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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자매
요한복음 12:1-8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벌써 사순절도 막바지이다. 시작할 때는 여전히 겨울이었는데, 이젠 봄기운이 완연하다. 부활절이면 봄꽃이 필 것이다. 그새 색동교회도 새봄맞이 기지개를 켰다. 지난 주 수요기도회는 남선교회 주관으로 드렸는데, 자발적인 선택이었다. 하나님께 진정으로 예배하려는 마음, 그것이야말로 봄소식이다.
여러분의 마음에 봄소식으로 가득하길 바란다. 봄소식은 무엇일까? 기다리는 마음, 설레는 마음, 내 마음에 새로운 씨앗을 심는 마음, 나와 주변이 모두 환하게 꽃피는 마음.. 그런 마음이 봄의 마음이다. 그런 마음으로 평화로운 봄을 맞이하기 바란다. 그런 마음으로 여러분의 인생에 봄을 꽃피우기 바란다.
지난 주간에 가장 큰 뉴스는 교황 선출이었다. 2006년 겨울, 바티칸을 방문한 일이 있다. 그때 한국 에큐메니칼 방문단은 바티칸에서 교황을 만났다. 매주 목요일 오전, 교황은 바오로 6세 홀에서 세계 각지에서 온 많은 그룹을 함께 만났다. 우리 한국 방문단은 맨 앞자리에 있었다. 동행한 광주대교구의 김희중 주교가 나를 지목하는 바람에 얼떨결에 교황과 악수를 하고, 사진을 찍었다. 그는 교황에게 나를 “메토디스트입니다”라고 소개하더라. 순전히 악수 한번 한 이유로 독일인 교황 베네딕토 16세에게 호감을 가졌는데, 노환으로 물러난다니 아쉽더라.
이번에 아르헨티나 출신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리오(76) 추기경이 제266대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무명의 사람이라고 한다. 많은 어려움에 직면한 가톨릭교회에 새 봄은 그렇게 찾아왔다. 새 교황은 프란치스코 1세 교황이다. 그는 가톨릭교회의 ‘대표 사도’로 부름 받은 것이다.
새 교황은 평소에 자주색의 추기경 복장 대신 수수한 검정색 예복을 착용했다고 한다. 추기경 옷도 전임자가 입던 것을 물려받았다. 권력지향자가 아닌 검소하고, 겸손한 사람에 대한 기대가 크다. 교황을 뽑는 콘클라베가 끝난 후 추기경들과 저녁 식사 자리에서 “하느님은 (나를 선택한) 여러분을 용서하실 것”이라고 우스갯소리를 했다고 한다.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은 비록 교황처럼 모두에게 환영을 받지는 않았으나, 적어도 주님을 진심으로 따르는 사람들에게 뜨거운 환대를 받았다. 그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베다니의 나사로 가정이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 일행이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하루 전에 다시 그 가정을 방문한 내용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남성들만이 아니었다. 여성들도 여럿 있었다. 비록 12사도로 구분되지는 못했으나, 남성들 이상으로 용기가 있었다. 처음 부활의 증인도 여자들이었다. 그 중에서 마르다와 마리아 두 자매의 헌신과 사랑은 참 아름답다.
이전의 교황들이나, 새 교황은 모두 남자들이다. 2천년 역사 상 266명이 남자 교황들이고, 앞으로도 여자들은 교황은커녕 사제조차 되기 어려울 듯하다. 그 이유는 단 한가지다. 예수님이 남자 제자들로만 12명을 사도로 세웠기 때문이란다. 115명의 남성 추기경이 모여 그들 중에서 교황을 선출했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예수님은 어떻게 생각 하실까? 절반의 뜻이 아닐까? 예수님은 여성 제자들을 칭찬하고, 함께 사역하셨기 때문이다.
1)
본문의 배경을 보라.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1).
요한복음 11장에는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이야기가 나온다. 나사로의 두 누이는 바로 마르다와 마리아였다. 두 자매는 누가복음 15장에서 만났던 아버지의 두 아들과 달리 참 모범적이다. 두 아들이 반면교사라면, 두 자매는 모범교사이다. 여성 제자들 가운데 마르다와 마리아는 대표적인 두 사람이다.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 이야기는 복음서에 세 번 나온다.
처음, 누가복음(10:38-42)에는 마르다는 손님 접대를 위해 분주히 준비하는 사람으로,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아래 앉아 말씀을 듣는 사람으로 나온다.
두 번 째, 요한복음(11:17-44)에서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이야기에서, 마르다와 마리아는 나사로의 두 자매로 나오는데, 여기에서 마르다는 유명한 신앙고백을 한다.
세 번 째, 오늘 본문에서 마르다는 분주히 손님을 대접하고, 마리아는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 발에 붓고, 그의 머리털로 씻어준다.
두 자매 모두 훌륭하다. 예수님 일행은 이 가정에서 언제나 특별한 환영을 받았다. 주님이 오시면 그 집은 봄날이었고, 잔치상이 차려졌다. 인간인 교황도 그렇게 세계적 주목을 받는데, 하물며 예수님의 방문은 얼마나 놀라운가? 다만 사람들이 그 은총을 알아보지 못할 뿐이다. 우리도 가정예배를 드리며 우리 가정에 모시는 일을, 또 식사기도를 드리며 우리 식탁에 모시는 일을 기뻐하지 않은가?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 할 새”(2).
복음서를 보면 나사로와 두 자매의 가정은 예수님을 모시기를 반겨하고, 예수님도 그 집을 편안하게 방문하셨다. 사실 손님 대접이 쉽지 않다. 더구나 예수님의 일행은 예고 없이 무리지어 들이닥쳤다. 언니 마르다는 손님 대접을 즐거워하였다. 동생이 자기 일을 돕지 않는 것을 불평하기도 했지만, 그런 불평은 믿음과 상관없이 당연해 보인다.
사실 마르다와 같은 넉넉한 마음 없이 어찌 손님 대접이 가능할까? 마르다의 봉사가 얼마나 소중한가? 성경은 마르다와 같은 여성들의 수고를 기억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만, 성경은 어머니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묘사한다. 사람을 낳고, 키우시고, 지극한 사랑으로 아껴주시는 하나님의 이미지는 여성적이기도 하다.
긍휼과 자비는 어머니의 성품이다. 긍휼은 자궁을 뜻한다.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입히시는 모습이나, 밀가루를 반죽하고 맷돌을 돌리시는 하나님 이미지는 여성적이다. 유대 속담에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갈 수 없어서 어머니를 만들었다는 말도 있다.
마르다의 불평을 들은 예수님은 이렇게 위로하신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 만이라도 족하니라”(눅 10:41-42).
마르다가 수고하고 있는 많은 일은 정당하다. 마르다의 봉사는 대단히 중요하다. 다만 예수님은 마르다의 일이 예수님의 말씀과 올바른 관계에 놓여 있기를 원하신다. 제자의 삶은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깊이 참여해야 한다.
2)
예수님이 베다니에 있는 나사로의 집에서 식사를 하실 때이다. 그때 마르다와 마리아는 저 마다 예수님을 위해 특별한 봉사를 하였다. 무엇보다 마리아를 보라.
“마르다는 일을 하고 ..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2-3).
귀한 손님이 집을 방문하거나, 혹은 식탁에 않았을 때, 그에게 존경의 표시로 몇 방울의 향유를 뿌리는 것은 관습적이었다. 그런데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부은 것은 몇 방울이 아니었다. 그녀는 옥합을 깨뜨리고, 그 속에 있는 나드 향유 한근을 모두 예수님의 발에 부었다. 기름을 머리에 붓는 것은 종교적인 의례였고, 존경과 신앙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런데 ‘지극히 비싼’ 향유 한 병을 모두 발에 붓다니? 게다가 그 기름을 자기의 머리털로 닦아 드렸다. 이런 행동은 종도 하지 않는 일이다.
마리아의 행위는 갑작스러운 일이 아니다. 마리아는 언제나 예수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들었다. 그런 까닭에 예수님과 마음으로 소통했을 것이다. 마리아가 향유를 깨고, 예수님의 발에 부은 것은 임박한 예수님의 고난을 직감하고, 적극적으로 한 행동이었다.
이런 마리아의 헌신적인 행동에 찬물을 끼얹는 사람이 있었다. 그 식탁에 앉아있던 가룟 유다는 마리아의 행동에 벌컥 화를 낸다.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5).
유다는 제자단의 회계였다. 예수님의 일행은 탁발 활동을 했으니, 많은 돈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늘 아슬아슬한 살림살이다. 그런 살림을 책임지는 유다는 영리한 사람이고, 책임감이 강했을 것이다. 그는 마리아의 행동에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왜 향유를 낭비하는가?
회계인 유다에게 마리아의 행동은 철부지 짓이며, 여자의 속 좁고 어리석은 행동이다. 아무리 예수님을 사랑한다지만, 제자단의 경제사정을 헤아리지 못하고 일회적 낭비를 하다니, 그건 낭만적인 이벤트일 뿐이라고 야단을 친 셈이다. 따져보면 데나리온이 한 사람의 하루 품삯이라면, 300 데나리온의 향유라면 얼마나 큰 가치가 있는 것인가?
마리아와 유다의 차이는 무엇인가? 예수님을 목적으로 삼는 사람과 예수님을 수단으로 삼는 자의 차이였다. 기쁘게 따라가는 자와 억지로 따라가는 자의 차이였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믿었고 유다는 예수님을 그저 알기만 하였다.
마리아는 예수님 안에 있었으나 유다는 예수님의 울타리 밖에 있었다. 마리아는 신앙적인 물질관을 가지고 있었으나 유다는 물질적인 신앙관을 가지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남자와 여자의 차이가 아니다. 누가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바르게 사랑을 실천하였는가? 마리아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최초로 이해한 여성이 되었다. 그래서 그 분의 장사를 준비한 첫 사람이 되었다.
3)
마리아의 행위는 거룩한 낭비로 예수님의 칭찬을 받는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행위를 이해하고 계셨다. 예수님은 흥분하는 유다의 말을 제지하고, 좌중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7-8).
두 마음을 품은 유다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물질적인 신앙관을 가진 유다가 예수님의 값없는 십자가의 사랑을 어찌 따를 수 있을까? 그는 가난한 사람을 핑계 삼아 이용가치부터 생각한 사람이다. 그는 거룩한 행위도 300 데나리온 운운하며 돈으로 환산하였다. 그런 유다의 눈으로는 마리아가 가진 순수함을 느낄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유다는 향유의 십분의 일 값인 은전 30냥에 예수님을 배신하였다.
유다는 마리아의 나드 향유 속에 담겨있는 사랑의 위대함, 희생의 고귀함, 헌신의 순수함, 신앙의 숭고함 같은 것을 볼 수 없었다. 물질 앞에서 그는 맹목적이 되었다. 그는 마리아처럼 바쳐보지 못한 사람이다. 그는 마리아처럼 자기를 내어 주지 못한 사람이다. 언제나 유다는 제자의 길에서 이해관계를 따졌고, 진실한 순종은 없었다.
마리아의 헌신은 평소와 같으면 분수에 넘치는 낭비일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다르지 않은가? 바로 내일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신다. 이미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누구든지 예수 있는 곳을 알거든 신고하여 잡게 하라 명령하였”다(요 11:57).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지금의 시간은 반복될 수 없는 일회적 시간이었다. 마리아는 이러한 시간의 급박함을 잘 알고 있었다. 단 한번인 기회, 다시없을 기회에 마리아는 최선을 다하였다. 마리아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경외와 헌신을 바친 것이다.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하신다. 새로 선출된 교황은 평소 가난한 사람과 함께 함으로써, 교황으로서 적임자로 존경 받는다. 그의 새 이름도 빈자의 친구 프란치스코가 되었다. 사실 가난한 사람은 언제나 세상에 존재한다. 유다의 말이 아니어도 언제든지 도울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항상 이 땅에서 함께 계시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은 세 차례나 수난 예고를 했음에도 남자 제자들은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권력 다툼을 일삼았다. 예수님은 그동안 당신의 죽음을 은유적으로 말씀하셨다. 그러나 마리아의 행동을 보고 있는 그대로 사실을 말씀하신다. 주님의 죽으심과 장례에 대한 말씀이다.
마리아는 다시 오지 않을 기회를 붙잡았다. 그 사랑의 충동을 실행에 옮겼다. 이 거룩한 낭비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응원하였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에 기름을 부어 예수가 구세주이심을 고백하였다.
어쩌면 평소 소외와 차별을 받으면서 살았던 여자이기에 더욱 민감하게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이해하고 부활을 믿게 되었을 것이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정확히 이해하고 그의 죽음을 준비해 드렸다. 이 일은 예수님을 참으로 기쁘게 하였다.
마리아 뿐만 아니다. 언니 마르다의 고백도 중요하다. 그는 오빠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요 11:27).
누구나 예수님을 말로 사랑한다. 입으로 시인한다. 마리아도 유다도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 어떤 행동을 하느냐가 중요하다. 그가 어떤 신앙적 가치관과 목적을 갖고 사느냐가 결정적인 관건이 된다.
우리는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산다.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린다. 그런 나는 언제나 봄날인가? 주님을 모시고 잔칫날과 같은 기쁨을 누리는가? 예수님을 더욱 사랑하라. 그 사랑 때문에 내게 다가온 기회를 놓치지 말라.
저절로 되는 일이 아니다. 평소 사랑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라. 주님을 사랑하기 위해 내 소중한 마음을 드려라.
하나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셔서 사순절과 한 평생 주님과 더욱 친밀하고 소통하는 삶을 누리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