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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서 한 번에 설교하기
본문 : 2:17-20절
2:17 후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당한 곤경은 너희도 보고 있는 바라 예루살렘이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으니 자,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여 다시 수치를 당하지 말자 하고
2:18 또 그들에게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신 일과 왕이 내게 이른 말씀을 전하였더니 그들의 말이 일어나 건축하자 하고 모두 힘을 내어 이 선한 일을 하려 하매
2:19 호론 사람 산발랏과 종이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이 이 말을 듣고 우리를 업신여기고 우리를 비웃어 이르되 너희가 하는 일이 무엇이냐 너희가 왕을 배반하고자 하느냐 하기로
2:20 내가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를 형통하게 하시리니 그의 종들인 우리가 일어나 건축하려니와 오직 너희에게는 예루살렘에서 아무 기업도 없고 권리도 없고 기억되는 바도 없다 하였느니라
주제 : 성벽건축과 개혁운동
강론
바벨론 포로에서의 귀환은 3차에 걸쳐서 이루어졌습니다. 제1차는 스룹바벨의 주도(主導) 하에 이루어졌으며 이들에 의해서 제2의 성전이 재건되었습니다. 제2차는 약 80년 후에 에스라의 인도 하에 귀환하였고 제3차는 그로부터 13년 후에 느헤미야의 인도 하에 귀환하여 무너진 성벽을 재건합니다. 학사 “에스라”는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에 동시에 등장하는데, 연대를 감안할 때 느헤미야가 성벽(城壁)을 재건한 후 에스라가 개혁운동(改革運動)을 전개한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느헤미야서는 크게 두 부분과 두 주제(主題)로 되어 있습니다. 1장-7장까지는 느헤미야가 주도한 성벽을 복원하는 내용이고, 8장-13장까지는 에스라가 주도한 개혁운동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성벽은 대외적(對外的)으로는 외침을 막고 대내적(對內的)으로는 하나의 공동체로써의 결속을 촉진시키는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먼저 느헤미야에 의해 외적(外的)으로 성벽을 재건하여 견고하게 하고, 다음에 에스라에 의해 내적(內的)인 개혁을 단행하는 것이 느헤미야서의 중심주제입니다.
① 먼저 성벽을 복원하는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1:3절입니다. 수산 궁에 관원으로 있던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는 말을 전해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는 것”(4)을 대하게 됩니다. 느헤미야는 참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의 사람이요, 자신의 영달보다는 그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느헤미야는 탁월한 지도력과 강력한 추진력을 겸비한 백절불굴의 사람이었습니다. 그 위에 명철한 분별력을 소유한 지도자였는데 이는 기도를 생활화한 결과로 여겨집니다. 그런 느헤미야는 울기만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금식하며 기도만 하지 않았습니다.
㉠ 1:11절입니다. “주여 구하오니 귀를 기울이사 종의 기도와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종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 종이 형통하여 이 사람들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하고 간구합니다. 그리고 1장은 “그 때에 내가 왕의 술 관원이 되었느니라”(11)고 마치고 있습니다. 이는 무엇을 말해주느냐 하면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나라와 백성을 위해서 헌신할 일이 무엇인가를 하나님 앞에 간구하고 있다는 점을 말해줍니다.
㉡ 이점이 2:12절에 나타납니다. “내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내 마음에 주신 것을 내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아니하고”합니다. 하나님은 느헤미야의 마음에, 그리고 우리들 마음에 소원(빌 2:13)을 주시고 행하게 하십니다. 기도란 이처럼 헌신하는데 까지 나아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결단과 실천이 뒤따르지 않는 기도는 기도의 유산(流産)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② 2장의 중심점은 2번(8, 18) 등장하는 “하나님의 선한 손”에 있습니다. 2:4절을 보면 왕은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고 묻습니다. 느헤미야는 “곧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하고” 소원을 말합니다. 이것이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뜻이요, 기도의 생활화입니다.
㉠ 2:8절입니다.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시므로” 왕이 느헤미야의 소청을 허락했다고 말합니다. 왕은 성을 건축하라는 허락만 한 것이 아니라 삼림 감독에게 필요한 재목을 주라는 것과 성을 건축하는 것을 방해하지 말라는 조서까지 내립니다.
㉡ 그러면 2:10절을 보겠습니다. 대적자들이 “이스라엘 자손을 흥왕하게 하려는 사람이 왔다 함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을 흥왕(興旺)하게 하려는 사람이 왔다”!! 얼마나 부럽고 매력적인 말입니까? 참으로 오늘 이 시대는 이런 사람이 일어나야 할 시대인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의 나라를 흥왕하게 하려는 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2:17절입니다. 성벽이 황폐한 실상을 정찰한 느헤미야는 방백들에게 “우리가 당한 곤경은 너희도 보고 있는 바라 예루살렘이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으니 자,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여 다시 수치를 당하지 말자”고 독려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한 손”이 자신을 도우사 왕이 조서를 내린 일들을 말해줍니다. 그러자 “일어나 건축하자”하고 모두 힘을 내어 분발했다고 말씀합니다. 오늘의 우리들이라면 “안 됩니다. 못합니다. 지금 상황에서는 불가능합니다.”라고 말하지 않았을까요?
2:19절을 보겠습니다. 대적 자들은 “우리를 업신여기고 우리를 비웃었다”고 말합니다. 당시의 형편과 처지에서 성벽을 건축하는 거대한 역사를 시작한다는 것은 무모하고 불가능한 일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 2:20절입니다. 느헤미야는,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를 형통하게 하시리니 그의 종들인 우리가 일어나 건축하려니와 오직 너희에게는 예루살렘에서 아무 기업도 없고 권리도 없고 기억되는 바도 없다”고 말해줍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하나님의 자녀요, 후사요, 유업을 이을 자요, 주의 종들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흥왕케 하려는 자”가 되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③ 드디어 3장에서 성을 건축하기 시작합니다. 3:1절은 “그 때에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그의 형제 제사장들과 함께 일어나 양문을 건축하는”(3:1)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3:32절은 “성 모퉁이 성루에서 양문까지는 금장색과 상인들이 중수하였느니라”(3:32)고 “양문”으로 시작하여 “양문”으로 마치고 있습니다.
㉠ 성벽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주목할 점이 있는데 “그 다음은(2), 그 다음은(4), 그 다음은”(5)하고 인간 띠처럼 연결되어 지어져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3장 안에는 “그 다음은”이라는 말이 무려 32번이나 등장합니다. 이는 손에 손을 마주 잡듯이 한 마음 한 뜻으로 역사를 감당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여러분은 구경하고 있을 것입니까? “그 다음”의 연결은 형제 몫이라는 점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 그런데 3:5절을 보십시오. “그 귀족(貴族)들은 그들의 주인들의 공사를 분담하지 아니하였다”고 고발합니다. 3:12절에서는 “그 다음은 예루살렘 지방 절반을 다스리는 할로헤스의 아들 살룸과 그의 딸들이 중수하였고”라고 “딸들”도 중수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④ 4장은 대적자들이 극렬하게 반대하는 내용인데 4:3입니다. “그들이 건축하는 돌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4:3)고 비웃습니다. 대적자들이 비웃는 것은 고사하고 10절에 보면 유다 사람들까지도 “흙 무더기가 아직도 많거늘 짐을 나르는 자의 힘이 다 빠졌으니 우리가 성을 건축하지 못하리라”고 건축하는 자들을 약화시키는 것을 대하게 된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 4:11절입니다. 대적 자들은 “그들이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가 그들 가운데 달려 들어가서 살륙하여 역사를 그치게 하리라”고 말합니다. 그리하여 4:16-17절에서는 “그 때로부터 내 수하 사람들의 절반은 일하고 절반은 갑옷을 입고 창과 방패와 활을 가졌고, 성을 건축하는 자와 짐을 나르는 자는 다 각각 한 손으로 일을 하며 한 손에는 병기를 잡았는데”라고 말씀합니다.
㉡ 그리고 4:23절을 보십시오. “나나 내 형제들이나 종자들이나 나를 따라 파수하는 사람들이나 우리가 다 우리의 옷을 벗지 아니하였으며 물을 길으러 갈 때에도 각각 병기를 잡았다”고 진술합니다. 얼마나 긴장감과 박진감이 있습니까? 이것이 영적 전투인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말하기를 “이 공사는 크고 넓으므로 우리가 성에서 떨어져 (상호)거리가 먼즉 너희는 어디서든지 나팔 소리를 듣거든 그리로 모여서 우리에게로 나아오라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4:19-20)고 독려합니다.
⑤ 6:15절입니다. 드디어 “성벽 역사가 52일 만인 엘룰월 25일에 끝나매”합니다. 그러자 비웃고 조롱하던 “우리의 모든 대적과 주위에 있는 이방 족속들이 이를 듣고 다 두려워하여 크게 낙담하였으니 그들이 우리 하나님께서 이 역사를 이루신 것을 앎이니라”(6:16)고 대적자들이 “낙담”했다고 진술합니다.
성경 66권 중에서 느헤미야서만큼 역동적이고 박진감이 넘치는 그런 책은 달리는 없습니다.
느헤미야는 상상을 초월하는 대내외적인 방해와 반대를 무릅쓰고 악전고투 끝에 52일이라는 최단 시일 내에 불가능하게 여겨졌던 성벽 복원이라는 큰 역사를 완성합니다. 이는 “여호와의 선한 손”이 역사하심으로 가능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아니 됩니다.
㉠ 이점에서 그렇다면 성벽을 중건한 일이 오늘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를 생각하게 합니다. 이 대목을 상고하노라면 신약 성경 에베소서를 연상하게 만듭니다. 에베소서의 주제를 “교회론”이라고 말합니다. 1장은 교회를 건축하기 위한 준비라 할 수가 있는데 ㉠ 하나님은 “우리를 택하시고”(엡 1:4), ㉡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1:7), 즉 값을 주고 사셨다고 말씀합니다. ㉢ 그리고 성령께서는 “인치셨다”(1:13)고 말씀합니다.
이렇게 준비한 자들로 2장에서는 교회를 세우시는데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2:21-22)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3장에서는 “무릎을 꿇고 비노니”(15)하고 봉헌기도를 드리듯 하는데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3:19)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거하실 성전건축(교회)을 마치고 마지막 장인 6장에서는 “끝으로,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6:10-11)고 명하는 구조입니다.
이는 마치 마지막으로 성벽을 쌓는 일에 해당된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믿음의 방패와 성령의 검을 가지고 지키라고 명합니다. 만일 성벽 역할을 하는 이런 영적 경계가 없다면 교회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렇다면 한국교회의 성벽과 모든 성도들 가정의 성벽은 튼튼합니까? 하고 묻게 됩니다.
⑥ 다음으로 느헤미야서 둘째 부분인 8:1절을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들의 성읍에 거주하였더니 일곱째 달에 이르러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져오기를 청하였다”합니다.
㉠ 성벽을 완공하고, “율법책 가져오기를 청했다”는 점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성벽은 “율법책”이 있기에 존재의미가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보수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이는 돌로 성벽을 건축하는 주제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회를 개혁하는 것으로 전환하는 점을 나타냅니다.
㉡ 이사야 26:1절을 보겠습니다. “그 날에 유다 땅에서 이 노래를 부르리라 우리에게 견고한 성읍이 있음이여 여호와께서 구원을 성벽(城壁)과 외벽으로 삼으시리로다”합니다. 그리고 26:2절에서는 “너희는 문들을 열고 신의(信義)를 지키는 의로운 나라가 들어오게 할지어다”합니다. “의로운 나라”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성벽”은 대내적(對內的)으로 거룩함과 의로움이 유지 되는 한에서만 유효하기 때문입니다.
㉢ 만일 이사야 1:21절 같이 “신실하던 성읍(城邑)이 어찌하여 창기가 되었는고 정의가 거기에 충만하였고 공의가 그 가운데에 거하였더니 이제는 살인자들뿐이로다”(사 1:21)로 타락하게 되면 성벽이 도리어 개혁을 막는 역할을 하여 기득권에 안주하게 만든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가 그 울타리를 걷어 먹힘을 당하게 하며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 것이라”(사 5:5)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외침을 막는 “성벽”과, 대내적인 “개혁”이라는 두 주제는 모든 시대, 모든 교회에 적실성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한국교회에 더욱 더 절실하다 하겠습니다.
㉣ 8:3절입니다. “새벽부터 정오까지,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다”합니다. 8-9절에서는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에게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니,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합니다. 왜 울었을까요? 자신들의 잘못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명심할 점은 깨달은 데서 멈춘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9:1-2절을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여 금식하며 굵은 베옷을 입고 티끌을 무릅쓰며 모든 이방 사람들과 절교하고 서서 자기의 죄와 조상들의 허물을 자복하고” 결단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을 대하게 됩니다.
⑦ 9장에는 에스라가 대표로 드렸을 기도가 있습니다. 조상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여 “우리가 오늘날 종이 되었는데……”(9:36)하고 바벨론 포로가 되기까지의 구속의 역사를 진술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해 인간은 얼마나 거짓되고 언약에 성실하지 못했는가를 참회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 그리고 9:38절을 보면 “우리가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이제 견고한 언약을 세워 기록하고 우리의 방백들과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이 다 인봉하나이다”, 즉 도장을 찍어 서약한다는 결단과 헌신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견고한 언약을 세웠다”고 말씀합니다. 영적 성벽을 견고히 쌓은 것입니다 그리고 10장에는 인을 친 사람들의 명단까지 공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헌신예배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헌신예배”는 이처럼 “견고한 언약을 세우고 인을 치는”데까지 나아가야 마땅하리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 그러나 느헤미야서의 마지막 장은 그들이 쌓은 성벽이 다시 허물어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느헤미야가 바사로 돌아갔다가 10여년 만에 재차 귀환해 보니 그들은 굳게 세운 언약을 지키고 있지 않았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말라기 선지자를 세우셔서 경고하셨는데 그래서 느헤미야서와 말라기서를 보면 그들이 파기한 종목들이 일치합니다.
㉮ 제사장들이 타락하고(13:29, 말 1:6), ㉯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였고(13:15-22), ㉰ 십일조를 드리지 않아 레위인들이 먹을 것이 없어 도망하고(13:10, 말 3:8), ㉱ 또다시 이방 여인과 통혼하고(13:23, 말 2:11), ㉲ 그 결과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타락하는 것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들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주던 견고한 성벽은 또다시 무너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 느헤미야서는 “……내 하나님이여 나를 기억하사 복을 주옵소서”(13:31)하는 말씀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자신이 수행한 성벽건설과 개혁운동의 수고가 헛된 대로 돌아가지 않게 해달라는 탄원입니다.
이를 통해서 무엇을 깨닫게 되는가? 첫째는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롬 3:20)는 자력구원의 불가능성입니다. 둘째는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롬 3:4)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다. 왜냐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구원계획을 중단하거나 폐하심이 없이 거짓되고 부패하고 구제불능한 자들을 위해서 자기 아들을 대속제물로 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를 알았기에 개혁자들은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소망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구약시대는 역사의 초점이 선민 이스라엘, 즉 구약교회에 맞춰져 있습니다. 신약시대는 주님의 피로 사신 교회가 최후의 보루라는 각성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사탄의 집중 공격목표입니다. 교회건물이나 교회성장은 내적으로 의로움과 성결이 유지되는 한에서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외부에서 침입하는 적보다는 내적으로 부패시키는 누룩이 더욱 해를 끼치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의 성벽이 붕괴되고 있지는 아니합니까? 내부적으로 누룩이 번지고 있지는 아니합니까? 이런 의미에서 성벽이 완성된 후에 제사장 에스라를 중심으로 전개한 개혁운동은 한국교회에 절실히 요청된다 하겠습니다. 묻습니다. 한국교회는 안전합니까? 여러분의 가정은 안전합니까?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잠 4:23)한 우리들의 마음의 성벽은 무너지고 있지 아니 합니까? 이것이 “성벽건축과 개혁운동”인 느헤미야서입니다.
시온성과 같은 교회 그의 영광 한 없다
허락하신 말씀대로 주가 친히 세웠다
반석 위에 세운 교회 흔들 자가 누구랴
모든 원수 에워싸도 아무 근심 없도다 (210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