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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성하기자 2014-04-20 7:35 am
이번에 소개하는 탈북수기는 북한에서 군관의 아내로, 음악교사로 살다가 한국으로 탈북해 한 예술단체에서 공연을 하고 있는 여성의 구술 증언을 정리한 수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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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함경북도 무산읍에서 딸만 다섯인 집안의 넷째로 태어났다. 7살 때 아버지가 근무하시던 군부대가 청진으로 이전하게 되면서 우리 가족도 함께 이사한 후 탈북할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지금 부모님은 돌아가시고 형제들은 북한에 남아있다. 내 어린 시절부터 남한으로 오기까지의 여정을 담담하게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나는 아버지가 근무하시는 군부대 부속 유치원에 다니면서 교육받았다. 어릴 적부터 음악에 남다른 소질을 보였다. 북한에서는 아코디언이란 악기를 구하기 어려웠지만, 내 재능을 눈여겨보신 아버지가 적극적으로 음악을 시켜주셨다.
그 덕에 나의 인생은 아코디언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한 번은 아버지가 군부대에 있는 하모니카를 가져오셨는데, 당시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나는 하모니카를 배운 적이 없었지만 내 나름의 선율로 하모니카를 부르자 아버지가 깜짝 놀라셨던 것이 계기로 작용했던 것 같다.
그렇게 딸 다섯 중 넷째임에도 언니들을 제치고 나 혼자서 돈 많이 드는 악기를 배우게 되었다. 그 때가 80년대 초였는데, 당시 악기를 배우는 사람이 많지 않던 시절이었다.
아버지가 음악을 시키기로 결심하고 1년 반이 지난 후,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아코디언을 구입해서 배우기 시작했다. 아코디언은 처음부터 돈이 참 많이 드는 악기였다. 우리 집 형편에 이런 악기를 시킨 것이 애초부터 잘못이긴 했다.
나는 악기를 배우기 시작하면서부터 거의 한달 만에 독주곡을 연주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런 나의 재능을 보고 아버지는 교육에 더 열성적이 되셨다.
아버지는 음악 선생님 집으로 직접 데리고 다니시며 밤마다, 새벽마다 개인 레슨을 받게 하셨다. 그때 새벽에 일어나던 것이 습관이 되어서 지금도 6시면 일어나 단 30분이라도 꾸준히 연습을 하고 있다.
내가 아코디언에 두각을 나타내면서 기대에 부합하는 모습을 보고 아버지는 너무 기뻐하셨다. 그렇게 예술 전문학교 시험을 치르게 되었는데, 사실 입학시험에는 연주 외에도 다른 기준이 많았다. 그 중 신장 기준이 140cm이상이었다.
당시 140cm이 안되어 떨어졌는데 아버지가 너무 억울해 하며 포기하지 않으셨다. 키 크게 하는 약도 먹이면서 노력하시다 1년 후 키가 137cm정도 되어 지원했는데 또 불합격했다. 아버지가 TV, 물고기 등으로 뇌물도 많이 하셨는데 또 떨어진 것이었다.
정규 예술전문학교 진학의 기회는 날아갔으니 일반 학교를 다니며 방과 후 활동(소년 궁전)으로 아코디언을 할 수밖에 없었다. 소년 궁전은 추천 단계부터 거저 이뤄지는 게 아니었다. 북한은 실력으로만 될 수 있는 사회가 아니다.
소년 궁전도 누구의 소개로 해서 붙었는데, 그 이후부터 고생길이 열렸다. 기차를 타면 40분, 버스를 타면 1시간 30반이나 되는 거리였다.
수업이 끝나면 12시 반 정도였고 아코디언을 매고 왕복 3시간이 되는 그 먼 길을 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86년부터는 도로공사를 하게 되어 버스가 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걸어 다니는 거리가 늘어나서 정말 고생을 많이 했다.
소년 궁전이라는 것이 도당, 시당 부설이어서 도시에만 있었는데 다니기 힘든 것은 둘째치고, 변두리 출신이었던 나는 안 좋은 출신배경 때문에 많이 힘들었다. 소년 궁전에는 성분이 좋고 돈도 많은 아이들이 참 많았는데, 그 중 노동자 가족 자녀는 나뿐이었다.
기량적으로 보면 누구보다도 뛰어났는데, 선생님은 시연(오디션) 같은 것 볼 때만 나를 앞세우다 정작 평양에 공연 갈 때에는 제외시켰다. 결국 평양에는 힘 있는 집 자식들만 데려가더라. 무슨 일이 있어도 힘 있는 집 자식들이 되는 사회였다. 기량이 없어도.
평양에서 김일성, 김정일 축일 등의 공연을 할 때면 도시락을 가져가야 했는데, 엄마가 노동자로 일을 했기 때문에 나 스스로 도시락을 싸가곤 했었다. 도시락을 먹을 때마다 다른 친구들과 비교되어서 항상 돌아서 먹곤 했다.
다른 애들은 항상 최고급으로만 먹었기 때문에 한 눈에 봐도 비교가 되었다. 지금 돌이켜봐도 정신적으로 너무 힘든 시기였다. 물론 친구들 중에는 좋은 사람들도 있었다.
도당 간부의 딸이었던 한 언니가 나를 잘 챙겨주었는데, 부모보다 언니가 챙겨주는 것들이 더 값비싼 게 많았다. 이러면 안되는 줄 알면서도 부모에 대한 원망이 많아 ‘내 뒤도 못 대주면서, 차라리 음악을 시키지를 말지.’라는 생각이 가득했다.
4월 학생 축전이 진행되었는데 그 때 코트를 하나 해 입어야 했다. 우리 집 형편에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무대 신발 하나 신는데도 돈이 많이 들었기 때문에 언니들은 꿈도 못 꾸는 신을 신고 참 많이 미안했다. 그렇게 온 집안의 희생으로 힘들여 한 아코디언이었지만, 책임자(반장) 같은 자리에도 못 앉았다.
‘나는 아무리 힘들게 해도 안 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인생을 자포자기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결국 아코디언에 대한 모든 것을 포기하기로 마음먹고, 6학년 2학기 때 궁전 다니는 것을 접었다.
선생님은 계속 나를 붙잡았다. 체력을 기르면 더 잘할 거라는 둥 여러 이유를 대며 나를 설득하려고 노력하셨지만, 이미 어린 나이에 상처와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았기 때문에 어떠한 노력으로도 깰 수 없는 음악 세계에 혐오감이 생겼다. 이 길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음악을 접고 다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음악 한다는 이유로 수업을 많이 빼먹어서 기초가 약했기 때문에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군에 입당하는 것도 생각해보게 되었다. 엄마가 제대군인이었기 때문에 우리 자매들은 의무 입대자가 아니었다.
딸 중에 군대 입당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 집에서 나만이라도 입당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붉은청년근위대라는 곳에서 그 생각을 완전히 접었다. 15살이 되면 근위대에 입당시켜서 미리 군대 생활을 일주일간 체험해보게 하는 곳이었는데, 직접 생각해보니까 상상하던 것 이상으로 힘들었기 때문이다. 결국 군대도 포기했다.
다행히 아코디언을 연주할 수 있다 보니 여기저기서 오라는 데가 많았다. 소년 궁전 시절의 혐오감이 너무나 컸던지라, ‘나에겐 내 부모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난 할 수 없다.’라는 부정적인 생각 대문에 악기하는 곳에 가지 않고, ‘기계공장 기동대’라는 곳에 들어가게 되었다.
공장의 생산현장으로 찾아가 나팔을 불어주고, 노래도 불러주는 일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한달 만 있으려고 했는데 일하다보니 4년 반을 있게 되었다. 오전, 오후로 나가서 아코디언을 연주하며 공연을 하고 다니는 일상이었다.
남한은 연예인이라면 높이 사는데, 북한에서는 모멸감을 받는 일이 많았다. 노리개 같은 느낌도 들고…. ‘내 능력이 이 정도 밖에 안 되는가. 여기는 내가 있을 자리가 아니다.’라는 생각을 하면서 지냈는데, 그 와중에 아버지 친구들과 그 자녀들에게 집에서 아코디언을 가르치는 일도 병행하게 되었다. 감사하게도 그 일은 참 재미있었다.
북한에서는 아코디언의 인기가 참 대단하다. 내가 개인 레슨 하는 일이 잘되다보니, 힘 있는 학부모의 자식들도 많이 가르치게 되었다. 오히려 한 학부모가 기동대에서 일하면 안 된다고 진심어린 충고를 해주었다. 나는 그 학부모의 도움으로 학교에 정식 교사로 들어가서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게 되었다.
북한의 통신대학(일하면서 배우는 곳)에 들어가서 교사생활을 했는데, 거기서부터 기초를 참 잘 다지게 된 셈이다. 우리 가족이 군부대 지휘부 주위에 있다 보니 군부대 지휘 가족 자녀들이 제자로 많이 들어오게 되어 형편이 나아졌다. 그때부터는 내가 가족을 거의 먹여 살리다시피 했다. 그런 고위직 학부모들 때문에 우리 가족이 그럭저럭 생계를 유지하면서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아코디언과 성악을 가르치다
부유층 자녀들에게 아코디언과 함께 소년성악도 가르쳤는데, 교사생활을 시작한 다음해부터는 아이들을 데리고 평양축전에 참가하기 시작했다. 점차 학교 명예가 높아지기 시작하면서, 내 이름도 유명해졌다. 인생이 풀리기 시작한 것이다.
일반 노동자계층 자식들에게 아코디언은 꿈도 꾸기 힘든 일이었기 때문에, 보통 아코디언 동아리에 들어오는 아이들은 잘 사는 집 자식이었다. 그들이 모두 내게 배우러 온 것이다.
‘고난의 행군(90년대 북한의 어려운 시기)’는 정말 힘든 시기였는데, 당시 아이들이 학교는 안가도 소조(학교 내 동아리)에는 나왔다. 아코디언을 배워놓으면 나중에 사회에 나와 할 일이 많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학부모들이 아코디언을 시키려고 했기 때문이다.
소학교 10살까지는 아코디언 배우는 것을 금하는 당의 방침이 있었지만 학교 측에서는 아코디언 동아리를 운영하였다. 아코디언 수업에 대한 학부모들의 요구가 많았고, 학교가 부유층 자녀를 좋아하였기 때문이다.
당국에서 금지한 10살 이전의 어린이들을 데리고 무대에 오를 수 없었기 때문에 오디션에도 나갈 수 없었다. 그래서 이 아이들에게 성악을 가르쳐서 경연에 참가하게 되었다. 아코디언뿐만 아니라 성악을 가르치게 되니 돈벌이가 제법 괜찮아졌다.
교사생활을 16년(초등학교 10년, 중학교 6년)을 하였는데, 교사생활을 하면서 어렸을 때 아코디언을 배워둔 것이 참 좋은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2001년도에 군관(장교)와 결혼하였다. 시집가서는 교사를 그만두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경제적인 사정상 계속 하게 되었다. 정부에서 초등학생에게 아코디언을 장려하지 않기 때문에 2005년부터 2011년까지는 6년 동안 중학교 교사를 하였다.
내가 통신대학으로 사대를 졸업하였으니 교과과정도 중학교가 맞았다. 수업하는 것도 중학교 교사가 훨씬 재미있었다. 어린 학생들보다는 좀 더 큰 학생들과 소통이 잘 되었고 어울리기도 쉬웠다.
교사생활 동안 특별히 기억에 남는 사건이 있다. 봄·가을 운동회 장기자랑 시간에 퇴폐적인 춤을 춘 여학생을 심하게 혼내고 동아리에서 내쫓은 일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렇게 매몰차게 대하지 않았어도 되었는데… 라고 마음에 걸린다.
1990년도부터 남녀 혼성인 중학교가 생기게 되었는데 남녀 학생이 함께 수업을 받는 것에 대하여 항상 조심하라고 교육을 많이 받았던 터였다. 장기자랑은 내가 관장하는 영역이 아니었지만 퇴폐적인 춤 공연을 보는 순간, 배신감이 느껴져 심하게 혼냈다.
그 다음날 아이엄마가 찾아왔다. 나는 매우 보수적이고 고집스럽게 ‘넌 더 이상 소조를 다니면 안 되겠다.’고 하며 그 아이를 내보냈다. 기분이 좀 나아졌을 때, 장기자랑 책임자이신 남자 선생님께서 내게 ‘음악선생님이 음악선생님 같지가 않습니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
이후 학생들에게 너무 엄하게 대하였던 것 같아 좀 풀어주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나는 좀 보수적인 사람임이 분명했다.
정부가 학교를 운영하는 게 아니고, 학부모들이 학교를 움직이는 상황이었다. 돈 있는 자녀들이 소조에 많이 들어오는데, 학급 담임들이 곤란을 많이 겪었다. 소조에 들어오면 오디션, 공연, 작은 것 하나까지도 돈이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뒷감당이 엄청나다.
게다가 한 번 들어오면 나가는 학생들은 거의 없었다. 나는 그런 돈 많은 학생들 덕분에 먹고 살았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내가 가르치던 소조는 돈을 좀 더 많이 내야했었다.
6년 동안 소조에서 아코디언과 노래를 가르치면서 많은 아이들을 양성 하였다. 제자들을 많이 아끼고 사랑했는데, 한국에 와서도 그 아이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 밥이 목구멍으로 밥이 안 넘어갈 지경이다.
탈북을 결심하다
시어머니와 시누이는 2003년도에 탈북을 했다. 남편은 2005년에 제대한 후 북한에서 되는 일이 없자 바로 탈북을 하였다. 내가 탈북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2009년쯤이다.
나는 아이들에 대한 교육열이 아주 강한 사람이다. 나 역시 교육열 강한 아버지에게 힘들게 양육 받았다. 자식들을 잘 키우는 것이 인생의 가장 큰 목표였고, 그 이상의 다른 꿈은 없었다. 아이들이 북에서 잘 커가고 있었던 때, 2005년 강제 제대를 당하게 된 남편이 명예를 잃고 할 일도 없어지면서 먼저 탈북을 하게 되었다.
나는 너무 고지식한 사람이었던지라 탈북 할 결심이 쉽게 서질 않았다. 게다가 평소 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던 시누이와 시어머니를 따라가기 싫었고, 그들을 변절자라고 흉도 보고 있었던 처지라 더더욱 탈북은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직업도 괜찮았고 경제적으로 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북에서 명예를 얻자면 입당을 해야만 하는데 아이들 아버지가 탈북자이다 보니 정치적으로 제압이 들어오게 되었다.
아비가 탈북자이기에 어디를 가도 떳떳하게 얼굴을 들지 못하게 되었고, 아이들 앞길도 막힌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결국 자식들을 위해 북한에서는 더 이상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선택한 길이 탈북이었다.
결심을 하고 나니, 학생들 앞에서 좋은 말을 하며 웃으면서도 뒤돌아서서는 참 많이도 울었다. 제자들과 농구도 하고, 탁구도 치던 생각이 많이 난다. 인생을 돌아보면, 부모님, 학생들에게 잘못해준 게 깊이 후회되고, 지금도 힘들 때마다 북에 두고 온 나의 귀여운 제자들을 생각하면서 힘을 내곤 한다.
탈북동기와 과정
나의 탈북 동기는 한 마디로 자식들 때문이었다. 애비가 탈북한 이후, 자식들은 탈북자의 아들로 낙인찍혀 결국 출세는커녕 앞으로 변변한 직장을 가지고 살 수도 없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된 바에 자식들을 위해 탈북을 하는 게 낫다고 판단하였다.
교사를 하다 보니 ‘인권’이란 단어를 들어보긴 하였다. 하지만 존재의 이유랄까, 그런 것은 살면서 전혀 생각해본 적 없었다. 북한에서는 그런 의식은 마비된 채로 살았다. 다만 탈북을 고민하던 2년 동안 (2009-2011) 밀려오는 여러 가지 생각들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살아갈 궁리였던 것 같다.
탈북을 결심하고, 집을 떠나 국경지방으로 향하였다. 위조증명서를 떼고 가는 길이라 조마조마 하였다. 일행은 나와 내 아이들 둘(8살, 10살), 그리고 중학교 4학년 남학생이었다.
여자 하나가 애 셋을 데리고 가는 모습이었다. 남편이 탈북자였으므로 나는 당국의 감찰대상자였다. 탈북을 위해 청진에서 무산까지 기차로 4시간 거리를 가는데, 기차 안에서 몸수색을 받았다. 가히 인격 모독적이었다. 국경에 다다르니 정말 벨트까지 다 벗으라고 하더라.
무산에서 내려 어느 집에 들어갔는데 우리 가족의 행색을 보고 탈북하려는 사람들로 보였나보다. 그 집의 할아버지가 우리를 당국에 신고하겠는 것이었다.
그 할아버지는 자기 아들 이름 부르면서 아들이 중앙당에 간부에 등용될 대상인데, 집안에서 탈북하려는 사람을 머물게 하였다는 문제가 있으면 안 되니, 신고하겠다는 것이었다. 완고하신 그 할아버지가 결국 신고하러 나가셨는데, 그 타임에 우리는 도망을 쳤다.
어찌어찌하여 두만강에 다다랐다. 우리를 인솔해 길을 안내하던 사람이 갑자기 신발을 벗으라고 하였다. 걸을 때 소리가 나므로 신발을 벗으라는 것이었다. 발이 아픈 줄도 모르고 발각되지나 않을까하는 두려운 마음에 떨면서 길을 걷고 강을 건넜다.
‘강만 넘어가면 바로 사람이 기다리고 있다.’ 란 약속을 믿고 강을 건넜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약속한 사람이 없단 말이다! 껌껌한 중국 땅에 안내자도 없고, 정말이지 두려워서 미칠 것 같았다. 곧 잡혀 죽는 게 아닌가 싶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시간이 지났다.
10분 정도를 헤매는데, 불빛이 보였다. 그렇게 만나기로 하였던 중국사람 2명을 우연히 마주치다시피 만났다. 엄청 무섭게 생긴 사람들이었다. 두 장정이 우리 애들 둘을 들쳐 업고 가는데, 마음이 너무나 불안하였다. 그렇게 얼마를 걸어 어느 집으로 우리를 데리고 들어가서는 문을 걸어 잠갔다.
그 집은 크고, 환경도 멋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극도의 긴장상태였다. 그런데 이 장정들과 우리를 연결해서 데리고 갈 사람과 마찰이 생긴 것 같았다. 결국 합의를 5,000원으로 보고, 그렇게 그 곳에서 하룻밤을 자고 연길로 넘어 올 수 있었다.
연길에서 태국으로 떠나는 길에도 또 한 번의 고비가 있었다. 우리와 만나기로 한 사람을 찾아 만나야 하는데, 우리와 같은 일행 여럿을 그 사람이 통솔하는 것이었다. 다른 일행들과 그 통솔자를 만나러 가야하는데, 찾으러 나간 일행 중 한명이 밖에서 공안에 붙잡혔다.
그 사람이 우리 거처를 말하면, 우리도 잡히게 될까봐 너무나 조마조마했다. 다행히 우리는 통솔자를 만나 무사히 연길에서 심양까지는 올 수 있었다. 중국어를 모르니까 모든 과정에서 힘들었다. 나의 운명이 다른 사람들 손에 놓여있는 그 기분이란 도살장에서 가축이 느끼는 기분일까. 어디 가서도 어떤 말도 하지 못한 채 두려움에 떨며 어디론가 끌려가는 기분.
또한 같은 일행들 사이에 칼부림도 일어났다. 서로가 너무 곤두선 신경에 몸도 마음도 지치다보니 감정에 휘말려 극한 행동으로 치닫게 되는 것 같았다. 칼에 찔린 사람은 더 이상 못 가게 되었고, 우리 일행은 칼을 찌른 사람이 너무 무서워서 같이 못가겠다고 하는 등 우여곡절 또한 많았다.
중국과 태국의 국경지대에 도착하였다. 메콩강을 건널 때에도 인원이 많아 2개 조로 나뉘어 탔는데, 칼부림을 했던 사람이 또 어떤 여자를 위협했다. 끝까지 긴장의 끈을 늦출 수가 없었다.
사실 중국에서 태국까지 넘어오는 과정은 열흘밖에 걸리지 않았는데, 그 열흘은 내 인생 어느 때보다 길고 힘든 시간이었다. 메콩강을 건너 태국으로 넘어오자 일단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태국에서 역시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조금은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어디론가 이끌려 들어가는데, 비행기 안이었다. 기내에서 주는 음식은 정말이지 맛있었다. 세상에 태어나서 이런 맛있는 식사는 처음 먹어보는 것이었다. 지금도 꿈만 같다. 8시간 비행을 하였던 것 같다. 비행기는 인천 공항에 내려앉았다. 나의 기나긴 탈북여정의 마침표가 찍히는 순간이었다.
자유 대한민국에 입국하다.
공항에 내려 한국 땅을 밟았다는 것이 처음에 믿어지지 않았다. 보이는 화려한 공항의 모습들이 신기하기만 하였고 모든 게 믿어지지 않더라. 양복 입은 사람들이 우리를 안내하고, 또 오자마자 우리의 건강상태를 체크해 주었다. 북한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나를 위해서 국가에서 뭔가를 해준다는 게 가당키나 하단 말인가. 너무나 따뜻한 대우에 어리둥절하였다.
건강검진을 받는 동안 나는 놀라움과 함께 약간 무서운 감정도 들었다. 국정원가서 식사도 주고, 간식도 주고 하는데, ‘나한테 왜 이렇게 해주지?’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를 이용하려 하는 것일까? 무엇 때문에? 왜?’ 등등 의심이 들었다.
북한 사람들은 엄한 규율 속에서 살아서 생겼던 피해 의식 때문이라는 것을 그 때는 몰랐다. 호의에 낯설어하는 나는 ‘내가 일단 한국에 왔으니 여기서 하라는 대로는 하겠지만, 절대 긴장의 끈을 놓지 말자’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이가 아파 관리하는 선생님께 호소했는데, 그 선생님이 바로 의사 분에게로 연결해 주고 치료를 해주더라.
시간이 지나면서 남한 사회의 진심을 받아들이고는 점차 나의 의심과 경계가 감사로 변하기 시작했다. 국정원에서 2달 동안은 너무 감사한 시간들이었다. 하나원으로 나오니 정말 하루하루가 더더욱 감사하더라. 국정원에서도 시기별로 옷을 줬는데, 하나원에서도 좋은 옷을 또 주더라.
하나원에서 컴퓨터, 운전면허 공부도 열심히 했다. 자격증, 운전면허 시험을 보는데 ‘내가 돈을 안 넣었는데 설마 내 점수가 그대로 나올까?’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뇌물을 안 넣었는데도 점수가 그대로 나오더라. ‘아, 여기는 내가 노력하면 다 되는 세상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면서 나의 가슴은 희망으로 부풀기 시작했다. 너무나 기쁘고 설레었다.
남한에 정착하다.
하나원에서 컴퓨터, 운전면허 공부도 열심히 했다. 모두 합격하였다. 아, 내가 노력하면 다 되는 세상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 때 사감 선생님도 ‘네가 노력하면 되는 땅이야.’ 라고 용기를 주셨다. 내가 하고 싶어서 응시했는데 노력한 만큼 다 되더라. 북한에서는 할 수 있는 게 없었기에 더욱 감사했다.
자본주의가 좋다는 게 결국 개인한테 좋다는 뜻인 것 같다. 사회, 사상을 떠나서 실질적으로 나에게 좋은 제도인 것이다. 사회주의에서는 내 존재도, 가치도 없으며 정치에 대해서 알면 괜한 소동일 뿐이었다.
내가 음악 교사로서 음악만 가르치는 일만 알면 되는 것이지 더 많이 알고자 하면 시끄러운 일뿐이었다. 정보도 전혀 공유되지 않으며 인터넷도 안 되는 세상에서 “뭐, 세상에 대해 알아서 뭐하니?” 이런 생각이었다. 여기 와서는 내가 그동안 세상에 대해 너무나 무지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많은 걸 알고 싶었고 배우고 싶었다.
나는 한국에 와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나원에서도 앞으로 뭘 하며 살아야 하나를 제일 걱정하였다. 2011년 9월 8일 하나원을 나온 후 운전면허와 컴퓨터 학원을 다니면서 일주일을 아르바이트 했는데 만족스러울 리 없었다.
그러다가 11월에 평양민속예술단이라는 탈북인 예술단체를 알게 되었다. 그 곳에 들어갈 기회를 얻은 것이 나에게 남한에서의 삶을 윤택하고 희망차게 한 큰 축복이었다고 생각된다.
그 다음부터 내가 내 길을 개척해 나가고 있다. ‘NK통일사랑교육협회’라는 북한 교사 집단에도 다니게 되었다. 그 이듬해 2012년 3월부터는 대안학교에서 방과 후 교실 강사도 하고 있다. 참으로 나에게는 행운의 연속이었다.
그러다가 작년 겨울 12월에 서울에 올라와 봤더니 그 때까지 나의 아이들은 놀기만 한 것을 알게 되었다. 나의 탈북동기가 아이들을 좋은데서 살게 해주기 위한 것이었는데 정작 아이들이 그냥 집에만 있고 하는 일이 집을 지키는 것이라니 너무나 마음이 안 좋았다.
나는 발전하고 내 자리를 잡고 있는데, 아이들은 집에서 놀고 있으니까 차라리 반대가 되면 좋겠단 생각이 들 정도였다. 평양민속예술단에 있으면서 내가 열심히 하니까 케이블 방송국 TV조선에서 나를 촬영을 하러 왔었다. 아이들 개교식 하는 모습을 찍고 싶어 하였다. 한국에 정착하는 모습을 담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별 생각 없이 그렇게 해달라고 했는데 우리 아이들이 ‘엄마, 우리가 북한에서 왔다고 해야 해요?’라고 말하더라. 못사는 데서 왔다고 하는 게 싫다고 하더라. 그날 밤에 PD에게 아이들을 촬영하는 것은 하지 않겠다고 전했다. 결국 나도 아이들 개학식 때 가지를 못했다.
한국교사들과 북한교사들이 굉장히 다른 점이 있다. 북한은 권위적인 모습이라면 남한은 교사들이 너무나 친근하다는 점이다. 아이들 담임선생님은 너무 편하고 혈육 같은 느낌이었다. 너무 잘 대해주니, 그것이 너무 신기했다. 교사라면 직급이 있는데, 자기 체면을 차릴 줄 알았는데, 그런 게 전혀 없었다.
그래서인지 한국아이들은 선생님들한테 엄마처럼 친근하게 다가가는데, 내 생각에는 교사가 따뜻한 건 좋은데 한편으로는 교사로서 조금 엄하고 그런 면이 있어야 할 것 같다. 학생과 교사 사이의 간격이 너무 없어서 그게 좀 걱정이 된다. 더구나 우리 아이들 같은 경우에는 북한에서 탈북하는 동안 배우지 못한 것들을 더 많이 배워야 하는데 선생님들이 그 점을 이해를 못하시는 것 같았다.
북한에서는 사교육 받는 애들이 실제 써먹는 게 별로 없어서, 우리 애들은 학원 받지 않고 학교 교육만으로 한다고 하니 담임선생님은 오히려 좋아하시는 것 같았다. 학교가 다른 학교에 비해서 체험 활동도 많고 사교육 절반으로 줄인 학교라 우리에게는 다행이었다.
북한에서는 교사들이 학부모가 찾아오는 걸 좋아하는데, 한국에서는 별로 그런 것 같지 않다. 아이들 소풍 전날, ‘선생님 도시락은 안 싸와도 됩니다.’ 라는 알림장을 보니 정말 신기한 세상이다.
북한에서 교육을 받고 온 것이 도움이 되었던 것인지 일단 우리 아이들이 학급에 들어가서는 공부에서 밀리지 않았다. 성격도 활달한 편이라 친구들과도 잘 지내서 다행이다. 둘째가 좀 고집스러워서 말 바꾸기를 굉장히 힘들어하긴 하지만.
요즘 정부와 하나원에서 많이 해주니 탈북자들이 많이 도태되어 있는 것 같다. 지금까지 헛산 것을 다시 메워야겠다는 생각에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 사실 한국 생활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기는 하나, 아이들을 생각하면서 극복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환경을 이겨내야 한다는 마음을 강하게 먹고 있다.
북한의 학교생활
북한에서는 제1고등중학교를 졸업하면 무조건 대학에 붙여준다. 공부를 아주 잘하면 태생을 넘어 팔자를 고쳐준다. 제1고등중학교를 가려면 초등학교 4학년에 입시 시험을 본다. 나는 큰 아이를 제1고등중학교에 보내려고 공부를 열심히 시켰다.
담임선생님이 엄한 분이셨는데 사소한 일로 아들에게 매를 들었다. 그렇게 맞은 이후 아들은 선생님을 보고 싶지 않다고 했다. 공부를 잘할 리가 만무했다. 이런 식으로 점점 친구들 소리가 없어진다.
학교에서 교과서가 바뀌는 것만 해도 2년이나 걸린다. 교재가 나와도 종이가 없다보니 출판이 안 되는 것이다. 전국적으로 교재가 나가기까지 3년은 족히 걸린다. 정해진 교재를 누구에게 먼저 분배하는지도 참 정하기 힘든 일이다.
교사도 하나부터 열까지 다 돈으로 결정되다보니 교사 역시 인맥관계를 잘 형성해야 한다. 교사를 하기도 엄청 피곤한 일이다. 담임 맡기도 힘들다. 학부모, 교장선생님의 눈에 들기가 힘들다. 결국 학부모들에게서 신임을 얻으면 학급을 맡는데 도움이 되기는 한다.
내 학생 중 한 명이 재간은 있는데 키가 작아서 군에 가지 않고 대학에 바로 진학했다. (원래는 군에 갔다 나와서 대학 가는 것을 더 좋게 쳐준다.)
설날에 하루 내게 인사차 왔는데, ‘공부해서 뭐합니까! 라고 하더라. 자기는 4.5가 나왔는데 3점 맞은 동기가 다음날 5점으로 올라 있었다는 것이었다. 북한은 학점도 하나부터 열까지 다 뇌물로 바꿀 수 있다.
나는 통신대를 맡았었는데 학생을 일 년에 두 번 즉 여름방학에 20일, 겨울방학에 10일간 본다. 주간 생들이 공부하는 것에 비하면 통신대 학생들은 장난이라는 이유로 통신대 아이들의 숙제는 돈을 안주면 아예 보지를 않는다. 정말 엉망이다. 점수를 돈으로 팔고 사고한다.
내 사촌동생이 공부를 제일 잘하는 상을 받았는데 삼촌이 돈으로 상을 샀기 때문이었다. 사실 사촌 동생이 실력이 낮은데 우리 삼촌이 검열과에 아는 사람이 있고 돈을 주어서 불합격인 그 아이를 합격시켰다.
도 시험, 중앙시험에서 결국 실력 있는 애들이 떨어지고 사촌동생이 붙는 상황이었다. 전국적으로 제일 큰 상인데, 이런 상도 이렇게 다 돈으로 사고 판다. 교사들 자질도 항상 문제되고, 정말 말로 다 못할 형편이다. 매해마다 교사 자질 평가를 하긴 하는데 다 눈가림이다.
학교생활의 비리와 교사로서의 후회
북한에서는 학교에서 아이들이 쓰는 종이 같은 학용품들도 모두 학부모들 주머니에서 나오는 것이다. 학부모들이 그저 학교를 움직이고, 나아가서 나라를 움직이는 것이다.
교사로서 학생들에게 장래희망에 대해서 묻는 것 자체가 미안한 일이었다. 어차피 그들에게 장래희망은 그저 말장난일 뿐이었다. 어린아이들에게 저 하늘에 떠가는 구름을 솜사탕으로 속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사는 언어도둑이 되었다. 북한에서 학생을 교육하는 것은 비극적인 일이라고 생각했다. 북한 당국은 다음 세대를 왜 교육하는지에 대한 큰 그림이 없다. 교육의 나아갈 청사진이 없었다. 김일성 김정일 부자의 우상화가 목적이라면 목적이랄까.
이제와 북한에서의 삶을 돌이켜 보면, 나를 포함한 교사들이 세상을 너무나 모르고 살았다는 생각에 기가 막힐 따름이다. 나 자신이 교사로서 아이들에게 말도 안 되는 것들을 가르쳤다는 점이 부끄럽고, 북한당국에 배신감이 밀려온다.
40년 동안 그런 곳에서 살았다는 것. 아니, 결국은 제대로 산 게 아니다. 그게 너무도 억울하다! 우리 애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우리 제자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당을 위해서 목숨을 바쳐야 한다.” 고 했던 지난날들을 생각하면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다.
군관 부인으로 남편과 멀어지다
북한에서 군관 가족으로 살면서 상처를 받은 점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나의 남편이 군인이었고 통신부문에서 일했다. 북한에서 군관 아내들은 결국 남편 직급이 본인들의 직급이나 다름없다.
군인 중에서 통신 쪽은 아무런 권력이 없기 때문에 나 또한 직급도 파워도 없는 상황이었다. 여자가 일단 군관한테 시집가면 자기가 하던 일을 그만 두어야 한다. 남편을 따라다니면서 시골 이곳저곳으로 이사를 다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남편을 따라다니지 않고 음악교사로 일을 계속했다. 그러다 남편이 여자부대로 옮겨 가게 되었다. 북한에서 여자가 군대에 가면 순결성이 다 없어진다고 보면 된다. 이동훈련, 동기훈련을 받는 동안 그때마다 남자 군인들은 여자 군인들과 같이 산다고 하더라.
나의 남편도 훈련을 나갔는데 한 달 째 집에 들어오지를 않았다. 그래서 내가 여자부대로 따라가 보았더니 남편이 반바지 바람으로 밖으로 나오 는 것이었다. 주위에 여자들이 가득한데 어떻게? 나는 괘씸하기도 하고 당황스러웠다.
그런데 그런 날들이 연속되었다. 그리고 밖에서 훈련받는 여자군인들 또한 모두 어디엔가 기대고 싶어 하는 마음이 왜 없었겠는가? 애아버지가 인정도 많고 외모도 멋있게 생겨서 여자군인들이 많이 기대고 싶어 했던 것 같다.
하루는 우리 집에 휘하의 병사들을 데리고 온 적이 있었는데 여자 부하들이 내가 있는데도 내복 바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었다. 북한에서 여자 군대들은 완전히 개방이라고 보면 된다더니!
나는 신랑 앞인데도 내복만 입지 못한 채 겉옷까지 갖춰 입고 있는데, 부하 여자군인들이 내복 바람으로 오가는 것을 보는데, 너무 깜짝 놀라고 화가 나기도 하고 그때부터 좋지 않은 감정이 시작되었다.
이런 광경을 실제로 보니 나는 주체 못하는 의심과 분노로 남편을 대했다. 여군들이 계속 따라다니고, 남편은 일주일에 한 번씩 집에 오던 것도 더 이상 오지 않게 되었다.
둘째를 2004년에 출산했는데, 딸이라고 하니 아예 나를 찾아오지도 않았다. 심지어 집에 왔을 때에도 애를 들여다보지 않는 것을 보면서 내가 느꼈던 슬픔과 억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나는 급성 설사증이 와서 정말 죽다 살아난 적이 있었는데 남편도 부대에 출근하지 못했다. 그런데 대대정치지도원이란 여자가 나를 호출하더니, 바로 반말을 하면서, ‘아니, 통신 참모 왜 안 내보내네?’ 라고 말하는 것이다.
내가 아파서 직장에 못 갔다고 하니, 그렇다고 왜 남편을 집에 두냐는 것이었다. 진단서를 뗐다고 하니까, ‘네가 아파서 받은 진단서가 무슨 상관인가, 통신 참모는 출근 시켜야지!’ 라며 다짜고짜 화를 내는데 아내로서 너무 자존심이 상했지만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했다.
군부대 생활하는 애아버지와 꼭 10년을 함께 살았는데, 결국 가정생활이 파경으로 흘러갔다. 여자로서 당한 것에 대한 분노가 담겨져 내가 더욱 치를 떠는 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군부대는 기강도 없고 성적으로도 타락했다. 군부대는 정말이지 엉망이다!
북한에서는 자본주의는 ‘하품하는 동안 금이빨 뽑아가는 사회’라고 교육받았지만 그와는 반대로 북한 사회 곳곳에서 남의 것을 빼앗아 자기 배를 채우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나는 남한소식이나 외부 소식이 굉장히 차단된 상태에 살고 있었지만, 남편은 군인인데도 북한 사회의 모순을 더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남편은 ‘김정일이 나쁜놈이야!’ 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두서없는 회상을 마무리하며
지금 남한에서의 나의 삶은 만족과 감사로 가득 차 있다. 현재 최대의 꿈은 두 아이중 하나만이라도 외국으로 유학을 보내는 것이다. 한국에서 잘나가는 공무원으로 키우고 싶다. 아이들이 잘 돼서 이 사회의 당당한 일원이 되는 것이 어미로서 바라는 첫 번째이자 가장 큰 소망일 것이다.
두 번째 소망은 나에 관한 것이다. 내가 더 공부하고 싶고, 더 배우고 싶다. 내 직업도 갖고 싶다. 나도 꿈꿀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참 멋진 일인 것 같다.
남한의 자유를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이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지 잘 모르는 것 같다. 꿈을 향해 달려갈 수 있는 것은 너무나 행복한 삶의 조건이다. 그리고 열심히 달려가는 것은 내 몫이다. 꿈을 꿀 수 있고, 꽃 피울 수 있다는 것. 그게 너무 좋은 것이다. 나의 미래에 박수를 보내며 지난날의 회상을 마친다.
출처 : 북한인권시민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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