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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응수 영천성수복,청주성무혈입성,일본군의 보급로상실,조헌과 아들등 칠백의총, 의병장 김면의사망
(1592.06~1593.03)
일본군에게 일찌감치 점령당한 경상우도에서는 자신의 마을을 지키기 위한 자위성 의병부대가 많은 활동을 하고 있었으나, 경상좌도는 6월까지 이렇다할 움직임이 없다가, 6월 초순 밀양부사 박진이 경상좌병사로 부임하여 신령에 도착하면서부터 경상좌도에서의 군사적 활동이 조금씩 활기를 띠기 시작하여 영천의 정세아, 조희익, 하양의 신해, 신령의 권응수가 각각 의병을 조직하였다.
그러다가 경상우도 초유사 김성일은 전 훈련봉사를 지낸 권응수를 경상좌도 의병대장으로 임명하여 영천 지역의 의병을 총 지휘하도록 하였다. 이에 권응수는 영천, 하양, 신령 등지의 의병을 통합하여 7월 22일 ‘창의정용군’ 을 조직한다.
창의정용군 지휘부는 대장(大將) 권응수, 전봉장(前鋒將) 홍천뢰, 중총(中摠) 정대임, 좌총(左摠) 신 해, 우총(右摠) 최문병, 별장(別將) 김윤국, 찬획종사(贊劃從事) 정세아, 정 담으로 짜여졌고, 의병에 대한 기록으로서는 드물게 이 때 모인 의병의 병력이 정확하게 3,560명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권응수의 의병부대는 신령에서 영천으로 진군하여 안강에 본진을 두고 있던 좌병사 박진으로부터 무기를 지원 받아 진용을 갖추고 의병군의 훈련을 실시하고 군기를 바로 세운 뒤 14일 박연에서, 22일 소계와 사천에서 소규모 적군과 조우하며 실전 경험을 쌓으면서 영천성에 접근하여 24일 추평에 진을 치고 공격 준비를 하였다.
당시 영천성에는 일본군 제5번대의 일부 병력이 주둔하면서 부산에서 한양에 이르는 주요 통로를 보호하고 있었다. 영산성의 남쪽에는 절벽 밑으로 남천(南川)이 흐르고 있고 북쪽에는 마현산이 솟아 있으며, 동쪽과 서쪽은 골짜기로 둘러싸여 있었다.
권응수는 마현산 기슭 성 주변에 마른 풀과 나뭇잎 더미를 쌓아 화공을 준비하는 한편, 이날 밤 사이 남천 주변 숲 속에 복병 400명을 배치해 두었다가 다음날인 25일 새벽 물을 길러 성을 나온 일본군을 습격하였다.
25일 경주에서 권사악이 의병 수백 명을 이끌고 지원을 왔다.
25일 하루 종일 성 안 팎에서 사격전을 주고 받으며, 서로 포격을 가하기도 하였다.
26일 권응수의 동생인 권응평이 결사대 500명을 조직하여 성 밑에 은밀히 접근하자 일본군은 성을 나와 선제공격을 가해 왔다. 결사대가 이들을 맞아 맹공을 가하자 일본군은 30여 구의 시체를 남겨 놓고 성으로 후퇴해 들어갔다.
27일 아침 영천성에 대한 전면 공격이 감행되었다. 그동안 권응수는 병력을 동원하여 고가 사다리와 같은 공성 기구들을 만들고 불에 잘 타는 나뭇가지들을 마련하여 장차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마현산 기슭에 산처럼 쌓아 놓은 나뭇더미에 불을 지르자 때마침 강풍을 타고 연기와 불똥, 재들이 성 안으로 날아들자 적군의 시야를 차단하였다. 권응수 군이 재빨리 사다리를 타고 넘어 들어갔고, 불길은 강한 바람을 타고 성 안으로 번졌다. 창고와 건물에 불이 붙고 곧 화약고에 불길이 닿게 되었다. 삽시간에 화약고가 폭발하자 일본군의 시체가 무수히 떨어졌다. 서북문으로 빠져나오던 일본군은 대기하고 있던 권응수 군에게 모조리 사살되었다. 남문을 빠져나와 물 속에 빠진 일본군 수명이 헤엄쳐 겨우 달아났다.
다음 날 아침, 연기가 걷히자 권응수 군은 성 안으로 들어가 전장을 정리하였다. 일본군이 버리고 간 군마 2백 여 필과 조총, 창검 등 무기류 9백여 점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으며, 조선인 남녀 1,090명을 구출해 내었다. 적의 사살자 수는 확인할 수조차 없었다. 이 전투에서 권응수 군은 전사 83명, 부상 238 명의 손실을 입었다.
이로써 영천성이 개전 95일 만에 수복되었고 인근 신령, 의홍, 의성, 안동 등의 적이 모두 경주로 퇴각하였다. 병사 박진이 조정에 계를 올리니 권응수는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임명되었고, 정대임은 예천군수가 되었다. 그리고 조성 외 여러 사람들에게 각각 그 공에 따라 벼슬을 내려 주었다.
일본군은 개전 3개월만인 7월부터 조선 각지에서 의병 활동이 본격화되자 군수 물자 현지 조달은 물론 본국으로부터의 수송이 갈수록 어려워졌다. 수로를 이용한 수송은 남해안의 제해권을 장악한 조선 수군에 의해 꿈도 꾸지 못하는 일이 되었고, 곡창지대인 전라도 진격도 좌절되었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경상도 일대에서 일어난 의병들의 유격전이 날이 갈수록 활발해져 도처에서 보급로가 차단당했다. 이렇게 되자 일본군은 점차 점령지역 확대보다는 기존 점령지역의 확보와 보급로 안전에 더 신경을 써야 했다.
8월 무렵부터 다음해 봄 부산으로 전면퇴각할 때까지 일본군은 서울과 부산, 그리고 평양까지의 주보급로 경비에만 약 6만 명의 병력을 배치했다고 한다.
이 외에도 일본군은 10리 또는 50~60리 거리를 두고 험한 곳을 골라 보급로 경비를 위한 영책을 세워 병력을 배치하였지만, 의병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이들 영책도 의병들에게 수시로 기습을 당하고 일본군 수송대도 번번히 약탈 당해 제대로 된 보급이 이루어지기 힘들었다. 많은 일본군들이 허기와 병으로 인해 사기가 떨어졌고, 일부 병사들은 향수병에 시달리며 일본으로 돌아가기 위해 탈영을 하기도 하였으나 그들 대부분은 도중에 매복해 있던 의병들에게 사살될 뿐이었다.
개전 첫 해 겨울부터는 연락병 1인을 보내는데도 기병 30 ~ 50 기, 보병 100 ~200명 씩으로 릴레이 호위를 붙어야 움직일 수가 있었다는데서 볼 수 있듯이 일본군의 보급로는 매우 위협을 받고 있었다.
● 보급로 단절
평양성에서 더이상 진격을 못하고 사태파악만을 하던 고니시 유키나가의 제1번대는 대동강 남쪽 중화군의 어량산성에 수비병력을 배치해 두고 있었다.
이에 중화군 사람인 임중량과 윤봉, 차은진, 은로형제 등이 의병을 이끌고 중화의 동과 서에 각각 진지를 구축하고 일본군을 견제하였다. 이들은 수시로 일본군의 소부대를 기습하는 등 일본군을 교란하면서 용맹을 떨쳤다. 계속되는 의병군의 교란작전으로 위협을 느낀 고니시는 이에 12월 1일 대군을 동원하여 동서 의병진지를 공격하여 하루동안의 공방전을 벌여 동진의 의병군 대부분을 전멸시키고, 서진 역시 붕괴시켰다.
조정은 전사한 윤봉에게는 사복첨정을 추서하고, 살아남은 차은진 형제를 서산과 청도 군수로 각각 발령하였다.
그러는 동안 명의 요동 부총관 조승훈이 3천여 병력으로 평양성을 건드렸다가 쫄딱 망하고 달아나자 조정은 이번에는 조선군 단독으로 평양성을 탈환하려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조선군이 이처럼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 이유는 조승훈이 도망가는 데도 일본군이 추격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의병들이 강서 방면으로 활동하여도 일본군이 출동하지 않자, 일본군이 크게 위축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하여 병력을 모아 총공격을 감행하면 평양성을 수복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조선군은 순찰사 이원익이 북쪽에서, 순변사 이일이 동쪽에서, 조방장 김응서가 서쪽에서 그리고 별장 김억추가 수군으로 대동강을 타고 올라와 각기 평양성을 공격하기로 하였고, 동원된 조선군의 병력은 이원익 휘하에 5천여 명, 이일 휘하에 5천여 명, 김응서 휘하에 1만여 명, 도합 2만여 명에 달했으나, 대부분 농민 중에서 징발되어 훈련이 부족한 군사들이었다.
8월 1일 조선군이 평양성의 보통문 밖에 이르자 일본군 50여 명이 성문을 나와 공격해 오자 조선군쪽에서도 화살을 쏘아 응전하여 이 중 20여 명을 사살하였고 일본군은 다시 성 안으로 들어갔다. 이에 조선군은 사기가 올라 성문을 향해 돌격을 감행하였으나, 이 때 성 안에서 일본군 수천 명이 일시에 나와 조선군의 중앙을 돌파하였다. 조선군은 모세의 십계에 나오는 홍해처럼 좌우로 갈라지며 지휘가 마비되었고 훈련이 안 된 군사들이 놀라서 흩어져 버리는 것은 당연지사다. 결국 잔여 병력만이 간신히 부산원 서쪽으로 후퇴하였다.
싸움에서는 대패했지만 김응서는 적의 목을 베어 돌아왔고 조선군의 피해도 의외로 전사 3명, 부상 27명으로 경미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아마도 싸움의 초기에 다들 흩어져 버린 결과가 아닐까 한다. 결국 제대로 된 싸움은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5월 하순에 충청도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킨 조헌은 전 참봉 조광윤, 선비 장덕익, 신난수, 고경우 등의 도움을 받으며 충청도 서남 지역을 돌면서 모병을 계속하여 7월 하순에는 1천 6백여 명의 병력을 거느리게 되었다. 조헌은 다시 옥천에서 보은으로 진출하여 그곳에서 공주에서 최초로 기병한 의승군장 기허 영규가 지휘하는 승군 1,000여 명과 청주성을 잃고 연기 쪽에 진을 치고 있던 방어서 이옥의 500여 병력과 합류하여 총 군세가 3천여 명으로 늘어나자 청주성을 수복하기로 하였다. 이 때 청주성은 일본군 제5번대 하치스가 이에마사의 부장이 1,000여 명의 병력으로 성을 지키고 있었다.
7월 하순 윤선각과 이옥의 관군은 연기에서 영규의 승군은 안심사에서 조헌 의병군은 옥천에서 각각 청주성 근교에 집결한 뒤 8월 1일 청주성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조헌의 의병군을 선두로 청주성 서문을 향해 공격을 시작하자, 일본군쪽에서도 수십 명이 성 밖으로 나와 조총을 쏘면서 반격을 하였다. 의병군은 지형과 수목을 이용하여 적의 조총 사격을 피하면서 활의 사정거리 내로 거리를 좁혀가다가 일시에 일본군을 포위하여 활로 집중 사격을 퍼부었다. 이 후 의병군과 일본군사이에 치열한 백병전이 벌여졌는데, 여러 부대가 뒤섞여 싸웠기 때문에, 갑옷 입은 관군, 승복 입은 승군, 한복을 입은 의병군 등 복장과 무기가 가지각색이었다.
당시가 8월 한 여름이라서 일본군 중에는 훈도시만 걸친 채 싸우는 자들이 많았다. 의병부대쪽에서도 윗 저고리를 벗어 던진 채 싸우는 의병들이 늘어나자, 이 모습을 본 조헌은 “가죽 갑옷 위에 옷을 입어라” 하며 소리치자 의병군 여기저기에서 폭소가 터져나왔다.
이렇게 사기가 높은 의병군들이 점차 일본군을 압박하여 몰아부치자, 일본군은 성 안으로 후퇴를 하였고, 의병과 승병, 관군은 일제히 성으로 돌진하여 긴 사다리를 이용 성벽을 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갑자기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쏟아져 공격을 계속할 수 없게 되었다. 조헌은 할 수 없이 병력을 철수하여 서쪽 산봉우리에서 적의 동정을 살폈다. 일본군은 철수하는 조선군을 추격할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날이 저물어 조헌 군은 산 위에서 야영을 하고, 다음 날 새벽 다시 청주성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는데, 일본군의 저항이 전혀 없었다. 전날 전투에서 많은 사상자를 낸 일본군은 야음을 틈타 모조리 달아나고 없었던 것이다. 조헌 군은 청주성에 무혈 입성하여 3개월 동안 일본군이 장악했던 청주성을 수복하였다.
청주성을 잃으면서 일본군은 경상도 금산(김천)→추풍령→영동→청주→용인을 잇는 보급로를 상실하였다.
경주에서 의병을 일으킨 전 훈련 봉사 김호는 경주 부근을 돌면서 민심을 안정시키고, 의병의 대오를 편성하여 훈련을 실시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조선 의병들의 활약으로 영천, 신령, 하양 등지를 빼앗기고 대구→청도→밀양→양산의 병참선 방어에 주력하면서 경주성에는 소수의 병력을 잔류시키고 있었다가, 영천을 빼앗긴 후 의병이 경주성을 공격할 것에 대비하여 양산 주둔 일부 병력을 경주성으로 보내기로 하고, 일본군 정병 500여 기가 양산을 출발, 8월 1일에 언양에 도착하였다.
이 때 경주 부근에서 의병을 훈련시키고 있던 김호는 이 소식을 듣고 일본군이 경주에 진입하기 전에 언양에서 격퇴시키기로 계획을 세웠고, 8월 2일 의병 1,400여 명을 거느려 숙영지를 출발 언양을 향해 진격하였다. 그런데 의병부대의 선봉이 경주인근을 벗어나 노곡에 이르렀을 때 일본군과 조우해 버렸다. 일본군은 그날 언양을 떠나 경주로 올라오고 있었던 것이었다.
불시에 적과 부딪히게 된 의병 선봉대는 함성을 울리면서 돌격을 감행하였고, 일본군은 갑작스러운 공격에 당황하여 계곡으로 달아났다. 의병들은 언덕으로 올라가 돌을 굴리고 화살을 쏘아 달아나는 적을 사살하였다.
이렇게 선봉대가 기선을 제압하고 있을 때, 김호가 이끄는 본대는 즉각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하였고, 완전 포위된 일본군은 다시 언덕을 기어 올라오려고 애를 썼으나, 의병들은 활을 쏘고 백병전을 벌여 일본군 수십 명을 사살하였다. 일본군 패잔병 일부는 의병의 배치가 엷었던 경주 방면으로 포위망을 뚫고 달아나 경주성으로 후퇴하였고, 김호의 의병부대는 언양까지 가지 않고도 경주성에 대한 구원병력을 격퇴시킬 수 있었다.
조헌은 청주성 수복 후 군량 부족으로 인해 다시 모이기로 하고 의병군을 일단 해산하였다가, 다시 의병군 1천여 명을 모아 근왕을 위해 온양으로 진출했다. 순찰사 윤선각이 이 소식을 듣고 조헌 휘하의 장덕익을 불러 “금산의 적부터 물리쳐서 양호(兩湖:호남과 호서)를 보전한 뒤 근왕을 해도 늦지 않다” 며 관군과 합동으로 금산성 공격을 제의했다.
당시 조선의 관군과 의병들은 고경명의 패배를 교훈 삼아 깊이 쳐들어가지 않고, 좁은 령(領)만을 지키며 일본군의 진출을 저지하고 있었다. 다만 보성과 남편의 두 부대만이 고개를 넘어 적을 엿보다가 오히려,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남평현감 한순이 전사하고, 500여 명의 군사는 전멸당했다.
윤석각의 제의를 받은 장덕익은 곧 조헌에게 전하였고, 조헌도 이에 동의하여 공주로 군사를 돌려 금산으로 향했다. 조헌은 이전 금산성을 공격하다 전사한 고경명과 했던 약속을 지키지 못했던 것이 못내 아쉬었던 것이었다. 원래 고경명은 금산 공격에 앞서 조헌에게 글을 보내 함께 형강(荊江)을 건너 금산을 치자고 했고, 조헌도 승낙하였는데, 조헌이 미처 거병을 하기 전에 전투가 벌어져 고경명과 그의 의병군은 전멸하고 말았다.
한편 윤선각은 조헌으로 하여금 근왕을 포기하고 금산으로 가게 한 후 합동작전은 커녕 조헌 의병군에 가담한 장정들의 부모와 처자를 잡아 가두고 각 읍에 공문을 보내 협력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렇게해서 1천여 의병 중 300여 명이 이탈하고 현지에 도착한 의병은 7백여 명에 불과했다. 윤선각이 갑자기 이처럼 돌변하여 조헌을 방해한 이유는 일전에 청주성 전투 당시 조헌은 순찰사인 윤선각과 방어사 이옥 등 관군이 제대로 전투를 하지 않는다고 질책을 하였고, 그러한 내용을 조정에 장계를 올리기도 하였기 때문에, 조헌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가 조헌에게 합동군사작전을 제의한 것은 그의 이러한 행위들이 조헌을 통해 중앙 정부에 알려지지 못하게 하기 위한 연막이었던 것이다. 당시 관군과 의병군 사이에는 모병과 전공 다툼, 그리고 합동작전 때 지휘권 문제 등으로 알력이 심하였다.
그래도 온양 현감 양응춘이 조헌 군에 합류하였다. 조헌은 얼마 안 되는 군사를 이끌고 단독으로 일본군을 치려 하였지만 전라감사 권율과 충청감사 허욱이 한꺼번에 같이 치자며 공격을 말렸다. 조헌은 권율에게 8월 17일에 금산성을 함께 공격하자고 제의한 후 권율의 회신을 기다리지 않고 15일 공주를 출발하여 16일 유성에 도착하여 영규의 승군 6백여 명과 합세하였다. 영규가 관군의 도움없이는 들어갈 수 없다고 하였으나 조헌은 단호히 물리치며 북을 울리며 진군하였다. 영규는 조헌을 혼자 죽게 할 수 없다며 자신이 거느리고 있던 의병군을 조헌의 부대와 합쳐 금산성으로 떠남과 아울러 관군이 빨리 따라와 주기를 바라는 글을 보냈다.
17일 금산성 밖 10리 지점인 연곤평에 도착하여 권율 군을 기다리던 조헌은 그날 저녁까지 권율 군이 도착하지 않자 다음날 단독으로 공격할 결심을 했다. 이때 권율은 전라도 군이 미처 출전준비를 갖추지 못하였으므로 금산성 공격을 연기하자는 회답을 보냈는데, 조헌은 그날까지 회답을 받지 못했던 것이다.
금산성에는 일본군 제6번대 고바야카와 타카가게의 1만여 병력이 지키고 있었는데, 고바야카와는 비록 웅치와 이치의 조선군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하였고, 고경명 부대의 기습을 받기도 하였으나, 금산 쪽으로 북진하려던 전라도 보성군과 남평현의 관군을 급습해 남평 현감 한순을 전사시키는 등 군세는 여전했다.
관군의 지원도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1천 3백여 명의 의승병군만으로 정예 1만여 일본군이 지키고 있는 금산성을 단독으로 공격하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충(忠)과 의(義)만을 알고 대쪽 같은 성품의 그는 물러나 뒷 날을 기약하자는 주위의 만류에 “임금이 욕을 당하면(主辱), 신하는 죽어야 한다(臣死)” 며 단호히 결전 의지를 밝혔다. 이에 영규와 의병군 전원이 옥쇄를 각오했다.
밤을 새워 공격 준비를 한 조헌 군은 18일 아침에 병력을 출동시켜 공격을 개시했다. 일본군은 뒤따라오는 후속부대가 없음을 알고 전 날 밤 야음을 틈타 의병의 배후에 군사를 매복시켜 뒤를 끊은 뒤 군사를 모두 내어 조헌군을 포위할 계획을 세웠다. 그런 사실을 모르고 성을 향해 진격하고 있을 때 일본군이 성에서 나와 선제 공격을 가해왔다. 그와 동시에 매복해 있던 일본군이 의병의 배후를 공격해 왔다. 적의 의해 포위상태에 빠진 조헌 군은 무기면에서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하루종일 분전했다.
조헌은 “오늘은 오직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마땅히 의롭다는 한마디에 부끄럽지 않아야 할 것이다” 라고 명령을 내려 독려했다. 한참동안 치열한 격전을 벌였다. 그 때 이미 조헌의 부대는 화살이 떨어져가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싸웠다. 그러나 조헌은 다급해하지 않고 장막안에서 꿈쩍하지 않았다. 곁에 있던 사람이 같이 나가자고 하였지만 “대장부는 죽으면 그만이지 구차하게 살 수 없다” 며 더욱 북을 세게 치며 독전하였다. 조헌을 따르는 의병들은 손에 무기하나 없이 육박전을 펼쳤다.
조헌, 영규, 온양 현감 양응춘 이하 관, 의병군, 의승군 거의 전원이 제자리를 떠나는 사람하나 없이 조헌과 함께 역사속으로 묻혔다. 조헌의 아들 완기도 함께 순국하여 고경명 부자에 이어 두 번째 부자 순국을 기록했다. 일본군 또한 전사자 시체를 성 안으로 옮기는 데만 3일이 걸렸다.
일본군이 물러간 뒤 조헌의 제자들이 700명의 시신을 수습하여 경양산(景陽山) 기슭(금산군 서리면 의총리)에 큰 무덤을 만들고 ‘700명의 의로운 사람들의 무덤(七百義塚)’이라 하였다. 일본군은 두 차례의 금산성 전투에서 모두 승리를 거두었으나 그들이 입은 타격도 적지 않았다. 이에 일본군은 전라도 점령 계획을 포기하고 9월 7일에 무주의 별군을 금산으로 합류시킨 후 16일에 전군을 옥천으로 철수시켰다. 이로써 일본군의 전라도 진입은 저지되었다.
7월에 무계의 일본군을 격퇴시키는데 성공한 의병장 정인홍은 합천에서 의병을 일으킨 김면 등과 성주성을 탈환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성주성은 대구→구미→선산→상주→문경→조령 또는 대구→구미→금산(김천)→추풍령을 잇는 일본군 주보급로를 지키는 요충이었기 때문에 이 성을 탈환하면 일본군의 보급에 막대한 차질을 줄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군도 대군을 주둔시켜 놓고 있었다.
원래 성주성의 점령부대는 하시바 히데카쓰의 제9군이었는데, 8월 11일자로 제7군의 모리 테루모토 휘하 부장 가쓰라 모토쓰나 1만 병력
과 교대하였다. 거기다가 곽재우와 김면 의병군에게 쫓긴 우도(右道)일대 일본군이 모두 집결하여 총 2만 명이 넘었다.
김성일은 김면, 정인홍 등의 의병군이 성주를 공격하도록 하는 한편 도체찰사인 정철에게 병력 증원을 요청하여, 운봉과 구례의 관군 5천여 명을 지원받을 수 있었다. 거기에 화순에서 기병한 최경회와 임계영 의병군이 합세하여 관군의 지원군과 기존 병력을 합하자 총병력이 2만여 명에 육박했다.
정인홍과 김면은 8월 21일을 주둔지를 출발하여 합천에서 고령을 거쳐 성주성 남쪽으로 진출한 다음, 8월 22일부터 운제(雲梯), 비루(飛樓), 충차(衝車) 등 공성기구를 마련하여 대대적으로 성주성을 공격할 준비에 들어갔다.
한편 일본군 지휘관이었던 가쓰라는 조선군의 병력이 수만 명에 달하자 개령에 있던 본진의 모리에게 병력 증원을 요청했다. 일본증원군은 곧장 의병군의 측후방으로부터 공격을 시작하였고, 포위망을 미처 완성하기도 전에 기습을 받은 의병군은 곧 대열이 무너지면서, 조직적인 대항도 제대로 하지 못찬 채 후퇴해야 했다. 이로써 성주성 공격은 제대로 전투도 못해 보고 실패로 돌아갔다.
1차 공격에 실패한 정인홍, 김면 의병군은 한 달쯤 뒤이 9월 11일 다시 성주성 공략에 나섰다. 이번에는 합천 군수 배설과 합천 가장(임시직) 김준민을 설득하여 경상우도 감사 김성일의 승인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공격군에 가담시킬 수 있었다.
성주성 5리 밖 가평에 지휘본부를 설치한 의병군은 10일 하루를 공격했으나, 일본군은 성을 굳게 지킬 뿐 반격하지 않아 별 소득이 없었다.
그러는 한편 1차 공격 실패의 교훈을 본받아 김면은 개령으로부터 오는 일본지원군을 차단하기 위해 합천 군수 배설로 하여금 개령과 성주 사이에 부상현 일대에 병력을 매복하여 일본증원군을 차단하도록 지시했는데, 배설은 “내가 어찌 일개 서생의 명령에 따라야 하느냐” 며 김면의 지시에 따르지 않고, 작전 지역을 이탈해 버렸다. 11일 아침부터 공성기구인 우네와 충차 등을 준비하는 등 공격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부상현을 넘은 일본군의 증원이 의병군을 공격하였고, 이에 맞추어 성 안의 일본군도 성을 나와 협공하였다.
혼전 중에 정인홍의 별장 손승의가 조총에 맞아 전사하는 등 조선군은 또다시 패주하며 2차 공격도 실패로 끝났다.
3차 공격은 석달 뒤인 12월 7일부터 시작되었다.
그동안 김면은 경상 의병 도대장, 정인홍은 경상 의병장으로 임명되었다. 두 사람의 지원 요청을 받은 전라도 의병장 최경회, 임계영 의병군이 장수와 무주에서 각각 넘어와 개령과 고령 방면에서 활동하며 김면, 정인홍 의병군과 연락하며 일본군을 교란하였다.
12월 7일 성주성에 도착한 경상, 전라 의병 연합군은 8일에 걸친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으나, 피해가 너무 심해져 결국 14일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3차례에 걸친 조선군의 끈질긴 공격을 받고도 성을 지켜낸 일본군은 그러나 이듬해인 1593년 전세가 점차 불리해져 본대가 후퇴해야할 상황에 이르자 1월 15일 밤 성문을 열고 철수하여 개령의 본대와 합류하여 선산방면으로 철수하였다. 이에 조선 의병군은 성주성에 무혈입성할 수 있었다.
이로써 경상우도, 낙동강 서쪽 지역이 모두 수복되었으며, 일본군은 부산→밀양→청도→대구→인동→선산→문경→조령→충주→용인→서울을 잇는 외길 육로 보급선에만 의존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한편 성주성 공략의 선봉에 섰던 의병장 김면은 의병군을 일으킨 뒤 한 번도 갑옷을 벗은 일이 없이 큰 전투만 10여 차례 치루는 등 대소 전투 40여 차례를 거듭하는 동안 만석꾼의 가산을 모두 탕진하여, 처자가 문전걸식을 하였는데도, 이를 돌보지 않고 전장에서만 보냈다. 하지만, 끝내는 전장의 과로로 병을 얻어 1593년 3월 11일 금릉군 하리의 한 병영 막사에서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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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을 거두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시에서 나라를 위해서만 싸우다 죽은 대장부의 어떤 회한 같은 것이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