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우리의 앞날은 스스로의 손에 달려 있는가
우리 스스로가 운명의 주인일까? 이러한 믿음이 굳건한 사회에서는 최고의 자리에 서는 사람과 가장 아래에 있는 사람 각자의 사회적 지위는 정당화된다. 부자는 그럴만한 자격이 있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은 누구보다 자신을 탓해야 한다. 게으르고 무력해서 가난하게 사는 것이며, 부지런하고 노력을 많이 해서 부유한 거라면 비난의 화살은 개인에게 돌아가는 게 맞다. 과연 그럴까? 가난한 자는 가난할 만해서 가난한 것인가. 우리 삶은 통제 밖의 변수에 더 많은 영향을 받는다. 가난한 자와 장애가 있는 자, 건강하지 못한 자는 운명적으로 주어진 조건인 경우가 많다. 그리고 지금 나와는 상관이 없는 것 같아도 누구나 그러한 상황에 갑자기 처하게 될 수도 있다.
강지나의 [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에는 빈곤함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사력을 다해 매일 매일을 살아가는 여러 청소년(청년)이 소개된다. 미래를 생각하면 우울해지는 소희, 평범한 가정을 꿈꾸는 영성, 대물림의 빈곤 속에서 비장하게 살아가는 수정, 범죄의 과거를 딛고 자신을 지켜나가는 현석.. 그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고군분투의 장면 그대로다. 외로운 군대가 떨어져 싸우듯 남의 힘을 받지 않고 벅찬 일을 오롯이 해나가는 모습들. 안쓰럽기도 하고 때로는 아슬아슬한 그 힘겨움이 그대로 전달되어 마음이 무거웠다. 그들 중 초긍정 에너지를 소유하고 가난을 극복해가는 지현의 사례에 놀라움을 넘어 존경심마저 들었다. 세상의 편견과 시선에 굴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추구해 나가는 강인함이 정말 훌륭했다. 가난을 극복하는 힘은 어떻게 생겨나는지 생각해 보게 하는 시사점도 주었다. 먼저 지현과 그녀의 가족은 적극적으로 도움을 요청하고 주변의 자원을 활용했다. 저자는 지현의 이러한 단단한 내면을 ‘성찰하는 힘’이라고 하면서 수많은 청소년 인터뷰이 중에서 성공적으로 가난에서 벗어난 친구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된다고 말한다. 성찰하는 힘은 인간이 사회적·정신적으로 성숙해지고 독립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97쪽). 지현의 ‘도움 요청’과 ‘성찰하는 힘’은 가난한 상황 속에서도 에너지를 생존에만 다 쏟아붓지 않으면서 어떻게 자신의 사회적 존재가치를 보듬고, 어떻게 자아의 욕구를 발견할 수 있는지 하나의 훌륭한 전략을 보여준다(100쪽).
그런데 나는 이 지점에서 다시 조심스럽게 묻고 싶었다. 적극적인 ‘도움 요청’도 가난 극복의 책임을 개인의 몫으로 돌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식주조차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가난을 ‘증명’해 보이는 복잡한 절차를 알려주는 것이 과연 최선인지. 먼저 가난한 자의 일상이 최소한의 기본적인 생존의 위협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그 위신과 존재가 부정당하는 구조를 개선시켰을 때 비로소 성찰하는 에너지도 기대해 볼 수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는 사회 속에서 자신이 ‘재능과 노력에 따라 받을 자격이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자수성가해야만 존중받을 수 있다는 불안과, ‘하면 된다’는 자기충족적 최면으로 끊임없이 스스로를 몰아치는 강박도 모두 능력주의가 갖는 폭정이다. 마이클샌델은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내가 가진 부와 안락한 환경은 이 공동체에서 내가 받은 행운이지 나의 업적 덕분이 아님을 깨달을 때 비로소 겸손해지면서 다른 사람의 운명에도 힘을 보태줄 수 있다고 말한다. 모두가 연대해야 하는 공동 운명체임을 받아들일 때 복지 제도에도 더 관대해지고 더 적극적이 될 것이다. 지현과 그 가족에게 무한 박수와 응원을 보내면서도 또 다른 어떤 가난한 청년들의 한숨을 줄여줄 방법으로 ‘적극적으로 도움을 요청하세요’ ‘성찰의 시간을 가져 보세요’라고 하는 말이 혹독한 메아리가 되지는 않을까 생각해 본다.
첫댓글 "성찰하는 힘"을 가진 재순 선생님의 글 잘 읽었어요.
바쁘신 중에도 일찍 제출하신 것에 경의를 표하고요,
세상을 바꾸는데는 궁극적이고 장기적인 목표와
단기적이고 실용적인 접근 둘 다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지현의 사례가 누군가에게는 꼭 필요한 실용적인 전략이 될 수 있겠지요.
가난을 증명하고, 도구로 활용해서 꼭 필요한 지원을 얻어내는 영리함
그렇지만 누구는 그렇게 할 수 없는 사람도 있을테니
좀 더 세심한 보편적 복지로, 공동운명체로 가자는 말씀에 궁극적으로 동감해요.
그 길로 가는 과정 중에 있겠지요? 그렇다고 믿고 싶습니다...만 갈 길이 머네요.
그나저나 국감 화이팅입니다!!!!
‘적극적으로 도움을 요청하세요’ 저는 이 문장을 주제로 쓰려고 했어요. 하지만 재순샘의 지적처럼 '혹독한 메아리'가 될 수도 있겠어요. 두단락 쓰다가 말았지만 다시 쓴다면 이 부분을 유념해서 쓸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