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부안에서 태어난 한 사람의 이름이 있다. 독립운동 역사책 어디에서도 앞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이름. 봉오동전투를 다룬 영화에도 나오지 않고, 청산리대첩을 기념하는 비석 어디에도 새겨지지 않은 이름.
고평(高平, 본명 高高鑽, 1884~?).
그는 잊혀졌다. 1950년 한국전쟁 때 납북된 뒤, 그냥 사라졌다. 정부는 그가 죽고도 한참 지난 1992년에야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직계 후손도 없었다. 앞장선 사람도 없었다. 전북 출신이면서도 전북 학계에서조차 거의 언급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가 영웅담으로 기억하는 장면들 바로 옆에 그가 서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고평은 1884년 전라북도 부안군 진서면 운호리에서 태어났다. 장흥 고씨 가문.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충남 금산전투에서 순절한 고경명(高敬命)의 후손이다. 8세에 전남 담양 창평의 고씨 종가로 양자로 들어가 8년간 한학을 배웠다. 그 창평 종가는 의병장 고광순을 배출한 집안이었다. 어린 시절의 그 집에서, 일본군에 의한 의병들의 희생을 가까이서 목격했다. 그것이 뿌리였을 것이다.
서울로 올라간 그는 보광학교와 관립 법관양성소를 졸업했다. 춘천 지방법원 검사로 임명된 것이 1905년. 임용된 지 한 달 만에 사퇴했다. 이후 부안 내소사에서 불교철학을 공부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1910년 나라가 망했다. 그리고 1년 뒤인 1911년 7월, 대종교에 입교했다.
대종교는 단군 신앙을 기반으로 한 민족 고유의 종교였다. 나철이 교조이고, 서일·김교헌·김좌진·홍범도·이시영·신채호·박은식 등이 대종교와 연결돼 있었다. 단순한 종교 조직이 아니었다.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독립운동의 신경망을 이루고 있던 네트워크였다.
1913년 4월, 고평은 대종교 동도본사(東道本司)의 전강(典講) 직을 맡아 중국 길림성 왕청현으로 이주했다. 30세였다. 부모와 처자를 두고 낯선 땅으로 건너간 것이다. 이후 거의 10년을 그 땅에서 싸웠다.
1919년 3월 13일, 중국 연변 용정(龍井)에서 3만여 명의 한인들이 거리로 나왔다. 조선에서 3·1운동이 일어난 지 열흘 남짓 지난 때였다. 이것이 '용정 3·13 반일시위운동'이다. 연변 학계에서는 이를 북간도의 3·1운동이라 부른다.
이 시위는 저절로 폭발한 것이 아니었다. 2월 18일과 20일, 연길 도윤공서 외교과원 박동원의 집에서 독립운동가 33명이 모였다. 고평도 그 자리에 있었다. 이들은 간도 내 각 교회와 단체의 연합, 독립선언서 공표와 동시에 시위 개시, 용정촌을 집결지로 삼는다는 것을 결의했다. 일본 관헌에게 체포되는 상황이 되더라도 희생을 감수하고 독립선언을 추진하기로 했다. 그 자리에서 혈서로 이름을 쓰며 결사동맹을 맺었다. 광복단이 결성된 것도 바로 그날 밤이었다.
특히 일본 간도총영사관 분관의 내부 보고문서에는 "2월 17·18일경 위 박동원의 집에 모인 기독교도 구춘선·유찬희 등과 대종교도 고평·김영학 등 17명은 일대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때 이들이 논의한 내용 중 하나는 독립 후의 국가 형태였다. 전제군주제나 입헌군주제가 아닌 공화제를 채택해야 한다는 주장이 이 자리에서 나왔다. 3·1운동보다 먼저, 만주의 어느 집 마루에서 공화국을 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결의가 씨앗이 되어, 열흘 뒤 3만 명이 용정 거리를 가득 메웠다. 일제의 사주를 받은 중국 지방관헌의 발포로 13명이 숨지고 30여 명이 다쳤다. 중국 당국의 내부 보고문서에는 "그 간민들의 조수와 같은 광열은 막을 수 없는 형세"라는 말이 실려 있다. 독립선언서 낭독 뒤 "군중은 기뻐서 흐느끼고, 흐느끼면서 뛰며 태극기를 흔들었다"고 전해진다.
그해 1920년 봉오동전투가 있었다.
지금까지 그 전투는 주로 홍범도의 지휘, 최진동의 군무도독부, 안무의 국민회군이 연합한 대한북로독군부의 싸움으로 기억된다. 독립군 연합부대가 약 700명 규모로 모여 일본군 야스카와 대대를 상대로 대승을 거뒀다. 이것이 역사책에 실린 봉오동전투다. 그런데 그 연합이 어떻게 성사됐는지는 잘 다뤄지지 않는다.
일본 학자 사사 미츠아키(佐佐充昭)의 연구와 일본 외무성 문서 분석을 통해 드러난 사실이 있다. 1920년 3월 말, 의군단(義軍團) 참모 고평이 부하 이영근 등을 데리고 봉오동의 최진동 집을 찾아갔다. 목적은 최진동의 군무도독부,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안무의 국민회군 간의 협력과 연대를 성사시키는 것이었다. 당시 일본 영사관의 내부 보고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3월 25일 도독부 소재지 봉오동에 의군단 참모 고평은 이영근 등을 데리고 와서 협의한 사실이 있다."
이 협의로부터 두 달 뒤인 5월 말, 약 700명의 대규모 독립군 연합부대가 '대한북로독군부'라는 이름으로 결성됐다. 고평은 그 참모부장을 맡았다. 그리고 6월, 봉오동전투가 벌어졌다. 여러 독립군 부대가 연합해서 싸웠기 때문에 가능했던 승리였다. 그 연합의 씨앗을 심은 사람 중 하나가 고평이었다. 역사는 전투만 기억하고, 그 전투를 가능케 한 보이지 않는 연결의 작업은 잊어버린다.
청산리전투 역시 마찬가지다. 그해 10월 청산리 일대에서 김좌진·홍범도· 안무 연합부대가 일본군을 대파했다. 고평이 참모장을 맡았던 의군부 중부 부대는 그 직전인 8월 하순, 노야령 일대에서 일본군과 치열하게 교전했다. 이때 총무부장 최우익을 포함해 13명의 독립군이 전사했다. 그 교전이 사실상 청산리전투의 서전(序戰)이었다. 이후 살아남은 부대는 백두산 동북의 청산리 방면으로 이동해 본 전투에 참가했다. 고평도 그 흐름 속에 있었다.
청산리전투에서 독립군이 쓸 수 있었던 최신식 무기는 어디서 왔을까. 1920년 6월, 서일·계화가 이끈 무장경비대가 도수 부대 200명을 호위하며 러시아 연해주로 가서 무기를 운반해왔다. 그 조달 과정에 고평이 깊이 관여했다. 그는 대종교의 블라디보스토크 관리 책임자였다. 연해주 한인들과 대종교 세력을 연계하고, 무기 구입과 운반의 연결을 맡았다. 총알 하나하나가 누군가의 손을 거쳐야 전장에 도달한다. 그 손들 중 하나가 고평의 손이었다.
1919년부터 1923년까지, 그는 한 자리에 머물지 않았다. 의군부 참모장, 봉오동 연합부대 참모부장, 고려혁명군 참모장. 자유시사변 이후 다시 만주로 돌아와 1922년에는 만주와 연해주 독립운동 단체들의 통합을 위한 대표자 회의에서 비서장을 맡았다.
1923년에는 의열단장 김원봉과의 연계를 통해 항일무장투쟁 확대를 모색했다는 동아일보 기사가 있다. 1920년대 후반에는 신민부(新民府)에 가담해 북만주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 활동무대를 중국 관내로 옮겼다. 1936년 중국 하남성 방공구국연맹군 제2군단 사령부 최고 참의, 1937년 같은 연맹군 제1군단 사령부 참모장, 1939년 하북성 제3초비사령부 군법처장. 중국 국민당 계열 지방군의 참모장과 군법무관 자리를 거치며 한·중 연대 항일투쟁의 한 축을 담당했다.
1945년 4월, 어떤 "중대 사명"을 띠고 서울에 들어왔다. 그 중대 사명이 무엇인지는 여전히 확인되지 않는다. 8월 해방 후에는 대종교 간부로 활동하며 민족정신 재건에 나섰다. 1946년 2월, 서울 명동의 중국음식점 아서원(雅敍園, 지금의 롯데호텔 자리)에서 대종교 주요 인사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 사진에는 이시영·조성환·조완구 등 임시정부 요인들이 함께 서 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직후, 그는 반민특위 재판관이 되었다.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특별재판부 재판관으로 임명된 고평은 1948년 12월 7일 국회 본회의 선거에서 72표를 얻어 특별재판관으로 선출됐다. 이듬해 3월, 제2부 배석판사(재판관)로 결정돼 친일 반민족행위자들에 대한 심판에 참여했다. 그는 "법집행은 어디까지나 공정하고 엄격해야 한다. 절대로 어떤 선입견을 갖고 다루거나 감정이 앞서서는 절대로 안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그 반민특위는 결국 용두사미로 끝났다. 친일 세력과 이승만 대통령의 비협조와 방해로 반민특위의 활동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949년 6월 6일 특별경찰대가 강제 해산당하면서 반민특위는 사실상 기능을 잃었다. 반민특위가 기소한 221건 중 징역형 이상의 처벌을 선고받은 사람은 12명에 불과했다.
한 역사학자의 말을 빌리면, "친일 청산에 실패한 게 아니라 친일파 민족 반역자를 청산하자고 주장하던 민족적 양심을 가진 세력이 친일파한테 거꾸로 청산당했다." 고평은 그 거꾸로 청산당한 세력 속에 있었다. 이듬해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터졌다. 피난하지 못하고 서울에 남아있던 그는 북한군에 납북됐다. 당시 67세였다. 이후 기록은 없다.
독립운동의 역사는 총을 쏜 사람만의 역사가 아니다. 총을 쥘 손을 연결한 사람, 분열된 부대들 사이를 오가며 연합을 성사시킨 사람, 무기가 전장까지 닿도록 연결망을 유지한 사람 - 그런 역할들이 있었기에 전투가 가능했다.
고평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봉오동전투 직전 최진동과 홍범도, 안무의 부대를 연결하러 봉오동을 찾아간 그 발걸음이, 대한북로독군부 700명 연합부대의 출발점이 됐다. 연해주와 만주를 연결하며 무기 조달망을 유지했던 그의 역할이, 북로군정서가 최신식 무기로 청산리에서 싸울 수 있게 했다. 용정 3·13운동을 기획하는 모임 자리에서 독립 후의 국가는 공화제여야 한다고 주장했던 그가, 해방 후 반민특위 재판관으로 앉아 친일파를 심판하는 자리에까지 갔다.
그 생애는 하나로 이어진다. 임진왜란의 의병 전통을 물려받은 가문, 어릴 때 목격한 의병의 희생, 대종교라는 네트워크, 만주와 연해주를 넘나든 30년의 투쟁, 귀국 후 반민특위의 재판정. 그리고 납북.
전북 부안 상서면 노적리 일대에 장흥 고씨 일족이 아직 세거하고 있다고 한다. 오늘날 부안에서는 그 일대 고씨 일족을 노적리 고씨라 부른다. 그 마을에서 떠난 한 사람이, 만주 벌판에서 연해주 항구에서 중국 내지에서, 그리고 서울의 재판정에서 평생을 싸우다 사라졌다.
비석은 아직 세워지지 못했다. 생전에 그의 생질이 비문과 글씨를 받아두었다고 전해지지만, 그 비석은 찾을수가 없다. 어쩌면 그것이 가장 솔직한 상징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기억하지 않은 것들이 그만큼 많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