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5월 31일 선거를 마치고
나는 5.31 지방 선거에 "부산시의원 후보"로 나섰다.
무소속 기호 6번을 받고 3명의 후보가 겨루었다.
준비가 부족한 관계로 선거운동 내내 힘들었다.
선거 사무원 채용이 돈과 관련이 있음으로 해서 숫자를 채우지 않은 상태에서 운동에 들어 갔다.
후보자나 운동원은 당선에 대한 부푼 기대를 걸고 선거운동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
돌이켜보면 나는 그 점이 부족했던거 같다. 하지만 사람의 기본적 성취 욕구가 있듯 나에게도 당선이나 득표력에 마음이 있었다.
6월 1일 개표 결과는 크게 실망할 정도다. 11,7%의 득표율은 사회적 지지도에 크게 미치지 못해 주위 분들에게 민망할 따름이다. 다소 한나라당 전국 싹슬이가 위안이 되기도 했다.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 피습사건 여파는 태충의 눈처럼 전국을 강타했다는 결론이다.
선거 운동 기간 중에 진주 경상대학, 동의과학대학, 남양 알로에 등 특강을 4차례나 나갔어야 했다.
강의료의 수입이 곧 운동원들의 수당을 줄 계산이었기 때문이다.
나를 지지해주신 분들이나 운동원들에게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고마운 마음이 더 앞섰다.
5월 31일 투표를 마치고 내 연구실로 가서 내일 강의 준비를 하면서 책을 펼칠 때 마음이 편안하게
왜? 내가 갈 길을 두고 이런 곤욕을 치르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하듯이 나는 학문과 강연을 먹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그동안 나를 위해 애써주신 두 형님과 처제, 그리고 이웃 민석기씨 가족이 너무나 고마웠다.
그리고 마음 고생을 하신 장인어른께 감사드리며 몸과 마음을 내 던진 아내, 아들 딸에게 사랑을 느끼며 이 글을 적었다.
---2006년 6월 2일 아침에 여순모 ---
첫댓글 가슴아픈 사연이네요. 그러나 인생살이가 평탄한 대로로만 간다면 살아가는 맛이 없지 않을까요? 잠시의 외도로 인하여 지금의 모습이 더 멋지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