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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여:BC 1세기경부터 30년 동안 퉁구스계의 부여족이 세운 나라이다. 부여는 토지가 광활하고 농업을 하기에 적합한 지금의 북만주 눙안 ·창춘 일대에서 농업을 주로 하면서 궁실 ·성책 ·창고 ·감옥 등 진보된 조직과 제도를 가졌던 나라이다. 정치는 완전한 귀족정치로서 지배계급에는 왕과 그 밑에 가축의 이름을 붙인 마가 ·우가 ·저가 ·구가와 대사) ·사자(使者) 등의 관직이 있었으며, 또 전국을 사출도(四出道) 혹은 사가도(四街道)라 칭하는 지역으로 나누어 마가 ·우가 등의 제가(諸加)가 각각 그 일부 지역을 맡아 다스렸다. 사출도 중의 큰 지역은 수천 호(戶), 작은 것은 수백 호가 되었다. 피지배계급인 하호(下戶)는 모두 노예에 속하였다고 한다.
산업은 농경을 주로 하였고, 명마(名馬) ·적옥(赤玉) ·미주(美珠) ·돈피(皮) 등이 산출되었고, 풍속 중에는 영고(迎鼓)라는 제천대회(祭天大會)가 있었고, 법률이 매우 엄정하여 도둑질 ·간음(姦淫) 등에 대하여는 특히 엄벌하였다. 부여의 주위에는 서쪽으로 선비(鮮卑) ·오환(烏桓), 동쪽에는 읍루(婁),남쪽으로는 고구려와 한(漢)나라의 현도군(玄郡)이 인접해 있었다. 해부루왕(解夫婁王) 때 아란불(阿蘭弗)의 권고로 가섭원(迦葉原)으로 서울을 옮긴 후부터는 동부여라고 칭하였다. 가섭원은 지금의 강원 강릉시 일대이다. 후에 동부여의 땅은 모두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다.
2.공주:.. 면적 940.64㎢, 인구 13만 5589명(2001)이다. 동쪽은 대전광역시와 충청남도 연기군, 서쪽은 예산군·청양군, 남쪽은 논산시·부여군, 북쪽은 아산시·천안시와 접한다.
차령산맥(車嶺山脈)이 북동에서 서남으로 뻗어 무성산(茂盛山:614m) 등 여러 산을 형성하고 있고, 남동부에는 계룡산(鷄龍山:845m) 지괴가 있다. 그러나 대개 해발고도 200∼300m 정도의 구릉성 산지가 많다.
금강이 중앙부를 대체로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면서 많은 지류와 합류하고 하천 양안에 약간의 평야를 이루어 놓았다.
지질은 선캄브리아대에 속하는 변성암류·편마상화강암류, 중생대의 화강암류, 경상계 퇴적암류·안산암반암류 등으로 이루어졌다. 토양은 금강 북쪽은 갈색·담황갈색의 양토 및 세치양토이며, 남쪽은 암색의 양토·치양토이다.
내륙지역에 위치하기 때문에 기온의 연교차가 심한 대륙성 기후를 나타낸다. 연평균기온 12℃, 1월 평균기온 -3.5℃, 8월 평균기온 26.2℃, 연평균강수량은 1,329.6mm이다.
3.부여 박물관:국립부여박물관은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70년 전인 1929년 재단법인'부여고적보존회(扶餘古蹟保存會)'가 발족되어 백제 문화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가지고 부여의 여러 유적과 유물을 보존하려고 힘썼다. 그 뒤, 이 단체를 중심으로 하여 백제의 유물을 중심으로 문화재를 하나 둘씩 모아, 부소산 남쪽에 자리한 조선시대의 건축물인 관아의 객사에 전시하여 여러 사람에게 보여주었다
4.부여박물관: <국립부여박물관 전경>
이것이 국립부여박물관의 처음 모습이라 할 수 있다. 1939년부터는 '조선총독부 박물관 부여분관'이라 하여 비로소 '부여박물관'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으며, 1945년 해방이 되자 '국립박물관 부여분관' 으로 이름을 고쳐 쓰게 되었다.
백제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소장 유물의 보존과 전시를 보다 새롭게 하기 위하여, 1970년에는 부소산 남쪽기슭에 새 박물관을 지어 부여지역을 비롯하여 백제권에 흩어진 백제문화유물을 중심으로 전시하였다. 그러나 점차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전시유물이 늘어나게 되고, 사회교육시설 등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아 박물관이 제구실을 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아서 지금의 박물관으로 옮겨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4.공주 박물관:국립공주박물관은 일제시기인 1935년 공주사람들이 이 지역의 백제문화를 보존하기 위해 만든 공주고적보존회(公州古蹟保存會)를 모태로 생겨났다. 이후 1940년의 공주사적현창회(公州史蹟顯彰會), 1946년 국립박물관 공주분관(公州分館)을 거쳐, 1975년 국립공주박물관으로 승격되었다. 일제시기부터 1972년까지는 공주의 옛 관아건물인 선화당(宣化堂)을 공주박물관 정원에 옮겨 박물관으로 사용하였는데, 1971년 기적적으로 발견되어 조사된 무령왕릉 출토품을 전시하기 위하여 현재의 박물관을 신축하였고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의 대부분을 전시하고 있다.
공주박물관에서 하는 일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가장 중요한 일이 공주를 비롯한 충남북부지역에서 출토된 많은 발견 발굴매장문화재를 안전하게 보존 관리하는 것이다. 각지에서 발견되고 발굴조사된 유물은 우리 국민 모두의 재산이므로 이를 국립박물관에서 안전하고 체계적인 방법으로 보관 관리하고 있으며, 그 중 학술적 가치가 높은 중요유물은 관람객과 전문 연구자들이 쉽게 살펴볼 수 있도록 전시하고 있다.
이외에도 유적발굴조사와 사회교육활동도 꾸준히 실시하고 있다. 그동안 공주박물관에서 발굴 조사한 주요 유적으로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방어취락인 부여 송국리(松菊里)유적, 원삼국(原三國) 초기백제의 무덤인 공주 하봉리(下鳳里)와 천안 화성리(花城里)유적, 백제시기의 산성인 대전 월평동(月坪洞)유적, 백제시기의 제사 취락지인 공주 정지산(艇止山)유적이 있다.
그리고 매년 5월에는 공주시내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하여 ‘어린이문화재 미술실기대회’를 열어 미래의 주인공이 될 어린이들이 우리 문화재를 사랑하고 우리 문화유산의 중요성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 있으며, 7월에는 교사와 시민을 대상으로 ‘문화학교-전통공예교실’을 개최하여 전 시민이 우리의 전통문화에 대한 애착심과 자긍심을 가지도록 홍보와 교육활동을 실시하고 있다.
전시실은 2실로 구성되어 있다. 제1실(2층)은 무령왕릉 출토품을 전시하고 있으며 제2실(1층)은 충남지역 출토유물을 시대순으로 전시하고 있다. 특히 제1실은 무령왕릉의 실제크기로 모형분을 만들어 왕릉 내부를 관람할 수 있도록 하였다. 정원에는 공주 일원에서 출토된 많은 석조유물이 전시되어 있고, 유물 사이사이에 수륜(樹輪)이 약 70년 이상 된 금송(金松)과 잣나무를 비롯하여 아름드리의 벚나무 수십 그루가 있어 시민들의 편안한 휴식공간이 되고 있다. 현재 상설 전시실에는 국보 14건 19점, 보물 4건 4점 등을 포함하여 중요유물 약 1,00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5.무녕왕릉 :무령왕릉 금제 관식(왕)(국보 154호)
얇은 금판에 아름다운 인동문을 투각
해 놓았는데 1쌍이 출토되었다. 좌우
로 벌어진 줄기에는 중간에 꽃모양을
배치했으며 그 선만은 모두 길게 연장
되면서 화염 모양을 이루고 있다.앞면
에는 많은 금제 영락을 달아서 한층 더
화려하게 만들었다.
무령왕릉 금제 수식부 이식(왕비)
(국보 157호)
세환에 또하나의 고리를 연결하고
거기서 2줄의 수식을 매달았다.긴
수식은 금철사를 꼬아서 만든 사슬
에 둥근 영락을 많이 달아 놓은 형식
인데 아래쪽 끝에는 누금세공의 캡
을 씌운 금제 원봉형 장식을 달았다.
또 하나의 짧은 수식은 심엽형의 영
락을 3단에 걸쳐 달았으며 끝에는 나무열매처럼 생긴 수식을 달아 놓았다. 첫번째
의 영락 끝에는 누금세공의 캡에 푸른 유리옥을 감장한 것이 하나 있는데 위에도
같은 형태의 캡을 배치하였다.
무령왕릉 금제 뒤꽂이(왕)(국보 159호)
꼬리가 긴 새 모양의 뒤꽂이로 위쪽 중앙에는
새머리 같은 작은 보주형이 달려있다. 머리에 꽂
히는 부분은 3갈래로 갈라져 있으며 날개에 해당
하는 부분 좌우에는 주문을 하나씩 배치하고 아
랫도리는 일종의 섬세한 당초문으로 빈틈 없이
메워 놓았다. 이 문양들은 모두 한쪽에서 두드려
낸 타출법을 쓰고 세부에 대한 표현에는 선각을
아울러 쓰고 있다.
무령왕릉 석수(국보 162호)
왕릉의 연도 중앙에 놓여 있던 석수로
한국에서는 처음 출토되었다.신앙적 성
격을 띤 상상의 동물로 머리에는 쇠로
만든 뿔이 하나 있고 몸뚱이 양측면에는
불꽃 같은 날개가 표현되어 있다.온몸을
채색했었지만 흔적만 남아 있다.
석재는 각섬석이다.
무령왕릉 지석(국보 163호)
발견된 지석은 2개인데 하나는 6행에
걸쳐 새겨진 글자에 사마왕(무령왕)이
523년에 사망하였다는 기록이 새겨져
있다. 이는 삼국사기 기록과 일치된다.
또 하나의 지석은 왕비에 관한 기록이
있으며 뒷면에는 땅의 신으로부터 돈을
주고 묘터를 사들인다는 내용의 매지문
이 새 겨져 있다.
6.공주 송산리 고분:송산리는 공주가 시로 승격되기 전의 지명이다. 현재는 공주시 금성동으로 지명이 바뀌었다. 백제는 475년 개로왕 때 고구려 장수왕의 한성 함락으로 그 아들 문주왕이 웅진으로 천도하게 된다. 문주왕 때부터 성왕 때까지(475-538) 백제의 수도였던 공주 주위에는 돌방무덤(石室墳)·벽돌무덤(塼築墳)·독무덤(甕棺墓)·널무덤(土壙墓) 등 다양한 백제시대의 고분들이 산재해 있다.
공주시 금성동의 공산성이 바라다 보이는 송산 언덕에는 백제시대의 큰 무덤이 10여기가 있는데, 이들을 송산리 고분이라고 부른다. 능선 오른쪽에 1∼4호분이 있고, 왼쪽에 5∼7호분이 있다. 1927년 1∼5호분이 조사되었고, 6호분(벽돌무덤)은 1933년 일본인 가루베(輕部慈恩)에 의해 조사되었다. 1971년 5호분과 6호분의 보수 공사 때 무령왕릉이 발견되었다.
1-5호 무덤은 돌방무덤(石室墳)이며, 6호분과 무령왕릉(7호분)은 벽돌무덤(塼築墳)이다. 6호분은 벽돌 벽면에 진흙칠을 하고 그 위에 사신도를 그렸었다. 무령왕릉에는 벽화를 그린 흔적이 없다. 지금 금성동에는 입구쪽에 무령왕릉 모형 전시관이 만들어져 있고, 돌방무덤인 5호분과 벽돌무덤인 6호분 및 무령왕릉을 연도(羨道)를 통해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있도록 해 놓았다. 무령왕릉에서 나온 유물의 대부분은 공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으므로, 송산리 고분군을 관람할 경우 반드시 박물관에 들려 출토 유물을 함께 관람하는 것이 좋다.
7.부소산성:5호. 사비성(泗城)이라고도한다. 이 산성은 부소산의 산정을 중심으로 해서 1차적으로 테뫼식(式) 산성을 축조하고, 다시 그 주위를 포곡식(包谷式)으로 약 1.5km에 걸쳐서 축조하였다. 현재 반월루(半月樓)가 있는 곳에서 산정을 두른 약 600m의 테뫼식 산성 안에는 영월루(迎月樓)와 군창지(軍倉址) 그 밖의 건물터 등이 있는데, 이곳에서는 탄화미(炭化米)가 많이 나오고 있는가 하면 토축(土築) 성벽도 완연히 남아 있다. 이 부소산성은 538년(성왕 16) 웅진(熊津)에서 이곳으로 천도한 때를 전후하여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8.낙화암:충남 부여군 부여읍 부소산(扶蘇山)에 있는 바위서기 660년(백제 의자왕 20) 백제가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의 침공으로 함락되자 궁녀 3,000여 명이 백마강(白馬江) 바위 위에서 투신하여 죽었다고 한다. 그 바위를 사람들이 낙화암이라고 불렀는데, 이 암석 위에 1929년 다시 그곳 군수 홍한표(洪漢杓)가 백화정(百花亭)을 지었고, 절벽 아래에는 ‘낙화암(落花岩)’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9.계룡산:높이는 845m이다. 주봉인 천황봉을 비롯해 연천봉·삼불봉·관음봉·형제봉 등 20여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졌으며, 전체 능선의 모양이 마치 닭볏을 쓴 용의 형상을 닮았다 하여 계룡산이라고 불린다.
신라 5악(五嶽) 가운데 하나로 백제 때 이미 계룡 또는 계람산, 옹산, 중악 등의 이름으로 바다 건너 당나라까지 알려졌으며, 풍수지리상으로도 한국의 4대 명산으로 꼽혀 조선시대에는 이 산 기슭에 새로이 도읍지를 건설하려 했을 정도이다. 특히 《정감록(鄭鑑錄)》에는 이곳을 십승지지(十勝之地), 즉 큰 변란을 피할 수 있는 장소라 했으며 이러한 도참사상으로 인해 한때 신흥종교 및 유사종교가 성행했으나 종교정화운동으로 1984년 이후 모두 정리되었다.
지질은 대체로 중생대 쥐라기·백악기에 형성된 화강암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차령산맥이 금강에 의해 침식되면서 형성된 잔구성 산지로서 산세가 웅장하고 경관이 뛰어나다. 노성천·구곡천·갑천·용수천 등이 발원하여 금강으로 흘러든다. 연평균기온은 11℃ 내외, 연강우량은 1,280mm이며 6~9월에 강우량의 90%가 집중된다.
각 봉우리 사이에는 7개의 계곡과 3개의 폭포가 있어 운치를 더해주며, 자연경관이 빼어나 1968년 12월 31일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특히 계룡팔경은 대표적인 관광명소인데 제1경은 천황봉의 일출, 제2경은 삼불봉의 설화(雪花), 제3경은 연천봉의 낙조(落照), 제4경은 관음봉의 한운(閑雲), 제5경은 동학사 계곡의 숲, 제6경은 갑사 계곡의 단풍, 제7경은 은선폭포, 제8경은 오누이탑의 명월(明月)을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