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프 혼은 바람이다
유기섭
아침 8시에서 9시 사이에 통과한다는 선내방송에 혼 곶의 정경을 놓치지 않으려고 배의 맨 위쪽 라운지에 올라가서 세찬 바람과 마주한다. 거대한 크루즈 선이 휘청거리며 중심 잡기에 어려움을 보일 만큼 파도가 위세를 떨치는 바다. 십만 톤이 넘는 대형 크루즈 선도 케이프 혼에 접한 바다에서는 육중한 몸통이 흔들거리며 중심 잡기에 어려움이 많은 곳. 남미대륙의 끝 지점 남쪽 바다를 지키는 곳이다. 이곳을 지나던 작은 배나 대항해시대 목숨을 건 항해를 시도한 뱃사람들의 용기와 고난을 다시 되새겨본다.
수백 년 전 새로운 대륙개척에 몰두한 해양 국가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이 해역을 통과하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사투를 벌였을 것을 생각하니 나의 우쭐해졌던 몸과 마음이 잠시 부끄러워진다. 당시의 탐험가나 무역상이 된 것처럼 어깨를 으쓱했던 자신이 왜소해짐을 느끼며 파도의 향연을 바라볼 뿐 어쩔 도리가 없음을 깨닫는다.
태평양과 대서양을 이어가는 유일한 통로였던 이 바닷길에 선택의 여지 없이 목숨을 내걸었던 앞서간 바다의 사람들. 그들의 고난에 찬 여정이 없었다면 이곳의 비밀은 영원히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이곳을 지나갔던 사람들의 사연과 못다 한 이야기들이 바람과 파도에 휩쓸려 심연의 바닷속으로 잠겨 든다. 물류의 이동과 문명의 교류에 이바지한 그들의 노고와 희생에 경건한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몇 년 전 아프리카의 희망봉에서 대서양과 인도양의 바닷물이 만나고 헤어지는 광경을 보며 깊은 감회에 젖기도 했다. 서로 다른 두 개의 문명이 만나서 하나 되는 거대한 물결이 용솟음쳤다. 오늘 아침에 보는 험준한 바위산과 파도를 몰고 다니는 바람 속에서는 태평양과 대서양이 만나고 헤어지는 거대한 파도 더미를 보았다. 그 누가 있어 바람과 파도의 자유로운 유희를 멈추게 할 수 있을까.
최근 한국과 필리핀 국적의 선원이 탑승한 우리나라의 벌크선이 남대서양상에서 실종되었다. 바람과 파도를 이기지 못한 불가항력이었을지 모르지만 실종된 선원과 배가 우리의 구조대에 의하여 행운의 여신과 함께 지구의 남단에서부터 희소식이 되어 바람에 실려 오기를 빌어본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강풍과 파도만이 물보라를 띄우며 바다의 갈매기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는 심술의 바다. 망망한 바다. 깜깜한 바닷속 그곳 해저 어디에선가 숨 가쁜 구조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을 선원들의 애끊는 절규가 메아리 되어 들리는 듯하다. 거대한 유람선도 파도에 따라서 중심을 잡기 어려워 휘청이는 바다 가운데서 일엽편주의 신세가 되었을 선원들의 배를 생각하면 답답하다. 남겨 두고 온 아이와 가족 이국땅에서 떨어져서 사는 가족들. 그들을 어떻게 잊고 바다 밑에서 고이 잠들 수 있을까. 잠재울 수 없는 바다의 용맹스러움에 대적하며 인간의 힘으로는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을 것 같다.
사람의 힘이 아무리 세다 한들 자연의 무한한 변화와 전진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갑판 위에서 겪은 한 시간여의 흔들림이 추위와 두려움을 잊게 하였다. 거센 자연에 맞서서 느꼈던 진한 감동이 오랫동안 식지 않을 것 같다. 두려움과 감동, 자연의 무한한 능력과 감탄, 이 모든 것을 뒤로하고 파도 속을 빠져나온 우리의 배는 케이프 혼의 바람과 작별을 고한다.
-월간 문학세계 게재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