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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르키예5 - 셀주크 투르크의 분파로 아나톨리아에 세워진 룸술탄국!
룸 술탄국은 오늘날 튀르키예가 소재한 아나톨리아(소아시아) 지역에서 1077년 ~ 1308년까지 존속한
이슬람 왕조니 룸(روم) 은 아랍어와 페르시아어로 로마라는 뜻으로... 동로마 비잔틴 제국의 핵심
영역이었던 아나톨리아에 세운 나라이기 때문에 지방 이름과 나라 이름을 그대로 룸이라고 하였습니다.
셀주크 제국에서 갈라져 나온 왕족이 세운 나라 룸 셀주크라고 하며, 본가 셀주크 왕조와 마찬가지로
튀르크계 유목민이 시초이지만, 페르시아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으니 현대 튀르키예어로는
아나톨리아의 셀추크 일족의 왕국이라는 의미의 아나돌루 셀추클루 데블레티나 룸 술탄국(Rum
Sultanlığı) 터키에서 셀주크 왕조 시대라는 튀르키예 셀축룰라르(Türkiye Selçukluları)등이 쓰입니다.
1. 룸술탄국 초창기(1077 ~ 1095)
1071년 동로마 제국의 황제 로마노스 4세가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셀주크 투르크에 패배하니 그 전
부터 소아시아 동부를 왕래하던 튀르크족은 군사적 공백과 로마 내부 분열을 기회로 본격적으로
아나톨리아 동부로 몰려들기 시작해 이후 튀르크족은 아나톨리아를 사실상 장악하다시피 했습니다.
셀주크 제국 왕족인 쿠탈므시의 아들 쉴레이만이 1075년 아나톨리아 서부의 니케아를 동로마
제국에서 빼았고, 2년후 1077년에 본국인 셀주크 제국으로 부터 독립하게 되니, 룸 술탄국
이라고 부르는 튀르크 정치체의 시작점으로 이 시기에 니케아가 이즈니크(İznik) 로 이름
이 바뀌었는데 다른 터키 도시들도 그렇지만 그리스어 발음을 투르크식에 맞게 고친 것입니다.
다만 초창기의 룸 술탄국은 애매한 정체성과 독특한 외교관계를 가진 불안정한 국가였으니
우선 쉴레이만 1세는 '샤' 를 칭했을 지언정 '술탄' 을 칭하지는 않았으며 게다가
셀주크 술탄 알프 아르슬란과의 계승 전쟁에서 패배한 쿠탈므쉬의 아들이다 보니
본가 혹은 본국이라 할수 있는 이란 및 이라크의 셀주크 제국의 궁정과 사이가 나빴습니다.
룸 술탄국 내부에는 피정복민인 비잔틴-로마인, 아르메니아인, 유대인들이 다수였고 권력의 근간
인 튀르크-무슬림인들은 이방인인데다가 소수였으며 기독교인 정교회를 믿는 튀르크인에
이교도와 통혼하는 사람도 많았으며 튀르크 엘리트들이 동로마 제국에 투항했으니 룸 술탄국은
셀주크-튀르크 제국의 일원으로 볼 수는 있어도 셀주크 제국(帝國)으로 포함시키기는 어렵습니다.
특히 쉴레이만 1세는 적국 동로마 제국의 황제 니키포로스 3세-알렉시오스 1세와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는데, 때문에 니케아의 튀르크 군주를 로마 황제의 반독립적인 봉신-동맹 혹은 두루
뭉술하게 '친구', '대리인' 으로 보기도 하니 이러한 독특한 관계 덕에 로마 황제는 기존 제국령
이었던 룸령 아나톨리아에 관리를 파견하고 유목민을 통제하여 제국 경제권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동로마 비잔틴 제국은 유사시에 튀르크군을 지원받을 수도 있었다는데, 불안정
하고 두 제국 사이에 끼인 국가였던 룸 술탄국 역시 동로마 제국과의 협력을
통해 살아남을 수 있었으니 셀주크 제국의 장군 보잔이 니케아를 포위하자
동로마(비잔틴)가 니케아의 샤 아불 카심을 도와 포위를 이겨내게 협조하기도 했습니다.
1086년 쉴레이만샤가 시리아에서 대셀주크와 전투중에 사망하자 룸 술탄국은 매우 불안정해졌으니
아들 클르츠 아르슬란은 셀주크 제국의 포로가 되었고, 니케아에는 로마 황제와 적대적인
비혈연 후계자가 들어섰으며 셀주크 왕족인 쉴레이만의 카리스마도, 원주인인 로마 황제의
빌려온 권위도 없게 된 아나톨리아는 유목민과 튀르크 족장들이 날뛰니 대단히 혼란스러워졌습니다.
협력관계였던 동로마 제국도 페체네그와 전쟁으로 국력이 한계에 달하자 이제는 이스파한
(이란)의 셀주크 술탄 말리크 샤와 협력하기 시작했으니 적대적인 두 제국 사이에서
소멸할뻔 했던 룸 술탄국은 1092년 말리크 샤가 죽어 셀주크 제국이 혼란스러워지고,
쉴레이만의 아들 클르츠 아르슬란이 풀려나 니케아로 돌아오면서 간신히 살아남게 됩니다.
2. 십자군 시대와 동로마 제국의 역습(1095 ~ 1180)
클르츠 아르슬란은 아버지 쉴레이만샤 처럼 동로마 황제와 협력하지 않고 반대로 적대했는데,
동로마 비잔틴 황제 알렉시오스 1세는 아나톨리아 수복 여론이 높아지는 와중에 자신의
지위까지 불안정해지자 국력이 부족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교황과 짜고 서유럽 세력을
불러들이니 바야흐로 십자군 전쟁의 시작이었고 최초로 공격을 받은건 룸 술탄국이었습니다.
제후들의 십자군에 앞서 은자 피에르의 민중 십자군은 1096년 4월 쾰른에 모인게 5만명에 달했
는데... 돈이 없으니 헝가리와 세르비아와 그리스등 비잔틴의 기독교 국가 도시들을 약탈하고
도둑질로 간신히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해 아시아로 넘어갔으나 미리 식량이나 군자금을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 약탈에 열중하던 중에 니케아 근교에서 셀주크 투르크군에 전멸당합니다.
유럽 침략군이 별거 아니라 생각해 안심한 룸셀주크국 클르츠 아르슬란은 술탄은 다음
해에 동쪽에 위치한 동족인 셀주크 투르크의 다니멘슈드를 공격해 전쟁중이었는데
1097년 5월에 프랑스와 독일 그리고 이탈리아 제후십자군은 콘스탄티노플에서
바다를 건너 소아시아를 침략해서는 룸 셀주크국의 수도 니케아(이즈닉)를 포위 합니다.
술탄이 달려왔을 때 수도는 포위된 상태였는데 예전에 비잔틴 제국이 건설한 니케아성은
길이 5km 성벽과 250개 망루에 서쪽에 있는 아스카니오스 호수는 천연 해자였으니
십자군과 비잔틴군은 맹공을 퍼부었지만 함락하지 못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민족
침입을 막으려고 건설한 동로마의 성벽이 건축한 주인인 비잔틴 황제의 접근을 막습니다?
1097년 5월 21일 룸 술탄은 남쪽 레몽 4세의 십자군을 공격했으나 응원군을 끌고 나온
플랑드르의 로베르 2세 부대와 합심한 중무장한 십자군 군대에 격퇴되니 훗날을
생각해서 셀주크 기마대를 보존하기 위해 군대를 퇴각 시키는데 니케아성의 투르크
군은 호수를 통해 식량을 공급받으며 한달을 버티다가 결국 비잔틴황제에게 항복합니다.
알렉시우스 1세 황제는 도시를 십자군이 점령하도록 놔두지 않았으니, 도시를 점령하는 날에는
원래 동로마제국 소유였던 니케아성을 십자군이 철저히 약탈하고 파괴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니케아(이즈닉) 시민들은 한세대 전만해도 비잔틴 황제의 백성들이었고 대다수가 기독교라는
사실은 피에 굶주리고 약탈에 눈이 먼 십자군에게는 사소한 문제일 것이라, 룸 셀주크 술탄
과 알렉시우스 1세 황제 간에 은밀한 물밑 협상을 통해 서로 최선의 결과를 얻어낸 것입니다.
젊은 술탄은 냉철한 판단을 보여주었으니 니케아(이즈닉)가 룸셀주크국 수도이긴 하지만
기마민족인 투르크족의 권력은 도시가 아니라 투르크 기마 전사들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생각했으니 6월 19일 제후 십자군들이 전리품을 약탈할 기대에 들떠
니케아 성벽에 도달 했을 때 세상에나??? 그들이 발견한건 "비잔틴 제국의 깃발" 이라?
니케아 공성전이 끝난 1097년 6월 26일 십자군은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 터키 내륙
으로 진격하는데 아나톨리아 고원지대는 구릉지라 투르크군이 매복하기 좋지만,
성지까지 가려면 어쩔수 없이 소아시아를 통과해야 하는지라 십자군은 현지에서
식량을 조달하는데 돈이 있으면 구입했고..... 없으면 별수 없는지라 현지에서 약탈합니다.
십자군은 규모가 컸기 때문에 식량을 콘스탄티노플에서 보급해오니 거리가 멀어지자 문제
가 커지는데 전위대가 먼저 떠나고.... 후일 예루살렘왕이 되는 고드프루아와 레몽 4세
등은 본진으로 출발하는데 남이탈리아 풀리아의 노르만족 보에몽이 이끄는 전위대가
도릴라이온을 지날때 클르츠 아르슬란은 적이 생각하는 것 보다도 대규모로 습격해 옵니다.
룸 셀주크국 술탄 클르츠 아르슬란은 셀주크 동족이자 적인 다니멘슈드를 끌여들였으니 다니멘슈드도
기독교 군대가 룸 셀주크국을 점령한 후에는 자신도 공격할것이니... 카파도키아의 하산등 동맹국
들도 끌여들여 30,000 연합군은 1097년 7월 1일 새벽에 1만명 십자군 전위대를 공격하는데
보에몽은 비잔틴제국과 전쟁과 아풀리아계승 전쟁을 통한 전투 능력과 위기관리 능력은 대단했습니다.
보에몽은 말에 탄채 산발적인 반격을 하는 기사들을 말에서 내리게해 전열을 유지하고 공격
을 막으라고 지시하니 보병과 비전투원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갑옷으로 중무장된
기사들이 앞에서 방패와 검으로 버티고 있으면 가벼운 갑옷을 입은 투르크 경기병들은
뚫고 들어오지 못하니 십자군을 포위한 기마 궁병들은 활을 쏘면서 공격을 되풀이 합니다.
하지만 정오쯤 고드프루아가 달려오고 레몽 4세의 기사들이 투르크 부대를 측면에서 기습하자
전세는 역전되고 투르크군이 황급히 도망가는 바람에 많은 전리품이 십자군에게 남겨졌으니
뜻하지 않은 횡재를 한 십자군 은 “신께서 너희를 부자로 만드실 것이다!” 라고 외칩니다!
예루살렘 탈환을 위한 십자군전쟁에 참가한 기사들은 신앙심 외에 물욕도 대단했던 것이라?
그러나 클르츠 아르슬란은 초토화 작전을 수행해 우물 하나, 곡식 한톨 남기기를 거부 했으니
십자군은 병사와 말들이 기아와 갈증으로 인해 고통받고 사망했으며 고통스런 행군은
6주간이나 이어진후 룸 투르크의 2번째 수도 콘야에 도달하여 식수와 식량을 보충하고는
동남쪽 아르메니아인 영토를 통해 안티오키아를 거쳐 팔레스타인과 예루살렘 으로 진군합니다.
1차 십자군이 통과한 이후 3번째 수도인 이코니온에 천도한 룸 술탄국은 십자군 후발대를 격파해
가며 살아남았는데 십자군이 통과한 공백을 차지하기 위해 동로마 제국과 경쟁하여 잠시동안
우세함을 보였으나, 요새화 전략으로 일관하는 제국을 아나톨리아에서 완전히 몰아내지 못합니다.
그리고 국력을 추스른 동로마 비잔틴군이 야전을 걸어온 1117년의 필로밀리온 전투에서 패배한
룸 술찬 클르츠 아르슬란은 이후 요안니스 2세 시절의 동로마 제국에 대해서는 수세를 취하며
중부 아나톨리아에서 간신히 국력을 수습하게 되는데 튀르크인들은 중세 튀르크어를 썼지만,
르네 그루세에 따르면 수도 코냐의 궁정에서 공식적으로 쓰는 언어는 페르시아어 였다고 합니다.
1차 십자군은 셀주크 수장들이 지키는 안티오키아성 공방전을 1년 가까이 수행하면서
참으로 악전고투 끝에 투르크족들이 서로 분열한 덕으로 간신히 함락하고는
예루살렘성을 공격해 수복해 중동에 예루살렘왕국등 5개의 기독교왕국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기쁨도 잠시 1144년 최북단에 자리한 기독교 에데사 백국이 이슬람 모술 태수 장기
에게 함락되자..... 놀란 유럽에서는 교황 에우제니우스의 제창으로 1145년에 프랑스왕
루이 7세와 신성로마제국(독일)황제 콘라트 3세 독일왕이 이끄는 2차 십자군이 일어납니다.
동로마 황제 마누일 1세는 2차 십자군의 결성이 룸 술탄국과 맺은 평화관계를 깨뜨리고 신성로마
제국 - 교황 - 베네치아를 잇는 대 노르만 동맹을 해칠 것이라 믿어 불만스러워 했으며 십자군
이 점령한 영토를 반환하지 않을 것은 1차 십자군의 전례를 보아 자명한지라..... 투르크족과
정전 협정을 맺었는데 이 때문에 서유럽은 그리스도의 적과 동로마가 거래를 했다고 분노합니다.
콘라트 3세의 독일군은 1147년 9월에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했는데 동로마 제국은 독일군의 약탈에
못마땅했지만 관계를 망칠 생각은 없어 접촉을 시도했지만 콘라트 3세는 냉담한 반응을 보였고
콘스탄티노플 교외를 계속 약탈하니 견디다 못한 마누엘 1세는 이들을 소아시아로 보내주자
콘라트 3세는 프랑스 십자군을 기다리지않고 1차 십자군 이동 경로를 따라 안티오키아로 향합니다.
독일 십자군은 1차 십자군 처럼 도릴라이움 에서 룸 술탄국 투르크 군대와 조우했는데 그때와는
달리 투르크 군대는 십자군들을 무참하게 살육했고 2만명 중에 1만 8천을 잃으며 전멸당한
콘라트 3세는 살아남은 기병대와 함께 니케아로 간신히 달아나서 프랑스 군대를 기다렸습니다.
한편 루이 7세의 프랑스 군대는 1147년 10월에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했는데 시칠리아왕
루지에로의 제안을 받아들여 동로마 비잔틴제국을 공격해야 한다는 주장이 계속 제기
되었지만 루이 7세는 기독교 제국을 공격하는 일을 거부하자 마누엘 1세는 루이
7세와 엘레오노르를 초대하여 극진히 대접했고 그후 왕과 왕비는 소아시아로 향합니다.
니케아에서 콘라트 3세와 합류한 루이 7세는 독일군이 극소수만 남았으니 이제 원정의 성패가 프랑스
군대에 달려있다는 것을 깨달았으니 콘라트 3세와 루이 7세는 룸 술탄국 셀주크 군대가 준동하는
위험한 아나톨리아 내륙 대신에 에게해와 지중해 연안 동로마 영토를 따라 행군하는데 비잔틴황제
가 뒤에서 투르크군과 밀약을 맺은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으며 배를 타고 팔레스타인으로 이동합니다.
그후 룸 술탄국은 마수드 1세와 클르츠 아르슬란 2세 시절에 서쪽의 동로마 비잔틴 제국과 동쪽의
투르크족 다니슈멘드 왕조 사이에서 끝끝내 수성에 성공하였고, 소아시아 내륙을 장악했으며
마누일 1세 시절의 동로마 제국이 서부 아나톨리아의 요새화를 대강 완료하고 중흥기를
달리자 국력차를 인정하고는 1161년에는 사실상의 봉신행세를 하는 등 와신상담의 시기를 보냅니다.
로마제국의 관심을 피해 약체화된 다니슈멘드를 공격해 세를 불린후, 1176년 미리오케팔론 전투에서
동로마 제국의 공세를 격퇴해 봉신 신세에서는 벗어났지만 국력차를 극복하지는 못해서 이어진
전쟁에서 패배하자 열세를 인정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필로밀리온 전투 이후 콤니노스 왕조 시대
의 룸 술탄국은 쉴레이만 1세 시절 보다 자주적이지만 정도가 다를뿐 로마 영향권내의 국가였습니다.
1176년 동로마군이 미리오케팔론에서 투르크에게 패배하면서 동로마 제국의 소아시아 회복은 허사로
돌아간지라 팔레스타인과 시리아에서 손을 떼는데 서유럽은 원조에 소극적이었으니 십자군국가들은
자력으로 난관을 극복했는데 살라딘은 1180년 투르크와 동맹을 맺고 1183년에 알레포를 점령합니다
3. 전성기 시대(1180 ~ 1225)
소아시아(아나톨리아) 정세는 1180년 마누일 대제의 사망으로 격변하기 시작하니 마누일 대제 사후
즉위한 무능한 동로마 황제들 덕분에 이슬람 이집트의 술탄 살라딘은 1180년 투르크와 동맹을
맺고 1183년에 알레포를 점령했으며 룸 술탄국도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에서 우세를 보이게 됩니다.
1187년 7월 히틴의 뿔 전투 패배로 십자군 예루살렘 왕국이 멸망하고 성지 예루살렘이 분열된 수니파
와 시아파의 통합에 성공한 이슬람 군주 살라딘에게 점령당하자 성지탈환을 위해 제3차 십자군
이 결성되었으니 신성 로마 제국의 "붉은 수염왕 프리드리히 1세와 "사자심왕" 이라 불리는
잉글랜드 국왕 리처드 1세에 프랑스 카페 왕조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존엄왕" 필리프 2세 입니다.
1189년 5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붉은 수염 프리드리히는 레겐스부르크에서 검을 치켜
세우자 4,000명의 기사와 15,000의 병사들이 황제의 이름을 연호했고 전 유럽이
통일된 듯한 장관이었으니 남독일의 귀족 대부분이 함께했고 역대 십자군을 통틀어
가장 거대한 규모로 기병 수천명에 보병 수만명으로 무려 10만에 달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배로 팔레스티나로 갔지만 독일군은 숫자가 많아 배를 구할수 없으니 육로로 터키
를 통과하는데 제1차 십자군 고드프루아가 통과한 길이고 2차 십자군 프리드리히 자신이 아는 길이라
택했는데 살라딘과 은밀히 동맹을 맺은 비잔틴 황제 이사키오스 2세가 십자군 진군에 비협조적이자
격노한 프리드리히는 "방해를 멈추지 않으면 동로마제국을 먼저 치겠다!" 며 아드리아노플을 점령합니다.
1190년 4월 25일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가 아나톨리아에 상륙하자 위협을 느낀 클르츠
아르슬란 2세는 5월 18일 독일 십자군을 습격했지만 독일 십자군은 투르크군
을 가볍게 쳐부수고 수도 이코니움을 점령하고는 남진해 아르메니아로 접어들었습니다.
하지만 1190년 6월 10일 노황제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가 살레프강을 건너던 중에 익사하고
말았으니 기세 등등하던 독일 십자군은 황당하고 허무한 종말을 맞이했으니 독일 십자군
의 대부분은 고향으로 돌아갔고 일부만이 프리드리히 공작과 함께 진군했으나 그 수는
극소수에 불과했으니..... 갑작스런 죽음 때문에 십자군의 전력은 크게 약화되고 말았습니다.
황제가 죽었다고 하느님의 성전에 참가한 십자군이 해산해 고향으로 돌아간다? 이는 2가지
이유 때문이니, 전쟁은 돈으로 하는데 돈을 댈 사람이 사라져버린게 첫째 이유입니다?
그리고 독일황제는 아들로 세습되는게 아니고 선제후들이 투표로 선출하는 것이니.....
누가 다음 황제로 뽑힐지 모르는지라, 빨리 돌아가서 선거 결과를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룸 술탄국은 1190년에 제3차 십자군 원정때 초반에 신성로마제국군에 패퇴하였지만 금방 국력을
회복해 1202년에 살투크 왕조를 멸망시켰으며 1204년 동로마 제국이 베네치아의 간계에 빠진
제4차 십자군이 이슬람이 아닌 기독교 국가를 공격하니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어 망해버립니다.
이교도를 정복하고 예루살렘을 수복해야할 십자군이 일탈해 버린것이니, 룸 술탄국은 로마 영역
으로 확장하기 시작해 1207년 안탈리아를 점령하여 지중해를 통해 이집트와 교역할수 있게
되었고, 라틴제국과 손잡은 후 아나톨리아 서부에 자리잡은 니케아 제국을 멸망시키려 했습니다.
그러나 1211년 안티오키아 전투에서 니케아 제국의 테오도로스 1세에게 룸 술탄 케이휘스
레브 1세가 전사하는 참패를 당하고 니케아제국 방면으로의 진출은 좌절되었으나, 대신
흑해의 패권을 장악하고 있던 트라페준타 제국을 공격하여 1214년 시노페를 점령합니다.
룸 술탄국은 트라페준타 제국을 거의 복속시킨지라 이때 룸 술탄국의 국력은 절정에 달햇으니
프리기아에서 아르메니아에 이르는 땅을 지배하였고 크림 반도에서도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4. 몽골 제국의 침공과 속국화(1243 ~)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인 13세기 중반엔 셀주크 투르크는 당시 절대 강자이던
몽골제국의 침략을 받아 세력이 크게 약화되고 이는 동로마 망명 세력들이 한숨
돌리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게 해 주었는데 1242년 몽골 제국은 에르주룸을
점령하였고, 룸 술탄국도 1243년 쾨세다으 전투에서 대패하고는 몽골의 속국이 됩니다.
몽골 제국의 분열 이후에는 일 칸국(이란)의 역대 칸들이 아나톨리아의 룸 술탄국에
대해 종주권을 행사했는데..... 이런 과정에서 룸 술탄국 각지의 가지(사령관)와
토후들이 사실상 독립함에 따라 내부 분열로 룸 술탄국은 점점 위상을 잃게 됩니다.
5. 룸 술탄국의 소멸
룸 술탄국이 유명무실해지는 와중에 아나톨리아 동남부인 킬리키아의 아르메니아 왕국은 룸 술탄국
의 일부 영토를 점령했으며 1270년대에는 잠시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의 지배를 받기도 했는데
그 와중에 고질적인 튀르크족의 내분이 심화되어 왕족 끼리 죽고 죽이는 일이 비일비재 했습니다.
1277년에 이집트 맘룩왕조의 술탄 바이바르스는 몽골의 동맹인 룸 셀주크를 응징하기
위해 4월 할랍(알레포)을 거져 엘비스탄 전투에서 몽골군을 격파하였고
카이세리를 점령한 후 귀환하였으니 이로써 룸 셀주크는 사실상 붕괴하기 시작합니다.
그 와중에 각지의 토후들은 룸 술탄국의 통제를 따르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
했으니..... 그야세틴 케이휘스레브 3세(1265 ~ 1284 재위)의 치세 말에
술탄이 다스릴 수 있는 영역은 세 번째 수도였던 이코니온 인근에 불과했습니다.
중간에 이란의 몽골 일 칸국이 개입하여 쿠데타를 일으킨 술탄을 내치고 자신
들이 원하는 술탄을 복위시키기도 하였으며 그후 룸 술탄국의 마지막 술탄이
죽자 일 칸국은 신임 술탄을 임명하지 않고 총독을 파견해 직접 통치를 합니다.
룸 술탄국의 해체는 숙적인 동로마 제국 입장에서도 달가운 일이 아니었으니 튀르크인들이 아나톨리아
에 정착한지 이미 오랜 세월이 지났고, 기동력을 살려 약탈을 일삼는 골칫거리인 튀르크 유목민들을
통제하는 룸 술탄국은 동쪽 완충지대이자 외교대상으로서 중요한 가치가 있었으니 유럽 영토에도
여력을 할애해야 했던 동로마 비잔틴 제국 입장에서는 룸 술탄국이 존재하는 것이 더 나았던 것입니다.
결국 룸 술탄국은 아나톨리아 베이(사령관)국으로 분할되어 역사에서 사라지고, 13세기 말에 동로마
제국과 맞닿은 북서부 국경에 가까운 비티니아 지방에 위치한 가지(추장) 군후국의 족장
오스만 1세의 세력이 강성해지기 시작하니.... 바야흐로 "오스만 투르크 제국" 이 시작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