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8일 (土, 음력 8월 5일)-철도의 날
경인선 철도 한국최초로 개통(인천~노량진)/1899
▲ 1899년 우리나라에서 처음 운행된 ‘모갈탱크형 증기기관차’. 미국 브룩스사에서 만든 기관차로 평균 운행속도는 시속 20∼22km, 3량 객차에는 외국인, 내국인 남자, 내국인 여자로 구분해 승차했다. 이 열차의 등장으로 서울과 인천이 뱃길로 9시간, 걸어서 12시간 걸리던 것이 1시간 반 만에 왕래할 수 있게 됐다.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이 1899년 9월 18일 개통됐다. 노량진-제물포 간을 잇는 33.2km였다. 영국철도가 1825년 9월 세계에서 처음으로 기적을 올린지 74년 만이었다.
경인선은 1889년 주미 대리공사였던 이하영이 귀국하면서 철도 모형을 가져 온 것이 철도부설의 중요한 계기가 됐다. 미국인 모오스는 1896년 고종 황제로부터 경인철도 부설권을 받아, 인천의 미국인 거상 타운센드와 함께 한국개발공사를 설립하고, 1897년 3월 27일 인천 우각리에서 역사적인 기공식을 가졌다. 그러나 자금난에 봉착한 모오스는 1898년 12월 부설권을 일본인들의 경인철도인수조합으로 넘기고 말았다. 그들은 1899년 4월23일 인천역에서 제2차 기공식을 갖고, 이날 인천-노량진 구간 개통식을 가졌는데 이것이 우리 나라 철도의 효시가 됐다.
초창기 기차는 탱크처럼 생긴 미제 ‘모갈’형으로 하루 2차례 왕복했다. 기차가 내뿜는 불똥으로 철로변 민가에는 화재가 빈발했다고 한다. 9월19일자 독립신문은 철도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화륜거의 소리는 우뢰와 같아 천지가 진동하고 기관차의 굴뚝연기는 하늘높이 솟아오르더라. 차창에 앉아서 밖을 내다보니 산천초목이 모두 움직이는 것 같고 나는 새도 미처 따르지 못하더라'
경인선의 개통은 근대적 교통기관의 도입과 함께 일본의 제국주의가 본격적으로 침투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 일본은 인천과 노량진간의 개통에 이어 노량진과 서울역 공사를 서둘러 1900년 7월 8일에 전구간을 개통시켰다.
월미도행 ‘꽃열차’ ‘경인통학생 열차’ 등으로 유명했던 경인선은 일제하, 광복 공간, 한국전쟁 등 급변하는 역사 속 철길을 숨가쁘게 달리면서 증기기관차에서 디젤기관차, 전철로 모습을 바꿔왔다. 경인선은 1965년 9월18일 복선에 이어 1974년 8월15일 전철화됐다.
만주사변 발발/1931. 9. 18
▲ "류타오거우사건을 일으킨 후 남만주철도선을 점령한 일본군, 1931년 9월 18일"
1931년 9월 18일 일본은 류탸오거우 사건[柳條溝事件]을 조작해 만주침략전쟁을 일으켰다. 만주 지역의 이권에 눈독을 들이던 일본 군부와 우익은 관동군 참모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郞], 이시하라 간지[石原莞爾] 등을 앞세워 류탸오거우에서 스스로 만철 선로를 폭파하고 이를 중국측 소행으로 몰아붙였다. 당시 중국은 장쉐량[張學良]이 베이징[北京]에 있었고 다른 봉천 군벌의 주력은 장성선(長城線) 이남에 집결해 잔류 수비대가 동삼성에 분산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침략 행위에 대해 즉각적인 대응을 하지 못했다. 이를 틈타 일본 관동군은 개전 5일 만에 랴오둥[遼東]·지린[吉林] 성의 거의 전지역을 장악하고, 이 지역 군벌들에게 압력을 가해 독립을 선언하게 했다. 이어 11월에는 동북3성 전역을, 1932년 1월에는 진저우[錦州]를 점령하고 3월 1일 만주국을 세웠다. 국제연맹은 일본군의 철수를 권고했으나, 러허 성[熱河省]마저 점령한 일본은 이를 거부하고 1933년 3월 국제연맹을 탈퇴했다. 만주침략으로 득세한 일본 군부와 우익은 정국을 장악하고 일본을 파시즘 체제로 전환시키는 한편 1937년에는 중일전쟁을, 1941년에는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강릉 잠수함 침투사건 발생/1996. 9. 18
▲ 1996.9 무장공비를 태우고 동해안 강릉해안지역에 침투한 무장잠수함
1996년 9월 18일 새벽 북한군 26명을 태우고 강릉 앞바다에 침투한 북한 잠수함이 좌초된 채 발견되었다. 한국 정부는 즉각 이 사건을 무력도발로 규정했으며, 국제연합(UN) 안전보장이사회는 이를 규탄하는 의장 성명을 발표했다. 이에 대해 북한은 정상적인 훈련 중 기관고장으로 표류하다 좌초한 사고라고 주장하면서, 남한측이 잠수함 내의 북한 군인을 사살했다며 '보복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한편 10월 1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생한 최덕근 영사 피살사건은 잠수함 사건으로 악화된 대북감정을 한층 더 악화시켰다. 이로써 그때까지 추진되던 화해·협조·지원의 대북정책에 제동이 걸렸으며 경수로사업 등 국제적인 계획도 중단되었다. 잠수함 사건 처리의 계기가 마련된 것은 그해 11월 24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회의에서 만난 김영삼 대통령과 클린턴 미국 대통령 간의 정상회담에서였다. 이 자리에서 양국 정상은 남북당사자문제와 국제문제는 분리해 다룬다는 원칙에 합의했으며, 12월 8~28일 북한의 사과를 이끌어내기 위한 미국과 북한 간의 접촉이 진행되었다. 그 결과 12월 29일 북한은 대외방송인 평양방송을 통해 잠수함 침투사건에 대한 사과성명을 발표했다. 이 사건은 탈냉전시대에 북한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외교역량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일깨워준 사건으로 평가된다.
현대시조의 선구자 노산 이은상 별세/1982
현대시조 시단의 선구자인 노산 이은상이 1982년 9월 18일 지병인 방광암으로 별세했다. 가고파의 작사자로 유명한 그는 우리 시조 현대화의 선구적 인물이자 개척자로서 그의 한 평생은 문단뿐 아니라 언론계, 민족문화운동 등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업적을 낳았다.
그가 시조를 발표하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 말부터로 첫 작품 ‘노산시조집(1923년)’을 내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카프문학에 대립한 국민문학파의 주역으로 활약하면서 시조의 형태나 내용면에서 현대화에 크게 이바지해왔다. 노산은 문학활동과 함께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의해 투옥됐다가 전남 광양경찰서에서 광복을 맞았다. 해방 후 줄곧 민족주의 사상과 애국선열을 기념하는 사업에 몰두해 이 충무공 기념사업회 이사장, 안중근의사 숭모회 이사 등을 맡았다.
노산의 시조문학은 서정과 서경이 융합된 독보적인 경지를 이룬 가운데 민족혼이 그 주조의 특징으로, 전통적인 시조의 ‘3장’을 과감하게 깨뜨리고 초장과 종장의 ‘2장’ 시조를 최초로 시도, 시조 현대화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특히, 그는 타계 전해인 1981년 7월 휴전선을 찾은 후 통일의 염원과 분단민족의 한을 담은 최후의 시조집 ‘기원’을 병상에서 출간하는 등 우리나라 시조문학에 마지막까지 혼신을 다했다. 대표작으로는 ‘가고파’ ‘봄처녀’ ‘이충무공 일대기’ ‘노산 시조집’ 등이 있다.
푸코 Jean-Bernard-Leon Foucault
1819년 9월 18일 태어남 / 1868년 2월 11일 죽음
"움직이지 않는 수평면에서의 진동이 고정되어 있다는 사실과 (실제 진자의 운동을) 비교해 보면, 끊임없이 서쪽에서부터 동쪽으로 회전하는 지구의 움직임을 쉽게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 장-B.-L.-푸코
푸코는 빛의 절대속도를 측정하는 정확한 기법을 도입해 발전시키고 지구의 자전에 대한 실험적 증거를 제공한 프랑스의 물리학자이다. 처음에 의학 공부를 했으나 실험물리학으로 관심을 돌려 A. 피조와 함께 빛과 열에 관한 일련의 연구를 시작했다. 1850년경 빛은 공기 중에서보다 물 속에서 더 느리게 통과한다는 사실을 확증했으며, 같은 해 빛의 속도를 측정해 참값의 1% 이내의 값을 얻었다. 1851년 67m 길이의 선에 매달려 있는 무거운 철구의 운동을 해석함으로써 지구가 그 자신의 축을 중심으로 자전한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 푸코 진자는 항상 같은 수직면에서 진동하지만 자전하는 지구 위에서는 이 수직면이 진자의 지리적 위도에 의존하는 비율과 방향으로 서서히 바뀐다. 이러한 논증과 자이로스코프를 이용한 유사한 실험으로 1855년 런던 왕립학회의 코플리 메달을 받았으며, 파리 제국천문대의 물리학 조교가 되었다. 또한 강한 자기장 속을 움직이는 구리원반에서 푸코 전류로 불리는 맴돌이 전류를 발견했고 반사망원경의 거울을 개량했으며 1859년 망원경 거울의 표면결함을 검사하는 정확한 방법을 개발했다.
이태영/李兌榮
1914. 9. 18 평북 영변~1998. 12. 17 서울.
여성운동가·인권옹호법률가.
가족법 개정과 가정법률상담소 운영을 통해 여성의 법적 지위 개선과 보호에 힘썼다.
1936년 이화여자전문학교 가사과와 1949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나왔다.
1952년 제2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했으며, 1969년 서울대학교에서 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52년 가족법 개정운동을 시작하여 일부 가족법 개정이 이루어진 1989년까지 가족법 개정 캠페인과 홍보활동을 했고 계속해서 정부에 청원서·진정서를 제출했다.
1956년 가정법률상담소를 창설하여 법률 지식이 부족한 여성들이 가정에서 당하는 불이익을 최대한 줄이고 이들을 보호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1976년에는 한국 여성운동의 산실이라 할 수 있는 여성백인회관을 건립했다. 1977년 명동 3·1사건으로 3년 징역과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했다가 1980년 복권되었다.
빨치산 이현상 사살/1953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고독한 사람', '남한 빨치산의 전설적 총수'….
《남부군》이란 수기를 펴낸 이태는 조선인민유격대 남부군 사령관이었던 이현상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는 1953. 9.18, 지리산 빗점골에서 토벌대에게 사살되었다고 전해지는데, 그의 유품은 창경원에 전시되었다.
'축지법을 쓴다, 몇 길 담장을 훌쩍 뛰어넘는다'는 등의 소문이 퍼질 만큼 이현상은 신출귀몰했다고 한다. 절대 포로를 죽이지 않았다는 그는 작고 통통한 몸집에 팔자 콧수염을 기른 냉혹한 성격의 소유자였으나 힘든 짐을 대신 지어줄 만큼 깊은 정이 있었다고 한다.
충청남도 금산(錦山) 출생. 중앙고등보통학교 재학 때인 1925년 조선공산당 창설에 참여하였다. 27년 보성전문학교 법과에 입학한 뒤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 산하 학생부원회, 조선학생과학연구회 등에서 활동하면서 반일동맹휴학을 주도하다 일제의 대규모 공산당 검거에 걸려 복역하였다. 출옥 후 박헌영(朴憲永)·김삼룡(金三龍) 등과 경성콤그룹을 결성하였으며, 일제 말기에는 지리산에서 은거하였다. 8·15 후 조선공산당 재건에 참여, 남조선노동당으로 개편된 뒤 연락부장 등으로 활동하다가 공산당 활동이 불법화되자 월북하였다. 48년 다시 지리산으로 들어가 6·25를 거치면서 빨치산 투쟁을 전개하였다. 51년 남한 빨치산의 공식 총수가 되고 각 도당유격대를 남부군(南部軍) 사령부에 소속시키는 등 조직적인 투쟁을 전개하다가 53년 휴전 이후 지리산토벌작전 때 사살당했다.
1988년 정치가 우양 허정 사망
정치가. 부산(釜山) 출생. 보성전문학교 법과를 졸업하고 1919년 3·1운동에 참가한 뒤 중국으로 망명, 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20년 프랑스로 건너가 재불한인거류민(在佛韓人居留民)회장으로 선출되어 교민 결속에 힘썼고,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한인유학생회장, 22년 북미한인교민총단장, 23년 미국에서 발행된 교포신문인 《삼일신보(三一新報)》 사장 등을 지냈다. 45년 한민당(韓民黨) 총무를 거쳐 48년 부산 을구에서 제헌국회의원에 당선, 같은해 교통부장관이 되었다. 50년 사회부장관, 51∼52년 국무총리서리, 57∼59년 서울특별시장, 59년 한·일회담수석대표 등을 지냈다. 60년 외무부장관이 되었고, 4·19때 이승만(李承晩)대통령이 물러난 뒤 과도내각의 수반으로서 대통령 권한대행직을 수행하였다. 63년 국민의 당 대표최고의원, 69년 통일원고문, 80년 국정자문위원이 되었고, 80∼84년 통일원고문회 의장을 지냈다. 인촌문화상을 받았다. 저서로 자서전 《내일을 위한 증언》이 있다.
가르보/Greta Garbo
본명은 Greta Lovisa Gustafsson.
1905. 9. 18 스웨덴 스톡홀름~ 1990. 4. 15 미국 뉴욕.
1920~30년대 영화계에서 가장 매혹적이고 인기있었던 여배우.
은퇴 후의 전설적인 은둔생활로 유명하다.
스웨덴 스톡홀름 출생. 1922년 백화점 점원이었다가 영화계에 데뷔, 1923년 《예스타 베를링의 전설 The Story of G sta Berling》의 주연으로 뽑혔다. 1925년 감독 모리츠 스틸레르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 할리우드 MGM의 인기스타로 오랫동안 은막의 여왕으로 군림하였다. 우수(憂愁)를 머금은 듯한 미모와 어딘지 불행한 면모가 엿보이는 쓸쓸한 분위기는 그녀 자신까지도 폐쇄적인 성격으로 만들었으며, 1928년 연인인 감독 모리츠 스틸레르의 죽음은 그녀를 더욱 고독하게 만들었다.
36세 때 연예계에서 은퇴, 뉴욕에서 은둔생활을 하였다. 무성영화시대의 대표작으로 《육체와 악마 Flesh and the Devil》(1927) 《안나 크리스티 Anna Christie》(1930) 등이 있으며, 유성영화시대 이후의 대표 주연작으로 《마타하리 Mata Hari》(1931) 《그랜드 호텔 Grand Hotel》(1932) 《크리스티나 여왕 Queen Christina》(1933) 《안나 카레니나 Anna Karenina》(1935) 《춘희(椿姬) Camille》(1936) 《니노치카 Ninotchka》(1939) 등이 있다.
네덜란드의 낭만파 화가 모베(Anton Mauve, 1838~1888) 출생/1838
친구인 요제프 이스라엘스 및 마리스 3형제와 마찬가지로 J. B. C. 코로와 바르비종파에게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 그의 작품은 주로 풍경화와 네덜란드의 시골 생활을 담은 그림으로 이루어져 있다. 모베는 1870년경 헤이그에 정착해, 가까운 어촌인 스헤베닝겐에서 그림을 그렸다. 1885년에 그는 몇몇 풍경화가들과 함께 힐베르숨 근처에 있는 시골 마을인 라렌으로 이사했는데, 이들은 나중에 '네덜란드의 바르비종파'라고 불리게 되었다.
모베의 그림들은 색깔이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고 회색과 푸른색이 조화를 이룬다는 점에서 코로의 그림과 비슷하다. 주요작품으로는 〈초원의 암소들 Cows in Meadaw〉(독일 뮌헨 고미술관)·〈모래 언덕이 있는 풍경 Dune Landscape〉(독일 함부르크 미술관)이 있다. 그는 노련한 수채화가였다.
제11대 로마제국 황제 도미티아누스 암살/96
로마황제(재위 81년 9월 14일 - 96년 9월 18일). 베스파시아누스황제의 아들. 게르마니아·브리타니아 및 다뉴브강 유역의 다키아인을 정복하여 외정(外征)에 성공하고, 내정상으로는 규율·질서를 존중하였다. 2차례에 걸친 귀족의 음모가 있은 뒤부터 칼리굴라황제 시대에 유행했던 밀고제도를 채용, 유혈사건이 빈번히 일어났다. 또한 그리스도교도를 박해하는 등 전제정치(專制政治)를 하였다. 뒤에 근위장관과 결탁한 황비 도미티아 등의 음모로 암살되었다.
제13대 로마제국 황제 트라야누스 출생/53
로마황제. 에스파냐 이탈리카 출생. 5현제(賢帝)의 2번째.
집정관·상(上)게르마니아지사 등을 지냈고, 97년 네르바 황제의 양자가 되어 이듬해 네르바 황제가 죽은 뒤 속주(屬州) 출신자로서는 최초로 황제가 되었다.
대규모 원정을 여러 차례나 감행, 아라비아페트라에아·다키아·아르메니아·메소포타미아 등을 합병하였고, 그의 시대에 로마제국의 영토는 최대로 확대되었다.
내정면에서는 주민의 부담을 덜어줌과 동시에 로마시민에 대해서는 거액의 증여 및 이탈리아 여러 도시의 빈민자제부양을 위한 기금증여 등을 하였으며, 로마시내와 속주(屬州)에서 많은 토목공사를 하는 등 사회정책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통치는 분명한 전제정치를 회피함으로써 <지고한 원수(元首)>라는 칭호를 받았으나, 실제로는 황제 쪽으로의 권력집중이 진행되었다.
117년 파르티아원정에서 돌아오는 도중 소아시아의 셀리누스에서 죽었다.
그밖에
2002년 경의선과 동해선 철도 및 도로 연결을 위한 착공식, 남북 동시 거행
2000년 경의선 복원공사 기공
1999년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실험실서 폭발사고. 대학원생 세명 사망
1999년 쌍방울 최태원 국내최초 623경기 연속 출장 신기록
1994년 이형철 WBA 주니어밴텀급 세계챔피언 획득
1990년 국제올림픽위원회, 1996년 올림픽 미국 아틀랜타시서 개최키로 결정
1985년 제4차 남북경제회담 개최
1982년 서베이루트내 팔레스타인 난민 1천8백여명 대량학살
1981년 정부, 소득별 정률(定率)공제 및 법인세율 낮추기 위한 세제개혁안 발표
1981년 프랑스 하원, 사형제도 폐지안 의결
1973년 한국-인도네시아, 국교수립
1973년 동서독 유엔 동시가입
1962년 소련, 북극에서 대기권 핵실험
1962년 17차 유엔총회 개막. 104국 대표 참석
1959년 흐루시초프, 유엔총회서 군비전면폐지 목표로 하는 군축안 제안
1958년 영국, 프랑스지역 금수(禁輸) 철폐
1957년 가짜 이강석 구속
1957년 고 딘 디엠 월남대통령 방한
1954년 북한, 중공군 40만명 철수를 발표
1954년 대한영화제작인협회 창립
1951년 한국-일본 항로를 허가
1950년 미국-영국-프랑스 외상회의 재개(뉴욕)
1950년 소련, 유엔안보이사회서 일본가입 거부
1949년 서울시, 특별시로 승격
1948년 일본 전학련(전일본학생자치회총연합) 결성
1947년 영국, 노동력통제령 공포(12.12 시행)
1947년 미국 중앙정보국(CIA) 발족
1935년 중국 항일구국동맹 결성
1934년 소련, 국제연맹에 가입
1911년 표트르 스톨리핀 피살
1909년 아프리카 가나의 초대 대통령 콰메 은크루마 출생
1907년 넵투늄(초우라늄원소)을 발견한 미국의 핵물리학자 맥밀런 출생
1905년 청, 과거제 폐지. 신교육제 채택
1894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초등교육기관인 관립 교동소학교(교동초등학교 전신) 개교
1883년 조선 보빙사 방미. 아더 미국 대통령 면담
1810년 칠레 자치정부 수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