에 큰 도시 아덴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반응으로 그런 결단을 내리게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사도행전을 익히 알고 있다면, 바울이 아덴에서 고린도로 간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또한 아덴에서 그의 사역이 중단되었고, 게다가 그리 성공적이 아니었다는 것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가 아덴에서 전한 설교에는 헬라 시인들의 시들을 인용한 내용이 있습니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바울이 헬라 학자들을 인용하고 헬라 문학에 대한 지식을 보여주었는데도 불구하고 아덴에서의 사역이 실패로 돌아가자 아덴에서 고린도로 오는 길에 '아, 다시는 이런 식으로 하지 않는 것이 좋겠구나'라고 결심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히심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결단을 내렸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해석이 전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해석을 전적으로 거부합니다. 그 이유는 한두 편의 시를 인용했다고 해서 그의 메시지의 핵심이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전한 것과 마찬가지로 아덴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히심을 설교했을 것입니다. 그는 어디서나 이것을 전했습니다. 그는 사역을 시작할 때부터 이 위대한 주제만 설교하기로 결단했습니다. 이것은 새로운 결단이 아닙니다. 원래 했던 결단의 반복입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그들 가운데서 그가 실제로 무슨 일을 행했는지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아주 신중하게 이런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그는 비상한 능력을 지닌 사람이었고, 박식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결단은 아주 중대한 것입니다. 그는 3장과 4장에서 좀더 깊이 이 부분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는 3장에서 "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미련한 자가 되어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18절)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뒤에 자신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어리석은 자가 되었다고 덧붙이고 있습니다.
헬라어로 어리석은 자가 되었다는 것은 '헬라 사람들에게 무식한 자로 취급받았다'는 의미입니다. 헬라 사람들은 아주 명석하고 위대한 철학자들입니다. 그들에게 철학이나 다른 것은 말하지 않은 채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히심을 전한다면, 그들이 자신을 무식하고 어리석은 자로 여길 것임을 바울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좋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의도적으로 어리석은 자가 되었다"라고 말합니다. 그는 계속 그런 식으로 처신했습니다. 모든 것을 배제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히심만 알기로 의도적으로 결단했습니다. 그는 아덴의 학식 있는 사람들에게 어리석고 별 볼일 없는 연사로 취급당하기로 의도적으로 결단한 것입니다.
그가 첫 장에서 이미 말한 바대로 그의 메시지는 유대인에게는 거치는 것이요, 헬라인에게는 터무니없이 어리석은 소리라는 것을 그 자신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도 유대인이었기에 유대인들의 생각과 태도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유대인에게 이 십자가의 도가 참으로 거치는 돌이었고, 헬라인들에게는 넌센스로 여겨질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팔레스타인에 살았던 어떤 목수를, 게다가 십자가에서 죽은 사람을 세상의 구세주라고 하는 주장은 말도 안 되는 얼토당토않은 것이었습니다. 그는 유대인과 헬라인이 믿는 것을 정확히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의도적으로 이렇게 설교하기로 결단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무엇을 믿고 있는지, 그리고 사람들이 자신의 메시지를 어떻게 취급할 것인지 알면서도 내린 결단입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가 내린 결론은 의도적이었습니다. 위대한 사도는 의도적으로 그들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히심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알지 않겠다는 이 결단에 이른 것입니다.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봅시다. 왜 바울은 이러한 결단을 내리게 되었을까요? 왜 바울은 그런 식으로 처신하기로 결단했을까요? 그리고 왜 저도 동일한 결단과 결론에 이르게 되었을까? 왜 바울은 그러한 결론에 도달했습니까? 오늘날 설교자들은 왜 이 동일한 결론에 이르러야 할까요?
저는 오늘날 교회가 능력을 잃고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는 이유가 바로 이 결론에 도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확신합니다. 교회가 정반대로 행동하고 있기 때문이고, 잘못된 방식으로 각 사람들의 취향에 맞추려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위대한 사도가 이런 결단을 내린 이유를 확실히 깨닫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가 그런 결단을 내린 이유를 우리에게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오늘날의 견해는 그런 결단과는 정확히 반대의 입장에 있습니다. 오늘날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만약 교회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하려면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잇는 것에 대한 언급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래 전부터 여러 가지 종류의 문제를 안고 사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히심만 전하는 것은 소용이 없는 일이라고 얘기되어 왔습니다. 사람들이 듣지 않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들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소수의 사람들의 지지는 얻겠지만 대중들에게 영향을 주지는 못할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기 원한다면, 그들을 인도하길 원한다면, 그들이 관심을 두고 있는 것에 대해 언급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나 이런 논쟁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아덴과 고린도를 방문했던 이천 년 전에도 이런 논쟁들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도 사람들은 자신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 것에 대해 이야기해 줄 사람을 원했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시간을 쓰지 않으려고 했습니다(행17:21). 그들은 듣는 것을 좋아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이 그들을 방문했을 때에도 "이 말쟁이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라고 말하며 궁금해 했습니다. 그들은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항상 그들이 관심을 갖는 것에 대해서만 말해주길 원했습니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그 사람들의 일부는 유대인이었고, 아마 나머지 사람들은 주로 헬라인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관심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은 바울이 무엇을 말하기를 바랐을까요? 물론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항상 율법에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주신 율법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항상 그것에 대해서만 논쟁하고 토론했습니다. '율법에서 가장 중요하고 으뜸인 계명이 무엇인가?' 율법에 대해서 논쟁하고 각 계명이 가지고 있는 유익들을 토론하는 것이 유대인들에게는 가장 큰 기쁨거리였습니다. 그래서 누구라도 율법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면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헬라인들이 무엇에 관심을 두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헬라인들은 철학이라는 것에 기본적인 관심을 두고 있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헬라인들은 여러 가지 방문에서 이 세상에 살았던 인종들 중에서 능력이 탁월하고 지적으로 우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알고 있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위대한 철학자들을 배출한 민족이 바로 헬라인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바울이 그리스도에 관한 메시지를 전하기 전에 그리스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입니다.
헬라인들은 철학적인 문제에 굉장한 관심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무슨 뜻일까요? 철학이란 인생을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이 같은 세상에서 지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라면, 문제와 아픔과 고통을 보면서 술이나 마시고 이 모든 것을 잊어버리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이 왜 이럴까?', '문제가 무엇인가?', '이렇게 된 상태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래서 헬라인들은 자신들의 탁월한 머리를 가지고 이러한 생의 문제들을 연구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물론 이것에 반대되는 가르침과 입장이 잇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오늘날 대학이나 학파에 해당하는 학원을 세웠습니다. 아마 여러분은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학파에 관해 읽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내세우면서 사람이 어떻게 해야 유토피아, 즉 완벽한 상태에 이를 수 있을지 논쟁했습니다.
철학의 또 다른 분파는 문화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문화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우리 모두는 그 의미를 잘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유명한 클라크 경이 TV에서 '문명'에 대해 강의하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헬라인은 건축에 관한 한 전문가였습니다. 그들은 장엄한 건물들을 많이 세웠습니다. 아테네에 가면 지금도 그 건물들의 잔해를 볼 수 있고, 그 잔해를 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방문할 가치가 있습니다. 그것들은 정말 위대한 건축물입니다. 일반 문화, 건축, 문서 등에 대해 헬라인들은 탁월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어떤 형태의 예술이든 관심을 가졌습니다. 헬라인들은 예술에 대해 토론하기를 즐겼습니다. 또한 스포츠에 대해서도 전문가들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올림픽 경기에 매료되곤 합니다. 그러나 올림픽 경기를 시작한 것은 우리가 아닙니다. 바로 헬라인들입니다. 마라톤, 올림픽 경기 등은 그들이 붙인 이름입니다. 지적으로 우수한 그들이 시작하고 발전시킨 것들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헬라인들에게 관심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사회생활, 도덕, 행위, 윤리 등 이 모든 것에 대해 관심을 가졌습니다.
바울은 이런 다양한 주제들에 대해 헬라인들이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러한 것들 중 한가지라도 이야기를 하면, 헬라인들은 누구라도 관심을 가질 것을 알았으며, 강연할 때마다 사람들이 모여들 것이고, 또 인기를 얻을 것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문제들을 언급할 만한 지식과 능력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의도적으로 이런 모든 주제를 언급하지 않기로 결단했습니다. 그는 헬라인들에게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히심만을 전하기를 결단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 질문을 생각해봅시다. 왜 그는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을까요? 왜 그는 그런 결단을 내렸을까요? 다행히 그는 고린도전서 2장 6절에서 답해주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세상의 지혜는 없어질 지혜입니다. 허사로 돌아가고 말, 아무 것도 아닌 지혜입니다. 왜 바울은 철학을 설교의 주제로 삼지 않았을까요? 왜 그는 정치에 관해 말하지 않았습니까? 왜 그는 문화나 예술,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다루지 않았습니까? 그 이유는 바로 그 모든 것이 허사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없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옳은 것일까요? 검증해봅시다. 그가 썼던 서신에서 그가 했던 말을 통해 살펴봅시다. 유대인들이 그토록 관심을 가지던 율법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왜 바울은 바리새인들이 항상 해오던 방법대로 율법의 세밀한 문제를 계속 거론하지 않았습니까? 왜 그는 율법을 해석하는데 시간을 보내지 않았을까요? 그는 많은 곳에서 우리에게 답을 줍니다.
예를 들어, 로마서 3장 20절을 보면,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해줄 뿐입니다. 우리를 정죄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를 진흙탕 속에서 굴복하게 만듭니다.
로마서 8장 3절에서는 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의 죄를 정하사" 다른 말로 말해서 율법은 실패했습니다. 즉 아무도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과 율법학자들이 그렇게 많은 토론을 벌였던 율법을 그 누구도 온전히 실천하지 못했습니다. 율법은 사람들을 도와주지 못합니다. 율법은 오로지 사람들을 정죄할 뿐입니다. 율법은 사람의 필요와 상처를 노출시키고, 사람들을 소망 없는 곳으로 완전히 내동댕이칠 뿐입니다.
바울과 저는 율법을 설교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율법이 아무 것도 해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허사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우리를 완전히 소망 없는 상태에 버려둡니다. 우리는 다른 문제에 있어서도 이를 똑같이 적용할 수 있습니다.
왜 바울은 철학에 대해서 설교하지 않았습니까? 철학은 허사로 돌아갈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철학을 인간의 지혜, 이 세상의 지혜라고 부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에 세상이 알고 있는 위대한 철학자들이 이미 있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위대한 가르침을 베풀었고, 그들의 계획을 제시했고, 유토피아에 대한 제안을 내놓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일반 역사에서 뽑아본 통계는 다른 부류의 사람들보다 철학자들이 자살률이 더 높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철학은 실패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지혜와 지식이 모든 시도를 다해볼 때까지 자신의 아들을 보내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그것들이 허사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철학은 문제 제기를 아주 잘합니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 후에 체코슬로바키아를 세운 위대한 지도자였던 토마스 마사리크(Thomas Masaryk)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철학자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세상을 해석하기만 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철학자들은 여러 가지 다른 견해와 해석을 제시하는 데 명석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있는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게 합니다. 세상이 정작 요구하는 것은 변화입니다. 어떤 철학자들도 이 세상을 변화시킨 적이 없습니다. 절대로 그런 적이 없습니다.
옛 세상은 이 탁월한 사상가들과 철학자들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비참한 상태에 처해 있었습니다. 어떤 상태였습니까? 제가 따로 설명 드릴 필요도 없습니다. 로마서 1장 마지막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그 당시 사회의 상태였습니다. 헬라의 철학자들과 그 문화, 로마의 법률, 정치에도 불구하고 다음에 언급하는 내용이 그들의 모습이었습니다.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롬1:28-32)
사람들은 철학자들의 위대한 가르침을 따르는 대신 이런 방식으로 살아왔습니다. 바울은 이 말을 하기 전에 무섭고 추한 성적인 변태 행위들도 지적했습니다. 남자들이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남자들끼리 성관계를 가짐으로써 자신의 몸을 부끄럽게 했다고 말입니다. 온 세상이 더러움 속에 침몰하고 있었습니다. 유토피아, 정치, 사회적인 개혁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의 실제 삶은 추악하기 그지없었습니다. 바울이 옳았습니다. 그 모든 것이 허사로 돌아갔습니다. 허사요, 실패요, 헛된 노력이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수세기를 통해서 지속되어온 진리입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동일한 것들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형태로 이것들을 드러내고 있지만, 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사람들은 허사로 돌아갈 것들을 신뢰해왔습니다. 사람들은 교회에 가서 예배드리기를 그만두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경을 믿지 않기로 결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믿는 것일까요? 철학입니다. 위대한 철학자들입니다.
여러분은 원하기만 하면 TV나 라디오를 통해서 지금도 철학과 정치를 신봉하는 말들을 들을 수 잇습니다. 우리는 정치가 사회의 모습을 바꿔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50년 전에 제가 여기 왔을 때에도 람세이 맥도날드(Ramsay Macdonald)와 다른 많은 사람들이 그런 확신을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정치가 세상을 바르게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신화나 요정 이야기 같은 넌센스가 아니라 교육, 문화, 새로운 지식, 과학, 이성, 철학이 완벽한 세상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그것들 모두는 지금 어떻게 되었습니까?
저는 바울이 당시에 말했던 것이 오늘날에도 동일한 진리라는 사실을 여러분에게 일깨워주기 위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아무 것도 아닌 허사일 뿐이라는 진리입니다. 제 말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물론 우리가 그것들을 통해 얻는 특별한 유익도 있습니다. 그 유익들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문제와 삶과 죽음의 문제, 그리고 참된 삶, 평화, 행복, 기쁨에 관한 문제에 직면하면, 그 모든 것들은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합니다. 완전히 실패하고 맙니다. 그 모든 것들이 허사로 돌아가 버리고 맙니다.
이 주제에 대해서 제 말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저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의 말을 인용함으로써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소설가 가운데 한 사람, '전쟁과 평화'와 다른 걸작들을 쓴 작가 톨스토이가 한 말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가 했던 말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생의 의미 없는 부조리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명백하고 유일한 진리이다" 그는 인생의 의미 없는 부조리가 유일하게 분명한 진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의 말을 생각해봅시다. 오늘날 사회학과 정치적인 문제에 전문가인 모리스 긴스버그(Morris Ginsberg)라는 사람은 최근에 다른 같은 말을 했습니다. "현대 심리학적인 이론들은 지적인 진보가 필연적으로 인간관계를 개선시킨다는 초기의 이론들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했던 것이 얼마나 단순했던가를 폭로하고 있다" 바로 우리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들이 그렇게 추측했습니다. 그들은 지적인 진보가 필연적으로 인간관계를 개선시킬 것으로 확신했습니다. 과연 그렇게 되었습니까? "사람들에게 지식을 전달하고 지적인 향상을 이루게 해라. 그러면 인간관계는 나아질 것이다" 이것은 추측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1976년 앨버트 맨스브리지(Albert Mansbridge)라는 사람이 태어난 지 백 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제가 이 사람을 언급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는 노동자 교육협회(WEA)를 만든 사람입니다. 저는 노동자 교육협회 모임이 오늘날 사람들에게 얼마나 알려져 있는지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50년 전에는 아주 유명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서 노동자 교육협회 강의실에서 구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앨버트 맨스브리지가 무슨 말을 했나요? 그는 1903년에 노동자 교육협회 강의를 창설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노동자들을 교육시키는 데에 충분한 노력을 기울인다면, 오늘날 우리 사회의 중요한 문제는 저절로 해결될 것이다." 그는 실제로 그렇게 믿었습니다. 이 생각에 있어서 그보다 더 정직하고, 더 진지하고, 더 성실한 사람은 없었을 정도로 그는 실제로 그렇게 믿었고, 희생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렇게 믿은 것은 그만이 아니었습니다. 그와 함께 했던 수천 명의 사람들도 그렇게 믿었습니다. 만약 사람들이 교육에 노력을 쏟아 붓는다면, 대중들이 교육을 받기만 한다면, 우리 시대가 안고 있는 주요한 사회적인 문제들은 저절로 해결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탤벗(Talbot) 항구의 애버러본(Aberavon)에 지금 사회적인 문제가 없어졌나요? 백 년 전, 또는 오십 년 전보다 문제가 훨씬 줄었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여러분 각자에게 맡기겠습니다.
또 다른 사람을 인용해보겠습니다. 위대한 역사가, 세계 역사에 관한 열 권의 책을 구상했다가 결국은 열두 권의 책을 출간한 사람, 아놀드 토인비(Arnold Toyynbee)입니다. 그의 마지막 책제목은 "인류와 어머니 지구(Mankind and Mother Earth)입니다. 토인비는 한평생을 다 바쳐서 인간에 대해 연구하고 역사의 관점으로 세계와 인생을 이해하려고 노력한 사람입니다. 그는 단순히 학문적인 연구가 아니라 실제적인 공헌을 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세상이 더 나아지고 개선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노년이 되었을 때 저술한 마지막 책에서 토인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류의 발달에는 도덕적인 공백이 존재한다. 사람들은 물리적인 힘을 점점 확대해 나가면서 환경을 지배했다. 그러나 그에 부합하는 사회적인 제도는 개선시킬 수 없었다. 인간의 파괴적인 욕망을 잠재우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했다. 인간의 활동이 진보를 이룩한 유일한 분야는 과학기술 분야뿐이다."
아놀드 토인비는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인문주의자입니다. 그는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히심을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철학과여러 가지 사상들만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유일하게 진보한 분야는 과학기술 분야뿐이라는 옳은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달에 보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더 나은 삶을 살고 있습니까? 기술의 발전에 상응할 만한 사회적 제도의 발전이 있었습니까? 인간의 파괴적인 열정을 다스릴 해결책을 찾아냈습니까? 지난 수년 동안 뛰어난 기술은 중력의 힘을 정복하고 달 표면에 사람을 착륙시켰습니다. 놀라운 일을 해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파괴적인 욕망을 감소시키는 일에는 성공했습니까? 여러분 주위를 돌아보십시오. 신문을 읽어보고 뉴스를 들어보십시오.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도 그것들을 공정하게 바라봄으로써 모든 것이 허사로 돌아갔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의 말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뛰어난 소설가인 그는 오랫동안 과학적 인문주의라고 불리는 것을 믿어 왔고, 그의 소설 속에 그런 내용을 담아 왔습니다. 하지만 그는 과학적 인문주의가 해결책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고, 그 후에 신비주의로 돌아갔다가 불교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헉슬리는 여전히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이 그의 전기를 읽는다면 그가 생애 마지막에 이르러 어떤 말을 했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그는 남자와 여자, 그리고 인생과 삶에 대해 정말로 많은 관심을 가졌던 사람입니다. 그는 더 나은 삶을 살고 싶어했습니다. 그는 세상이 더 나은 모습이 되길 바랐습니다. 하지만 그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 원자폭탄, 수소폭탄으로 인해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습니다. 일생동안 그것을 이해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러나 생애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헉슬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일평생 인간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 왔지만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충고가 '좀 더 신중해지도록 노력하라'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없어서 정말 당혹스럽다." 뛰어난 철학과 과학적인 사고 끝에 그가 우리에게 남긴 말은 이것이 전부입니다.
"좀 더 신중해지도록 노력하라."
이제껏 말씀드린 사람들은 모두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썼던 사람들입니다. 교육, 지식, 문화, 철학, 정치를 통해서 세상을 바로 잡아보려고 했던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결국 그들이 한결같이 동의했던 내용을 다시 한 번 살펴보십시오. 그들은 모두 위대한 사도였던 바울이 고린도전서 2장 6절에서 우리에게 했던 말을 확증하고 있을 뿐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나에게는 지혜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 세상 지혜가 아니다. 너희는 내가 이 세상의 지혜를 말하길 바라지만, 나는 세상 지혜를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세상 지혜는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속이 텅 빈, 공허한 것이다. 세상 지혜를 통해 너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단지 '좀더 신중해지기 위해 노력하라'라는 권고만 들을 수 있을 뿐이다. 얼마나 철저한 파탄이자 완전한 실패인가!"
이것이야말로 오늘날의 세상이 들어야 할 메시지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믿었던 모든 것이 그들을 현재의 혼란 상태에 이르게 했습니다. 세상의 지혜는 우리에게 아무 것도 주지 못합니다. 아무런 소망도 제시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약속을 하지만 그것을 누가 믿나요? 사람들 스스로도 믿지 못합니다. 그들은 완전히 속았습니다. 사람들은 당혹한 나머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어디에 잇는지조차 알지 못합니다. 텅빈 공허함, 허무함, 소망의 완전한 상실, 궁극적인 절망.
제가 이런 문제들을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는 것은 부정적인 생각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끝장났다는 것과 모든 것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기 전까지 사람들은 복음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을 부정적인 생각에 머무르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긍정적인 방향을 제시하겠습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사도 바울이 왜 이렇게 말했을까요? 왜 모든 복음전도자들이 이렇게 말해야 할까요? 왜 오늘날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만을 온 세상에 전해야 합니까? 바울은 왜 이것을 전하기로 결단했습니까?
여기에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히심만을 전하도록 명령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 사명을 위임받았습니다. 여러분은 기억하실 것입니다. 다소 사람 사울, 바리새인이자 신자들을 핍박했던 그가 살기등등한 태도로 기독교인들을 핍박하고자 예루살렘에서 다메섹으로 내려갔던 일을 말입니다. 그는 갑자기 한 줄기 빛을 보았고,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는 "주여 뉘시오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는 대답이 들려왔습니다.
그후에 그는 위대한 사명을 부여받고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사명은 종과 증인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살아 계신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복음전도자가 될 것과, 주님과 십자가에 못 박히심을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자가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외에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알지 않겠다고 결단한 것입니다. 바로 그것만을 전하기 위해 부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공적인 정직성에 관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위대한 사도 바울은 다른 곳에서 "나는 그리스도의 사신이다"라고 말합니다. 사신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것입니까? 자신의 생각한 바를 말하는 것일까요?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는 매우 악한 사신입니다. 사신의 사명은 자신을 임명하고 파송한 국가의 생각과 입장을 전하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그 생각과 입장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신에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사신의 사명은 자신에게 어떤 전갈이 주어지든 간에 그것을 그대로 전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그 문제에 대한 선택권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이 나에게 전하라고 하신 것이다. 나는 내 이론이나 생각을 전하려고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주님이 나에게 주신 것만을 전하도록 선택받았다." 그의 서신을 읽어보십시오. 읽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세상에 존재하는 것 중에서 가장 위대한 문헌을 놓치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맡겨진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복음 전파였습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내가 생각했던 것과 철학적으로 입증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내가 받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계시입니다. 위임받은 것입니다. 명령받은 것입니다. 바울은 공적인 사명에 순수하고 정직했기에 자신이 보냄을 받은 목적, 명령받은 메시지만을 전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유가 그것밖에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왜 바울은 그것만을 전하고자 했을까요? 그는 다시 한 번 우리에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또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10절)
왜 바울은 정치나 예술이나 문화나 철학에 대한 것은 전하지 않았습니까? 그가 갖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심오한 진리, 하나님의 증거에 관한 메시지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내가 여러분에게 전한 것은 세상이나 인생에 대한 인간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모든 것에 대한 하나님의 견해가 우리에게 계시되어 있다면, 왜 우리는 결국 허사로 끝날 인간의 생각을 전하면서 힘을 낭비하고 있는 것일까요? 여러분은 TV와 라디오와 그 밖의 여러 매체를 통해 접하는 학식 있는 사람들의 말을 듣느라 피곤하지 않습니까? 그들은 사물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을 표명하는 것에 관한 한 전문가들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증명하거나 입증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독단적인 말을 합니다. 여러분은 그런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기에 지치지 않았습니까? 이 세상이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지금 세상이 절실하게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왜 세상이 이 모양이 되었습니까? 우리는 한 세기 동안 두 번의 세계대전을 겪었습니다. 첫 번째 전쟁은 오십 년 전에 제가 여기 왔었을 때 있었습니다. 그 다음에 또 한번의 세계 대전을 치렀습니다. 우리는 폭격이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알고 있습니다. 사회의 파괴를 보았습니다. 문제가 어디에 있습니까? 의회의 법령들도 우리를 올바로 인도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많은 법규들이 있지만 인도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많은 법규들이 있지만 문제가 줄어들기는커녕 점점 증가하고 있습니다. 뭔가 잘못된 것일까요? 인간들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일까요? 우리 각자가 가지고 있는 문제는 무엇입니까?
이 질문들을 만족시킬 답변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답변이며, 그분의 말씀입니다. 왜 세상이 이 모양입니까? 성경에 의하면 그것은 인간의 반역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은 완벽한 세상이었습니다. 그리고 완벽한 상태의 사람을 만드셔서 아무런 문제와 난관이 없는 낙원에 두셨습니다. 그런데 그 완벽했던 세상, 낙원이 오늘날과 같은 세상이 된 이유는 바로 인간들이 어리석음과 교만으로 인해 하나님을 배반했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을 대적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했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외칩니다. "아, 이것이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결국 인간들은 스스로 혼돈에 빠져버렸고, 낙원에서 쫓겨났습니다. 그 이후로 오늘날까지 낙원 밖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다시 낙원으로 돌아가려고 몸부림치면서 말입니다. 그렇지만 인간들은 결코 낙원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 이후로 세상은 혼란과 혼동 상태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답변이고, 그분의 말씀입니다.
왜 우리가 세계대전을 두 차례나 겪었습니까? 그런데도 왜 또 세계대전을 일으키려고 하고 있습니까? 왜 사회는 우리 눈앞에서 붕괴되어 갑니까? 왜 부도덕, 악, 혼란, 불행, 마약 중독, 알코올 중독이 만연하고 있습니까? 왜 사회적, 도덕적 문제가 끊이질 않습니까? 이 모든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그 유일한 설명은 사람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말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여러분도 기억하다시피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이미) 나타나나니(롬1:16-18)
그는 이것을 복음을 자랑하는 이유라고 말합니다. 이것이야말로 복음을 전하는 동기이고, 복음을 전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는 이유라고 고백합니다. 왜냐하면 오직 이것만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인 사람들에게 유일한 소망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이것이 지금 이 세상이 고통 당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여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20세기에 대한 유일한 설명입니다. 교육, 문화, 철학, 정치, 그리고 그 밖의 많은 시도가 있었음에도 세상은 점점 더 혼란 속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세상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을 싫어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의 선지자들을 통해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사57:22)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이 세상에 대한 설명입니다.
여러분은 호주머니를 돈으로 가득 채울 수 있습니다. 배움을 통하여 많은 지식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가질 수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절대로 평강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들은 돈을 가질 수는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돈, 학식, 지식을 가졌습니다만 평강은 얻지 못했습니다. "궤사한 자의 길은 험하니라"(잠13:15).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한번 보십시오. 어렵고 불행합니다. 세상에는 행복이 없습니다. 그래서 마약이나 알코올에 손을 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것들 없이는 살아갈 수 없을 만큼 그렇게 절망적인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의 진노가 바로 우리 위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계속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는 한 우리에게 행복을 허락하시지 않으십니다. 바벨탑을 파괴하셨던 것같이, 그분께서는 우리가 세운 바벨탑, 우리가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들을 파괴하십니다. 빅토리아 시대가 그것을 확증하고 잇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시대 사람들이 신뢰하던 것을 무너뜨리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대항하고 잇는 동안은 절대로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하늘로부터 나타나고 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상태에 대한 유일무이한 설명입니다.
저는 정치 이야기보다 더 중요한 것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정치가들은 현재 세상의 상태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헤매고 있습니다. 정치가들의 모든 예언은 거짓임이 증명되었습니다. 그들의 예언을 신뢰하던 자들은 지금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릅니다.
도덕과 과학적 지식을 소유했던 사람, 불쌍하기 그지없는 웰즈(H.G.Wells), 여러분은 그가 마지막으로 집필한 책의 제목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궁지에 빠져버린 이성'(Mind at the end of its tether)입니다. 그는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몰랐고, 이해하지도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진노 가운데서 우리들을 내려다보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창조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단지 그분의 피조물일 뿐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과 영예를 위해서 살도록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기 전까지는 절대로 평강을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바울은 "저는 여러분에게 다른 것들은 전하지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에게 전해야 하는 하나님의 증거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심오한 진리만을 전하기 원합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인간의 상태에 대한 하나님의 분석을 들을 준비가 되셨습니까? 사람들의 헛된 말들에 지치지 않으셨습니까? 여러분은 우리의 상태와 온 세상의 상태에 대한 하나님의 진단을 들으셨습니까?
저는 바울이 부정적인 것들만 말하고 끝내 버리지 않은 것에 다시 한 번 감사하는 바입니다. 그 부정적인 진술들은 이 세상의 상태에 대한 하나님의 진단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러한 진단만 내리고 나서 말을 맺지 않았습니다. 감사하게도 그는 우리의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책을 제시했습니다. 세상의 어떤 것도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했다고 말한 그 자리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7절)
이것이 바로 확실한 해결책입니다.
여러분은 미래에 대해 희망적입니까? 미래를 기대하면서 행복을 느끼고 있습니까? 만일 여러분이 자신의 남은 생애와 죽음의 순간을 미리 본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여러분이 갖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무슨 희망이 있습니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이 말씀에 - 바울이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 외에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결단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 우리 개인과 우주 전체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세상의 기초가 놓여지기 전부터 준비되고 예정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이제 실행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 말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그것은 인간의 모든 계획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항상 역사 속에 어떤 위대한 인물이 나오기를 기다립니다. 어떤 위기가 닥치면 우리는 위대한 인물이 나오기를 바랍니다. 언론인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그들은 종종 그런 식으로 말합니다. 우리가 어떤 심각한 위기에 직면할 때, 항상 '위대한 인물'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합니다. 그러면 그들이 그 위대한 인물에 대해 언급합니다. 세상은 항상 그런 인물을 기대하고 바랐습니다.
이것이 과연 하나님의 계획일까요?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그분이 누구십니까? "그분은 나사렛 출신의 예수라는 사람으로, 직업은 목수였습니다. 하지만 정말 대단한 위인이죠" 이것이 적절한 대답입니까? 바울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귀를 기울여보십시오. 우리는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 확실하게 알아야 합니다. 세상의 관원들은 그분이 어떤 분인지 몰랐습니다. 그들은 그분을 단지 한 인간으로 여겼습니다.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여기에 하나님의 해결책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바로 제가 복음을 즐거워하는 이유입니다. 오직 이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어떤 분을 주셨다고 말씀하셨나요? 위대한 철학자인가요? 위대한 정치가를 주셨다고 했나요? 아닙니다. 독생자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바로 나사렛의 예수입니다. 영광의 주님입니다.
여러분도 기억하다시피,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이것을 깨달았습니다. 그전까지 그는 예수를 일개 목수로 알았습니다. 그분에 대해서 전혀 깊이 고려해보지 않았고, 심지어는 그분을 조롱했습니다. 그랬던 그가 멸시받은 예수가 영광의 주님이고, 복되고 거룩하신 삼위일체 중 제2위이신 분이라는 진리, 그리고 성부 하나님께서 그분을 보내셨기에 이 세상에 오시게 되었다는 진리를 다메섹 도상에서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육신의 놀라운 메시지이며, 말 그대로 유일한 희망입니다. 인간들의 노력과 시도는 모두 실패로 끝나버렸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보내셨습니다.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베들레헴의 마구간에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놀라운 기적이요, 이해할 수 없는 신비요, 성육신의 경이입니다. 그분이 왜 마구간에서 태어나셔야 했습니까? "이는 사관에 방이 없었음이라." 돈을 가진 사람들이 여관방을 모두 예약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막 아이를 낳으려는 불쌍한 임산부에게 방을 내어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사람들도 현대인들처럼 이기적이었습니다. 새치기를 하면서까지 앞에 서려고 하고 자기의 권리만을 주장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만 괜찮으면 그 어떤 것도 신경 쓰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결국 아기는 볏짚과 천한 짐승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들은 그 작고 힘없는 아기를 구유로 몰아버린 것입니다. 그 아기가 누구입니까? 바로 영광의 구주이십니다.
육체에 숨겨진 하나님을 보라!
큰 소리로 환호하며 맞이하라,
성육신하신 하나님을!
바울이 전했던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구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시간 속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보내시기 전에 위대한 선지자들과 종들을 끊임없이 세우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은 하나님의 독생자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고 영광의 주님이라는 사실을 그들에게 알리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한 것입니다.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그분이 행한 기적으로 증명되었습니다. 또한 그분의 삶과 가르침과 완전한 본을 통해 입증되었습니다. 게다가 사람들을 괴롭히는 마귀와 모든 악한 것들을 정복하신 능력을 통해 입증되었습니다. 폭풍과 격노한 바다를 잠잠케 하신 권능을 통해 입증되었습니다. 그분이 바로 창조주이십니다. 결정적으로 그분이 죽음의 사슬을 끊으시고 무덤에서 일어나서 승리를 거두신 그 사건, 즉 부활을 통해 입증하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여러분은 그분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음을, 독생자로 세상에 오셨음을 알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셨습니다. 죄 있는 육신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플라톤과 소크라테스에 관해 말하라구요? 아니요, 그럴수 없습니다. 제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말할 수 있기에 그들에 대해 말할 수 없습니다. 영광의 주님에 대해 말할 수 있는데 뭐 하러 사람에 대해 말하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바울이 그들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못 박히심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겠다고 결심한 이유입니다. 갈보리의 십자가 바로 핵심입니다. 이것은 유대인에게는 거치는 것이었고 헬라인에게는 터무니없는 소리였습니다.
기적은 좋은 것이라고 우리는 말합니다. 그러나 그분은 연약함 가운데서 죽으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땅에 내려오셔서 그분을 구하시지 않았을까요? 그분은 불명예스러운 죽음, 수치스러운 죽음을 맞으셨으며, 사람들은 그분을 무덤에 장사지냈습니다. 왜 그분의 십자가의 못 박히심을 강조합니까? 사도는 우리들에게 말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간단하게 요약해 보겠습니다. 여러분과 저에게 가장 필요한 것, 그리고 이 세상에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과 화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하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우리에게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우리 모두가 느끼는 괴로움은 우리가 외인이고 반역자라는 사실, 그리고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 아래 놓여 있다는 사실에서 기인합니다.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어서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죄를 없애지 못합니다. 우리가 자신의 죄를 없애기 위해 영원이라는 시간을 들인다 하더라도 우리는 죄를 없앨 수 없습니다.
나의 수고로는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없습니다.
나의 열심도 심판을 유예시킬 수 없고,
눈물을 한없이 흘린다 해도
모든 죄를 보상할 수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당신만이 나를 구원하셔야 합니다.
오직 당신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을 통해서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신 분이시므로 죄를 못 본 척하실 수 없습니다. 그분은 의로우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죄를 짓는 자마다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이것은 현시대에서도 증명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습니까? 죄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해서 반드시 처벌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의 의로운 성품 때문에 말입니다. 그분이 제가 저지른 죄로 인해 저를 벌하신다면, 저는 끝장나고 말 것입니다. 영원한 죽음에 빠질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위해 한 가지 길을 계획하셨습니다. 세상의 기초를 놓으시기 전부터 계획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흠 없고, 순결하시고, 순수하시고, 결코 율법의 일점일획도 범하지 않으신 분, 아버지께 완전한 순종을 하신 자신의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을 십자가에 넘기셨고, 그분에게 우리의 죄를 지우셨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해서 죄를 삼으신 것은 그 안에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5:21)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고 특별히 저 십자가 위에서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고후5:19)
베드로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2:24)
하나님과 화목하는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셨고, 우리를 대신해서 벌을 받으셨으며, 우리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셨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그분 안에서만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을 전했던 것입니다.
그것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에 바울은 그것만을 전했습니다. 그 외에 어떤 것도 우리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다른 모든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것을 보았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만이 구원의 역사를 일으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지혜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도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고 말합니다(고전2:9).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입니다. 왜냐구요? 그것이 이룬 것, 그리고 우리에게 준 것들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었나요? 모든 죄가 사해졌다는 진리를 알려주었습니다. 우리 마음이 깨끗해졌다니,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우리는 끔찍한 죄를 저질렀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 깨끗케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무서워합니다. 당연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모두 죽으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죄에서 벗어날 수 잇습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 죄를 용서받을 수 있습니까? 여기 유일한 대답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을 통해서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5:1).
우리의 죄가 모두 사해졌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내일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을지 없을지 걱정할 필요 없이 평안히 잠자리에 들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평안을 누리고 있습니까? 양심의 평안을 누리고 있습니까? 죽음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죽음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오직 한가지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입니다. 집에 가서 마음을 고쳐먹고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애쓰라고 권면하는 것이 기독교가 아닙니다. 절대 그것이 아닙니다. '지금 있는 그대로 나오라! 돈 없이 값없이 나아오라.' 이것이 바로 기독교입니다.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그리스도께서 당신에게 가장 소중한 분이심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그래서 우리는 용서받고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함으로 우리 안에 평강이 임했습니다. 새로운 시각으로 삶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안에 새로운 삶이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이 알 수도 없는 기쁨을 알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난다 해도 빼앗길 수 없는 기쁨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로마서에 기록된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우리가 환난 주에도 즐거워하나니"
모든 것이 우리를 대적하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절망이 우리를 흔들어도,
하나의 문이 열려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분의 귀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실 것입니다.
영광스러운 광경이 장차 우리 앞에 펼쳐질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잇는 이 옛 세상은 심각한 문제 가운데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바울의 가르침에 의하면 이 세상의 문제는 점점 더 악화될 것입니다.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딤후3:13).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마24:6). 기독교는 이 세상을 완전한 세상으로, 전쟁이 없는 세상으로 만들어 줄 것이라고 약속하지 않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본주의 사상입니다. 기독교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거스르는 한 비극은 점점 증가하며 모든 일들은 고통으로 변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을 믿는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계획의 일부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언젠가 될지는 모르지만 미래의 정해진 시간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영광의 구주를 이 세상에 다시 보내실 것입니다. 그분은 거룩한 천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구름을 타고 오실 것입니다. '이기고 또 이기시려' 오실 것입니다. 세상에 오셔서 온 세상을 의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모든 죄와 악과 더러움은 불못에 던져질 것입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이 메시지를 거부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를 정결케 하시고, 의에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드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삶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영광이 임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생애 마지막 순간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1-3)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해도, 이 옛 세상이 무슨 짓을 저지른다 해도, 폭탄을 투하한다 해도, 난리가 난다 해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 어떤 것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못 박히심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결단하게된 이유 말입니다. 그는 이 복되신 분을 알았습니다. 그분의 은혜의 부요함을 받아 누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마련하신 것들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것으로 인해 즐거워하고 있었습니다. 그것만이 해결책입니다. 그것만이 능력입니다.
그는 바리새인이자 자기 의와 자기 만족에 빠져 있던 사람, 그리고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비참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는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영광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운명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영광의 주님이 다시 오셔서 모든 눈이 그분을 보고 그분을 믿는 자들이 그분과 같이 변화될 영광의 날을 바라보고 고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몸까지 변화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과 함께 살 것이며 그분과 함께 다스릴 것입니다. 영광스러운 세상에서 영원히 살 것입니다.
바울이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결단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만 전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것만이 그의 삶 속에서 역사했습니다. 그는 그것으로 인해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그는 영광스러운 미래를 확신하고 고대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한 변화가 바울에게만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도 동일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6장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고전6:9-11)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고린도 항구에서 허드렛일을하는 일꾼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위대한 철학이 설파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을 변화시키지 못했습니다. 술에 절어 있었고, 갖가지 죄들에 중독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잇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철학, 정치, 사회학, 교육, 그 어느 것 하나 그들을 도울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모습은 과거의 모습일 뿐입니다. 더 이상은 그렇지 않습니다.이미 깨끗하게 씻어졌기 때문입니다.
능력, 능력, 놀랍게 역사하는 능력
어린 양의 귀한 보혈 속에 그 능력이 있습니다.
성령과 능력의 증거 가운데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은 그들을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들을 새롭게 했으며, 하나님 교회를 구성하는 거룩한 백성으로 변화시켰습니다.
저는 다음 사실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복음은 바울에게만,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만 역사한 것이 아닙니다. 여기 이 곳 애버라본의 샌드필즈에 있는 이 교회에서도 역사했습니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저는 여러분에게 그 사람들의 이름을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들은 그들의이름을 들은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윌리엄 토마스(William Thomas), 혹은 시장 바닥의 빌리(Billy), 또는 빌리 스테포드샤이어(Billy Staffordshire)라는 사람의 이름을 들어보신 적이 잇는지요? 그는 77세까지 알코올 중독, 폭력, 방탕으로 얼룩진 소망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밤, 바로 이 건물에서 그는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깨끗함을 받았고 거룩해졌으며 의롭다 하심을 입었습니다. 거룩한 성도가 되었습니다. 리스씨(Mr. E.T.Rees)와 저는 이 자리에서 그가 천사와 같이 빛나는 얼굴로 이 세상에서 영원의 세계로 떠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가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품에 안긴 것입니다. 다른 어느 것도 그를 변화시키지 못했지만,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이 그를 변화시켰던 것입니다.
그는 단지 수많은 사람들 중 한 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그 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 몇 시간이라도 부족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 모두는 한결같이 소망이 없던 사람들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에 못박히심을 믿고 나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지금 영원한 영광 중에 있습니다. 지금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구름같이 허다한 증인들에 둘러싸여 있는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여러분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이 전부입니까? 이것은 각 개인들에게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분이 중심입니까? 다른 모든 것보다 그분이 먼저입니까? 그분이 전부입니까? 그분만을 믿습니까? 그분 외에 다른 것은 역사를 일으키지 못합니다. 그분만이 역사하십니다. 저는 그것을 증명할 수 있기에 지금 이 자리에서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보혈을 본 그 날 이후로
구속의 사랑이 내 노래의 제목이 되었습니다.
내 숨이 멈추는 그 순간까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6:14)
사랑하는 여러분, 삶의 한 가운데서 우리는 죽어 있습니다. 이것은 이론이 아닙니다. 이것은 개인적이고 실제적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살고 계십니까? 행복하십니까? 만족하십니까? 여러분은 미래를 어떻게 맞이하겠습니까? 두렵습니까? 무섭습니까? 여러분은어떻게 죽음을 맞이하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죽게 되어 있습니다. 50년 전에 이 곳에 살았던 사람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지금 이곳에 있지 않습니다. 대부분 이 세상을 떠났지요. 우리도 지금 옮겨지고 있는 중입니다. 우리에게는 영구한 도성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 여러분은 온전히 그분, 즉 예수 그리스도, 영광의 주, 하나님의 아들, 세상의 구주께 고정되어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에 모든 것이 고정되어 있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다른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못합니다. 모든 것은 허사로 돌아갈 것입니다. 이 지역은 제가 여기 처음 왔을 때보다 더 많이 변했습니다. 이곳에는 한 주에 몇 푼 안되는 돈을 벌던 분들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그들은 모두 영광 가운데 있습니다. 여러분은 많은 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때 이곳에 없던 많은 것들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에도 종말이 찾아옵니다. 여러분은 죽을 때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습니다.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고 돌아갈지라"(욥2:21)
최후를 맞이할 때에 무엇을 가지고 가시렵니까? 여러분은 그 어떤 것도 가져갈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 말고는 붙잡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면 여러분은 찰스 웨슬리(Charles Wesley)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그것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오, 그리스도여!
주님은 내가 원하는 모든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발견하는 것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주님과 함께할 때 찾을 수 있는 풍성한 은혜
그 은혜가 나의 모든 죄를 덮습니다.
치료의샘물이 넘쳐 흐르게 해주소서.
나를 정결하게 하시고 지켜주소서.
예수 그리스도와그분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 여러분은 그분을 아십니까? 그분을 믿으십니까? 삶과 죽음, 그리고 영원한 세상 속에서도 우리를 도우시는 분은바로 예수 그리스도뿐임을 알고 계십니까?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지금 이 시간에 분명히 깨달으십시오. 그분의 발 앞에 엎드리십시오.그분이 여러분을 영접하실 것입니다. 그분은 여러분을 새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새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을 깨끗하고 정결하게 하실 것이고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변화시켜 주실 것이고,여러분은 거룩한 성도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지금 영광 중에서 주님의 얼굴의 광채를 받고 있는 영광스러운 성도들의 무리를 뒤따르게 될 것입니다. 더 늦기 전에 복음의 진리를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1965년 4월 12일 영국의 장로교회 C.M. 힐튼 목사에게) 현재 행해져야 할 것에 대한 당신의 주된 느낌에 관하여, 저는 당신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 합니다. 그 문제를 올바로 생각함이 없이 그냥 사람들을 불러내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저는 내내 느껴왔습니다. 어떠한 경우에서는, 이러한 문제들은 결코 냉랭하게 다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거기에는 억압하는 느낌이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러한 극단적인 혼란가운데서 우리는 큰 인내를 발휘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인도함을 받을 것입니다.
(1967년 11월17일 침례교회연맹의 그래함해리슨 목사 Rev. Graham S. Harrison에게) 침례교 연맹과 관련된 당신의 위치에 관하여, 저는 당신이 말 한 것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혼자 행동하는 것보다 일단의 무리들이 함께 행동할 수 있을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좋다고 언제나 말해왔습니다. 우리는 지난해 동안에 그것으로 되돌아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문제에 있어서 개인적인 양심을 허용해야만 합니다.
[위의 발췌는 때때로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로이드 존스 박사가 1966년에 문제가 있는 교단으로부터 즉각적으로 탈퇴하여 새로운 교단을 형성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는 것이 잘못되었음을 보여줍니다.동시에 그가 믿었던 바는 교회와 국가의 최대의 관심사는 메시지가 다른 사람과 교회들을 함께 놓은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Q: 하나님의 율법의 위치는 무엇인가?
(로버트 박사에게 전달 된 1973년 11월 7일의 다음 편지는 어떠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어떤 질문에 대한 답이다. 하지만, 질문의 성격은 대체적으로 답에 의하여 이해될 수 있다.) 현재 당신이 직면하고 있는 이러한 중대한 문제들에 대하여 당신이 무엇을 느끼는지 나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러한 상황을 충분히 다루기에는 긴 편지가 필요합니다. 이상적인 방식은 질문과 답변입니다. 현재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이러한 전 문제들을 커버하는 원리들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1. 우리가 피해야만 하는 개념은 성경이 일종의 계산조견표(ready reckoner)라는 생각입니다.제가 아는 한, 이러한 문제들을 다루는 어떠한 유일한 구절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적인 교훈의 일반적인 기조를 취해야만 합니다.
2. 물론 성경은 특별히 이러한 문제들을 상상하도록 하는 경향은 없습니다.
3. 모세를 통하여 주어진 율법은 일반적으로 사람과 사람사이에서의 삶과 행동을 제어하도록 의도되어진 것이지, 신학적인 질문들에 대한 답을 주기 위함이 아닙니다.
4. 율법은 기계적이거나 또는 법률을 존중하는 태도록 해석되어져서는 안됩니다. 저는 이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이 "살인하지 말라"고 가르치기 때문에 당신이 직면해야만 하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어떠한 어려움도 없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그것이 그 문제를 해결한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지 않다고 논쟁합니다. 왜냐하면 그 진술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 대하여 싫어하는 두 사람사이의 관계를 언급한다는 사실때문입니다. 이것은 명백하게 두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그 질문을 커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죽이고 심지어 진멸하라고 명령하신 분은 다름아닌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5. 제가 언제나 느껴왔듯이, 로마 카톨릭은 성경의 교훈에 대한 그들의 특별한 철학적인 우리의 문제들에 크게 덧붙여왔습니다. 제가 느끼기에는 어떠한 성경적인 보증도 없는 자세한 진술들을 그들은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영혼의 인격이 언제 시작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6. 우리는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일반적인 교훈을 떠나 있습니다.
7. 우리는 언제나 이 세상에서의 삶을 영원의 빛 안에서 볼 수 있는 성경적인 관점을 가져야만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잘못되어가는 것은 그들이 이것을 유일한 삶과 세상으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8. 실제적인 삶이 아닌 영속적인 존재에는 어떠한 목적도 없습니다.
9. 그러므로 우리가 언제나 만족해야 할 것은 일조으이 기계적인 존재의 연속과 다른 것으로 간주되는 전체적인 삶의 전망입니다.
10. 만약 약간의 의심이나 주저함이 있다면 우리는 잘 견디어 내야만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은 궁극적으로 우리의 판단고 지혜의 문제가 됩니다. 이것이 정직하게 행해지는 한, 우리는 더이상 의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영혼의 영원한 운명이 우리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니며 우리가 결정하는 것에 의하여 영향 받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Q: 구약시대 기간동안 구원은 어떠하였습니까?
(1962년 3월 24일 R. C.셀러스씨에게) 당신의 질문과 관련되 답변은 이러합니다. 구약시대의 백성들의 죄를 하나님이 용서하시고 넘어가 주신 것은 우리 주님의 죽음의 빛 안에서 가능했다는 것을 로마서 3:25,26으로부터 알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9:5-15에도 이것과 병행구절이 있습니다. 특별히 15절이 그러합니다. 물론 히브리서 11:39,40도 같은 것입니다. 요한복음 8:56에 중요한 진술이 있습니다."너의 조상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당신이 이것을 로마서 4:17-24와 갈라디아서 3:6-29과 연관지으면, 오직 하나의 구원이 있음이 명백해 집니다. 그것은 언제나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을 통해서라는 사실입니다. 구약시대 아래서의 희생적 교훈을 받아들이고 복종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길을 받아들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러한 것들이 단지 오는 어떤 것의 예표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이 이해가 불완전 했다는 사실은 아무런 차이를 가져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오직 하나의 구원이 있음을 선언하셨습니다. 그것이 왜 구약 성경의 모든 것이 이것을 지적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당신에게 도움이 되기를 저는 바랍니다. 원하시면 언제든지 저에게 편지하세요. 어떤 점에 있어서 대화하여 도울 수 있다면 더 좋을 것입니다.
Q:중생이란 무엇인가?
(1973년 8월 22일 왈리 레이털씨에게) 당신의 질문에 대한 답은 이것입니다. 요한복음 3:1-8에서 가르치는 것처럼, 중생은 우리 안에 감추어진 과정입니다. 중생이 일어나는 정확한 시간은 알 수도 없고 또한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일어났다는 첫 번째 표징은 영적인 일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이며(고전2:14의 반대), 죄를 자각하고 주 예수그리스도를 유일한 구세주로 믿는 것입니다. 당신에게는 이것이 1966년에 일어났던 것이 분명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일은 그것이 언제 일어났느냐가 아니고 그것이 정말 일어났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더욱 더 축복하시기를 빕니다.
Q: 독서에 대한 충고
(1973년 6월 21일 왈리 레이털씨에게) 스펄전에 관한 모든 것은 당신이 얻을 수 있는 대로 다 읽으십시오. The Banner of Truth Trust와 당신의 나라에 있는 The Sovereign Grace에서 출판된 모든 것들을 당신을 읽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당신은 또한 칼빈의 기독교강요와 주석들을 크게 즐길 수 있을 것입니다. 마틴 루터는 다소 말이 많으며 논쟁적입니다. 그러므로 아주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창세기 주석과 관련하여 저는 레우폴드(Leupold)의 것을 강력하게 추천합니다. 요한복음과 관련해서는 핸드릭슨의 것을 추천합니다. 모두가 베이커 북 하우스 (The Baker Book House)에서 출판되었습니다. 당신은 레우폴드의 창세기를 크게 즐길 것입니다. 핸드릭슨은 신약의 여러 책들에 대한 주석들을 썼으며, 그들 모두는 최상이며 아주 유익합니다. 신약성경 전체를 주석하는 것이 그의 의향입니다.
P.S. 투르니어(Tournier)나 유사한 저자들에 의한 책들은 읽기를 권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진정한 성경적 가르침이라기 보다는 심리적인 것입니다.
Q: 성취되지 않은 예언에 관한 책들
(1974년 11월 30일 왈리 레이컬씨에게) 당신의 진보에 대하여 들으니 대단히 기쁩니다. 당신의 두가지 질문에 대하여:
1. 예언에 관하여 당신에게 권하고 싶은 두가지 책은 핸드릭슨에 의한 More Than Conquerors입니다. 당신은 이미 이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W.J. 그리어 (Grier)에 의한 중요한 사건(The Momentous Event)입니다. 당신의 나라에서 이것을 누가 출판하였는지 나는 알 수 없습니다. 아마 에드만(Erdmans) 출판사일 수 있습니다. 다른 좋은 책은 오스왈드 알리스(Oswald T. Allis)에 의한 예언과 교회(Prophecy and the Church)입니다. 이것이 필라델피아의 장로교 개혁주의 출판사 (the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mpany) 에 의해서 출판된 것을 믿습니다.
2. 저는 여전히 흠정역(the King James Version)을 최고의 번역으로 간주합니다. 뉴 버클리(The New Berkeley) 는 아자 좋습니다. 현대 최고의 번역가운데 하나입니다.
[로이드 존스 박사의 편지들의 가치에 대한 더 충분한 증거들을 위하여 로이드 존스박사:편지들, 1919-81,이안머레이에 의하여 간주 달려서 선택된(Edinburgh: Banner of Truth,1984). 이책은 여전히 살 수 있습니다.
질문 : 박사님은 젊은 시절 , 장래가 매우 촉망되는 의사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설교자로 나서게 되셨나요? 그 과정에서 어떤 내면적인 깊은 갈등은 없었습니까?
대답 : 예, 매우 큰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 갈등은 의사로서의 길을 정리하기까지 열여덟 달 동
안 계속되었습니다. 그 당시 제 몸무게가 실제로 20 파운드 이상 줄었습니다. 친구들은 의사 일을 계속하면서 때때로 설교를 하면 어떻겠느냐고 말했습니다.
저도 그렇게 해보았지만 만족이 없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사람들의 육체적 질병보다 사람들 그 자체에 더 관심이 많았던 거죠. 제가 상대 하는 환자들 대부분이 장기 (organic) 질환이 아닌 기능 (functional) 장애를 입고 있다는 사실에 점차 마음이 이끌렸습니다.
질문 : 목사님의 그러한 결정에는 어떤 분들이 영향을 주었습니까?
대답 : 제가 소속한 교회는 런던의 한 웨일즈 장로교회였으나 제가 개인적으로 큰 매력을 느끼던 분은 존 허튼 (John A. Hutton) 박사였습니다. 이 분은 후에 「브리티쉬 위클리」(The British Weekly)지의 편집자가 되었습니다만 당시는 제가 가끔 출석하던 웨스트민스터 채플의 목사였습니다. 그분은 강해설교자가 아니었지만 설교를 매우극적으로 했으며, 저에게는 인간의 삶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권능을 느끼게 할 정도로 깊은 감동을 주는 설교였습니다. 마침내 저는 의사로 살면서 가끔씩 설교자 노릇하는 생활을 중단 하고 , 반대로 의사 노릇은 가끔씩 하고 설교를 주로 히는 설교자로 살기로 결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제가 왕실주치의인 호더(Horder)경과 함께 왕실에 소속된 의사였기 때문에 저의 결정은 언론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저도 놀랐지요.
질문 : 제가 듣기로는 1930년대 초에 이미 박사님께 영적 질병을 진단해내는 지혜의 은사가 있었고 박사님께서 과학적인 성경강해를 하신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 있었다고 하던데요.
대답 : 저는 의도적으로 남부 웨일즈의 한 작은 선교센터로 가서 개척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교인이 93명이었던 이 교회는 웨일즈 장로교 소속이었는데 , 광산지역과 철강산업의 중심지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교인들 가운데 다수는 부두노동자였습니다 . 교회는 제가 부임하지 마자 처음부터 사람들로 가득 찼습니다 . 언론의 광범위한 보도도 그 국부적인 이유였습니다. 일부 언론은 저를 크게 괴롭히기도 했지만요. 어쨌든 그 곳에서 놀랄만한 회심이 일어났습니다. 11년 6개월의 목회 기간에 교인 수는 530 명으로 늘어나고 출석수는 약 850 명에 달하게 되었습니다.
질문 : 목사님은 캠벨 몰간(G . Campbell Morgan)의 후임으로 웨스트민스터 채플을 맡게 되셨는데요, 이 분을 처음 만난 때는 언제 입니까?
대답 : 그 분이 스완시(Swansea)에서 집회를 하고 계실 때 제가 그 분의 설교를 들으려고 갔었는데, 그때 집회에 참석한 그의 친구 한 분이 저를 그 분에게 소개해주었습니다 . 그 뒤 1935 년 12월 초에 다시 몰간 목사님을 만나게 되었는데요, 안개가 지독히도 자욱이 꼈던 어느 날 밤 런던에서 가장 큰 강당이었던 앨버트 홀 (Albert Halll) 의 바이블 위트니스 (Bible Witness) 집회에서 제가 설교를 하던 때였습니다. 캠벨 몰간 박사도 이 집회에 참석했던 거죠. 그리고 거의 그다음 날 저는 그분에게서, 1935년도의 마지막 주일에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 설교를 해달라는 내용의 초청 편지를 한통 받았습니다.
그 후에 또 1937년 당시 미국연합장로교 (북장로교) 총회 전 (前) 전도 집회에서 설교를 하기 위해 제가 미국에 가있을 때, 순회여정으로 필라델피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거기에서 사회를 보시는 목사님으로부터. 전날 밤 영국에서 캠벨 몰간 박사가 이 곳에 도착해 집회에 참석하실 것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그분이 앞쪽에 앉아 있는 것이 강단에서 보였습니다. 제가 설교를 시작하자 그는 손목에서 시계를 풀었습니다. 설교시간을 재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모종의 이유로 인해 이것이 저에게 자극을 주었습니다. 집회는 은혜롭게 끝났습니다.
집회 후 구내에서 저에게 처음으로 인사 한 사람이 캠벨 몰간이었습니다. 이어서 사람들이 제게 몰려들자 그는 슬그머니 자리를 빠져 나갔습니다. 직감적으로 저는 그가 저를 지신의 동역자로 초빙하는 문제에 대해 심사숙고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습니다.1937년 6월의 그 밤에 몰간박사는 저를 웨스트민스터 채플에 초빙하기로 결정했던 것입니다.
그 후 몰간 박사는 , 제가 이듬해에 웨일즈의 한 신학대학에서 교수직을 가질 예정으로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 당분간 (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 자신과 설교사역을 교대로 행하자고 요청했습니다. 그의 요청을 받고 제가 간 떼가 1938년 9월입니다 .그로부터 6주 뒤 저는 동역목사로 시무해달라는 만장일치의 청빙을 수락했습니다.
질문 : 그런 거장의 그늘 아래 일 해보셨는데, 어떠했습니까?
대답 : 그는 위대한 강단의 거장이었습니다. 많은 면에서 제가지금까지 본 설교자들 중에 가장 위대한 설교자였습니다. 그는 또한 매우 친절하고 관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언제나 제 나름대로의 독특성을 살리고 싶었습니다. 결코 그 분 이나 다른 어떤 설교자를 모방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저의 주된 관심사는 저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해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우선은 메시지를 믿었고, 또 하나님께서 저의 노력에 응답하시리라 믿었습니다. 우리 두 사람은 매월 낮예배와 저녁예배를 번갈아 인도했습니다. 회중의 수는 전쟁(제2차 세계대전) 이전 우리가 함께 사역하던 한 해 내내 거의 동일했습니다.
질문 : 제2차 세계대전이 어떤 영향을 끼쳤습니까?
대답 : 전쟁은 대단히 파괴적이었습니다. 지금도 1939년 9월 3일 주일 오전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오전 11시에 라디오 뉴스 속보가 있을 예정이었으므로 우리는 그 불안한 발표가 있기까지 예배를 미루었습니다. 소식의 내용은 ‘전쟁 발발’ 이었습니다! 즉시로 모든 사람은 런던에 공습이 있을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우리의 예배당에는 인명대피 시설이 없었으므로 우리는 회중을 해산해야 했습니다. 사실 바로 그날에 공습경보가 울렸습니다만 이는 잘못된 경보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런던을 빠져나갔습니다. 우리의 회중 수는 점차 감소해 약 300명으로 내려갔습니다. 우리는 교회 유리창을 등화관제하고 저녁예배를 오후 중반으로 옮겼습니다. 1944년 6월에는 비행기 폭격으로 길 바로 건너편에 폭탄이 투하되어 웨스터민스터 예배당의 지붕을 반이나 날려버렸습니다. 그래서 l4주간 동안 약 150 명의 교인과 함께 홀을 빌려 예배를 드렸습니다. 캠벨 몰간의 거대 한회중이 고작 일 이백 명밖에 남지 않은 것 입니다. 캠벨 몰간 박사님은 1943 년에 사임 하고 1945 년 소천 하셨습니다.
질문· : 박사님도 설교 사역을 보류하고 싶을 정도로 낙심한 적이 있습니까?
대답 : 아뇨.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전쟁 중 일 때도 저는 최소한 일주일에 이틀씩 영국 곳곳으로 여행하며 연합 집회나 특별예배에서 설교를 했습니다. 1947년에 많은 사람들은 저에게 웨일즈 장로교 전진운동 (Forward Movement) 의 회장 직을 맡아달라고 강권하였으나 저는 전쟁으로 할퀸 런던에 머물렀습니다. 회중은 다시 서서히 늘어나기 시작해 전쟁이 끝날 즈음에는 대충 500명 정도의 사람이 꽤 정규적으로 참석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질문 : 독일 나찌당이 격퇴당한 뒤에는 어떠했습니까?
대답 : 사람들이 다시 런던으로 돌아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교인들 중 대다수를 잃은 상태였습니다. 아직 남아 있던 전쟁 전의 교인들은 주로 중년과 노년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전후 (戰後) 에 사실상 새로운 회중 층이 형성되고 있었습니다. 1948년 출석수가 1,300내지 1.400명에 도달하자 교회의 회랑을 개방했습니다. 951년 전국 100주년 박람회의 물결을 타고 수많은 사람들이 런던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캠벨 몰간 시절 이후처음으로 예배당은 다시 가득 메워졌습니다. 때로는 2500명 정도의 사람들이 청중석과 회랑, 발코니까지 가득 들어갔습니다.
질문 : 회중의 수 이외에 다른 어떤 면에서 그러한 거대한 강단사역의 효과가 측정될 수 있을까요?
대답 : 한 가지 예로 , 예배시의 고양된 영적 분위기를 들 수 있습니다. 우리는 회중들이 앉은자리에 예배 후 언제나 목사와 개인면담을 할 수 있다는 알림의 글을 놓아두었습니다. 저는 예배가 끝나고 나면 그때마다 회심이나 상담을 원하는 사람들과 면담하느라 족히 1시간 이상을 보내곤 했습니다.
질문 : 목사님께서 성경에 정통할 뿐만 아니라 의학과 과학, 역사에도 일가견이 있으시기 때문에 복음주의 밖의 지성인들이 목사님 의 설교에 매력을 느낀다는 그런 소문이 미국에까지 퍼졌지요.
대답 : 1936년에 저는 미국 IVF (Inter-Varsity Fellowship) 대회에 연사로 초청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전쟁 중에는 제가 이 모임의 회장 일을 보았습니다. 학생들이, 특히 전후 (戰後) 에 우리 교회로 대거 몰려왔습니다. 신약신학자 타스커 (R. V. G. Tasker) 교수는 주일 저녁마다 우리 교회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그리고 자유주의를 버렸습니다. 그분이 제게 들려준 말로는, 저의 설교를 들으면서 원죄와 하나님의 진노를 확신하게 되고 이로 인해 자신이 완전히 변화되었다고 합니다. 그것 말고도 저의 설교를 듣고 복음주의 신앙을 다시 회복한 사람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질문 : 제가 기억하기로 , 박사님과 저는 1966년 장차 있을 (빌리 그레이엄) 베를린 세계 복음전도대회에 관해 의논하기 위해 만났습니다만, 당시 박사님은 이 대회의 참가자나 업저버가 되기를 사양하셨지요. 또한 박사님은 런던의 큰 교회 목회자들 가운데 아마도 빌리 그레이엄 전도대회에 협력하지 않은 유일한 목사였지요? 그러한 방관자적 입장을 취한 이유가 어디에 있었습니까?
대답 : 사실 그것은 저에게 매우 중차대하고도 어려운 문제입니다. 저는 평소 부흥 외에 어떤 것도 교회와 세계의 상황을 해결할 수 없다고 믿어왔습니다. 부흥이란 성령이 찾아오시는 사건으로서 복음전도캠페인과는 다른 것이죠. 웨일즈 장로교회는 18세기의 복음주의 대 부흥에 뿌리를 두고 있었습니다.
대 부흥 당시 하나님의 권능이 설교자들과 교회들에 강하게 임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회심 하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저는 조직화된 전도운동에 대해 탐탁하게 여긴 적이 없습니다. 1820년대에, 특별히 미국에서 에이저헬네틀튼 (Azahel Nettleton) 의 부흥운동으로부터 찰스 피니 (Charles G. Finney) 의 전도운동에 이르기까지 매우 미묘하고 불행한 변화가 발생 했습니다.부흥에 관해서는 두 가지 입장이 있습니다. (교회와 사회의) 상황이 좋지 않게 진행 되고 있을 때, 옛날의 접근법은 목회자들과 집사들이 금식과 기도의 날을 선포하고 하나님께서 권능으로 임해 달라고 간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의 대안은 복음전도 캠페인입니다. 목사들은 “우리가 누구를 전도자로 세울 수 있을까? 라고 묻습니다. 그 다음에는 조직을 만들고 여기에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저는 이둘 옛 학파에 속 해있습니다.
질문 : 목사님은 현대의 복음전도운동 그 자체에 대해 특별히 어떤 점들을 염려하고 계시는가요?
대답 : 한마디로 말하자면 조직화된 캠페인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결신하고 싶은 사람들을 앞으로 나오게 하는 초청제도는 더욱 그렇습니다. 제 이야기를 잘 들어 보십시오. 저는 빌리 그레이엄이 지극히 정직하고 신실하며 순전한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그는 1963년에 저에게 제1 차 (빌리 그레이엄) 전도대회의 회장을 맡아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습니다. 그 대회는 베를린이 아닌 로마에서 열리기로 예정되어 있었던 집회였습니다. 저는 그와 협상을 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만일 그가 전도대회를 위해 여러 부류의 사람들로부터 후원받는 것을 중단하고, 결신자들을 앞으로 나오게 하는 초청제도를 없앤다면, 저도 마음을 다해 그를 후원하고 집회의 회장직을 맡겠노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약 세 시간동안이나 이야기를 나누였습니다만 결국 그는 이 조건들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대회나 캠페인이 실제로 상황을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에 저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현실이 저의 견해를 실증해주고 있다고 생각되는군요. 지난 20년 내지 25년 동안 해온 이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영적 상황이 호전되기보다는 악화되지 않았습니까? 교회와 목회자들이 무릎을 꿇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간구하는 길 외에 아무것도 소용이 없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우리가 계속하여 조직하는 일에 매달리는 한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자신들에게 임하여 자신들을 치유해달라고 간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캠페인식 접근법은 궁극적으로 성령의 권능보다 기교를 신뢰하는 것 같습니다. 그레이엄은 확실히 복음을 설교합니다. 그 점에 관해서는 결코 그를 비평하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비평했던 점은, 일례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글래스고우 전도대회 때에 그레이엄은 존 서덜랜드 보넬 (John Suther-landBonnell) 로 하여금 목회자들의 모임에서 설교를 하게 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거기에 이의를 제기했죠. 그레이엄은 대답했습니다. “저는, 많은 복음주의 목사님들 보다 존 서덜랜드 보넬과 오히려 더 많은 교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이렇게 답했습니다. “아마도 보넬이 로이드 존스보다는 더 훌륭한 사람이겠죠. 이 점을 논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인 교제는 다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자신은 나와 동일한 기본 진리를 소유하지 않은 사람과 진정한 교제를 나눌 수 없을 것 같군요.”
질문 : 박사님은 케직 사경회의 팬도 아니시죠?
대답 : 거기에서 설교하는 것을 거절했습니다. 이른 바, 성화(聖化)에 관한 케직 메시지라는 것에 대해 저는 탐탁치 않게 여겼습니다. 그 메시지가 비성경적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리고 로마서 16장과 8장을 강해한 저의 책에서 나름대로 그 이유를 설명해 보았습니다. 저는 성화가 하나의 과정이라고 봅니다. 케직의 공식 문구인 “하나님을 놓아드려 하나님이 하시도록 하라” (Let go and let God) 는 비성경적입니다. 오늘날 케직은 더 이상 설교자들에게 수정된 완전주의 교리를 고수하도록 요구하지 않습니다.
질문 : 복음주의자들이 지나치게 소홀히 하는 것으로는 어떤 중요한 요소들이 있을까요?
대답 : 제가 보기에, 현대 복음주의의 낙장(落張)은경건의 문제, 곧 한때는 영성이라고 하던 것에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복음주의자들은 너무 잘난체하고 자기만족이 너무 강하며 힘이 너무 강해졌습니다.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서 겸손해야 한다는 관념은 사라졌습니다. 우리는 가짜 지성주의의 영역 속에 지나치게 들어가서, 그리고 의지를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가슴(heart)은 무시되고 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역설했던 이 위대한 요소로 돌아가기 전에는 소망이 없다고 봅니다. 에드워즈는 명석한 지성인이자 걸출한 철학가였지만 가슴(heart)에 궁극적인 강조점을 두었습니다.
제가 말하는 가슴이란, 감정적인 요소가 특별히 강조되는 전인 (全A) 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모호한 감상주의가 깊은 감정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겸손을 잃어버렸습니다. 주님에 대한 경외심이 거의 없습니다. 현대의 복음주의는 18세기의 복음주의나 청교도들의 복음주의와 매우 다릅니다. 저는 이점을 불행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복음주의는 예전의 그 복음주의입니다.
질문 : 예전의 그 복음주의는 지성적으로도 신학적으로도 강력하지 않았습니까?
대답 : 예. 엄청나게 강력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신학적으로 천박한의사(疑似) 지성주의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명석한 신학적 이해와 뜨거운 가슴, 이 양자가 다 필요합니다. 제가 처음 잉글랜드에 와서 보니, 복음주의는 비신학적이었으며 경건 주의적이고 감상주의적이었습니다. 저는 지성을 최대한 발휘할 것을 역설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많은 복음주의자들은 자기 지성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기독교의 예술관, 드라마관, 정치관같은 이차적인 것들에만 사로잡혀 있습니다.
질문 : 박사님은 기독교의 지성적 차원이 보다 강력해져서, 위대한 계시 진리에 대한 온갖 사변 적 대안들의 천박성이 백일하에 폭로되기를 분명히 바라고 계시죠?
대답 : 물론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현대의 설교와 관련하여 생각해 볼 때 성경의 가장 중요한 장은 고린도전서 2장입니다. 성령의 권능의 현현이 없으면 모든 신학은 무위로 돌아가고 맙니다. 어떤 의미에서 저의 핵심 구절은 로마서 6장 17절입니다.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 (heart)으로 순종하여 진리는 일차적으로 지성을 향해 다가오지만 그 진리는 동시에 가슴 (heart) 을 움직여야 합니다. 그러면 다음으로 진리가 의지를 움직이게 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훈의 본’ (교리)을 가지는 선에서 더 이상나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반면 어떤 사람들은 결단 (의지) 에 강조점을 두고 있습니다. 이 접근법들이 둘 다 가슴(감정)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질문 : 영국 국교회와 비국교회 안에서 복음주의가 얻은 이득이나 입은 손실이 있다면 어떤 것
들을 주목할 수 있을까요?
대답 : 현재의 주된 문제는 대 혼돈입니다.
질문 : 국교회는 물론 비국교회들에서도 그렇습니까?
대답 : 예. 특히 국교회 안에서 그렇지만 비국교회도마찬가지입니다.
질문 : 왜 그럴까요?
대답 : 언어학과 교회론의 ‘전문가’들이 신학자들에게서 통제권을 빼앗아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학문이라는 것에 통제권이 양도되었습니다. 성경과 특정 교리들에 대해 자유주의적 견해로 기울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제임스 바 (James Barr) 가 그의 저서「근본주의」(Fundame -ntalism) 에서 이 나라 (영국)의 일부저명한복음주의자들이 고등비평에 입지를 양보함으로써 포착하기 어렵게 조용히 선을 넘어가고 말았다고 묘사하고 있는데, 이것이 옳습니다. 문제는 성경의 완전영감과 완전무오성 교리를 상실했다는 점입니다.
질문 : 복음주의의 출애굽, 곧 제임스 패커 (James Packer) 가 캐나다로, 콜린 브라운 (Colin Brown) 이 미국으로 이주하고 존 스토트(John Stott) 가 힘겨운 해외 사역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영국이 입은 손실과 관련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대답 : 저는 이 사람들을 대단히 존경하고 있습니다. 한 국가가 복음주의 학자들과 지도자들을 잃는다는 것은 대단히 슬픈 일입니다. 그분들은 여기 영국에 머물며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교파적 상황이 매우 복잡하기 때문에 문제를 싸움으로 해결하기는 어렵습니다. 영국 국교회의 복음주의는 오늘날 주체성 (identity)의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교단 내 다수지도자들과 교수들이 기독교의 기본 교리들을 버리는 그러한 상황이며, 기타 타협적인 교단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헌신적인 복음주의자들이 그러한 교단 내에서 일한다는 것은 결국, 이런 진리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오늘날 교회론을 새로이 부각시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제도적인 조직체를 교회로 간주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저는 ‘복음주의의 연합’ 이 옳은 일이라고 믿습니다. 복음주의자들이 세력을 규합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새로운 교단을 만들기 위해서가아니라 연대와 협력을 위해서 말이에요. 그렇게 상호간에 힘을 실어주는 것은 미래로 나아 갈 수 있는 희망찬 길입니다.
질문 : 친구분들의 말을 들어보면 목사님은 유머감각이 대단하시다고 하던데요, 강단에서는 좀처럼 유머를 사용하시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대답 : 제 경우에는 강단에서 유머스럽게 말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것 같습니다. 강단에서면 언제나나 자신이, 지옥에 갈지도 모를 영혼들과 하나님, 이 양자의 중간이라는 무시무시한 입장에 서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이런 입장이 저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므로 감히 유머를 사용하지 못합니다.
질문 : 작년에 있었던 입원 가료와 건강 회복 때문에 현재 4개월간의 설교 약속을 취소하신 것 으로 들었습니다. 목사님의 건강에 대해 저의 친구들이 몇 마디 말씀을 듣고 싶어 합니다.
대답 : 저는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늘 강제로 일을 시키시지 않으면 안 되었던, 그런 죄인입니다. 목회를 처음 시작하기 전에도 1년 반이나 깊은 갈등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1968년도에는 당연히 은퇴를 생각했었습니다. 그때 제 나이 68살이었으니까요. 그 해에도 목회를 계속하다가 3월에 이르러 큰 수술을 받게 되었는데요. 이때 하나님은 제게 웨스트민스터채플을 떠나 설교를 출판하고 영적회고록을 준비하도록 분명한 신호를 보내셨습니다. 그런 신호는, 이 수술이 심각하고 위중하지만 그럼에도 분명 성공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보장이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순회 설교를 줄이고 저술에 집중할 생각입니다.「로마서 강해」 12권 가운데 나머지 6권과「에베소서 쐐」 8권 가운데 마지막 두 권이 곧 출판될 예정입니다. 그리고 영적 자서전집필을 시작할 준비도 되어 있습니다.
질문 : 오늘의 경제상황에 대해 기독교가 무슨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대답 : 우리가 전해야 할 위대한 메시지는 인간과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죄인이기 때문에 인간적인 모든 대책은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유일한 희망은 그리스도의 재림입니다. 그 외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복음주의자들이 갑자기 정치에 이토록 관심을 기울인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50년 전이나 100년 전에는 그런 관심이 의미가 있었겠지만 지금은 그러한 노력이 제가보기에 어리석은 짓 일뿐 입니다. 지금의 세계는 해체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평생 (재림에 관한) ‘때와 기한’ 의 설정에 반대해 왔으나 지금이 마지막 때 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점차 드는군요.
질문 : 그러한 신념을 뒷받침해준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대답 :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전 지역을 모두입니다. 목회를 처음 시작하기 전에도 1년 반 점령한 1967년을 저는 매우 중대한 시점으로 보았습니다. 누가복음21장24절은 지극히 의미심장한 구절입니다. 거기에 보면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 방언들에게 밟히리라” 고 씌어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 일이 1967년도에 발생한 것 같습니다. 이는 2천년 동안 일어나지 않았던 극히 중차대한 사건입니다. 누가복음 21장24절은 하나의 고정된 사실입니다. 그러나 종말이 이르기 전 유대인들 가운데서 커다란 영적 회심이 있을 것에 대해 말하는 로마서 11장도, 마찬가지로 저에게 깊은 감동을 주는 대목입니다. 로마서 11장의 이 언급은 점진적 발전을 의미한다고 생각되지만 가일층 굉장한 어떤 사건을 가리키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때로 원근법이 들어간 그럼처럼 사건들의 간격을 축소시키는 경향이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종말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느낌은 지울 수가 없습니다.
질문 : 우리에게 설령 24시간이나 48시간 밖에 안아있지 않다 하더라도 정치 분야 혹은 기타 어떤 분야에서든 기독교적 증언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을 회피하는 짓이며 하나님의 섭리를 불신하는 것이라는 그런 견해에 목사님은 동의하십니까? 하나님은 최후의 몇 시간 안에도 일찌기 하시지 않았던 어떤 일을 이루실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가 종말에 가까이 다다를수록 공공양섬에 호소하는 일이 더욱더 중요해지지 않을까요? 또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그리스도가 요구하는 바를 역설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지 간에 재림하실 왕께서 인간과 열방을 심판하실 때 사용하실 기준에 대해 우리가 그들에게 상기 시켜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대답 : 아니오. 동의하기 어려울 것 같군요. 제가 생각하기에, 주님 자신이 역설하신 바는 이와 전혀 다르고 오히려 상반되기까지 히는 것 같습니다. 누가복음 17장을 보세요. 거기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째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나서…” 우리가 세상을 개혁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창세기 1장 28절에 근거한, ‘사회 명령과 문화명령’ 에 관한 가르침에 전혀 동의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창세기 3장에 기록된 인간의 타락을 완전히 망각한 것이라고 봅니다. 우리가 세상을 기독교화 할 수는 없습니다. 종말의 때는 노아홍수의 때와 같을 것입니다. “장차올 진노에서 피하라!” 이것이 우리가 전보다 더욱 열심히 전해야 할 메시지입니다. 현대 세계의 상황이 우리가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지금은 중요한 시국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마땅히 정치에 관여하고 사회적인 일에 개입해야한다고 믿습니다만, 그러나 교회는 아닙니다. 교회가 수행해야 할 하나님 나라의 임무는 인간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해 장차올 진노에서 구원받게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제가 믿는 바이며 또 강조하는 것입니다. 정치와 문화 및 이와 유사한 모든 것들의 주요 기능은 악을 억제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어떤 궁극적인 긍정적 사역을 결코 이룩할 수 없습니다. 확실히 세계의 역사가 이를 실례로 보여줍니다. 세상을 결코 기독교화 할 수는 없습니다.
질문 : 중생한 교회가 새로운 사회이며 영원히 지속할 유일한 사회라는 사실, 또 세상 그 자체는 결코 기독교화 될 수 없고 새로운 사회로 바뀔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중생을 떠나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길이 없다는 사실 등은 우리가 그대로 인정합니다. 그렇다 치더라도, 교회는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해야 하지 않을까요? 제도적인 교회가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 할지라도 그리스도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을 사회 제도 속에 침투시켜 경건과 정의를 보여주도록 함으로써, 악과 죄 및 지신의 대의를 파괴시킬 온갖 세력을 향해 승리의 영역을 확장시키시고 싶지 않을까요? 그리스도인들이 사회를 기독교 화하는 것은 바랄 수 없다 하더라도 선한법과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일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대답 : 물론입니다. 그러한 노력이 세상의 부패를 막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전적으로 소 극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를 적극적인 사역으로 간주하고 싶지 않습니다.
질문 : 어느 곳에서 어느 시점에, 그리스도인의 노력을 통해 ‘기독교문화’ 라 할 수 있는 것이 나 타나는 것은 불가능할까요?
대답 : 예, 결코 그러한 것은 오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성경이 그와 상반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불가능 합니다. 세계의 현재 상황을 보면 모든 문명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도덕적인 면, 정치적인 면, 그리고 기타 모든 면이 붕괴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확실히 이보다 더 위험한 고비는 일찌기 없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가 전해야할 가장 긴급한 메시지는 ‘장차 올 진노에서 피하라!”는 것이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질문: 그렇다면 젊은이들에게 다른 어떤 직업에 대한 소명보다도 목회사역이나 선교사로서의 소명을 먼저 고려해 보라고 권하시겠습니까?
대답 : 아니오. 지금까지 결코 그런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문제에 관한 결정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개인적 소명에 따라야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중대한 위험을 목도하고 있는 우리로서는 확실히 사람들에게 진노를 피하라고 강권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이든 현 시대에 그 밖의 다른 문제에 더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놀랄 일입니다.
질문 : 목사님의 사위 프레드 캐더우드(Sir Fred Catherwood)가 현재 유럽 의회에서 정치적인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만, 그가 그일 말고 영적인 사역에 종사하고 있다면 목사님은 더 좋으시겠습니까?
대답 : 아뇨. 그렇지 않을 겁니다. 사실 목회를 하라는 압력이 그에게 들어왔을 때 그가 이를 거부한데 대해 저는 기쁘게 생각했습니다. 저는 언제나 사람들에게 목회를 하지 말라고 말려온 입장입니다. 제 개인적인 견해로는, 사람이 목회의 길을 피할 수 없는 경우에만 목회에 들어서야 한다고 봅니다.
질문 : 사위에게 정치 분야에서 이룩할 수 있는 괄목할만한 공헌에 대해 직접 조언을 해주셨나요?
대답 : 예.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입장에 서서 ‘이것이 기독교적인 정치관’ 이라는 따위의 주장을 해서는 결코 안 된다는 이야기도 아울러 해주었습니다. 그러한 접근법이 아브라함 카어퍼의 실수였습니다. 키어퍼는 타협적인 입장에 섰습니다. 기독교 성직자로서 수상이 된 다음에는 로마가톨릭 교도들과 유대관계를 형성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찬성하는 특정의 정치적 입장을 주장하였던 겁니다.
질문 : 목사님의 초창기 설교에서 복음주의 교리에 관해 어떤 모호한 점은 없었습니까?
대답 : 사역 초기에 저는 중생을 주된 메시지로 삼고 이에 관해 설교했습니다. 그러나 칭의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지 못했지요. 아시다시피 조지 횟필드도 저와 같이 한동안 그러했습니다. 저는 제가 확신하는 것을 설교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속죄에 관해서는 소홀히 다루었으나 대략 2년 내에 저는 이런 식의 설교가 불완전한 메시지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질문 : 박사님은. 오늘날의 복음주의 설교가 속죄와 칭의 교리를 지나치게 소홀히 다루는 반면에 중생의 필요성을 강조함으로써 부지불식간에 하나님이 죄를 묵인하신다는 인상을 심어주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대답 : 예, 맞습니다.
질문 : 잉글랜드에서 복음주의가 부흥할 가망이 있다고 보시나요?
대답 :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이 크게 쏟아 부어지는 것 - 제가 말하는 부흥이 바로 이것입니다 - 외에 어떤 것도 지금의 상황을 만회 할 수 없습니다.
질문 : 목사님은 향후 20년간의 세계 역사가, 그 안에 종말이 오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려 질 것이라고 보십니까? 어떤 것이 사라지고 어떤 것이 남아있을까요 ?
대답 : 붕괴 외에는 아무것도 목도하지 못할까 걱정됩니다. 민주주의는 정치적으로 마지막 대안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인류는 기타 갖가지 정치 형태를 겪어 보았습니다. 그러나 민주주의 밖에서는 현재 독재정치 혹은 완전한 혼돈이 희미하게 등장하고 있습니다.
종말이 더욱 가까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666은인간의 수입니다. 민주주의가 바로 이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을, 그리고 자신의 형상을 예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향후 20년이 보장 되리라는 확신이 전혀 없군요. 전에는 없었던 여러 요인들이 오늘날 출현 하였습니다. 과거에는 세계 여러 지역의 찬란한 문명들이 때에 따라 붕괴되곤 하였지만 그러한 때에도 세계의 나머지 다른 지역은 황폐화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세계가 거대한 하나의 집단이 되었습니다. 한 지역에서 일어나는 일이 모든 곳에서 발생합니다. 현재, 정치가 몰락해가고 있다고 생각 됩니다 . 전 세계가 그런 것 같아요. 문명이 붕괴하고 있는 거죠.
질문 : 끝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세속적인 사람들을 위해 한 말씀해주시겠습니까 ?
대답 : 제가 할말은 이것뿐입니다. “장차올 진노에서 피하라.”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1959년 7월 마틴 로이드존스와 그의 아내는 웨일즈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일 오전 기도모임이 있는 어느 작은 교회에 참석했는데, 그 때 로이드존스는 그들에게 "저에게 오늘 오전에 말씀을 전하도록 해주시겠습니까?"라고 요청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휴가 중이었고, 허락한다면 그의 에너지를 소진시킬 것 같아 주저했습니다. 그러자 그의 아내가 말했습니다. "허락하세요. 설교는 그의 삶이니까요." 이것은 참된 진술이었습니다. 설교와 설교자라는 그의 책 서문에서, "설교는 나의 삶입니다. 설교하는 일은 제게 있어서 가장 높고 가장 위대하며, 과거 어떤 사람이 받을 수 있었던 소명 중에서도 가장 영광스러운 소명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그를 마지막 칼빈주의 메소디스트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그가 진리를 사랑하는 칼빈과 18세기 메소디스트 부흥의 불과 열정으로 개혁주의 교리를 전하는 것을 결합시켰기 때문입니다. 30년동안 그는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채플의 강단에서 설교해왔었습니다. 대개 매주 금요일 저녁, 주일 오전과 오후마다 세가지 다른 설교가 진행되었습니다. 말년에 그는 "나라면 나의 설교를 듣고자 길을 건너지 않겠다고 정직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라고 자신의 설교를 촌평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느끼는 것과는 다릅니다. J. I 패거가 22살의 나이로 학생이었을 때, 그는 1948-1949년의 학창시절에 매주 주일 저녁에 로이드존스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는 "과거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설교"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알고 있는 그 설교는 그에게 "전기충격과 같은 힘으로 다가왔고, 적어도 듣는 이로 하여금 다른 어떤 사람보다 하나님의 임재를 더 많이 가져다준 설교"였습니다.
우리 중 많은 이들도 로이드 존스의 설교 책자들을 통해 이런 충격을 받습니다.
저는 매우 명료하게, 67년 우르바나에서 조지 버우어가 로이드존스의 두 권으로 된 산성설교집은 그가 과거 읽었던 것 중 가장 위대한 산물이라고 말한 것을 들었음을 상기합니다. 저는 그 책을 1968년, 대학과 연구원 시절에 사서 읽었습니다. 그 충격은 잊지 못할 것입니다. 제가 저의 아버지의 설교하시는 곳 아래 앉았던 어린 소년이었던 때가 아니었을 때, 저는 패커가 말한 "영적 이슈의 위대함과 무게"에 감동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그가 받았던 그 영향력이었습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수천명이 갖게 됩니다. 몇몇 사람들에 의해 그는 단순하게 "금세기 가장 위대한 설교자"로 불립니다.
그의 인생 스케치
웨스트민스터에서의 그의 과거는 필적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는 1899년 12월 20일 웨일즈 카디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그의 가족과 함께 그가 14때 런던으로 이사했고, 성 바돌로매 의학대에 들어갔는데, 여기에서 그는 1921년에 M. D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토마스 호더 경의 수석 조수가 되었습니다. 유명했던 호더는 로이드존스를 내가 전에 알던 "가장 예리한 사고"를 했던 사람으로 묘사했습니다.
1921년과 1923년 사이에 그는 깊은 회심을 경험합니다. 이것이 그의 삶을 바꾸게 되었고, 의사로서의 소명보다 완전하게 훨씬 큰 비중을 갖게 된 설교의 열정을 가져오게 됩니다. 그는 일년간 깊이 이러한 것을 느끼고, 그의 고향 웨일즈로 돌아가서 설교하게 됩니다. 그의 첫번째 설교는 1925년 4월에 그곳에서 전해졌습니다. 그리고 그가 전한 노트는 그의 삶의 빈번한 주제였습니다. 웨일즈는 사회적인 활동에 대해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거대한 영적 각성"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부흥과 권능과 실제적인 생명의 주제는 그의 평생의 열정이었음을 상기시킵니다.
그는 1926년 애버라본, 샌드필즈의 베들레헴 전진 운동 교회의 목사로 초빙받습니다. 그리고 다음 해에 그의 전직 동료 의과대 학생이었던 한 사람, 베단 필립과 1월 8일에 결혼합니다. 그들이 함께 한 삶 속에 엘리자베스와 앤, 두 딸을 갖게 됩니다.
그의 설교는 영국을 건너 미국에까지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의 설교는 인기가 있었고, 수정처럼 명료했으며, 교리적인 내용, 논리적이고 불붙은 설교였습니다. 1937년에 그는 필라델피아에서 설교했고, 그곳에 G. 캠벨 몰간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는 강한 인상을 받았고, 런던의 웨스트민스터에서 그의 협동목사로 일해줄 것을 로이드존스에게 부탁한다는 말을 해야겠다고 느꼈습니다.
그 때, 로이드존스는 북 웨일즈, 발라에 있는 칼빈주의 메소디스트 학교의 학장에 대한 요청을 고려 중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순간적으로 종신적인 보좌 일원이 되어달라는 웨스트민스터의 제안을 거절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학교는 그를 제외시키게 되었습니다. 그 학교의 회의에서, 그의 주요 후원자는 열차를 놓친 셈이 되었고, 그가 그 직위를 맡도록 밀어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웨스트민스터의 요청을 수락하게 되었고, 29년을 그곳에서 1968년 은퇴할 때까지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우리의 삶 가운데서 일어나는 그 어긋남과 반전과 역행으로 인해 잠시나마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원하시는 곳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30년동안 런던에서 설교하지 못하게 된 마틴 로이드존스가 있어 왔다면 영국의 복음주의는 얼마나 다르게 되었을까요! 1968년 여름 제가 그의 설교를 읽지 못했다면 제 자신의 삶은 얼마나 달라져있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열차를 놓치게 하시고,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사고라고 부르게 되는 법입니다.
로이드존스와 캠벨 몰간은 몰간이 1943년 은퇴할 때까지 같이 동역했습니다. 그리고나서 로이드 존스는 거의 30년을 혼자 설교하는 목사로 있게 됩니다. 1947년 주일 오전 참석자는 거의 1,500명이었고 주일 저녁 참석자는 그 명료함과 권능과 그의 설교에 있는 교리적인 깊이에 빨려간 사람들로 2,000 명이었습니다. 그는 수수한 검정색 제네바 가운을 입었고, 어떤 술책을 부리거나 농담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백년 전에 살았던 조나단 에드워즈같이 그는 진실에 대한 그 순수한 무게와 그의 안목의 강렬함으로 전했습니다.
그는 1968년에 병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은퇴와 저술을 위해 그 자신을 더욱 더 돌보라는 신호로 취해졌습니다. 그는 약 20 년간 이 일을 지속하고나서 1981년 수면 중에 평화롭게 운명했습니다.
부흥, 성령세례
처음부터 끝까지 로이드존스의 생애는 두 가지 영역의 깊이을 호소하였습니다. 성경적 교리의 깊이와 생기 넘치는 영적 경험의 깊이가 그것입니다. 빛과 열. 논리와 불. 말씀과 성령. 그는 반복해서 두 개의 전방에서 싸웠을 것입니다. 그 하나는 죽음, 형식적인 것, 획일적인 지성주의,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천박함, 입심만 좋은 것, 동양적인 오락. 인본주의적 감성주의입니다. 그가 본 세상은 그리스도와 소망 없는 멸망적인 상태였고, 교회는 이것을 변화시킬 힘도 없음을 보았습니다. 교회의 한쪽 날개는 지성이 빠져있었고, 다른 한쪽은 복음주의 타협 혹은 부주의한 카리스마적인 가르침의 약대에게 삼키운 바 되었습니다. 로이드존스에게 있어서 유일한 희망은 역사적이고도, 신본중심의 부흥이었습니다.
제가 하고자하는 것이 로이드존스의 설교 속에 있는 부흥의 의미를 숙고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더 특별한 것을 숙고하자는 것일까요? 제가 이해하기를 원하는 것은 그가 구하던 권능이자, 이것이 임한 것처럼 그가 기대했던 그것이며, 우리가 이것을 어떻게 구해야하는지를 그가 가르친 내용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로이드존스는 금세기에서 다른 어떤 사람이 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이루어내었는데, 바로 "부흥"이라는 단어의 역사적인 의미의 회복입니다.
부흥은 기적입니다. 권능으로서만 설명될 수 있는 무엇입니다. 하나님의 개입입니다. 사람들은 복음주의적인 캠페인을 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부흥을 산출해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님의 주권적인 부어주심으로서의 부흥의 깊은 전체적인 의미가, 1959년에 웨일즈 부흥 100주년 기념행사로 그 주제하에 열려진 그 시간에 잃어버린 바 되었다는 것은 로이드존스에게는 거대한 비극이었습니다. 그는 "지난 70년에서 80년 동안, 이런 성령님의 방문의 전체 개념, 교회에 부어주시는 성령의 세례는 가고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왜 그런가에 대한 여러 이유를 제시했습니다. 그는 부흥에 대한 만연된 냉담함의 가장 중요한 신학적인 이유는, 성령은 오순절날 모두에게 한번만 임하고, 그래서 다시 부어주실 수 없다는 관점이 그 이유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부흥을 위한 기도가 잘못되고 불필요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로이드존스는 성령세례에 대한 표준적인 복음주의적 해석과 함께 어느 정도 시작했습니다. 그는 단호한 어조로 사도행전 2장의 성령세례와 고린도전서 12:13의 성령세례는 같다고 하는 일반적인 견해를 반대하였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그가 반대하는 견해를 묘사했습니다 :
그렇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것은 성령세례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모두가 취하는 견해는, 이것이 무의식적인 것이며, 이것을 자각할 수도 없는 그 순간 우리에게 일어나서 우리가 믿고 회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에 합병시키는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부 다른 사람들은 성령세례를 구하고자 기도하지 않고, 교회에 성령을 부어주시라고 하나님께 간구도 하지 않습니다. 이같은 내용의 설교가 유통되고 있을 때, 사람들이 부흥을 위한 기도를 멈춘다는 것은 놀랄 일도 아닌 것입니다.
"... 첫 번째 원칙이 있습니다. 제가 강력히 주장하는 바는 여러분은 아직까지 성령으로 세례를 받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여러분은 여러분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을 소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세례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이루어지는 어떤 것이지, 성령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과 세례 받는 것은 성령의 사역이십니다(고전 12:13에서 이 사실을 지적하였습니다). 중생도 그의 사역이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체적으로 다른 무엇입니다. 즉 이것은 성령과 더불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세례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제시하는 바, 이것은 명백하게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 중생하는 것, 여러분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을 소유하는 것과는 구분되고 분리된다는 것입니다."
그가 슬퍼하던 바는, 중생으로써 성령세례가 정의된다는 것, 그 전체적인 것이 아무런 경험적인 것이 되지 않고 자각되지도 않는다는 데 있었습니다. 이것은 사도행전에서 경험된 바로 그 방법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런 관점에 대해 강한 어조로 말한 것입니다. "성령세례가 중생할 때 중생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한다는 견해는, 저에게는 신약성경을 부인하는 것뿐만 아니라 명백하게 성령을 소멸하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성령세례는 이례적인 확신과 기쁨을 가져다준다.
로이드존스는 이러한 관점이 오늘날 교회가 그렇게 필사적으로 필요로하는 것을 구하는 것으로부터 우리를 낙심시킨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오늘날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구원을 확신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확신은 성령세례라는 특별한 방법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자녀라면 으례 갖게 되는 "통상적인 확신"과 " 그가 요청하던 성령세례와 함께 오게 되는 "이례적인 확신" 혹은 "완전한 확신"을 구별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게 되면, 전에는 결코 알 수 없었던 능력과 하나님의 현존의 감지를 갖게 됩니다. 이것은 확신에 관한 한 가장 놀라운, 가능한 형태입니다.
성령세례는 영혼에 있어서 새롭고 신선한 하나님의 나타나심입니다. 여러분은 우리의 주와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여러분 안에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압도당하는 지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성령세례의 가장 위대하고 가장 진수적인 성격인 것입니다. 이것은 경험적인 일입니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일입니다. 여기에는 보통의 경험을 초월하여 갖게 되는 즉각성이 있습니다. 압도하는 기쁨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이것은 돌이켜 그들이 본 바되고 들은 바 되는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의 증인으로 만듭니다.
그는 확고한 진술로, 그리스도인의 통상적인 경험과 성령세례의 경험 사이의 차이점을 토마스 굿윈의 말로 조명하였습니다.
"한 남자와 그의 어린 자식이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들은 손을 잡고 걷고 있지요. 그 아이는 그가 자신의 아버지라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아버지가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지요. 그 아이는 이러한 것 속에서 기뻐하고 행복해합니다. 여기에는 이 모든 것에 대한 의심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아버지가 어떤 충동에 의해서 그 아이를 잡고 번쩍 들어올립니다. 그리고 그의 팔로 사랑스럽게 만지고, 그에게 입맞추고, 껴안습니다. 그 아이에게 자신의 사랑을 보여줍니다. 그러다가 그는 다시 아이를 내려놓고 함께 가던 길을 계속 갑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그 아이는 이전에도 그의 아버지가 자신을 사랑함을 알았고, 자신이 그의 자식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오! 그 사랑의 포옹, 그 갑작스런 사랑의 부어짐, 이례적으로 나타난 그 사랑, 이 모든 종류의 사랑이란. 성령이 우리의 영에서 베푸시는 증거는 우리가 바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로이드존스에 의하면, 예수께서 어떤 사람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때, 그 사람은 의심에서 믿음으로 옮겨질 뿐만 아니라 확신으로, 하나님의 현존과 영광의 각성으로 옮겨진다고 합니다
청교도들의 삶과 신학은 흔히 교리적이고 율법적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리하여 상대적으로 역동성이 결핍되어있다라고 여겨져 왔다. 그러나 성령에 대한 청교도들의 인식과 그것이 설교에 미친 영향을 고찰해보면, 의외로 그들은 우리안에 역사하시는 성령에게 매우 민감하며 더나아가 그들의 삶의 전반에서 말씀과 성령을 깊게 고려한 흔적을 충분히 찾아볼 수있다. 이러한 청교도 설교의 영향은 마지막 청교도라고 불리우는 로이드죤스(M.Loyd Johns)의 설교에서도 강력하게 나타난다. 본고를 통하여 청교도적인 성령관의 실체를 살펴보고, 그것이 그들의 설교에 미친 영향을 고찰해보면서 설교의 진정한 역동성을 추구해보려한다. 먼저는 대표적인 청교도 설교자(목회자)를 고찰해본 후에 그들의 설교의 특징을 간추려보고, 성령에 대한 관심이나 내용이 어떠한 위치를 그 설교속에서 점유하고있는지를 살펴본 후에, 나름대로 설교에 있어서의 성령에 대한 청교도들의 신학과 사상을 정리하고 그러한 사상의 영향이 20세기 인물이지만, 마지막 청교도라고 불리우는 로이드 죤스에게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고찰하겠으며, 그러한 역사적인 흐름을 타고 설교와 성령의 상관관계에 대한 청교도들의 인식을 정리하여 오늘날 설교자들에게 줄 수 있는 교훈들을 얻고자한다.
2. 본론
1. 청교도 설교자들의 다양성
청교도 설교의 족보는 적어도 쯔윙글리가 쮜리히 민스터에서 마태복음 전체를 한절 한절 설교하기 시작했던 1519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청교도 설교의 본래 탄생지는 캠브리지였다. 청교도의 설교 전통은 캠브리지 대학의 첫번째 대복음 운동의 지도자들 -윌리암 퍼킨스, 폴 베인스, 리차드 십스, 존 코튼, 존 프레스턴, 토마스 구드윈 - 에 의해 16세기와 17세기의 전환점에 창조되었다. 그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었던 청교도 주의는 교회 개혁 프로그램이 아니었다, 사실상 이 점에 있어 그들은 전혀 일치하지 않았다. 퍼킨스와 베인스는 카트라이트와 함께 체제를 장로교화하는 꿈을 꾸었고 코튼과 구드윈은 조합교회파가 되었고 프레스턴은 비국교도였고 십스는 온건한 국교도로 남았다. 그들의 청교도 주의는 차라리 깊은 칼빈주의적 경건과 앞 장들에서 묘사된 생명력있는 신앙에 대한 절박한 관심이었다. 퍼킨스에 의해 설교의 기술에 최초로 공식화된 그들의 설교 원리들 은 웨스트민스터 회의를 통해 하나님의 공적 예배를 위한 규칙서에서 가장 훌륭하게 균형잡힌 표현을 찾았고 리차드 박스터의 목회적이며 복음 전도적인 설교들에서 아마 발전의 최고점에 다달았을 것이다. 17세기 말경 설교 구조는 청교도 전성시의 구조에서 단순화되었고 현대의 '3대 별' 이 탄생하였다. 그러나 청교도의 후예들은 이 새로운 형태 가운데 과거의 실천적인 추구를 지속시켰다. 18세기에 디센트(Dissent)는 청교도 전통의 문자를 장려하고자 주장했다. 그러나 그 정신을 가장 훌륭하게 유지한 사람들(청교도 신학을 거의 자신들의 주식으로 탐식한 사람들)은 바로 칼빈주의 영국 국교도 복음주의자들이었다. 찰스 시므온(Charles Simeon) 은 "클라우드의 설교 작성에 대한 소론"(Claude's Essay on the Composition of a Sermon)의 자신의 편집판에서 보다 정확하고 활력있는 형태로 청교도 설교의 기본 원리들을 고쳐서 기술하였고 그의 21권에 달하 는 설교학을 가득 채우는 2, 536개요들에서 장황하게 예증하였다. 자칭 청교도 후예들인 C. H. 스펄전, J. C. 라일, 알렉산더 화이트(Alexander Whyte)는 19세기 말까지 이 전통을 뛰어나게 지속시켰다. 마틴 로이드 존즈(M. Loyd-Jones)박사는 거의 흘로 이 전통을 20세기에 증언하였다. 오늘날 여러 가지 다른 설교 방식과 양식들이 유행하고 있고 청교도 설교는 빛을 잃고 있다. 그러나 성경과 삶에 충실하였던 그들의 신앙과 사상은 오늘의 교회의 성숙을 위해, 청교도 기질의 설교의 회복에 따라 상당한 분량으로 좌우된다고 본인은 확신한다. 왜냐하면 이들이야말로 성경의 정신과 열정을 동시에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2. 청교도들의 설교관과 그 특징
제임스 패커는 그의 책1)에서 설교에 대한 청교도 사상(필자주:내용)을 네가지로 요약하였다. 첫째, 지성의 탁월함에 대한 신념, 둘째, 설교의 절대적 중요성에 대한 신념, 셋째, 성경의 생명을 주는 능력에 대한 신념, 넷째, 성령의 주권에 대한 신념 등이다. 이 네 번째 요소를 자세히 언급해보면 청교도들은 설교의 궁극적인 효과는 사람의 능력 밖에 있다고 주장했다. 인간의 직무는 단순히 말씀을 가르치는 데 충성하는 것이다. 그 진리를 확신시키고 마음에 새기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다. 즉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하는 생각을 청교도들은 굳게 가지고 있었다.
이로 볼 때, 청교도들은 설교의 성패가 성령의 역사에 의해 좌우된다고 여겼던 것같다.
1.설교자의 태도
청교도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설교자상은 무엇인가? 존 번연의 글을 통해 들어보자.
“해석자: 들어오시오 당신에게 유익할 만한 것을 보여드리리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인을 데리고 현실로 들어가서 종을 시켜 한 문을 열게 하였다. 문을 열 때에 그리스도인이 본즉 어떤 매우 점잖은 사람의 그림이 벽에 걸렸는데 그 모양으로 말하면 눈은 하늘을 향하였고 손에는 책 중의 가장 좋은 책을 들었고 입술에는 진리의 율법이 기록되었다. 그리고 세상을 등지고 서서 마치 사람들에게 무엇을 설명하는 것 같았으며 그 머리에는 금면류관이 씌워져 있었다.
그리스도인: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해석자: 그 화상은 천에 하나 있을 사람으로서 능히 자녀를 낳아 해산하는 수고를 알며 자녀를 낳는 대로 친히 양육하는 분입니다. 당신이 본 바와 같이 저가 눈을 들어 하늘을 향하고 손에는 책 중의 가장 좋은 책을 가지고 진리의 율법이 입술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저의 임무가 어두움의 일들을 알고 죄인들에게 밝히 가르치는 것이니 곧 당신이 본 바와 같이 저가 서서 마치 사람들에 게 무엇을 설명하는 것과 세상을 등진 것과 저의 머리에 있는 것은 저가 주께 봉사하는 데 애착심을 가짐으로 현세에 있는 것들은 그렇게 중히 여기지 않고 오직 내세의 상급으로 영광을 얻을 줄 확신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해석자는 다시 계속하여 말했다.
당신에게 먼저 이 그림을 보인 것은 당신이 가는 곳에 주님께서 그 길에서 당할 모든 어려운 경우에 당신의 인도자가 될 만하다고 지적한 유일한 인물이기 때문입니다.2)
이렇게 번연은 이상적인 기독교 설교자의 윤곽을 그린다, 동일한 이상이 하나님께 대한 공적 예배를 위한 웨스트민스터 규칙서의 설교가 행해져야 하는 정신과 방식에 대한 부분에 보충적 형식으로 다음과 같이 제시된다.
말씀의 설교는 구원에 이르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복음 사역에 속한 가장 중대하고 가장 뛰어난 과업들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사역자가 부끄럽지 않고 또한 자신과 듣는 자들을 구원할 수 있도록 수행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종은 자신의 모든 사역을 다음과 같이 행해야 한다.
(1)수고하여 (즉 전력을 다하여) 주님의 일을 태만하게 행하지 말라.
(2)명백하게 즉 가장 재능이 없는 사람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라. 진리를 인간 지혜의 유혹적인 말로 전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무런 효과도 없이 되게 하지 말고 성령과 능력의 증거로 전하라. 또한 알지 못하는 외국어, 이상한 어법, 억양의 무익한 사용을 삼가하고, 고대나 현대의 별로 우아하지 않은 성직자나 다른 인간 저자의 문장의 인용을 삼가하라.
(3)신실하게 즉 자신의 이익이나 영광을 바라보지 말고 그리스도의 영광과 사람들의 회심과 덕성 함양과 구원을 바라보라. 이러한 거룩한 목적들을 조장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억제하지 말고, 각 사람에게 그 사람의 몫을 주고, 비천한 자들을 무시한다거나 신분이 높은 자들은 그들의 죄를 관대히 보아주거나 함이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동등한 관심을 나타내라.
(4)지혜롭게 즉 자신의 모든 교리, 권고, 특별히 견책을 가장 적절하게 설복할 수 있는 방식으로 구성하라. 각 사람의 인격과 처지에 가장 적절한 관심을 보이고 자신의 걱정이나 한을 섞지 말라, (5)진지하게 하나님의 말씀과 어울리도록 하며 자신과 자신의 사역을 멸시하는 사람들의 타락을 유발할 수 있는 모든 몸짓과 음성과 표현을 피하라.
(6)사랑의 감정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경건한 열심과 그들이 선하게 행하는 것을 진심으로 바란다는 것을 알도록 하라.
(7)하나님에 의해 가르쳐지는 것처럼 그리고 자신의 마음으로 설득하라. 그가 가르치는 것은 그리스도의 진리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양떼 앞에서 그 진리의 모범으로 행하라. 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신중하게 자신의 수고들이 하나님의 축복이 되게 하고 자신과 또한 주께서 그들 감독자로 세우신 양떼를 주의 깊게 감독하라. 그러면 진리의 교리들이 더럽혀지지 않고 보존될 것이며 많은 영혼이 회개하고 설 것이며 그 자신은 살아있는 동안에도 그의 수고에 대해 많은 위로를 받게 되며 장차 올 세계에서는 그를 위해 예비된 영광의 면류관을 받을 것이다.
위의 이상중 세 번째 것은 리차드 박스터가 동료 설교자들에게 그들의 설교에 대해 말할 때 드러난다. 그리고 (2)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설교할 것을 역설하는 것은 그가 설교에 있어서 성령의 필요성과 능력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는 반증이 된다.
“자신의 온 힘을 다해 설교하거나 또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정말로 진실하다고 믿게 하는 태도로 영원한 기쁨과 영원한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는 목회자들이 얼마나 적은지요! 아, 슬픈 일입니다. 우리는 너무 나른하고 점잖게 말하기 때문에 잠들어 있는 죄인들은 듣지 못합니다. 그 타격은 너무나 가벼워서 심령이 굳은 죄인들은 느낄 수 없습니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음성을 사용하지도 않고 진지한 발성을 내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큰 소리로 진지하게 말한다고 해도 문제의 중량과 진지성으로 그에 응답하는 사람은 얼마나 적은지요! 그러나 문제의 중량과 진지성이 없다면 음성은 거의 효력이 없습니다. 문제가 일치하지 않을 때 사람들은 음성을 단지 고함으로밖에 평가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목회자들이 훌륭한 교리를 다루면서 세심하고 생명력있는 적용을 하지 못함으로 죽게 하는 것을 들을 때 가슴 아픈 일입니다. 여러분이여 우리는 그러한 순간의 메시지를 얼마나 명확하게, 얼마나 세심하게, 얼마나 열심으로 전달해야 하는 것입니까! 형제들이여, 하나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강단으로 가기 전에 여러분 자신의 심령을 각성시키어 여러분이 죄인들의 심령을 각성시키기에 적당하게 되도록 노력하십시오 그들은 각성을 받거나 그렇지 않으면 저주를 받게 되는데, 잠들어 있는 설교자는 졸고 있는 죄인들을 거의 각성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비록 여러분이 하나님의 거룩한 일들을 가장 귀한 찬양의 말로 전할지라도 만일 냉담하게 전하면 여러분은 그 태도로 인해 그 문제에 대해 말한 바를 취소하는 것같이 보일 것입니다. 우리는 훌륭한 목회자들 중에서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들을 때 진지하고 설득적이고 능력있게 설교하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설교자를 발견하기가 어렵습니다. 비록 나는 여러분이 설교를 할 때 항상 큰 소리로 하라고 제안하지 않고(왜냐 하면 그렇게 하면 여러분의 열정이 천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항상 진지함을 갖도록 주의하라고 제안하지만 내용이 큰 소리를 요구할 때는(적어도 적용에 있어서는 그렇게 해야 할 것입니다) 목소리를 높이고 활기를 아끼지 마십시오. 당신의 성도들에게 여기에서나 지옥에서나 잠이 깨어야 하는 사람들에게 하는 것처럼 말하십시오 그들을 믿음의 눈으로 그리고 연민으로 둘러보고 그들이 영원히 기쁨의 상태가 아니면 고통의 상태에 있어야 할 것을 생각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진지해질 것이며 여러분의 심령은 그들의 상태에 대한 느낌으로 녹는 것 같을 것입니다. 천국이 아니면 지옥이라는 이처럼 큰 일에 대해 냉담하거나 무관심하게 말하지 마십시오. 내가 나의 영혼의 이상을 나의 양떼에게 나타낸다는 한탄스러운 경험을 고백합니다. 나의 심령이 냉담해지도록 내버려 둘 때 나의 설교는 냉담해집니다. 나는 나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 중에서 종종 다음과 같은 사실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즉 내가 설교를 냉담하게 할 때 그들도 역시 냉담해지고 내가 듣게 되는 그들의 기도가 나의 설교와 너무나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이여, 여러분 자신의 심령을 감시하십시오. 색욕과 정욕과 세상적인 기호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고 믿음과 사랑과 열심의 삶을 유지하십시오. 집에서 하나님과 많이 거하십시오. 목회자는 회중에게 나아가기 전에 심령으로 특별한 수고를 해야 합니다. 만일 심령이 차가우면 어떻게 그가 듣는 자들의 심령을 따뜻하게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생명을 위해 특별히 하나님께 나아가십시오.3)
이 얼마나 열정과 감격이 넘치는 글인가? 그리고 이러한 감동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청교도의 설교는 이 후기 시대에 악평을 받았다. 청교도의 설교는 정확하게 길고 난해하고 지루하다는 풍자가 있다. 실제로 한 시간은 공인된 길이였고 그 내용은 실천적 성경 해석이었고 스타일의 통례적인 특징은 활력이 없다. 청교도 설교는 언어적 심상들과 이야기체의 예화들과 성경 전체에 풍성하게 산재해 있는 기사들의 은유로 길게 이어졌다. 휴 라티머(Hugh Latimer)의 설교들이 나타내는 바와 같이 청교도 설교는 문체상으로 말하자면 아마 14세기의 위클리파 교도들(the Lollards)과 탁발 수도사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전통을 나타낼 것이다. 그러나 청교도 설교를 현실적으로 만든 것은 그 내용 못지 않게 그 스타일의 영향도 컸다. 청교도는 성경을 개인의 삶에 대한 지속적인 적용을 수반하여 조직적으로 철저하게 설교했고 성경을 믿는 사람들로서 그리고 그들의 태도에 의해 자신들의 내용을 믿을 수 있고 설득력 있고 죄를 깨닫게 하고 회심시키는 것이 되도록 애쓰는 사람들로 설교했다. 청교도의 강단의 열정은, 파악하고 파악되어야 하는 은혜와 경건, 생명과 죽음, 천국과 지옥에 관한 하나님의 진리의 회중을 위한 명확한 구현이 되고자 하는 열망의 소산이었다. 설교에는 영혼들의 교제와 우리 와 그들간의 어떤 의사 전달이 있다 그러나 이것이 청교도 설교의 강점이기도 하다. 만일 우리가 청교도의 설교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우리가 착수해야 하는 부분은 바로 이 설교자의 직무에 대한 청교도의 깨달음이다.
2.청교도의 설교 사상
설교에 대한 모든 청교도 사상은 네 가지 권리에 기초된다. 우리는 이미 그 원리들을 보았으나 여기서 다시 말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첫째로 -지성의 탁월함에 대한 집념이다. "모든 은혜는 이해에 의해 돌아 온다"는 청교도의 격언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단순한 육체적 폭력으로 인간들을 행동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정신에 말하시고 신중한 동의와 지적인 순종의 응답을 요구하신다. 따라서 모든 사람의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된 첫째 의무는 그 말씀을 이해하는 것이며 모든 설교자의 첫째 의무는 그 말씀을 설명하는 것이다. 설교자가 심령에 이르기 위해 권한을 부여받은 유일한 길은 머리를 통해 가는 길이다. 그러므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을 자신의 가장 중요한 일로 삼지 않는 목회자는 자신의 일을 하지 않는 것이며 설교는 제아무리 다른 것이라고 해도 성경의 교훈적 해석이 아니라면 그 칭호를 받을 가치가 없는 것이다. 둘째는 설교의 절대적 중요성에 대한 신념이다. 청교도들에게 있어 설교는 공적 예배의 정점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의 신실한 선포와 순종의 들음보다 더 하나님을 존귀하게 하는 것은 없다고 말했다. 어떤 환경에서도 설교는 예배 행위이며 따라서 그렇게 수행되어야 한다. 더욱이 설교는 교회에 있어 은혜의 가장 중요한 수단이다. "땅에서 지금 행해지는 가장 놀라운 일들은 공적 의식들 가운데 역사한다"고 말한 데이비드 클락슨(David Clarkson)은 "사적 예배보다 우선되어야 하는 공적 예배"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선언했다.
여기에서 죽은 자들은 하나님의 성자의 음성을 듣고, 듣는 자들은 살아난다. 여기에서 성자께서는 병든 영혼들을 말씀으로 고치신다. 여기에서 성자께서는 사단을 쫓아내신다. 주님께서 이 놀라운 일들을 공적으로만 행하셨던 것이 아닌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공적 예배는 주님께서 이 일들을 행하시는 유일한 정상적 수단인 것이다.4)
이렇게 설교는 매우 엄숙하고 중대한 사역이다. 목회자와 회중은 모두 주일 설교가 그 주간의 가장 중요하고 의미있는 사건임을 깨달아야 한다. 다른 어떤 것이 무시되어도 설교는 무시되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자신의 우선권을 알고 있는 목회자는 설교 준비를 위한 시간을 중심으로 한 주간을 계획할 것이다.
현대의 목회자들에게 이 말은 매우 심각하게 고려되어야한다. 다원화 세계는 목회의 현장도 매우 세분화시켜놓고 있기 때문이다. 성도들의 세계는 너무 복잡하여졌고 그들이 겪고있는 현실적인 문제 또한 전문적인 지식을 요구할 때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리하여 목사의 시간을 빼앗아가기에 충분하다. 심방, 행정, 상담, 등 각 분야만해도 너무 복잡하기 때문에 설교에 집중할 수없게 만들 때가 많은 것이다. 설교에 우선권을 두라는 선배 청교도의 말씀이 새삼 귀에 새롭고도 중요하게 다가온다. 그렇다면 그들의 설교의 능력의 원천은 무엇이었을까?
3. 청교도들의 성령관
청교도들은 성령을 말할 때 무엇을 말하는가?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 하시나니’(롬8:16)라는 말씀은 우리의 구원을 확신시키는 성령의 역사에 대하여 청교도들이 추구했던 바를 단적으로 가르쳐준다. 성령의 역사는 교회의 신학적 유산에 청교도의 가장 값비싼 기여가 이루어진 분야이며 특별히 확신이라는 주제는 몇몇 가장 뛰어난 청교도정신의 소유자들에 의하여 매우 충분하고 심오하게 다루어졌다.5) 본고에서는 청교도 교사들이 자주 말하고 강조한 요소들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고찰해 보려한다.
1. 믿음의 본질
청교도들은 믿음이 복음의 메시지의 진리에 대한 신념으로 마음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했다. 믿음은 성령의 영적인 조명(Illumination)의 결과로 생기는 것이다. 조명을 통해 성령께서는 마음을 밝혀 신령한 일들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하시며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하시는 그 일들의 객관적인 진실에 대하여 마음에 깊은 인상을 준다. 이러한 영적 지식은 이성을 초월하는 것이다. 이 지식은 간접적이며 불안정한 ‘관념을 떠도는 지식’이 아니다. 이 지식은 ‘현실적이고 견고한 지식이며’알려진 일에 대한 영적 지각에 의한 직접적 인식의 소산이다. 이 지식을 주는 신적 작용을 칼빈과 그의 계승자들은 ‘성령의 내적 증거’라고 칭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2:4에서 이를 ‘성령의 나타남’이라고 칭한다.6) 다시 말하면 구원의 출발이라 할 수 있는 믿음의 생성에서부터 성령의 역사가 시작됨을 청교도들 역시 인지하고있었으며 이는 종교개혁의 전통에 합치할 뿐아니라 성경의 교훈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구드윈(T.Goodwin)은 이렇게 말한다.“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믿음을 역사하실 때 두가지 일을 행하신다. 첫째는 그는 우리에게 새로운 지각 곧 그리스도를 알아볼 수 있는 새로운 눈을 주시고 둘째로 성령 자신께서 이 새로운 자각위에 빛으로 오심으로 영적 실재들에 대한 영적 시야를 열어주시는 것이다.7) 그러나 청교도들이 희망하였던 확신은 이에서 더 나아간다. 그들은 ‘확고하고 근거가 충분한 확신을 원하였다. 성경은 확신을 믿음과 성질이 다른 것으로 말한다. 브룩스가 말한 대로 이것은 믿음의 실재가 아니고 믿음의 복리이다. 사실 이 종류의 확신은 믿음이 최소한의 구원의 실행 범위를 훨씬 넘어 최고도의 발전에 이르렀을 때에 나타나는 정상적인 믿음의 한 국면이다. 요약하여 말한다면 믿음의 신비와 보다 차원높은 한 국면에 있어서 이 초자연적인 확신이 나타날 때 그의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가 변화된다. 그런데 이러한 역사는 성령께서 일으키시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2. 성령의 확증
성령은 우리 영의 증거를 확증한다. 청교도들은 ‘우리 영’(롬8:16)을 그리스도인의 양심과 동일시한다. 즉 그리스도인의 양심이 성경이 중생의 증거라고 명기한 표적들을 자신의 심령가운데 분별하여 그에 의해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결론을 내릴 수있다는 것이다. 사실, 성령의 확증과 일치에 대한 롬8:16의 해석에있어서 여러 청교도들의 견해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구원에 대한 이중적인 확증을 주장하는 알미니안 계통의 청교도신학자 구드윈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우리가 확신이 직접적인 증거라고 말할 때 그 의미는 말씀이 없는 증거라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않다. 확신은 약속에 의한 것이다. 그 의미는 확신이
우리 자신의 은혜를 증거로 사용한다는 점에서 직접적이라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약속, 어떤 절대적인 약속을 심령에 깊이 명심시킨다.우리는
광신을 변호하지않는다. 우리가 말하는 것은 말씀을 심령에 적용시키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시라는 것이다8)
구드윈은 에베소서1:13의 “약 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느니라”는 구절을 이 직접적인 증거를 언급한 것으로 해석한다. 그렇게 해석하면서 그는 십스와 존 프레스턴을 지난 청교도 실천신학의 개척자 월리암 퍼킨스에게까지 거슬러올라가는 노선과 동화한다. 그러나 그는 ‘인치심이 세례의 큰 열매’ 고 하는데까지 일보 진전한다.
이를 살펴볼 때 신자의 마음속에 확증을 주시는 것이 결국 성령의 인치심과 연결된다는 주장이 나온다. 그리고 그것은 말씀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3. 성령의 인치심
그렇다면 성령의 인치심은 어떻게 이루어지며 사실상 그것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이번에는 오웬(J. Owen)의 해석에 귀기울여보자. 오웬이 자세히 논하는 그리스도의세례는 분명히 우리의 인침의 원형이었다.9) 그러나 그것은 사역과 연관되어 기름부어진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성도들을 인치심은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로우신 교통으로 그들에게 하나님께 용납되었음을 증거하고 그들의 영원한 구원까지의 보존을 단언함으로 그들이 거룩한 부르심의 의무들을 할 수있게하는 것이다. 확신이 은사와 함께 올 수도 있으나 확신이 은사와 동등되어서는 안된다. 인침은 성령의 어떤 특별한 작용이 아니라 성령 자신의 은사이다. 분명히 성령으로 인치심은 확신을 준다. 실제로 성령의 임재는 인치시는 활동의 어떤 한 가지 요소에 의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삶 가운데서의 총체적인 활동에 의해 나타나는데 그것이 신자에게 자신이 하나님의 소유라는 확신을 주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요일3:24, 4:13, 롬8:9)
이상에서 살펴본 청교도들의 성령관은 무엇보다도 그들이 신자의 중생과 믿음의 확신이 성령의역사임을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음을 보게된다. 이는 신자에게 믿음을 심어주는 모든 행위-설교, 성경공부, 기도, 예배등-에 성령께서 역사하시며 결국, 신자의 믿음과 중생과 인침과 그로 인해 얻게되는 확신이 인본적인 열매가 아니라 신령한 사역의 창출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4. 로이드죤스의 설교관
설교에 대하여 로이드 죤스가 느끼는 점의 첫 번째 요소는 소명감의 우위성이다. 그는 어떠한 소명보다도 설교의 소명을 가장 우위에 놓았다.10) 그러한 소명은 성령께서 주시는 것인데 이것을 로이드죤스는 사도행전6장의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과 연결시켜 설명한다. 즉 이러한 영성이 설교자에게 반드시 요구된다는 것이다. 설교의 모든 면에서 성령과 연관시켜 말하고있지만 예를 들어 설교준비에 있어서도 이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연속설교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도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라고 하는 말을 빼지않는다.11) 그는 결론적으로 말하기를 “나는 성령께서 한 때는 따로 떨어진 본문에 입각해 설교하게도 하시고 어떤 경우에는 연속된 설교를 하게도 하신다는 것을 주장합니다.”라고 하였다.
그가 설교에 있어서 성령의 역할을 가장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말은 설교의 영력을 강조하면서 한 말이다. 그는 설교학에 대한 강의를 하면서 “나는 마지막 장을 설교하는 일에 관련하여 가장 커다란 진수가 되는 성령의 감동과 기름 부으심에 대한 것으로 장식하려 합니다.” 그에게 있어서 설교의 처음과 끝은 성령이시다. 그리고 이러한 영향은 청교도들에게 입은 바 크다.
5. 로이드죤스의 성령관
설교에 있어서 로이드죤스가 독특하게 강조하는 것은 성령의 기름부으심(unction)이다. 그렇다면 그가 그토록 높이 평가한 이 능력은 도대체 무엇인가?
1.성령의 기름부음
그 분을 구하십시오! 그 분을 구하십시오! 그 분 없이 우리 가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그 분을 구하십시오 항상 그 분을 구하십시오 그러나 그 분을 구하는 것 이상으로 나아가십시오 그 분을 기대하십시오 강단으로 설교하러 올라 갈 때에 당신은 당신에게 무엇인가가 일어나기를 원하십니 까? -이 능력을 구라고, 이 능력을 기대하고 이 능력을 갈 구하십시오 그리고 이 능력이 임하면 그 분께 순복하십시 오 거역하지 마십시오 가능하면 당신의 설교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어버리십시오 그 분으로 하여금 당신을 풀어 주 게 하며 그 분이 당신 안에서 그리고 당신을 통하여 능력 을 나타내게 하십시오 "
- 마틴 로이드 존스 박사는 위풍 당당판 인격의 소유자요. 잘 절제된 목소리와 놀라운 표현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한 번도 어떤 효과를 내려고 애쓰지 않았다. 모든 것이 완전히 천부적이었다. 그러나 그가 치과 의사 계통으로, 즉 해부학적 진리와 사역을 해왔던 것을 생각하여본다면, 그것이 그의 설교사역에 많은 도움을 준 것도 부인할 수없다고 본다. 그의 설교에서 서로 다른 자질 두 가지가 자주 거론된다. 첫째는 표현이다. 그는 일생 동안 머리를 통하여서만 마음에 도달할 수 있다는 원칙에 따라 행동했다고 한다. 그래서 지성의 동의를 얻어 내기 위해 지치지 않는 열심을 가지고 철저한 논리를 추구해 나갔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설교는 한 번도 강의로 전락하지 않았다. 그 진리로 신속하게 그 자신의 영혼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신속하게 그 불을 회중에게 전달했다. 두 번째는 끈질기고 무자비한(?) 적용이었다 “,,,그의 설교 들은 자기가 본 것을 향해 있었다 사람들이 쉽게 빠지는 오류들. 그들이 쉽게 젖어드는 분위기 그리고 그들이 안정 을 기대한 거짓된 안식처들을 향하여 그는 외쳤다. 그는 말하였다 "설교란 사람이 받을 수 있는 가장 높고 영광스러 운 부르심이 아닌가1"" - 도널드 맥클리오드(Donald Macleod)
이제 우리는 다시 한 번 '기름부음'(unction)이라는 단어를 놓고서, 로이드 존스의 깨달음에 더욱 접근해 보고자 한다. 그가 그렇게도 높이 평가한 이 능력은 무엇인가? 로이드 존스의 성령 신학에 대하여 깊이 있게 다룬 한 연구와 몇몇 비평적 논문과 글이 있는데, 적지않게 신랄하다. 그의 성령론은 기름부음을 향한 그의 열망과 기름부음에 대한 그 개념의 축이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서 설교의 승패를 결정하는것도 기름부음이며, 그는 성령의 기름부음이 설교에서 담대함과 명확성과 능력을 불러일으킨다고 믿었다. 만약 후자가 결과라면 전자는 그 원인이다. 한 곳에서 그는 성령 세례에서 흘러나오는 유익들을 상술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다음으로 내가 즉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사람의 말- 이 말에서 내가 실제로 의미 하는 것은 설교이다- 에 지치는 '성령 세례'(Baptism with the Spirit)의 효 과이다. 기름부음, 이 단어를 가지고 실제로 나타내고자 한 바는 무엇일까? 다행스럽게도 그가 그것을 말해 준다. 그는 그것을 '능력의 부가'(accession of power)혹은 능력의 부어 주심'(effusion of power)이라고 묘사하였다12). 이 능력은 설교자를 그 자신 밖으로 이끌어 내어, 그가 말할 때 원래 그의 것이 아닌 능력들을 주는 효과를 낸다. 40년 이상을 행한 설교들 속에 나타 나는, 신성한 능력 주심에 대한 로이드 존스의 가르침과, 여기저기 분산되어 있는 언급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추론이 가능하다.
기름부음은 영구적인 소유물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그것을 더 많이 경험할 수 있다. 그러나 누구도 그것을 취할 수는 없다. 한 번 기름부음을 받은 경험이 있더라도 다시 추구하여야 한다. 로이드 존스는 다른 실례들과 함께 베드로의 경험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오순절 날 성령을 부어 주신 결과로 그는 능력 있는 설교 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뒷장에서 우리는 베드로와 요한이 산헤드린 앞에 서 있게 된 것을 본다, 그들은 복음을 전파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그 때 베드로는 사유를 밝힐 것을 요구받았는데, 이 상황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 다.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행 4:8). 그는 오순절날 설교를 할 때 기름부음을 경험하였다. 그러나 지금 상황에서 그에게는 새로운 공급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스데반이 다른 여섯 명과 함께 집사로 임명을 받았을 때, 그 직책을 위한 핵심적인 자질은 그들이 '성령으로 충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행 6:3). 그러나 스데반은 그의 순교를 야기시킨 위기의 상황에 직면하였을 때 성령의 능력을 새롭게 공급받았다(행 7:55). 로이드 존스가 즐겨 말하던 에피소드도 그 점을 확증한다 그는 동료인 데이비드 몰간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1859년 웨일즈 부흥 때였다.그는 목수였는데, 목사로서의 훈련을 충분히 받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신실하긴 하였지만 별로 주목받지 못하던 목사였다. 그러던 어느 날 성령을 체험하게 되고, 친구에게 그것에 대하여 말하였다. "그날밤 나는 예배에서 능력을 느끼기는 하였지만 평상시처럼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에 잠이 깨었을 때 나는 내가 다른 사람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마치 내가 사자처럼 느껴졌고 큰 능력을 느꼈다." 그는 그 후 엄청난 권위를 가지고 설교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상당 기간 동안 지속되었카. 훗날 그는 같은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느 날 밤 나는 2년 동안 나와 함께하던 그 능력으로 채워지는 것을 느끼면서 잠자리에 들었고, 다음날 아침 일 어났을 때 내가 다시 평상시의 데이비드 몰간이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 예화는 흔치 않은 것이기는 하지만, 이 능력의 내려 주심을 당연한 것으로 간주할 수 없다는 로이브 존스의 주장을 우리 마음속에 확인시켜 주는 데 도움을 준다. 그러나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는 없다고 해도 성령의 기름부음이 영구적이 아니며, 우리는 그분의 역사앞에 매우 수동적인 존재임을 느끼게 하기에는 충분하다. 거기에는 밀물과 썰물이 있다. 성령의 은사들처럼 그 것은 영구적인 소유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나는 자주 세상에서 가장 낭만적인 장소가 강단이라고 말합니다. 나는 주일마다 강단의 계단을 올라갑니다. 하지만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날 지 결코 알지 못합니라. 솔직히 고백하지만, 어떤 때는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나는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능력이 주어집니다. 또 다른 때는 내가 한 준비 때문에 많은 것을 기대합니다. 그러 나 슬프게도 거기에 아무런 능력이 없는 것을 발견합니다. 이것은 하나 님에게 감사할 일입니다. 나는 최선을 다하지만 공급과 능력은 하나님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 분이 그것을 부어 주십니다.13)
여기서 우리는 로이드 존스가 기름부음에 관하여 더욱 강조한 내용으로 나아가게 된다.
기름부음은 '주어진' 요소에 의존한다". 다른 말로 하면 이 능력 부어주심은, 완전히 성령의 주권에 달려 있다. 그 분이 그것을 내려 주실 수도 있고, 내려 주시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은 전적으로 그 분의 재량이다. 또한 한 번 받았다고 계속 저장해 놓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로이드 존스의 사역에 대하여 명상하면서 레이 포웰(Leigh Powell)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관찰했다.
때때로, 설교의 말미에 자주 그랬는데, 그는 무엇인가를 기다리면서 배회하는 것처럼 보였다.,,때때로 성령의 바람이 불어서 우리를 쉽쓸고 그를 달려 올렸으며, 우리는 독수리 같은 날개를 타고 두렵고 생생한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올라가곤 하였다.9)
이것은 통찰럭 있는 지적이다. 설교하는 도중에 그는 성령의 영감이 자기 위에 내리기를 열망하였다. 그러다가는 높이 치솟아서, 기름부음에 의하여 자극받고 능력받은 말과 논리로써 기관총 사격처럼 메시지를 전하곤 하였다고 위의 책에서 토니 시전트는 전한다. 그 결과, 회중은 자주 온 몸이 얼어붙어 버렸다. 성령이 역사하는 곳에는 언제나 담대함과 권세가 나타났다. 로이드 존스는 이 경험을 지속적으로 갈망하였다. 그는 설교 도중에 느꼈던 '천상적 임재' 에 대하여 언급한 적 도 있었다. 설교자의 연약함이 기름부음을 방해하지는 않는다. 여기서 연약함이란 더듬는 말투뿐 아니라 외모 등을 포함하여 모든 것 에 관한 것일 수 있다. 로이드 존스는 하나님이 '추하게 생긴' 사람을 얼마나 놀랍게 사용하실 수 있는지에 대하여 이야기한 적도 있다고 한다! 그는 고린도 전서에 주목하였다. 여기서 사도는 그의 외모뿐 아니라 그의 말의 연약함 을 인정하였다(고후 10:10). 그는 유창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말투와 떨고 두려워하는 자신을 인정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의 고린도 사역을 회상할 때에, 자기의 전도가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된 것이 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고전2:4). 이것은 매우 중요한 선언이다. 실제로 로이드 존스는 이것을 전체 주제를 '지배하는 진술' 로 간주하였다. 그 자신의 고백에 의하면, 타고난 연설가도 아니고 그 당시의 수사학자 들과 같은 방식으로 훈련할 마음이 전혀 없었던 사람의 말을 통하여, 혹은 그런 사람이 말했지만, 성령의 부어 주심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 추론은 골로새서 1장에서 좀더 강력한 지지를 얻는다. 바울은 "각 사 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치면서-골 1:28)주님에 관한 좋 은 소식을 선포하려는 자신의 시도를 언급한다. 설교자로서 바울은 최선을 다하였다. "이를 위하여 나도,,,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우리에게 용기를 주는 것은, 그가 다음과 같이 첨가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2장). 이 능력은 기름부음의 본질을 구성하는 성령의 역동성이다.
기름부음의 필요성은 설교에는 단순히 말하는 것 이상의 무엇이 있음을 확증한다" 로이드 존스는 설교와 설교 행위를 구분하였다. 설교는 잘 준비될 수 있으며, 좋은 자료들로 장식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효과적이고 능력 있는 전달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데살로니가인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바을은 그가 고린도인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자기가 그들과 함께 있었던 때를 회상하였다. 그는 자신의 설교의 성격을 기억하였다. 그 설교는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었다. 여기서 핵심이 되는 말은 ‘말로만이 아니었다' 는 것이다. 성공적인 설교는 큰 소리로 말하는 것 이상이다, 로이드 죤스는 자주 이것을 강조하였다. 어떤 때는 설교 행위에서의 성령의 역동성을 너무나 강조하는 나머지, 그의 마음속에는 오직 그 생각만 이 들어 있는 것처럼 비치기도 하였다, 그것은 계산된 모험이었다. 그는 자신이 위험을 감수하고 있는 것을 알았고, 또한 그것이 오해를 야기시킬 수 있음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오늘날의 설교 철학에서 균형이 깨어졌다고 느끼는 것을 수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자주 간청하기도 하고 자신이 성실한 모범을 보임으로써, 설교 준비를 열심히 하면서도 성령의 기름부음 을 기대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설교에 말이 필요하다는 의미는 어떤 명확한 것을 진술한다는 뜻이다. 세심하게 준비한 개념들, 상상들 그리고 어투는 설교를 구성하는 본질이다. 그러나 훌륭한 사고와 표현 형식에 말씨와 뚜렷한 발음을 전부 합친다해도 충분하지 않다. 이 모든 것은 '오직 말' 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그 이상의 것이 있어야 한다. 바로 이것이 바울이 데살로니가서에서 말하고 있던 본질적인 것이다. 그는 자신의 사역이 성령의 능력 때문에 효과가 있었던 것을 감사하였다. 로이드 존스는 바울의 요점을 강조하면서, 설교자들에게 주일이 다가옴 에 따라 예비적인 기초 작업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하지만, 동시에 선포될 내용을 성령께서 인정하실 것을 기대하여야 한다고 충고한다,14)
그는 두 편의 설교를 준비하고 모든 능력과 지식을 거기에 쏟아 부어야 합니다. 그어나 그는 또한 성령께서 그것들 위에 임하지 않으시면 그것 들이 아무 소용이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성령께서는 사 람이 최선을 다해 준비한 것을 사용하십니다 성령이냐 혹은 준비냐가 아닙니다. 준비에 기름부음이 더해져야 하는데, 이것은 오직 성령만이 공급하실 수 있습니다.15)
준비가 부실하고 부절적할 때에도 성령의 은혜안에서 기름부음이 넘쳐 흐를 수 있다. 로이드 존스는 사무엘 데이비스(Samuel Davies)와 길버트 테넨트 (Gilbert Tennent)가 시도했던 잉글랜드 방문을 언급하였다. 그들의 목적은 새로 조성된 대학을 위해 기금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여행은 그들이 배가 파선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정도로 참담했다. 런던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휫필드의 설교를 듣기 원했다. 그들은 휫필드가 그 도시에 있음 을 알고 기뻐했으며 다음날 아침 그의 설교를 들으러 갔다. 그 사건을 기록 한 일기에서 데이비스는 이렇게 쓸 수밖에 없었다. 나는 "휫필드가 매우 바쁜 일주일을 보냈다는 사실을 그 예배에서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그는 설교를 적절히 준비할 시간이 없었음에 분명하였다.,,,구문과 사상의 순서라는 견지에서 그것은 매우 빈약하고 결점이 많았다. 그것은 형편없는 설 교였다." '그러나' 라고 사무엘 데이비스는 계속한다. "거기에 수반된 기름 부음 때문에 나는 그 은혜로운 능력 아래 있기 위해서라면, 즐거운 마음으로 파선을 무릅쓰고 대서양을 몇 번이라도 건널 수 있을 것 같았다.16) 로이드 존스가 설교 준비를 대강대강 해도 된다고 옹호하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강조한다. 그러나 설교자는 자기가 원하는 만큼 준비를 하지 못 하고 강단에 올라가서도 매우 능력 있는 메시지를 전하는 경우가 있다. 열심히 준비하는 것이 아무리 칭찬할 만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기름부음은 그 열심에 대한 보상은 아니다. 기름부음은 설교자로 하여금 '불타게' 한다 로이드 존스는 '설교는 불이 붙은 사람에게서 나오는 신학' 이라고 외쳤다. “최상의 묘사는 '불이 붙은 논리 ! 유창한 논증이다. 이 불길이 타오르기 위해서는 기름부음이 있어야 한다. 엘리야가 일부러 물에 흠뻑 적신 제물에 불을 붙일 번개를 기다렸듯이, 설교자는 자신의 설교에 능력이 임하기를 열망한다. 강단에 선 사람에게는 자신이 특별한 방식으로 능력을 받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가 큰 권세와 사람을 끄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아는 적절한 시간들이 있다. 조금 다른 종류이기는 하지만, 야고보서에는 파괴적이고 무서운 능력을 지닌 혀에 대한 언급이 있다. 거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혀는 곧 불 이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약 3:10). 이것은 우리가 지금 정의하고 밝히려고하는 기름부음의 정반대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부정적인 실례들은 우리에게 완전한 대비를 제공함으로써 도움이 될 수도 있다. 거룩한 불 로 점화된 혀는 바로 설교자가 원하는 것, 즉 불타는 논증이다. 오스왈드 샌더스는 예수님의 사촌(필자주: 세례요한 지칭)위에 임하여 있던 그런 기름부음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의 삶은 성령의 기름에 잠기고 하나님의 불에 접촉되어서 눈부신 것이 되었다. 그의 영향력의 비결은 성령이 그의 전 인격을 지배하고 상호 침투하였다는사실에 기인한다.17)
물론 샌더스는 세례 요한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기름 부음에 힘입어 설교하는 사람에 대해 (정의하는 것이 아니더라도) 묘사하고 있다. 즉 기름부음은 성령이 그 인격에 침투하여 지배하는 것이다. 노련하고 경건한 설교자라 할 지라도 특별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새로운 기름부음이 필요하다. 로이드 존스는 실례로 사도 요한을 제시한다. 그는 본질적으로 영적인 인물이었다.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그는 그의 첫 번째 서신에서 기름부음에 대하여 썼다. 주님이 다락방에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실 때도 거기에 있었다. 물론 그가 보아너게라 불리울 정도로 혈기방장하였지만 이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또한 몇 주일 후에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렸던 120명 가운데도 있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1장에서 그는 다른 기름부음을 증언하였다. 그 의 앞에는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다시 들려주는 사명이 받았다. 로이드 존스는 그렇게도 오랜 동안 신실하게 주님을 섬겨온 요한이 계시록의 메시지를 비축하고 전달하는사명에 직면하였을 때 새로운 도움이 필요했다는 사실을 의미 심장한 것이라고 느꼈다. 그래서 요한은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계 1:10)라고 선언하였던 것이다라고 해석한다.
기름부음에는 회중이 포함된다. 로이드 존스는 자신의 회중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그가 자신의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은, 가끔 그들을 언급하면서 나타내보이는, 사랑이 가득한 태도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차가운 피' 를 가지고는 설교할 수 없다는 논평은 회중이 없이는 설교할 수 없다는 암시인 것이다! 오늘날과 같은 대중 매체의 시대에도 그 의미는 언 뜻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불합리한 것이 아니다. 회중없이 카메라나 마이크 앞에서 말하는 것은 설교가 아니다.
일단의 사람, 즉 청중이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설교의 본질적인 요소이다. 그 것은 단순히 사람이 모여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임재해 계신 것이다. 이것이 교회의 위대한 신비이다. 하나님을 경배하며 복음의 선포를 듣기 위하여 함께 모인 그리스도인들의 그 분위기 자체에 무엇인가가 있는 것이다.18)
즉 로이드 죤스는 설교를 하나의 사건으로 이해하면서 청중이 설교를 이루는 하나의 조건이 되며 그것은 성령의 역사 하심과 기름 부으심에도 연결된다고 믿는 것이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은 설교자와 청중 전체에 이루어진다. 그 설교에 기름 부으심이 임하는 것이다. 성경을 사용하고 강해를 시도한다고 해서 설교의 조건이 갖추어지는 것은 아니다. 회중의 존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강단과 회중석 사이에는 상호 작용이 있다. 설교자에게는 회중의 공감과 기도가 필요하다.-한 번은 로 이드 존스가 그의 회중에게 중보 기도의 중요성을 인식할 것을 도전하였다. "여러분은 복음 설교자들에게 성령의 능력이 임하게 하기 위하여 얼마 나 많은 기도를 하십니까? 여러분은 이것에 관하여 중보 기도를 하십니까? 여러분은 이것에 대하여 관심이 있으십니까? 그는 보통 자서전에서는 보기 드문 어떤 사건 하나를 이야기하였다. 그것은 가정 예배 때 성공적으로 설교하고 나서, 그로부터 몇 주 후에 다른 교회에서 그 동일한 설교를 전한 것에 관한 이야기이다. 동일한 자료를 사용했는데도 불구하고 성공과 복은 동일하게 반복되지 않았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어쨌든 첫 번째 경우에는 당신의 그 하찮은 설교가 취해졌고, 당신은 비상한 방식으로 특별한 기름부음과 권위를 받았으며, 따라서 그런 예외적인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가능한 이유 두 가지가 제시된다. 결국 그것은 대단한 설교가 아니었는데, 두 번째 경우에 당신이 성령의 특별한 부어 주심이 없이 그 설교에 의지했거나 혹은 기름부음이 당신의 회중에게 의존하여 있었던 것이다. 첫 번째 경우, 당신은 그들에게서 무엇인가를 받았다 그러나 두 번째 경우에는 회중과 당신 사이에 아무런 교감이 없었던 것이다. 설교자는 회중에게서 무엇인가를 받아야 한다. '거기에는 상호 작용, 행동과 반응이 있으며 이것은 흔히 매우 본질적인 차이점을 만든다...청중의 적극적 반응과 열심은 그를 고양시키고 생기를 준다.' 그는 이것에 열려 있어야 하고 그것을 기대하고 있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는 '설교자에게 오는 가장 영광스러운 복 가운데 하나를 상실할 수도 있다.19) 정리하여본다면, 지금까지 제시한 요점 여덟 가지는, 로이드 존스가 강조하는 기름부음의 일반적인 특징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근본적으로 기름부음은 설교자에게 추진력을 주는 것이다. 그것은 설교 행위를 특별한 것이 되게 한다. 이 말은 설교를 준비하는 과정에서는 기름부음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연구하는 동안에도 설교자의 마음과 심정이 활력을 얻고 따뜻해지는 것으로 기름부음이 올 수 있다. 그렇다면 신약성경으로 들어가서 주님과 제자들이 설교 사역에 착수하던 때에, 성경이 그들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지 살펴보자.
2.우리 주님의 경험
로이드 존스는 주님의 사역을 자기 주장의 닻으로 삼았다. 주님은 고향 나사렛에서 전파하기 시작하셨다. 거기서 그 분은 구약 성경 두루마리들 중 이사야의 예언을 포함하고 있는 부분을 넘겨 받으셨다. 의도적으로 그리고 적절하게 주님은 이사야 61장을 펴서, 예배자들이 듣는 가운데 이렇 게 기록된 곳을 읽으셨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 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눅 4:18). 두루마리를 맡은 자에게 주시고, 주님은 당시의 관습대로 앉으셔서 설교를 시작하셨다, 그 분의 서두는 진정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설교 속에서 주님은 두 번이나 이사야의 예언이 지금 막 실현되었다고 선언하셨다.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눅4:21). 이 모든 일은 우리 주님이 요단강 가에서 사촌인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의 강림을 경험하신 이후에 벌어졌다. 성령의 강림은 비둘기에 의하여 가시적으로 확증되었다(눅 322). 그런 연후에 주님은 광야로 이끌려 나가셨다. 거기에서 주님은 40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셨는데 그 절정은 시험이었다, 주님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눅 4:1>광야로 들어가셨고, '성령의 권능으로 (눅 4:14)고향 갈릴리로 돌아오셨다. 고향의 회당에 오신 주님은 이사야의 그 구절들을 인용하심으로써 자 신에게 일어난 일을 설명하셨다. 즉 주님은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것이다. 구약 성경으로 돌아가 잠깐 살펴보는 동안에 우리는 기름부음이 제사 장들과 왕들이 각각 일에 착수할 때에 그들에게 부어진 어떤 것이었음을 알았다. 제사장, 선지자, 왕이라는 세 직책은 주 예수님에게 수렴된다. 세 가닥의 흐름이 한 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솔로몬보다 더 큰 왕이시며(눅-모세와 그의 집보다 더 우월한 대제사장이시며(히 3:3: 4:14),'마지막 날' 에 하나님이 그를 통하여 마지막 메시지를 주실 대선지자인(히 1.2)것이다. 로이드 존스의 근본적인 질문은 우리 주님에게 내리신 성령이 주님의 그 이후 사역에 어떤 영향을 미쳤느냐는 것이다. 독자들 중에 아직도 로이드 존스의 입장이 그의 설교 사역의 말기에 가서 바뀌었다고 느끼는 이가 있다면: 그의 초기의 글과 말기의 글 모두가 이 문제와 씨름한 사실을 지 적하고 있음을 주목하라. 예를 들면 1~50년대 초 캐나다에서 열린 한 학생 집회에서는 동일한 질문을 제기하고 나서, 요한복음을 가지고 행한 후 기의 설교에서 그가 제시한 것과 똑같은 대답을 했다. 이 두 번의 경우가 사상, 논리, 결론 그리고 심지어 어투에서까지 비슷하다는 사실은 참으로 괄목할 만한 것이다" 로이드 존스는 주님이 세례의 경험 이전에 설교하지 않으셨음을 주목하였다. 주님에게는 공적인 설교 사역을 시작하기 위하여 성령 세례가 필요하였던 것이다. 로이드 존스는 성령께서 우리 주님을 인치신 것이 언급된 경우를 제시함으로써 자신의 결론에 힘을 더하였다. 그는 성령의 인침과 세례를 동일 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오천 명을 먹이신 일이 있은 다음날 주님은 그 이 적을 언급하셨다. 그러나 그것은 제자들을 향한 혼잣말 이상의 말씀이었다, 주님은 아버지께서 자신을 위하여 하신 일을 말씀하셨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요6:27>.
로이드 존스는 에베소서를 가지고 설교하던 초기에도 그가 가르치던 내용과 명백한 일관성을 유지한다 아들의 인침은 성령의 강림에 의하여 표시되었다, 로이드 존스는 성자 위에 성령을 보내시던 성부 하나님이 요단강에서 성자를 인쳤다고 논증하였다. "거기서 그는 성령 충만을 받았다."
비록 그가 여전히 하나님의 아들이며, 영원하시고 성부와 동등하신 하 나님의 아들이시지만, 그는 스스로를 제한하셨고, 종의 형체로 오셨으며, 인자와 구주로서 그의 사역을 하실 수 있기 전에 성령의 능력이 필요하였던 것입니다.,,,우리 자신과 관련하여 이 용어의 의미를 숙고하게 될 때 이 사실은 참으로 도움이 됩니다. 이 용어는 우리 주님에게 의미했던 것과 똑같은 것을 우리에게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 용어 는 우리가 참으로 확증될 수 있다는 것, 즉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의 아 들이라는 사실이 명확한 표지들에 의하여 확립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로이드 존스는 인침에 관한 웨스트코트(westcott)감독의 정의에 찬성하였다. 인침이란 '임무 완수를 위하여 엄숙하게 구별되며, 명확한 표지들에 의 하여 확증되는 것이다. 우리 주님의 세례 시에 일어간 일이 바로 이것이 다. 그 체험은 주님에게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이었다. 실제로 그 체험은 주 님을 공적인 사역에 착수하게 하였다. 로이드 존스는 이 사실을 기초로 삼았다. 만약 그런 능력의 내려 주심이 하나님의 아들에게 필요하였다면, 일반 신자들 그리고 특별히 설교 사역을 위하여 부름받은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더 필요하겠는가!
우리 주님 자신도 성령의 이런 내려 주심을 받지 않았다면 구원의 복음 의 증인으로, 선포자로, 증거자로 행동하실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성령 세례의 목적임을 여러분에게 보여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6. 청교도의 설교와 성령의 상관성
그렇다면 설교와 성령의 상관관계를 청교도들은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가를 요약하여보자.
물론 이 양자의 모범적인 조화를 우리는 우리 시대와 가장 가까운 청교도 로이드 죤스를 통해 살펴보았다. 그들은 첫째, 설교가 성령의 사역임을 인정하고 적용했다. 그리하여 설교사역 자체를 인간의 일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일로, 더 구체적으로 초대교회에 임하신 성령의 사역으로 간주했다. 성령은 설교를 위하여 임하신 영이라는 것이 청교도 설교의 기본 정신이다.
둘째, 청교도들은 설교의 필수 요소로써 말씀과 함께 성령을 들었다. 성령의 존재와 역사 하심없이 설교는 불가능하다. 성령의 존재가 설교의 본질을 이루고있기 때문에 진정한 설교는 성령의 감동과 역사 하심이 필수적으로 들어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설교자는 이 사실을 명심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사모하며 이론적인 말씀 준비 뿐 아니라 기도와 경건 생활을 통한 성령과의 교제에 헌신해야한다. 성령 충만한 설교자의 삶과 인격이 성령 충만한 설교를 낳는다. 셋째, 설교를 통해 열매를 맺고 변화를 이루어 내는 것, 특히 구원과 중생의 역사를 이루어내는 일은 전적으로 성령께 의존한다. 성령은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신다. 그러므로 설교 또한 분명한 목표를 향해 날아 가야한다. 그리고 목표를 이루어 내는 것은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이며 설교자 자신은 수동적인 도구임을 인정하고 목표를 향해 설교를 전진해나가는 성령의 인도 하심에 민감해야 한다. 수종을 드는 자세를 잃지 말아야한다.
이외에도 여러 가지 청교도 설교에서 드러나는 성령의 역동성이 있겠지만 로이드죤스를 통해 가장 부각된 세 요소는 위의 세 가지 라고 간추려본다.
3. 결론
설교는 성령에 의해 잉태되고 준비되며 그것은 말씀에 의해 사로잡힌 설교자에게 능동적으로 임하여 결국 설교의 현장에서 빛을 발하게 된다. 이것이 교회사가운데서 가장 영롱한 빛을 발한 시기중에 청교도시대가 있다. 그 정신은 19세기의 영국교회를 거쳐 20세기 문턱에서 부흥을 갈망하는 한 의사출신의 설교자에게 전달되었다. 오늘날 다시 현대는 말씀과 성령에 공히 사로잡힌 설교자를 찾고 있다. 한국교회에 더더욱 필요하다. 누가 응답할 것인가! 설교에 성령의 기름부으심의 역사는 먼저 설교자에게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있을 것을 요구한다. 이것이 청교도 정신이다.
1960년대는 로이드 존스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힘든 10년이었다. 마치 부흥이 막 임할 것 같은 분위기를 느끼고 있었던 복음주의자들과는 달리 로이드 존스는 영국의 영적 상황이 점점 악화되고 있음을 확신하고 있었다. 여러 곳에서 강의했던 로이드 존스의 강연들을 살펴보면 여러 가지 전선에서 문제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으로는 1950년대에 로이드 존스의 자극을 받아 청교도 대회등을 통해서 교리의 중요성을 새롭게 발견한 젊은 사람들 가운데서는 교리만을 강조하는 정통주의적인 성향으로 빠질 위험성이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로 인해 로이드 존스는 교리 공부의 필요성을 강조하던 이전의 강조점을 바꾸어 교리만으로는 충분치 않음을 역설했다.
또 다른 한편으로 로이드 존스의 성령의 능력에 대한 새로운 신뢰의 강조를 듣고서 광범위한 은사의 회복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로이드 존스는 이러한 은사주의자들이 자신이 말한 부흥의 참된 본질적 의미를 손상시키고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가장 심각한 문제는 교회연합(에큐메니칼) 운동으로 발생한 교회론 문제였다. 에큐메니칼 운동은 진리의 우선권을 문제삼을 뿐만 아니라 영적 일치는 어떤 외형적인 하나됨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에 복음주의는 다양한 교파로 흩어져서 존재할 수 있다는 복음주의 주장에 도전을 하고 있었다.
에큐메니칼 운동은 교파의 연합을 목표로 함으로써 영적이며 교회의 양면성에 기초를 둔 일치를 만들어내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로이드 존스는 당대의 에큐메니칼 운동이 가져온 이러한 상황에 대해 가장 심각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이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강하게 표명했다. 이러한 로이드 존스의 답변은 영국의 복음주의의 분열이라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제 이 문제를 조금 상세하게 살펴보도록 하자.
에큐메니칼 연합이냐? 복음적인 연합이냐?
영국의 복음주의자들에게 1960년대는 부흥이 아니라 논쟁의 10년이었다.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논쟁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교회연합의 문제였다. 에큐메니칼주의자들은 교회연합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을 이미 확실하게 정리해두었다. 홍수처럼 쏟아져 나온 논문과 책과 토론과 회의들은 한결같이 존재하는 모든 교파를 하나의 교회로 통합하려는 목적은 선하고 옳은 것이라는 견해를 고수하고 있었다.
1964년에 노팅함에서 열린 한 영국 교회협의에서는 '1980년 부활절까지는 하나의 교회‘를 만들자고 말할 수 있었다.남아있는 문제라고는 어떻게 이러한 목적을 이룰 것인가에 대한 수단의 문제였다. 그러나 복음주의자들에게는 교회연합이라는 문제 자체가 시작일 뿐이었다.
로이드 존스에게 있어서는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단순한 반대보다는 어떻게 참된 연합의 필요성을 느끼게 해 줄 것인가 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문제였다. 그러나 복음주의에서 차지하고 있던 위치상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반대에 있어서 주도적인 역활을 해야 하는 것은 필수불가결한 형편이었다.
로이드 존스가 에큐메니칼 운동과 본질적으로 다른 점은 ‘성경은 그리스도인을 누구라고 하느냐?’에 대한 본질적인 이해문제였다. 로이드 존스가 에큐메니칼 운동을 반대한 가장 주된 이유는 에큐메니칼 운동이 그리스도인의 정의를 너무 넓게 내리는데 있다. 에큐메니칼 운동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정의는 신약성경과는 다른 것이다.
2)복음주의내의 분열의 도화선이 된 로이드 존스의 제2차 영국전국복음주의대회 개회연설
영국 복음주의 교회는 1966년 10월 18일 저녁 웨스트민스트 본당에서 개최된 제2차 전국 복음주의 회의에서 결정적으로 분열되었다. 이 회의의 주체는 복음주의 연맹이었고, 이 단체는 원래 복음주의가 영국내에서 생명력 있게 존속하게 하기 위해서 1846년 처음 조직되었다.
복음주의 동맹이 처음 결성될 당시 복음주의자들은 교파문제에 대한 의견차이가 존재함을 느꼈고 종종 성경의 영감, 선택교리, 천년왕국문제 같은 것에 대한 심각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복음주의자들은 이러한 불일치에 대해서 연합할 분명한 필요성이 있었다. 그래서 1846년의 제1차 전국복음주의회의는 복음주의자들이 서로간의 의견이 다를 때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에 대한 실제적인 8가지 규칙을 만들기도 했다.
제2차 복음주의회의도 이러한 의도를 가지고 모였다. 1966년 회의는 복음주의 연맹에 의해서 조직된 1846년 이래로 영국 복음주의자들의 첫 번째 가장 중요한 모임이었다. 회의의 목적은 복음주의의 연합을 추구한 것이었으나 결과는 복음주의의 분열로 끝났다. 분열의 직접적인 원인은 로이드 존스와 존 스타트의 공적인 대결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표면적인 이유일 뿐 복음주의 안에는 이미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서로 다른 의견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단지 문제가 표면화되지 않고 잠재되어 있었다. 그러던 것이 로이드 존스의 제2차 복음주의 개막연설과 그리고 이 연설에 이어 이 회의의 의장이었던 존 스타트가 공개적으로 로이드 존스의 연설이 비성경적이며, 비역사적이라고 반박한 데서부터 영국복음주의는 공적으로 분열을 가져오게 되었다.
이 문제의 배경과 과정 그 결과 그리고 이 문제가 오늘 우리 한국교회에 주는 의미등을 종합적으로 살펴보기 위해서 먼저 로이드 존스가 행했던 제2차 영국전국복음주의대회의 개막연설을 상세하게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이 연설은 로이드 존스의 교회관을 가장 잘 드러내주고 있는 한편의 강의일 뿐만 아니라 영국 복음주의 역사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사건을 유발시킨 역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원문에는 없지만 소제목을 달아서 강의 전문을 개략적으로 소개하도록 하겠다.
로이드 존스가 개회연설을 하게 된 배경
“제가 말씀드릴 주제는 교회연합입니다. 제가 이 주제에 대해서 말씀드리는 것은 위원회의 요청에 따른 것입니다. 저는 이 연설이 위원회의 요청에 따른 것이라는 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이렇게 하는 것은 어느 누구도 제가 오늘밤 여기에 와서 여러분에게 제 자신의 관점을 은근히 주입하도록 위원회 간부들이 친절과 호의를 제게 베풀었다고는 생각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 위원회 앞에서 나타나서 한 증인으로 부르심을 받은 특권을 저는 가졌습니다. 또한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제 자신의 견해를 진술하였습니다. 저에게 오늘 밤 여기에 와서 많은 공중들 앞에서 제가 지금 여러분에게 말하겠다고 말씀드린 바로 그 문제를 진술해 달라고 요청한 이는 그 위원회 회원 자신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주제로 말씀드리는 데 대한 근본적인 책임은 그들에게 있습니다. 그들은 이미 그것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저에게 그것을 다시 여러분에게 반복해서 말씀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로이드 존스가 생각하는 현시점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교회론 문제
그러나 그 점 때문에 저는 겸연쩍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실로 이런 기회를 갖게 되어서 대단히 기쁩니다. 왜냐하면 오늘밤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 현시점에서 생각하고 직면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문제를 숙고한 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제 방식대로 하였다면 이 집회 전체를 바로 이 한 주제를 위해서 할애했을 것입니다. 다른 주제들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제가 믿기로 이 점은 우리의 다른 모든 난제들을 해결하는 열쇠입니다. 바로 이 순간에 제가 봉착한 난관은 짧은 시간에 그러한 주제를 다루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교회의 본질과 교회 연합문제는 신약성경의 주요 강조점
제가 말씀드린 대로 이 주제가 어찌해서 그처럼 중요한 주제입니까? 한 가지 이유를 말씀드린다면 교회의 문제는 항상 중요합니다. 신약성경 자체에서 교회의 교리에 주어진 탁월성을 살펴보십시오. 초대교회에서 일어난 거의 모든 난제들은 사람들이 교회의 본질에 대하여 결함있는 개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야기되었던 것 같습니다.
또한 특별한 많은 난제들도 교회의 본질에 대한 바른 관점을 가지게 됨으로 단순하게 풀려집니다. 그런 다음에 교회연합의 문제가 제기됩니다. 이제까지 말했던 모든 사람들이 바로 그 문제들을 다루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일반적인 서론의 방식으로 말해진 것을 강조하고 싶다는 말씀밖에는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교회의 연합은 영적이면서 역시 가시적인 문제라고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기도하셨습니다.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세상으로 믿게 하옵소서.
연합은 영적인 것이어야 할 뿐 아니라 눈에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이 우리로 하여금 교회와 교회연합의 문제를 숙고하도록 강하게 강조하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서 숙고해야 한다고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복음주의 연맹이 탄생한 배경
자, 우리는 여기서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로서 함께 모였습니다. 복음적이라는 말은 제한적인 어휘입니다. 그 말은 특별한 의미와 의도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전체 문제에 있어서 특별한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역사에 대해서 잠깐만 간단하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복음주의자들은 100여년 동안 바로 이 문제 때문에 고통을 당해왔습니다. 오늘밤 우리의 모임을 주최하고 있는 바로 이 복음주의 연맹이라는 공회를 생각해 보십시다.
이 공회는 1846년에 탄생되었습니다. 어째서입니까? 존 헨리 뉴만과 다른 사람들이 로마교회로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로마교회로 넘어가는 추세는 바로 이 연맹의 시작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복음적인 사람들은 위험표시를 알아챘고 저희들이 함께 모여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그 후에 자유주의적인 , 또는 현대주의적인 운동, 고등비평운동이 들어왔습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무엇으로 부르기 좋아하든지 간에 그것은 복음적인 사람들의 난제와 문제를 증가시켰습니다.
어떻게 그들은 이 난제를 대처했습니까? 그들은 여러 연맹과 운동들과 공회들을 조직함으로써 그러한 난제들을 대처했습니다. 우리 중 어떤 사람들은 그러한 것들이 옳으냐 그르냐에 대해서 매우 제한된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적인 잠시적 조처로서 또는 세상적인 잠깐 동안의 편의로서라면 그들이 행한 것은 전적으로 정당했다는 데에 우리는 다 찬동할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이 가공할 경향성에 비추어 볼 때 자기들이 함께 모여서 힘을 북돋아주고 믿음 안에서 용기를 잃지 않도록 해주어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에큐메니칼 운동이 초래한 현실에 대한 로이드 존스의 인식
“이 점은 즉시 오늘밤 우리가 다루는 주제로 우리를 인도해줍니다. 저는 여기서 주창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지금 새로운 상황에 처했는데 그 상황은 에큐메니칼운동이라고 알려진 것이 우리 속에 들어왔고 또한 우리 속에서 일어남으로써 매우 큰 영향을 받아 나타난 새로운 성향입니다. 이런 일은 1910년에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주의자들인 우리를 위해서 그것이 긴박한 문제가 되었습니다. 특별히 암스테르담에서 제1차 WCC(세계교회협의회)가 열리던 1948년 이후에 그러하였습니다. 오늘밤 제가 말씀드리는 주장의 본질은 제가 보건대 이 운동이야말로 우리에게 전적으로 새로운 상황을 가져다주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 이후에 전혀 겪지 못했던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고 지적하고 싶습니다. 16세기에 대단한 격변이 있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 후 여기저기서 여러 변화와 운동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다소 정적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그렇지 않습니다. 전혀 새로운 것이 우리 중에 들어와서 전세계의 중한 모든 교단들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이 교단들은 우리들에게 분명하고 공개적으로 말하기를 자기네들은 자기들의 전체문제를 재고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용광로 속에 집어던져 넣어 새로운 세계교회가 거기서 나타날 수 있게 할 각오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에큐메니칼한 교회내의 복음적인 그룹으로 남아있는 것으로 만족할 것인가?
저는 오늘 저녁 여러분에게 하나의 호소를 하고 싶습니다. 저는 여기에 논박하려고 오지 않았습니다. 제 친구들은 제가 논박하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기서 논박하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고 여러분에게 이유를 말씀드리려고 온 것입니다. 저는 입장이 너무 심각하고 너무 긴박하다고 생각합니다.
복음적인 사람들은 오늘날 그 전에 전혀 갖지 못했던 기회를 가졌다고 믿습니다. 제가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가 그 기회를 다시 얻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이 매우 중차대한 순간에 우리가 함께 모였다고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단번에 우리 스스로에게 말해야 하는 어떤 몇 가지 요점들이 있음을 지적하여 드리려 합니다. 저는 다만 이점을 요약할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마음을 향하여 던져야 하는 두 가지 주요한 질문이 있다고 저는 주장합니다.
첫 번째 질문은 우리 복음주의자들이 교회의 복음적인 편에 서 있다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의문의 여지없이 그 동안 전체상황은 포괄적인 전지역을 하나로 묶은 국가교회를 향하여 기울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관점을 다른 사람들 뿐만 아니라 많은 복음주의자들도 취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직면한 첫 번째 질문은 우리가 복음적인 입장에 서서 저항하고, 우리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하며, 그 영향력이 서서히 침투하여 다른 사람들이 자기들의 개념이 그릇되었고 우리들의 개념이 올바르다는 것을 알게 하기를 희망하고 있는가? 우리는 계속 그렇게 해나가는 것을 만족해하는가? 입니다.
우리가 급기야 로마 카톨릭 교회까지 포함시키는 하나의 지역내의 한 보편교회 안에 복음적인 입장을 견지한 채 있는 것으로 만족해야 합니까?
우리는 어디서 출발해야 하는가? 현재의 상황으로부터 출발할 것인가? 신약성경으로부터 출발할 것인가?
두 번째 문제는 이러합니다: 이 전체 문제에 있어서 어디서 우리가 출발해야 합니까? 여기 다시 우리 가운데 틈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현재 상황에서부터 출발하고 그것을 개선하고 최선을 다하여 고치는 것으로 만족하겠는가? 아니면 에큐메니칼 운동의 도전과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도전을 받아들일 각오를 하면서 우리 새롭게 출발하자, 신약성경으로 돌아가자고 말하겠는지요?
이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용광로 속에 모든 것을 집어던질 각오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 새롭게 출발하자, 이미 존재하는 것을 고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말고 새롭게 시작하고 신약교회가 진정으로 어떠한 교회이어야만 하는지 발견하자고 말합니다.
에큐메니칼주의자와 복음주의자의 가장 큰 차이점: 교회의 교리 문제를 우선시 하느냐? 아니면 교회연합문제를 우선시 하느냐?
우리 앞에 당도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교회의 교리문제입니다. 교회는 무엇입니까? 그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이 교회가 무엇이냐에 대해서 명확한 개념을 갖기 전에는 교회연합을 논할 수 없습니다.
여기 위대한 구분이 있습니다. 에큐메니칼 사람들은 교리보다 교제를 앞세웁니다. 우리는 복음주의자들입니다. 우리는 교제보다 교리를 앞에 놓습니다. 사도행전 2:42절에서 우리는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교리)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고 되어 있음을 기억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진수자체입니다.
교회에 대한 유명한 프로테스탄트의 정의는 이러합니다: 교회는 참 교리가 설교되는 곳이고 성례가 바르게 정규적으로 시행되는 곳이며 권징이 시행되는 곳이다. 분명히 우리 복음주의자들은 그리고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교회의 첫 번째 표지인 참된 교리는 무엇인가?
그러면 참된 교리는 무엇입니까? 이미 언급한 바입니다.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에 대한 우리의 관점,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고유한 신성을 역설하는 것-동정녀 탄생, 이적과 초자연적인 것, 그의 속죄, 희생, 대속, 죽음, 그리스도의 문자적이고 육체적인 부활, 성령의 인격과 그 사역 등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구원의 진수가 되는 교리들입니다. 그것이 전파되어야 할 교리요, 교회의 참된 표지로 첫 번째가 되는 메시지입니다. 교회는 이러한 것들을 믿기 때문에 언약 가운데서 함께 모인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들은 그러한 것을 믿을 뿐만 아니라 그 능력을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난 사람들이고 저희들의 일상생활에서 이점에 대한 증거를 보여주는 사람들입니다. 분명히 그것이 교회에 대한 복음적인 관점입니다.
교회분열이란?
자, 이제 그점은 저로 하여금 다음 요점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그것은 교회분열의 죄입니다. 제가 어떤 의미에서 교회분열의 죄라고 말씀드리는가요? 제가 보건대 오늘 현시점에서 우리 앞에 있는 가장 중요한 문제들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로마 카토릭 교회는 우리더러 ‘너희는 프로테스탄트들이니 교회를 분열시키고 있다’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진리를 배반한 교회를 떠나는 것은 교회분열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의무요 다른 어떤 것이 아닙니다.
교회분열이란 무엇입니까? 사도바울이 특별히 고린도전서에서 개요적으로 그려주고 정의하는 바대로 하면 분열을 정당화시킬 만큼 중요하지 않는 문제들 때문에 참된 가시적인 교회의 지체들 간에 분쟁하는 것이 바로 교회분열의 죄입니다.
복음주의자들이 에큐메니칼 운동에 가입하지 않는 것이 교회분열의 죄가 아니라 에쿠메니칼 운동에 가입함으로써 복음적인 연합을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교회분열의 죄다
저와 여러분은 복음적인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본질들에 관해서 찬동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같이 이 한 특별한 집회에 함께 모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시간 거의 대부분을 서로 떨어져서 보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구원의 이처럼 본질적인 문제들을 부인하고 반대하는 사람들과 합하고 그들의 일에 가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과 우리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들과 눈에 보이는 연합을 하고 있습니다. 자, 그것이 바로 죄악입니다. 우리 복음주의자들은 어째서 그렇게 나뉘어져 있습니까? 중요한 교단들 사이에서 나뉘어져 있는 것은 어떤 이유입니까?
만일 우리가 정직하다면 우리중 거의 대부분이 사실상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하나의 출생의 문제입니다. 나는 침례교도로 태어났고, 나는 성공회 교도로 태어났고, 나는 침례교도로 태어났고, 나는 메소디스트로 태어났고, 아니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나는 이러저러한 것으로 태어났다는 식입니다. 내가 거기서 머물고 나는 그것을 위해서 싸울 준비가 되어 있다는 식입니다.
그러한 논리가 얼마나 자주 제기됩니까? 저는 주장합니다. 진정으로 문제되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하나인 우리가 우리 삶의 주요한 율조나 우리 사긴의 대주분을 나뉘어져 있는 가운데 둔다는 것은 다름 아닌 교회분열의 죄를 저지르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진실로 이 문제를 아주 급박하게 대면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기 오늘 이 밤에 모인 여러 복음적인 사람들에게 하나의 호소를 하고 싶습니다. 어떤 이유로 우리는 함께 모이지를 못했습니까? 우리가 그 질문에 답변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이유들이 제시됩니다.
복음전도의 기회를 놓칠 것이니 함께 모이지 못한다는 식의 말이 들립니다. 그와 같은 종류의 이유가 제시됩니다. 저는 그러한 논리를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에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성령이 어디에 계십니까? 분명히 성령께서는 우리 가 함께 모여 진리를 위해 싸운다면 진리를 영예롭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처해있는 이 모순되는 입장을 이런 방식으로 고집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현시점에 주요 모든 교단들 안에 있는 복음주의자들의 입장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시간 대부분을 자기 지도자들을 비평하는데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그 비평받는 지도자들이 여전히 그들의 지도자인채로 있습니다.
에큐메니칼운동을 반대하고 복음적인 연합을 추구하는 것은 종교개혁자들의 정신을 이어받는 것이다.
사랑하는 친구들이여, 우리는 성경의 믿음을 방어하고 지키는 사람들만이 아닙니다. 과거에 여러세기 동안 이 동일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웠던 영광스런 사람들의 후계자들이며 그 사람들을 현대적으로 나타내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복음적인 사람들로서 이러한 호소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프로테스탄트 개혁자들의 입장에 서 있습니다.
종교개혁이 이제까지 일어났던 일 중에서 가장 큰 비극이라는 이 현대적인 개념을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만일 여러분이 그렇게 말하고 싶으시다면 그것은 비극입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너무나 썩어서 종교개혁자들이 행한 일은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비극은 종교개혁자들의 입장을 떠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비극은 로마교회의 상태였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람들, 즉 청교도들, 언약주의자들, 초기 메소디스트들을 현대적으로 대표하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그 기회를 알 수 있습니까?
복음적인 연합이 이루어질 때 부흥과 영적 각성의 가능성을 기대할 수 있다
이 옛 증거를 기회를 따라서 간헐적으로 유지하지 말고 항상 유지하며 이 나라의 사람들에게 그것을 나타내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고 계시다고 믿습니다. 죄를 깨달을 필요성, 새로운 생명에 대한 필요성,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되는 필요성이 이 때보다 더 큰 적이 없었습니다.
성령께서만이 바로 그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들이 믿음의 본질적이고 사활이 걸린 것들을 나타내 보이느라 대부분의 시간을 쓸텐데 성령께 그러한 교회들에게 복을 내려주시기를 구할 권리가 있을까요? 분명히 성령께서는 당신 자신이 말씀한 복을 주실 것입니다.
만일 그것을 믿는 우리 중 어떤 사람들이 함께 모여 교회들로서 함께 서서 부단히 함께 모든 일을 감당하며 함께 증거를 한다면 하나님의 성령께서 강력한 부흥과 재각성의 역사로 우리에게 임하시기를 기대할 권리가 있다고 믿습니다.
에큐메니칼 운동반대에 따른 예상되는 어려움들
저는 사람들이 어려움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그러한 어려움들을 축소시키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적극적인 원리들을 제시하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가 마땅히 찬동하는 것들입니다.
그 다음에 우리는 그러한 것들을 위해서 더 구체적으로 일해 나가야 합니다. 크고 심각한 난제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러한 난제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바로 이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 중에는 내가 권면하는 것을 하려고 할 때 자기들 앞에 엄청난 과제, 재정적이고 경제적이고 가정적인 난제를 만나게 되는 사람들이나 목회자들이나 교구목사들이 있음을 저도 압니다. 저는 그것을 축소시키고 싶지 않습니다. 제 마음은 그런 사람들에게까지 닿습니다.
만일 우리가 이런 원리들에 입각해서 행동하려 하면 그 큰 난제들이 우리에게 봉착해 옵니다. 그러나 복음주의자들로서 우리가 그 난제들을 두려워할 때가 온 것인가요?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난제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심각한 난제들을 가지고 있었고, 가정에서 쫓겨남을 받기도 하였고 죽음의 위협을 만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기세가 꺾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계속해 나갔습니다. 그들은 믿었습니다. 알았습니다. 진리를 위해서 싸우지 않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나음을 알았습니다.
수세기에 걸쳐서 바로 그러하였습니다. 마틴 루터는 진리를 알았을 때 하나의 문제도 만나지 않았던가요? 물론 만났습니다. 그러나 문제로 말미암아 당황하지 않았습니다. 여러 세대의 모든 순교자들과 신앙 고백자들이 그러하였습니다.
지금은 역사의 대 전환점이자 영광스러운 기회의 날이다
사랑하는 친구들이여, 우리는 거대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역사의 대 전환점에 살고 있습니다. 저는 이미 말씀드렸습니다만 다시 말씀드립니다. 16세기 이후 이와 같은 적이 없었습니다. 지금의 영광스러운 기회의 날입니다. 우리는 수로는 작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남은 자의 교리가 복음적인 사람들 속에서 인기를 얻지 못하던 때가 언제였습니까? 성경 전체에서 그것은 가장 영광스러운 교리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수에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진리와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집으로 가셔서 다시 기드온의 이야기를 읽어보십시오. 또한 때를 따라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통하여 성취하셨던 일들에 대한 다른 많은 예를 읽어보십시오. 수에 관심을 가지지 마십시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를 위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고 복주실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친구들이여,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이여, 우리 그 기회를 포착합시다. 제가 믿는바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읍시다. 우리는 사랑을 가지고 이러한 것들을 대처해 나갑시다. 우리는 큰 은혜를 필요로 할 것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할 필요가 있습니다. 겸손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한 가지 목적, 곧 주의 영광과 그 나라를 위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 이러한 여러 난제들에 대한 참된 해답을 얻게 될 것입니다. 앞으로 몇 년만에 에큐메니칼운동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게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왜냐하면 그 에큐메니칼 운동은 우리로 하여금 운동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교회의 차원에서 우리의 난제를 대면하게 만들었고 사실상 우리 복음적인 교회들이 서로 교제하고 협력하도록 이끄는 효과를 가져왔기 때문에 그렇게 감사할 때가 올지 누가 알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날을 속히 허락해주시도록 기도합니다(시대의 표적 331-346).“
그의 책은 이상하다. 지적인 오만이나 호기심을 만족시킬 양으로 읽으면 정말 맛이 없다. 그의 목적은 지적인 만족을 주거나 철학적인 논리로 사람들을 설득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설교를 듣는 이들을 말씀과 성령 안에서 온전하게 세우려는데 있다. 그러므로 정말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서서 은혜를 받고 성령 안에서 건강해지려는 경건의 목적을 가지는 자의 마음에만 불을 지르는 것이다. 그의 책을 읽을 때는 교회의 회중석에서 은혜를 사모하는 심정으로 설교를 듣는 것처럼 읽어야 한다. 마치 희곡을 읽을 때에 연극 무대를 연상하면서 읽어야 제 맛이 나듯 말이다. 정말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경배하려는 목적이 아니면 그의 책은 읽으나 마나이다.
둘째, 어느 책을 먼저 읽을 것인가?
특별히 어느 책부터 읽으라고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모든 책들이 강한 인상을 남길 것이다. 그러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책을 읽는 좋은 순서를 추천하고자 한다. 먼저 「산상설교」(문창수 역)를 읽으라. 그리고 다음에 「로마서 강해」(서문 강 역)와 「에베소서 강해」(서문 강, 지상우 역)를 읽으라. 그러면 그의 영성, 아니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무엇을 말씀하시고 계신지 발견하게 될 것이다.
더하여 평신도들이라도 「목사와 설교」(서문 강 역)를 읽으라. 그러면 회중으로서 설교를 어떻게 들어야 할 지를 잘 배우게 될 것이다. 그 책들이 너무 두꺼워 무리라고 하는 이들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한꺼번에 그 큰 책들을 다 삼키려 들지 말라. 그냥 한 장(章)만 읽어보라. 그러면 그 다음 장을 읽고 싶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 그러다가 한 권이 끝나고, 그 다음 권을 읽고 싶어질 것이다. 그래서 그를 통해서 전해지는 진리의 깊이로 들어가면 책이 두꺼운 것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경험담을 들려 준 것을 기초하여 내린 결론이다.
셋째, 그의 책을 읽을 때 조심해야 할 것
아무리 보약이라고 할 지라도 그 약재를 한 가지씩 따로 떼어서 추출하여 그것만 사용하면 독약이 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다. 보약은 약초나 약재가 나름의 독특한 효과가 있지만 서로 상호 작용을 하여 조화를 이루어서 전체적으로 몸을 이롭게 하도록 만든 것이다.
복음은 여전히 그 속에 죄에 대한 경계와 그 결과에 대한 거룩한 위협과 전제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복음의 진정한 목적은 사람으로 구원받게 하려는 데 있다. 그는 사람을 살리고 구원받게 하는 복음의 전령이지 사람에게 겁을 주어서 경계만 시키고 끝내 죽이는 율법주의적인 해부 학자가 아니다.
그의 책을 통해서 복음의 능력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와 경륜의 깊이를 알고 결국 자신의 의를 의지하지 않는 겸비한 사람이 되었다면 그의 책을 잘 읽은 사람이다.
결론 - 로이드 존스 목사와 우리의 소망
우리가 그의 영성과 책을 강조하는 것은 그를 숭상하고 우상화 하려는 것이 아니다. 사도 바울과 그의 바램이 그러하듯이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서기’ 위함이고 궁극적으로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신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고 순종하기 위한 것이다. 그 목적을 견지하지 못하면 그 어느 것도 온전한 것이 되지 못하고 우리가 살피고 고심할 이유가 없다.
교회사적으로 보면 로이드 존스 목사와 같은 영성을 지닌 주의 종들이 항상 주어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일이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는 말씀의 사역자로 부름받은 목회자들이 같은 영성을 지니고 사역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 영성의 목회자들을 진정으로 존중하는 한국 교회 성도들이 되기를 간구하자.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부족하고 연약한 자들을 통하여 거룩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긍휼과 사랑의 역사를 진행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아멘.
첫째, 그는 책을 쓴 적이 없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책을 낼 목적으로 책상에 앉아서 원고를 쓰고 다듬고 만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많은 책들이 나왔는가? 모든 책은 그의 ‘입’을 통해서 나온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가 강단에서 외친 것들을 녹취하여 책으로 엮어낸 것이다. 그는 설교 할 때 원고를 완전하게 준비하지 않고 중요한 요지만 조목조목 적어서 그 요지를 기준 삼아 설교를 하였다.
물론 자신이 「목사와 설교」에서 밝힌 것 같이, 그런 방식만이 설교의 유일한 방식이라고 억지를 부리지는 않았다. 사람마다 천성이나 은사나 소양이나 개성이 다를 수 있으니 자기에게 가장 자유롭고 편한 방식을 택하라고 권고한다. 강단에서 자유로움을 상실하면 어느 방식이든지 그 사람에게는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설교자는 강단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할 수 있도록 자유로움을 견지할 것을 간곡하게 당부한다.
성경 강해서가 아닌 「목사와 설교」(Preaching & Preachers)나 「인간 조건과 의사 자신」(Human Condition and Doctor Himsel; Miraculous Healing)의 경우에도 원고를 준비하여 낸 책들이 아니다. 그것도 녹취록이다. 「목사와 설교」는 1971년 미국 필라델피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2주 동안 특강 형식으로 전한 것들이고, 「인간의 조건과 의사 자신」도 영국 내 기독의사협회 연례 컨퍼런스에서 여러 해에 걸쳐 고정 특별 강사 자격으로 연설한 내용들을 녹취하여 묶어낸 것이다.
하나의 예외적인 경우가 있기는 하다. 그의 초기 목회지 웨일즈 샌드필즈의 선진운동교회(Foward Movement Hall)에서 복음 전도적인 메시지를 책으로 묶어 낸 것이 「복음전도 설교」(Evangelistic Sermons)인데, 그 책만이 설교를 하기 전에 완전 원고를 준비하였다. 그러나 이 경우도 설교 자체를 목적으로 한 것이지 나중에 책으로 낼 것을 생각하며 원고를 작성한 것은 아니었다.
둘째, 그는 설교자와 설교(說敎)를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믿었다.
그는 정말 하나님께서 소명을 주셔서 세우신 설교자와 그 설교를 믿는 사람이었다. 이것은 그의 사역과 영성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점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설교자로 부르셨다는 확신을 가지고 성령 안에서 전력투구(全力投球)하여 그 소명에 충실하기 위해 혼신을 기울였다. 그는 또한 자신이 설교자로 부르심을 받아 섬길 수 있다는 것을 여간 특권으로 여긴 것이 아니다. ‘설교자가 된다는 것은 사람이 지상에서 받을 수 있는 소명들 중에서 최상의 소명이다’라고 말했다.
그러한 지각은 설교자로 서있는 것이 얼마나 큰 책임을 내포하고 있는 것인지, 설교자를 통해 하나님께서 당신의 나라를 위해 일하시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것을 체험하는 것이 얼마나 즐겁고 위로가 되는지를 함께 견지한 것이다.
설교자와 설교의 필요성에 대한 의식이 상대화 되어가면서 심지어 설교자의 위치에 대해서까지 회의적이었던 20세기 전반의 추세를 거스리고 그는 설교자의 위치와 설교의 우위성에 대한 확신으로 맞섰다.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에 합당하게 설교하는 것과 교회의 진정한 부흥은 항상 맞물려 있다는 것을 믿었던 것이다. 마치 능한 궁사(弓師)가 눈을 부릅뜨고 과녁의 정 중앙을 겨냥하면서 화살이 과녁의 정통을 맞힐 것이라는 흥분어린 기대감과 확신을 가지고 살을 쏘듯이 강단에서 확신과 기대감을 가지고 설교를 하였다. 그리고 그 확신은 설교 사역과 열매를 통해서 옳았음이 확인되었다.
셋째, 그는 성경의 절대적인 권위와 오늘도 성경으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믿었다.
설교자와 설교에 대한 그의 믿음은 바로 성경의 절대적인 권위에 대한 믿음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그가 소명을 받고 설교자로 처음 사역을 시작할 때가 1927년으로 28세였다. 당시 영국의 상황이나 국제적인 상황은 대단히 혼미하고 앞을 내다보기 어려웠다. 사회적으로는 이데올로기 논쟁이 가열되어 있었고, 경제적으로는 1930년대의 경제 대공황(大恐慌)을 직전에 두고 있었다. 국제적으로는 전운(戰雲)이 짙게 드리워 있었다.
교회는 자유주의 신학으로 타격을 받아 강단에 선 설교자들이 성경을 뒤로 던져 버리던 시대였다. 기존에 성경에 대해서 가지고 있었던 경외감도 사라지고 시대에 맞는 새로운 처방을 찾느라고 분주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해결하기에는 성경은 더 이상 적실성(的實性)을 갖고 있지 못하고, 그것을 대체할 다른 권위를 창출해야 한다는 의식이 교회 안에 팽배해 있었다. 교회가 휴머니즘적인 일반 인문 과학이나 정신 의학 등의 영역에서 새로운 권위의 척도를 찾으려고 기웃거린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설교자들은 성경 말씀이 아니라 대학 교수나 각 분야의 전문적이고 지도적인 인물의 말을 가지고 강단에 올라가 회중에게 각색하여 전하는 것이 시대를 아는 설교자의 임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는 정반대의 입장에 확고하게 서있었다. “아직도 성경은 예나 지금이나, 성경이 처음 쓰여질 때나 교회사의 어느 시대 속에서나, 지금 이 20세기의 복잡한 사회 현실 속에서도 여전히 동일한 권위를 가진 정확하고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은 시대에 뒤떨어진(out of date) 것이 아니고, 항상 최신식(up to date)이다.” 이 확신은 그의 초기 사역(1927년)부터 사역의 마침(1968년)에 이르는 41년간의 사역 기간 동안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그리고 1968년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채플 교회의 담임 목사직에서 물러 난 후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한 1981년까지의 기간 동안 힘이 닿는 데까지 그 확신을 후배 사역자들에게 부각시키려고 애를 쓰며 사역에 전념하였다. 담임 목사직에서 물러난 후 설교로 증거된 말씀을 책으로 내기 시작한 것도 그러한 일의 일환이었다. 그는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 설교할 때 이렇게 이야기했다. “성경은 오늘 이 밤 런던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The bible tells us what is happening tonight in London.)
넷째, 그의 설교는 전부 성경 강해였다.
그의 설교는 단순한 에세이(essay)가 아니라 성경 강해였다. 단순하게 어느 성경 본문을 기초로 설교를 끌어낸 후 설교의 본론으로 들어갈 때는 본문은 더 이상 거론되지 않고 다른 내용으로 채우는 설교 형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또는 본문에서 제목과 설교의 대지(大旨)를 몇 개 뽑고는 그것을 가지고 나름대로 내용을 구성하는 그런 설교도 아니다.
그의 모든 설교는 본문이 결정하였다. 설교자는 성령의 인도를 따라서 센스 있게 임해야 하며, 일단 본문이 결정되면 무엇을 설교할 것인지 결정하는 것은 설교자가 아니라 성경 본문 자체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선입견이나 개인적인 관점 없이 본문과 그 본문이 들어 있는 문맥과 장(章), 더 나아가서는 그 본문 전체를 면밀하게 연구하고 순리적인 해석을 가하여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교훈을 증거하고 현실의 상황에 비추어 적용해야 한다. 글자 그대로 본문의 강해이다. 본문을 통해서 말씀하고 싶어하시는 하나님의 의중을 정확하게 증거하고 적용하여 회중들에게 권고하는 것, 그것이 바로 그가 생각하는 설교의 정형이다.
그것은 지적(知的)인 호기심에 입각해서가 아니라 온전한 믿음으로 성령의 감동 아래에서 해야 한다. 성령께서는 바로 그러한 설교자를 통해서 당신의 사람들을 구원하시고 먹이시고 기르시고 가르치시고 지도하신다. 그것이 바로 그의 설교관이며 목회관의 핵심이기도 하다.
그는 설교 외의 다른 부분에 대해서도 섬세한 관심을 기울였다. 성도들과의 교제를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 성경 연구와 묵상과 기도를 위한 시간에도 성도들이 교제를 원하면 언제라도 반가이 응대해준 자상한 목회자였다. 또한 연약한 자들을 위한 상담도 병행했다. 그럼에도 그의 목회 중심은 설교자로서의 소명을 충실하게 감당하되 성경을 철저히 강론하는데 있었다.
다섯째, 그는 신학교에 다니지 않았다.
그의 애칭이 ‘박사’(Dr)였는데, 그것은 신학 박사가 아니라 의학 박사를 뜻한다. 26세에 성 바돌로매 병원에서 봉직하며 영국 왕립의학회가 주는 흉부외과 전문 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제도적인 신학교에 다닌 적은 없다. 그러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서도 아니었고, 신학의 필요성을 무시해서도 아니었다.
그는 당시의 신학교 커리큘럼과 내용을 보고 ‘이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신학교가 성경을 적극적으로 가르치기보다는 비평적인 입장에서 사변적이고 지나친 주지주의(主知主義)로 흘러갔기 때문이다. 영성은 차갑고 메마른 방향으로 너무 치우쳐 있었다. 당시 신학교의 교육이 하나님께서 목회와 설교자로 부르신 이들을 바르게 훈련하고 사역을 준비하기에는 멀리 벗어나 있었던 것을 직시한 것이다.
그러나 신학을 하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31세에 목사 장립을 받게 되었을 때 노회에서 신학교를 나오지 않은 이 사람을 목사로 장립하는 것이 타당한가라는 의문이 제기되었다. 노회의 지도자들은 한결같이 ‘이 사람은 정규 신학교를 졸업한 이들보다 신학적인 체계와 학식에 있어서 탁월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래서 웨일즈 장로교회 교단의 목사로 장립 받게 되었다.
그러면 그는 어떻게 복음적이고 개혁주의적인 견실하고 온전한 신학 체계를 수립할 수 있었는가? 이것은 우연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 속에서 걸어온 필연의 결과였다. 그가 성경에 대한 절대적인 권위를 의존하며 확실하게 내린 결론은 ‘분명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인 성경의 권위와 능력과 영광이 어떠하다는 것을 드러내실 것이 분명하고, 그런 사례들이 교회사 속에 분명하게 드러나 있을 것이다’였다. 그래서 그는 교회사를 추적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찬연하게 빛났던 시대를 뒤지기 시작하였고, 거기에서 성경을 통해 나타내신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보게 되었다. 특히 16세기 종교개혁 시대,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초엽에 이르는 청교도 시대, 18세기의 영적 각성 시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엽의 영적 부흥 시대 등에 주목하게 된다.
고서(古書)를 취급하는 헌 책방에서 18세기 초엽에서 중엽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영적 각성 시대에 하나님께 주도적으로 쓰임을 받았던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의 전집을 만난 것도 그의 영적인 눈을 활짝 열어주는 전환점이 되었다. 그리고 같은 시대의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존 웨슬리(John Wesley)의 등의 사역에 대해서 함께 연구하였다. 루터와 칼빈과 같은 종교개혁자들과 오웬(John Owen), 리차드 십스(Richard Sibbes), 리차드 백스터(Richard Baxster) 등과 같은 유명한 청교도들에 대해서도 연구하였다. 그리고 찰스 핫지(Charlse Hodge), 워필드(B.B. Warfield)나 그레삼 메이천(Gresham Machen)등 칼빈주의적이고 개혁주의적인 계보에 속한 이들의 저서들을 섭렵하였다. 유명한 성경 주석서들을 연구하였다. 그는 결혼할 당시 결혼 선물로 다른 것은 사양하고 「칼빈 전집」과 「존 오웬 전집」을 요구하였다고 한다.
아울러 하나님께 쓰임 받았던 역대 목회자들의 생애와 설교들을 집중적으로 연구하여 복음의 영광과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 깊은 인상을 받고 성경적인 복음이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 더욱 확실한 지식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성경과 교회사 속에서 하나님께 쓰임 받은 이들의 체험과 열매가 완전한 일치를 이루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성경의 권위에 대해 철저히 인식하게 되었고, 그것이 설교 속에 용해되어 선포되었다.
설교자는 반드시 성경의 해석자이어야 한다. 그의 임무는 두 가지 과정을 포함한다. 첫째는 본문이 본래적인 청중에게 무엇을 의미했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다음은 본문이 신자들의 실존적 현재에 대해서 무엇을 의미했는지를 파악해애 한다. 첫 과정을 해석(exegsis), 두번째 과정을 해설(exposition) 이라고 부른다. 전자는 의미에 후자는 의의에 관심을 둔다. 로이드 죤즈는 해석과 해설이란 두 용어를 구별없이 사용하지만 그는 항상 본문의 정확한 의미를 다루고 나서 그 의의를 살핀다. 설교자가 설교하기 전에 본문에 대한 만족할 만한 이해에 도달해야 한다고 로이드 죤즈는 강조한다. 그러면 '만족할 만한 이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에게 있어서 만족할 만한 이해는 진리에 대한 지적인 이해와 동시에 진리에 대한 포용을 의미한다. 본문의 진리를 참으로 이해한다면 거기에 상응하는 열정이 있어야 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신자로서 우리는 바울서신을 감동없이 읽을 수 없습니다. 감정이 우리를 휩싸고 사로 잡아야 합니다. 그러할 때 우리가 서신서에 나타난 진리를 아는지 판별 할 수 있습니다." 즉 진리의 이해와 포용은 하나님 말씀의 만족할 만한 이해라는 나눌 수 없는 전체의 두 측면인 것이다.
2.분석적 접근
1)본문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라.- 로이드 죤즈는 특정 본문의 연구를 진행시킬 때 그것을 이해하고자 하는 모든 실질적 노력을 다 기울이고 있다. 그는 이렇게 충고한다. "어려운 구절을 대할때 성급히 서두르지 마십시요. 계속해서 끈질기게 읽어 보십시요. 본문에 귀를 잘 기울여 보십시요. 안다고 생각해 왔던 것보다 갑자기 훨씬 더 알게 될 뿐만 아니라 참으로 이해하게 되고 알아듣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읽어야만 합니다. 연구해야 합니다. 묵상해야 합니다. 우리의 지각을 사용해야 합니다. 진리와 더불어 씨름하십시요. 진리를 깨닫기 위해 달라붙으십시요. 여러분이 기꺼이 알려고 하는 마음, 참 욕구를 가진다면 성령께서 여러분을 도우신다고 확신합니다."
2)본문 구조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라. - 본문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으로 본문의 구조를 분석하는 것보다 더 유익한 방법은 없다고 로이드 죤즈는 믿었다. 왜냐하면 바울의 편지들에는 반드시 특정한 구조가 있으며 팔복 등에도 특정 순서가 있기 때문이다. 문장마다 우연히 거기에 배치된 것이 아니고 영적, 논리적 귀결에 따라서 성령의 영감으로 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분석적 접근의 목적은 본문에 내재한 특정한 구조를 발견하는 것이며 거기에 따라 본질적인 메시지를 파악하는 것이다.
분해는 반드시 자연스러운 것이어야 하고 인위적이어서는 안되며 본문에서부터 나온 것이어야 한다. 무리한 분석은 피해야 하지만 할 수 있는 한 세밀히 분석해야 한다. 이 분석으로부터 로이드 죤즈는 본문의 개략적인 구조에 대한 관찰로 나아간다. 로이드 죤즈는 대개 설교마다 본문분석을 하고 있다. 그의 설교에서 분해의 기능은 본문에 대한 배경과 해석적 정황을 제공하는 것이다. 분해하는 과정에서 일반적인 분석을 개별적인 분석보다 먼저 하는 것이 더 좋다고 권하고 있다. 그는 맨 먼저 전체에 대한 일반적인 분석을 하고, 그 다음 문단에 대한 개략적인 분석을 한 다음 마지막으로 세부적인 부분에 대한 세밀한 분석을 한다.
3.문법적 접근
문법적 접근의 목표는 문법의 규칙에 따라서 의미를 결정하는 것이다. 로이드 죤즈의 문법적 접근은 단어나 구절이나 문장의 단순하고 평범하고 일상적인 문자의 뜻을 살피는 것이다. 그는 문자적인 의미가 뒷받침 되지 않은 본문 해석의 타당성을 부인한다. 이 문법적 접근의 배경에는 성경의 영감교리에 대한 강한 확신이 깔려 있다. 이 문법적 접근이야말로 본문의 정확한 이해에 도달하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그가 실제로 어떻게 문법적 접근을 했는지 살펴보자
1)원본과 역본에 대한 고려 - 그는 해석의 실제 과정에서 원문을 계속적으로 살피며 샐략되어 있거나 잘못 번역되어 있는 단어를 찾아 낼 뿐만 아니라 원본에 사용된 정확한 단어가 무엇인지 밝히기도 한다. 원본에 대한 고려와 함께 그는 여러가지 번역본들을 살펴본다. 강단에서는 흠정역 성경을 사용하지만 연구를 할 때는 여러가지 다른 번역본들을 활용한다. 원문에 좀 더 가까운 번역을 찾기 위하여, 또한 좀 더 분명한 의미를 밝히기 위하여 사용한다. 때로는 역본에 생략된 단어들과 부정확한 번역들을 지적하기도 한다. 그는 대체로 흠정역의 번역을 선호하지만 새번역의 가치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 자신이 새번역을 사용하지만 주의해서, 그리고 비판적으로 사용한다. 어떤 번역은 이미 번역자들의 신학적 편견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뻔역이라기보다는 해석이 되고 말았다는 지적을 하고 있다.
20문법의 기본 사항에 대한 고려 - 로이드 죤즈는 헬라어에 대한 상당한 지식을 갖고 사용하고 있다. 그는 끊임없이 헬라어의 성, 수, 격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자주 동사의 시제나 태에 관심을 쏟는다. 특별히 본문의 의미를 밝히는 과정에서 문법적 지식을 자주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원어 지식은 중요하지만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말한다. "이는 설교의 기술적인 부분으로 대단한 것도 아니고 치명적인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중요합니다."
3)어휘론적 측면에 대한 고려 - 개별 단어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위하여 로이드 죤즈는 원어사전(Lexicon)응 사용한다. 그의 설교집에 인용된 사전으로는 Water Bauer Lexicon과 그림-데이어lEXICON이 나온다. 로마서 3장 25절의 "화목"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보면 단순히 한 단어의 가느한 의미를 찾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전체 가르침을 살피므로 정당한 통시론적 언어 연구의 좋은 예를 발견할 수 있다.
헬라어 단어의 의미를 결정하기 위하여 그는 통시론적 언어학 뿐만 아니라 공시론적 언어학도 활용하고 있다. 물론 그는 이와같은 전문용어를 사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의 설교를 보면 이와같능 활용을 여러곳에서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동일한 단어의 활용의 예를 살펴봄으로서 이 말을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신약의 빛 속에서 이 말은 --- 그러한 의미와 함축적인 뜻으로 대개 사용되고 있습니다."
4)구문론적 측면에 대한 고려 - 로이드 죤즈는 연결의 문제 즉 접속사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인다. 그의 설교에서는 여러가지 접속사의 기능을 계속적으로 설명한다. 그의 설교에서 몇개의 예를 살편본다. "그러나라는 단어는 접속사입니다. 하지만 그 단어는 항상 대조를 시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연결과 대조를 봅니바." "우리 주님께서는 왜냐하면 이라는 단어로 그것을 강조합니다. 이 단어는 핳상 어떤 것에 대해 주의를 하게 하며 진지함과 중요함을 보여줍니다." "그가 사용하는 논리를 주목하여 보십시요. '그러므로' - 교리에 비추어서 실제 삶을 살라는 말입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사도 바울의 글에 나오는 '그러므로'라는 말이나 '그런즉' 이라는 말의 중요성을 알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사도 바울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는 롬3:21의 '그러나 이제는' 이라는 접속사를 주제로 몇편의 설교를 하기도 하였다. 이와같이 그의 해석 실제를 살펴보면 접속사는 때로 본문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열쇠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접속사는 단어나 문장이나 문단에 포함된 사상들을 연결시켜 주기 때문이다. 5)형태론적 측면에 대한 고려 - 로이드 죤즈는 바울의 논증을 설명하면서 그의 문체의 특성에 관심을 기울인다. 뿐만 아니라 단어의 어순이나 무엇을 강조하는 본문인지에 대하여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이와함께 바울서신에 나타나는 독특한 문법적 형태인 파격구문이나 곡언법 등에 대하여서도 본문의 의미를 정확히 하기 위한 필요에 의해 분석하고 있다.
6)해석 역사에 대한 고려 - 특별히 어려운 본문의 의미를 알기 위해 로이드 죤즈는 그 본문에 대한 해석 역사를 살펴보고 있다. "성경에 나오는 어렵고 혼란스러운 주장에 봉착하면 권위있는 자들의 의견을 살펴보고 교회 역사를 살펴보며 우리 앞에 산 사람들의 경험과 해석을 살펴 본다는 것은 매우 좋은 방안입니다." 그는 로마서 7장14 - 25을 해석하는데 있어서도 역사적으로 어떠한 해석이 있었는지를 먼저 살피고 있다.
4.문맥적 접근
문맥적 접근을 생각지 않고 강해 설교가로서 로이드 죤즈를 생각 할 수 없다. 그는 언제나 문맥을 염두에 두고 본문에 접근하며 언제나 문맥적 접근을 해석의 척도라고 생각한다. 문맥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 형태를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역사적 정황(the historical context)이고 다른 하나는 언어적 정황(the linguistic context)이다. 그러나 이 둘은 서로 겹칠 수 밖에 없다.
1)역사적 정황
1.일반적인 역사정황-로이드 죤즈는 어떤 단어나 구절을 설명할 때 청중의 사고세계라는 정황에서 한다. 예를들면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엡4:8)라는 구절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고대에는 왕이든지 왕자든지 위대한 장군이든지 전쟁에서 이기고 그의 고국으로 돌아오면 항상 승리의 행진이 있었습니다. 정복당한 왕들이나 왕자들이나 대장들이나 장교들은 모두 사슬에 매인 채로 이 행진에 참여해야만 합니다. 정복자는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아' 사로잡힌 적군을 공중에게 구경시킵니다. 동시에 그는 자기 백성들에게 선물을 던져줍니다. 마차를 타고 가며 환호하는 백성들에게 아낌없이 선물을 나누어 줍니다. 동시에 그는 이 정복한 사람듶을 포로로서 이끌고 나옵니다. 이것이 여기에 있는 풍경입니다.
청중의 사고세계라는 정황뿐 아니라 그들의 생활의 정황으로부터 본문을 설명하기도 한다.
2.특수한 역사정황-본문이 형성된 역사적 정황에 대한 그의 고려는 저자와 원 청중의 상황에 대한 지식을 요구한다. 로이드 죤즈는 그의 산상보훈 설교에서 첫 설교를 산상보훈 전체의 배경과 서론을 제공하는데 할애한다.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설교에서 로이드 죤즈는 본문을 그 특수한 역사적 정황-말하는 사람으로서 주님과 그의 청중의 역사적 정황에서 설명한다. 이와같이 로이드 죤즈는 일반적인 일반적인 배경에 주의를 기울일 뿐만 아니라 각 편지의 특별한 정황도 생각하며 본문을 그 특별한 정황 내에서 설명한다.
2)언어적 문맥 - 로이드 죤즈가 문맥을 언급할 때에는 특정한 본문이 나타나는 언어적 문맥을 주로 의미한다. 여기서는 그가 최소한 네가지 문맥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살펴 보겠다.
1.근접한 문맥-로이드 죤즈는 본문의 의미를 근접한 문맥에 비추어서 이해한다. 그는 본문 앞 뒤의 문맥을 자세히 관찰하여 본문 이해의 척도로 삼는다.그는 사본상 차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근접한 문맥을 사용하기도 한다. 때로는 어떤 헬라어 단어가 순수히 언어적인 입장에서 두 경우로 번역이 가능할때 택일하기 위해 근접한 문맥을 활용한다. 또 만약 한 본문을 해석하는데 두 가지 선택이 있다면 로이드 죤즈는 근접한 문맥에 의하여 그것을 결정한다. 그리고 만약 한 단어가 성경 여러 곳에서 여러가지 의미를 가질때 그는 근접한 문맥이 그 의미의 정확한 측면을 보여준다고 믿는다. 많은 잘못된 해석은 문맥을 무시하고 단어나 구절에만 집착한 결과라고 로이드 죤즈는 주장한다.
2.주제별 문맥-때로는 몇 구절로서 하나의 주제별 문맥이 형성되기도 하지만 대개는 한 장을 이룬다. 한 문단 속에 있는 중심 주제에 의한 해석은 로이드 죤즈의 특징에 속한다.
3.특정 저서 및 저자 단위의 문맥-그는 로마서나 에베소서 강해에서 동일한 저자의 병행구절이나 전 정경적 문맥을 살피기 전에 특정한 저서 단위의 문맥을 해석학적 단위로서 먼저 살피고 있다.
4.전 정경적 문맥-최종적이고 가장 광범위한 언어적 문맥은 전 정경과 그 범위가 일치한다. 그러므로 그는 다루고 있는 본문을 설명하기 위애서 성경의 다른 부분을 자유롭게활용한다.
2.특징적인 설명방법
1.연속설교
성경의 한 권을 택해 연속설교를 하는 것은 설교할 본문을 찾아야 하는 설교자의 부담을 줄여줄 뿐만 아니라 한 사람의 설교에 강조점의 변화를 가져다 줄 수 있고 동시에 한 교리만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을 피하고 하나님의 말씀 전부를 살펴보게 한다. 그의 중요한 특징인 세밀한 성경 강해는 본문이 특별하게 풍부한 의미를 가지고 있을 때나 우리의 삶에 중요한 의의를 지닐 때 이 방법을 택한다. 그는 설교자의 직무는 사도에 의해 요약된 형태로 주어진 것을 펼쳐 놓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2.일반적인 데서부터 특수한 데로
로이드 죤즈의 설교를 살펴보면 대체적으로 일반적인 데서부터 시작해서 특수한 데로 나아간다. 이것은 로이드 죤즈의 가장 특징적인 설명 방법의 하나이다. 해석을 할 때도 동일한 방법을 사용한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교리 전부를 총체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진리를 그릇 이해할 수 있는 위험을 방지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세세한 부분은 전체의 빛을 떠나서는 바로 조명될 수 없다. 우리가 일반적인 주제에 대해서 분명해 질때 우리는 특정 사항을 바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고 믿었다.
일반적인 원리는 그 자체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러므로 반드시 특수한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로이드 죤즈는 동일한 설교 내에서 일반적인 진술로 끝내는 법이 없고 특수한 데로 항상 진행한다. 즉 일반적인 원리를 추론해 내고나서는 구체적이고 세부적이고 특수한 영역에까지 그 진술을 확장해 나가는 것이다.
3.선 부정, 후 긍정
로이드 죤즈는 잘못된 견해가 유행하기 때문에 몇몇 부정으로부터 시작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해설을 제시하기 전에 대안적인 해석을 먼저 고찰한다. 그는 주어진 문제에 대해서 사람들의 마음 속에 일어날 수 있는 예상되는 반대와 어려움들을 내다보고 미리 그것을 부정적인 명제로 진술한다.
기독교의 영광스러운 측면은 그 메시지가 부정으로 끝나지 않고 항상 긍정을 포함하고 았다는 점이다. 그는 말한다."부정은 절대로 필수적입니다. 그러나 만일 복임이 부정적인 데서 멈춘다면 그것은 도덕이지 복음일 수 없습니다. 이것은 도덕이 아닙니다. 이것은 기독교입니다" 이 근본적인 이유 때문에 로이드 죤즈는 기독교의 진리를 부정과 긍정이라는 두 가지 방식으로 설명한다.때때로첫 설교 전체가 부정적인 접근을 하고 두번째 설교가 긍정적으로 접근하기도 한다.
4.반복
그는 참된 이해에 있어서 반복이 필수적이며 좋은 가르침의 필연적 요소라고 믿었다. 로이드 죤즈는 또 본문 자체가 지니고 있는 진술에 충분한 무게를 주기 위해서 반복이 요구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저자인 바울 자신이 그렇게 자주 반복을 하고 있는 로마서와 같은 서신을 설교할 때에는 많은 반복이 있을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반복의 목적은 첫째 사물의 새로운 국면을 소개하기 위해서이고, 둘째 논지의 중요한 핵심을 요약하기 위해서이며, 세째는 강조의 목적을 위해서 반복을 하고 있다.
5.예증
로이드 죤즈는 진리를 명백하고 분명히 하는 것을 돕는데 예증을 사용해야 할 유일한 이유가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예증은 다만 그 목적만을 위해서 주의 깊게 사용되어야지 사람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사용되어서는 안된다. 어떠한 예증이라도 완벽할 수 없기 때문에 예증은 너무 세세한 데까지 강조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다.
로이드 죤즈가 사용한 예증은 수에서도 지극히 적고 예증을 사용할 때에도 매우 주의깊게 사용하고 있다. 그가 예증을 할 때는 필연적으로 해야 하는 경우이다. 그가 주로 사용한 예증은 찬송가, 교회사, 일상 생활, 일반 독서, 목회 경험, 전기 등에서 주로 예증거리를 찾고 있다. 그가 매우 즐겨 사용한 또 하나의 예증은 성경 속의 사건이다.
6.상상
로이드 죤즈는 상상의 가치를 인정하였다. 그는 "상상은 진리를 선포하는데 실질적인 여지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상상은 진리를 생생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상상은 위험할 수도 잇다. 상상이 본문에서 벗어나거나 본문의 의미와 상관없는 측면을 지나치게 부각시킬때 진리보다는 상상만이 남게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항상 상상을 진리에 복종시켰다. 왜냐하면 우리의 임무는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이 진리이어야지 우리의 상상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7.논증
논증이 없는 설교를 로이드 죤즈에게서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물론 로이드 죤즈는 설교의 기본적인 임무가 논쟁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선포하는 것이라고 본다. 동시에 그는 성경은 곳곳에서 논증하고 이유를 밝혀주는 논리로 가득한 책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설교자의 임무는 거기에 있는 논리를 발견하고 활용하는 것이다. 로이드 죤즈에게는 신앙이란 단순하게 신비적인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논리적인 것이다. 그래서 본문 내에 있는 논증을 찾는 것은 본문의 진리 속에 내포된 특징들을 발견하는 것을 의미하고 그것은 이성을 설득하는 능력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그는 논증을 사용하는 것을 옹호한다.
로이드 죤즈의 특징적인 논증 방법 중의 하나는 성경을 활용하는 것이다. 로이드 죤즈는 그의 명제를 뒷받침하기 위해서 많은 성경을 이용한다. 엄청난 양의 그의 성경인용은 그가 성경에 대한 철저한 지식을 가진 사람임을 입증하고 있다. 로이드 죤즈로부터 우리는 성경을 가지고 회중을 교육하고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 때때로 그는 먼저 구약 예언서를 인용하고 그 다음 사도들을 인용하고 마지막으로 주님 자신을 인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순서는 그가 주님께 궁극적인 권위를 부여하는 것을 보여준다. 또 로이드 죤즈는 논점을 지지하는 방편으로 성경 전반을 사용하는 것은 성경의 단일성에 대한 분명한 신념을 나타내 준다.
3.특징적인 적용방법
1.연역적 적용
로이드 죤즈는 교리와 그 교리의 적용 사이에는 불가분해한 결합이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는 균형있는 강던사역은 교리 일변도이거나 적용 일변도여서는 안되며 둘 다 포함해야 하고 바른 순서에 두어야 한다. 교리가 항상 먼저 와야 하고 그 다음에 교리의 적용이 뒤따라야 한다. 그는 적용에 앞서서 교리가 나오는 것은 신약성경의 불변의 법칙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여러가지 면에서 논리의 문제요,연역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러분은 교리에 대해서 분명해 지기 전까지는 적용이나 실천이나 행동이나 경험을 논할 수 없습니다." 달리 말해 그는 명령법 앞에 직설법을 둔다. 직설법에서 논지가 분명해진 다음에 명령법으로 진행한다. 그래서 그의 특징적인 적용 방법의 첫째는 연역적 적용이라고 부른다.
2.범주적 적용
사람들의 영적인 상태는 근본적으로 두 가지 범주만이 있다. 신자와 불신자이다. 그는 항상 이 두 범주의 사람들을 향해서 적용한다. 이러한 범주적인 적용의 목적은 청중들오 하여금 선택하도록 돕는 데 있다. 그는 청중들로 하여금 두 가지 가능성에 직면하게 한다. 그래서 청중들로 하여금 자신의 신앙고백을 시험하도록 강요하여 결과적으로 진리를 받아들이도록 이끄는데 이러한 범주적 적용의 목적이 있다.
로이드 죤즈는 기독교 교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선포되어야 하지만 윤리적인 호소는 성령에 의해서 내적인 수용 능력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만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아직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에게 기독교적 윤리를 실천하도록 요구하는 것은 잘못이며 적용에 있어서 엄격한 구분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직설법의 기초가 없는 명령법은 청중을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도덕주의자로 만들 위험이 있는 것이다.
3.보편적 적용
복음은 사람의 자연적인 차이에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고 로이드 죤즈는 믿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설교자는 자기 앞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성격을 알든지 모르든지 그것은 큰 차이를 만들지 못한다. 왜냐하면 설교자는 그들이 죄인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구원은 특정 문제로부터 벗어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전인'을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두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청중들을 공통 분모로 축소시키고 인간의 근본적인 필요에 대해서 메시지를 적용하는 것이 설교의 필수적인 부분이다. 여기에 다시 한번 '근본적이고 기본적인 진리의 중요성을 파악하는' 로이드 죤즈의 능력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로이드 죤즈의 적용은 '문화와 교육의 정도를 초월한 호소'이며 '생의 영적인 문제를 분명하게 밝혀서 어떤 사람이 들어도 오해하지 않도록' 하는 목적이 성취되고 있다.
로이드 죤즈는 어떤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적용할 수 있는 영속적인 교훈을 발견한다. 로이드 죤즈의 보편적인 적용은 시간과 장소에 따라서 가변적인 인생 문제의 표면적 차원에 기초하지 않고 불변하는 인간의 심층 상황에 기초하고 있다. 이런 점들이 그의 적용을 특별하게 만드는 부분이라고 할 것이다.
4.정황적 적용
앞에서와 같이 많은 성경적 가르침은 아무런 변화없이 현대 상황에 직접 적용할 수 있다. 근본적인 메시지는 오늘날 어떤 문화적인 상황 속에 있는 사람들일지라도 그들이 당면한 근본적인 문제에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재적용의 필요를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재적용의 필요는 원독자의 정황과 현대 청중의 정황이 다를 때에 일어난다. 그러므로 로이드 죤즈는 원리는 언제나 동일하지만 적용은 정황이 다를 때에 다르게 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왜냐하면 소위'1세대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언제나 사실이지만 오늘날의 신자들은 그렇게 단순하게 규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로이드 죤즈는 성경의 원 독자와 오늘날의 독자 사이의 영적 정황이 다르기 때문에 원리를 적용하기에 앞서서 청중들에게 그들이 그리스도인인가에 대한 확인과 점검을 먼저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정황의 차이는 동일한 원리를 상이하게 적용하도록 요청하기 때문이다.
설교자는 마땅히 원 독자의 정황과 현 청중의 정황 모두를 잘 살피는 것이 중요한 의무이다. 이 말을 그때 누구에게 했는가? 이것은 오늘날 사람들에게 직접 적용될 수 있는가? 만약 설교자가 이것을 소홀히 한다면 청중들에게 그릇된 만족감을 주거나 기독교를 도덕 종교로 전락시킬 위험이 있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정황적 적용은 설교자가 두 정황 모두에 대해서 민감할 것을 요구한다. 성경적 메시지를 설명하고 적용하는 것은 이 두 정황이 계속 서로 주고 받는 과정 속에서 상호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적용의 목적이 구체적인 정황 속에서 청중들을 변화시키는 것인 만큼 설교자는 과거의 역사적인 정황에 대한 이해 못지 않게 오늘날 구체적인 정황에 대해 깊이 이해해야 한다. 결과적으로 이 정황적 적용은 옛날 독자들의 정황과 현대 청중들의 정황 양자에 적절한 무게를 두도록 요구한다.
정황에 대한 현대적 강조의 문제점은 두 부류의 사람들의 영적 정황을 완전히 무시하고 두 문화적 정황에 대한 거의 배타적인 관심을 쏟는데 있다. 그러나 로이드 죤즈는 문화적인 정황이 아니라 양자의 영적 상태에 밀접히 관련된 정황을 강조하므로 그들의 잘못을 극복하고 있다.
5.실제적 적용
로이드 죤즈는 주어진 교리에 포함된 성경적인 원리를 고찰한 다음에 그 원리를 실제적으로 적용한다. '실제적'이라는 말은 정치적인, 혹은 사회적인 상황을 의미하지 않고 보통 그리스도인들이 일상생활에서 부딪히는 문제를 다루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또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어떻게' 측면을 강조한다. 예를 들어 죄를 억제하는 일의 중요성을 다룬 다음에 '우리는 육체에 먹이를 주어서는 안된다'는 제목아래 이것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 실제적인 충고를 하고 있다.
이 실제적인 적용의 배후에는 "복음의 설교가 실제적이 아니라면 그것은 참된 설교가 아니라"는 로이드 죤즈의 신념이 있다. 기독교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할 말을 가지며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그가 하는 모든 일에서, 또 그가 하는 모든 것에서 자동적으로 올바르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로이드 죤즈는 기독교의 가르침을 생의 모든 영역에 적용한다. 교리와 실제적인 삶 사이에서 균형을 상실한 많은 설교자 들괴는 달리 비교할 만한 다른 인물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이 문제에 대해 균형있는 강조를 하는 로이드 죤즈의 탁월함을 설교자라면 누구나 배워야 할 점이라고 생각한다.
6.직접적 적용
로이드 죤즈의 설교에 있어서 변하지 않는 특징은 참석하지 않은 죄인들에 대하여 설교하지 않고 강대상 바로 앞에 앉아 있는 청중들에게 설교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오늘날 많은 강단에서는 자기의 청중들의 문제를 다루기 보다는 설교를 듣는 청중들과는 무관한 문제를 다루고 비판하는데 열심이기 때문이다. 설교에는 반드시 선지자 나단의 메시지와 같이 '당신이 그 사림이요'라는 것을 포함해야 한다.
또한 로이드 죤즈의 설교의 적용에는 긴박감이 내재되어 있다. 그는 죽어가는 사람이 죽어가는 사람에게 하듯이 설교한다. 그는 설교하는 순간에 영원의 문제가 결정된다고 믿는다.그래서 모든 설교에는 이러한 긴박감이 담겨져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7.적용의 방법
1)질문방식 - 로이드 죤즈는 청중들이 진리를 자신들에게 적용하게 할 때 질문하는 방식을 가장 흔하게 사용한다. 그는 일련의 질문을 연속적으로 하는 것이 진리를 전달하는 좋은 방법이며 청중들의 마음 속에 자극을 주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2)단언방식 - 어떤 때는 질문 방식과는 별개로 하지만 대개 질문방식과 함께 일련의 단언방식을 사용한다. 그는 질문하는 데에서 멈추지 않고 그 질문의 결과가 무엇인지를 보여줌으로서 청중들이 그 진리를 수용하도록 자극한다.
3)설교 전편에 걸친 적용 - 그의 설교를 보면 적용이 결론에서만 나오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진리를 설교 전체에 걸쳐서 적용하는 것은 그의 특징적인 방식이다. 하나하나의 단락마다에서 그는 끊임없이 적용한다. 그리고 설교의 결론 부분에서는 이 모든 것을 극적으로 강조하는 방식으로 적용하여 끝을 맺는다.
4.발제를 끝내며
본 발제는 로이드 죤즈의 설교 원리와 방법에 중점을 두고 다루었다. 발제를 마치면서 느끼는 소감은 이와같은 연구로는 로이드 죤즈의 설교의 모든 면을 전하는데 부족한 점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름대로 유익한 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끝으로 로이드 죤즈의 강해설교 방법을 알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그의 설교집을 정독하는 것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해 두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