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득의 부산항 이야기 <30> 첫 '컨'선 들어오던 날
100명 '컨' 하역일 5명이 처리 '깜짝'
- 위기의식 느낀 노무자들 파업
- 요구안 수용해 가까스로 진정
부산항에 처음 컨테이너전용선이 들어온 날은 1970년 3월 2일 오전이다. 입항예정일보다 하루 앞서 부산항 제 4부두에 접안한 이 선박은 컨테이너운송시스템의 개척자인 미국 시랜드(Sea Land) 사 소속 1만200t급 피츠버그(Pittsburgh)호였다. 이 배에는 35t짜리 컨테이너 98개가 실려 있었다.

1980년대 우리나라 최초의 컨테이너종합터미날인 자성대컨테이너부두 전경.
당시 전용선 자체 크레인에 의해 단숨에 무거운 철제박스가 부두에 내려지는 것을 지켜본 많은 사람들은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100여 명의 노무자가 하던 일을 4, 5명의 기술자가 거뜬하게 처리하고 있으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게 해방 이후 낙후된 부산항에 컨테이너전용선이 몰고 온 하나의 충격이자 일대 파란이었다. 더군다나 컨테이너선이 들어온 그때가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7년~1971년)이 마무리 되는 데다 수출 드라이브 정책까지 맞물려서 부산항이 호황을 맞을 무렵이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컨테이너전용선이 들어온다는 소식에 제일 먼저 민감한 반응을 보인 곳은 항만의 노무자였다. 이들에게는 18세기 중엽 '기계가 사람을 잡아 먹는다'는 영국 산업혁명에서 나온 빛바랜 구호가 새삼 가슴에 와 닿을 정도로 기계화로 인한 대량실직이 눈앞에 다가서고 있었다. 위기의식을 느낀 당시 전국부두노조원 2만여 명은 부산항 개항 94주년을 맞은 2월 26일 오전 6시부터 컨테이너선 취항 반대투쟁을 위한 가부투표를 하면서 파업에 대한 긴장도를 높여갔다.
이로 인해 부산항을 비롯한 전국 항만의 하역작업은 순조롭지 못했다. 가뜩이나 조합원 97%의 찬성으로 힘이 실은 부두노조는 전면파업 D-day를 컨테이너전용선 입항예정일에 맞춰져 있었다. 그러다 보니 날로 부산항은 암울한 분위기 속에서 점점 긴장감만 높아갔다. 다행히 컨테이너선 한국대리점인 한진상사에서 노조의 실업보상 등의 요구사항을 모두 수락함으로써 일단 파업이란 위기를 모면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정부의 컨테이너시스템 도입계획도 별다른 저항 없이 순조롭게 추진되었다. 특히 부산항 제 4부두 북쪽 25번 선석 일대 2800평을 컨테이너 야적장으로, 18호 창고는 화물 조작창으로 지정하여 컨테이너 화물 처리에 대비했다. 이어서 대진해운 소속의 인왕호(4500t급)가 1972년 10월부터 부산과 일본 고베 간에 처음으로 컨테이너 운송서비스를 시작하면서 부산항은 피터항으로서의 역할이 주어졌다. 이어서 같은 해에 부산-서울 간 컨테이너 전용열차도 개통되면서 복합운송시대가 서서히 이 땅에 뿌리를 내렸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에 발맞추어 정부는 1974년 말에 제 5부두에 컨테이너 전용부두를 만들기 시작하여 지난 1978년도에 완공을 보았다. 이게 우리나라 최초의 컨테이너종합터미널인 자성대컨테이너부두(현 허치슨부두)였다.
오늘날에 와서 항만의 위력은 크레인의 위용과 관련이 깊다. 부산항은 이제 동북아의 대표 컨테이너 허브(Hub)항이다. 이렇게 컨테이너가 물류시스템의 중심으로 자리를 잡기까지 제일 먼저 부닥친 난간은 노동자의 파업이었고 이것은 세계적인 추세였지만 다행히 부산항에 컨테이너선이 처음 들어오던 날은 평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