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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고린도후서 2장 17절
개혁주의 핵심 교리들의 실천적 의미
1517년 10월 31일, 루터가 95개 조항을 비텐베르크 대학교 교회의 정문에 붙이면서 시작된 종교개혁이 올해로 506주년을 맞이했습니다. 모든 교회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매 년 10월 마지막 주를 종교개혁주일로 지키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지켜야 할 의무가 있는 날은 아닙니다. 지키지 않는다고 해서 개혁주의와 상관없는 그런 교회라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또 지킨다고 해서 개혁주의 정신을 가진 교회인가? 안타깝지만 다 그런 것도 아닙니다. 어쨌든 개인적으로 2021년부터 10월 마지막 주에 종교개혁과 관련해서 설교를 하고 있는데, 날의 중요성 때문이 아니라 종교개혁과 관련해 하나님께서 심고자 하신 주의 진리가 무엇인가를 한번 돌아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재작년부터 김영규 교수님의 글을 가지고 나름대로 설교화해서 여러분에게 소개를 하고 있는데, 오늘은 2004년 저희 교단 총회 교직자 수련회에서 강의하신 내용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강의 제목은 “실천적 의미에서 발견된 역사적 개혁주의 핵심교리들과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적 정체성”입니다.
먼저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적 정체성에 대한 역사적 맥락을 다시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장로교회의 보수주의뿌리는 미국 정통 장로교회(OPC)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역사적 뿌리와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관계합니다. 미국 정통 장로교회가 1936년 6월 11일 미국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 in the U.S.A.)로부터 스스로를 분리하여 첫 총회가 열렸을 때, 그렇게 분리한 데는 총회가 공식적으로 ‘모든 현대주의’와 ‘불신앙의 다른 형태들’에 대한 반대를 선언한 데 있습니다. 동시에 신학적으로 그 선언은 ‘신구약의 무오성과 신적 권위‘에 대한 ‘엄격한’ 선언이었고, 장로교회 전통으로 볼 때, ‘인간에게 알려진 성경에 대한 가장 신실한 해석’으로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요리문답들을 채택한 ‘장로교 대 전통의 가장 순수한 직접적 선’(the direct line of the purest of the great Presbyterian tradition)에 있음을 확인하는 선언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목사 임직 혹은 장로 임직, 혹은 집사 임직과 관련해 선서를 한다고 할 때 첫 번째부터 세 번째까지 이와 관련해 선서를 하게 됩니다.
1) 본인은, 신구약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요 신앙과 행위에 대하여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으로 믿습니다.
2) 본인은, 본 장로회 신조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및 대소요리문답은 신구약 성경에 교훈한 교리들을 총괄한 것으로 알고 성실한 마음으로 받아 신종할 것을 선서합니다.
3) 본인은, 본 장로회 정치와 권징조례와 예배모범을 정당한 것으로 받아 신종할 것을 선서합니다.
그런데 이 전통적 선에 대한 개념은 침례교, 감리교, 루터주의, 감독주의와 구별된 ‘기독교의 가장 순수한 형태’로 정의되고, 일명 ‘개혁신앙’을 믿는 자들로서 정의가 되고 있습니다. 이 신앙이 표현될 때, ‘기독교의 일반적 교리’(삼위일체, 창조, 그리스도의 신성,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십자가 상에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 죽은 자로부터 부활, 하늘로 승천, 땅으로 영광스러운 재림) 외에 그 ‘지배적인 원리’와 ‘몇 가지 특징적인 교리들’로 나누어 그 신앙이 표현되고 있습니다.
먼저 개혁신앙을 지배하는 원리로서 ‘하나님의 주권’이 표현될 때, 로마서 11장 36절에 근거하여, “이 원리에 따라서 창조로부터 구원에 이르기까지 육체적 혹은 영적, 과거나 현재 및 미래, 땅의 것이나 하늘의 것이나 모든 영역들에서 하나님이 유일한 하나님이시다. 즉 만물이 하나님 안에서 그 원천을 찾고 만물이 하나님에 의해서 작정되어 있으며 만물이 하나님 자신의 기뻐하심과 영광을 위해서 작정되어 있다”는 내용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 공동적으로 개혁신앙의 특징들로 지키는 교리는 도르트 회의 결정을 다섯 가지로 표현한 ‘칼빈의 5대 교리 요점들(인간의 전적부패: 창8:21; 롬3:11; 엡2:1; 창6:5, 무조건적 선택: 엡1:4,5,11; 잠16:4, 제한속죄: 요19:12; 10:26; 17:9, 유효적(불가항력적) 은혜: 벧전2:9; 딛3:5; 골2:13, 영원한 보증(성도의 견인): 요 6:51; 10:28; 빌 1:6; 롬 8:38-39)’로서 그 정통장로교회는 이들 교리들과 ‘가장 신실히 일치한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정통장로교회의 신학적 정체성이 한국교회의 보수적 장로교회의 정체성과 맥락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신학적 정체성이 역사적으로 확립된 것은 미국 장로교회가 ‘점진적인 그러나 지속적인 몰락’의 길을 걷다가 몰락의 ‘절정’에 도달한 그 시점에서 생긴 것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아르미니우스주의가 대각성운동을 통해서 장로교에 들어오기 시작하여 이미 먼저 좀 더 강하게 아르미니우스주의에 영향을 받은 회중교회와 연합할 분위기로 발전되었으며, 결국 연합하게 되고 그 연합은 전체적으로 자유신학에 문을 열게 해 주었으며, 그런 오염을 느끼기 시작하여 다시 분리되기 시작할 때는 이미 그런 신학에 의해서 모두 오염된 후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미 아르미니우스주의로 오염된 그런 분위기 속에서 미국장로교회로부터 분리하여 미국 정통 장로교회의 첫 총회가 열린 것이고, 거기서 신구약의 무오성과 신적 권위에 대한 엄격한 선언과 함께, 인간에게 알려진 성경에 대한 가장 신실한 해석으로서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요리문답들을 채택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값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아르미니우스주의로 오염되었다고 할 때 거기서부터 끌어올린 것이 하나님의 주권, 칼빈의 5대 교리라는 것은 개혁주의에 있어 가장 최소한의 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반성해야 할 일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적 정체성이 미국 정통 장로교회에 두고 있다고 할 때 저들만의 반성이 되어서는 안 되고, 우리의 몫으로 있기도 하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반성은 이미 아르미니우스주의로 오염된 그런 분위기 속에서 신구약의 무오성과 신적 권위,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대소요리문답을 성경의 가장 신실한 해석으로 채택하는 정도가 아니라, 다시 말해 최소한의 선에서만 만족하고 머물러서는 안 되고 사실은 좀 더 깊은 우리의 개혁신앙의 역사적 뿌리를 찾아야 당위성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네 가지로 요약해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는 저항의 개념으로서의 오직 성경입니다.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 되어야 한다는 말이 있지만, 사실 개혁주의는 항상 개혁하기 전에 이미 개혁된 신학으로 있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개혁주의가 이미 개혁된 신앙으로 있지만 종교개혁시대 때 지역에 따라 아직도 개혁되지 않을 경우 그 개혁된 신앙이 역사 속에 드러나기까지 같은 진통이 있게 마련입니다.
예를 들어 장로교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고난을 받고 순교한 사람들의 고집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고집이었고, 그리스도만이 왕이요 교회의 머리로 고백하는 자로서의 고집이었습니다. 실제로 어떤 사람은 이런 고집으로 순교를 당할 때 혁명이라는 죄목으로 죽음을 당해야 했지만, 그는 혁명이 아니라 복음을 듣는 것이 혁명이라고 증언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분위기는 루터에게도 있지만, 칼빈의 경우 더 깊은 개혁정신 아래서 하나님의 홀인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 원리로 발견됩니다. 칼빈은 그 당시 교회가 어리석고 무지한 사람들을 미혹하여 진리의 말씀에 경청하지 못하도록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사로 어리석고 무지한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또한 교부들의 훌륭한 글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잘못 설명하거나 혹은 왜곡시켜 황금에서 쓰레기를 모으고 있고, 지혜와 판단력과 정신력을 총동원하여 교부들의 결함과 오류들만을 숭배하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나아가 그런 거룩한 교부들의 합의와 가장 오래된 관례로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하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하지만 좀 더 영적인 통찰을 깊게 하여 이르기를, 사탄이 오랫동안 빈둥거리면서 깊은 휴식을 즐기고 있었다가 어느 정도 그의 흑암을 쫓아내었을 때 오랜 잠에서 깨어나 무기를 들기 시작한 것이 바로 동터오는 진리를 폭력으로 눌러 버리는 일과 제세례파들과 괴상한 악한들을 통해서 불일치와 교리적 논쟁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진리를 희석시키고 마침내 말살하는 일을 행한다고 지적하였습니다. 그 때 그 사탄은 두 무기들, 즉 진리를 폭력으로 누르거나 진리를 불일치와 교리적 논쟁으로 불러일으킴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반대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능력을 대항하며 성령의 자유를 육신의 방종으로 전락시키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사탄과 인간의 모든 훼방에도 성경 자체의 힘으로 그것을 보존한다는 것이 칼빈의 저항의 개념인 것입니다.
여기에 실천적인 의미가 있는데, 종교개혁자들이 말하는 영적인 무기로서 혹은 저항의 무기로서 하나님의 말씀이란 그 말씀을 듣는 것 자체도 저항이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말씀만을 듣는 것은 보다 큰 저항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사회적 운동이라는 것입니다. 진리에 대한 고집 자체가 사회로 하여금 진리를 추구하도록 하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그 한계를 정확하게 긋는 것도 진리 자체만을 사랑한다는 선포인 것입니다. 이런 보이지 않는 메시지에 방해가 되는 어떤 과도함이나 가장이나 침묵을 배제하는 것이 그 진리를 사랑하고 지키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말씀만을 선포하고 바른 성례집례를 고집하는 것이 미래에 어떤 상황에서는 오직 말씀에 의한 저항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 주일 주 앞에 나아와 예배를 드리고,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의 참된 말씀이 선포되고 그 말씀을 듣는 것이 곧 말씀을 대항하는 모든 것에 대한 저항인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진리를 버리고, 진리 때문에 친구들도 나를 버리고 가족들도 나를 버리며 가까운 신앙의 동지들도 나를 버려 진리 때문에 홀로 서 있고 하나님만이 그 증인으로 있을 때, 인간의 의지만으로 홀로 서 있어서는 안 되고, 루터처럼 성경과 더불어 이성 혹은 양심으로 홀로 서 있어서도 안 되고, 오직 성경을 가지고 그 성경과 함께 오직 성경에 의해서 생각하고 말하는 자로서 홀로 서 있어야만 합니다.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오직 성경을 가지고 그 성경과 함께 오직 성경에 의해서 생각하고 말하는 자로서 홀로 서 있는 것, 이것이 저들에 대한 저항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더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궁극적 양식으로서의 좀 더 깊은 의미, 다시 말해 신명기 8장과 마태복음 4장에 나타나 있는 그 의미로까지 나아가는 것이 우리에게 요구되고 있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두 번째는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뿐만 아니라 창조와 섭리, 구원의 모든 역사의 유일한 주체는 분리할 수 없이 유일한 하나님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이라는 내용입니다. 성경이 성령에 의해서 영감 되었고 성경 기자들은 성령의 도구들에 불과하다고 할 때 근원은 오직 하나님 안에 있고 거기에 인간의 것과 혼합된 것이 없다, 혹은 인간 자신의 어떤 것을 덧붙임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성경의 말씀은 인간의 말이 아닙니다. 이는 죽을 인간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입니다. 즉 성경 말씀이 기자의 말일지라도, 고유한 의미에서 그 저자는 하나님 이외에 다른 이가 없고, 그 분의 소유로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는 근거입니다.
성경의 계시와 기록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역사도 이런 성격이 있습니다. 인간도 일하고 마귀도 일하며 하나님도 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인간과 마귀의 역사와 차원적으로(방법과 목적에 있어서) 전혀 다르게 역사하신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렇다고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인간과 마귀에게 있다고 할 때 타락 이후 모든 의지는 어떤 중립적인 의지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죄를 짓고자 하고 죄를 짓는 의지입니다. 이런 의지의 부패성을 인정하지 않으면, 펠라기우스주의나 아르미니우스주의처럼 구원이 시대와 상관없이 인간 의지의 역할에 맡겨짐으로 궁극적으로 구원의 성취와 적용을 파괴시키게 됩니다. 이 점 때문에 도르트 회의에서 아르미니우스를 강하게 정죄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주체이시고 그가 주체라는 사실은 인간의 어떤 것도 들어올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르미니우스는 그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그래서 총회는 아르미니우스를 정죄하였던 겁니다.
그러나 창조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섭리와 역사들을 통하여 일하시는 분은 오직 한 분이시고, 같은 분이시라는 강조는 개혁주의자들의 독특한 길에 있어서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아타나시우스나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를 믿는다는 것은 창조로부터 구원의 모든 역사에 있어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경륜적 통일성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통일적 경륜을 믿는 것입니다. 크리소스토무스 이래 신구약의 실체의 통일성으로서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같은 저자의 통일성은 하나님의 모든 교리의 통일성을 의미하였습니다. 구약의 경륜과 신약의 경륜이 다르다고 해서 구약의 교리와 신약의 교리가 다른 것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이라는 통일성 안에서 경륜의 역사는 다를지라도 동일한 교리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이런 통일성이 종교개혁시대에 부쪄의 로마서 주석과 칼빈의 『기독교 강요』(1539년 판이래) 및 갈라디아서 4장 주석에서 확증되었습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에서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과 관련하여 논쟁이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교리사적으로 이런 면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배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논쟁은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이란 책에서 성령이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는 말씀(요7:39)의 의미는 전에는 오순절 성령 부어주심과 같이 그런 식으로(talis) 없었다는 해석으로 이미 종결된 내용입니다. 조금 더 설명하면 성령이 저희에게 계시지 않더라고 해서 성령의 내주하심 없이도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할 수 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엄밀하게 말해 가룟 유다를 제외한 나머지 사도들은 사도 베드로의 고백과 같은 고백을 한 자들인데, 거기에는 성령의 역사가 없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복음 7장에서 성령이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오순절 성령 강림과 같은 그런 식으로는 계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어거스틴 이래 창조, 섭리, 구원과 같이 외부를 향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은 분리될 수 없고 동시적이라는 것은 정통교회의 공리와 같은 것으로 하나님의 한 실체의 개념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 안에 영지주의에 반대하여 신구약의 통일성과 그 저자로 삼위일체 하나님이 변증되면서 그 변증역사가 결국 삼위일체 교리의 성립의 배경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삼위일체의 개념의 발전은 근본적으로 신구약의 실체의 통일성과 관련하여 사용되어야 합니다. 신구언약의 통일성은 후에 이미 루터와 쯔빙글리로부터 발전된 것이지만, 그 보다 먼저 신구약 통일성은 속성들과 분리될 수 없는 한 실체로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통일성을 먼저 그 배경으로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제1권의 창조자 하나님의 지식이나 제2권 구원자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창조자로서 동시에 구원자로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지식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창조는 오직 성부가, 구원은 오직 성자가 이런 식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1536년판 기독교 강요에서부터 창조를 포함한 모든 사역이 세 위격들의 공통된 사역이지만, 하나님 한 본질 안에 세 독특성들을 강조하고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성자 안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역사하신다는 표현과 같이 각 위격들의 고유한 사역을 강조하였던 겁니다. 그런 고유성도 위격의 질서 안에서 질서의 근거에 있어서 그렇다는 것이고, 각 위격들은 분리가 아닌 구별로만 이해할 것을 강조하였던 겁니다.
따라서 후대 개혁신학자들에게 영향을 주는 칼빈의 경우에도, 신구약의 통일성은 단순히 기독론적인 통일성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경륜적 통일성을 의미하되, 더 좋게 삼위일체 하나님이 매 경륜마다 분리될 수 없이 역사하신다는 의미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동시 통일적 경륜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역시 신구약 사이의 차이가 말로 할 수 없는 은혜의 과잉으로 말미암은 판명성의 차이로 구분된다면, 이 판명성의 차이는 삼위일체 계시의 판명성의 차이와 같습니다. 이에 따라서 구약부터 신약까지 해석할 때, 삼위일체 하나님의 계시와 역사의 점진성을 판명성의 차이로 해석해야 하고, 어떤 판명한 계시의 말씀이 어떤 시대에 계시되었든 처음으로 소급하여 적용할 수 있다는 당위성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하나님은 하나의 주제로 다루어지거나 인간론이나 논리적 개념에 종속될 것이 아니라, 상기의 독특한 이해로 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의 주체성이 다시 발견되어야 합니다.
세 번째는 교회의 통일성, 구원의 성취와 그 서정의 뿌리를 하나님에게만 알려진 영원한 예정론에 두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과거 이신칭의론이 종교 사회적 부패들을 제거하는데 크게 이바지하였습니다. 이신칭의의 핵심은 구원의 길로서 믿음의 방식에 있다. 즉 그 방식은 사회적 계층들을 상대화하였고 각 개인의 가치를 크게 하였으며, 정치 사회적 가치기준들을 변경시켰습니다. 그러나 부정적으로 영원한 구원의 핵심이 인간론 중심으로 바뀌어 지고 거기에 강조가 있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회적 계층을 지나치게 상대화함으로 일시적으로 재세례파 교인들처럼 무정부주의로 발전될 가능성도 있었습니다. 역시 루터주의가 교회역사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은 이신칭의에 있지 않고 성만찬 교리와 개혁과정의 타협(예를 들어 십자가에 대한 이해, 교회의 독립성 등)에 있습니다.
그러나 예정론에 구원이 기초하면,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의존한다는 것 때문에, 전적인 은혜로 인한 감사의 생활을 하게하고 인간론 중심에서 벗어나 자신에 대해서 비판적이고 극히 겸손하게 합니다. 그런 구원론은 성도에게 견인과 강한 인내를 가져다줍니다. 특별히 이방인들에 대한 사랑과 정치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들에 대한 강한 신뢰를 요구하고 선교에 있어서도 인간론적으로 흔들리지 않게 하고 선교지에서도 한 사람의 구원이 없더라도 선교에 대한 일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인내하며 순교까지 할 수 있는 정신을 제공해 줍니다.
이런 예정론은 교회 개혁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보이지 않는 교회를 강조하는 것만큼, 또한 하나님만 아시는 교회에 대한 눈을 가짐으로 성도의 교제에 있어서 인간론으로 빠지지 않게 합니다. 이것은 교회개혁의 보이지 않는 힘입니다. 교회의 부패는 인간론이 강한 끈이 되어 장기간 성도의 교제들이 이루어 질 때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그 보이지 않는 교회에 시간과 공간이나 계층을 초월한 보편의 교회가 있기 때문에, 그리고 인간의 노력과 운동으로 참된 보편의 교회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확신을 갖기 때문에 진리 때문에 고립되거나 화합과 합동에 실패해도 좌절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강조할 사실은 칼빈이 기독교 강요를 처음 썼을 때부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이르기까지 엄밀한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구원의 서정까지 예정론 안에 두었다는 것입니다. 그 내용이 도르트 회의에서 가장 잘 표현되어 있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는 제3장 6항, 8장 1항에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서정 안에서 예정론이 다루어져야 된다는 것은 칼빈의 신학적 발전으로부터 왔다고 생각한 것은 오해입니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 초판부터 사도신경 해석 중 교회론을 예정론에 근거해서 처음부터 마지막 시대까지 모든 교회는 같은 구원의 서정에 따라 구원되는 것으로 해설하고 있습니다. 그에 의하면 구원의 가까운 원인과 먼 원인을 구분하여 영원한 예정과, 죄의 원인은 그런 원인들의 최고의 그리고 가장 최상의 균형적 조화가 있지만, 적어도 하나님의 부르심은 선택의 증거요 그 영광은 선택의 완성이며 칭의도 선택을 나타내는 한 표징에 불과하며 하나님의 계속되는 은혜가 있다면 그것은 선택의 열매이며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무슨 덕이든 선택의 결과라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선택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부르심이 있는 것이고, 선택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완성으로서의 영광이 있는 것이고, 선택으로 말미암아 칭의도 있고, 선택으로 말미암아 계속되는 은혜의 열매들이 있으며, 선택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덕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긍휼에 종속적이고 그것 없이 이룰 수 없는 그리스도의 공로조차도 그 공로의 시초가 그에게 있지 않고 제일원인인 하나님의 결정으로 돌아가며 예정과 은혜의 가장 밝은 빛은 인간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시요 중보자 자신이 현저한 예정의 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칼빈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의 깊이가 있습니다.
그것을 넘어 성경 자체가 개혁신학의 최대의 지지자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다음의 내용을 우리에게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첫째, 구원의 근원은 인간의 의지나 행보 이전에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의지에 최종 원인이 있다(롬9:16). 둘째, 긍휼을 입은 자와 강퍅케 되는 자는 하나님의 한 의지의 두 대상이다(롬9:18). 셋째, 선택은 선악을 행하기 전에 이루어진다(타락전 선택설, 롬9:11). 넷째, 사망과 생명(신30:15,19, 롬 8:38), 환난과 곤고(롬8:35), 악까지도(신30:15; 사45:7) 하나님의 역사의 수단들에 불과하다면,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인 택자는 그 수단들보다 앞선다(롬8:31-39). 다섯째, 만세전의 예정의 내용으로서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의 동일 형상들’은 구원의 서정이 그 내용이다(롬8:29-30). 여섯째, 만물의 역사의 원인은 하나님의 뜻의 의논인 반면, 택자의 예정은 만물을 그의 뜻의 의논에 따라 역사하시는 자의 작정에 따른 것이다(엡1:11).
따라서 중생만 하나님의 전적인 사역이라 강조하고 성화에서는 하나님의 전적사역을 포기하며 하나님과 인간의 공동사역을 강조하는 것은 루터주의 신학이나 아르미니우스신학에 가까운 것입니다. 칼빈은 처음부터 ‘털끝만치라도 행위에 공로를 돌린다면, 그는 성경 전체를 왜곡시키고 변질시키는 것이요 공로라는 말을 사용하는 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모욕하는 자’라고 강하게 비판하였습니다. 그래서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 주님의 의라고 한 것은 그것에 의해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은혜로 이미 의롭다 하신 자기 백성을 연단하여 의에 이르게 하신다고 해석해야 할 것을 강조하였고,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갚으신다는 성경의 표현들이 있지만, 그 표현은 우리 행위가 그런 보상의 원인이 된다는 말이 아니라고 하였던 겁니다. 성화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역사와 인간의 역할은 이미 언급한 하나님의 은밀한 역사의 일반성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열심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사탄과 모든 활동에 방해됨이 없이 그리고 인간의 책임성이 결코 배제되지 않는 목적과 방식에 있어서 그 모든 구원의 역사를 이루신다는 의미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 자신을 지극히 높고 마지막 상급으로 믿는 은혜언약의 핵심사상이 구체적인 삶의 원리가 되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칼빈이 기독교 강요 1536년판에서 츠빙글리의 최고선의 개념처럼 오직 하나님 자신이 무한한 지혜와 의, 선과 긍휼, 진리와 생명이라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전 삶이 하나의 예배로서 하나님에 대해서 굶주리고 배고픈 자가 그로부터 은혜를 받아 그 받은 은혜를 다시 그 원천의 영광으로 돌려보낸다는 의미에서, 복된 삶의 궁극적 목적도 하나님을 아는데 두고 처음과 끝을 여호와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에 두었습니다.
이런 원리는 개혁주의의 삶의 중요한 유산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는 그의 백성이 된다는 것이 아브라함과 맺으신 은혜언약의 내용이고,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역사의 중심내용이라면, 칼빈에 따른 은혜언약 내용의 핵심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 최고의 지혜와 선과 진리와 가장 좋은 선물이 된다는 점에 있다는 말입니다. 지극히 높은 상급으로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선물이었다는 것입니다(창15:1). 물론 핵심적 내용은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성취되고 성령에 의해서 확증과 보증이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런 은혜언약의 핵심내용이 하나님의 나라의 현재와 미래의 중심기둥이 되는 셈입니다.
그렇다면 삶의 중심이나 요구도 우리가 받은 은사나 은혜에 있어서는 안 되고, 하나님 자신이 최고의 선으로서, 우리의 유일한 지혜와 우리의 유일한 부로서 남아 있도록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역시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들과의 관계가 이런 하나님 자신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선물이시라는 사상 안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는 곤비한 자들이요 가난한 자들이지만, 최고 상급으로서 하나님 자신의 긍휼에 피난처로 삼고 행보하는 일만큼 인류의 참된 행복으로 남아 있는 것은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정리하겠는데, 한국장로교회의 정체성은 미국 정통 장로교회의 선언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신학적으로 그 선언은 ‘신구약의 무오성과 신적 권위‘에 대한 엄격한 선언이었고, 장로교회 전통으로 볼 때 ‘인간에게 알려진 성경에 대한 가장 신실한 해석’으로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요리문답들을 채택한 것으로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최소한의 선입니다. 더 나아가야 할 것은 무엇인가? 저항 개념으로서의 오직 성경, 모든 것에 있어서 분리할 수 없는 유일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주체성, 영원한 예정론에 바탕을 둔 신학, 그리고 최고 상급이신 하나님 자신만이 우리의 삶의 원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우리가 고린도후서 2장 17절 말씀을 읽었는데,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는 이 말씀은 감히 말씀드리지만 이러한 이해 속에서만 그 정당성을 가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신구약의 무오성, 그리고 그 말씀에 대한 신적 권위를 의심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는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내용 그리고 대소요리문답의 내용에서 벗어나는 해석들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는 것입니다. 물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내용은 성경 해석에 있어 가장 신실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최상의 내용이라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가장 신실하다고 할 수 있는 그런 내용도 교회 회의를 통해 결정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그 안에는 더 좋은 해석과 덜한 해석이 만나 중간정도의 해석으로 남아 있는 것이지, 더 좋은 해석이 항상 남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더 나아가야 할 것이 무엇인가 할 때 저항 개념으로서의 오직 성경, 모든 것에 있어서 분리할 수 없는 유일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주체성, 영원한 예정론에 바탕을 둔 신학, 그리고 최고 상급이신 하나님 자신만이 우리의 삶의 원리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내용은 결코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으로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신앙의 이름으로 인간론 중심으로 생각하는 아르미니우스주의를 주의해야 하고, 또 엄밀한 개혁과 순교적 고백을 포기하도록 하는 니고데모파도 주의해야 합니다. 인간은 죽고 사라져도 진리만은 남도록 해야 합니다. 마귀의 역사는 우리에게서 진리를 뺏으면 됩니다. 어떤 방법이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빼앗은 순간에 그의 일은 다 끝이 납니다. 힘과 폭력이 그의 주된 무기가 아니라, 가장과 망각과 무지가 그의 더 큰 무기입니다. 그는 진리를 먼저 삶에서 빼앗아 가고 진리를 포기하도록 양심을 설득합니다. 21세기를 위해서 교회가 준비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사실 새롭게 준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발견될 수 있고 개혁신앙이 지금까지 싸워온 같은 가르침들에 표현되어 있는 대로, 가장 오래되고 거짓에 대한 가장 큰 증거인 하나님의 말씀에 더 확고히 서는 것만이 교회의 준비로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