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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히 경계를 무너뜨리는 인연
몸이 먼저 안다. 해가 뜨기가 무섭게 공기가 따뜻해지고, 주변이 눈에 들어온다. 울긋불긋한 단풍들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 청명하게 파란 하늘에 아직 달이 떠 있다. 산세가 험하지 않은 내연산은 여성들이나 노약자들이 등산하기에 좋다. 내연산 문 구실을 하는 보경사 입구를 지나 골짜기로 20분쯤 걸어 들어가니 스탭들이 단풍나무 몇 그루를 이리저리 심는 중이다. 몇몇은 바위 위에 걸터앉아 커피 한 잔의 여유를 만끽하고 있다.
큰 바위 아래 모니터를 놓고 자리를 잡은 김대승 감독이 아침 담배를 피운다. <혈의 누> 시대극을 마무리한 후 데뷔작 <번지점프를 하다>에 이은 두 번째 멜로 <가을로>를 만들면서 그는 요즘 새로운 멜로의 공기를 어떻게 포착할까에 골몰한다.
이런 깨끗한 공기, 이렇게 맑은 햇살이면 도를 깨우칠 것도 같은데 김대승 감독의 심정은 전혀 그렇지 않다. "무슨! 지금이 가장 미칠 것 같은 시간이다. 오늘 신은 연기자들보다 내 감정이 더 중요한 촬영이라 답이 나올 때까지 현장을 들여다봐야 한다. 오후에 내연산 입구에서 주인공 현우가 등산하고 그 앞에 과거의 연인 민주가 걸어가는 장면을 찍는다. 인물이 등장하는 것만으로 그 어떤 경계나 신호 없이 과거도 되고 현재도 되는 시간의 혼재된 개념을 연출하고 싶다. 이 장면 때문에 <가을로>를 만들려고 마음먹었는지도 모른다.“
<혈의 누>와 <번지점프를 하다> 때도 시도했던 일이지만 김대승 감독에겐 시간을 붙잡아 통제하려는 마음이 어느 때보다 강하다. 어떻게 과감하게 생략하고 부딪치면서 시간의 속도와 리듬감을 만들어낼까.
아래를 내려다보니 엄지원, 김지수가 현장에 도착해 재잘거리고 있다.
한쪽 옆에선 최근 제작, 각본, 출연을 맡은 연극 <육분의 륙> 때문에 서울에서 연극 연습을 하다 새벽녘에 온 유지태가 스탭들 옷더미에 파묻혀 잠시 눈을 붙이는 중이다.
매일 오후 <가을로> 촬영이 끝나면 저녁 비행기를 타고 서울에 가서 밤 9시부터 연극 연습을 하고 다음날 새벽 다시 촬영지로 귀환하는 고된 스케줄 탓이다. 힘겹지만 거의 모든 장면에 나오니 어쩔 수가 없다. 자꾸 감기는 눈을 치켜뜨며 일어난 유지태는 주인공 현우가 되어 등산로를 올라간다. 등산복, 등산화가 아니라 평상복 차림에 단화를 신고 있는 모습이 부조화를 위한 조화다.
여행을 잘 다니지 않던 검사 현우가 그저 담담하게 산을 오르는 것이다. 사랑했지만 잃어버린 연인 민주가 지나갔던 길이기 때문이다. 오전 내내 유지태가 등산로를 왔다 갔다 한다. 유지태 앞에는 세진 역의 엄지원이 산을 오르고 있다. 산의 기운을 받아서인지 엄지원의 얼굴이 꼭 물에 씻은 달처럼 맑고 생기 있다. 오전 촬영은 등산객들 틈에 섞여 산을 오르는 현우와 앞서 가는 세진의 뒷모습을 스테디캠으로 따라가며 찍는다. 어쩐지 무심해 보이는 장면이다.
극중 현우와 세진은 서로를 몰라도 관객은 이 장면을 통해 두 사람의 모습 속에 겹쳐진 인연을 깨닫게 된다.
웰메이드 멜로의 자취
1995년 6월 29일 오후 5시 55분. 지상 5층 지하 4층의 삼풍백화점 철근 콘크리트 건물 2개 동이 모래성 무너지듯 삽시간에 붕괴됐다. 영화라도 찍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거짓말 같은 일이었다.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끔찍한 참사로 501명이 사망, 6명이 실종, 937명이 부상을 당했다. 대한민국 건국 이래 가장 참혹한 인재 가운데 하나로 기록된 삼풍백화점 붕괴사건은 무리한 증축, 자본주의의 얼룩진 욕망이 불러일으킨 대참사였다.
사건 이후 죽은 이들의 가족과 살아남은 피해자들이 지금도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사법 연수생 현우(유지태)와 연인 민주(김지수)도 삼풍의 피해자들이다. 행복한 결혼을 앞두고 결혼 준비로 민주와 함께 쇼핑하려던 현우는 급한 일이 생겨 민주를 백화점에 혼자 보낸다. 서둘러 달려와 백화점 앞 횡단보도에서 길을 건너려는데, 눈앞에서 그만 백화점이 무너져 내린다. 보고도 믿을 수가 없다. 그리고 10년 후. 민주를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자책감에 사로잡힌 현우는 차가운 얼굴의 검사가 되어 있다.
그런 현우 앞에 10년 전 민주가 현우를 위해 준비했던 여행 노트가 배달된다. 민주가 신혼여행 코스로 생각했던 여행지의 사진들과 그곳에 대한 감상을 담은 글이 정성스레 적힌 노트다. 고위 공직자의 비리 사건을 조사하다가 휴직을 당한 현우는 이 참에 민주의 자취를 따라가 보기로 한다. 그런데 여행지마다 계속 부딪치는 여자가 있다. 명랑하지만 어딘가 힘들어 보이는 세진(엄지원). 묘한 만남이 반복되면서 둘은 조금씩 마음을 연다.
<가을로>는 한 마디로 착한 멜로다. 지극히 사랑했기 때문에 다친 마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메워지지 않은 상처를 보듬으려 하기 때문이다. 진부할지는 몰라도 진심인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 진심을 어떻게 보여 주느냐가 문제다. 감독도 배우들도 고민이다.
<봄날은 간다> 이후 오랜만에 멜로로 돌아온 유지태의 심중은 이렇다. "멜로가 신파 아니면 로맨틱 코미디로 양분되는 요즘, 굉장히 장르적인 멜로를 하고 싶었다. 돈을 목적으로 사랑을 놓고 웃음을 유발하거나 울음을 강요하는 멜로는 싫다. 솔직히 대중과 너무 멀어진다는 느낌에 멜로 출연을 결정했는데 <가을로>는 분명 강요하지 않는 웰메이드 멜로가 될 거라 믿는다."
상처를 지닌 여자 세진을 연기하는 엄지원은 더욱 고민이다. 김대승 감독이 촬영을 시작한 후에 “세진 역은 잘못하면 욕 먹고 잘해봐야 본전이야”라고 하길래 속았구나 싶었지만 어쩌랴. 엄지원은 자기 역할을 정확히 알고 있다. “민주는 영화에 테두리를 만들어주고, 현우는 감정을 심어주는 캐릭터라면, 세진은 테두리 안에 있는 그림에 색칠해 주는 인물이다.
멜로의 디테일을 완성시키는 인물이라 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다쳐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는 감정이 있다. 내가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감정들을 연기해야 하는 게 어렵다.” "비극적인 정서를 담백하게 풀어내는 방식에 끌려“ 문승욱 감독의 멜로 <로망스>가 크랭크업한 다음날 <가을로> 현장으로 옮겨온 민주 역의 김지수 역시 남다른 어려움을 느낀다.
"민주는 <가을로> 전체의 정서와 이미지를 대표한다. 정말 햇살 같은 여자이고 10년간 현우 마음속에서 살아 있는 여자기에 육체적, 정신적으로 부담스럽다." 그래서 오전 9시부터 자기 신이 없어도 촬영장을 지키다가 오후 1시에 유지태와 함께 등산하는 신을 찍는다.
김지수는 어느새 건강하고 따뜻한 여자 민주가 되어 뒤를 돌아본다. “왜? 쉬었다 갈까?” 카메라는 뒤이어 오는 현우를 잡는다. 헤어 스타일리스트의 재빠른 손길을 입은 유지태는 어느새 10년 전 앳된 모습의 현우다. 지쳐 보이는 현우는 “쉬었다 또 가? 이러다 월북하겠다!”며 투덜거린다. “거의 다 왔어.” “너 아까도 그랬잖아!” 연인들의 귀여운 다툼이 화면 속에 되살아나면 오전에 촬영한 현우의 쓸쓸한 모습과 대비돼 잃어버린 사랑에 대한 안타까움이 더해진다.
“멜로는 디테일 싸움”이라고 믿는 김대승 감독은 자연광을 살려 2.35:1 화면에 내연산의 아름다운 풍경을 펼치기 위해 이모개 촬영감독, 여경보 스테디캠 기사 등 스탭들과 세세한 논의를 한다. "감독이란 참 외로운 직업인데 촬영감독이나 배우들이 의지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 덜 외롭다”는 김대승 감독의 말이 <가을로> 촬영장의 은근한 분위기를 말해준다.
가을의 풍경을 찾아서
"매일 촬영 일정은 내가 아니라 해가 정한다"는 김대승 감독의 말은 사실이다. 해가 어느새 산을 넘기고 촬영이 끝난다. 오후 3시인데 산은 완전히 캄캄한 게 마치 초저녁 같다. “엄마나. 김지수 아냐? 아이구 악수나 합시다. 나 포항에서 가장 잘나가는 아파트 부녀회장인데, 앞으로도 좋은 모습 보여 주세요.” “어머 이 아저씨, 잘생겼네, 이 언니는 뭐하는 사람인데 이렇게 예쁘장하대?”
지나가다 말고 서서 배우들 얼굴을 뚫어져라 구경하거나 저돌적으로 다가오는 등산객들을 막으며 스탭들이 온갖 장비를 짊어진 채 또 산을 탄다. 거의 출애굽기 수준으로 산을 내려간다. 김대승 감독은 산을 내려오자마자 다음 촬영지를 답사하러 사라진다.
체력도 넘치고 의지도 넘친다. 황량한 주인공들의 가슴에 온기를 불어넣어 줄 또하나의 주인공이 바로 풍경이다 보니 숨막히는 로케이션의 미학을 위해 잠시도 쉴 틈이 없다. 촬영 일정은 80회차 중에 이제 30회차를 넘기고 있다. 전라남도 목포 끝에서 경주, 울산, 울진, 포항을 거쳐 강원도 영월, 태백까지 가장 아름다운 일몰과 달빛, 햇살을 찾아가는 영화 <가을로>는 내년 2월까지 촬영한 후 내년 5월 개봉 예정이다. 여름의 대참사를 겪고 황폐해진 주인공의 마음을 치유하는 가을을 붙잡기 위해 모두의 마음이 바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