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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현행자의 서원』 중 「수학분」
항상 부처님을 따라 배우겠습니다. 부처님의 견고하신 발심과 불퇴전의 정진을 배우겠습니다. 지위나 재산이나 명예나 내지 목숨까지도 보시하신 것을 따라 배우겠습니다. ~~~~
금주의 법어--왜 마하반야바라밀 염송인가?
금주의 법사--불광법회 선덕 혜담 스님
존경하고 사랑하는 불광법회 법등 가족 형제 여러분 대단히 감사합니다. 또한 유튜브를 통해서 오늘의 불광법회를 함께 하시는 전국의 사부대중 여러분 대단히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부처님의 자비광명이 항상 함께 해서 집안이 편안하고 가족이 화목하고 하시는 모든 일이 원만히 성취되기를 축원해 마지않습니다. 제가 한 보름 전에 서울의 빌라생활을 마감하고 각화사로 원대복귀했습니다. 각화사를 6년만에 가서 살아보니까 여기가 극락세계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각화사 가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각화사 앞으로 보는 풍광이 서울 경기권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풍광이라 아주 좋습니다. 지금 가을에 뒷산이 온통 단풍으로 장식되는 모습들이 극락세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한 열흘 동안 산과 하늘을 보며 생각했습니다. 제가 몸이 안 좋아 불광사에서 밥이라도 얻어 먹으려 왔다가 오지 말라고 해서 할 수 없이 아파트나 빌라에서 살게 되었는데 빌라에서는 밤에 애들 소리, 부부싸움 소리가 시끄럽게 하루종일 났습니다. 그 모든 것을 벗어나서 각화사로 가니 그야말로 극락정토 같은 감이 들었습니다. 제 나름으로는 어디에 살든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각화사 살아보니 이렇게 복된 곳이 있는데 공연히 빌라에서 산다고 애를 썼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전생에 작은 복이라도 지은 모양이라 이렇게 좋은 도량에서 인생 말년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도 아울러 했습니다. 전부 형제 여러분의 성원과 염려 덕택에 잘 지내고 있어서 감사합니다.
오늘 말씀드릴 법문 제목은 ‘왜 마하반야바라밀 염송인가’ 입니다. 제가 갖고 있는 '불광법회 요전 초판'으로 233쪽에 보면 마하반야바라밀 염송란이 나옵니다. 첫말이 ‘보살이 국토를 장엄하여 불국토를 이루는데 무상의 여의보주를 가졌으니 보살은 이 보주를 항상 굴리어 대위신력을 발휘하고 중생을 제도한다.' 이 부분의 맨 뒤에 나오는 마하반야바라밀을 염하는 자세를 설명하는 부분은 우리 형제들이 기도할 때는 읽을 필요가 없어서 괄호를 쳤습니다. 대한불교 조계종 대부분 절에서는 관세음보살을 염불하는데 관음전도 아닌 대웅전에서 관세음보살을 염불하는 건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불교 수행 가운데는 조계종에서 하는 간화선도 있고, 정토종의 나무아미타불 염불도 있고, 옴마니반메훔을 하는 주력도 있는데 광덕 큰스님께서는 왜 48년 전에 불광법회를 창립하시면서 마하반야바라밀이라는 기치를 걸었을까요? 불광법회 요전을 만들어 출판한 것이 1982년과 1983년 사이인데 처음에는 염송하는 법이 없다가 나중에 넣었습니다. 혹자는 다른 절에서 안 하는 마하반야바라밀을 염송한다고 불광법회는 외도라 말한 스님과 신도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어떤 큰스님은 나무마하반야바라밀은 교리에 맞지 않다는 극언까지도 했습니다만 경전상에 분명히 나무마하반야바라밀이라 나옵니다.
'이 보주는 마하반야바라밀이다. 관세음보살도 마하반야바라밀로 관자재하시어 오온개공하여 일체고액에서 해탈하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사실 관세음보살을 관자재보살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법화경의 『관세음보살』 「보문품」에 의해 관세음보살이 되었습니다. 원래 이름은 관자재보살입니다. 관자재란 모든 것에 자재, 자기 뜻대로 다 할 수 있다는 뜻이고 혹은 자재천이라는 천상의 뜻도 담고 있습니다. '일체 보살이 반야바라밀다로 일체 공포를 타파하고 자유를 성취하며 열반을 증득하고 성불한다. 마하반야바라밀다는 이것이 대신주다, 대명주다, 무상주다, 무등등주다.'
마하반야바라밀이 대신주 대명주 무상주 무등등주란 말은 반야심경에 나와 있어서 다른 이견을 제시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광덕대선사께서는 불광형제의 수행법으로 마하반야바라밀 염송을 제창하셨는가 하는 의심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저 역시 82년도 불광에 방부를 들이면서 이것이 참 곤혹스러웠습니다. 다른 절에서는 듣도 보도 못한 마하반야바라밀을 염송하는지 큰스님께 직접적으로 여쭤보지는 않았습니다. 그 의미는 알고 있으니까요. 우리가 불교사를 돌이켜보면 원시불교 부파불교 다시 대승불교가 흥기하고 전개되는데 대승불교가 흥기할 때 제일 먼저 편찬된 경전이 『반야경』입니다. 이 반야경은 해인사 장경각의 팔만대장경 중에서 대승경전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양인데 반야심경 금강경 대품반야경 대반야경 소품반야경 모두 포함됩니다. 양적으로 많다는 것은 그만큼 불교사상에서 반야가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제가 처음 와서 법등모임에서 신묘장구대다라니를 했다가 어느 보살이 큰스님에게 일러서 혼이 나고 다음부터는 마하반야바라밀 염송을 했습니다. 분명히 대승불교가 일체중생의 이익을 위해 반야경을 제작할 때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깨달은 그 순간에 마하반야바라밀에 대해 무엇인가 언급이 있고 근거가 있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전문학자도 아니고 전문적으로 연구할 위치도 아니어서 그럭저럭 시간을 보내며 부처님 재세시의 원시경전에 마하반야바라밀에 대한 확실하게 말씀하신 것이 있는가 궁금해했습니다.
20여년 전에 갑자기 전국에서 명상 붐이 일어 어떤 스님은 세계적으로 명상대회를 한다며 세계적인 유명한 명상가를 불러와 일종의 이벤트를 하는 것을 보며 저는 굉장히 의아하게 생각했습니다. 신도들도 가끔 명상이 무엇인지, 어떻게 하는지, 명상을 하자고도 했습니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불교권에 명상이란 말이 이용되는지 궁금해서 불교사전을 찾아봤습니다. 한국의 불교사전은 물론이고 모치스키라는 일본의 제일 큰 불교사전을 찾아봐도 명상이란 말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불교내에서는 원래 명상이란 말이 없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영미권에서 meditation이란 말이 유행하니 이 말을 수입해서 한국에서도 명상이라고 한 것같습니다. 국어사전에서 명상을 찾아보면 고요하게 생각한다고 간단하게 되어 있습니다. 한국불교 1600년 역사에서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명상이란 말이 왜 유행하는지 궁금해서 그에 관한 책을 7~8종 사서 봤습니다. 특별히 명상에 대한 설명은 없어서 명상이 나올 수 있을 만한 『아함경』을 보고 그에 대비해서 『니까야』도 봤습니다.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명상이란 단어는 중국을 비롯한 동북아 불교권에는 지금까지 없었던 말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불교 내부에서 참선수행을 명상과 접목하여 설명하는가 하면 심지어 세계적인 명상전문가를 초빙하여 참선수행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몇몇 스님들과 함께 명상의 활성화를 도모하고 있습니다. 노납은 이렇게 참선수행을 설명하는 방편으로 명상수행을 이용하는 것은 득보다는 실이 더 많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참선과 명상은 그 지향하는 바가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다들 아시는 바와 같이 참선수행의 목적은 깨달음을 이루어 부처가 되는 것인데 비해서, 명상은 위에서 살펴본 사전적 해석처럼 눈을 감고 고요히 생각하거나 사색에 잠기는 행위이기 때문에 세상을 차분하고 평온하게 살아가는 데 도움을 주는 소위 마음수행에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영어 meditation에 해당하는 산스크리트어와 빠알리어가 바와나(bhavana)임을 통해서도 알 수가 있습니다. 즉 산스크리트어 바와나는 중국 초기불교에서는 수습(修習)이라는 한자로 번역되었고, 영어 meditation의 문자적 의미는 기르기 (cultivation)입니다. 그러므로 명상이라는 말은 생명의 실상에 대한 이해와 행복감과 덕성을 기른다는 의미가 목적으로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명상이란 똑같은 행위를 여러 번 되풀이해서 익힘으로써 목적하는 결과를 얻는 수행법인 것입니다. (혜담스님 저서, 고따마 붓다의 정관명상 중 18~19쪽)
다시 말씀드리면 명상이란 바와나를 영미권에서 자기들 나름대로 명상이라 해석한 것인데 바와나를 중국 역경가들은 수습이라 했습니다. 명상과 전혀 관계가 없는 말인데 불교사전에서는 수습을 '같은 것을 여러 번 되풀이 해서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는 것'이라 하는 겁니다. 바와나란 '같은 것을 여러 번 되풀이 익힘으로 성불이라는 목적을 달성하는 겁니다. 바와나는 불교에서 나온 수행법인데 멍 때리고 가만히 있는 것을 명상으로 착각하지만 명상은 목적이 있습니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같은 것을 되풀이합니다. 참선할 때는 화두를 끊임없이 들고 그 의미를 알려고 노력하는 겁니다. 쉬지 않고 죽을 듯이 하는 것을 수습이라 합니다. 일본에서 공부할 때 산스크리트어로 되어 있는 '수습차제'라는 티벳경을 했는데 명상법입니다. 이것을 보면 수습은 바와나이고 산스크리트어를 모르는 저로서는 일본에서 더울 때 찬물에 발을 담그면서 그 강의를 들었는데 그 수습차제란 공을 체득하기 위해 끊임없이 추구하는 겁니다. 명상은 멍청히 앉아서 마음을 고요히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대상을 갖고 끊임없이 의심하는 것이라 목적은 생명의 실상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함입니다. 바와나라는 산스크리트어와 영어의 명상은 사실 같은 말이 아닌데 이것을 명상으로 알고 쓰지만 근본적으로 잘못된 해석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초기경전에서도 명상이란 말을 쓰지 않았고 중국의 역경사도 수습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염불할 때도 관세음보살이나 마하반야바라밀을 어떤 목적을 갖고 계속 부르는데 이것이 바와나입니다. 바와나는 마음을 쉬려고 멍청하게 앉아 있는 명상이 아니라 목적을 갖고 같은 것을 되풀이하는 행위입니다. 바와나, 여기에서 삼매가 나오고 깨달음이 나오게 됩니다.
산스크리트어 바와나(수습)의 의미는 우리들이 알고 있는 보통명사인 명상과는 다르게 궁극적으로 사유의 차원을 넘어서 세상과 생명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눈으로 보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위 저서, 25쪽) 부처님은 이와같이 바와나 수행으로 깨달음을 얻는데 깨달음을 얻고 난 뒤에 하시는 말씀으로 『쌍윳따 니까야』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비구들이여, 내가 이와같이 3가지 양상과 12가지 형태를 갖추어서 4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있는 그대로 알고 보고 있는 것이 지극히 청정하지 못하였다면 나는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실현하였다고 신과 마라와 범천을 포함한 세상에서 사문 바라문과 신과 사람을 포함한 무리 가운데 스스로 선언하지 않았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내가 이와같이 3가지 양상과 12가지 형태를 갖추어 4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그대로 알고 있는 것이 지극히 청정하게 나는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실현한다고 신과 마라와 범천을 위시한 세상의 모든 사문 바라문 신과 사람을 포함한 무리에게 스스로 증명하였다. 그리고 나에게 나의 해탈은 확고부동하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 태어남이다. 이제 더 이상의 태어남은 없다.
여기에서 부처님께서 확실히 깨달았다는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같은 책 83쪽‘에 나와 있습니다. 『니까야』의 『도시경』이란 말을 형제 여러분과 같이 저도 처음 들어본 경전인데 『아함경』에서는 『성읍경』이라 합니다. 『도시경』에서는 깨달음인 빤야(panna) 등이 생긴 순간을 두 차례 언급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태어남과 알음알이 등이 서로 의존하는 성품에 연유한다는 깨달음을 거쳐서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고온)가 일어난다‘라고 통찰지로써 관통했을 때이고, 두 번째는 태어남이 소멸하기 때문에 늙음 죽음 등의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가 소멸함을 통찰지로써 관통했을 때입니다. 이때 고따마 붓다는 일어남, 일어남과 소멸, 소멸이라는 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법들에 대한 눈(1)이 생겼다. 지혜(智,2)가 생겼다. 통찰지(慧,3 반야)가 생겼다. 명지(明,4)가 생겼다. 광명(光,5)이 생겼다.라고 설하고 계십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부처님께서 바와나를 통해서 깨달음을 얻는 그 순간에 5가지의 힘이 생겼는데 대승불교의 선구자들은 이 5가지를 통틀어서 쁘라즈냐, 즉 반야라 하고 승속을 불문하고 반야가 최고라며 주장하고 반야바라밀에 대해 칭송을 하면서 부처님 깨달음 자체, 부처님과 동급이라고 주장을 합니다. 그런 영향 속에서 대승불교권에서는 가장 유명한 경전이 『반야심경』입니다. 8만4천 경전 가운데 복이 많은 경전은 많은 사람이 읽고 칭송하고 자기 수행으로 삼는 경전이고 어떤 경전은 들어보지 못한 것도 있어서 문서로만 남아있는 건 복이 없는 경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경전 가운데 복이 가장 많은 경전이 『반야심경』과 『금강경』 정도이고 정토종에서는 아미타경이나 관무량수경이 있습니다. 반야심경에 반야바라밀이 나오고 반야바라밀이 바로 시대신수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등주라며 칭송을 하고 있습니다.
광덕대선사께서 48년 전에 불광법회를 만들어 후배스님과 불자를 지도하기 위해 제창하신 것이 반야바라밀 염송인데 그 반야바라밀 염송이 어디에서 나왔는지를 저는 우연히 명상이 무엇인지 찾아보기 위해 『아함경』과 『니까야』를 뒤져보는 가운데 알게 되었습니다. 부처님께서 깨닫는 그 순간에 얻은 5가지 능력을 알게 되었고 대승불교 선구자들이 쁘라즈냐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서 최고의 덕목으로 우리에게 등장시킨 겁니다. 쁘라즈냐는 밝은 광명과 지혜, 눈 등 부처님께서 깨달은 모든 경계를 하나로 모은 것으로 반야입니다. 그래서 반야경에서는 그렇게 칭송합니다. 불교는 반야로서, 반야를 제외한 불교는 있을 수 없습니다. 불교는 반야를 설한 것이라 할 수 있고 마하반야바라밀 염송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처님이 깨달은 순간의 핵심적인 내용 그 자체를 우리는 기도하면서 염송하는 겁니다.
마하반야바라밀 염송할 때 '법회요전 초판 233쪽'을 읽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걸 안 읽고 하니까 무조건 마하반야바라밀 하는 곳인가 보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오늘 특별히 이 책을 소개하면서 왜 마하반야바라밀을 염송하는가에 대해 넣었습니다. 이 책을 보면 광덕대선사께서 얼마나 치밀하게 불광법회를 창립하시고 불광도량을 건립하셨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중생을 향한 뜨거운 자비심이 그대로 들어 있습니다.
같은 책 214쪽 맨아래입니다. 그렇다면 적극적으로 최고의 진실인 공을 표현하는 말은 없는 것일까요? 『대품반야경』 「탄정품」에는 일체의 것은 본래 완전히 청정하다라는 표현과 ’반야바라밀이 청정하기 때문에 이 청정함을 밝다고 한다‘라고 설하여 마음(반야바라밀)은 본래 밝게 빛나고 있다’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사물과 마음이 구별되지 않는 최고의 실재의 세계에서는 이 둘의 표현은 동일합니다. 맑게 빛나는 마음, 마음의 맑고 빛남이라는 표현이 특히 주목됩니다.
불광법회가 처음 생기고 제등행렬할 때 보면 제일 먼저 불광 깃발을 들고 다음이 ‘맑고 밝고 희망찬 마음’이라고 하는 큰 글씨를 들고 나갔습니다. 큰스님께서 제창하신 ‘언제나 사람의 마음은 맑고 밝고 희망차다’는 것을 저는 잘 이해못했습니다. 저 내용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불교에서 저렇게 긍정적인 표현이 어디에서 나올까를 젊은 시절에는 많이 궁금했습니다. 이 책을 집필하면서 보니까 『대품반야경』 탄정품에 이 내용이 나와 있어서 맑고 밝은 마음의 경전적인 근거가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큰스님께서는 『대반야경』을 보셨을 것인데 대반야경에도 분명 이 표현이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큰스님께서 그냥 조계종 스님의 행위가 불만스러워서 독단적으로 법회를 만들어 중생제도를 해야겠다고 해서 한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사상적으로 반야경에 확고한 근거가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아무도 말씀하지 않은 것을 당신께서 보시고 우리에게 설명해준 겁니다.
이것을 모르고 불광법회가 먼저다 불광사가 먼저라면서 싸울 일이 아닙니다. 역사가 증언하고 아직 살아있는 제가 증언하는데 어떻게 사제들이 불광사가 먼저라며 광덕스님 말이 틀렸다고 할 수 있는지 말이 안되는 소리입니다. 새벽에 예불하러 올라가서 큰스님의 의자에 앉아 있는 사진을 보면 육계가 저렇게 올라갈 수 있는가 하고 놀랍니다. 부처님의 32상호 가운데 정상육계상이 있는데 불상을 보면 육계가 올라가 있는 겁니다. 스님도 공부를 할수록 육계가 자꾸 올라가는 건데 큰스님의 사진을 보면 육계가 엄청 올라가 있어서 제 모습을 거울로 보면 저도 꽤 많이 올라가 있지만 큰스님보다는 한참 모자랍니다. 제 머리를 깎아주신 혜암스님이 제 머리가 잘 생겼다고 하셨는데 그때는 머리가 동글했지만 공부하면서 지금은 많이 올라가 있으나 은사스님께 비교하면 아직 부족합니다. 그래서 큰스님께서는 이론뿐만 아니라 수행도 열심히 해서 ‘맑고 밝고 희망찬 마음’을 발견해서 우리에게 말씀해주셨구나 하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형제 여러분은 조금도 의심하지 말고 누가 뭐라든 큰스님의 하신 말씀, 불광법회의 창립은 시대가 요구하는 것이고 여기에 우리가 실질적으로 참여한다는 것에 긍지를 가져도 좋습니다. 스님들이 방해하든 말든 관계없이 우리는 큰스님께 물려받은 마하반야바라밀 사상을 오늘 이 책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긍지를 갖고 계속 수행하며 불광법회를 가꿔가는 형제들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우리는 횃불이다. 스스로 타오르며 역사를 밝힌다.
내 생명 부처님 무량공덕 생명, 용맹정진하여 바라밀 국토 성취한다.
우리는 불광법등입니다. 전법으로 정토를 성취하겠습니다.
보현행원으로 보리 이루리!!! 나무 마하반야바라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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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먼곳에서 서둘러 법회에 참석하시여 법회일지 정리 작성을 위해 매번 애쓰시는 바라밀보살님께 감사와 찬탄드리옵니다 ~()()()
혜담 스님 법문을 통해
우리가 '불광 정상화'를 위해
왜 이렇게 애쓰는지를 모든 분들이 다시 한번 가슴속에 새겼으리라 확신합니다.
광덕 큰스님께서
불광 법회를 창건하신
그 초심을 지키는 일이,
불광 법회를, 또 불교를,
세세생생 이어가는 일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혜담 스님,
소중한 법문 감사드립니다.
바라밀 님,
스님의 법문을 소상하게 기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바라밀 보살님 세밀하고 규모있는 사진과 볍문 편집 하시는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 합니다.
마하밤야바라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