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銅) : ‘구리’를 일컫는 한자말.
‘구리가 모자란다.’는 근심은 (명나라 – 옮긴이 잉걸. 아래 ‘옮긴이’) 이전 시대에도 이미 얘기되었다. ‘강엄(江淹. 제하[諸夏] 남조[南朝] 시대에 살았던 ‘한족[漢族]’ 벼슬아치이자 문인. 서기 444년에 태어나 서기 505년에 세상을 떠났다. 유송[劉宋]/남제[南齊]/양[梁] 세 왕조를 섬겼으며, 문학을 즐겼고, 유교/불교/도교에 통달하였다 – 옮긴이)’이 말하길 “옛날의 검[古劍]은 구리를 많이 썼다(서주[西周] 시대나 춘추전국 시대에 청동기로 병장기를 만들어 썼기 때문에 제하 남북조 시대의 사람인 강엄이 이런 말을 한 듯하다 – 옮긴이).”고 했는데,
‘곤오(昆吾[검의 이름 – 옮긴이])’/‘구야(歐冶[춘추시대 말 ~ 전국시대 초에 살았던 월(越)나라의 대장장이. 여기서는 이 사람이 만든 검들을 일컫는 말로 쓰였다 – 옮긴이])’ 같은 종류들이 모두 구리(사실은 구리와 주석을 녹인 뒤 그 둘을 섞어서 만든 쇠붙이인 청동 – 옮긴이)였다.
(옛 기록에 따르면, - 옮긴이) 초(楚)나라 자작이 정(鄭)나라 백작에게 금(동)을 주면서 “‘(이 구리를 – 옮긴이) 병장기로 만들지 마십시오.’하고 맹약했기에, (정나라는 – 옮긴이) 이것으로 세 개의 종을 만들었다.”고 했다.
옛날의 금(金)에는 세 가지 등급이 있는데, 검은 금(흑금[黑金])은 철이고, 붉은 금(적금[赤金])은 구리이며, 누런 금(황금[黃金])은 (금덩이의 재료이자, 귀금속인 – 옮긴이) 금이다.
하(夏)나라 시대에 (하나라의 – 옮긴이) 아홉 제후들이 (하나라 왕실에 – 옮긴이) 금(실제로는 구리인 적금으로 보인다 – 옮긴이)을 바쳤는데, 마침내 (그것들을 – 옮긴이) 녹여 ‘형산’ 아래에서 정[鼎. ‘솥’/‘세 발이 달리고 귀가 둘 달린, 먹을거리를 익히는 데 쓰이는 기구’ - 옮긴이]으로 만들었다.
‘동안우(董安于. 서기전 453년, 제하[諸夏 : 수도 북경(北京)]의 전국시대 초기에 활동했던 진[晉]나라 사람 – 옮긴이)’가 ‘진양’의 공궁을 다스릴 적에 공궁의 집들 모두 제련한 구리로 기둥을 만들라고 명령했다.
형가(荊軻. 전국시대 말기의 협객. 연나라 태자에게 고용되어 그를 위해 영정[시호 ‘진시황’]을 죽이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 옮긴이)가 진왕(이름은 ‘영정’ – 옮긴이)을 공격할 적에 (칼로 – 옮긴이) 구리 기둥을 맞혔다.
또 시황제(영정 – 옮긴이)가 천하의 병장기(兵仗器. 예전에 병사들이 쓰던 온갖 무기 – 옮긴이)를 거두어 녹인 뒤 금인(金人) 열두 명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는 – 옮긴이) 곧 동인(銅人. 구리[銅]로 만든 사람[人]의 형상 – 옮긴이)이다.
오왕 ‘합려’의 무덤은 동곽을 세 겹으로 만들었고, 진시황의 무덤 또한 구리로 관/곽(槨. 순수한 배달말로는 ‘덧널’. 관을 담는 궤를 일컫는 말이다 – 옮긴이)을 만들었다.
전국시대부터 진(秦)나라 때(진 제국 때 – 옮긴이)까지 [제하(諸夏)가 – 옮긴이] 전쟁과 분란 중(가운데 – 옮긴이)[에 있는지라 – 옮긴이] 구리는 (병기로 쓰기에 – 옮긴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청동의 재료가 되는 구리 대신 – 옮긴이) 철로 모자라는 것(수요 - 옮긴이)을 채웠다.
(그 때가 되면 – 옮긴이) 구리를 가지고 병장기를 만드는 것은 이미 어려워졌고, 철을 구하기는 아주 쉬웠기에, 구리로 만든 병장기는 점차 적어지고 철로 만든 병장기가 많아졌다.
(다시 말해, 제하[諸夏]에서 청동기 시대가 끝나고 철기시대가 열린 까닭은 전국시대의 잦은 전쟁으로 병기가 모자라게 되었기 때문이고, 청동의 재료인 구리와 주석은 묻힌 양이 적지만, 쇠의 재료인 철광석은 많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다 – 옮긴이)
(쇠로 병장기나 생활용품을 만드는 일은 – 옮긴이) 해를 더할수록 점차 번지고 유행하고 옮겨져서 마침내 풍속이 되었다. 철(쇠 – 옮긴이)을 다루는 장인이 (서로 – 옮긴이)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많아진 까닭에, 청동을 다루는 장인은 점점 사라졌다.
양한(兩漢. 두[兩] 한[漢]나라. 전한 왕조와 후한 왕조를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 옮긴이) 시대에는 그 미약함을 더 볼 수 있다. 건안 24년 “위나라 태자 조비(조조의 아들 – 옮긴이)는 세 개의 보도(寶刀. 보배로운[寶] 칼[刀] - 옮긴이)와 두 개의 비수(匕首. 날이 날카로운 단도 – 옮긴이)를 만들었다.”라고 했는데, (그 때가 되면 – 옮긴이) 천하에 수없이 두들겨서 만든 정교한 기물은 모두 철로 만들었으니, (제하[諸夏] 사회는 – 옮긴이) 구리 주조로 돌아갈 수 없었다.
역사(歷史. 순수한 배달말로는 ‘갈마’ - 옮긴이)를 살펴보건대, 한나라 이후부터 구리로 만든 기물은 사라져 적어지고, 위나라 명제(이름은 '조예' - 옮긴이)만이 동인 두 개를 만들어 ‘옹중(翁仲)’ 이라고 불렀고, 또 황룡과 봉황 하나씩을 (구리로 – 옮긴이) 만들었다.
그리고 측천무후(이름은 ‘무조[武照]’. 제 1 당[唐] 왕조를 무너뜨리고 무주[武周] 왕조를 세운 사람이다 – 옮긴이)도 구리를 녹여 구주(九州. 아홉[九] 고을[州]. 의역하자면 ‘온 누리’/‘온 천하’라는 뜻이다 – 옮긴이)를 상징하는 솥을 만들었는데, (이 솥을 만드는 데 – 옮긴이) 구리 56만 712근을 썼다.
이 밖에는 조용할 뿐 (주목할 만한 특별한 사례를 – 옮긴이) 듣지 못했고, 동마(銅馬[구리로 만든 말 – 옮긴이])/동타(銅駝[구리로 만든 낙타 – 옮긴이])/동궤(銅匭[구리로 만든 상자 – 옮긴이]) 같은 종류가 있는 데 그칠 뿐이다.
『 통감( 『 자치통감 』 을 줄인 말 – 옮긴이 ) 』 에는 “후주(後周)의 세종 현덕 원년 9월 병인일에 구리를 채굴하고 (그것으로 – 옮긴이) 동전을 주조하는 감독관청을 세우도록 명령했는데, (거두어들인 구리는 – 옮긴이) 현 관리의 물건이나 군대의 기물, 절의 도관, 종(鐘)/경(磬[악기의 일종인 경쇠 – 옮긴이])/발(鉢. 불교 승려들의 밥그릇인 ‘바리때’ - 옮긴이)/탁(鐸. 방울/작은 경쇠 – 옮긴이) 종류는 아니었다.
남겨 놓도록 허락한 것 이외에 민간에 남은 구리 기물과 불상은 50일 이내에(안에 – 옮긴이) 모두 관청으로 보내고, (대신 백성들이 관청에서 – 옮긴이) 그 (구리의 – 옮긴이) 값을 받아 가도록 명령했다.
(만약 – 옮긴이) 기간이 경과해도(지나도 – 옮긴이) (구리를 – 옮긴이) 은닉하고(몰래 숨기고 – 옮긴이) 내놓지 않을 때는, (숨긴 구리가 – 옮긴이) 다섯 근 이상일 경우 죽음으로 죄를 다스렸다. (숨긴 구리의 양이 – 옮긴이) 다섯 근에 미치지 못하는 자는 차등해서 형벌을 따졌다.
황제(후주의 세종? - 옮긴이)께서 주변 신하에게 말씀하시길,
‘경들이 불상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고 하니, (그 말을 하는 까닭이 – 옮긴이) 의심스럽다. 불교는 선한(착한 – 옮긴이) 가르침으로 사람을 교화한다니, 진실로(참으로 – 옮긴이) 선함(착함 – 옮긴이)에 뜻을 두는 것이 부처(붓다 – 옮긴이)를 받드는 것인데, 저 동상(불상 – 옮긴이)을 어찌 (참된 – 옮긴이) 부처라고 말하겠는가? 또한 내 듣자니 불교의 참 뜻은 비록 머리와 눈을 버릴지라도 보시(布施. 불교 용어. <펴고[布] 넓게 전하여짐[施]>/<돈[布]을 베풂[施]> → 자비심으로 불법[불교]과 재물을 베풂 – 옮긴이)하여 사람을 이롭게 하는 데 있다고 했다.
만약 짐이 몸소 백성을 구제할 수 있다면 [동전을 만들려고 재료가 구리인 – 옮긴이] (불상을 부숴 버리는 것) 또한 애석해할 바가 아니다.’라고 하셨다.”라는 말이 나온다.
『 오대사(五代史. 오대십국 시대 가운데 북중국인 화북 지방에서 세워지고 망한 다섯 ‘왕조’인 후량/후진/후당/후한/후주의 갈마[‘역사’]를 다룬 책. 『 구오대사(舊五代史) 』 와 『 신오대사(新五代史) 』 라는 두 종류가 있다 – 옮긴이) 』 에는
“고리(高麗. 여기서는 왕건이 세운 ‘후기 고리’를 일컫는 말로 쓰였다 – 옮긴이) 땅에서는 구리와 은이 나온다. 후주 세종 때에 상서수부원외랑 ‘한언경(韓彦卿)’을 보내 (후주에서 짠 – 옮긴이) 비단 수천 필로 고리(高麗)에서 구리를 거래하여 (그것을 후주로 가져와 – 옮긴이) 동전을 만들었다(그러니까, 후기 고리와 후주가 공무역을 했다는 이야기다. 후기 고리는 자신의 땅에서 캐낸 구리를 한언경에게 주었고, 한언경 일행은 그 대가로 후주산[産] 비단 수천 필을 준 것이다. 제하[諸夏]의 비단은 한[漢]나라 때부터 품질 좋은 고급 옷감임을 인정받았고, 그래서 종이나 도자기와 마찬가지로 제하의 중요한 수출품이었다 – 옮긴이).
현덕(顯德) 6년(서기 959년 – 옮긴이) 고리(高麗) 왕(실제로는 후기 고리의 천자/황제. 제하[諸夏] 한[漢]나라 이후 ‘한족[漢族]’들은 ‘한족’의 임금만 ‘황제’로 부르고, 다른 나라의 임금들은 설령 실제로는 천자나 독립국가의 군주라 하더라도 [황제의 제후를 일컫는 말인] ‘왕’이나 ‘후’로 낮춰서 불렀다. 그리고 ‘한족’의 ‘황제’는 시호/묘호/연호로 불러야지 성씨나 이름으로 부르면 안 된다고 강조하면서도, 이른바 ‘오랑캐’의 임금은 성씨나 이름을 막 불렀고, 그들을 다룬 글을 적을 때도 그들의 성씨나 이름을 드러냈다. 동아시아 사회에서 상대방의 이름을 막 부른다는 건, 상대방이 나보다 나이가 적거나, 신분이 낮거나, 동무거나, 아니면 사이가 아주 나쁜 사람일 때에만 가능한 일이었으므로, 이는 ‘한족’ 사관[史官]이나 글쟁이들이 다른 나라의 임금들을 ‘깎아내리거나, 욕하거나, 막 다뤄도 되는 하찮은 아랫것/꼴도 보기 싫은 상대’로 여겼다는 뜻이다 – 옮긴이) 왕소(王昭. 시호 ‘광종[光宗]’. 성이 왕씨고 이름은 소다 – 옮긴이)가 (후주로 – 옮긴이) 사신을 보내 황동(黃銅. 누런[黃] 구리[銅] → 구리와 아연의 합금. 황금빛을 띄며, 순수한 배달말로는 ‘놋쇠’로 부른다. 동전이나 놋그릇이나 악기나 가구의 장식품이나 그 밖의 다른 공예품들을 만들 때 많이 쓰인다 – 옮긴이) 5만 근을 바쳤다.”
(제하[諸夏]의 전근대사회에서, ‘한족[漢族]’ 사관들은 제하 밖의 다른 나라들과 공무역을 한 사실을 ‘오랑캐 나라가 조공했다.’/‘오랑캐 나라가 “중국/중화”에 물건/짐승을 바쳤다.’고 썼으므로, 이 기사는 실제로는 서기 959년에 후기 고리의 황제인 광종이 후주로 사신을 보내 많은 놋쇠를 주고, 그 대가로 후주에게서 다른 물자를 얻어간 사실을 다룬 것이라고 – 그러니까, 두 나라 사이의 또 다른 공무역을 다룬 기록이라고 – 봐야 한다 : 옮긴이)
라고 적혀 있다.
- 『 일지록( 日知錄 ) 』 「 동( 銅 ) 」
▶ 옮긴이(잉걸)의 말 :
내가 이 글을 여러분에게 소개하는 까닭은, 이 글이 동아시아 사회이자 문명에 속하는 제하(諸夏)가 청동기를 버리고 철기를 쓰게 된 까닭을 정확하고 간단하게 설명하기 때문이다(단, 나는 고 선생이 이 글에서 전쟁뿐 아니라 철제 농기구의 높은 생산력과 철제 도구의 효율성도 전국시대의 제하 사회가 철기를 쓰게 된 까닭임을 거론하지 않은 것은 이 글의 한계라고 생각한다). 비록 명나라 말 ~ 청나라 초에 ‘청동기시대’나 ‘철기시대’라는 말은 없었지만, 당시 ‘한족’ 지식인은 선대(先代)인 전국시대에 사람들이 주로 쓴 쇠붙이가 청동에서 쇠로 바뀌었다는 건 알았고, 그것이 사회의 변화를 불러왔음도 알았다. 그것은 그런 사실 자체를 알지 못한 상태보다는 훨씬 나아진 것이다.
그리고 다른 까닭도 있다. 고 선생이 인용한 역사서( 『 오대사 』. 그러나 『 구오대사 』 인지 『 신오대사 』 가운데 어느 쪽 책인지 모르겠다 )에 서기 10세기 중반 후기 고리(高麗)가 오대(五代) ‘왕조’들 가운데 하나인 후주(後周)와 공무역(公貿易. 공적인 무역. 동아시아의 전근대사회에서 나라와 나라 사이의 무역을 일컫는 말이다. 주로 ‘조공’이라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을 했다는 사실이 실렸기 때문이다.
이는 후기 고리 광종의 업적들에 ‘다른 나라와 무역을 하여 자신의 나라를 부유하게 했다.’는 것을 덧붙일 근거가 된다.
또한 이 공무역이 구리를 주고 대신 비단을 받는 (또는 놋쇠를 주고 그 대신 다른 물자를 대가로 받는다는) 일종의 ‘물물교환’ 형태로 이루어졌으므로, 이 기록은 중세 동아시아의 공무역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사료다.
나는 이 세 가지 까닭 때문에 이 글을 여러분에게 인용/소개하기로 했으며, 부디 이 글이 여러분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 단기 4357년 음력 3월 21일에, ‘이제 우리는, 대한제국이나 근세조선 뿐 아니라 후기 고리(高麗)의 갈마(“역사”)와 문화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여기는 잉걸이 올리다
첫댓글 "그러나 『 구오대사 』 인지 『 신오대사 』 가운데 어느 쪽 책인지 모르겠다."라는 문장을 '그러나 『 구오대사 』 <와> 『 신오대사 』 가운데 어느 쪽<을 인용했는지는> 모르겠다.'로 고칩니다. 저도 방금 전에야 이 문장이 잘못된 것임을 알았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신경 써서 글을 올리고, 글을 다 올리고 나서 잘못된 부분이 있는지 없는지 제대로 확인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