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안의(朴安義)
[생졸년] 1599년(선조 32)~1672년(현종 13) / 壽 73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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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청주 지역 출신의 무신으로 본관은 밀양(密陽)이며, 자는 자유(子由)이다. 증조할아버지는 박란(朴蘭)이고, 할아버지는 한성부판윤 박숭원(朴崇元)이다.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밀계군(密溪君) 박기현(朴耆賢)이고, 형은 박안길(朴安吉)이다.
그는 1599년선조 32) 청주에서 태어나, 1627년(인조 5) 무과에 급제하였고, 병자호란 이후 1637년 봉림대군(鳳林大君)[훗날의 효종(孝宗)]이 심양(瀋陽)에 볼모로 끌려갈 때 호종하였다.
1641년 심양에서 현종(顯宗)이 태어나자 수소문하여 보모를 구하는 등 극진히 돌보았고, 귀국 후에는 서생포첨사로 부임하였다. 현종 연간에 흥양(興陽)과 대산(大山) 등지의 목관(牧官)을 지냈는데, 서산목관으로 있을 때 말을 잃어버린 일을 허위로 보고하였다가 도(徒) 2년에 처하여진 일도 있었다.
박안의는 관직에서 물러난 뒤 고향 청주로 낙향하여 지내다가 1672년(현종 13) 사망하였다. 묘소는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강내면 황탄리에 소재한다.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자료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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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사 박후 묘갈명(僉使朴矦墓碣銘)
숭정(崇禎) 정축년(丁丑年,1637, 인조 15), 효종께서 대군으로 오랑캐 땅으로 가게 되자 장사 여덟 사람을 선발하여 따르게 하였는데, 사또 박안의(朴安義)는 그중 한 사람이었다. 사또의 자는 자유(子由)이며 밀양(密陽) 사람이다.
휘 숭원(崇元)은 한성부 판윤을 지내고 임진왜란 때 의주에서 세상을 떠나 호성 공신에 책록되고 밀천군(密川君)에 봉해졌다. 이분이 휘 기현(耆賢)을 낳았으니 동지중추부사를 지내고 밀계군(密溪君)에 습봉(襲封)되었다. 사또는 그의 측실에게서 태어난 아들이다.
태어난 지 석달 만에 일어나 앉을 수 있었고, 자라서는 용맹이 남보다 훨씬 뛰어났다. 정묘년(丁卯年,1627, 인조 5) 무과에 급제하고 병자년(丙子年,1636) 효종께서 오랑캐를 피해 강화도로 가려고 할 적에 사또는 상중에 있었다. 신풍부원군(新豐府院君) 장유(張維) 공은 평소 사또의 훌륭한 행실을 알고 있었기에 말하기를,
“나라가 이처럼 위급한데 효성을 옮겨 충성할 수 없는가?”
하였다.
신풍부원군은 밀천군의 외손이었다. 효종 역시 그 이름을 듣고 불러서 기복(起復)하게 하였다. 사또는 개연히 말하기를,
“우리 할아버지의 손자가 나라를 위해 죽지 않는다면 조상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하였다.
난리가 평정되자 사또는 고향으로 돌아가 상을 마치려 하였다. 마침 효종께서 북쪽으로 떠나고 인선왕후(仁宣王后)가 따르게 되자, 또 불러서 함께 갔다. 사또는 항상 효종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몸에 단도를 차고 불의의 사태에 대비하였으며, 여러 해가 지나도 일편단심은 더욱 지극하였다.
신사년(辛巳年,1641), 현종이 탄생하자 왕후는 우리나라 사람 중에 유모를 구하였는데, 우연히 밀계군의 옛 여종을 찾아 보모로 삼았으니, 사또의 힘이었다. 4년 뒤 사또는 보모와 함께 몰래 현종을 모시고 귀국했다가 다시 북쪽으로 돌아갔다. 일이 있으면 번번이 마루에 올라오라고 하여 함께 의논하였고, 왕후는 항상 아저씨라고 불렀다.
갑신년(甲申年,1644), 효종이 비로소 돌아오자 성상에게 아뢰어 심양(瀋陽)에 들어갔던 장사들을 수용하게 하였다. 성상이 허락하고 병조에 하유하기를,
“수용하는 차례는 봉림대군에게 물으라.”
하였으니, 봉림대군은 효종이 잠저에 있을 때의 호칭이었다.
그리하여 사또는 서생 첨사(西生僉使)에 임명되었다. 효종 초년에 또 방답(防踏)에 제수되었다. 효종이 승하하자 사또는 1년 동안 소식하였다. 양궁(兩宮 효종과 인선왕후)의 은혜로운 돌봄에 이야기가 미치면 매번 오열하며 눈물을 흘렸다.
효종의 기일에는 반드시 5일 동안 재계하고, 새벽에 일어나 북쪽을 향해 절하였다. 현종조에 흥양(興陽)과 대산(大山)의 목민관으로 임명되고, 청주(淸州) 고향으로 돌아와 늙었다. 왕후께서 특별히 옛 노고를 유념하여 항상 안부를 묻고 때때로 옷과 음식을 하사하였다.
나이 74세 되던 임자년(壬子年,1672) 세상을 떠났다. 임종을 앞두고 손자들을 불러 말하기를,
“나는 미천한 몸으로 난리를 만나 나라로부터 몹시 두터운 은혜를 받았으나 장차 만분의 일도 보답하지 못하게 되었다. 너희들이 내 뜻을 유념하여 제몸을 잊고 나라에 보답할 마음을 품는다면 나는 죽어도 불후히 전할 것이다.”
하였다.
왕후가 상을 치르고 장례 지낼 물품을 하사하라고 명하고 2품에 준하여 부의를 내렸다고 한다. 사또는 성품이 강개하여 가계를 돌보지 않았으며, 충성과 의리로 분발하여 죽으나 사나 한결같았다. 왕손을 호위하여 만 리 길을 몰래 돌아온 일로 말하자면 사직에 공로가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관직은 절제사에 불과하였으니, 사또가 왕손을 보호한 일을 말하지 않은 겸손한 덕과, 성조(聖朝 효종)께서 사사로운 은혜로 관직을 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나는 이에 몹시 감탄하는 한편, 사또가 한결같은 절개로 충성스럽고 부지런했던 일이 사라져 전해지지 않을까 두려워 그 대략을 서술하여 사또의 손자 태창(泰昌)에게 주어 비석에 쓰게 한다. 명은 다음과 같다.
아, 장사여 / 嗚呼壯士兮
재주는 어찌 그리 걸출하며 운명은 어찌 그리 곤궁하였나 / 何才之傑而何命之窮
비록 공신각에 초상을 걸지 못하더라도 말가죽에 시신을 싸서 돌아와야 하거늘 / 縱不能圖形麟閣亦足以裹尸馬革
어찌하여 시골에서 늙어 죽었는가 / 胡爲乎老死畎畝之中
겸손히 지조를 지키며 지난날의 공을 말하지 않았으니 / 惟其退然自守口不道前功
박양후(博陽候)의 풍모와 비슷하구나 / 尙庶幾乎博陽之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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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脚註]
[주01] 첨사 박후 묘갈 :
이 글은 박안의(朴安義)의 묘갈명이다. 박안의의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자유(子由)이다.
1599년(선조 32) 태어나 1672년(현종 13) 세상을 떠났다.
[주02] 박양후(博陽候) :
한(漢)나라 승상 병길(丙吉)을 말한다. 그는 위태자(衛太子)의 옥사에 연루되어 죽을 뻔한 선제(宣帝)를 구하였으나 그 공로를 말
하지 않았기에 훗날 승상에 임명되었다.《漢書 卷74 丙吉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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