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아침엔 ‘송축해 내 영혼 내 영혼아 거룩하신 이름 이전에 없었던
노래로 나 주님을 경배해‘ 하는 찬양을 우리말로 또 영어로 부르면서 큰
감격을 맛보았습니다. 찬양은 과연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신앙의 종합적
노래이기 때문에 딱히 내가 뭣 때문에 찬양하는지를 콕 집어 낼 수는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을 찬송으로 하나님께 올리는 겁니다.
신앙이 어렸을 때에 남들이 찬양도 은사, 가지고 있는 자질도 달란트라고 하는 말을
듣고는 산기도 중에 이 음치인 제게도 찬양을 간구한 적이 있습니다.
은사라면 당연히 구하면 주실 것으로 믿었지요. 근데 주시지 않아 섭섭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찬양은 노래가 아니므로 재능도 더욱 아니라는 걸 알았습니다.
말씀이 내 속에 스며들어와 그 이름이 내게 인 박이듯 박히므로 나도 모르게 찬송으로
주님의 성호를 높이며 거룩하신 그 이름 앞에 경배와 찬양을 드리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1절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내 입술로 항상 주를 찬양하리이다”
이 말씀을 원어로 풀면 ‘내가 어느 때에나 나 여호와를 송축함이여 그의 찬송이
내 입에 항상 있도다" 가 됩니다. 이 시편의 제목을 보면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 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라고 되어 있습니다. 비참하고 무참한 상황입니다.
삼상21:10-13절을 보면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겨 가드 왕 아기스에게 도망을 갔을
때에 그의 정체가 탄로 나자 미친 체 하고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침을 수염에 흘러내려
죽음을 모면한 사건을 말합니다. 다윗은 그 일마저도 하나님이 자신을 구원하신
사건이라고 여기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천사들이 그를 도왔다는 겁니다(시34:7)
찬송은 어떤 이들은 자신의 기분을 돋우기 위해서 부르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교회 음악이 여기에 속하는 것 같아서 매우 안타깝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니 목회를 50년을 했다는 한 목사가 청년들이 찬송을 신나게 부르는 게
좋더라 하는 망언을 하는 실정입니다. 이건 완전히 귀신 씨 나락 까먹는 소리입니다.
그 다음 말씀을 받은 후에 부릅니다. 말씀이 기도와 묵상을 통해 체화가 되면 다윗과
같이 그 속에 있는 것으로 전천후로 찬양을 합니다. 그야말로 무슨 일을 만나도
무슨 일이 그 앞에 놓여도 저녁이 되면 또 찬양해 하는 노래 말과 같습니다.
영혼이 여호와를 자랑하는 것 이것이 바로 진정한 찬송입니다. 그래서
"내 영혼이 여호와를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가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2절)
환경이나 사정에 의한 바깥의 영향이 아니라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다윗은
그 안에서 터져 나오는 찬양을 가진 복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성령의 사람이며
그 앞에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신 주님을 항상 모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그 안에 이루어진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눈물이 납니다.
시편의 모든 노래는 시편1편을 기초로 한 고백들이라는 사실을 다시 상시시킵니다.
따라서 찬양은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여 이루어진 것과 불가불리의 관계입니다.
이런 찬송은 자신도 성령의 감동으로 눈물을 흘리고 남도 감동시키게 됩니다.
아니면 시쳇말로 찬송가사로 은혜를 받으세요 하는 정도의 찬양인도이겠지요.
그래서 3절이 성취가 됩니다. “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의 이름을 높이세” 한 마디로 말하면 나와 함께 주님의 광대하심과
그의 높으신 그 이름을 '찬송합시다' 하면 다 따라 찬송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찬송할 이유는 첫째 구원의 하나님을 노래합니다.
4절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다윗이 아기스 왕 앞에서 심하게 두려워했습니다.
그는 옴짝 달싹하지 못하는 두려움의 창고에 갇혀 있다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찬송할 이유 두 번째는 여호와를 앙망할 때에 빛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5절 "그들이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내었으니 그들의 얼굴은 부끄럽지 아니하리로다"
그렇게 비굴하고 처참한 상황에서도 다윗은 주를 앙망하며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성령의 사람이었습니다. 그 얼굴 곧 체면을 세우시는 주께서 그에게 광채를 비추십니다.
찬송할 이유 세 번째는 주의 사자들이 경외하는 자들을 보호하기기 때문입니다.
7절 "여호와의 천사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치고 저희를 건지시는도다“
저는 천사들이 구원 받을 후사를 섬기는 사실을 잊고 있다가 깜짝 놀라기도 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간증을 권합니다. 8절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래서 주관적인
구원의 체험을 하나님께 올리면 찬양이 되고 자신의 말로 사람에게 말하면 간증이
되며 성경의 객관적인 지식으로 남에게 전하면 전도가 됩니다. 설교가 바로 그겁니다.
이런 사람이 비로소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을 가르칠 수가 있는 겁니다. "너희 자녀들아
와서 내말을 들으라 내가 여호와를 경외함을 너희에게 가르치리로다"(11절)
이와 같이 찬송과 간증과 고백을 가진 사람이 받는 복입니다.
첫째 생명을 사모하여 장수하여 복을 받습니다. “생명을 사모하고 연수를
사랑하여 복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누구뇨(12절) 하나님의 명령은 영생이며(요12:50)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도 영생입니다(롬6:23) 성령의 기름부음이 우리 안에
거하도록 하시므로 아들 안과 아버지 안에 거함도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함입니다(요일2:24)
그리스도 안에 생명을 얻고 또 얻어야만 그 형상으로 영광을 얻어 영광에 이르러
주님과 하나가 되어 하나님 아버지께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두 번째는 혀를 금하여 악이나 궤사한 말을 하지 않습니다. “네 혀를 악에서 금하며
네 입술을 거짓말에서 금할지어다”(13절) 주님을 송축하며 그 입술로 항상 주를 찬양하는
혀로 악이나 궤사한 말을 할 수가 없지요. 한 우물에서 두 종류의 물을 길을 수가 없습니다.
세 번째는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따르게 됩니다.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따를지어다”14절)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 되게 하신 언약을 좇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자신을 묶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부인하고 주와 그리스도를 따라 하나님과 화목하게 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드디어 그리스도인다운 그리스도인 곧 생활의 열매와 체험이
있고 간증과 찬송이 항상 있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어 가는 겁니다(15-22절)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우리 주님 찬송하며 나는 가리라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