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譯者 東洋文獻學會 愚堂 盧炳德
공의 이름은 여석(汝錫), 자(字)는 뇌숙(賚叔)이다. 김씨의 계통은 신라(新羅)에서 나왔다. 신라 말에 왕자 흥광(興光)이 나라가 장차 혼란할 것을 알고 광주(光州)로 나와 은둔하니, 자손이 따라서 본관(本貫)으로 삼았다. 고려 시대에 10세(十世)를 이어 평장사(平章事)를 하였으므로 세상에서 그들이 살던 곳을 일컬어 평장동(平章洞)이라 한다.
조선 시대에 들어 절도사(節度使) 종연(宗衍)과 그의 아들 직제학(直提學) 백균(伯勻)-어휘(御諱)를 피하여 균(鈞)에서 金을 떼어냈다.-이 함께 윤이(尹彝)와 이초(李初)의 사건에 화를 입었다.
백균의 아들 자진(子進)은 사정(司正 고려의 관직)이다. 여말선초(麗末鮮初)에 망복(罔僕)의 의리로써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갔는데, 송산(松山) 조견(趙狷)ㆍ야은(冶隱) 길재(吉再)와 공은 선후배이다.
만년에 또한 나주 금정동으로 물러가 거처하니, 전조(前朝)의 사패지(賜牌地)인 연고이다.
정자에 편액하여 수산(首山)이라 하고, 샘을 여(麗), 전답을 여(麗), 담장을 여(麗)라 하여 통틀어 부르기를 여촌(麗村)이라 하였다.
조선 태종조(太宗朝)에 우의정으로 세 번이나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고, 하늘의 해를 보지 않은 채 일생을 마치니, 이로부터 조정에서 후손을 거두어 등용하는 은전이 있었다.
충손(衷孫)은 음 참판(蔭參判)이고,
숭조(崇祖)는 문장으로 세상에 명성을 날려 문과에 거듭 올라 홍문관 전한(弘文館典翰)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에 이르렀으니, 이분이 공의 5대조이다.
고조 기(紀)는 문과급제 홍문관 전한이다. 젊어서 재상의 재목으로 인정받아 중종(中宗)의 대우가 특별하였으나 불행히 일찍 세상을 떠나 미처 크게 등용되지 못하였다. 상감이 매우 슬퍼하며 특별히 관청에 명하여 장례를 돕게 하였다.
증조 경우(景愚)는 음 좌랑(蔭佐郞) 증 사복시정(贈司僕寺正)이다.
조부 대진(大振)은 참봉(參奉) 증 승정원 좌승지(贈承政院左承旨)인데, 손자 여옥(汝鈺) 때문에 귀하게 된 것이다.
부친 우량(友亮)은 통선랑(通善郞)으로 문예가 특이하였다. 임천(林泉)에서 덕을 길러 과거에 나가지 않고 시주(詩酒)로 스스로 즐겼다.
서산 유씨(瑞山柳氏) 탁(琢)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천계(天啓) 임자(1672) 11월 10일에 공을 낳았다.
숙부(叔父) 통덕랑공(通德郞公) 우헌(友憲)이 완산 이씨(完山李氏)에게 장가드니, 찰방(察訪) 만취당(晩翠堂) 황종(黃鍾)의 따님이며 개국공신 배도공(裵悼公)의 후예이다. 자손이 없어 공을 취하여 아들로 삼았다.
공이 처음 태어날 적에 중부(仲父) 참판공(參判公)이 용구(龍駒)가 구름을 타고 떨쳐 날아가 유 유인(柳孺人)의 침소로 들어가는 꿈을 꾸었다. 공이 노닐 적에 비할 수 없이 뛰어났으므로 참판공이 특별히 아껴 〈지몽(志夢)〉이라는 시를 지어 기대하는 뜻을 보였다.
9세에 부친상을 당하여 상제(喪制)를 성인처럼 지켜 가슴을 치며 통곡하고 슬퍼하였으니, 지성에서 나온 것이다. 하루는 우연히 아이들을 따라 잠시 나가 마을을 벗어났는데, 조객이 마침 이르렀다. 곡비(哭婢)가 나가 찾았으나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객이 떠난 후에 생부[生大人]가 불러 경계하여 훈계하자 그 후 다시는 거적을 벗어나지 않았다.
집이 본래 재산이 넉넉하여 남자 종[蒼頭] 2인이 관장하는 색깔이 곡물[殖利穀物] 1천여 석이 있었다. 공이 이 유인(李孺人)에게 말씀드려 문서를 취하여 불태워 증거를 하나도 없이 하니, 듣는 자들이 원대(遠大)하게 기대하였다.
장성하여 이 유인과 본생부모를 받들어 물심양면으로 봉양하고, 어버이의 뜻에 하고자 하는 바를 모두 갖추어 힘껏 받들지 아니함이 없었다.
생모 유 유인이, 친정이 가난하여, 부모 제삿날에 제사에 보탬이 되는 물건을 보내고 싶어 하였다. 공이 번번이 자성(粢盛)과 서품(庶品)을 마련하여 유 유인에게 올렸으며, 유인이 세상을 떠났어도 오히려 행하여 종신토록 폐하지 않았다.
동기간에 우애가 돈독하였다. 백씨의 집이 매우 가난하였으므로 공이 항상 경비를 대주었다. 심지어 공부(公賦)나 사곡(絲穀) 같은 것 역시 자신이 준비하여 납부하고 백씨 모르게 하였다. 이로써 이서(吏胥)들이 세금을 독촉하려면 으레 백씨에게 알리지 않고 공에게 바로 알렸다.
백씨의 아들 중에 가난하여 생계를 꾸릴 수 없는 자가 있었는데, 전답과 소작인을 떼어주어 산업을 경영하도록 하였다.
누이 중에 일찍 과부가 되어 의지할 곳 없는 이가 있었다. 집터를 나눠주어 와서 살게 하고, 그의 아들을 자기의 소생과 다름없이 가르쳤다.
생질 중에 가난하여 딸을 출가시킬 수 없는 이가 있었는데, 집으로 데려다가 혼수를 갖추어 성례하여 보냈다.
종족을 대접하기를 매우 후하게 하여 뜻하지 않은 환란이 있으면 마음과 힘을 다하여 구호하였다.
또한 매번 효제돈목(孝悌敦睦)의 의리로 후생을 권면하여 입에 익숙하고 귀에 순하게 하였다. 그래서 비록 일가들이 소원(疎遠)할지라도 오히려 화경(和敬)의 풍(風)과 봉선(奉先)의 도리가 있었다.
원대한 경략에 힘써 장례와 제사로부터 선영의 수호에 이르기까지 모두 규모 있게 경영하도록 정례적 제도를 확립하여 만들었다.
종형 도헌공(都憲公)이 관직 때문에 서울에 있으면서 매양 공에게 편지를 부쳐 말하기를
“일가를 통할하여 봉선(奉先)하는 도리에 오직 우리 아우가 있어 나는 걱정이 없다.”
하였다.
제자(諸子)를 훈육함에 엄정함이 있었다. 평소에 순순히 경계하여 깨우치되, 한 번이라도 잘못된 행실이 있으면 통렬히 꾸짖고, 비록 자잘한 행위나 작은 일이라도 멋대로 하지 말도록 하였다.
송암(松巖) 기정익(奇挺翼)이 일찍이 공에게 일러 말하기를
“형의 네 아들 모두 유능한 자제들이라 말할만한데, 형의 단속이 입에 끊이지 않으니, 실로 형의 가문에 자제하기 어렵겠다.”
라고 하였다.
사람을 대함에 겉으로 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불가한 바에는 일찍이 뜻을 굽혀 구차하게 영합하지 않았으므로 고을에서 경탄하였다.
노복(奴僕)을 부림에 은혜와 위엄을 병행하여, 겁나게 기세를 부리며 남들과 싸우는 자가 있으면, 불문곡직(不問曲直) 다스렸다. 이로써 노복 중에 비록 교활한 자가 있을지라도 감히 음주를 좋아하거나 스스로 방자한 자가 없었다.
접때 선조(宣祖) 기축년(1589)에 상공(相公)인 송강(松江) 정철(鄭澈) 공이 추관(推官)으로서 역옥(逆獄)을 다스렸는데, 공의 외조부 이 찰방(李察訪)의 서간이 최영경(崔永慶)의 문서 가운데에 있었다. 선조(宣祖)가 이공을 나문(拿問)하도록 명함에 마침내 이공이 곤장을 맞고 죽었다. 정 상공이, 이공이 비록 서간의 일이 있었으나 마음을 달리하지 않았음을 잘 앎으로, 상감께 청하여 이공의 원통함을 아뢰었다.
그러나 공이 말을 배울 때부터 이 유인의 슬하에 있으면서 송강을 공척(攻斥 배척)하는 말을 익히 들었다. 15세에 동서분당(東西分黨)의 이유 및 기축옥사(己丑獄事)의 시말(始末)을 취하여 살피고, 이 유인에게 아뢰기를
“외조부께서 서간의 일로 화를 입었을 뿐, 실로 정 상공이 끌어들여 죽인 것이 아닙니다. 또한 정 상공은 실로 소인이 아니고, 정 상공을 모함하는 자들이 소인의 무리로 귀결지은 것일 뿐입니다. 자교(慈敎)에 비록 공척하는 말씀이 있을지라도 소자는 지금부터 감히 받들 수 없기에 모친께 품합니다.”
라고 하였다. 이 유인이 말하기를
“너는 책을 읽을 줄 알아 어둡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의리(義理)의 추향(趨向)이나 언의(言議)에 분수를 헤아려 행해야 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때마침 기암(畸庵) 정홍명(鄭弘溟) 공이 창평 농장에 있다가 공의 이 일을 듣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어찌 10세 아이가 시비를 판별하여 탁연히 수립하기를 이같이 할 수 있다는 것인가?”
하였다.
숭정(崇禎) 기해년(1659) 효종의 대상(大喪) 때에 장렬왕후(莊烈王后)의 복제에 대하여 우암(尤菴) 송문정공(宋文正公)이 헌의(獻議)하여 기년(朞年)으로 결단하자 윤휴(尹鑴)와 허목(許穆) 등의 예론이 분연히 일어났다.
공이 기 송암(奇松巖)에게 일러 말하기를
“윤휴와 허목 등이 예론을 핑계 삼아 바른 이를 더럽힐 계책을 이루려 하니, 실로 기탄없는 소인들이다.”
하고, 드디어 기공과 왕복 논변하여 윤휴와 허목 등의 비주이종설(卑主貳宗說)을 설파하였는데, 가소(賈疏)의 장서(長庶)에 이르러서는 우암 선생의 헌의와는 약간 차이가 있었지만, 그 큰 뜻은 일치하지 않음이 없었다.
숙종 을묘년(1675), 우암 선생이 헌의한 일 때문에 뭇 소인들에게 미움을 사 장기(長䰇)에 위리안치[荐棘]되었다.
이에 앞서 공이 자제들에게 당부하여 소장(疏狀)이나 통문(通文)에 참여하지 말도록 하였었다. 이에 이르러 이는 사문(斯文)과 관계된 것으로써 실로 국가의 흥망의 근원이었기에 중자(仲子) 극광(克光)을 시켜 창의(倡義)하자 사림(士林)이 상소하여 신변(申卞)하였다.
그 후 기사년(1689)에 우암 선생이 끝내 화를 당하였다. 공이 “현인이 없어지니 나라가 병들리라[人之云亡 邦國殄瘁邦]”라는 말을 들어 혼자 속으로 통탄하였다.
그때 나라에 경과(慶科)가 있었는데, 자제와 문인에게 과거에 나가는 것을 불허하였다.
경신경화(庚申更化) 초기에 우계(牛溪)ㆍ율곡(栗谷) 두 선생에 대한 종향(從享) 건으로 공이 태학(太學)에 편지를 통함에 태학이 팔도를 두루 깨우쳐 합소(合疏)하여 마침내 윤허를 받았다. 거의 백 년 만에 사문(斯文)의 흠전(欠典)이 일조에 거행되었으니, 실로 공이 주도한 논의에 말미암은 것이다.
당시에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 선생ㆍ정관재(靜觀齋) 이단상(李端相) 공 같은 제현(諸賢)과 모두 도의로 교유하여 추허(推許)가 매우 깊었다.
경화 이후로 당화(黨禍)가 일어나 한 시대의 사류(士流)가 거의 일망타진(一網打盡)되어 조야가 흉흉한 지 오래였다. 공이 비록 위포(韋布)의 처지에 있었으나 시비를 논변한 것이 왕복 편지에 있었다. 그래 당시 명사들이 모두 이르기를 ‘그에게 미칠 수 없다’ 고하였다.
끝까지 제자(諸子)에게 두 선생의 문하들과 종유하도록 하였으니, 공의 정견(定見)을 추향(趨向)에서 알 수 있다.
병자호란(1636)에 인조(仁祖)가 피란을 갔다. 공이 종형 김여옥(金汝鈺) 도헌공(都憲公)과 앞장서 충의를 분발하여 열읍으로 뜻을 같이하는 선비들에게 격문을 띄워 의곡(義穀)을 거둬 모아 장차 행재소로 보내 군국의 용도를 돕고, 형제의 가동(家僮) 100여 인을 뽑아 의병을 편성하여 도헌공과 함평현(咸平縣)에서 수비하다가 나아가 왕을 도울 계획이었다.
정축년(1637) 봄에 인조가 성에서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북쪽을 향하여 통곡하고, 모아둔 곡식을 조정에 바치니, 조정이 열읍(列邑)에 분산 비치하여 비상시에 보태도록 하였다.-자세한 내용이 수성록(守城錄)에 있다. 영광군에 역시 의곡록(義穀錄)이 있어 발간하여 세상에 배포하였다.-
용맹이 빼어난 효종(孝宗)께서 제일 먼저 원수를 갚고 치욕을 씻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아 영준한 인물을 초빙하여 일의 성공을 꾀하고자 하였다.
우암 선생이, 종씨(從氏) 도헌공의 재국(才局)이 한쪽을 감당할 만하다 하여, 조정에 서쪽 변방의 방비 책임을 주도록 천거하였다.
상감께서 임헌(臨軒)하여, 시설할 것 가운데 먼저 할 바를 묻고 위로하여 보냈다.
도헌공이 이윽고 특별한 대우에 감읍하고 더욱 울컥 충분(忠憤)하여 성념(聖念)에 보답할 바를 생각하고 힘써 심력(心力)을 다하였다.
공이 호남에서 이때의 기미를 듣고 당시의 대책을 저술하였다. 입기강(立紀綱)ㆍ정민지(定民志)ㆍ섬국용(贍國用)ㆍ엄병모(嚴兵謨), 양사(養士)ㆍ취인(取人)ㆍ군정(軍丁)ㆍ전결(田結)ㆍ화천(貨泉)ㆍ호적(戶籍), 우(牛)ㆍ주(酒) 등의 법 및 비어(備禦)의 방책에 관하여 조목조목 분류하여 논리적으로 열거한 글을 도헌공의 임소(任所)로 보내 채용하여 만일의 차질이 없게 하였으나, 효종(孝宗)이 승하하여 만사가 와해하였다.
또한 이듬해에 도헌공의 상(喪)을 당하여 더욱 세상일에 뜻이 없었다. 임천(林泉)에 자취를 감춰 남이 알아주기를 구하지 않고, 마침내 저술한 바를 명명하기를 “《만어(漫語)》”라 하였다.
창계(滄溪) 임영(林泳)ㆍ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이 취하여 내용을 보고, 또한 칭찬하여 말하기를
“당대에 실시하여 쓰였다면 급한 병의 양약(良藥)이라 일컬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타고난 재주가 투명하여 어렸을 적에《서전(書傳)》(기삼백(朞三百)의 주(註)를 읽으며 몇 달 동안 깊이 연구하여 일월(日月)의 도수(度數)와 기삭(氣朔)의 영축(盈縮)을 환하게 통하여 막힘이 없었다.
훗날 상사(上舍) 백홍원(白弘源)과 그것을 논하였는데, 백 공이 깊이 탄복하여 말하기를
“나 같은 사람은 한평생 강구(講究)하여 줄거리를 대략 깨쳤는데, 형은 공부를 심하게 않고도 소상히 이해하여 이에 이르렀으니, 형의 식견에는 실로 미칠 수 없다.”
하였다.
기타 경전(經典)의 오묘한 뜻을 통하여 이해하지 못한 것이 없었다. 경례(經禮)에 더욱 깊어 《의례(儀禮)》《예기(禮記)》로부터 선대유학자의 주소(註疏)에 이르기까지, 무릇 의장도수(儀章度數)와 절문융쇄(節文隆殺) 또한 모두 연구하고 익혀 요점을 기필코 몸에 행하기를 임무로 삼았다.
문예가 뛰어나 저술이 있었다. 붓을 들어 써 내려가면 이치가 분명하였으므로 청사(晴沙) 고용후ㆍ기암(畸庵) 정홍명 공 같은 이들이 찬탄하며 작자(作者)라고 칭찬하였다.
병진년(1676, 숙종2) 겨울, 동당시(東堂試)의 시장(試場)에 들어갔는데, 고관(考官)이 모두 시인(時人)이었다, 책제(策題)는 “군자는 모범적이라야 지당하니, 오늘의 폐단을 설파하라. [君子楷範至當今說弊]”는 문제로 드러내놓고 풍유(諷諭)하여 기롱하는 행태가 있었다.
그래 공이 마침내 책을 챙겨 책문을 짓지 않고 나오자 유생들이 좇아 짓지 않은 자가 과반이나 있었다.
시인과 고을 수령이 함께 시장에 들어오다가 상황을 목견하고 관찰사에게 말하여 공과 양세남 공을 주동자로 지목하여 공격하려 하였으나 관찰사가 현명하여 용서하였다.
그 후로 과명(科名)에 급급하지 않았는데, 생대인(生大人 생부)이 일찍이 공에게 일컬어 말하기를
“네가 과거를 폐한 것은 실로 매우 가상한 일이나 문호(門戶)의 계책 역시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라고 하였다.
공이 선대의 유지(遺志)대로 공거(公車)에 나가기에 힘써 일찍이 향시(鄕試)에 여러 차례 장원하였으나 예부시(禮部試)에서 번번이 꺾였다. 비록 시장(試場)에 들어갔더라도 여의치 못한 상황을 보면 문득 글을 짓지 않고 나왔다.
일찍이 도사(都事)와의 친혐(親嫌) 문제로 좌시(左試)에 응하기를 회피하였다. 좌도(左道) 유생들이 공의 재명(才名)을 꺼려 거짓말을 날조하여 심하게 배척하여 마침내 한바탕 소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공이 주사(主司)에게 나아가 “도사가 혐의를 응피(應避)하였음이 공문(公文)에 명백한 상황”을 자세히 말하고, 또한 말하기를
“일이 비록 이와 같지만, 나 한 사람 때문에 시험장이 소란하므로 청컨대 문을 열고 나가겠습니다.”
하였다. 주사가 말하기를
“그대의 자처에 실로 극히 감탄하오. 다만 선정(先呈) 전에 문을 열기는 불가하오. 또한 공문이 이처럼 명백하거늘 어찌 무뢰배의 거짓말 때문에 끝내 스스로 과거를 폐하려 하오?”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과거급제가 비록 중하기는 하지만, 선비가 처신을 어찌 구차히 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끝내 한곳에 단정히 앉아 선정을 기다려 당당하게 나갔다. 주사가 예리(禮吏)를 시켜 시험장에 큰소리로 고하여 말하기를
“제생(諸生)은 모름지기 장성 유생(儒生)의 처신한 바를 보아야 할 것이오. 선비가 명예와 절조를 마땅히 이같이 해야 하지 않겠소. 저 사람이 어찌 곡경(曲逕)하여 응시한 자인가?”
하였다.
공이 돌아가는 길에 복천(福川)의 산수를 두루 유람하였는데,
吾行不落寞 내 가는 길 쓸쓸하지 않거니
勝賞冠平生 평생에 구경거리 으뜸이로다
라는 구절이 있다.
비록 평생 교유한 바라도 지위가 현달(顯達)한 이에게는 먼저 서신을 보내 문안하기를 좋아하지 않고, 또한 일찍이 일선(一善) 일예(一藝)로써 뽐내지 않았다.
일찍이 어느 학자가 공에게 묻기를
“근세에 조금이라도 명칭이 있는 자들은 별호(別號)로써 자처하지 않은 자가 없는데, 공은 문학과 덕망으로써 아직 별호가 없으니, 장차 학자들에게 어찌 칭하도록 하려는가?”
하였다. 공이 답하여 말하기를
“별호를 어찌 사람마다 의당 가져야 할 바이겠는가?”
하였다.
만년에 용강처사(龍江處士)라 칭하였는데, 문인들이 높인 바이지 공의 본의가 아니었다.
이 상국(李相國) 이상진(李尙眞)이 공과는 안면이 없었으나 공의 명함을 듣고 일찍이 조정에 천거하였으며, 문곡(文谷) 김문충공(金文忠公) 역시 공의 명함을 적어 전관(銓官)에게 보냈으나, 끝내 말단의 관직[一命]도 얻지 못하였다.
포부(抱負)와 재학(才學)을 한 번도 세상에 펴지 못하고, 마침내 시골에 묻혔으니, 어찌 운명이 아니겠는가!
평생 고질을 앓아 조리와 수양에 방편이 있었으니, 선현의 “망생순욕(忘生詢欲)”의 문구를 항상 읊조리며 지극한 경계로 삼았다. 그래 70을 넘어서도 정력이 오히려 왕성하였다.
어느 날 우연히 병이 들어 병세가 처음에는 심각하지 않았는데, 스스로 말하기를 ‘다시는 회생할 수 없을 것이다’ 하고, 마침내 뒷일을 매우 자상하게 처리하였다. 그리고 네 아들에게 말하기를
“내 나이 70을 넘어 너희가 모두 목전에 있으니, 다시 무엇을 구하겠느냐? 지금 죽을 날을 당했지만 조금도 처량한 생각이 없다.”
하고, 며칠 지나 마침내 졸하니, 갑술년(1694) 2월 21일이다.
처음에 영광의 박산 선영 옆 뒤편에 장사하여 여러 차례 옮기고, 금상(今上) 임신년(1752)에 증손 천록(天綠)ㆍ천근(天根) 등이 다시 나주의 대화 황산마을 뒤 임좌(壬坐) 언덕으로 옮겼다.
공은 강방(剛方)한 자질과 통민(通敏)한 재주가 있어 글을 읽으면 의리를 탐구하여 몸소 행하는 실상으로 삼고, 일을 당하면 시비를 따져 지당한 결론을 얻기에 힘썼다. 그래 겉치레를 끊고, 학문으로써 자처하지 않았다.
법도[繩墨]를 스스로 지켜 견해(見解)가 분명하고, 추향(趨向)이 바르며, 절개[操守]가 확고하며, 실천[踐履]이 돈독하여 절로 남들보다 뛰어나 실로 근세에 유학자라 자칭하는 자들이 미칠 바가 아니다.
일찍이 자제들에게 말하기를
“사람은 처사(處事)와 행기(行己)에 항상 일인자를 스스로 기약해야 할 것이며, 비록 일인자는 못될지라도 하등인(下等人)으로 추락하는 지경에는 이르지 않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나는 사람의 나쁜 짓을 보면 그것을 미워하는 뜻이 매우 심한데, 이는 지나친 처사이다. 그러나 악을 미워하지 않고 선을 행할 수 있는 자는 있지 않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내 평생 일찍이 악을 행하지 않았으나, 또한 감히 선을 행하지 못하였다. 지금 스스로 살펴보건대, 실로 너무 아쉽다.”
하였다.
그러나 이 몇 마디 말에서 평소의 자성(自省)과 용공(用功)의 대략을 볼 수 있다.
공이 세상을 떠나고 몇 년 후에 도내 사림이 본부(本府)에 통문(通文)하여 장차 제사(祭社)의 건립을 도모하려 하였는데, 제자(諸子)들이 ‘공의 겸양하는 평소의 뜻과 어긋나고, 또한 근세의 서원[儒院]이 명분을 좇을 뿐 숭봉(崇奉)하는 실상이 없다.’ 하여 극구 말리는 바람에 논의가 끝내 행해지지 못하였다.
저술한 시문(詩文)과 잡저(雜著) 몇 권이 집에 소장되어 있다.
비(妣)는 남양홍씨(南陽洪氏)로 부친 시태(時泰)는 음 현감(蔭縣監), 조부 치경(致慶)은 창릉 참봉(昌陵參奉)이다.
온후하고 완숙하여 매우 부덕(婦德)이 있었다. 시부모를 받들거나 공의 병을 수발할 때면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밤과 낮, 추위와 더위를 가리지 않고 20여 년을 하루처럼 하였으므로, 온 집안이 모두 경탄하였다.
그가 졸하자 시어머니가 매우 슬퍼하여 병을 얻었다. 공이 일찍이 말하기를
“내 평생 군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 설령 들었다 하더라도 내게 누가 될만한 것은 없었다.”
하였다. 공보다 25년 앞서 졸하였는데, 끝내 공과 한 무덤을 하였다.
〇4남 3녀를 두어 장남 후광(後光)은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극광(克光)은 통덕랑(通德郞), 도광(道光)은 선교랑(宣敎郎), 지광(知光)은 생원(生員) 창릉참봉(昌陵參奉)으로 모두 문행(文行)으로 세상에 이름을 드러냈으며, 장녀는 오형석(吳亨錫), 다음은 이천(李蒨), 다음은 이천삼(李天三)에게 출가하였다.
측실(側室)에 딸이 3인데, 고두절(高斗節), 이국창(李國昌), 고한익(高漢翼)에게 출가하였다.
〇후광이 1남 1녀를 두니, 아들 회명(會明)은 선교랑, 사위는 송유연(宋有淵)이다. 측실의 2남에 장남 회공(會恭)은 첨지(僉知), 회량(會良)은 선교랑이다.
〇극광이 3남 3녀를 두니, 장남 회통(會通)은 통덕랑, 회풍(會豊)은 통덕랑, 회중(會中)은 장사랑이며, 장녀는 송헌(宋櫶), 다음은 유문욱(柳文煜), 다음은 오상제(吳尙齊)에게 출가하였다.
〇도광이 3남 2녀를 두니, 장남 회겸(會謙)은 통덕랑, 회관(會觀)은 장사랑, 회점(會漸)은 통사랑이며, 장녀는 권혜경(權惠經), 다음은 송행(宋行)에게 출가하였다.
〇지광의 1남 회성(會盛)은 통덕랑이다.
〇오형석은 2남 4녀이니, 아들은 대연(大延), 대보(大輔)이며, 사위는 이언렬(李彦烈) 전적(典籍), 이재(李載), 백상하(白尙夏), 신창구(愼昌龜)이다.
〇이천은 2남 2녀이니, 아들은 사성(師聖) 진사(進士), 사현(師賢)이며, 사위는 최언䂓(崔彦䂓), 윤영적(尹英啇)이다.
〇이천삼은 1남 4녀이니, 아들은 징구(徵久)이며, 사위는 오시림(吳時臨), 윤제적(尹際啇), 안서침(安瑞琛), 신창원(愼昌遠)이다.
〇이국창은 3남 2녀인데, 아들에게 후사가 없다.
〇회명은 2남 3녀이니, 장남 천록(天祿)은 진사(進士)이며, 천복(天福)은 회풍의 뒤를 잇고, 장녀는 이유(李煣), 다음은 송정훈(宋廷勳), 다음은 임행원(林行遠)에게 출가하였다.
〇회통은 1남 2녀이니, 아들은 천덕(天德)이며, 장녀는 조윤림(曺潤臨), 다음은 이중렬(李重烈)에게 출가하였다.
〇회풍은 후사가 없어 회명의 아들을 아들 삼았다.
〇회중은 2녀이니, 장녀는 이성휘(李聖輝), 다음은 김습(金熠)에게 출가하였다.
〇회겸은 2남 1녀이니, 아들은 천형(天亨)이고, 딸은 신창휘(愼昌徽)에게 출가하였다.
〇회관은 2남 3녀이니, 장남은 천후(天垕)이고, 천중(天重)은 회승의 뒤를 잇고, 장녀는 기언복(奇彦復), 다음은 나석좌(羅碩佐)에게 출가하였다.
〇회점은 후사가 없다.
〇회성은 1남 2녀이니, 아들 천근(天根)은 진사이며, 장녀는 정력(鄭櫟), 다음은 고만언(高萬彦)에게 출가하였다.
〇천록은 1남 1녀이니, 장남 필의(必宜)는 통덕랑, 필기(必基)는 진사이다.
〇천덕은 2남이니, 장남 필태(必泰)는 음 사헌부감찰(蔭司憲府監察), 필항(必恒)이다.
〇천복은 2남으로 필우(必雨), 필두(必斗)이다.
〇천중은 4남으로 장남 필흠(必欽)은 통덕랑, 필심(必鐔)은 천후의 뒤를 잇고, 필감(必鑑), 필련(必鍊)이다.
〇천근은 1남으로 필겸(必兼)이다.
안팎의 적서(嫡庶)와 증손 현손 남녀의 숫자가 수 백인이다.
아, 공의 평생을 불초 후손이 헤아릴 수 있는 바 아니나, 큰 졸가리로 사람들 이목에 있는 것으로 논하건대, 경신(1680, 숙종6) 논변ㆍ병자(1636) 의거, 여러 명사와 왕복한 글, 두 정승의 추장하여 천거함이 반반하였음을 제가(諸家)의 야사(野史)에서 상고할 수 있다.
공의 인품과 공의 처지로 공의 식견과 공의 학문을 살아서는 당시에 한 번 시험해 보지 못하고, 죽어서는 후세에 알려지지 않는다. 심지어 지문(誌文)과 행장(行狀)에 관한 글 또한 유명(遺命)으로 감히 입언가(立言家)에게 부탁하지 않았다.
지금은 현인을 포상하고 의리를 장려하던 세상과 아득하니, 이 어찌 자손이 지극히 한탄할 뿐이겠는가. 역시 세상의 도리를 위해서도 불행일 것이다.
저술한 문장이 적지 않으나 일부 《만어(漫語)》에 실로 《춘추(春秋)》의 복수하고 설욕하는 뜻을 붙인 것이 있는데, 국가를 위한 대경륜(大經綸)이다.
공을 노 선생(老先生)이 천거하고, 도헌공(都憲公)이 부탁하였으니, 어찌 까닭 없이 그러하였겠는가? 다만 사우(士友) 간의 전송(傳誦)과 제현(諸賢) 간의 왕복에서 주워 모아 백세 후에 서둘러 기술하니, 아! 이 어찌 공에게 만에 일이라도 족하겠는가. 말을 제대로 할 이로 후세의 우옹(尤翁)을 기다리노라.
경진 4월 길일에 증손 진사(進士) 천록(天祿) 삼가 쓰다
龍江處士金公行狀
公諱汝錫, 字賚叔, 金氏係出新羅。羅季, 王子諱興光, 知國將亂, 出遯于光, 子孫因籍焉。高麗時, 連十世爲平章事。故世號其所居曰 “平章”。入本朝, 節度使諱宗衍、子直提學諱伯勻【避御諱去金傍】, 皆被尹彝ㆍ李初之禍。子諱子進, 官司正, 前朝啣也。麗末國初, 以罔僕之義, 入杜門洞, 趙松山、吉冶隱, 爲公先後者也。晩又退居于羅州之金井洞, 盖前朝賜牌地故也。扁其亭宇曰 “首山”。井曰“麗”。田曰“麗”。墻曰“麗”。統以號曰 “麗村”。我太宗朝, 以右議政三徵不就, 不見天日, 坐沒其齒。自是朝家有收錄之典。有諱衷孫, 蔭參判。諱崇祖, 以文章鳴世, 再登文科, 官弘文典翰, 至司諫院大司諫, 寔公五代祖也。高祖諱紀, 文科, 弘文典翰, 少有公輔望受知, 中廟恩遇殊常, 不幸早世, 未及大用。上悼惜甚, 特命官庇葬禮。曾祖諱景愚, 蔭佐郞、贈司僕寺正。祖諱大振, 官參奉、贈承政院左承旨, 以孫大司憲汝鈺貴也。考諱友亮, 通善郞, 文藝特異, 而養德林泉, 不就公車, 詩酒自娛。娶瑞山柳氏琢之女。以天啓壬子十一月十日生公。叔父通德郞公, 諱友憲, 娶完山李氏, 察訪晩翠堂黃鍾之女, 開國功臣裵悼公 □□之後也。不育取而子之, 公之始生, 仲父參判公, 夢龍駒乘雲奮飛, 入柳孺人寢所。及其遊戲, 已俊邁不群, 參判公奇愛之, 作志夢詩, 以示期待之意。九歲, 遭外艱, 持制如成人, 哭擗哀毁, 出於至誠。一日, 偶隨群兒, 乍出里外, 弔客適至, 哭婢出索, 不知所在。客去。生大人招而警誨之。自後, 不復離苫次。家本饒財, 有兩蒼頭所掌殖利穀物千餘石。公白李孺人, 取其券焚之, 一無所徵, 聞者以遠大期之。及長, 奉李孺人, 及本生父母, 志物之養, 咸備凡親意所欲, 無不竭力奉承。生母柳孺人, 以本家貧匱, 每當考妣諱辰, 欲致助祭之物。公輒具粢盛庶品, 以進柳孺人, 旣歿猶行之, 不廢以至終身。同氣之間, 友愛篤至: 伯氏家素淸寒,公常繼其調度, 至於公賦、絲穀之類, 亦自備納, 以不使伯氏知。以此吏胥之催賦者, 例不告伯氏而直告於公。伯氏之子, 有窮不能料生者, 割田民而給之, 使經紀産業。女弟有早寡無依者, 分與家基, 使之來居, 而敎育其子, 無異己出。甥姪有貧不能嫁其女者, 挈來于家, 具粧成禮而遣。待宗族甚厚, 有意外患難, 則盡心力而救之。又 每以孝悌敦睦之義, 勸勉後生, 使之熟口順耳。故雖族屬疎遠, 而猶有和敬之風, 奉先之道。務在經遠, 自葬埋祭祀, 至邱墓守護, 皆有規畫營度, 立爲定制。從兄都憲公, 以宗子係官在京, 每寄書于公曰: “統族人而奉先之道, 惟吾弟在, 吾無憂矣。” 訓諸子嚴而有方, 平居諄諄警誨, 而一有過擧, 則痛加鐫責, 雖細行、微事, 使不得自專。奇松巖挺翼嘗謂公曰 : “兄之四男, 俱可謂能子, 而兄之警飭, 不絶於口, 信乎兄家難爲子也。” 待人不爲表襮心, 所不可, 則未嘗屈意苟合, 鄕黨敬歎焉。御奴僕, 恩威竝行, 有忷使氣與人鬪鬨者, 則不問曲直加懲治。以此奴僕, 雖有桀黠者, 亦不敢崇飮自肆焉。先時宣廟己丑, 松江鄭相公澈, 以推官治逆獄, 公外祖李察訪書簡在崔永慶文書中。宣廟命拿問李公, 李公遂死於杖下。鄭相公深知李公, 雖有書簡事而心則無他, 請于上申李公寃。然公自學語在李孺人膝下, 習聞攻斥松江之語。十五歲, 取考東西分黨之由, 及己丑獄事始末, 白于李孺人曰: “外王考特以書簡事被禍, 宲非鄭相公之致之死也。且鄭相宲非小人, 而誣鄭相者, 徒歸於小人黨。慈敎雖有攻斥之語, 而小子自今不敢奉承, 故稟于母親。” 李孺人曰: “汝知讀書不能眛, 然於義理趨向言議, 汝可自諒爲之也。” 時, 畸庵鄭公在昌平庄舍, 聞公此事, 歎曰: “安有十歲兒, 辯別是非, 卓然樹立, 能如此者乎?” 崇禎己亥, 孝廟大喪時, 莊烈王后服制, 尤菴宋文正公獻議, 以朞年爲斷, 尹鑴、許穆等禮論紛然而起。公謂奇松巖曰: “鑴、穆等假托禮論, 欲售醜正之計, 誠無忌憚之小人。” 遂與奇公往復論辯, 破鑴穆等卑主貳宗之說, 而至賈疏長庶處, 與尤菴先生獻議, 略有異同, 而其大旨無不沕合。肅廟己卯, 尤菴先生以獻議事, 慍于群小, 荐棘長䰇。先是, 公誡飭子弟, 無參於疏章、通文。至是, 以此關係斯文, 而宲國家喪亡之源, 使仲子克光倡義, 士林上疏申卞。其後, 己巳, 尤菴先生卒被禍, 公擧 “人之云亡, 邦國殄瘁”之語, 私自隱慟。時, 國有慶科, 而不許子弟、門人赴擧。庚申更化之初, 以牛․栗兩先生從享事, 公書通于太學, 太學徧諭八路。因爲合疏, 竟得蒙允, 近百年斯文欠典, 一朝得擧, 盖由於公之主論也。當時, 諸賢如文谷金先生壽恒、靜觀李公端相, 皆以道義之交, 推許甚重, 而自更化以後黨禍作, 一時士流, 網打殆盡, 朝野恟惧者久矣。公雖在韋布, 論辯是非在往復書。故一時諸名勝, 皆以謂不可及終。使諸子從遊於兩先生門者, 知公之定見於趨向也。當丙子大駕之播遷也。公與從兄都憲公, 挺身奮義, 檄於列邑同志之士, 收取義穀, 將輸納於行在所, 以助軍國之用。調發兄弟家僮百餘人, 經營義旅, 都憲公同守咸平縣, 以爲轉進勤王之計。至丁丑春, 聞乘輿出城, 北向慟哭, 以其所取穀獻于朝家, 朝家分置列首出, 以報雪讐恥爲己任, 延攬英俊, 欲圖事功。尤菴先生, 以從氏都憲公才局, 可當一面, 薦朝家以畀西蕃備禦之任。上臨軒, 咨詢其設施之所當先者, 勞勉而遣之。都憲公旣感殊遇, 尤激忠憤, 思所以圖效聖念, 務竭心力。公在湖上, 聞此時機, 著當時之策, 以立紀綱、定民志、贍國用、嚴兵謨, 養士、取人、軍丁、田結、貨泉、戶籍、牛酒等法, 及備禦之方, 分条論列書送于都憲公任所, 以爲採用之, 萬一無何。孝廟賓天, 萬事瓦解。又遭都憲公之喪於翌年, 尤無意於世事, 韜晦林泉, 不求人知。遂名其所著曰 “漫語”。林滄溪泳、金農巖昌協取而見之, 亦皆獎許曰:“若能施用於當世, 可謂急病之良藥。” 天才明透, 少時讀書傳朞三百註, 數月潛究, 日月度數、氣朔盈縮, 洞曉無礙。後與白上舍弘源言之, 白公深加推服曰:“如某一生講究, 略曉梗槪。兄則不甚用工, 而能融會至此, 兄之識解, 眞不可及。” 其他經傳奧旨, 莫不延刃而解, 尤邃於經禮, 自儀禮、禮記, 至先儒註疏, 凡儀章度數、節文融殺, 亦皆硏究講磨, 而要必以行之於身爲務。文藝絶人, 凡有著述, 操筆立書, 理致明暢。如晴沙高公、畸庵鄭公莫不獎歎, 以作者稱之。丙辰冬, 入東堂試場, 考官皆時人, 策題問“君子楷範至當今說弊”, 顯有諷諭譏剌之態。公遂裹冊不製而出, 儒生從而不製者過半。有時人守宰, 同入場中, 目見其狀者, 言於方伯, 以公及梁公世南, 指爲首唱, 將肆侵斥, 而方伯賢而原之, 自後不汲汲於科名。生大人嘗謂公曰: “汝之廢科固極可尙, 而門戶之計, 亦不可不念。” 公以先志勉就公車, 盖嘗屢魁鄕試, 而輒屈禮部。雖入試場, 見不如意爻象, 則輒不製而出。嘗以都事親嫌, 避赴左試, 左道儒生, 忌公才名, 做成躛言, 排擯甚力, 遂至一場鬨亂。公進往主司之前, 詳言 “都事應避之嫌, 公文明白之狀”。且曰: “事雖如此, 以吾一人之故, 場屋鬨亂, 請開門出去。” 主司曰: “君之自處, 誠極歎尙。旦先呈之前, 不可開門。且公文明白如此, 豈以無賴輩讏言之故而遂自廢科乎?”公曰: “科名雖重, 士子處身, 何可苟也?” 遂端坐一處, 待先呈昂然而出來。主司使禮吏高聲告場中曰: “諸生須見長城儒生所處, 士子名節, 不當如是乎? 彼豈曲逕赴試者耶?” 公歸路, 遍遊福川山水, 有吾行不落寞, 勝賞冠平生。之句。雖平生所交遊, 位在通顯, 不肯先通書問。又未嘗以一善一藝自多。嘗有一學者問公曰: “近世梢有名稱者, 莫不以別號自居, 而以公文學、德望, 尙無別號, 將使學者, 何以稱之?” 公答曰: “別號豈人人之所宜有者耶?” 晩歲“龍江處士”之稱, 乃門人所尊而非公本意也。李相國尙眞與公所眛, 而聞公名嘗薦于朝, 文谷金文忠公, 亦以公名書送銓官, 而終不獲一命。抱負才學, 一不展布於世, 遂淪沒窮鄕。豈非命哉。一生沈痼, 調養有方, 每誦先賢“忘生詢欲”之語, 以爲至誡。故年踰七旬, 精力尙旺。一日偶感疾, 疾勢初不甚劇, 而自言無復回甦。遂處置後事甚詳悉, 仍語四男曰: “吾年踰七旬, 汝等皆在目前, 復何求哉。方當考終之日, 少無悽惋之念。” 過數日竟卒, 甲戌二月二十一日也。始葬靈光博山先塋之側後, 屢遷措, 今上壬申, 曾孫天綠․天根等, 又遷奉于羅州大化黃山村後, 壬坐之原。盖公有剛方之資、通敏之才, 讀書則探頤義理, 以爲躬行之宲。遇事則究核是非, 務得至當之歸。故遂絶去緣飾, 不以學文自處。繩墨自持, 見解之明, 趨向之正, 操守之固, 踐履之篤, 自有過人者。宲非近世, 以儒自名者, 所及矣。嘗語子弟曰: “人於處事、行己, 常以第一頭自期, 雖未必得第一頭, 可不至墜落下等人。” 又曰: “吾見人做惡事, 疾之之意甚固, 是徧處, 然未有不疾惡, 而能爲善者也。” 又曰: “吾平生未嘗爲惡, 亦不敢於爲善, 以此時自點檢, 宲多歉。” 然處此數款語, 亦可見平日自省、用功之大略也。公歿後幾年, 道內士林通文于本府, 將爲祭社之擧, 而諸子以非公謙揖素志, 且近世儒院徒徇名, 而無崇奉之宲, 力止之, 故議遂不行。所著詩文ㆍ雜著, 若干卷藏于家。妣南陽洪氏, 考時泰蔭縣監。祖致慶昌陵參奉, 溫厚婉淑, 甚有婦德, 事舅姑, 每侍公病, 竭心殫力, 不分晝夜寒暑者, 垂二十年如一日, 一門皆驚歎, 其卒也, 姑氏以哀傷致疾, 公嘗曰: “吾平生, 固不聽內言, 假令聽之, 亦無可爲吾累者。” 先公二十五年卒, 終與公同穴。有四男三女 : 長後光司憲府監察、次克光通德郞、次道光宣敎郎、次知光生員昌陵參奉, 皆以文行著聞於世。女長適吳亨錫、次適李蒨、次適李天三。側室女三 : 適高斗節、李國昌、高漢翼。後光有一男一女 : 男會明宣敎郎, 女宋有淵。側室二男 : 長會恭僉知、次會良宣敎郎。克光有三男三女 : 男長會通通德郞、次會豊通德郞、次會中將仕郎, 女長適宋櫶、次適柳文煜、次適吳尙齊。道光有三男二女 : 男長會謙通德郞、次會觀將仕郎、次會漸通仕郎, 女長權惠經、次宋行。知光一男 : 會盛通德郞。吳亨錫二男四女 : 男大延、大輔, 女李彦烈典籍、李載、白尙夏、愼昌龜。李蒨二男二女 : 男師聖進士、師賢, 女崔彦䂓、尹英啇。李天三一男四女 : 男徵久, 女吳時臨、尹際啇、安瑞琛、愼昌遠。李國昌三男二女 : 男無嗣。會明二男三女 : 男長天祿進士、次天福出後會豊, 女長適李煣、次適宋廷勳、次適林行遠。會通一男二女 : 男天德, 女適曺潤臨、次適李重烈。會豊無嗣子會明子。會中二女 : 女長適李聖輝、次適金熠。會
謙二男一女 : 男天亨, 女適愼昌徽。會觀二男三女 : 男長天垕、次天重出後會升, 女長適奇彦復、次適羅碩佐。會漸無嗣。會盛一男二女 : 男長天根進士, 女適鄭櫟、次適高萬彦。天祿二男一女 : 男長必宜通德郞、次必基進士。天德二男 : 長必泰蔭司憲府監察、次必恒。天福二男 : 長必雨、次必斗。天重四男 : 長必欽通德郞、次必鐔出後天垕、次必鑑、次必鍊。天根一男 : 必兼。內外嫡庶, 曾玄男女, 總數百人。嗚呼! 公之平生, 非不肖後孫, 所可涯涘, 而以大節之, 在人耳目者言之。庚申之論辯、丙子之義擧, 諸名勝往復之褉、兩相抽獎之薦, 斑斑可考於諸家野史。 以公之人、以公之地, 以公之識、以公之學, 生未一試於時;沒未有聞於後。至於誌狀文字, 亦以遺命不敢求托於立言之家。只今寥寥於褒賢獎義之世, 此豈旦子孫之至恨, 亦可爲世道之不幸。所著文章, 不爲不多, 而一部漫語, 宲有寓於春秋復雪之義, 爲國家大經綸。老先生之薦, 都憲公之託, 於公, 豈無所以然而然哉? 只以掇拾於士友之傳誦, 諸賢之往復者, 草草記述於百歲之後。嗚呼! 此豈足爲萬一於公哉。語之至者以俟後之尤翁焉。庚辰四月吉日曾孫進士天祿謹狀
첫댓글 행장이 조금 긴데
애쓰셨네요.^^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