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중심의 신앙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14:7-12).
사도는 “먹는” 문제(2-3)와, “날을 중히 여기는”(5-6) 문제를 다루다가,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7) 하고, “인생의 목적”(7-8)이라는 중대한 문제로 비약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먹느냐? 먹지 않느냐” 하는 “아디아포라”, 즉 하찮은 일은 다를 수가 있어도, “살아도, 죽어도 주를 위하여” 라는 중대한 목적(目的)에 있어서는 동일하다는 점을 일깨워줌으로, 판단하거나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 문단이 14장의 중심부분인 것입니다.
①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7) 합니다.
㉠ 왜 이렇게 말씀하고 있을까요? 사도는 교회 내에서 일어나기 쉬운 “대수롭지 않은 것들”(아디아포라)을 해결하는데 있어서 원리(原理)가 되는 말씀을 하려는 것입니다.
㉡ 본문에는 “위(爲)하여” 라는 말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6-8절 안에 7번이나 등장합니다. “자기(自己)를 위하여 사는 자도 없고 자기(自己)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하고 말씀합니다. 전에는 로마 형제들이나 우리 모두는, “자기를 위하여 살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그런 삶을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② 그런데 이제는,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8) 합니다.
㉠ 이 말씀은 그가 복음을 알고 믿고 있는가? 그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인가, 아닌가를 분별하는 시금석이 되는 말씀인 것입니다. 만일 “우리 중에, 자기를 위하여 살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말씀이 됩니다. 아무리 좋게 생각한다 하여도 그런 사람은 아주 어린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됩니다.
㉡ 이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삶의 목적(目的)이, 자기중심에서 하나님중심으로 바뀌는 것이라는 점을 나타냅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그리스도인은 인생의 목적이 바뀌게 되었다는 것인가?
③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9) 하고 대답합니다.
㉠ 사도는 고린도후서 5:14-15절에서도,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하고 말씀합니다.
㉡ 사도는 이점에 있어서 확고한 사람이었습니다. “죽은 자와 산 자의 주(主)가 되려 하심”(9하)이라 말씀하는데, 이제는 내가 주인(主人)이 아니라, 나의 주인은 그리스도시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에서는,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20) 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에서도,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말씀합니다. 얼마나 확고부동합니까?
㉢ 이는 사도 바울에 국한된 인생관이 아니라,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다”(4:25)는 복음진리를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에게나 적용이 되는 표지(標識)가 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하는 것입니다.
④ 사도가 이처럼,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여” 라는 극단적인 말씀을 하는 의도가 어디에 있는가?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判斷)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10상) 하는 말씀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 “판단하느뇨” 하는 말은, 먹는 자들을 판단하는 보수(保守)주의자들을 향해서 하는 말이고,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하는 말은, 먹지 않는 자들을 비웃는 자유(自由)주의자들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씀입니다.
㉡ 10절에는 “너”라는 말이 3번 나오고, “우리”라는 인칭이 한 번 등장합니다. 무슨 뜻이야 하면, “너와, 나”가 방법(方法) 면에서는 다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원리적으로,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 목적(目的)은 하나요, 그러므로 “우리”는 한 형제라는 것이 바울의 증거입니다.
㉢ 사도는 방법적(方法的)인 문제를 다룰 때는 인칭을,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10) 하고, “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원리적(原理的)인 면을 말씀할 때는,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7) 하고, “우리”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8) 하고 말씀합니다.
⑤ 반면 6-9절 안에는, “주”라는 말이 7번이나 나옵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까지 합하면 10번이나 됩니다.
㉠ 지엽적(枝葉的)인, 즉 “아디아포라”에 집착하다보면, 큰 것을 잃고 감정에 치우치기가 쉽습니다. 원 줄기와 같은 주님 중심으로 바라보아야만 한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중심으로 그 형제를 바라보게 되면,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15)임을 깨닫게 됩니다.
㉡ 하나님중심으로 그 형제를 바라보게 되면,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3)을 인식하게 됩니다. 이를 알았기에 사도는,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 하노라 비록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 5:16) 하는 것입니다. 형제도 그러합니까?
⑥ 이렇게 말씀한 사도는,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10하) 하는 경고를 합니다.
㉠ 너는 “남의 하인을 판단”(4)할 심판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는 판단하거나, 업신여기지 말라는 경계인 것입니다. 방법 면에서는 다를 수도 있고, 아직은 연약(軟弱)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목적은 분명하고 하나라는 것입니다.
㉡ 이처럼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중심으로 바꾸어지게 되면, 주님이 보시는 안목(眼目)으로 바라보게 되고, 형제를 업신여기거나 판단함이 옳지 않음을 인식하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나”라는 자아가 살아있기 때문에 자신의 의견과 주장만을 고집하다가, 주님중심의 신앙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중심의 고집으로 변질되어 버리는데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주장이 관철되지 아니하면 굴욕과 패배감에 빠져 버립니다.
㉢ 그래서 교회 내에는 불화와 분쟁의 싹이 트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는 하나님을 위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10) 하는 엄숙한 경고를 명심하십시다. 우리가 심판대 앞에 섰을 때에, 형제를 비판하고 업신여겼던 일들이 정당화될 수가 있다고 생각 하느냐는 말씀입니다.
⑦ 본 문단은, “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12) 하는 결론으로 끝맺고 있습니다.
㉠ 형제여, “하나님중심”의 신앙은, 교회 내에서 일어나기 쉬운 불화와 분쟁을 하나로 만드는 원리임을 명심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