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요14:7)
이 말씀이 좀 어려운 문장입니다. 요한복음은 문장은 쉬우나 뜻이 어렵고
히브리서는 문장은 어려우나 뜻은 매우 쉽습니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완전히 동문서답입니다.
도마가 ‘주님이 가시는 그 장소와 그 방법을 내게 말씀해 주세요’ 하니까
주님이 ‘내가 길이다 진리다 생명이다’ 하시곤 자신을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하시고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면 하나님 아버지를 이 분이구나하고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전에 한 번 본 사람을 다시 소개받을 때 아, 그때 만났던 그 사람이네 하듯
그렇게 알아진다는 뜻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이해하면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겁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치시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를 우리에게 나타내십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아버지를 알게 됩니다. 길을 알면 목적지도 알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의 목적지입니다.
우리 신앙의 목적지는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신앙의 목적지가 이 땅에서 잘 살고
땅의 복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아버지께 나아가고 아버지의 나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둠에 있는 자들은 그리스도가 가시는 그 길을 알지 못합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요14:1) 이 말씀은 주님이 떠나신다고 하니까
마음에 근심이 되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지금 현재도 수많은 성도들이 주님이
가시는 길 곧 아버지께 나아가는 그 길과 목적지를 모르므로 요동하고 흔들리고 있습니다.
근심한다는 말은 요동한다는 말입니다. 진리를 모르면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따르는지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께 어떻게 가는지, 내 인생이 가는 길이
어딘지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신앙이 늘 요동합니다. 오락가락 합니다.
성도는 예배하는 길, 기도하는 길, 찬송하는 길, 말씀을 묵상하고 내 것으로
만드는 길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확실하게 정립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람의 말이나 글을 읽어보고 말을 들어보면, 예수 그리스도께로 가는
그 길을 알고 있나 모르고 있나 금방 알 수가 있습니다. 설교를 들어보고
기도를 들어보고 그 사람의 간증을 들어보면 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아버지를 찾아가는 방법을 알고 있다 모르고 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길을 모르는 사람일수록 말을 많이 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왜 그러느냐면 따발총처럼 쏘아서 아무거나 하나 맞아야 하니까 그렇겠지요?
그러나 그 길을 아는 사람은 그 길을 직통으로 갈 수 있도록 가르쳐 줍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아버지께 나아가는 이 길을 확실하게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나를 믿으라”는 말씀은
“하나님을 믿으려고 한다면 나를 믿으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면 아버지를 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14:3절에 “거처”(처소)란 말이 나옵니다.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나는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천국이라고 부르지 말고 성경에 나오는 대로
‘아버지 집’이라고 불렀으면 좋겠습니다. 2절의 거처가 바로 아버지 집입니다.
그런데 이 천국은 우리가 가는 건가요? 오는 건가요? 옵니다. 그래서 우리가
“나라가 임하시오며” 라고 기도합니다. 계21장에도 보면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옵니다. 신부가 신랑을 위하여 단장한 것처럼 내려옵니다(계21:2)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가 내려오는데 왜 우리는 들어간다고 표현하느냐?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찾는 자에게는 분명히 열린 문입니다.
천국이 우리에게 오는 것이지만 우리로서는 그곳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들어갑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에게 임하는 것인데 우리가 그를 구하고
찾고 두드려서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간다고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이 온다는 표현도 맞고, 천국에 간다는 표현도 맞는데 천국은 우리에게
임하시고, 우리는 힘써 그리로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거기서 서로 만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우리에게 임한 천국은 모르고 장차 갈 천국만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예수님이 천국이 가까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세례요한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3:2)고 외쳤습니다. 그 천국은 누구를 말씀하는가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하시는 천국은
바로 아버지 집입니다(마4:17) 그래서 세례요한의 증거는 예수 그리스도께 까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로 말미암아 우리를 그를 힙 입어 아버지께로 가는 것입니다.
율법과 선지자는 예수 그리스도께로 끝이 나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와
진리로 아버지께로 간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잘 알아야 됩니다.
그래야 아버지께로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임하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를 침노하게 되는 겁니다. 천국은
임하시고 우리는 들어가고 그 곳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만남이 있습니다.
하늘과 땅, 두 짝이 만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
수컷과 암컷이 한 짝이 된다는 말과 같은 의미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보실 때,
방법만 강구하지 마시고, 항상 원리를 생각하는 것이 좋습니다. 영의 세계에는
공간의 간격이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영의 세계는 차원이 있을 뿐 가고 오고하는
공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해도 하나님 나라와 이 땅의 나라가
서로 차원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 섞여 존재하고 있어도 상충이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육신 안에 있어도 그리스도의 영안에서 우리가 하나님 우편에
앉았다(엡2:6)고 말 할 수 있는 겁니다. 신학적으로는 그것을 좌소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계신 좌소는 우리의 심령도 될 수 있고, 이 우주만물도 될 수
있는데 우리의 혈과 육으로는 결코 그리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고전15:50)
예컨대 보통 하늘하면 어딘가요? 다들 머리 위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늘은 우리의 눈 밑에도 있습니다. 땅에서 1mm만 떠도 하늘입니다.
으레 하늘하면 우리는 당연히 위를 쳐다보는데 하늘은 우리의 눈 밑에도 있습니다.
땅 아니면 바로 하늘입니다. 그리고 지구 반대편의 하늘은 우리 발밑에 있습니다.
그런 것처럼 우리 관념에는 천국하면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진 어느 장소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세계는 어떤 공간의 세계가 아니라 차원의 세계입니다. 그렇지요?
우리가 혈과 육으로 이 땅에 속해 있을 수도 있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에
속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육신은 그 자리에 있으면서도... 이 말에 동의하십니까?
그게 바로 육신은 제자리에 가만 놔두고 거듭났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도 없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도 없다’(요3:3,5)고 말씀하셨습니다.
거기 니고데모 앞에 하나님 나라가 있지 않는가요? 바로 자기 앞에 있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분이 천국의 문이며 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하나이신 분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코앞에 있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도 없고, 코앞에 있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도 없단 말입니다.
거듭나지 않으면... 그래서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습니다.
이 비밀을 다 이해해야 됩니다. 그래서 처소(거처) 문제도 우리가 어디로 날아가면
거기에 우리의 처소(맨션)가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예수 그리스도 안,
성령님 안이 나의 거처(처소)라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여호와는 나의 방패, 여호와는 나의 처소,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라고 노래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자리에서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방패가 되시고, 산성이 되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상급과 방패는 여호와이시지만, 롯의 상급과 방패는 소돔과
고모라였습니다. 그런데 롯은 결국 몰 창피를 당하고 구원받는 사람의 대명사가 되었고,
아브라함은 육안으로는 보이지는 않지만 하나님이 그의 상급과 방패가 되셨습니다.
그게 바로 거처(처소)란 말입니다. 나를 비밀한 곳에 숨기신다 그 말씀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어떤 목사처럼 피난처에 간다고 하는 말을 헬리콥터를 타고 어디로 간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헬리콥터를 타고 간들 거기가 거긴데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재앙을 마지막 환난을 피할 그런 장소가 어디 있는가요? 그렇게 말하면 안 됩니다.
헬리콥터가 아니라 우주선을 타고 가도 안 되는 것입니다. 지금 돈 장난 하느라고
탈 지구를 하여 화성으로 도망(?)갈 궁리는 하는데 미안하지만 거기도 땅일 뿐입니다.
피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피할 수 있는 곳은 예수 그리스도 안 밖에 없습니다.
첫댓글 아멘 입니다.
이보다 더 선명한 진리는 없습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목적대로 다시 회복하는 것으로 배웠습니다.
성령안에서 주님과 하나가 되어 하나님 아버지께서 거하실 거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비록 하나님께서 귀히 쓸 그릇은 안된다 할지라도, 내 그릇안에 삼위 하나님이 담긴것 만으로도 천.만배 감사를 드립니다.
대단한 깨달음이세요 주님께서 크게 기뻐하실겁니다 할렐루야!
@瑤翰 김요한 네 우리가 진리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 있으므로 아버지의 집에 거하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아멘! 감사합니다. 우리가 사는곳 우리집이 천국 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