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저총은 중국 길림성 집안현 여산에 있는 고구려시대의 벽화고분입니다.
일본인 이케우치 등에 의해 1935년에 조사되었구요.
분구는 방대형으로 밑둘레 한 변의 길이가 약 15m정도 됩니다.
널방은 네 벽위에 두 단의 평행굄돌을 놓고 다시 그 위에 네 단의 삼각굄돌을 올려놓은
모줄임천장입니다. 벽화는 앞방과 널방의 네 벽과 천장에 인물풍속도가 그려져 있습니다.
총은 중국 길림성 집안현 여산에 있는 고구려시대의 벽화고분이다
1935년에 발견되어 일본인 이케우치 등에 의해 조사되었다 분구는 방대형으로 밑둘레 한변의길이가 약 15m이다 묘실은 널길 장방형의 앞방
통로,방형의 널방으로 이루어졌다 천장구조는 앞방은 단면 아치형 천장이고
널방은 네 벽위에 두단의 평행굄돌을 놓고 다시 그 이에
네 단의 삼각굄돌을 올려놓은 모줄임천장이다 벽화는 앞방과 널방의 네 벽과
천장에 인물풍속도가 그려져 있다 배치상태를 보면
앞과 통로에는 나무와 맹견이 널방 네벽 가운데 북벽에는 주인의 실내생활도가 동벽에는 씨름 그림과 부엌 그림이 서벽에는 수레와 나무가 남벽에는 나무가 그려져 있다 이 벽화고분을 각저층이라고 이름지은 것은 동벽 중앙으로부터 약간 오른쪽에 그려져 있는 씨름 그림에 의거한 것이다.
또한 무용총(舞踊塚) vs 각저총(角抵塚)이 이야기 인데
무용총, 각저총 이들 두 무덤의 축조 시기는 무용총은 400년 무렵에 축조된 무덤으로 보고,각저총은 5세기 전반에 이른 시기, 즉 410~420년대의 무덤으로 보고 있다.
무용총과 각저총이 이름을 갖게 유래는 1935년 일본인 이케우치 히로시와 우메하라가 조사할 당시 동남쪽 벽화속의 화려한 의상을 입은 무용수들의 춤추는 모습에 착안하여 무용총이란 이름이 주어졌고, 우리의 전통적인 씨름꾼을 표현한 벽화가 무덤이어서 각저총이란 이름을 갖게 되었다.
각저총과 무용총은 고구려 제10대 산상왕(山上王) 13년(서기 209년)부터 수도이었던 환도산성에 위치하고 있다.
지금의 중국 길림성 집안시 통구 광개토왕릉 북서쪽 약 1km 거리에 무용총과 각저총이 있다. 1966년 중국이 집안분지 주변 통구고분군을 일제히 재조사하면서 여산(如山) 남쪽 끝자락에 있는 두 고분의 명칭을 우산묘구(禹山墓區) 또는 우산하고분군(禹山下古墳群)으로 바꾸었으며 이에 따라 무용총은 458호로, 각저총은 우산묘구 457호로 지정되었다.
각저총은 한국의 씨름꾼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린 것이어서 북한에서는 이 무덤을 씨름무덤이라고 부르고 있다.
반면 무용총 천정의 두 장사는 수박희를 하는 씨름꾼이라고 얘기해 오고 있다.
하지만 머리 모양새나 복장 및 두 사람이 취한 동작과 몸짓으로 볼 때 무용총의 두 장사는 스모 선수이고, 벽화의 내용은 스모의 한 장면이다(서동인, 2011).
문헌상 오늘날의 체계와 비슷한 수박(手搏)이 행해진 것은 고구려 제10대 산상왕 13년(서기 209년)부터 환도산성 (丸都山城)에 있는 무용총현실의 벽화에서 자유대련의 장면과 신채호의 『조선상고사』(1948)에 「선비(先人 또는 仙人)를 신수두 단전(壇前)의 경기회에서 뽑아 학문을 힘쓰며 수박, 격검, 사예, 기마, 덕견이, 씰흠(씨름)등
각종 기예를 하며…」라고 한 것으로 이미 삼한시대부터 제례행사로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한 가지 부언할 것은 각저총의 벽화라 하여 일방적으로 씨름의 어떤 동작이라고만 판단하기 쉬우나 고대에 있어서는 수박이니 각저니 한 것은 오늘날과 같이 수박(권법, 당수), 씨름(상박, 각저 각력)이니 하여 분류된 것이 아니고 「겨름 즉 자기의 힘을 기울려 맞대고 다툰다」는 뜻, 다시 말하면 투기라는 “총칭”의 의미로 불러 졌다는 것이다.(신채호, 1948)
이와 관련 유술(柔術)이란 말은 일본 고래의 용어로 수박, 권법, 백타, 상박 등의 투기 즉 무예의 “총칭”으로서 쓰인 것이다. 그 용어가 우리나라 문헌에 처음 나타난 것은 구한말 즉 광무 10년 이재완(李載完 또는 完順君)의 일본시찰 귀국보고(高宗實錄)에서 인 것이다.
B 일본에서는 유술의 한 분야에 속하는 수박, 권법, 상박, 백타 등이 한 유파적인 투기에서 유도로서 체계화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羅絢成, 1976)
라현성(1976)은 수박의 기원을 논하면서 무용총현실 벽화에서 오늘날의 태권(수박)과 같이 체계된 방식의 자유대련 장면이 고분벽화에 나타난 것을 보아 우리의 조상들이 수박을 얼마나 즐겼던가를 짐작 수 있다고 한다.
「韓國 手搏(跆拳)攷」의 논문을 통해 태권도계에서는 태권도의 역사에서 무용총 벽화를 수박=태권이라고 인용하고 있는 듯하다. 헌데 그는 같은 책 「유술 · 유도 어원에 대한 고찰」에서 “그와 같은 투기가 오늘날의 방식같은 체계 밑에 手搏 (卞, 권법, 당수, 공수)이나 角抵(角觝, 각력, 상박, 졸교, 질교, 쟁교)가 우리나라에 있어서도 행해졌음을 고구려
시기인 제10대 산상왕 13년(209)부터 고구려의 수도이었던 환도산성에 있는 각저총현실의 벼화에서 각저와 수박(자유대련)의 장면을 엿보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수박(태권)이라는 언급이 없다.
手搏은 卞(변)이라 하고 힘을 다투므로 무희라 하니 또는 무술을 講(강)하는 소기(小技)이다. 중국은 물론 조선 정조 14년(1790) 4월 무예도보통지 권4 권법 조(條)에, 「博은 곧 권박인데 卞이라고 쓴다.」같은 의미를 드러내고 있다.
무용총 벽화를 두고 무용(舞踊) 즉 화려한 의상을 입은 무용수들의 춤추는 모습을 수박이라고 부르는가 하면 또 한편에서는 일본 스모라고도 단정하고 있다. 그런가하면 라현성(1976)은 수박(태권) 즉 태권=수박이라고 썼으니 논리의 비약뿐이 아니라 역사의 비약을 두고 오늘날 우리는 혼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현용 체육교과서의 유술, 유도 조를 보면 「유술은 고려 숙종 때부터 시작되었는데 그 이름을 수박, 권법, 혹은 권박, 태껸이라고 하였다」라고 기재되어 있고 또 유도계의 인사들 가운데서도 수박을 유도의 시초라 하여 고려 숙종 때부터 라고 보는 분이 많은 듯하다.(라현성, 1976) 유술=수박, 권법, 태껸이라고 볼 때 유도(1908)는 유술에서 나왔으니 유도의 원조는 수박, 권법, 태껸이라는 공식이 성립된다. 그리고 手搏(卞, 권법, 당수, 공수) 곧 수박=공수, 권법, 당수라고 할 때 태권도는 당수, 권법, 공수 등 명칭의 개명에서 출발하고 있다.
무용총을 해석하는 다양한 사관에 따라 무예계는 두고두고 논란이 되고 있다.
○ 중국 지린 성[吉林省] 지안 현[輯安縣] 여산(如山)에 있는 고구려 벽화고분.
1935년 이케우치[池內宏] 등이 조사했다. 각저(角抵)는 고구려의 씨름인데,
고분에 그려 있는 씨름 그림 때문에 각저총이라 이름했다. 고분의 봉토는
방대형(方臺形)이고, 밑둘레 한 변의 길이는 약 15m이다.
널길[羨道], 직4각형의 앞방[前室], 통로, 정4각형의 널방[玄室]이 있는 두방무덤[二室墳〕이다.
천장은 앞방의 경우 단면 아치형이고, 널방의 것은 2단의 평행굄돌과 4단의 3각굄돌을 올려놓은 8각형 모줄임 천장이다. 벽화는 앞방과 널방의 회칠한 네 벽과 천장에 그렸는데, 묵선·적·황·적갈·녹청색 등을 썼다.
그 내용은 인물풍속도인데 앞방에는 나무, 통로에는 맹견도, 널방 북벽에는 주인의 실내생활도, 동벽에는 씨름도와 주방, 서벽에는 수레와 나무, 남벽에는 나무를 그렸다. 그밖에 불꽃무늬 기둥과 창방 등 목조건물 의장을 그렸으며, 천장에는 해·달·별과 불꽃·초롱 무늬를 장식했다. 사신도가 없고, 앞방이 장방형이며 감(龕)이 없는 점, 인물풍속도를 그린 점 등으로 미루어 이 벽화고분의 연대는 5세기 후반에서 6세기초로 추정된다.
이 벽화고분은 고구려의 풍속·건축·복식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첫댓글 귀한 자료 잘 읽었습니다. 신이 납니다.
자료 잘 보았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무용총 천정의 두 장사는 수박희를 하는 씨름꾼이라고 얘기해 오고 있다.
하지만 머리 모양새나 복장 및 두 사람이 취한 동작과 몸짓으로 볼 때 무용총의 두 장사는 스모 선수이고, 벽화의 내용은 스모의 한 장면이다(서동인, 2011).
---스모와는 ㅘㄴ전 다른 모습--- 자세와 머리스타일---입맛대로 맛나게 쓴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