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2년 7월 31일 오후 6시 55분 서울 강서구 개화동과 경기도 고양시 행주외동을 잇는 신행주대교 공사장에서 2개의 주탑 중 하나가 부러지고 교각과 상판 800여 m가 내려앉아 붕괴된 사건이다. 마침 작업이 끝난 시간이어서 인명 피해는 없었다. 이 다리는 기존 행주대교의 교통 체증을 덜기 위해 1987년부터 정부가 벽산건설에 수주, 170억원을 들여 길이 1,460m, 폭 14.5m 왕복 4차로로 건설 중이던 2개의 Y자형 주탑을 가진 사장교(斜張橋)이다. 상판 작업 60∼70m 간격을 남겨 마지막 연결 공사를 하던 중이었다.
대안입찰 방식으로 벽산건설에 맡겨진 사장교 형식은 한국에서 최초로 시도되는 공법으로, 기술 수준의 차이 때문에 안전 진단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채 외국인 기술자에게 공정을 전적으로 의존해 왔다. 건설부는 1992년 5월 한국건설안전기술협회와 공동으로 안전 진단을 실시했으나, 이때도 공법이나 구조물 상태에 관하여는 거론을 하지 못하였다. 사고의 직접 원인은 주탑과 상판 사이의 인장작업 전 임시로 설치한 가교각 2개가 상판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여 붕괴되면서 강북쪽을 향해 10개의 교각이 차례로 무너지고 강선으로 연결된 상판 41개가 차례로 강물로 끌려들어가면서 일어났다.
이 사고로 붕괴된 교각과 상판은 물론 상판 위에 쌓였던 수십 억원의 자재, 장비가 수장되고, 재건설에 4년 여의 기간이 걸려 일산, 중동 등 신도시 건설에 맞춘 수도권 교통망 확충계획이 차질을 가져왔다.
1993年
우암아파트붕괴사고
- 충북 청주시 소재 우암상가 아파트가 화재와 함께 기둥 등 골조가 붕괴하여 사망 28명, 부상 48명의 사상자를 낸 대형참사가 발생.
일시 : 1993. 01. 06. AM 01 : 13
→ 준공 2년이 경과하면서부터 벽체에 균열이 생겼고, 건축과정에서 3차례의 설계변경을 하는 등으로 인해 정상적인 건설이 되지 않았음이 나타났다. 붕괴사고 이후 조사에 의하면 지하 및 1층 부분 콘크리트의 압축강도가 부족했고, 일부철근이 제대로 배근이 되지 않는 등 부실시공이 사고발생의 가장 큰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구포열차전복사고
- 부산 시내 초입에 있는 구포역 입구에서 철길 지하 굴착공사로 인한 지반 붕괴로 부산으로 들어가던 무궁화 열차가 전복되는 대형 사고가 발생 승객 78명이 숨졌다.
일시 : 1993. 03. 28. PM 05 : 29
→ 93년 3월 28일 오후 5시 30분께 부산시 북구 덕천2동 381의8 빅토리아호텔 뒤 덕천천 교량 2백여미터 앞 경부선(구포역기점 서울방향 2.5km) 철로 지반이 침하돼 이곳을 지나던 서울발 부산행 제117호 무궁화호열차(기관사· 노진환.32)8량 가운데 기관차와 발전차, 객차 2량이 탈선해 깊이 5m,너비 15m 가량의 무너진 구덩이에 쳐박혔다. 기관사 노씨에 따르면 시속 85km로 사고지점 부근인 구포역쪽으로 운행하던중 사고지점 50여m 앞에서 철로 지반이 내려앉기 시작하는 것을 발견, 급제동을 걸었으나 철로가 깊이 5m 가량 내려 앉으면서 기관차 머리가 먼저 흙속으로 쳐박혔고 연결된 발전차와 6,5호 객차가 잇따라 탈선하면서 서로 충돌했다는것. 이 사고로 밤 11시 현재 신성자씨(33.여.부산시 금정구 남산동 59의32)와 신씨의 아들 이동혁군(8)등73명이 숨지고 김채은씨(45 부산시 사하구 괴정4동 584의22) 등 1백7명이 중경상을 입고 북구 구포동 한중병원과 부산대학병원, 백병원 등 시내 13개 병원에 분산 수용되었다.
서해훼리호침몰사고
- 전북 부안군 위도면 임수도 부근 해상에서 승객 2백여명과 승무원 9명을 태우고 위도 파장금항을 출발하여 부안군 변산면 격포항으로 항해중이던 서해훼리(주) 서해훼리호가 파도에 강타당하면서 침몰한 사고.
일시 : 1993. 10. 10. AM 10 : 10
→ 출항당시 기상은 북서풍이 초당 10~14m로 불어 파고 2~3m로 여객선이 출항을 해서는 안되는 악천후 였음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출항하였고 출항후 좌현 정횡(배 왼쪽중앙) 부분으로 닥치는 파도가 예상보다 높아지자 선장이 뱃머리로 파도를 받기 위해 침로를 60 회전하여 시속 12노트로 진행하다가 임수도 북서쪽 1.9마일 지점에서 원항로로 복귀하기 위해 남쪽으로 40도 가량 변침하는 등 기기를 무리하게 조작한 것 등이 사고원인으로 판명되었다.
서해 훼리호 승선정원은 221명이었으나 362명이 탑승, 141명을 초과 승선시켰고 수화물을 갑판부분에 적재하여 배의 상부가 무거운 상태에서 키를 남쪽으로 갑자기 돌렸을 때 복원력 상실이 결정적 원인으로 작용하여 침몰.
1994年
성수대교붕괴사고
- 서울 강남 압구정동과 성동구 성수동을 잇는 성수대교 교각 일부가 붕괴된 사고.
일시 : 1994. 10. 21. AM 07 : 38
→ 1994년 10월 21일 아침 7시 40분께 서울 성수동과 강남구 압구정동을 잇는 성수대교 중간 다섯째와 여섯째 다릿발 사이의 상판 48m가 붕괴되어 출근과 등교길의 승객 사망자 32명 부상자 17명이 발생하였다.
한강다리중 11번째로 건설된 성수대교는 1977년 4월 9일에 착공하여 1979년 10월 15일 2년6개월만에 준공된, 폭 19.4m, 길이 1,160.8m의 4차선 교량이다.
동아건설이 시공하여 1백15억 8천만 원의 공사비가 소요되었으며, 기능 위주로 설계된 종래의 교량들과 달리 미관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처음으로 거버 트러스(Gerber Truss)공법에 의해 건설되었다.
성수대교는 교량 상판을 떠받치는 트러스(철강구조물)의 연결 이음새의 용접이 제대로 되지 않고 10mm이상이 돼야 하는 용접두께가 8mm밖에 되지 않았으며 강재 볼트 연결핀 등도 부실했던 것으로 검찰 조사결과 밝혀졌다. 서울시의 형식적인 안전점검, 관리소홀도 부실 시공된 다리의 붕괴를 앞당겼다. 시는 부식된 철제 구조물에 대한 근본적인 보수 없이 녹슨 부분을 페인트로 칠하는 방법으로 위험을 숨겼다. 또한 성수대교를 이용하는 차량대수가 급격히 늘어난 것도 붕괴사고의 한 원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1995년 4월 26일부터 현대건설이 총 공사비 7백 80억원을 들여 복구공사에 착수하였고 사고발생 2년 8개월 만인 1997년 7월 3일 차량통행이 재개되었다.
아현동가스폭발사고
- 1994년 서울특별시 마포구 아현동 지하철 공사장의 도시가스관 폭발 사건.
일시 : 1004. 12. 07. PM 02 : 50
→ 1994년 12월 7일 오후 2시 50분쯤 서울 마포구 아현동 시민공원에서는 지축이 흔들릴 정도의 폭발음과 함께 거대한 불기둥이 치솟았다. 불길은 삽시간에 주변으로 옮겨갔다. 도시가스 중간공급기지(밸브스테이션) 위에 조성된 200여 평의 공원에는 벤치 등 각종 시설물이 있었으나 폭발사고 후에는 형체도 찾아볼 수 없었다.
사건의 원인은 이날 지하철 공사장에서 하수관 파쇄 작업을 하던 포클레인 기사가 하수관 바로 밑에 있던 가스관을 포클레인으로 잘못 건드려서 일어났다.
발화 지점의 가스 분출 압력이 거세고 가스 차단이 늦어져 불길을 잡는 데는 1시간 이상 걸렸다. 이 화재가 크게 번진 것은 사고 현장 주변에 가스 차단 밸브 장치가 없었기 때문이다. 현장에서 10km 가량 떨어진 가스 공급소에서 가스를 차단해야 하는데, 차단 이후 20분 가량 가스관 내부에 차 있던 잔류 가스가 계속 탔다. 이 사건으로 시민 12명이 죽고 1명이 실종되었으며, 65명이 부상당했고 이재민 600여 명이 발생했다.
1995年
대구지하철공사장가스폭발사고
- 1995년 4월 28일 대구광역시 상인동(上仁洞) 지하철 1호선 제1~2구간 공사장에서 일어난 가스폭발 사건.
일시 : 1995. 04. 28. AM 07 : 50
→ 대구시 상인동 70번지 영남중고교 앞 네거리 지하철 1호선 제1∼2구간 공사장에서 일어난 가스폭발 사건이다. 인근 대구백화점 상인점 신축 공사장에서 지반을 다지기 위한 천공작업 중 그 부근을 지나던 지름 100mm의 가스관을 파손해 이 가스관으로부터 새어 나온 가스가 하수관을 타고 지하철 공사장으로 흘러들어 괴었다가 폭발하였다.
천공작업을 하던 (주)표준개발은 가스관이 파손된 지 30여 분이 지난 뒤에야 도시가스측에 신고하고, 신고를 받은 대구 도시가스측도 신고 후 30여 분이 지난 뒤에야 사고현장으로 통하는 가스밸브를 잠그는 등 늑장 조처로 큰 피해를 초래했다. 폭발음과 함께 50여 m의 불기둥이 치솟았으며, 지하철 공사장 복공판 400여m 구간이 내려앉아 차량 150대가 파손되고 주택, 건물 등 80여 채가 파괴되었다. 그리고 등교 중이던 학생 42명을 비롯하여 사망 102명, 부상 117명 등 220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피해액은 약 600여 억원으로 추정되었다.
이 사고처리를 위해 설치된 검경 합동수사본부는 대구백화점 상인점 공사를 맡은 (주)표준개발의 과실에 의한 사고임을 밝혀내고 회사 관계자 9명을 업무상 과실치사상 등의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
이 사고로 지하 매설물에 대한 전산대장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당국의 안전관리 행정에 대한 비판이 크게 일었으며, 긴급 구난체계 및 통합 구조체계의 정비에 대한 정부와 국민의 목소리가 높아져,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대책기구가 설립되고, 도시가스사업법 등 관계 법령의 개정을 가져왔다.
삼풍백화점붕괴참사
- 서울 서초구 서초동에 있던 삼풍백화점의 한 동(棟)이 1995년 6월 29일 오후 6시경에 붕괴된 사고.
일시 : 1995. 06. 29. PM 05 : 55
→ 사망 501명, 실종 6명, 부상 937명이라는 인명피해는 8·15광복 이후 가장 큰 인적 재해로 기록되었으며 재산상의 손해도 매우 컸다.
지상 5층, 지하 4층, 그리고 옥상의 부대시설로 이루어진 삼풍백화점은 1989년 말에 완공하였으나 설계·시공·유지관리의 잘못에 기인된 참사였다. 정부는 특별재해지역으로 선포하였다.
이 사고를 계기로 긴급구조구난체계의 문제점이 노출되어 119중앙구조대가 서울·부산·광주에 설치되었으며, 부실건축물로 인하여 다시 한 번 국내외적인 부끄러움을 감수해야 했다.
→ 좌초된 선박이 북한의 소형 잠수함으로 확인됨에 따라 군인·경찰· 예비군은 합동으로 무장공비에 대한 소탕작전에 돌입하였다. 이 수색·소탕작전중 잠수함과 도주로 주변에서 중화기인 대전차 로켓을 비롯하여 M-16·AK소총·정찰용지도 등 유류품 367종 4,380점을 노획하고 조타수 이광수(31세,상위)를 생포하였으며,동승했던 정찰조원들이 북한의 지령에 따라 잠수함 좌초책임을 물어 사살한 것으로 추정되는 승조원 11명의 사체를 발견하였다.도주한 잔당을 추적한 끝에 정찰조장·잠수함장 등 13명을 발견하여 교전끝에 사살하였으나 아군 11명,경찰·예비군 2명, 민간인 4명이 피살되는 인명희생을 당했다.
생포된 이광수에 의하면, 이들은 북한의 대남공작기구중 하나인 인민무력부 정찰국 해상처 22전대 소속으로 94년 12월 함남 신포에서 건조된 300톤급 잠수함을 타고 총 26명이 침투하여 강릉비행장· 영동발전소등을 정밀 촬영하였는데, 침투 임무는 전쟁에 대비하여 한국의 군사시설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는 한편, 강원도에서 열리는 전국체전에 참석하는 주요 인사들을 암살하려는 것이었다.
결국 강릉 잠수함 침투사건은 북한 김정일의 직접적인 지령에 따라 남침계획을 구체화시켜 나가기 위해 사전정찰 및 한국 내정교란을 목적으로 자행한 명백한 군사침략행위였다.
또한 98년 6월22일 오후 4시 33분쯤 강원도 속초시 동쪽 11.5마일(18Km)지점 우리 영해에서 북한의 유고급 잠수정 1척이 어선이 뿌려놓은 꽁치잡이 그물에 걸려 표류하다 해군 함정에 의해 6월23일 새벽 동해안으로 예인됐다.
이 잠수정에서는 승조원과 공작원 등으로 추정되는 9구의 시신이 자폭한채 발견됐다.
중앙합동신문조의 수사결과 사망자 가운데 4명은 머리에 총상을 입은 상태였으며 나머지는 난사당한 흔적이 발견돼 공작조가 승조원들을 죽이고 권총자살한 것으로 드러났다.
발견된 잠수정은 레이더 탐지가 어렵고 잠수 및 발진속도가 빨라 북한이 정찰 및 침투용으로 사용하고 있는 70톤 규모로 길이 20m , 폭 3.1m인 유고급 잠수정이다.
1997年
IMF외환위기
일시 : 1997 ~ 1998
→ 국내외의 악재로 인하여 외국에 지불해야 할 외환이 바닥나서 우리나라가 파산상태로 몰렸던 사건.
1998年
부천LPG가스폭발사고
일시 : 1998. 09. 11. PM 02 : 14
→ 안전검사를 위하여 투입한 질소가스를 검사후 배출시키기 위해 밴트밸브를 열어놓고 잠그지 않은 상태에서 지하 저장탱크에 가스를 충전하던 중 밴트밸브로 새어나온 누출가스에 의해 가스가 발화하여 폭발한 사고.
1999年
씨랜드화재참사
- 경기도 화성군 청소년수련원 씨랜드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유치원생 19명 등 23명이 숨진 대형사고.
일시 : 1999. 06. 30. AM 01 : 20
→ 1999년 6월 30일 새벽 경기도 화성군 서신면 백미리(현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백미리)에 있는 청소년 수련시설인 '놀이동산 씨랜드'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가 발생하여 잠자고 있던 유치원생 19명과 인솔교사 및 강사 4명 등 23명이 숨지고 5명이 부상당하는 참사가 일어났다.
사고 당시 현장에는 서울 소망유치원생 42명, 서울 공릉미술학원생 132명, 안양 예그린유치원생 65명, 부천 열린유치원생 99명, 화성 마도초등학교 학생 42명 등 497명의 어린이와 인솔교사 47명 등 모두 544명이 있었다.
화재 발생 후 1시간이 지난 새벽 1시 41분, 신고를 받은 소방관서에서는 현장에 소방차 20여 대, 소방관 70여 명, 경찰 250여 명 등을 출동시켜 화재진화와 인명구조 작업을 벌였다. 그러나 불이 나면서 발생한 유독가스와 건물 붕괴위험 등으로 진화작업에 어려움을 겪었다.
불은 맨 처음 수련원 2층 C동 301호에서 일어나 순식간에 건물 전체로 옮겨붙은 것으로 보였다. 화재원인은 방 안에 피워둔 모기향이 이불에 옮아 붙었거나, 전기 누전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정밀검식을 하였지만 원인을 밝혀내지 못하였다.
이 수련원은 콘크리트 1층 건물 위에 52개의 컨테이너를 얹어 2~3층 객실을 만든 임시건물로, 청소년을 위한 수련원으로 사용하기에는 많은 위험요소를 안고 있는 구조물이었다.
수원지방검찰청과 화성경찰서는 씨랜드 대표와 화성군 관계자 등을 소환하여 수련원 준공 및 사업허가 경위 등에 대한 수사를 벌였다. 화성군으로부터 준공 및 사업허가 관련 서류 일체를 넘겨받아 이 과정에서 불법이 있었는지를 집중수사한 검찰은, 이들 사이에 인허가를 둘러싼 비위사실이 있었음을 밝혀 내었다.
신창원검거
- 부산교도소를 탈출한 탈주범 신창원을 2년 6개월 만에 검거한 일.
일시 : 1999. 07. 16.
→ 신창원은 1997년 1월 20일 부산교도소 감방 화장실의 쇠창살을 절단하고 교도소를 탈출하였다. 1999년 7월 16일 가스렌지 수리의뢰를 받고 전남 순천의 한 아파트에 들어갔던 수리공의 제보로 검거될 때까지 2년 6개월 동안 신창원은 경찰의 수사망을 뚫고 전국 각지로 출몰하며 숱한 화제를 뿌리고 다녔다.
신창원은 1967년 5월 전북 김제군 금구면 하신리에서 가난한 농부의 3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나 초등학교 1학년 때 어머니를 잃고 홀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김제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했으나, 가난한 집안사정 등으로 2학년 때 중퇴하였다. 15세인 1982년 절도죄로 김제경찰서에 붙잡혀 소년원에 들어갔다. 소년원에서 나온 다음 해 서울로 올라와 청량리역 주변 유흥가에서 음식점 배달원 등을 전전하면서 1983년 절도죄로 다시 징역 8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았다.
1989년 3월 24일 공범 3명과 함께 서울 성북구 돈암동 정모 씨 집에 침입, 정씨를 흉기로 찔러 숨지게 한 혐의로 경찰의 수배를 받았다. 그 해 9월 검거되어 강도치사죄로 무기징역형이 확정돼 서울구치소와 청송교도소 등을 거쳐 1994년 11월 부산교도소로 이감되었다. 1997년 1월 20일 교도소 감방 화장실의 쇠창살을 절단하고 탈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 후 도피생활을 하는 중에도 108건의 강도와 절도를 저질러 9억 8000여 만 원을 빼앗았다. 이 돈을 이용하여 다방 여종업원 등 유흥업소 종사자를 유혹하여 동거장소를 은신처로 삼았다. 신창원의 도피기간 동안 경찰수사의 공조부재, 주민신고 무시 등 고질적인 허점이 드러났으며, 많은 경찰관이 체포에 실패한 책임을 지고 경찰에서 물러났다.
인천호프집화재사고
- 1999년 10월 30일 인천의 인현동 상가건물에서 불이 나 건물 안에 있던 중 ·고교생들을 포함한 56명이 사망한 대형사고.
일시 : 1999. 10. 30. PM 06 : 52
→ 1999년 10월 30일 오후 7시경 인천광역시 중구 인현동에 위치한 4층 상가건물에서 발생한 화재로 건물 2층 라이브호프집과 3층 그린당구장에 있던 10대 중·고교생들과 20대 초반의 청소년 등 손님 52명이 불에 타거나 연기에 질식해 숨졌다. 또 71명이 연기에 질식되거나 화상을 입고 중앙길병원, 인하대학교 부속병원, 인천의료원 등 인천지역 8개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이 날 불은 이 건물 지하에 있는 히트노래방의 내부수리 공사장에서 처음 발생하여 계단을 타고 2층과 3층으로 번졌다. 이 때문에 있지도 않은 비상구와 비상계단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던 많은 청소년들이 화를 당하였다. 불은 긴급출동한 소방차 15대와 구급차 19대, 소방관 180명과 경찰관 160명에 의하여 35분 만에 진화되었다.
그런데 많은 중·고교생들이 희생된 호프집은 불법영업을 일삼아 온 문제업소였으며, 이 업소의 실질적인 소유주인 정성갑이 단속기관과 밀착되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단순한 화재사건 이상으로 커졌다. 화재가 일어난 직후 종적을 감춘 정성갑은, 1999년 11월 3일 오후 충남 보령시 대천역 앞에서 경찰에 자수하였다.
한편, 언론은 정성갑의 전 관리인으로부터 입수한 비밀수첩에는 1998년 말부터 1999년 1월 중순까지 인천 중부경찰서, 파출소 등에 얼마씩을 지출했다는 내용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결국 인천호프집화재사건은 사회의 안전불감증과 공무원의 부정부패로 인한 인재(人災)가 여전함을 다시 확인해 주는 사고였다.
2000年
남북정상회담
- 남북한의 최고 지도자가 만나 통일과 상호 교류ㆍ협력 등에 관한 문제를 광범위하게 논의한 회담.
일시 : 2000. 06. 15.
→ 대통령 김대중과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평양에서 2000년 6월 13일부터 15일까지 2박 3일 동안 가진 정상회담으로, 이는 김정일의 초청으로 이루어졌다. 남북한의 정상이 직접 만나기는 1945년 한반도가 분단된 이후 55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회담의 주요 내용은 한반도의 통일과 평화정착, 민족의 화해와 단합, 남북간 교류와 협력 등이다. 회담의 성과는 대결의 냉전질서 종식과 화해 및 협력의 역사적인 계기 마련 등을 들 수 있다.
남북정상회담의 구상은 제5공화국 때 최초로 공식 제안되었다. 1985년 김일성 주석이 실현가능성에 대하여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후 여러 경로를 통하여 남북간에 접촉이 있었으나 그 실현에는 이르지 못했다. 제6공화국에 와서도 이의 실현을 위한 다각적인 노력이 있었지만 성사에는 이르지 못했다.
문민정부는 정상회담 개최에 대하여 적극성을 보였다. 대통령 김영삼이 1993년 2월 25일 취임사와 1994년 취임 1주년 기자회견에서 김일성 주석과 만날 용의가 있음을 밝히자 북한은 1994년 6월 지미 카터 전 미국대통령을 통하여 이를 수락했다.
이에 따라 남북간에는 정상회담 개최를 위한 부총리급 예비접촉을 판문점에서 열고, 1994년 7월 25일부터 남북정상회담을 열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7월 8일 김일성 주석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회담은 결국 실현되지 못했다.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면서 대통령 김대중은 1998년 2월 25일의 취임사, 3·1절 기념사를 통하여 "남북기본합의서 이행을 위한 특사 교환과 북한이 원한다면 남북정상회담에도 응할 용의가 있음"을 천명하는 등 남북 정상간 대화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1999년 3월 독일을 국빈 방문 중이던 대통령 김대중은 "한국정부는 북한이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다"며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지향한 '베를린선언'을 발표했다.
베를린선언 후 북한은 회담의 개최 의사를 밝혔고, 이에 따라 2000년 3월 17일 중국 상하이에서 남북간 첫 접촉이 있었다. 그 후 베이징에서 수차례 비공개 협의를 가진 뒤 4월 8일 남북간 최종 합의서를 작성했다. 이 합의서에 따라 4월 22일부터 5월18일까지 판문점에서 5차례의 준비접촉을 갖고 대표단 수행원수, 취재기자수 등에 관하여 최종 합의를 이루고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의 성사를 보게 되었다.
2002年
韓日공동월드컵개최
- 2002년 한국과 일본이 공동 개최한 제17회 월드컵축구대회.
일시 : 2002. 05. 31. ~ 06. 30.
→ 2002년 5월 31일부터 6월 30일까지 한국과 일본의 20개 도시에서 열린 21세기의 첫 월드컵이자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개최된 월드컵이며, FIFA(국제축구연맹) 월드컵 사상 최초의 공동 개최라는 의미를 지닌다.
대회 공식명칭은 2002 FIFA WORLD CUP KOREA/JAPAN이며, 새 천년, 새 만남, 새 출발을 기본 이념으로 한다. 가장 모범적인 FIFA 월드컵을 대회 목표로 세우고, FIFA의 공식 위탁을 받은 한국월드컵조직위원회(KOWOC)와 일본월드컵조직위원회(JAWOC)가 협력하여 대회의 운영 전반에 관한 기획과 실행, 관리를 맡았다. 공식 엠블럼은 원형의 중앙에 트로피·축구공·지구를 디자인한 형태이며, 마스코트는 3차원 애니메이션 기술을 구사한 상상 세계의 동물로 이름이 각각 '아토(Ato:코치)', '니크(Nik:선수1)', '캐즈(Kaz:선수2)'이며 축구를 매우 좋아하는 캐릭터이다.
한국의 서울·부산·대구·인천·광주·대전·울산·수원·전주·서귀포와 일본의 삿포로[札幌]·미야기현[宮城縣]·니가타[新潟]·이바라키[茨城]·사이타마현[埼玉縣]·요코하마[橫浜]·시즈오카[靜岡]·오사카[大阪]·고베[神戶]·오이타[大分] 등 20개 도시에서 31일간 한·일 각 32경기로 총 64경기가 펼쳐졌다.
대회 일정은 1999년 10월 지역예선 참가국 발표, 12월 7일 도쿄에서 지역예선 조 추첨, 2000년 3월부터 2001년 11월까지 대륙별 지역예선, 2001년 12월 1일 부산에서 본선 조 추첨, 2002년 1월 IBC(방송센터)개설, 3월~4월 한국과 일본에서 프레월드컵 개최, 5월 말 한국에서 FIFA총회 개최, 5월 31일 서울에서 개막식 및 개막전, 6월 30일 요코하마에서의 결승전을 치렀다.
경기는 지역예선 조 추첨 결과에 따라 지역 조별 리그전을 거친 29개 본선 진출 팀과 개최국인 한국과 일본, 지난 대회 우승국인 프랑스 등 예선을 치르지 않고 본선에 진출하는 3개국을 더한 총 32개 팀이 16개 팀씩으로 나뉘어, 한국과 일본에서 본대회를 치렀다.
본대회는 한국과 일본에서 각각 4개국으로 이루어진 4개조의 리그전으로 시작되어, 리그전을 거친 상위 16개국은 결승 토너먼트에 진출, 한국에서 결승에 진출한 8개국 중 4개국이 일본으로 가고, 일본에서 4개국이 한국으로 와서 8강전을 치렀다. 이어 한국에서 8강에 진출한 4개국 중 2개국은 일본으로 이동하고, 일본에서 2개국이 한국으로 와서 준준결승전을 치렀다. 한국에서 준준결승전으로 4강에 오른 2개국 중 1개국은 일본에서, 일본에서 준준결승전을 거친 2개국 중 1개국은 한국에서 준결승전을 치렀다. 마지막으로 한국에서 준결승에서 승리한 팀은 일본으로 이동하여 결승전에 출전, 패자는 일본에서 온 준결승전의 패자와 3, 4위 결정전을 가졌다.
우승은 브라질이 차지하여 월드컵 5회 우승을 기록했으며, 준우승은 독일, 3위는 터키, 4위는 한국이 차지하였다. 한국은 특히 7전 4승 1무 2패라는 성적으로 한국은 물론 아시아에서 최초로 4강신화를 기록하여, 월드컵대회 참가 48년만에 첫승·16강·8강·4강에 오르는 기록을 경신하였다. 또한 한국축구대표팀의 서포터스인 붉은 악마를 중심으로 온국민의 길거리 응원도 전세계의 이목을 받았다.
최우수 선수에게 주는 상인 골든볼과 최고의 골키퍼에게 주는 상인 야신상은 독일의 올리버 칸이 차지하였으며, 최고의 득점왕에게 주는 상인 골든슈는 우승팀인 브라질의 호나우두가 8골을 넣어 차지하였다. 대회 내내 깨끗한 매너를 보인 팀에게 주는 페어플레이트로피는 벨기에팀에게 돌아갔다.
2003年
대구지하철화재참사
- 2003년 2월 18일 대구광역시 중구 성내동(城內洞) 중앙로역에서 일어난 대형 지하철 화재사고.
일시 : 2003. 02. 18. AM 07 : 50
→ 대구광역시 중구 성내동(城內洞) 중앙로역 구내에서 50대 남자가 플라스틱통에 들어 있는 휘발유에 불을 붙인 뒤, 바닥에 던져 12량의 지하철 객차를 뼈대만 남긴 채 모두 태워버린 대형참사로, 2003년 2월 18일 오전 9시 53분에 일어났다.
사고원인은 50대 중반의 한 정신지체장애인이 자신의 신병을 비관하다 판단착오로 저지른 것으로 밝혀졌다. 이 방화범은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南山洞) 명덕역에서 지하철을 탄 뒤 경로석에 앉아 있다가, 성내동 중앙로역에서 열차가 서행하는 틈을 타 갑자기 불을 질렀다.
이 사고로 열차는 완전히 불에 타 뼈대만 남았고, 중앙로역 천장과 벽에 설치된 환풍기, 철길 바깥쪽 지붕들도 모두 녹아 내려 역 구내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바뀌었다. 출근시간이 지나기는 했지만, 많은 시민들이 타고 있어서 인명피해도 엄청나 192명이 사망하고 148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사고 다음날 정부는 대구를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하였으나, 사고 직후 대구광역시와 지하철 종사자들이 사고를 축소·은폐하고, 현장을 훼손하는 등 부실한 대응으로 피해가 확대된 것으로 밝혀져 더 큰 충격을 주었다. 이로 인해 방화범과 지하철 관련자 8명이 구속 기소되었고, 방화범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이 사고로 지하철 관련기관 사이의 공조체제 구축, 사고현장 탐색 및 복구, 훼손된 시신의 개인식별, 유족지원 등 대형참사와 집단사망에 따른 각 과정의 체계화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유영철연쇄살인사건
- 30대 중반의 범인 유영철이 연쇄적으로 21명을 살해한 사건.
일시 : 2003. 09. ~ 2004. 07.
고등학교 2학년 때 절도사건으로 소년원에 수감된 이래, 총 14차례의 특수절도 및 성폭력 등의 혐의로 11년을 교도소에서 생활한 30대 중반의 남성 유영철이 2003년 9월부터 2004년 7월까지 총 21명을 살해한 엽기적인 연쇄살인사건이다.
유영철은 1991년 안마사와 결혼하였으나, 2002년 5월 무렵 부인이 이혼소송을 제기해 일방적으로 이혼을 당한 뒤부터 여성 혐오증을 보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3년부터 1995년까지는 간질 증세로 병원에서 진료를 받았고, 2003년 11월에는 전과자·이혼남이라는 사실이 알려져 교제 중이던 여성으로부터 절교를 당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1990년대 중반부터 막연한 복수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것이 연쇄살인의 계기가 된 것으로 전문가들은 추정하고 있다. 첫 살인은 2003년 9월 서울특별시 강남구 신사동(新沙洞)의 단독주택에서 행해진 대학교 명예교수 부부 살인사건이다. 이후 2004년 7월까지 총 21명을 잇달아 살해하였는데, 공식적으로 확인된 숫자만 21명이다. 유영철 자신은 5명의 여성을 더 살해했다고 주장하는데, 2004년 8월 현재까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살해 대상은 주로 부유층 노인과 여성으로, 범행의 주요 특징은 다음과 같다. 범행 수법이 과감하면서도 치밀해 거의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도구는 자신이 직접 만든 망치나 칼 등을 이용하였고, 증거를 없애기 위해 일부러 불을 지르거나 시체를 토막 내 야산에 묻기도 하였다. 또 피해자의 신원을 알지 못하도록 살해한 여성의 지문을 흉기로 도려 내기도 하는 등 갖가지 잔혹한 방법을 사용하였다.
정부 수립 이후 최대의 연쇄살인사건으로, 유영철은 2004년 7월 18일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어 같은 해 8월 13일 구속 기소되었는데, 죄목은 21명 살해, 공무원 자격 사칭, 강도 등의 혐의이다. 유영철 자신이 더 살해했다고 주장하는 5명에 대해서는 계속 수사가 진행 중이다.
2004年
노무현대통령탄핵사태
- 2004년 3월 12일 야당 국회의원 193명의 찬성으로 가결되어 같은 해 5월 14일 헌법재판소에서 기각된 대통령 탄핵사태.
일시 : 2004. 03. 12.
→ 2004년 1월 5일 새천년민주당의 조순형(趙舜衡) 대표가 노무현 대통령 탄핵을 언급하면서 본격화된 탄핵은, 같은 해 3월 5일 대통령이 선거중립의무 위반과 측근비리 등에 사과하고 재발방지를 하지 않을 경우, 새천년민주당은 탄핵소추안을 발의하겠다는 특별기자회견을 하였다.
대통령이 사과를 거부하자, 3월 9일 한나라당과 새천년민주당이 공동으로 탄핵소추안을 국회에 제출하고, 여당인 열린우리당은 탄핵저지를 위한 국회 본회의장 농성에 들어갔다. 3월 11일 오후 탄핵소추안이 처음으로 국회에 상정되었으나, 열린우리당의 물리적 저지로 무산되었다.
3월 12일 새벽 한나라당 의원들이 본회의장에 진입해 여야 의원들의 대치 상황이 이어지는 가운데, 오전 11시 5분쯤 박관용(朴寬用) 국회의장이 국회 경위들과 함께 본회의장에 들어와 경호권을 발동하고 열린우리당 의원들의 물리적 저지를 막았다. 이어 의장석에서 농성 중이던 여당 의원들을 차례로 끌어내고, 곧바로 탄핵소추안을 상정해 제안설명도 유인물로 대체한 채 무기명 투표에 들어갔다.
11시 55분 한나라당·새천년민주당·자유민주연합 등 투표에 참석한 195명의 야당 의원들 가운데 193명의 찬성으로 탄핵소추안이 기습적으로 가결된 뒤, 헌법재판소에 소추의결서가 접수되었다.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의 탄핵소추안 가결과 동시에 야당에 대한 전국민적인 질타가 쏟아졌고, 전국 각지에서 탄핵에 반대하는 촛불시위가 잇따랐다. 각종 시민단체들은 탄핵소추안 가결을 야 3당의 쿠데타, 3·12쿠데타로 규정하고 탄핵안 철회운동에 돌입하였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과 대한변호사협회 등 변호사 단체들도 탄핵철회 촉구 결의문을 채택하는 등 전국이 탄핵사태로 들끓었다.
탄핵안 가결에 대한 국민적인 분노는 4월 15일 치러진 제17대 국회의원총선거에까지 이어져 열린우리당이 과반이 넘는 152석을 차지하고, 제1당이던 한나라당은 121석밖에 얻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다. 제2당이던 새천년민주당은 9석, 자유민주연합은 4석을 얻었다.
탄핵의결서가 헌법재판소에 접수된 뒤, 평균 주 2회씩 7번의 공개변론과 10회에 가까운 평의를 개최하는 등 집중적인 심리가 진행되었다. 대통령에 대한 증인신문은 기각되었고, 4월 30일 최후 변론이 종결된 뒤 헌법재판소는 2주일 동안의 집중 평의를 거쳐 결정문 작성에 들어갔다. 5월 14일 마침내 헌법재판소가 탄핵소추안 기각 결정을 내림으로써 두 달 동안 계속된 대통령의 권한정지는 자동적으로 해소되고, 탄핵사태는 종결되었다.
北룡천역폭발사고
- 평안북도 용천군 용천역에서 일어난 열차폭발사건.
일시 : 2004. 04. 22.
→ 2004년 4월 22일 평안북도 용천군 용천역에서 질산암모늄을 실은 화물차량과 유조차량 교체작업을 하던 중에 일어난 열차충돌로, 전철에 전기를 공급하는 고압전선이 끊어져 유류수송열차 위로 떨어지면서 나온 불꽃이 열차에 옮겨 붙어 대규모 폭발사고가 발생하였다.
용천은 철도와 차량, 해상운수를 갖춘 북한 서북지역 교통의 요지로 신의주에서 15㎞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용천역은 동쪽의 피현군(枇峴郡) 백마노동자구에 있는 정유공장(精油工場)인 봉화화학공장에서 정제된 석유를 실은 수송열차가 지나는 역이다.
용천역 열차폭발사고로 철로가 훼손되고 용천역사를 비롯해 역 부근의 학교와 관공서, 상가건물, 민가가 크게 부서져 폐허가 되었다. 가옥 1,850여 채가 완전히 붕괴되었고, 6,300여 채의 가옥은 부분적 피해를 입었으며 8,000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하였다.
사망자수는 150여 명, 부상자수는 1,300여 명에 이르는데 특히 어린 학생 피해자가 많았다. 대한적십자사와 대북지원 민간단체에서 북한동포를 돕기 위한 구호품을 보냈으며, 국제기구 등에서도 피해 복구를 지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