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시에는 '터미널'이라는 이름의 버스정류장이 참 많다.
서신터미널, 사강터미널, 발안터미널, 남양터미널 등등...
하지만 이들은 모두 길가에 놓인 정류장이다.
향남환승터미널 개통 이전까지 진정한 터미널은 오직 조암에만 있었다.
오래 전부터 정식 버스터미널로 영업해왔던 조암터미널은,
그 흔한 리모델링 하나 없이 시간의 순리를 그대로 따라오고 있다.
그래서 터미널 곳곳에 각각 시대마다 다른 흔적들이 남아있다.
특유의 분위기가 좋아서 언젠가는 한 번 가보고 싶었던 조암터미널을,
2008년 방문 이후 정확히 10년이 지나 다시 밟을 수 있었다.
기대와 설렘을 한가득 안고 이른 아침 조암터미널로 발길을 향했다.

수도권 버스터미널 재업로드 2부의 시작은 바로 조암터미널이다.
12월에 시간이 남는 덕분에 부랴부랴 서둘러 갔다오려 했으나,
갑자기 독감이 걸리는 바람에 일정이 조금 늦춰져 동지 무렵에 이곳을 오게 되었다.
지하철 첫차를 타고 빠르게 서두른 덕분에 아주 일찍 이곳에 도착하였다.

거의 모든 상점이 문을 닫은 아침 8시의 조암은 무척 고요했다.
터미널과 재래시장이 붙어있어 북적여야 할 거리는 적막을 깨는 차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새벽까지 득세였던 미세먼지가 싹 걷혔다는 점이다.
게다가 온도까지 따뜻하여 가장 고민이었던 날씨 걱정은 한시름 놓았다.

조암터미널을 처음 알게된 것은 2008년 초였다.
DSLR도 없었던 그 당시, 학생 신분에 핸드폰 하나 들고 와서 조용히 사진을 담은 기억이 생생하다.
10년이 지나 너무도 많은 환경이 바뀌어버린 나 자신이 이렇게 다시 오게 되어 기분이 묘하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버스터미널을 변한 게 전혀 없어보여서 더욱 그러하다.

정말 놀랍게도 버스를 제외한 모든 광경은 10년 전에서 한 치도 변하지 않았다.
위 사진에서 10년 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새로 들어온 슈퍼 에어로시티 차량,
그리고 로얄시티 파란색 시외버스가 유니버스 빨간색 광역버스로 바뀐 정도다.

개인적으로 조암이라는 곳을 언젠가는 다시 와보리라 마음을 먹고 있었다.
높은 빌딩숲과 깔끔하고 멋드러진 거리, 그 길을 지나는 수많은 사람들과는 거리가 먼,
전형적인 시골 버스터미널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몇 안 되는 수도권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터미널뿐 아니라 땅을 뒤엎고 아파트를 우후죽순 올리는 격변의 시대에,
오랜 세월 같은 추억을 가진 공간이 어쩌면 그리웠는 지도 모른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모든 것이 옛 모습을 간직한 건 아니다.
사당-조암을 오가는 번호 없던 시외버스가 지금은 환승이 되는 8155번 광역버스가 되었으니 말이다.
정작 수원행 시외버스는 아직까지 시외버스로 남아있는 게 아이러니지만,
사당행 노선이 광역버스로 전환되면서 조암 주민들의 삶이 서울과 한층 가까워졌다.

조암터미널이 아직까지 폐쇄되지 않고 시골 터미널의 모습을 간직할 수 있었던 것은,
사당과 수원을 오가는 광역 / 시외버스의 종점이기도 하거니와,
근처 농촌을 오가는 농어촌버스의 집결지라는 사실이 중요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시간마다 번호를 달리 바꿔 한적한 촌동네로 들어가는 버스들이 여기에 시시때때로 들어온다.

ㄷ자형의 타일 깨진 낡은 플랫폼도, 녹이 벌겋게 슨 지붕 기둥도, 때가 시커멓게 탄 색색들이 천막도,
20세기 아날로그 시대에 갖춰진 그 모습 그대로이다.
도시의 깔끔하고 번잡한 버스터미널도 좋지만,
이렇게 시골 냄새 물씬 풍기는 버스터미널은 정겹고 살가운 맛이 있다.

예전에는 수도권에도 이렇게 생긴 버스터미널이 제법 많이 있었다.
그러나 수익성을 이유로 오래된 시골 버스터미널이 하나 둘 철거되거나 다른 용도로 바뀌었다.
도시 단위로 보면 김포, 광주, 안성, 동두천이 그러했으며,
서울서부(불광), 일산(명성), 파주서부(금촌), 문산, 적성, 죽산 등등
수많은 터미널이 세월이라는 이름의 파도 속에 쓸려나갔다.
그래서 옛 모습을 온전히 간직한 이곳이 너무나 반갑기만 하다.

그러나 오래 전 시설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을 뿐, 시대의 변화에 뒤쳐지는 터미널은 아니다.
시대가 바뀌면서 그에 맞게 적응해가는 모습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10년 전과는 가장 크게 달라진 부분은 외국어 간판이 곳곳에 눈에 띈다는 점이다.
주변에 공장이 정말 많은데 공장 노동자들 대부분이 외국인이다 보니,
이런 시골 버스터미널조차 국제화의 추세를 따라갈 수 밖에 없었을 테다.

실제로도 10년 전 터미널에는 지역 주민들(특히 학생과 장년층)을 주로 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이곳에 있는 사람들의 1/3은 외국인인 것 같았다.
생김새가 아닌 옷차림으로 구분이 가능한 중국인부터 시작해서,
동남아 남아시아 중앙아시아에 온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이 좁은 공간에서 모두 볼 수 있었다.

이미 10년 전에도 조암터미널 매표소는 폐쇄된 상태였지만 매표 공간은 그대로 남아있었는데,
어느덧 매표 공간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환전소가 차지하고 있다.
아예 중국인을 타겟으로 했는지 붉은색 한자가 도배되어 있다.
난민 문제다 뭐다 해서 외국인 노동자 문제가 최근에 민감한 이슈로 부상하고 있는데,
조암과 같은 공단 지대는 이미 오래 전부터 이슈를 넘어 일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위 사진에 나온 사람들도 전부 외국인이었으니 말이다.

각 지역의 발전도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시골 지역에 얼마나 많은 공장이 있는가이다.
수도권이나 충청권 북부, 경남 동부 같은 경우 시골에도 엄청난 수의 공장이 흩어져 있는 반면,
호남권, 경북 북부, 강원, 경남 서부의 대부분은 공장 없는 전형적인 농촌으로 남아있다.

화성시는 상대적으로 낙후된 서부 지역조차 이미 공장으로 빼곡하다.
길을 지나가면 공장부터 눈에 밟히고 그곳에 일하는 노동자를 흔히 볼 수 있다.
조암터미널의 엄청난 분위기 변화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공장 노동자의 상당수가 외국인으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외국인 비중만 보면 서울 대림동, 안산 원곡동이 부럽지 않다.
다만 이것은 최근 십수 년 간 너무 급격하게 이루어진 변화이기 때문에,
같은 장소 같은 공간인데도 위화감이 느껴질 정도로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조암터미널에 인쇄된 수많은 버스 시간표들도,
아직까지는 지역 주민 위주로 돌아가고 있지만 점점 외노자들을 위해 맞춰져 가고 있다.
33-1번 시간표 중 군외공단이라고 쓰인 자리가 대표적 예로서,
공단 출퇴근 수요를 절대 무시할 수 없어서 출퇴근 시간에 포커스를 맞추게 된다.

물론 근처 농어촌버스가 아닌 서울/수원행 장거리 버스는 예외다.
이쪽은 상대적으로 내국인 이동에 포커스가 더 맞춰져 있다.
대도시 - 위성도시를 연결하는 노선 패턴과 상당히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조암터미널과의 만남은 짧았지만 많은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수도권에 얼마 남지 않은 시골 버스터미널 고유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외국인의 유입으로 인해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고,
광역버스의 확장으로 더 수도권스럽게 느낌이 바뀌었다.
이게 좋다 나쁘다를 논할 수는 없는 문제이지만,
빛과 그림자가 공존한다는 사실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또다시 10년이라는 시간을 더 보내고 찾아온다면 그땐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부정적인 말보다 긍정적인 말을 더 할 수 있게 되는 만남이었으면 좋겠다.
첫댓글 시골냄새가 물씬 풍기는 정겨운 모습이 남아있군요.
경진여객 주력노선중 하나이자 고향집 대들보 같은 조암터미널의 모습, 잘 봤습니다.
고향집 대들보라는 표현이 재밌네요~ 시골 터미널 특유의 정겨운 느낌이 참 좋습니다. :)
지금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시간표보다 조발을 많이 하는곳이죠.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8.12.29 17:24
조발까진 아닌데 시간표를 철저히 지키더군요. ㅎㅎ
조암터미널은 옛 분위기가 그대로 남아있는 장소이군요. 옆동네 향남터미널은 현대식이지만요.
잘 보고 갑니다.
두곳이 가깝지만 많이 대비되죠.
안중~조암 노선 꾸준히 운행하는거보면 대단하다고
생각됩니다...적자노선임에도 불구하고...운행하는게 놀라울 따름입니다...
적자임에도 운행하는 건 우리가 모르는 나름의 이유가 있는게 아닐까요?
화성은 참 다양한 모습이 공존하는 곳 같습니다. 동서로 길게 지역이 만들어져 있는 탓에 동서 지역간의 차이가 참 크게 느껴집니다. 병점이나 동탄 같은 곳이 조암이나 향남과는 느낌이 많이 다르더군요. 경진여객이 어느 정도 세를 유지하고, 조암이 그런 경진여객의 주요 기점 역할을 하는 곳으로 남는다면 조암터미널은 강화터미널과 같은 형태로 꽤 오랜 기간 존속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문산터미널이나 서울 서부터미널과는 처해 있는 지역적 특색이나 맥락이 많이 달라 보입니다. 특히 문산은 신성교통 계열이 무너진 것도 큰 영향을 받았겠고요.
맞습니다. 실제로 화성시는 일제강점기 이전에는 동부가 수원, 서부가 남양이라는 동네로 각각 나뉘어 있었죠. 경부선이 지나는 곳과 아닌 곳의 차이가 두드러지게 나지만, 최근에는 향남지구, 남양지구, 송산그린시티 개발로 분위기가 바뀌고 있습니다. 조암터미널은 말씀하신 이유 때문에 웬만해서 사라질 일은 없다고 저도 생각합니다.
@Maximum 과거 화성이 그렇게 동, 서부로 나뉘어져 있었다는 이야기는 덕분에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한 지역 내에서도 서로 다른 분위기가 나타나게 되었군요. 덕분에 또 하나 좋은 걸 배워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