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소환
문희순
얼마 전에 티브이에서 “스타다큐 마이웨이”라는 프로에 1970년대 “얄개 신드롬”을 일으켰던 배우 ㅇㅇㅇ씨의 인생이야기가 방영되고 있었다. 데뷔 시절부터 긴 인생 여정을 조명했다. 1970년대 최고의 하이틴스타로 떠들썩하게 얄개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불꽃같은 인기도 잠시 연기를 중단하고 ㅇㅇㅇ씨는 어머니의 사업실패로 돈을 벌기 위해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긴 아픔 시간이 지나고 지금은 재혼한 아내와 세종시 조치원읍에서 조그마한 식당을(전집) 하며 행복한 날들을 보내고 있다.
“조치원” 나에게는 보석 같은 추억이 있는 작은 도시, 내 가슴 깊은 곳 어딘가에 샘물처럼 맑은 추억의 “연기군 조치원읍” 정녕 잊지 못할 도시, 지금은 세종시 관할이 되었다. 세종시 하면 행정복합도시 이미지만 있다 보니, 아직도 오래된 읍, 면 지역인 조치원은 세종시가 아닌 것 같고, 왠지 그 옛날 향수가 희미해진 느낌이 든다. 그러니까 오래전에 경찰관 아버지께서 부여에서 조치원으로 발령을 받으셔서 우리 가족은 조치원으로 이사를 했다. 마당이 넓은 기와집으로 우리가 사는 곳은 뒤채 방 2칸에 여름에 시원한 마루가 있고 부엌은 일자로 길었다. 나는 부엌을 통해서 주인집으로 자주 놀러 가곤 했다. 어느 날 저녁 먹고 어둠이 내려 사방이 어둑어둑한데 주인집에 놀러 간다고 아버지 큰 슬리퍼를 질질 끌며 부엌을 걸어가다가 석유풍로에 놓인 솥단지 날카로운 모서리에 이마를 부딪치며 넘어졌다. 죽는다. 울었다. 이마가 찢어지고 병원에서 열 바늘 넘게 꿰매고, 혼났던 기억이 있다. 지금도 이마에 상처가 있다. 신기하게도 그때 그날 밤 일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생생하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우리가 살던 곳이“교동”이라는 마을이었다. 기와집 큰아들은 나보다 나이가 7살이나 많아 오빠라고 불렀다. 어른들끼리는 나중에 아이들이 크면 혼인시키자고 약속했다고 한다. 기와집 어르신들은 꼬마인 나를 무척 귀여워하시고 사랑을 듬뿍 주셨다.
그 시절 유치원에서 나만 보면 꼬집고 선생님 안 보이면 때리고 괴롭히던, 사납고 통통한 친구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유치원 졸업을 못 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 친구도 어느 하늘아래서 예쁜 할머니가 되어있겠지……. 그리고 마을에 “철거덕 철거덕” 엿장수아저씨의 가위질 소리가 울리면 나는 방안으로 뛰어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썼다. 무서워서 한참을 기다리면 가위질소리 멀어지고 나는 땀으로 목욕을 하고 나왔다. 엄마는 내가 무슨 잘못을 하면 엿장수아저씨한테 보낸다고 엄포를 놔서 조그마한 가슴이 쿵쿵 얼마나 무서웠는지 모른다. 아저씨가 왔다간 그날 밤에는 내가 식은땀을 흘리며 안 간다고 잠꼬대를 심하게 해서 그 다음부터 엄마는 절대 안하셨다. 여름이면 엄마는 하얀 모시 치마저고리 선녀처럼 입으시고 나를 데리고 교회당에 가셔서 기도하셨던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엄마가 정성을 들여 기도할 때면 나는 옆에서 엄마 양산만 만지작거리며 기도하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어떤 남자아이도 나처럼 눈감은 사람들 틈에서 두리번거리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무슨 잘못을 한 것처럼 고개를 숙였다. 높은 곳에 계신 목사님 목소리가 우렁차서 그때는 무서웠다.
초등학교 2학년 가을인가보다. 학교에서 끝나고 집에 오니 손님이 오셨는지 시끌시끌한 소리가 들렸다. 엄마가 나를 보더니 “얘가 희순 이예요” 하시며 인사하라고 등을 떠미셨다. 얼떨결에 인사하고 바라보니 어떤 아줌마하고 중학교 교복 입은 남학생이 있고 아줌마는 “많이 컸네! 이젠 시집가도 되겠네. 하시며 웃었다. 부끄러워서 나는 장독 뒤에 숨었다. 그 아줌마하고 남학생은 조치원 교동에서 같이 살았던 기와집 주인이었다. 그리고 그 후로는 서울에 있는 대학에 들어갔다는 소식만 어른들에게 들었다.
작년에 내가 시무하고 있는 교회를 추억과 사랑이 담긴 조치원으로 이전하려고 교회 몇 군데를 보고 다녔다. 그런 와중에 코로나 19가 기승을 부려 교회 이전하는 문제를 잠시 미루기로 했다. 하루속히 코로나 19가 종식되어 아름다운 연둣빛 추억이 있는 정겹고 소박한 조치원읍에서, 소담한 예쁜 교회를 섬기면서 아름답고 선한 영향력을 나누는 소소하고 행복한 삶의 그림을 그리려 한다. 평소 존경하는 작가님 책에서 “행복은 꽃 피고 새우는 유토피아 같은 곳에나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고를 버려야 진정한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 행복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서 꽃처럼 피어난다. 라는 글귀가 생각난다. 거꾸로 거슬러 오르는 연어들의 알 수 없는 신비한 이유처럼, 아련한 추억소환으로 잔잔한 미소가 입가에 머물고 한적한 도로가에 싸리꽃이 흐드러진 봄날에 진정 행복한 향기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