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네거리 노점상 시인 정재완의 <광화문 연가> 이야기로 첫발을 내딛은 이후, 노란버스를 몰고 그림을 좇아 사랑을 찾아 전국을 여행하는 화가 한생곤의 두 번째 책. 작가는 달팽이처럼 화실을 등에 업고 돌아다니는 '이동화실'을 꿈꾸다가 2002년에 노란 중고 버스를 구입하여 '노란버스 화실'을 마련, 지금까지 우리나라 방방곡곡을 다니며 그림여행을 하고있다. 이러한 작가의 기행은 1999년 KBS 방송 <제3지대>와 2003년 <인간극장>에 각각 소개되기도 했는데, 이 책에 실린 내용은 10여 년에 걸쳐 기록한 80여 권의 그림노트에서 작가의 노란버스 여행을 중심으로 정리한 기록과 작품들이다. 한생곤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과 대학원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흔히 말하는 우리나라 화단의 ‘재원(才媛)’으로 꼽을만한 화가다. 그러나 그는 지금 10여 년 몸담고 생활하던 화실 전세금을 빼서 중고 노란버스를 구입해 세상을 떠도는 ‘방랑화가’로 자리매김했다. 그것에 대해 작가는 책에 실린 <작가의 말>을 통해 이렇게 얘기한다.
“1994년 늦가을, 스물여덟 살이던 나는 봉천동의 골목길을 걷다가 갑자기 안이 근질근질하더니 급기야는 안에서 뭔가 상승하다 터지듯이 마음이 밝아지는 경험을 또 겪게 되었다. … 그 순간 나는 내 청춘의 모든 고뇌와 실존의 허무감과 그림의 미궁이란 것은 오직 내 머리의 혼란이었지, 내 두 다리의 혼란이 아니었음을 본 것이다. 다시 말해, 나는 걸음마를 배운 이후 지금까지 머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결국 두 다리로 잘 걸어왔으며, 바로 그날의 골목길 끝까지조차도 넘어지지 않고 잘 걸어갔던 것이다! 바로 이 순간 나는 길이란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걸음이 바로 나의 길이었음을 처음으로 ‘자각’했다. … 이때의 전율에 제목을 붙인다면 ‘걸음걸이를 통한 깨달음’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늘 걷고 있었다는 것, 전에도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라는 이 깨달음은 작가 자신이 “지구별 여행자”임을 자각하는 계기를 불러왔고, 여행자로서의 행보를 내딛기 시작한 것이다. 그 첫발을 내딛은 것이 1999년에 발표한 작가의 대학원 학위논문 <깨달음의 회화적 수렴에 관한 연구>이고, 본격적인 시작점은 노란버스를 구입한 2002년부터다.
80여 권이 넘는 기록, 한생곤의 그림노트 책을 만들기 위해 작가로부터 넘겨받은 자료는 실로 방대함 그 자체였다. 1991년 8월부터 기록하기 시작한 그림노트(畵帖)는 올해 3월까지 이미 80여 권을 넘어섰는데, 그것은 습작노트라기보다는 그 자체가 하나의 작품이었다. 그 기록 속에는 때론 어린아이의 눈으로 본 세상의 모습이, 때론 옛 사랑의 추억에 흔들리는 불빛이, 그러다가도 면벽선사의 날카로운 외침 ‘할(喝)’의 모습이 모두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림노트 곳곳에는 온 생을 사유하는 사막의 여행자처럼 자신의 생과 천지만물에 대한 사무침이 배어 있었다. 곧, 지구별 여행자로서의 자각을 하나하나 끌어내가는 과정인 것이겠다. 이 책 《노란버스》에는 수록되지 않았지만, 다음의 기록을 보면 그의 ‘방랑’에 대한 자각과 사무침의 정도를 알 수 있다.
“여행의 목적은 없다. 아무 목적이 없으므로 자유롭다. 이 여행을 통해서 나는 무언가를 얻게 되겠지. 그것은 지금으로서는 나도, 창밖의 참새들도, 그리고 내 신발도 알지 못한다. 일주일이 지나면 나는 그것을 알게 될 것이다. 참새들이 아침을 알듯이. -1995. 4. 10
우리나라 전체가 나의 작업실이다. 나는 지금 뚝섬역에서 조금 떨어진 ‘포항식품’이라는 ‘점방’ 앞 테이블에 앉아 있다. 자판기 커피를 벗 삼아 지나가는 사람들과 차들을 풍경화로 걸어놓고 앉아 있는 지금 이곳은, 내 작업실에 다름 아니다. 나는 내 눈앞에 펼쳐진 무진장한 대상들 앞에서 넋을 잃고 만다. -1995
나에게 있어 인생이란 널리 여행하고 깊이 궁구하여 깨쳐서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1995. 10. 22
지구가 있다. 나는 지구를 여행하는 바람의 몽상이다. 잘 놀고 잘 먹고 가면 그만. 나머지는 나의 몫이 아니다. 다른 사람은 다른 사람대로 지구를 여행할 텐데 뭘. -1996. 11. 20 새벽”
작가의 첫 책인 《노란버스》는 이렇게 14년여의 방대한 기록을 토대로 그의 그림과 인생에 대한 하나의 쉼표로 묶여 나오게 되었다.
그놈 학교 보냈더니 부모 그릴 줄도 아네 “고등학교 때 나는 한 번도 돈을 내고 화실을 다닌 적이 없다. 많은 친구들이 그림 공부를 위해 화실에서 부산스럽게 보낼 때, 나는 화실 한구석에서 화실비 못내는 학생으로 있으면서 묵묵히 그림을 그렸다. 화실비를 못내는 대신 나는 청소반장이었고 아주 늦게까지 화실에 남아 혼자 그림을 그렸다.”
책의 첫 부분에 실린, 그림을 처음 시작한 작가 자신의 모습에 대한 회고다. 넉넉지 않은 가정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작가가 소위 명문대에 합격했을 때 부모님의 기쁨과 기대감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하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곧 작가 아버님의 말씀처럼 “그림을 왜 그려? 밥도 안 나오는데”라는 아들이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이어지는 게 현실이기 마련이다. 작가도 그 어려움을 토로한다. “아버지와의 화해는 정말 어려웠다.” 그 어려운 화해는 작가 자신의 그림에 대한, 곧 자기 자신의 인생에 대한 열정과 사랑으로 이루어낸다. 그리고 그 결과물은, 부모님이 자기 그림의 주인공이 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작가는 세 번째 개인전에 <아버지의 등> 작품을 발표한다.
“벼들이 가득 찬 논에 아버지는 하얀 모자를 쓰고 계셨고, 피를 뽑으실 때는 허리를 숙이셨다. 그 연초록색의 벼들 속으로 허리를 숙이시면 아버지의 등이 꼭 거북이 등처럼 둥글게 선을 그었고 다시 일어서시면 하얀 모자와 상반신이 논 가운데 나타는 것이다. 아스팔트를 터벅터벅 걸어오면서 나는 그 모습을 모았다. 한 번은 논 속에 숨고 다시 한 번은 논에서 나타나는 그 모습을, 그 리듬을…. 나는 그때 처음으로 아버지를 이해했다. 그 단순한 아버지 삶의 리듬을 느꼈다. 그때에서야 겨우.” -본문 1부 중에서
작가는 자신이 이해한 부모님의 모습을 그림으로 옮기고, 부모님께서는 당신들을 화제(畵題)로 그림을 그린 작가의 작품과 그의 그림인생을 이해하는 한 말씀, “그놈 학교 보냈더니 부모 그릴 줄도 아네” 하는 말씀이 진정한 학위이고 화가로 인정받은 진정한 ‘성공’이라고 말하고 있다.
아름다운 방랑, 그러나 고단한 여로(旅路) 2002년 시작된 그의 노란버스 여행이 900일을 훌쩍 넘어섰다. 여행길에 작가는 이름 모를 산과 강, 바다를 떠돌면서 사마귀와 친구가 되고 들꽃과도 친구가 된다. 그러나 길동무만으로 위로삼기에는 만만치 않은 여로다. 애초 구입한 중고 노란버스는 의자를 떼어내 내부공간을 좀 확보하는 선에서 그쳤기에, 그야말로 버스 안에서의 ‘노숙생활’ 그 자체였다. 여름에는 달구어진 버스 차체로 뜨거웠고, 겨울에는 말할 수 없는 추위가 닥쳐왔다. 그러나 얼마나 고대해왔던 행로던가.
어떤 외로운 계절도 물들이지 못한다. 어떤 지독한 사랑조차도 평범함에 이르지 못하듯 그토록 변하고 시끄럽지만, 한없이 고요한 이 고독은 고요하기만 하다. 언어도단의 추위가 입김처럼 사무쳐도 삶은 저물지 않는 고독으로 따뜻하구나. 안녕 삶이여 모든 거짓으로부터 자유로운 영혼이여 마음껏 노래하라. -본문 2부 <저물지 않는 고독>
뼈에 사무치는 추위와 고독 속에서도 작가는 노래한다. 그토록 열망하던 여로이었기에.
KBS 다큐미니시리즈 <인간극장>에 ‘길 위의 화가’ 방영 여행길에 오르기 전, 작가는 포천의 한 마을에 둥지를 틀고 아이들 미술교육을 시작했다. 이름하여 <그림노트> 모임이다. 아이들 미술교육에 대한 작가의 생각은 각별하다.
사랑하지 않는 것을 그리는 아이는 없다. 아이들이 그리는 그림은 “나는 너를 사랑해”라는 문장과 같다
아이들이 떠드는 것은 얼마마한 사랑인가!
어떤 어른이 저들처럼 떠들며 노래할 것인가? -본문 4부 중에서
아이들 미술교육에 대한 특별한 그의 열정이 소문이 나서 다큐멘터리를 찍는 김우현 감독을 만나게 된다. 그게 1999년이다. 이때 기록된 필름은 KBS <제3지대>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사람들에게 알려졌고, 이후 작가 개인에 대해 관심을 갖은 감독이 몇 년에 걸쳐 그의 행보를 촬영하여 2003년에는 KBS <인간극장> 프로그램에 5부작 다큐멘터리 <길 위의 화가>라는 제목으로 다시 한 번 선보이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