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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李仲燮,1916.4.10 - 1956.9.6)
' 죽 어 야 마 땅 해 '
(‘노을 앞에서 울부짖는 소’-서양화가이중섭형을보내며)
- 1956.9.11. 화장터에서 <서울신문 9.16.>박 고석
중섭 형.
자네같이 못난 놈은 없을 걸세. 그 좋은 재간 그 아름답고 따뜻한
마음보를 갖고 그래 사나이 자식이 더 살아 배길 수가 없었단 말인가.
나같이 흉측한 놈이 이렇듯 어지러운 세상일지라도 이러저러
살아나갈 수 있는 반성과 용기를 또 누구에게 의존해야 한단 말이냐.
내가 듣고 보아 아는 한 가장 아름답고 깨끗한 사람으로 나는 형을
우러러 사모해 왔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은 일을 한 화가를 치면
형을 엄지손가락에 꼽는 우리들의 심정만이라도 알아주어야 하지 않겠나?
내나 또한 형을 아끼고 숭모하는 친구들은 젖혀 놓고라도 형 처나 아이들의
안타까이 그리워하는 숙원은 어떻게 되느냐 말이다.
임종이 외롭다기보다 살림살이가 고달프다기보다 세상 사람들이 야속하다기보다
자네는 자네만 아름답게 살았고 좋은 그림을 남기고 가면 그만 이라는 그 배짱은
도대체 어디서 생겨난 것인가?
너만이 착하고 아름답고 너만이 좋은 그림을 그린 것이 우리들에게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이냐.
너같이 너만이 깨끗하고 아름답게 살려는 놈은 죽어야 마땅해.
살아선 궁핍했고 죽어서는 신화가 된 사람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예술의 혼과 자존심을 놓지 않으려 했던
고 이 중섭 화가의 50주기입니다.
위작 시비, 친일 행적 논란 등 난무하는 설들이 있긴 하지만
40세의 아까운 나이에 차가운 병실에서 그를 홀로 보낼 수 밖에 없었던
벗들의 안타까운 마음을 담은 추모 글로서만 그냥 봐 주세요.
어찌 살았건 이러한 글을 내 무덤 앞에서 누군가가
읊어준다면.. 헛된 인생을 산 것은 아니었을 듯 싶어요.

호는 대향(大鄕). 평남 평양(平壤) 출생. 오산고보(五山高普) 졸업. 일본 도쿄문화학원 재학중
1937년 일본의 전위적 미술단체의 자유미협전(自由美協展:제7회)에 출품하여 태양상(太陽賞)을 받고,
1939년 자유미술협회의 회원이 되었다. 1945년 귀국, 원산(元山)에서 일본 여자
이남덕(李南德:본명 山本方子)과 결혼하고 원산사범학교 교원으로 있다가 6·25전쟁 때 월남하여
종군화가 단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신사실파(新寫實派) 동인으로 참여했다. 부산·제주·통영 등지를
전전하며 재료가 없어 담뱃갑 은박지를 화폭 대신 쓰기도 했다.
1952년 부인이 생활고로 두 아들과 함께 도일(渡日)하자, 부두노동을 하다가 정부의 환도(還都)와 함께
상경하여 1955년 미도파(美都波)화랑에서 단 한 번의 개인전을 가졌다. 그후 일본에 보낸 처자에 대한
그리움과, 생활고가 겹쳐 정신분열병증세를 나타내기 시작, 1956년 적십자병원에서 간염으로 사망했다.
작풍(作風)은 포비슴(야수파)의 영향을 받았으며 향토적이며 개성적인 것으로서 한국 서구근대화의 화풍을
도입하는 데 공헌했다. 담뱃갑 은박지에 송곳으로 긁어서 그린 선화(線畵)는 표현의 새로운 영역의
탐구로 평가된다. 작품으로 《소》(뉴욕현대미술관 소장), 《흰 소》(홍익대학교 소장) 등이 있다.
덤벼드는 소 종이에 유채 29 X 40.3cm 1956년무렵 개인소장
Attacking Bull Oil on Paper 29 X 40.3cm around 1956 Personal Collection
소는 중등 과정부터 즐겨 그리던 그림의 소재였다고 동창들은 전한다. 소를 통하여 자신의 감정과 소로 상징되는 민족과 현실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그렸던 것으로 보인다. 자신을 돌봐준 의사에게 선물한 이 그림은 그의 배려로 건강하게 되었다는 감사의 마음을 그림에 보이는 평정한 모습의 소로 전달한 것으로 보인다.

떠받으려는 소 종이에 유채 34.5 X 41.5cm 1953년무렵 용인 호암 미술관
Butting Bull Oil on Paper 34.5 X 41.5cm around 1953
이 작품은 화가 박고석(朴古石, 1917년 평양~2002년 5월 23일 대표작으로 <산시리즈>가 있음. '산의 화가'로도 불림)이 이중섭 최대의 걸작이라고 격찬한 작품이라고 한다. 다음글은 전인권의 아름다운사람 이중섭에 실린 것이다.
또 다른 작품을 걸작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박고석은 또 다른 <흰 소>(그림-98)를 최대의 걸작이라고 격찬한다. 이중섭의 소그림에서는 강렬한 선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이 작품은 배 부분을 중심으로 넓고 둥글둥글한 면이 강조되어있다. 그 결과, 소의 웅장하고 균형잡힌 자태가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앞다리와 어깨를 중심으로 몸의 중심이 앞으로 쏠리는 듯한 자태가 운동성을 강조한다.
이 작품을 감상할 때 유의해야 할 점은 반드시 멀리 떨어져서 감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유홍준(兪弘濬, 1949년 1월 18일 정무직공무원,미술평론가,대학교수 저서로 <나의북한문화유산답사기>가 있음)교수의 탁월한 지적인데, 이 작품을 감상할 때는 반드시 4~5m 이상 뒤로 물러나 보아야 한다. 아니면 천천히 뒤로 물러나먼서 감상하면 웅장하고 균형잡힌 소의 몸매가 더욱더 웅장하게 변하는 것을 즈낄 수 있다. 그런데 이 작품 역시 통영시대의 것이다. (p.218)
갤러리 현대가 출판한 이중섭화집에는 다음과 같은 그림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검은 배경 앞의 소가 화면 너머에 있으리라 여겨지는 상대를 향해 뿔을 세우고 막 나가려 하고 있다. 붓과 물감칼로 비교적 넓게 발려진 흰 빛깔에 비해 어두운 빛깔의 물감은 붓을 꼿꼿이 세워 그은 것으로 보인다. 이런 서릿발같은 붓질은 매우 숙련된 상태가 아니면 나오지 않는ㄷ. 그래서 마치 추사체의 필획을 보는 것같다.

황소
왼쪽으로 향한 얼굴과 오른쪽으로 향한 눈이 화면의 양쪽 모두를 지배하고 있다.
코와 입에 가해진 선연한 붉은 색과 넓은 배경의 붉은 노을을 층지게 하여 이런 느낌을 더욱 강화하고 있다.

소
소의 머리에서 피가 나는데도 불구하고 쳐든 앞다리 한쪽과 넓게 벌린 뒷다리의 분위기로 보아
투혼이 사라지지 않은 소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흰 소
검은 배경 앞에 소가 화면 너머에 있으리라 여겨지는 상대를 향해 뿔을 세우고 막 나가려 하고 있다.

흰 소
회색조의 배경에 검고 흰 붓질로 된 득의의 작품이다.
여기에서 검은 빛과 흰빛을 아울러 추사체와 같은 붓질로 여겨진다.
특히 머리와 꼬리 부분의 표현이 강하다.

소와 어린이
그림이 될 순간만 포착하여 어떻게 할 것인지 계산 되어 그려졌다.
단붓질로 끝을 내 화면은 깔끔하고 경쾌한 리듬감 마저 느껴진다.

싸우는 소
서로 싸우는 두 마리의 소 중에서 오른쪽의 소가 패해서 완전히 넘어지려고 하고 있는 상황의 그림이다.
마치 삶의 허무성을 보여주는 것 같다

투계(鬪鷄)
두 마리의 닭이 서로 싸우고자 하는 듯 덤벼드는 설정이다.
고구려 무덤벽화에 나타나는 사신도의 유현한 색채, 대상이
서로 조응하는 조형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손
왼손과 오른손의 앞뒤를 출렁이듯 휘감은 연기 같은 흰선들이 등장하는 독특한 그림이다.
진주에서 박생광과 어울리던 시절 그 친구 청담스님을 만나 느낀 바를 그린 것으로 보이며
불교적인 분위기가 강하다.

서귀포의 환상
아이가 새를 타는 것으로 설정해서 환상적이기도 하지만 사실적인 필치가 있으므로
월남하기 전에 북한에서 유행하던 사실주의적인 화풍이 엿보인다.

섶섬이 보이는 풍경
이 그림은 전쟁시 월남해 서귀포에서 주민의 도움으로 살던 집에서 그린 것으로
지붕과 그 아래로 펼쳐지는 섬이 있는 바다의 고요하고 깨끗한 느낌을 그린 것이다.

달과 까마귀
보름달이 뜬 맑고 푸르른 하늘을 배경으로 검게 세가닥으로 그어진 전깃줄에 앉아 친구를 찾아
모여드는 까마귀를 검은 물감을 묻힌 붓으로 간단히 그렸다.
몸 전체가 까맣다는 점 때문에 먹만으로 그리는 문인화의 소재로 어울리는 소재여서
자주 그려지기도 했다.

돌아오지 않는 강
왼쪽 위에는 머리에 물건을 인 여자가 눈이 내리는 속에서
화면 앞으로 걸어 나오는 듯 하다. 오른쪽 거의 절반을 차지한 집의 창가에는
한 남자가 팔을 괴고 얼굴을 옆으로 두고 있다.
이 그림은 이중섭이 보고싶은 아내를 그리는 마음인 것 같다.

도원
물이 있고 크고 작은 봉오리들이 있는 곳에 서 있는 천도복숭아를 중심으로
네 명의 남자아이가 노는 광경을 통하여 낙원의 느낌을 나타냈다.
통영에 머물던 시기에 그려진 것으로 최재덕과 8,15 직후
서울에서 그렸던 벽화도 이런 소재였다고 한다.

노는 아이
은지화와 비슷한 설정과 느낌의 그림으로
이중섭이 그림 그리는 재료를 가리지 않고 그렸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길
지붕과 나무가지가 화면의 아래와 위에 걸쳐 있는 사이로 꼬불꼬불한 길을 배치했다.
통영에 있는 남망산으로 오르는 길이다. 화면은 엷고 빠른 붓질로 되어 있어
독특한 운치를 자아낸다. 분청사기 표면에 베풀어진 귀얄 무늬가 연상되는 느낌이다.
속필의 서예미 탓이라 여겨진다.
헤어져 있던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가족을 소달구지에 태우고
자신은 황소를 끌고 따뜻하여 평화와 행복이 있을 함께 가는 광경을 그렸다.

부부

부부
두마리의 봉황이 서로 닿으려고 애쓰는 모습을 그렸다.
그러나 위의 새는 화면 너머의 무엇인가에 긴박한 듯 매달려 더 내려오기는 불가능하고,
아래의 새는 다리를 지면에서 떼기 힘든 듯하다.
아래 그림은 가로줄을 겹쳐 이러한 분위기를 더욱 강화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림은 제목과 달리 부부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남북한에 관한 것이라고
이중섭이 직접 말했다는 증언이 있다.

춤추는 가족

환희
복숭아꽃이 수 놓여지듯한 네모 틀 안에 구름에 쌓인 해를 사이에 두고
봉황을 닮은 파란 숫새와 붉은 암새가 춤을 추는듯한 전례가 없었던
독특한 구성의 그림이다.

아버지와 두아들
즐겁게 노는듯하나 전체의 분위기가 암울함을 나타내어 준다.

과수원의 가족과 아이들 20.3 x 32.8cm

돌아오지 않는 강 20.2 x 16.4cm, 1956년



은박지 그림

첫댓글 희.노.애.락이 진하게 전달되는 그림들이네요.....제주도에 머물면서 이중섭 화가가 기거하던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가슴이 짠~ 하더라구요...어찌나 궁색해 보이던지...그래도 바닷가와 아이들의 그림들은 천진해 보여서 마음이 좋아져요...다행~! 어디서 다시 태어나 그의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들과 평범하게 산다면 둘중에 어느 것이 더 행복한 것일까요?
누드화가 인줄 알았더니,,, 서양화가였구만요,,, 몰라뵈서 죄송했어요,,, 이중섭 화백님~~ ♡ 파란만장한 이중섭 화백님의 인생길 안길에서 다른 화백들이 누르지 못했던 건강하고 진솔한 인생들을 그림을 통하여 잘 표현해 주었네요,,, 덕분에 주변에 적지않는 많은 시기와 질투로 인한 올가미에서도 많은 시련과 좌절속에 잊지않는 기발한 아이디어 작품들을 후세들에게 남기신 업적들을 보노라면 정말 우리나라에서 부끄럽지 않는 제1인자 화백님을 모시게 되어 얼마나 기쁜 일인지요,, 이중섭 화백님을 만나 좋은 작품 잘 접수했어요~~ 하늘나라 가서도 늘 평안한 웃음을 잃지 마시길요~~ ♡ 주님의 평안으로,,,, (*^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