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진상고객이 되기로 작정한 사회
가톨릭 일꾼 기사; 2025.02.17 11:00
이송희일 칼럼
우리는 정치인의 음주 운전에는 관대하다. 지난 총선 후보자 697명 중 8.1%인 57명이 음주운전 이력이 있다. 국힘은 22명, 민주당은 21명. 하지만 이중에 음주운전 이력으로 단죄받은 이는 아무도 없다. 우리는 정치인에게는 관대하다. 사실 우리는 정치인의 도덕성을 중요하게 소비하지 않는다. 그들이 음주운전을 하든, 재산을 어떻게 비도덕적으로 편취하든, 갖은 편법을 통해 어떻게 자식 공부를 시키든, 심지어 어떤 사법적 처벌을 받든, 자신의 확증 편향의 세계를 충족시켜주면 된다. 적을 이겨 승리를 안겨줄 만한 대상을 구매하고 소비하는 것이다. 정치가 양극화된 세계에서, 적과 아군만 있는 세계에서 정치인의 도덕성은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심지어 우리의 공동체를 어떻게 잘 건사할 것인지를 질문하는 정치도 그닥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이기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사회는 어떻게 지속되는가? 정치인들에게조차 정치적인 것과 도덕적인 것에 대한 심문을 면제하는 사회는 과연 어떻게 유지되는가? 도대체 어떻게 이 공백을 메꾸는가? 사회적 관계 전체를 도덕화하는 것이다. 사회 모든 구석구석, 도덕의 과잉이 야기되는 것이다. 그 덕에 매일매일 도덕의 카니발이 벌어진다.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우우 몰려가 자신의 도덕적 공분을 투사하며 정의감을 불태운다. 오픈런처럼 달려가 자신의 정의감과 감정과잉을 실컷 투사하고, 다른 사건으로 또다시 우르르 몰려가 그다음 사냥감을 물색한다. 사건이 발생한 구조의 문제를 들여다보거나, 어느 한 사람 낙오되지 않는 공동체적 해법을 모색하는 게 아니라 '가해자/피해자'로 납작해진 드라마를 쓰고 복수 서사를 소비한다. 캔슬 컬처와 사적 제재로 가해자를 활활 태운다.
이 과정에서 '실수'라는 개념은 사라진다. 누구나 실수를 한다는 이야기는 도무지 허용되지 않는다. 그 실수를 우리 공동체가 어떻게 껴안을지에 대한 이야기, 즉 정치의 복원도 상상하지 않는다. 그저 가해자에 대한 단호하고 맹렬한 도덕적 단죄가 필요할 뿐이다. 그것이 곧 망가진 사회의 공백을 보충하는 방법으로 표상되기 때문이다. 그 카니발에 참여함으로써 자신은 결백하고, 붕괴된 공동체에 관여하지 않았다는 도덕적 알리바이를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따라서 우리는 서로를 감시하고 자신의 도덕성을 과시하며, 매 사건이 터질 때마다 기꺼이 도덕적 투사가 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특히 사회적 관계가 '서비스와 재화의 판매자와 구매자'로 상품화될수록 끊임없이 서로에게 도덕성을 요구한다. 각자 모두가 진상 고객이 되는 것이다. 도덕적 흠결이 발생하면 즉각 반품이다.
대표적인 소비 대상이 연예인이다. 마약, 음주운전 등 사건이 터지면 언론과 대중들은 끝내 그 대상을 퇴출시킬 때까지 악마화하고 비난을 멈추지 않는다. 물고 뜯고 즐기는 도덕의 축제가 벌어진다. 더군다나 이 축제는 성차별적이기까지 하다. 음주운전을 한 남자 연예인보다 여자 연예인에게 더 가혹하다. 제발 이제 그만하면 안 되겠냐며 하소연하던 여자 배우에게 돌팔매질이 멈추지 않았다.
정치가 실종되고 공동체가 형해화된 세계에서의 도덕주의는 그렇게 붕괴된 사회의 폐허에서 자라는 독버섯과 같다. 안간힘이기도 하지만 치명적 독을 가지고 있다. 그 덕에 우리는 재능 많은 연예인들을 계속 잃고 있다. 또 무수히 많은 이들이 댓글에 치이고 있다.
나는 실수할 수 있지만 당신들은 절대 실수하면 안 된다는 세계는 얼마나 이기적이고 잔인한가.
이송희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