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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내 사랑 중국 ♡ MyLoveChina 원문보기 글쓴이: 익명회원 입니다
운남성의 쿤밍, 대리, 시쌍반나 관광정보
윈난이 중국에서 가장 매혹적인 여행지임이 틀림이 없다. 중국의 모든 성들 중에서 가장 다채로울 뿐 아니라, 지역적으로는 아열대로부터 티베트의 눈 덮인 봉우리까지 걸쳐있다.
윈난은 중국에서 6번째로 큰 성(省)이며, 중국 전체 소수민족의 1/3(성 전체 인구의 절반에 가까운 인구가 비(非)한족(漢族)이다)과 중국 전체의 식물과 동물 종(種)의 절반이 이곳에 살고 있다.
만약 단 한곳의 성으로만 여행할 수 있는 경우라면 윈난성으로 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윈난은 일 년 내내 온화한 기후로도 유명하다. 윈난이란 이름은 구름의 남쪽이란 이름이고, 성도인 쿤밍 또한 봄의 도시라는 뜻이다.
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 성의 많은 산간지방은 중국의 영향력에 대해 완강하게 저항하는 강한 지방색을 띄고 있다. 이러한 정체성이 경제의 급속한 성장으로 사라질 위험에 처해 있지만 성도인 쿤밍조차도 마치 베이징과는 지구의 반대편에 있는 것처럼 자신의 고유한 풍치를 간직하고 있다.
윈난은 과분할 정도로 많은 별명을 갖고 있다. 이곳은 2500종이나 되는 많은 야생화초와 식물을 비롯하여 중국에서 가장 많은 종류의 식물과 동물의 자생지이자 서식지인 까닭에 식물 (혹은 동물)의 왕국. 천상의 화원. 그리고 향료의 본고장 이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생약의 보고라는 새로운 꼬리표에 별 감흥도 없이 당연시 할 정도이다.
역사:
1960년대 학자들이 175만년~250만 년 전에 살았던 원시인의 치아 조각을 발견함으로서 위안 머르런은 중국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인류로 기록 되었다. 또한 윈난의 남쪽 뎬 호수 주변에서 발견된 정교한 청동기 시대 문화 유적은 또 하나의 위대한 인류 문학적 발견이다.
다른 남서부 지역과 마찬가지로 윈난은 언제나 정부로부터 가장 먼저 이탈하는 지역 중의 하나였다. 중국의 무수한 사람들을 이곳으로 추방 하면서 몰락한 관리들이 이곳으로 유배 되었고 이러한 역사가 이 성의 반란적 성향에 결합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윈난은 확고하게 중국영토의 일부로 통합 되었다. 윈난성의 인구는 26개의 소구 민족을 포함하여 4300 만명 이다. 윈난성에 거주 하는 소수민족으로는 ~ ~ 등이 있다. (소수민족 참조)
윈난은 중국 서남 지역의 雲貴 高原에 위치하고 있으며, 중국에서 동남아로 통하는 교통의요지, 미얀마, 라오스, 베트남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제갈공명이 맹획을 7번 잡았다, 놓아준 남서부의 산악지방. 외국과의 국경선이 3,207Km에 달하고, 8개 지역, 26개 현,시가 이들 국가와 인접해 있어 동남아 내륙에서 중국으로 통하는 주요 교통 요지임.
면적 : 394천㎢ (중국 총면적의 4.1% 면적 크기로는 8위), 동서로의 길이 864.9㎞, 남북으로 990㎞의 크기임.
인구 : 4,241 만명( 2000 기준) , 인구밀도 107.5명/Km2
민족 : 雲南省은 雲南省 유일의 15개 소수 민족을 포함하여 26개의 소수 민족(인구5,000명이상 기준)으로 구성된 다민족 省임.
기후 :
높은 산 깊은 계곡 등의 복잡한 지형으로 각양각색의 다양 기후를 보이고 있는데, 대체로 연중 기후 차이는 심하지 않으나 일교차가 비교적 큰 편임. 건조 기후와 습윤 기후의 차이도 많아 연간 강우량은 적지 않으나 계절별 지역별로 강우량의 차이가 많은 고원 계절풍의 기후임. 우기는 5월-10월 기간 중이며, 동일지역에 한대. 온대. 아열대. 열대기후 를 보일정도로 기후의 수직변화가 심하여, 一山 有 四季, 十里 不 同天' (한개의 산에 계절이 있고 십리를 가면 기후가 다르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임.
연간 강수량은 서남지역은2,000mm 이상이나, 중,북부지역은 500-600mm정도로 다소 적은 편이며, 운남성의 수도인 곤명은 春城으로 불리워질 만큼 사계절 기후변화가 크지 않는 겨울철의 휴양지로 유명하다. 사계절 기후변화가 크지 않는 겨울철의 휴양지로 유명하다.
마음속에서 자리 잡은 이상향.
말로 설명 할 수도, 글로 쓸 수도, 그림으로 그리기도 어렵지만 그 이상향은 현실을 도피하기 위한 어떤 곳이 된다. 물리적인 장소를 불문하고. 찬란한 21세기에 이상향에서의 불로불사는 바라지도 않는다. 다만 마음의 평화만 중요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대리와 여강, 샹그릴라까지 품고 있는 윈난 성이야말로 이상향을 찾아가는 여행이 아닐까.
이상향을 위한 첫 발자국, 쿤밍-(昆明)
맑고 청명한 하늘, 상쾌함을 더하는 건조한 날씨는 카메라의 기종을 막론하고 선명한 사진을 만들어준다. 그래서 윈난 성을 여행하는 사람에게 카메라는 여권만큼이나 중요하다. 아니면 선명한 기억이라도. 중국의 내륙 남부에 자리한 윈난 성 여행은 곤명에서 시작한다.
연중 따사로운 날씨로 1년 내내 꽃을 피워 봄의 도시, 춘성(春城)이라 불리는 이곳은 서울에서 직항편이 있어 먼 거리, 낯선 지명에 비해 편한 여정을 꾸릴수 있다. 터미널, 백화점, 관공서, 그 중 둥근 돔의 이슬람 사원은 여러 민족과 종교가 공존하는 단면을 보여주는 것, 중국에서 보는 모스크는 신기하다.
숙박
중국의 다른 지역에 비해 윈난은 다양하고 저렴한 숙소가 있다. 보통 외국인은 중국에서 초대소 아니면 1성급 이상의 호텔에서 묵어야 한다. 호탤은 200~300 위엔. 쿤밍에서는 쿤밍역 부근에 한국인이 운영하는 게스트 하우스가있다.- (아침 포함 30원) 따리의 게스트하우스는 대략 1인 20위엔에 침상하나이다. 싱글룸도 그리 비싸지 않다. 욕실도 완비되어 호텔에 비해 그리 낮은 수준도 아니다.
음식
운남지역의 음식은 한국인에게도 그리 힘들지 않다. 아침은 누룽지밥 같은 쌀죽과 쌀국수가 늘 거리에 대기하고 있다. 정 한국 맛이 그립다면 김과 김치정도는 준비해 가면 좋다. 많은 게스트하우스와 까페에는 서양식 요리도 준비되며 윈난 커피를 즐길 수 있다.
이동
윈난은 철도가 발달되어 있지 않다. 생각보다 고도가 높고 산악이 많아 차량 이동이 대부분이다. 도시의 버스 터미널에는 각지로 가는 버스들이 있다. 단 험한 길을 가는 탓에 100킬로미터 정도는 5~6시간 정도 걸린다고 생각해야 한다. 쿤밍에서 따리까지는 비행기가 오가고 있다. 왕복 20만원 정도.
건강
쇼핑
중국에서 가장 질 좋은 물건은 의류, 가방 등이다. 옷은 이곳에서 미리 준비해 가는 것보다 현지에서 구입해 입고 다니는 것이 저렴할 정도다. 윈난성에서 가장 매력적인 상품이라면 '보이차'를 들 수 있다. 차의 고장답게 다양한 형태의 차를 구입할 수 있다.
보이차-(퓨얼차)를 빙으로 만든것
관광지와 백화점 보다는 거리의 차 전문점에 지인과 함께 가면 서울의 백화점 보다 싸게 질 좋은 보이차를 구할 수 있다. (최근 1년새에 가격이 5배 정도 올랐다)약간 발효시킨 보이차를 들어보면 왜 그 맛에 수많은 사람들이 빠져드는지 느껴 볼 수 있을 것이다
구향 동굴
기암괴석의 석회암 종유석과 석순이 자라는 구향 동굴부터 본격적인 여행이 시작된다. 동굴 안으로 들어가면 축축 늘어지고 흐르다. 멈춘 듯한 종유석들이 마치 공포영화의 한 장면인 듯하고, 원색의 조명이 비춰져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긴다. 기괴한 모양을 따라 동굴 내부를 오르고 내리다 보면 동굴의 규모를 온몸으로 실감하게 된다.
석림(石林)
곤명에서 2시간가량 떨어진 석림은 땅에서 솟아난 듯하다. 돌기둥들이 불쑥불쑥, 그것도 늘씬하게 쭉쭉 뻗은 것들로 숲을 이루었다. 그리하여 이름도 석림(石林). 돌로 된 숲이라니 한자 실력으로도 그 뜻은 통하고도 남는다.
바다 화석이 출토되어 먼 옛날 바다였음을 짐작하는 석림은 대석림과 소석림으로 나뉜다. 아무래도 규모면에서는 대석림인데, 장장 7km에 달하는 산책로를 따라 가면 길을 막는 돌기둥과 기암괴석, 30m가 넘는 장신의 돌 기둥 절벽들이 이어진다. 다양한 돌 기둥의 크기와 색깔, 온갖 짐승 모양의 돌들을 보며 벌어진 입은 다물어 지질 않는다.연꽃처럼 생긴 봉우리 연화봉을 지나 물에 잠긴 석림, 검봉지(劍峰池)를 구경한다. 하지만 돌기둥들의 끝없는 도열은 그 안에서는 도저히 그 시작과 끝을 가늠을 할 수 없다. 그래서 석림의 웅장하고 신비한 풍경을 한 눈에 보려면 망봉정(望峰亭)에 올라야 한다.
비로소 보이는 윤곽은 거대하고 신비할 뿐이다.
로맨틱한 도시로의 여행, 대리(따리 大理)
대리석이 나온 대리는 중국의 스위스라 불린다.
대리 성문
오염되지 않은 자연은 파란 하늘과 맑은 공기에서 그대로 느낄 수 있고, 도시 앞의 이해(얼하이 ?海) 호수는 평화로운 분위기를 만들어 준다. 따리하면 이름 그대로 대리석을 떠올린다. 그 옛날 황제들이 황궁을 지을 때 꼭 필요로 했다는 대리석이 이곳을 통해 중원까지 갔을까? 무협지작가 김용에 의하면 대리는 그 옛날에도 중원 못지않게 비중 있는 지역으로 나온다. 대리국의 단씨 황제들에게 내려오는 절대필기 '일양지'가 그것이다. 그 때문일까 따리는 오늘날에도 그 절대고수들의 이야기를 따라 수많은 중국인들이 들리고 싶은 곳이기도 하다.
백족
따리는 백족의 세력권이라고 할 수 있다. 한족으로부터 민차(民家)라고 불려 왔으나, 신중국이 되면서 바이족(白族)으로 개칭되었다. 인구는 약 60만 명으로 1956년 다리바이족(大理白族) 자치주가 설립되었다. 언어계통은 몬크메르어·타이어·티베트 버마제어설 등이 있으나 정설이 없다.
오늘날 이들은 소수민족으로 전락했지만 알고보면 대 제국의 후예들이다. 지금으로부터 2000년전 전한시대에는 남소 왕국을 건설했고
이웃 중국 한 나라에 못지않은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세계의 오지속에 살었던 그들이 어떻케 그처럼 높은 문화를 가지고 있었는가는 지금도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당나라때 바이족이 다시 다리 왕국을 건설하자 이웃 민족을 못살게 굴었던 당나라는 다리 왕국을 없에기위해 6만명이라는 큰 병력을 동원한다. 그러나 당나라 군사들은 다리의 얼하이 호수에서 한 명도 살아남지못한대 참패를 당한다.
바다같이 넓은 얼하이호수(?) 삼탑사 뒤 멀리 산밑에 얼하이 호수가 보인다.
바이족의 이 전투는 고구려 유민들과의 합작품일 가는성이 아주높다. 그때즘, 고구려가 망하고 당나라에 붙잡혀간 고구려 포로들은 일부가 농우(지금의 칭하이 호수 근처)에서 다리 일대로 남하해 있었던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다리 지역은 우리의 곳과 닮은 풍속이 눈에 많이 띤다. 우리 민족의 상징물인 솟대가 있고 백설미를 만들어 먹는 풍속도 남아 있다. 또 세계에서 오직 우리 민족만이 사용한다고 알려진 지게와 호미가 이 지역에서 발견되는것도 예삿일이 아니다.
백족이 자리 잡은 이곳 따리는 북쪽으로 만년설이 뒤덮인 창산이 있고 남쪽으로는 얼하이라는 거대한 호수가 자리하고 있다. 어떤 방향에서도 외적의 침입을 막을 수 있을뿐더러 거대한 논이 펼쳐져 있어 나라를 경영하기 좋았을 법 했다. 뒤에는 창산이 도시위로 거대하게 솟아있었다. 만년설을 머리에 쓰고 있는 4000 미터의 창산은 참 비현실적이었다. 그런대 저 산을 넘어온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따리국을 멸망시킨 원나라 몽골인 들이었다. 창산과 얼하이로 천혜의 요세를 구축했다고 자신했던 따리국 사람들은 경악했다. 완전히 허를 찔린 셈이었다.
따리 시내-뒤에 창산이 보인다.
백족의 지도부는 어마어마한 기세와 말을 동원한 기마군단의 발굽아래 짓밟히고 말았다. 수많은 귀족들은 몽골군을 피해 식솔들을 데리고 오지 산간으로 피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서. 중원의 정권으로부터 오랫동안 독립되어 있던 따리왕국은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그 후 명대와 청대를 거치면서 윈난은 완전히 중국으로 종속되고 말았다.
하지만 역사의 복수는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일까? 몽골의 힘을 절대적으로 약화시킨 원인이 바로 이곳에 있었다. 흑사병으로도 불리우는 페스트는 원래 이 지역의 풍토병이었다. 그러나 들쥐로 부터 전염되는 이 병은 이 곳 사람들에게는 치명적인 병은 아니였다. 그런대 페스트균을 실은 들쥐가 군마에 실려 초원으로 갔다. 그리고 초원에서 왕성하게 번식해 대규모 흑사병을 일으켰다.
몽골의 초원은 삽시간에 초토화 되었다. 따리의 복수였던것이다. 물론 원 제국이 급속히 쇠락한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설이 있지만 흑사병의 창궐른 그중 꽤 유력한 설 중 하나이다. 산해경과 사기에는 이 지역 민족을 백만(白蠻)이라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오래전부터 중원에도 잘 알려진 듯하다. 창산의 만년설처럼 흰옷을 즐겨 입어 붙여진 이름일 것으로 추정된다. 언어적으로 볼 때 크메르어와 타이어, 티베트버마어 등과 상관성이 있을 뿐 중국어와는 거리가 있어 민족적으로 별개인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당나라 때부터 본격적인 중원의 한문화를 도입해 역사적인 기록이 풍부하고 백족 특유의 문화를 발전시켜 왔다. 주로 불교가 도입되어 지배층 종교로 자리 잡았지만 민중들은 번주(本主)라는 자연신이나 따리국의 왕자나 전설 속의 영웅 등을 숭배하는 종교를 믿고 있다. 종교와 함께 백족 고유한 문화를 발전시켜 천문, 역법, 기상, 의학, 문학 등 분야에서 많은 우수한 작품을 창조하기도 했다.
윈난성 쿤밍에서 버스로 하루거리.
하지만 이제는 따리로 가는 항공기가 흔해져서 버스 여행객이 줄어들 정도라고 한다. 육로에 비해 35분이면 갈 수 있는 비행기를 거부하고 쿤밍의 북부여객터미널에서 따리로 가는 버스를 타고 백족을 찾아 나섰다. 급할 것도 없었지만 사람을 찾으러 가는 길이 하늘이라도 낭만이 없지 않겠는가?
곤명에서 야간열차를 타면 아침 일찍 대리에 도착한다. 양인가(洋人街)라고 불릴 만큼 많은 서양 여행객들이 찾고, 아예 눌러 사는 서양인들도 많은 곳이다. 따리는 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대리석의 산지로 알려져 있고 옛 대리제국으로서 명성이 높은곳 이기도하다. 고성이라고 하지만 지금은 옛날 건물들을 개조해서 모두 기념품을 파는 상가로 바뀌었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게스트 하우스도 자리하고 있다. 소수민족 고유의 분위기를 가진 게스트 하우스도 많아 저렴한 경비로 숙식을 해결 할 수도 있다.
버스가 도시로 접어드니 상당히 중국화된 도시풍경이 나타난다. 하지만 조금 더 도심으로 들어가 보니 고대도시의 풍모를 지닌 대리 고성이 나타난다. 도성안의 모습은 그야말로 1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 느낌. 운남 특유의 낮은 기와 건물들과 수많은 골목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동서로 8개, 남북으로 5개의 길로 이루어진 계획도시의 면모를 갖추고 있는데다 돌로 깔린 길들을 걷다보면 골목마다 가득한 상점과 노점들을 구경하는 것도 고성을 보는 또 다른 즐거움이 되고 있다. 하지만 이곳도 대규모로 관광객(1년 180만)들이 몰려오면서 돌로 깔아놓은 바닥이 반들 반들 달아가면서 하루가 다르게 그 면모를 잃어가고 있다고 현지인들은 아쉬워하기도 한다.
대리석의 도시답게 낮에도 환한 기운으로 빛을 내는 대리석 탑과 건축물들이 눈에 띈다.
대리 성벽 멀리서본 삼탑사
특히 호수에 비치는 세 개의 탑인 삼탑사는 대리의 유명한 볼거리로 놓칠 수 없다. 당나라 시절 만들어진 것으로 이 근방에선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고, 정상에는 사리가 모셔져 있다 한다.
대리 여인이수놓은 염색천 손오공과 삼장법사가 들렸다는 삼탑사
대리 여행은 우선 이해(?海)라는 호수가 먼저다.
얼하이 유람선 차마 고도 가는길
湖가 아니라 海다. 해발 2,400여 미터에 자리한 이 거대한 호수는 차라리 바다라는 이름이 어울린다. 동서로야 맞은편이 빤히 보이는 정도이지만 남북으로 40여 킬로미터에 이르는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고원호수이기 때문이다. 따스한 봄날 끝없이 펼쳐진 호반을 바라보면서 바다를 꿈꾸었을 백족(白族)들의 아스라한 눈빛이 그려진다.
바다처럼 펼쳐진 이해(얼하이 ?海)호수는 대리를 포함한 호수 주변의 사람들에겐 어업의 장소이고 생계 수단이다. 건조한 기후가 만들어주는 깊고 푸른 호수의 빛깔과 주변의 풍경이 그만이다. 배를 타고 호수를 유람하는 코스도 있으니 바다만큼 큰 호수의 크기와 깊이를 느껴본다. 봄, 겨울이면 호수주변에 제주도처럼 노란 유채가 아름답게 핀다.
이해 여행은 큰 유람선을 이용한다. 선상에서 벌어지는 백족 고유의 결혼 풍속을 그린 공연과, 삼도차(三道茶) 시음으로 4시간이 그리 길게 느껴지지 않는다. 젊은 시절의 패기와 시련을 상징하는 약간의 쓴맛, 장년의 풍요에서 오는 달작 지근한 맛. 그리고 인생의 황혼에서 과거를 돌아보는 회미(回味)! 한 잔의 차에도 인생의 철학을 담아내는 그들의 넉넉함이 보인다.
대리는 예로부터 불교의 고장이다. 창산(蒼山) 19 개 봉우리 마다 탑이요, 남북 칠백촌 고을마다 절이라고 했다. 지금은 세월의 무게를 못 이겨 흔적만 남고 단지 숭성사(崇聖寺)의 삼탑만이 온전하게 남아있을 뿐이다. 푸른 창산을 머리에 이고 이해를 바라보는 탑의 모습이 한가롭다.
배에서 내리면 길 따라 찾게 되는 곳이 호접천(蝴蝶泉)이다. 호젓한 대나무 숲길을 따라 20분쯤 올라가면 맑은 물이 사철 솟아오르는 샘을 만난다. 백족 청춘 남녀가 지순한 사랑을 지키기 위해 샘에 몸을 던진 후 한 쌍의 나비가 나타나 샘 주위를 맴돌았다는 전설에서 생긴 이름이다.
쿤밍서 따리까지 7시간의 열차여행과 4시간의 호수 유람. 앞으로의 여정을 위해 일찍 하관(下關)으로 돌아와 호수위에 두둥실 떠있는 달빛을 이불삼아 누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