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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장유초 42회 원문보기 글쓴이: 사랑방지기
선비족...고대 남만주에서 몽골지방에 걸쳐 산 유목민족.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중국에 자주 침입하고, 후에 흉노(匈奴)에게 멸망된 동호(東胡)의 후예라고 하나 분명하지 않다. 선비족이 역사에 이름이 나타나는 것은 흉노의 피지배 종족으로서 1세기 초부터이고, 시라무렌강 유역에서 유목을 하고 있었다.그들은 동호(東胡)족의 북쪽 일파이며 동호족의 남쪽 일파는 우환이다. 언어학적으로는 몽골어계통이라는 설이 강하지만 투르크계, 몽골계, 퉁구스계와의 혼혈이라는 설도 있다. 선비족의 흥성은 1세기 흉노족의 몰락과 때를 같이 한다. 87년과 93년에 선비족은 흉노족의 두 선우를 처단하였다. 1세기 말 북흉노가 후한(後漢)에게 격파되자, 선비는 흉노에 이어 몽골지역에서 번영하였다. 2세기 중엽 단석괴(檀石槐)가 선비의 여러 부족을 통합하여 국가를 세운 후 자주 후한에 침입하는 등 중국을 압박하였다.
후한이 망하고 서진(西晋)의 황족 중에 8왕의 난이 일어나자 선비족은 용병으로서 서서히 중국 내부에 이주하게 되었다. 오호십육국시대에 들어서자 흉노의 유연(劉淵)이 서진으로부터 독립하여 전조(前趙)를 세우자 선비족도 이를 따라 중국에 나라를 세웠다. 이 즈음의 선비는 여섯 부족이 각각 강하게 되었다. 각 부족은 나라를 세우게 되었다.
* 모용부(慕容部) (前燕, 後燕, 西燕, 南燕) * 단부(段部) * 우문부(宇文部) (北周) * 흘복부(乞伏部) (西秦) * 독발부(禿髪部) (南涼) * 탁발부(拓跋部) (代, 北魏)
독발부는 탁발씨 (拓跋氏)에서 갈라져 나온 선비족 의 일파이다. 독발부가 세운 남량 과 탁발부 의 북위 를 가리켜 탁발량국(拓跋涼国)이라고도 칭한다.북위의 태무제 탁발도 拓 跋 燾는 元씨로 바꾸었으며 왕족인 독발부는 源씨로 바꾸도록 명했다.이 源씨에서 일본 源씨가 나오고(52 대 사가천황(嵯峨天皇/786.9.7~842.7.15-재위기간은 809.4.1-823.4.16)은 자신의 자녀들에게 미나모토(源)씨의 성을 제수),일본 초대쇼군인 미나모토 요시나리源 賴朝가 가마쿠라 막부를 세우게 된다. 또한 북위(원씨로 개성한 탁발씨)의 속민이던 몽골족들이 북위를 다시 일으켜 원나라를 세우게 된다.
탁발씨에게 밀린 모용씨들은 신라의 황족이 되고~탁발씨에게 밀린 우문씨들은 북주와 수나라를 건국하는데,대하씨로 바꾼 탁발씨의 일파가 다시 당나라를 건국하고,그후 하(서하,대하를 세운 탕구트족(黨項族)를 건국하게 되는 탁발씨이다) 결국,원래 이들은 고구려 고씨,백제 부여씨,한나라 유방의 경우처럼 원래 위씨들의 후예로써 위(북위)를 건국하는것이며,다시 이들이 원씨로 개성한후 그 후예가 원나라를 세우게 된다,따라서 몽골족(선비계)이라는 징기스칸도 위씨의 후예이며,그의 조상인 신라김씨=모용씨도 위씨의 후예가 맞다.
선비족의 일파인 모용씨(신라김씨)는 희씨 황제헌원족 주나라의 혈족인 연나라 왕족이므로 따라서 위씨는 희씨와 같은 족속이고,선비족과 황제헌원족은 같은 선비족인것이다. 수당과 신라가 같은 선비족이듯이.신라의 선조국 진나라가 서융(선비계)계인데,동이東夷의 일원인 강융姜戎 즉 西戎은 견웅이라고도 하는데(제견 반고가한)주나라의 왕비는 주왕실의 조상인 후직(고구려 선조 제곡고신의 아들)때부터 줄곧 강융(강족)이 왕비였다.결국, 서주西周 왕실王室도 모계혈족이 다 강융이었으므로 그들이 강융姜戎의 피가 흐른다는 것이 됩니다.(고대의 왕실은 대대로 세력이 강한 부족중에서 왕비를 받아들이는 전통이 있으므로,결론은 같은 족속인데,만년노 한족들이 돌려말하고 있는것이다)
이 외에 모용부로부터 나와 서천한 토욕혼(吐谷渾.티벳계 민족,당나라와 같은 탁발선비 당항(탕구트도 티벳계민족,당장경의 당도 티벳을 뜻하므로 당나라도 티벳지방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임)도 선비계인데 현지의 강인(羌人)도 융합하였다. 강인은 강족을 뜻한다(현재 학계에선 강족을 페르시아계 소그드인으로 추정하고 있다),강족은 중앙아역사에서 현 우즈벡이 주거지라 하므로,주나라를 건국한 강태공이나 주나라를 건국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강족의 활동지는 바로 중앙아이다(중국역사가 한종족을 둘로 가른듯한 냄새가 나는게~주나라와 강족,흉노 갈족과 한,탁발선비와 당,돌궐 사타족과 조광윤의 송(송의 부활을 외친 주원장이 고려인이라는 주장의 이면에는 주원장이 돌궐사타족이 아닌지 연구해봐야한다고 봄,고구려나 백제도 돌궐계국가라고 한다~즉,흉노란 얘기고~~~신라는 선비족(모용)이 중심이 된 국가로서,신라를 이은 고려나 조선은 신라의 지배층(구유신계급==>사대부==>양반(무신과 문신=고로 원래 무신에서 나온 특수집단이 문신~이들은 신라의 모용선비족이 중심이 된 지배계층의 후예=선비족이 신라이후 주 지배계층이 되었다는 반증) 탁발부의 북위(北魏)는 439년에 화북을 통일하여 이 이후는 남북조 시대가 되었다. 그 후 수의 양견(楊堅)에 의하여 중국이 되었으나 양견은 우문부가 세운 북주(北周)의 외척이다. 동일하게 선비족시기 다얀씨(탁발씨==>개성 大野氏, 대야씨)인 북주(北周)의 귀족이었던 당의 이연(李淵)도 또 선비 출신이다 흉노계는 처음 나라를 세우면 자신의 이름을 연이라고 하거나,국가명을 연으로 하고~또는 대선우 한왕이란 의미에서 한(한은 지역명으로 주로 한수인근을 의미하거나 한중을 의미한다,유연의 한나라를 전조라고 한다,유방의 후예이다)이라고 하거나 흉노 선우의 성씨인 유씨를 썼으며,이민족을 뜻하는 이씨를 쓰기도한다~
묵특선우와 모수리단군의 유사성?
두는 제사지내는것을 의미하고 만은 해를 의미하니 두만은 천왕랑,천군이라는 의미이다.
북부여 1세단군 해모수는 천왕랑이다.흉노어로 티무르이다(또는 鐵勒) 頭曼은 터키어, 몽골어, 만주어 등에서 일만(一萬) 또는 만장(萬長)을 의미하는 ‘tumen’이 그 어원이다. Tumen은 頭曼, 頭滿, 圖們, 土門 등의 한자를 차음하였다,
고구려의 동명성왕(東明聖王)과 부여의 동명왕(東明王)의 동명(東明)은 몽골계어 Tumen 즉, 萬長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Tumen’은 만주어 ‘Tumen(萬)’, 순수 우리말인 '즈믄'(千)과 같은 어원인 것 같다. 이는 흉노의 頭曼과도 같은 의미이다.
한편, 추모(鄒牟)는 몽골의 후예인 티무르의 ‘Timur’와 같은 계열일 수도 있다. ‘Timur’는 터어키계어로 ‘鐵(쇠)’ 를 의미한다. 고국원왕(故國原王)의 이름이 ‘사유(斯由)’ 또는 ‘쇠(釗)’이었던 것으로 짐작하면, 추모왕(鄒牟王)은 일명 '쇠왕' 또는 ‘철왕’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武->wu, 無->wu, mo, 巫->wu]처럼 오늘날 한국어 '무(mu)' 발음의 많은 경우는 중국어로는 '우(wu)'가 된다(즉 m>w). 치우(蚩尤)’ 즉, '치무'(티무)도 ‘Timur(鐵)’와 같은 의미인 듯 하다. 즉, '구리로 된 머리와 쇠로 된 이마' 는 '치', '티' 등을 우리말 '쇠'(고형물:시), 무(Mur)를 '머리'로 볼 수도 있다.
선우(單于)는 유목국가의 군주를 뜻하는데, ‘撐犁孤塗單于(탱리고토 또는 탕리코토선우’)의 약어이다. 몽골어계에서 撐犁(탕리 또는 탱리)는 하늘을 의미하는 ‘텡그리’(Tengri의 취음)로 단군(檀君)의 원어로 추측된다. 그리고 孤塗(고토 또는 코토)도 몽골어계에서 아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중국이 변방의 여러 부족을 유린 또는 복속시킬 때 내린 봉호(封号)로서 사용되기도 했다. 撐犁孤塗는 ‘Tangut(탕구트)’의 취음으로 6-14세기 초 주로 중국 서북부에서 활동한 티베트계의 유목민족으로 일부는 서하(西夏: 1227년 칭키즈칸에 의해 멸망)을 세우기도 했다.
單于(Shanyu)라는 칭호를 처음 사용한 것은 흉노(匈奴)이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문헌상으로는 『史記』의 「匈奴列傳」에 頭曼單于(冒頓單于의 아버지)가 나타나는 것이 처음이다.
당항족을 탕구트라고 하며,당항족이 세운 나라는 하(서하,대하)가 있다,이들은 당나라와 같은 탁발선비족으로 당황족 이씨처럼,이들도 이씨로 바꿨다,이는 이민족인 동이를 뜻하는 글자이다.나무 목자에 아들자라고 하는데,이때의 나무는 신단수이며 황제를 비롯한 3황5제가 제위에 오르면 입는다는 숙신(조선)의 신목으로 만든 옷이며,천자의 권리를 의미한다. 당항족은 강족의 한분파이다(알씨의 후손이기도 하고,강태공의 후손이라는 소리)
결론은 선비족은 웅녀족인 알씨족 후예이다.
천녀인 웅녀는 신궁의 궁주가 되고,삼한의 신녀가 되었으며,무사집단은 이를 수호하는 특수집단이 되는데 이를 선비라 한다,이들이 수장이 조선비왕이 되는것이다,연개소문이 연태조(연왕)아들로서 조의선인의 지도자자리인 국선으로 대대로 대막리지의 자리에 오르는것과 같은 이치인것이다. 신궁의 궁주인 웅녀(촉과 한중의 궁주)를 일컬어 원화 또는 중화라 하는것이다. 웅녀는 알씨이다,이들을 수호하는 무사무리,알씨족이 바로 선비이다.
묵돌,묵돈,묵특(冒頓)이라고 불리우는 묵돌선우는 두만선우의 아들로서 頭曼單于가 후비 閼氏(연씨 또는 알씨라고 하며 흉노 언어로 황후를 지칭함=흉노어 알지)에서 태어난 아들을 後嗣(후사)로 삼기 위해 적대관계에 있던 月氏(월씨) 부족으로 화평을 명목으로 하여 冒頓을 인질로 보내놓고 곧바로 月氏를 공격해서 冒頓을 죽게 하였다. 그러나 冒頓은 용케 살아남아 아버지 頭曼單于에게로 돌아와 좌현왕이 됐다가. 두만선우를 죽이고 선우자리를 찬탈한 자인데~한고조 유방은 흉노를 견제하기 위해 측근인 한왕 신을 북방에 배치하고 흉노 토벌을 명한다. 하지만 한왕 신은 흉노 토벌이 어렵다 생각하여 화평을 시도했고, 이후 고조가 이를 책망하자 흉노로 투항해 버렸다. 한왕 신이 투항하자 묵돌은 그의 인도를 받아 대(代)의 땅을 공격해 들어갔고, 현재의 산서성 동쪽의 평성에 이르렀다. 한 고조 역시 대군을 일으켜 이에 맞섰으나, 묵돌은 이를 무찌르고, 한나라 군대를 백등산에 몰아 넣어 7일간 포위하였다. 이후 한 고조는 묵돌의 연지(선우의 왕비)에게 선물을 주어 포위를 풀고 장안으 로 도망쳤다. 한 고조가 죽고, 효혜제가 즉위하자. 묵돌은 고조의 왕비인 여태후에게 "나도 독신이고 그대도 독신이니 잘해보자"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 희롱했다, 모수리단군의 모수는 묵돌,묵돈,묵특이라고도 하는데,해모수의 해를 쓰지않고,모수만 이어받아 모수리라고 한다,북부여 3세단군부터는 고씨성을 쓴다,고주몽은 북부여 7세 단군이다,
여기서 모수(묵특,묵돈)은 다른곳으로 이어진것이 아닌가 한다, 모수리단군이 백산에서 한왕 유방을 패배시켜 죽이려하자 유방의 신하가 꾀를 써서 모수리단군의 부인인 신궁의 궁주인 알씨를 움직여 알씨의 도움으로 목숨을 부지한다
흉노의 흉=선=웅=환웅천왕족이라는 의미이며,고구려 구려족의 구를 변조한 글자. 교활한 만년노예 한족이 조선9족을 분할해 만든게 소수민족이다. 단석괴는 단군조선의 단군왕검의 혈족,단석괴가 통일한 선비족이 분열하여 선비,몽골,거란으로 갈리게 된다고 한다.
고구려는 고씨의 구려라는 말로
1,고씨의 구려국 2,고씨의 구려(9려=9이=동이제족=조선9족) ==>구려족이 고조선의 조선9족을 다물(회복)했기 때문
句=勾(陈星)=북극성
북극성이 천문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는 말안해도 알것이다, 즉,해를 숭상하는 조선고시씨의 방계혈족인 황제(화서씨)의 직계후손인 전욱고양(고이족=구려족)의 직계혈손 고주몽이 구려국(bc2240)을 승계하며 무려 2200여년이 지나 고구려를 건국(bc37)하게 된다. 결론은,부여족의 일파인 고주몽이 부여족과 고이족을 통합한것이 고구려이다. 여기서 구려와 고구려를 의미하는 句=勾라는 글자를 유의깊게 살펴보아야한다. 만년노예 한족이 자신들이 내세울만한 조상과 역사가 없어서, 고구려황실인 고주몽가계의 직계조상인 전욱고양과 황제를 한족의 조상으로 날조하다보니, 고구려와 고구려의 시원인 구려국의 실제역사가 걸리게 되어 句(勾)==>匈로 흉할흉(凶)자를 넣어 구려국과 고구려의 백성을 분할해 흉(=슝=슌=선(조선의 선)족을 만들어내게 된다,이들은 모두 중국어로 xiong이거나 원래 고어발음이 흉또는 슝이다(실제는 부여족일것으로 사료된다~~~흉족을 비하해서 奴를 붙여 흉노족으로,몽족을 비하해서 몽고족으로 하듯)
고구려는 돌궐계(퉁구스족)국가라고한다,백제도 마찬가지다. 즉,돌궐족은 자신들이 흉노의 일파라 말하고 있다. 그럼,결론은 선족(슌족=흉족=흉노족)이라 칭하는 조선-고구려(선족=조선9족)가 분립하여 돌궐흉노와 선비흉노가 된것이다,선비흉노가 분할하여 거란-말갈-여진-몽고-만주족이 된것이다. 전욱고양의 후손이 요임금이고,요임금의 직계가 고구려의 고주몽이고, 제곡고신의 후손이 순임금이고,순임금의 직계가 진(진한)시황의 진(과 6국)이고,진과 6국의 후손이 6국(6촌)연맹의 신라로서,신라도 선비족이고,진도 선비족이다~
북위사에 보면,선비족은 황제의 후손이다~(한족은 황제의 후손이 아니고~~~) 따라서 선비족은 고조선의 선족=조선(=조선9족)이고,고구려에서 분가한 족속이며. 또한 신라의 방계족속이다-선비족에서 여진-몽고-만주가 나온 전욱고양은 황제의 직계후손이고, 제곡고신은 소호의 후손으로,소호는 황제의 후손이다 (일설에는 소호는 조선고시씨의 직계후손인 소호금천이고,황제는 조선고시씨의 방계후손이라고 한다,
역사상 소호금천이 황제보다 먼저 존재했고,소호계(제곡고신계)와 소전계열인 전욱고양(황제계)의 싸움이 주나라 이전의 역사이므로, 모든 혈통계보를 황제로 통합해놓은 역사는 만년노예한족의 날조에 불과할것이다~)대륙사를 보면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선비족의 중국통일과 삼한중의 하나인 선비족 신라의 삼한통일이 그궤를 같이하며 또한 중국통일시 등장한 선비족의 역사가 백제와 신라의 흥망성쇠와 거의 같으며 민족또한 같다,
고구려가 돌궐흉노계이면,백제도 돌궐흉노계인데 흉노족의 흥망성쇠와 돌궐,선비족의 흥망성쇠가 고구려,백제,신라의 흥망성쇄와 그궤를 같이할뿐만 아니라 중국을 통일한 선비족역사와 삼한을 통일한 선비족 신라의 역사가 어쩜 이리도 같을까? 고구려 후반기 등장하는 국가는 죄다 돌궐계와 선비계국가이다 삼국지에 등장하는 위,촉,오의 지명들이 대부분 백제의 지명이다. 또한,백제의 공격으로 북위를 멸망으로 몰고갔으며, 북위의 멸망으로 수나라가 등장한다는것
의문점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신라는 처음엔 고구려와 백제의 부속국가였으며, 백제와 고구려는 한성(한나라=백제한성)쟁탈전이 심했으며, 고구려는 명사에서 보듯,한을 완전히 병합한 나라로서, 아시아의 패자였던 국가이다
즉,백제의 땅에서 벌어진 일이 한(고구려에 복속된 한나라 그리고,고구려에서 분가한 백제)-위촉오삼국-위진남북조-수-당이다~
고구려말기 역사를 보면, 당항성을 공략한 백제(당항성=당주=당나라?)와 이를 다시 강탈한 신라=>백제멸망과 고구려멸망으로 이어지는데~~~ 수당은 선비족국가(선비흉노계)이고, 신라도 선비족국가이다 고구려는 돌궐흉노계이다
신라가 나당전쟁에서 승리하고 난후 선비족의 역사는 사라지면서 한족들이 말하길,당나라는 한족사이고,선비족은 한족에 융화되었다고 한다~~~정말 웃기지않는가? 만약,현중국사에서 말하는 대로 당나라가 대륙의 주인이라면 자신들 민족이 사라지도록 한족화를 진행하고, 노예에 불과한 하잘것없는 집단들의 문화를 배우고 익히려하겠는가?
이건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다. 지배민족이 피지배민족을 영구히 지배하기 위해, 정책적으로 확연히 극심한 차별은 금지하거나 피지배민족을 동화시키려고 수단을 강구하긴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극히 일부에 속하며, 또한 반드시 그에 수반하여 타민족의 구심점이 되는 인사는 제거하고,구심점이 되는 문화는 철저히 제거한다. 그런데., 만년노예인 한족에게 동화되었다고~~~ 이거 웃기는 소리다~~~ 지배받는 노예족속이 뭔 문화가 있냐? 문화란 원래 등따스하고 배부른 자들의 문화로서, 지배자문화가 본바탕이된다. 지배층과 지배민족의 문화를 놔두고, 할일없이 지배나 당하며,수탈,착취나 당하던 자들의 문화인 노예문화에 흡수융화되었다고~~~ 만년노예족속 짱개한족이여~~~ 어거지는 그만!!! 선비족간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신라가 대륙을 차지하고, 천년왕조 신라의 찬란한 문화가 선비족(=실은 선족=흉(노)=조선9족=동이족)의 문화를 대표했으며, 당나라는 신라제국내 일개소국에 불과하여 당나라의 선비족은 신라선비족의 문화에 압도되어 흡수되었는데. (신라(황제의 후손인 소호금천의 직계)와 당(황제를 조상으로 함)은 같은 조상을 둔 같은 선비족혈족이다) 만년노예 한족이 또 역사갖고 농간질해서 선비족은 한족에 융화되어 사라졌다고 하는것이다. (원래 한족은 환국조선=환국=한국의 한민족이다~) 북위가 망한후 이 나라의 선비족 일파들이 바로 60여년후에 그들의 長子이자 고조선의 강력한 후계자였던 고구려와 백제를 먹어버린 隋와 唐나라가 되는것이다. 이 얼마나 역사의 아이러니 인가! 北魏는 탁발씨가 나라를 일으켜 315년부터 530년까지 비교적 장수한 북방왕조중에 속한다 .
고구려인의 북위에서의 영향력
『위서』 <태조기(太祖紀)>에 의하면 398년에 북위의 수도인 업( -하북성 남부지방)에 고구려인 등 36만과 기술자ㆍ예술가 10만 명이 수도에 가득 차 있다는 기록이 있다. 혹자는 이것을 광개토대왕 8년에 고구려군이 이곳까지 쳐들어간 증거라고도 하고, 북위가 고구려인을 잡아간 것이라고 이야기도 하나, 단편적인 기록이라 입증하기는 어렵다. 다만 북위가 이곳에서 머물지 못하고 곧 수도를 만리장성 인근의 평성(平城)으로 옮긴 것으로 볼 때, 고구려인이 북위의 압력세력이었지 끌려온 자들은 아니라고 보인다. 하지만 북위에 고구려 출신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을 알려주는 자료이기는 하다. 5세기 후반, 북위의 정권을 장악한 자는 고조(高肇)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북위 고조(高祖)의 여동생인 고평공주와 혼인하여 상서공(尙書公)이란 높은 요직에 오르고, 여동생을 고조의 황후로 만들었다. 여동생은 문소태후(文昭太后)가 되어 세종(499∼515년)을 낳았다. 그의 조카딸은 세종의 황후(宣武皇后)가 되기도 하며, 조카 맹(猛)은 장락공주와 혼인함으로써 북위 황실과 3중의 혼인관계를 맺게 되었다. 고조는 외척으로 족당(族黨)까지 형성하는 최고의 권력을 누리기도 했다. 이렇듯 권세를 누린 고조의 집안은 발해(渤海)고씨라고 알려져 있다. 그의 5세조 고고(高顧)는 4세기 초 서진이 멸망할 무렵에 난리를 피해 고구려로 갔다고 한다. 그의 가문은 고구려에서 계속 살았고, 고조와 문소태후도 고구려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그가 470년대에 고구려에서 북위로 돌아오자 곧 여위장군에 봉해지고, 여동생을 황후로 들여보내는 놀라운 출세를 하게 된다. 『위서』를 비롯한 기록에는 그가 후한시절의 명문집안이었던 발해고씨였기 때문에 우대를 받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발해고씨의 대부분이 100년 이상을 요동지방과 고구려에서 망명생활을 했다가 북위시절에 하나둘씩 망명한 자들이고 보면, 백년 전의 명문집안 출신이란 이유로 그가 귀국하자마자 그렇게 쉽게 권력의 핵심에 오를 수는 없다고 본다. 고구려에서의 행적은 전혀 기록되지 않고 단지 이름만 기록된, 중국에서 고구려로 건너간 고조의 선조들을 한족으로 보는 것은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그의 선조들이 160년 간이나 고구려에서 생활했다면 완전히 고구려인이 되었을 것이지, 여전히 한족의 정체성을 갖고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또한 북위가 척발선비족의 국가인 이상, 한족이기 때문에 환영받았을 가능성도 희박하다. 그런데, 그의 동생 고현(高顯)은 고구려대중정(大中正)이란 고구려 출신 인물들을 천거하는 벼슬을 받았다. 그것은 당시 북위에 고구려에서 온 사람들이 대단히 많았다는 것을 의미하며, 고조의 가문이 고구려인을 세력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 자리를 고조의 집안에서 맡게 된 것은 그들이 고구려인이기 때문일 것이다. 고조와 친척이 되는 고잠(高潛)은 고구려에서 돌아오자 곧 북위의 부마도위(왕의 사위)가 되었고, 고윤(高允)은 북위의 대표적인 학자이자 정치가로 대접받았다. 남북조시대 북조에는 고구려인으로서 북연을 세운 고운(高雲)을 비롯하여 북주(北周)에서 10주(州)의 군사권을 지니기도 했던 고림(高琳) 등 출세한 고구려인이 많았다. 북연을 건국한 고구려인 고운(발해고씨==>한족들은 무조건 중국사에 등장하는 고씨는 발해고씨로 우김~~~) 고운의 할아버지 고화는 고구려에서 갈라진 일파로 자칭 고양씨의 후예라 하여 성씨를 고씨로 했다. 앞서 모용보가 태자로 있을 때 고운은 무예직으로 태자를 가까이 모시고 있었는데 모용보가 고운을 양자로 삼고 모용씨라는 성을 주었다. 우리가 태왕사신기에서 보았던 바로 그 고구려인 고운이다,주나라 왕족 희씨의 일족으로 춘추전국의 연나라왕족(주무왕의 동생 소공석=연왕 모용석)인 모용선비족의 후예가 세운 5호16국의 연나라(후연)의 왕족 모용보의 양자 모용운(고운)이 세웠다고 하기도 하고,그의 부장 풍발(한족이라고 우기나 실은 흉노족)이 세웠다고도 하나,공통점은 모용운이 바로 고구려인 고운이고,그를 살해한 고운의 총신 이반과 도인을 풍발이 처단하고 자리를 차지하였으며,그의 동생 풍홍이 제위를 이은뒤 북위의 침입을 받아 고구려로 도망갔다가 장수왕에게 죽임을 당했다
北魏 (後魏) (북위 / 후위) 386 ~ 534 선비족(鮮卑族)의 탁발부(拓跋部)가 중국 화북지역에 세운 북조(北朝) 최초의 왕조(386∼534). 원위(元魏)·후위(後魏)라고도 한다. 3세기 중엽 탁발부는 내몽골의 바옌타라[巴彦塔拉] 지방에서 세력을 넓혔으나, 4세기 초 이들의 세력을 이용하여 북변의 보위(保衛)를 도모하려는 서진(西晉)으로부터 산시성[山西省] 북부의 땅을 얻음으로써, 그곳에서 세력을 신장하였다. 315년 군장(君長)인 탁발 의로(拓跋盧)는 서진의 관작을 받고 대왕(代王)으로 봉해졌다. 탁발 십익건(拓跋什翼) 때 전진(前秦)의 부견(符堅)과의 싸움에 패하여 정권이 와해되었지만, 부견이 비수(水)전투에서 패한 기회를 이용하여 탁발 규(拓跋珪:후의 道武帝)는 나라를 재건하고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국호를 위(魏)라고 하였다(386). 이어 내몽골 여러 부족을 평정하고 후연(後燕)을 격파, 허베이[河北] 평야에 진출하여 국도를 평성(平城), 즉 지금의 산시성[山西省] 다퉁[大同]에 정하였다(398).
위는 중국 고래의 전통에 의한 국가 체제를 채용하기로 정하고, 화북지방을 평정하기 위하여 몽골에서 데려온 여러 유목 부족을 해산시켜 부민(部民)을 군현(郡縣)의 호적에 편입하게 하였다. 그리고 훈공이 있는 부족 중의 유력자에게는 관작을 수여하고 한족(漢族)의 명문(吊門)과 똑같이 고급관리로 채용하여 귀족제의 기초를 이룩하였다. 명나라 원제(元帝) 때 남조(南朝)의 송(宋)을 공략하여 허난[河南]지방의 땅을 빼앗았고, 태무제(太武帝) 때 하(夏) ·북연(北燕)·북량(北凉)을 멸망시킴으로써 5호 16국(五胡十六國)의 난을 종식시켜, 439년 마침내 북위는 강북지역 통일을 완성하였다. 그뒤 선비족의 한화(漢化)가 촉진되었는데, 특히 효문제(孝文帝)가 즉위하자 국도를 뤄양[洛陽]으로 옮겨(494), 호복(胡朊)·호어(胡語)를 금하고 호성(胡姓)을 한인(漢人)처럼 단성(單姓)으로 고치게 하였으며, 황족인 탁발씨도 원씨(元氏)로 개성(改姓)하였다. 효문제는 한화정책과 함께 봉록제(俸祿制)·삼장제(三長制)·균전법(均田法) 등을 창시하여 북위의 국력과 문화가 크게 발전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북방민족 고유의 소박상무(素朴尙武)의 기풍이 쇠퇴하고, 사치스럽고 문약(文弱)한 경향이 일어났다. 그리고 나이 어린 효명제(孝明帝)를 섭정한 영태후(靈太后)가 지나치게 불교를 존숭하여, 사탑(寺塔) 건축에 국비(國費)를 낭비함으로써 국정을 어지럽게 하였다. 따라서 도둑이 들끓고, 524년에는 북진(北鎭) 병사의 반란이 일어났다. 이 난을 진압할 때 큰 공을 세운 북방 민족의 무장(武將) 세력이 강력해져, 마침내 그들의 수령 이주영(爾朱榮)이 정권을 전단(專斷)하게 되었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이주씨(爾朱氏) 일당은 그의 부장(部將)인 고환(高歡)에게 격멸되었다. 그로부터 우문태(宇文泰)와 고환의 대립이 격심해졌으며, 따라서 양자는 각각 북위의 종실을 천자로 옹립하였다. 534년 우문태는 고환의 전횡(專橫)을 증오하여 우문태에게 의지한 효무제(孝武帝)를 살해하고, 이듬해 문제(文帝)를 옹립하여 즉위하게 하였다. 이처럼 북위는 서위(西魏)와 동위(東魏)로 분열되었는데, 동위는 550년 고환의 아들 양(洋)에게 빼앗겨 북제(北齊)가 되었으며, 서위는 556년 우문태의 아들 우문각(宇文覺)에게 빼앗겨 북주(北周)가 되었다.
북위 효문제
평성에서 낙양으로의 천도가 이루어진 것은 493년으로 효문제의 시대입니다. 490년 섭정으로 있던 풍태후가 사망한 이후 효문제의 친정이 시작되었는데 효문제는 풍태후의 노선을 계승하여 중앙집권화와 한화를 목표로 하고 있었습니다.그런데 평성은 선비족의 출신 귀족들의 영향력이 매우 강했기 때문에 효문제는 낙양으로 천도함으로써 귀족들의 영향력을 감소시키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습니다. 이를 위해 남제(南齊)를 정벌한다는 핑계를 대고 낙양까지 이르게 되었는데 신하들이 남제에 대한 정벌을 극구 만류하자 그 대신에 낙양으로 천도를 한다는 명목으로 천도를 하게 됩니다. 이후 효문제는 탁발(拓跋)이라는 선비족의 성을 원(元)으로 바꾸고 신하들에게도 새로운 성을 주었으며 선비족 언어와 선비족의 관습을 금지하는 등 강력한 한화 정책을 추진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개혁 정책은 전통적인 선비족 귀족들의 반발을 불러왔고 496년 옛수도 평성에서 반란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 반란에는 황태자인 원순도 참여했는데 효문제는 반란을 진압한 후 원순을 폐하고 죽입니다. 499년 효문제는 33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 효문제의 시대를 북위의 전성시대라고 합니다.
선비족의 한족식 성씨 변화 출처:http://en.wikipedia.org/wiki/Change_of_Xianbei_names_to_Han_names
Tuoba (拓拔) (imperial clan name) -> Yuan (元) 원희룡 원혜영 원세훈 l Gegu (紇骨) -> Hu (胡) 胡锦涛, 胡耀邦(호진타오, 호요방) l Pu (普) -> Zhou (周) 周恩来(주은래) l Wapen (嗢盆) -> Wen (溫) 温家宝(온자오보) l Kezhuhun (渴燭渾) -> Zhu (朱) 洪武帝 朱元璋, 朱镕基(주원장, 주용기) l Budahan (步大汗) -> Han (韓) 한 한혜진 한승수, 한명회 한화갑 l Qiulin (丘林) -> Lin (林) 임 임경옥 임지순 임하룡 l Shilou (是樓) -> Gao (高) 고 고두심 고승덕 l Heba (賀拔) -> He (何) 하 하희라 하명중 l Dugu (獨孤) -> Liu (劉) 유 유방 l Chekun (車焜) -> Che (車) 차 차인태 차범근 l Ruogan (若干) -> Gou (苟) 구 구자경, 구인회 l Balielan (拔列蘭) -> Liang (梁) 양 양주동 양혜은 l Bolue (撥略) -> Su (蘇) 소 소찬희 소지섭 l Chiluo (叱羅) -> Luo (羅) 나 나경원, 나운영 l Pulouru (普陋茹) -> Ru (茹) 여 여운형, 여운계 l Yidoujuan (壹斗眷) -> Ming (明) 명 명계남 명수빈 l Poduoluo (破多羅) -> Pan (潘) 반 반기문 반효정 l Chigan (叱干) -> Xue (薛) 설 설수현 l Qinu (俟奴) -> Qi (俟) 사 사미자 l Houmochen (侯莫陳) -> Chen (陳) 진 진대제, 진영호 l Tailuoji (太洛稽) -> Ji (稽) 계 계은숙 l Yuchi (尉遲) -> Yu (尉) 위 위성미 l Baba (拔拔) -> Zhangsun (長孫) 장손 장손무기 l Daxi (達奚) -> Xi (奚) 해 해모수 l Tufulu (吐伏盧) -> Lu (盧) 노 노무현 l Molu (莫蘆) -> Lu (蘆) 노 노태우 l Qiudun (丘敦) -> Qiu (丘) 구 구봉서 l Buliugu (步六孤) -> Lu (陸) 육 육영수 l Wuniuyu (勿忸于) -> Yu (于) 우 우장춘 l Shiben (是賁) -> Feng (封) 봉 봉두완 l Hugukouyin (胡古口引) or l Gukouyin (古口引) -> Hou (侯) 후 후인정 l Yuyuanzhen (郁原甄) -> Zhen (甄) 견 견미리 l Yifu (乙弗) -> Yi (乙) 을 l Washilan (嗢石蘭) -> Shi (石) 석 석종철 l Qujin (去斤) -> Ai (艾) 애 애수근 l Kediyan (可地延) -> Yan (延) 연 l Shilian (是連) -> Lian (連) 연 l Aluhuan (阿鹿桓) -> Lu (鹿) 록 l Taluoba (他駱拔) -> Luo (駱) 락 l Boxi (薄奚) -> Bo (薄) 박 l Wuwan (烏丸) -> Huan (桓) 환 l Suhe (素和) -> He (和) 화 l Helai (賀賴) -> He (賀) 하 l Helou (賀樓) -> Lou (樓) 루 l Afugan (阿扶干) -> A (阿) 아 l Yuhun (谷渾) -> Hun (渾) 혼 l Pilou (匹婁) -> Lou (婁) 루 l Qilifa (俟力伐) -> Bao (鮑) 포 l Dieyun (牒云) -> Yun (云) 운 l Shiyun (是云) -> Shi (是) 시 l Chili (叱利) -> Li (利) 리 l Fulü (副呂) -> Fu (副) 부 l Ruluo (如羅) -> Ru (如) 여 l Pulan (僕闌) -> Pu (僕) 복 l Ruokouyin (若口引) -> Kou (寇) 구 l Hege (賀葛) -> Ge (葛) 갈 l Qifu (乞扶) -> Fu (扶) 부 l Kedan (可單 or 渴單) -> Dan (單) 단 l Qiji (俟幾) -> Ji (幾) 기 l He'er (賀兒) -> Er (兒) 아 l Tuxi (吐奚) -> Gu (古) 고 l Chulian (出連) -> Bi (畢) 필 l Chilü (叱呂) -> Lü (呂) 려 l Monalou (莫那婁) -> Mo (莫) 막 l Xidoulu (奚斗盧) -> Suolu (索盧) 색노 l Moluzhen (沒路真) -> Lu (路) 노 l Hudigan (扈地干) -> Hu (扈) 호 l Muyu (慕輿) -> Yu (輿) 여 l Gegan (紇干) -> Gan (干) 간 l Qifujin (俟伏斤) -> Fu (伏) 복 l Qutu (屈突) -> Qu (屈) 굴 l Talu (沓盧) -> Ta (沓) 답 l Jiepi (解枇) -> Jie (解) 해 l Qijin (奇斤) -> Qi (奇) 기 l Xubu (須卜) -> Bu (卜) 복 l Damogan (大莫干) -> Ge (郃) 합 l Ermian (尒綿) -> Mian (綿) 면 l Gailou (蓋樓) -> Gai (蓋) 개 l Suli (素黎) -> Li (黎) 려 l Chimen (叱門) -> Men (門) 문 l Suliujin (宿六斤) -> Su (宿) 숙 l Bibi (馝纰) -> Bi (纰) 비 l Tunan (土難) -> Shan (山) 산 l Wuyin (屋引) -> Fang (房) 방 l Shuluogan (樹洛干) -> Shu (樹) 수 l Maojuan (茂眷) -> Mao (茂) 무 l Youlian (宥連) -> Yun (雲) 운 l Gedouling (紇豆陵) -> Dou (竇) 두 l Kudi (庫狄) -> Di (狄) 적 l Bulugen (步鹿根) -> Bu (步) 보 l Xiqihai (係俟亥) -> Hai (亥) 해 l Yizhan (乙旃) -> Shusun (叔孫) 숙손 l Qiumuling (丘穆陵) -> Mu (穆) 목 l Nianchi (輾遲) -> Zhan (展) 전 l Feilian (費連) -> Fei (費) 비 l Qilian (其連) -> Qi (綦) 기 l Kehou (渴侯) -> Gou (緱) 구 l Chilu (叱盧) -> Zhu (甄祝) 견축 l Heji (和稽) -> Huan (緩) 완 l Tulai (菟賴) -> Jiu (就) 취 l Dabo (達勃) -> Bao (褒) 포 l Duguhun (獨孤渾) -> Du (杜) 두 l Helan (賀蘭) -> He (賀) 하 l Gexi (紇奚) -> Ji (嵇) 혜 l Yuele (越勒) -> Yue (越) 월 l Chinu (叱奴) -> Lang (狼) 랑 l Kuruguan (庫褥官) -> Ku (庫) 고 l Wuluolan (烏洛蘭) -> Lan (蘭) 란 l Yinalou (一那蔞) -> Lou (蔞) 루 l Yufu (羽弗) -> Yu (羽) 우 l Keba (柯拔) -> Ke (柯) 가 l Bulugen (步鹿根) -> Bu (步) 보
선비鮮卑족은 우리와 한 핏줄?
우리는 선비, 또는 선비족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다. 동양사나 한국 고대사를 보면 우리의 주변민족 또는 북방의 한 오랑캐 족속으로 선비라는 민족이 존재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선비족에 대하여 중화사관에서는 소위 ‘춘추전국(단군조선이 약화됨에 따라 단군조선의 연방소국들이 독립하고자 반란을 일으켜 들고 일어난 혼란한 시기)’시대에 등장하여 남만주와 몽골지역에서 활동하다가 서기 후 이른바 5호16국시대를 거치면서 사라진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선비족은 고대 동아시아 역사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수(隋, 영어:Sui Dynasty, 581년 ~ 619년)나라 나, 북위 정권의 뿌리를 이루고 있다는 학설이 강력히 제기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선비鮮卑라는 말에서 卑를 보면 ‘저속하다, 낮다, 천박하다’ 라는 뜻이 있다. 이것은 차이나족속이 자기중심의 중화사상에 입각하여 역사를 서술하면서 주변 한민족을 비하하여 부르며 붙인 이름이라는 것은 참역사학계에서는 다 아는 일반상식이다. 자기네를 중심으로 두고 주변의 네 방향에 자리 잡고 있는 던 4 이(四夷)한겨레, 즉 큰 활을 쏘는 네 부류의 한겨레를 이만융적(夷蠻戎狄)이라고 표현하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이에 따라 중화사대주의자들이 득세한 조선왕조 시대를 거치면서 우리는 선비족은 우리와는 상관없는 북방의 이민족으로 배워왔다. 백제와 고구려의 도성에 침범한 소정방과 설인귀의 당나라군대가 아주 작정하고 착수한 제일의 만행은 당시까지 존재하던 단군조선의 사서 등 고사서를 모두 불태우거나 약탈한 것이다. 그리고 차이나족의 거수국, 이씨정권은 차이나중심의 사서만 남은 상태에서 이것을 베껴다가 우리역사의 기틀을 잡는다. 이것이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더욱 강고해졌고, 정치적 광복이후에 그대로 이어져 오고 있다. 그래서 선비족은 우리와 남남이 되었다. 그러나, 단군세기 등 참역사 사료를 보면 선비족이 우리와 남남이 결코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15세단군 대음(후흘달)재위51년 기미40년(서기전1622년)단제의 동생 대심을 봉하사 남선비의 대인으로 삼다.
둘째, 32세단군 추밀 재위30년 갑인3년(서기전847년)선비산의 추장문고가 공물을 바쳤다.
셋째, 삼국사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오는데, 보면 고구려시대까지만 해도 선비족은 고구려연방의 한 연방자치국으로 존재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즉 당연히 선비족의 역사는 우리의 역사라는 것이다. 유리명왕 11년(서기전 9) 여름 4월에 왕은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선비(鮮卑)는 [지세가] 험한 것을 믿고 우리와 화친하지 않으면서, 이로우면 나와서 노략질하고 불리하면 들어가 지키니 나라의 근심거리가 된다. 만약 이들을 굴복시킬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장차 그에게 후한 상을 줄 것이다.” 부분노(扶芬奴)가 나와서 아뢰었다. “선비는 [지세가] 험하고 굳은 나라이고 사람들이 용감하나 어리석으므로, 힘으로 싸우기는 어렵고 꾀로 굴복시키기는 쉽습니다.” 왕은 “그러면 어찌하면 좋은가?”고 물었다. [부분노가] 대답하였다. “사람을 시켜 배반한 것처럼 해서 저들에게 들어가 거짓으로 ‘우리나라는 작고 군대가 약하고 겁이 많아서 움직이기 어렵다.’고 말하게 하십시오. 그러면 선비는 필시 우리를 업신여기고 대비하지 않을 것입니다. 신은 그 틈이 생기는 것을 기다렸다가 정예 군사를 이끌고 사잇길로 가서 수풀에서 그 성을 엿보겠습니다. 왕께서 약한 군사를 시켜 그 성 남쪽으로 나가게 하면 그들이 반드시 성을 비우고 멀리 쫓아올 것입니다. [그때] 신이 정예 군사로 그 성으로 달려 들어가고 왕께서 친히 용맹스런 기병을 거느리고 협공을 하면 이길 수 있습니다.” 왕은 그 말에 따랐다. 선비(鮮卑)가 과연 문을 열고 군대를 내어 뒤쫓았다 부분노는 군사를 거느리고 그 성으로 들어가니 선비가 그것을 보고 크게 놀라 되돌아 달려왔다. 부분노는 관문을 지키며 막아 싸워 매우 많은 [적을] 목베어 죽였다. 왕은 깃발을 세우고 북을 울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선비가 앞뒤로 적을 맞이하게 되자 계책이 다하고 힘이 꺾였으므로 항복하여 속국이 되었다. 왕은 부분노의 공을 생각하여 식읍(食邑)을 상으로 주었으나, [부분노는] 사양하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왕의 덕입니다. 신에게 무슨 공이 있습니까?”라고 하고는 결국 받지 않았다. 그래서 왕은 황금 30근과 좋은 말 10필을 내려주었다. (우리역사의비밀 네티즌 게시판의 신완순님 게시물에서 발췌)
넷째, 신라의 법흥왕은 선비족의 모용씨의 후예였다고 하는 주장도 나타나고 있는데 상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 위 그림은 경북 경주의 천마총에서 발견된 천마도이다. 그런데 아래 선비족의 유물에서도 같은 천마도가 발견된다. 이것이 우연의 일치인가, 분명히 한반도 경주에 나라를 건설한 세력과 선비족은 같은 핏줄을 갖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다섯째, 선비족의 활동지역에서 출토되는 유물을 보면 이들의 뿌리문화 역시 한반도 한겨레의 무당문화였음을 알 수 있다. 유물을 보면 천손신화를 나타내는 황금으로 된 새모양이 나타나고 신목(神木)의 나무가지가 뻗어있는 것도 나타난다. 여기서 신목은 무당문화의 결정체, 강원도 강릉단오제에서 반드시 등장하는 신목-당목-서낭당의 나무와 같은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선비족에게도 아직 확인은 안되고 있지만 분명히 독자적인 이름을 갖고 있는 제천행사도 있었다는 것도 충분히 짐작이 간다. 위 유물은 전형적인 북방한겨레의 하늘자손사상을 담고 있는 봉황=새를 나타내고 있다. 새는 북방한겨레의 무당문화에서 하늘과 인간을 이어주는 매개체역할을 하는 상징물로 등장한다. 이러한 천손문화는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지역에서도 발견된다. 신목의 나무가지를 형상화 한 것으로 보인다. 신목은 우리나라의 서낭당의 나무와 같다. 여기에는 현세의 복락을 기원하면서 오색의 천 조각을 매달아 놓기도 한다. 현재북방시베리아 소수 한겨레는 자작나무에 복락을 비는 천조각을 달아 놓고 있는데 러시아인들이나 관광방문객들도 덩달아 따라하고 있는것이 발견된다. 역시 무당문화의 한 줄기다. 선비족을 무지막지한 미개인 내지 야만인으로 학습받아온 세대는 위와같은 고급문화를 상상하기 힘들것이다. 자세히 보면 바둑을 두고 있는 그림으로 추정된다. 바둑의 원조는 한겨레라는 것은 이미 증명하였다(백제방의 공지-금동대향로편 참조)
여섯째, 선비족의 언어는 오환족과 함께 고대 몽골어(퉁구스어)와 같다는 것이다. 그리고 몽골어와 우리 한국어는 본 바탕이 하나의 뿌리에서 나왔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사마천의 사기에서는 동호족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우리 한겨레임이 이미 증명되었는데, 이미 연구된 바로는 선비는 동호족의 후예라는 학설이 유력하다. 선비족의 영웅은 서기2세기 중엽의 단석괴(檀石槐)가 있는데 단석괴의 檀을 보면 단군의 단과 같다. 이 점을 보아도 선비족은 우리와 무관하지 않은 같은 핏줄임을 알 수 있다.(임승국의 한단고기-단군세기편 참조)
결론적으로 선비족의 역사는 우리 한겨레의 역사이다. 또한 선비족은 우리와 다른 이민족 오랑캐가 아니라 우리와 같은 한겨레다. 마치 우리와 다르게 배우게 된 것은 한국내 중화사대주의 새끼중국인들이 한국 제도권 사학계를 틀어쥐고 현재의 국사책을 썼고 이것을 참역사인 양 국가가 강제로 가르쳐 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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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족 계통의 신라 왕족
신라의 법흥왕 김원종(金原宗 : 501~540)은 나라의 중흥을 위해 불교를 수용한 개혁군주로 지금 발견된 그에 관한 새로운 사실이 있는데 법흥왕의 본명이 모진(慕秦)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조부인 갈문왕(葛文王) 습보(習寶 : 410~460)는 김씨, 혹은 내물왕의 손자가 아닌 모용(慕容)씨 성을 가진 사위였다. 그는 북연(北燕 : 409~436)의 모용씨 왕족으로 436년 멸망 뒤 신라로 망명하여 눌지왕(訥祗王 : 401~458)의 딸과 혼인을 했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얻은 아들이 지대로(智大路 : 437~514)이며 후에 성은 모(慕)씨로 바뀌어지게 된다. 모용씨는 황제(黃帝) 희헌원(姬軒轅 : BC 2707~2598)의 후예이자 춘추전국시대 연(燕)나라의 왕족으로 연나라가 진(秦)나라에게 멸망한 뒤, 선비족의 일원이 되었다. 그리고 238년에 모용선비족으로 거듭났고 이들은 진(晉 : 265~420)나라에 혼란이 야기되었을 때 갈족, 흉노족과 함께 병사를 이끌어 중원을 공격하고 그곳에서 연나라를 재건했다. 그러나 고구려와 탁발씨의 북위에 의해 멸망하여 대부분은 복속되거나 혹은 조선 반도로 망명하였는데 이 연나라의 망명 왕족이 바로 지증왕(智證王)계 신라 김씨의 시조가 된다. 지증왕 지대로, 법흥왕 김원종이 즉위한 뒤, 나라가 비약적으로 발전되었고 진흥왕(眞興王 : 534~576) 대에 이르러 영토가 확장되었으며 그 후손 문무왕(文武王) 김법민(金法敏 : 626~706) 때에 삼국이 통일되었다. 이후 선비족 계통의 김씨들은 더욱 번창하여 한국 3대 성씨 중 일부로 등장하여 많은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 한국 金氏의 혈관에는 흉노의 피가 흐른다?
서기 342년 겨울, 「半흉노」의 일파인 鮮卑族 모용황은 5만5천의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했다. 험준한 길인 南路에 4만을, 평탄한 길인 北路엔 1만5천을 투입했다. 거꾸로 고구려는 수비병력의 전부를 北路방어에 쏟았다. 결국 고구려는 대패했고 반면 北路로 침공했던 선비족 기마군단 1만5천은 고구려군에 의해 모두 죽은 것으로 기록됐다. 그러나 그때 그들 가운데 일부가 고구려軍에 쫒겨 들어간 곳이 지금의 新羅였다고 추정한다.
신라계와 가야계, 크게 두 줄기로 대별되는 한국 金씨의 뿌리가 흉노족의 피가 이어진 기마민족, 「선비족 모용씨(鮮卑族 慕容氏)」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이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최근 「신라 법흥왕은 선비족 모용씨의 후예였다 (풀빛출판사)」를 쓴 KBS 장한식 기자는 신라 김씨 왕족과 가야 김씨 왕실이 서기 342년 고구려를 침공한 모용씨 군대 가운데 낙오한 무리의 후예라는 가설을 펼치고 있다. 기존의 역사 지식으로는 선뜻 수긍하기 힘들지만 문헌에 근거한 주장을 펼치고 있다는 점에서 나름의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한국인 가운데 20%나 차지한다는 金씨의 뿌리를 탐색한다는 의미에서 「金씨의 기원은 흉노족의 후예 모용 선비」라는 그의 가설을 소개한다.<張漢植 한국방송공사 보도국 TV 편집부 기자> 경주와 말의 문화 / 積石木槨墳)
慶州(경주)에서는 최근 몇년째 「말(馬) 싸움」이 심각하다. 보문관광단지 인근에 약 29만 평 규모의 경마장을 건설하겠다는 경주시의 방침에 대해 전국의 문화계 인사들이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市(시) 당국과 대다수 시민들은 수백억원은 족히 될 馬券稅(마권세) 수입에다 관광객도 연간 1백만명 정도 늘어나는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하며 적극 추진하자는 입장이다. 반면 문화계 인사들은 천년 古都(고도) 경주가 말이 뛰노는 투기장으로 전락해서는 안된다며 결사반대다. 게다가 경마장 부지로 지정된 지역에서 白炭(백탄) 숯가마 10여 기가 확인되고, 토기 工房(공방)이 발굴되고 있는 등 보호가치가 높은 역사유적지란 점을 들어 경마장 건설은 안된다고 버티고 있다. 문화유적 보존과 경건한 역사·문화도시의 명성 유지를 위해 경마장 설치를 반대하는 논리에 필자 역시 동의하는 편이다. 하지만 『경주와 말(馬)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주장만큼은 再(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경주는 한동안 騎馬文化(기마문화)가 꽃을 피웠던 곳이기 때문이다.
4세기 중반의 어느 날, 말을 탄 一團(일단)의 무사들이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경주 땅에 밀려들었다. 아무도 초대하지 않은 불청객이었지만 그들은 우세한 武力(무력)으로 경주 땅을 정복하고는 신라의 지배층이 되었다. 그리고는 한 동안 馬上(마상)에서 권력을 휘두르다 기마족의 문화를 짙게 남겨둔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갔다. 匈奴(흉노)의 피를 이어받은 「鮮卑族 慕容氏(선비족 모용씨)」, 훗날 金(김)으로 성을 바꾸는 신라 왕족들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4세기께 신라 땅 경주에는 積石木槨墳(적석목곽분)이 출현하고 있다. 바닥에 냇돌을 깔아 목관을 안치하고 그 주위에 통나무로 상자모양의 목곽, 즉 방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그 위에 돌을 쌓아 올리고 바깥에는 흙을 부어 거대한 봉분을 조성하는 방식이다. 적석목곽분은 경주 시내 곳곳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그 대표적인 곳이 황남동의 大陵園(대릉원)이다. 경주로 수학여행을 갔다 왔으면 틀림없이 이곳을 둘러보았을 것이다. 작은 동산을 연상케 하는 천마총과 황남대총 등 23기의 고분들로 공원이 조성돼 있다. 적석목곽분에 앞서 조성된 고분은 「낙랑형 토광목곽묘」다. 많은 학자들은 두 묘제 사이에는 계승 관계가 없다고 보고 있다. 즉 적석목곽분을 조성한 사람과 토광목곽묘를 만든 사람들의 뿌리가 서로 다르다는 말이다. 경주 땅에서 적석목곽분을 조성한 세력은 4세기 중반 이후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金씨 왕족이란 것이 정설이다. 이 적석목곽분이 匈奴族(흉노족)을 비롯한 중앙아시아의 기마민족이 조성했던 무덤과 매우 유사한 방식으로 조성됐다는 점이 밝혀지면서 이를 만든 金씨 왕족의 뿌리가 대초원지대의 기마민족임을 알게 해 주었다. 무덤 형식만 바뀐 것이 아니라 적석목곽분에서 나온 출토물도 과거와 크게 달라진다. 신라 적석목곽분은 가히 「騎馬文化의 타임캡슐」이라 할 만하다. 중앙아시아 대초원지대의 기마유목민족들이 즐겨 사용했던 각종 제품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금관과 장신구, 금으로 만든 허리띠, 띠 고리(버클), 각배(뿔잔), 보검, 유리제품 등은 스키타이族과 흉노族 등의 기마민족들이 즐겨 사용한 것과 비슷하거나 동일한 제품들로 밝혀졌다. 게다가 말을 순장한 무덤을 비롯해 안장과 등자(발걸이), 배가리개 등 호화롭게 장식한 각종 馬具類(마구류)가 다수 발굴되고 있어 적석목곽분을 조성한 金씨왕 세력이 기마족임을 거듭 확인시켜주고 있다.
4세기께 「말을 탄 사람들」이 신라 땅으로 들어와서 살았고 죽음에 이르러 아끼던 말을 순장하고 무덤 안에 마구류를 부장했다는 이야기다. 이같은 적석목곽분과 그 속에서 나온 각종 출토물들을 종합해 볼 때 신라 金씨왕은 중앙아시아 대초원지대에서 이동해온 기마族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 정설이라 할 정도로 힘을 얻어가고 있다. 하지만 신라의 북쪽 고구려, 백제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匈奴風(흉노풍)의 유적과 유물이 어찌하여 한반도의 동남단 신라(그리고 가야)에서만 나타나고 있는지는 한국 고대사의 오랜 수수께끼였다.
필자는 이에 대해 서기 342년 고구려를 침공한 기마민족 「慕容 鮮卑(모용 선비)」 군대의 일부가 신라로 들어가 왕권을 찬탈했고, 그들 사이에 분열이 일어나 또 하나의 무리가 가야(나아가 왜국)까지 진출했다는 가설을 내세우고 있다. 鮮卑族은 원래 東胡(동호:내몽골-만주 일대에 살던 옛 민족)의 일파로서 흉노족의 지배를 받은 민족이다. 기원 전 200년께, 좀 어리숙했던 東胡族의 임금이 아무런 준비도 없이 흉노에 싸움을 걸었다가 冒頓 單于(묵특 선우:묵특은 이름이고 선우는 왕을 뜻하는 흉노족 단어)가 거느린 흉노군에게 멸망당했다.
참고로 묵특은 왕위계승 분쟁으로 그 아비를 살해하고 선우 位(위)에 오른 뒤 30만명의 騎馬 弓兵(궁병)을 이끌고 아시아의 대초원지대를 석권한 인물이다. 漢(한)나라 창건자 劉邦(유방)도 묵특에게 도전했다가 패해 죽음의 위기를 맞자 한나라 공주를 시집보내고 매년 막대한 조공을 바치겠노라고 빌어 겨우 목숨을 건질 정도였다. 이런 묵특을 얕잡아 보고 싸움을 벌인 결과 「동호」는 망하고 그 무리는 크게 세 갈래로 흩어진다. 한 무리는 흉노로 흡수되고 하나는 烏桓(오환), 나머지는 鮮卑로 통합된다.
묵특의 흉노軍에 박살이 난 鮮卑족은 약 3백년이 지나서야 흉노에 앙갚음을 하게 된다. 기원 후 85~91년 사이, 鮮卑는 後漢조정의 부탁을 받고 南흉노, 丁零(정령:시베리아 예니세이강 유역에 살던 유목민족 국가)과 함께 北흉노 토벌에 나서 北흉노를 패퇴시켰다. 이때 10여만 落(락:한 가구를 뜻함)의 北흉노인들이 선비족으로 귀속됐다는 내용이 後漢書에 나온다. 10여만 落이라면 매 落마다 5인 정도로 계산해도 50~60만명에 이르는 막대한 인구다. 원래 선비족의 인구는 40만명 정도였는데 이때 2배 이상 커지게 된다. 필자는 선비족 가운데 절반 이상이 본래 흉노족이었다는 이 대목을 중시한다. 선비족의 인종적 특징이나 문화가 흉노의 그것과 깊은 관련을 맺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이 대목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 글의 제목에서 「한국 金씨의 혈관에는 흉노의 피가 흐른다」고 한 것도 흉노족이 기마민족의 대표격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는데다 鮮卑族의 절반 이상이 애초 흉노족이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최근 金씨의 선조가 한나라 武帝가 藿去炳(곽거병)을 보내 흉노를 토벌했을 때 붙잡힌 흉노의 王子(왕자) 金日(김일제)라는 가설을 펼치는 사람들이 있어 흥미롭다. 김일제는 漢무제의 말치기로 생활하다 성실성을 인정받아 끝내는 무제의 총애를 받는 귀족이 되었고, 金씨 성과 侯(투후:지금의 중국 하남성 일대인 「투」지방을 다스리는 제후 벼슬)라는 작호를 하사 받은 인물이다. 김일제의 후손들은 번창해 한나라 조정에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지만 왕망이 新(신)나라를 세우는데 적극 협조했다는 이유로 멸문의 지경에 이르자 한반도로 도망쳐 나왔다는 것이 「김씨 선조는 김일제」설을 펼치는 사람들의 주장이다.
신라 문무왕의 비석에 「□侯祭天之胤傳七葉(□후 제천지윤 전칠엽)이라는 기록이 나왔는데 이들은 「侯(투후)」 즉 김일제가 문무왕의 옛 조상이었음을 기록한 증거라고 말한다.
이들의 주장에 의견을 같이하는 것은 아니지만 반가운 마음이 앞선다. 한국의 최대 성씨 金씨의 기원을 찾아보려는 진지한 노력을 평가하는 의미뿐만이 아니라 金씨의 기원을 나와 마찬가지로 흉노족에서 찾고 있기 때문이다. 「金씨 선조는 흉노족의 피가 절반 이상 섞인 선비족 모용씨」라는 필자의 가설과 「김씨 시조는 흉노 왕자 김일제」라는 주장은 시대 상황과 경로 설정에서는 서로 다르지만 한국 金씨의 뿌리를 흉노족에서 찾아보자고 하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半匈奴(반흉노)」라 할 수 있는 선비족 가운데 한 일파가 「慕容부족」이다. 모용 부족의 명칭은 서기 150년경에 활동했던 「慕容」이란 추장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선비족은 추장의 성씨나 이름을 部族名으로 하는 관습이 있었다. 선비족 내부에는 拓跋部(탁발부)와 宇文部(우문부) 등 여러 부족이 존재했지만 「모용」의 5대손쯤 되는 涉歸(섭귀)가 추장이 되었을 즈음 모용부가 汎(범)선비족 가운데 최강의 부족으로 떠오른다. 섭귀는 「선비 單于(선우)」에 올랐다. 선우는 최고지도자를 뜻하는 흉노의 단어. 여기서 모용부가 원래 흉노족에서 선비족으로 귀속됐거나,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흉노의 정치체제나 풍습을 대폭 수용하고 있음을 알수 있다.
섭귀의 아들 慕容(모용외)가 추장이 되면서부터 모용부는 국가의 모습을 갖춰나갔고 韓(한)민족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모용외는 서기 285년 부여를 침공해 부여왕 依慮(의려)를 자살하게 만들고 부여 백성 1만여 명을 포로로 잡아갔다. 또 제집 안방 드나들 듯 고구려를 침공하니 고구려 봉상왕이 『모용씨는 兵馬가 精强(정강)해 걸핏하면 우리 강역을 침범하니 어찌하면 좋으냐』고 탄식할 정도였다(삼국사기). 모용외를 뒤이은 아들 慕容(모용황)은 337년 자신의 영역이 춘추전국시대 燕(연)나라와 겹친다는 점에서 제멋대로 국호를 燕(연)이라 정하고는 왕위에 오르니 바로 「5호16국 시대」 모용씨 왕조가 탄생한 것이다.
慕容의 고구려 침공과 모용씨의 신라 진출
모용황은 꿈이 컸던 인물이다. 요서와 요동지방을 삽시간에 아우르고는 中原(중원)을 도모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모용황이 중원 공략에 나서려 하자 동방의 고구려가 눈엣가시로 다가왔다. 고구려를 그대로 두고 대륙 깊숙이 진출했다가는 등 뒤에서 칼을 받을 위험성이 있었던 것이다. 훗날 後金(후금)이 中原을 석권하기에 앞서 조선을 침략(정묘호란, 병자호란)한 것과 같은 이치에서 모용황은 고구려를 정복해 굴복시키고자 했다. 342년 겨울, 드넓은 만주 벌판이 두터운 눈으로 뒤덮였을 즈음 모용황은 5만5천명의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기마족이었던만큼 대부분이 騎兵(기병)이었을 것이다. 당시 모용황의 군대가 고구려 수도 환도성을 침공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 南路(남로)와 北路(북로)가 있었다. 남로는 험준하고 좁은 산악지대였던 반면 北路는 평탄한 개활지였다. 따라서 주력부대가 평탄한 北路를 택하고 험준한 南路에는 조력부대가 진출하는 것이 병법의 상식이었다. 그러나 모용황은 이같은 병법의 상식을 거부하는 전략을 세웠다. 삼국사기에는 모용황의 서자 형 慕容翰(모용한)이 「고구려는 분명 우리 대군이 北路로 쳐들어올 줄 알고 북쪽만을 엄중히 막고 남로를 소홀히 할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대군을 南路에 집중시켜야 할 것이다」고 주장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모용한의 작전은 제2차 포에니전쟁 때인 기원 전 218년경 알프스 산맥을 넘어 로마를 기습공격한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의 전략을 떠올리게 한다. 모용황은 형 모용한과 동생 慕容覇(모용패)를 선봉장으로 삼아 자신이 4만 대군을 이끌고 험준한 南路로 침공하고 北路에는 1만5천 병력을 보냈다. 이 작전은 그대로 고구려의 허를 찔렀다. 고구려 고국원왕은 아우 高武(고무)왕자에게 5만 병력을 맡겨 北路를 방어하게 하고, 혹시나 싶어 예비대 1만명으로 하여금 南路를 지키게 했던 것이다. 4만의 기병군단을 1만명으로 막기에는 역부족, 전투는 삽시간에 끝나고 모용황의 大軍은 환도성으로 물밀 듯이 쳐들어갔다. 형세가 다급해진 고국원왕은 단웅곡이란 깊은 산골짜기로 달아났고 고구려 백성 5만명이 포로로 잡혔다. 모용황은 고구려 수도 환도성에 불을 질러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나 본국 사정이 궁금해진 모용황은 고국원왕의 항복을 받지 못한 채 철수 길에 올랐다. 모용황은 고구려가 뒤에서 공격하는 것을 막기 위해 왕비와 왕대비를 볼모로 잡아갔고 왕의 부친 미천왕의 무덤을 파헤쳐 屍身(시신)까지 꺼내가는 파렴치한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모용황의 공격을 받아 나라가 쑥대밭이 되자 고구려는 어쩔 도리 없이 연나라에 머리를 숙여야 했고 모용황은 이때부터 고구려의 배후공격 위험에서 벗어나 中原도모에 주력할 수 있었다. 모용황의 주력군이 고구려에 대승을 거뒀지만 北路로 간 1만5천명의 운명은 정반대였다. 삼국사기는 「왕우(북로 침공군 대장) 등은 북쪽 길에서 싸우다가 패하여 모두 죽었다(會王寓等戰於北道, 皆敗沒)」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의 이 기록은 중국 역사서인 자치통감의 기록을 다소 축략해 전재한 것이다. 자치통감은 물론 모용황측이 전한 기록을 담았을 것이다. 「(고구려 군에게)패하여 모두 죽었다」는 말은 북로로 진군한 1만5천명이 아무도 본진으로 귀환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1만5천의 병력으로 5만 대군을 맞아 싸웠으니 전투에서 패했을 것은 분명한데 아무도 돌아오지 않으니 자세한 내용은 담지 못하고 「모두가 죽었다(皆敗沒)」고 간주해 이런 짧은 기록만을 남긴 것이다. 하지만 燕나라로 귀환한 모용황의 병사가 없다고 해서 北路로 진군한 1만5천명 모두가 전사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1만5천명의 별동대는 자신들이 버림받은 처지임을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고구려 주력군의 눈을 속이기 위해 전선에 투입되고 있다. 5만명의 고구려 군대와 맞서 싸우면 질 것이 뻔하다. 모용황은 우리가 죽어도 괜찮다는 생각에서 북쪽 길로 보낸 것이다』
임금에게서 버림받은 데 대한 울분과 질 것이 뻔하다는 불안감을 갖고 출전한 1만5천명. 이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을 리가 있을까?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고구려군과의 전투에서 패하자마자 살기 위한 목적에서 도주했을 가능성이 높다. 처음부터 방향을 정하고 달아났다기보다는 대오를 갖추기 힘든 상태에서 고구려 軍의 추격을 받다보니 고구려 지경을 벗어나 신라 땅으로까지 밀렸을 개연성을 상정해본다. 고구려와 신라를 잇는 동해안 루트는 예부터 열려 있었다. 4세기 중반 이후 기마族의 신라 진출 흔적이 뚜렷이 발견된다는 점에서 1만5천명 가운데 적어도 수천명의 군단이 신라에 들어갔을 것으로 추정한다.
내물왕 26년, 즉 서기 381년 신라는 북중국의 유목민족 국가 前秦(전진)에 사신을 보낸다. 삼국사기에는 이때 전진의 황제 符堅(부견)과 신라 사신 衛頭(위두) 간의 대화가 기록돼 있다. <부견이 위두에게 묻기를 『그대의 말에 海東(해동:신라)의 형편이 옛날과 같지 않다고 하니 무엇을 말함이냐』고 하니 위두가 대답하기를 『이는 마치 중국의 시대변혁·명호개역과 같은 것이니 지금이 어찌 예와 같을 수 있으리오』라고 하였다. (符堅問 衛頭曰, 卿言海東之事, 與古不同, 何耶, 答曰, 亦猶中國 時代變革 名號改易, 今焉得同)>
이 기록에 대해 지금까지는 신라가 내물왕 들어 나라가 크게 발전했음을 보여주는 답변이라고 풀이해 왔지만 시대변혁·명호개역은 단순히 나라의 체제가 정비된 수준을 넘어선다. 이전까지의 昔(석)씨 임금 시대가 끝장나고 외부세력이 정권을 장악해 모든 면에서 과거와 완전히 다른 나라가 됐음을 내포한 말로 해석할 수 있다. 사실 내물왕 이후 昔(석)씨는 신라 역사의 주류에서 사라진다. 왕은 물론 왕비나, 재상, 학자, 장군 가운데서 昔씨는 찾아볼 수 없다. 신라 金씨보다 역사가 오래된 昔씨지만 현대 한국사회에서 昔씨는 대단한 희성이다. 이는 내물왕 집권기에 昔씨가 철저히 제거됐음을 암시한다.
昔씨가 사라지는 것과 위두가 밝힌 시대변혁이라는 문구를 통해 이 시기에 강력한 군사력에다 선진적 국가체계를 경험한 새로운 세력이 신라 땅을 정복했음을 거듭 시사받을 수 있다. 사실 4세기경 고구려 땅을 뚫고 신라로 진출할 수 있는 기마족은 선비족 모용씨 외는 달리 거론하기 힘들다. 신라 김씨왕이 선비족 모용씨였다는 결정적 문헌은 있을 수 없다. 金씨왕들은 기존의 신라인들과 힘을 합쳐 새 나라를 건설하는 입장이었던 만큼 「우리는 대대로 신라 땅에서 살아온 사람들이다」는 기록을 남기는 게 정상이지 「원래는 모용 선비였는데 석씨 임금을 몰아내고 왕이 되었다」는 기록을 남길 리 만무하다. 하지만
金씨왕의 기원이 모용선비임을 알게 해주는 약간의 단서는 있다.
1. 법흥왕의 본명은 慕秦(모진) 신라 법흥왕에게는 두 개의 姓(성)과 이름이 있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4권 법흥왕의 기록을 그대로 옮겨본다. <법흥왕이 즉위하니 이름은 원종이다. 『책부원구란 옛 책에는 성은 募(모), 이름은 泰(태)라 했는데, 태는 遺事(유사:책 이름) 王曆(왕력)에는 秦(진)이라 돼 있다』 지증왕의 원자로서 어머니는 연제부인이요 왕비는 박씨, 보도부인이다. (法興王立, 諱原宗『冊府元龜, 姓募名泰, 泰, 遺事王曆作秦』, 智證王元子, 母延帝夫人, 妃朴氏保刀夫人)>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저술하면서 법흥왕 김원종의 성과 이름을 募泰(모태) 또는 募秦(모진)으로 괴상하게(?) 적고 있는 고기록의 출처를 밝혀두었다. 金씨로 알고 있는 법흥왕의 성과 이름을 이런 식으로 표기하고 있는 사례는 삼국사기뿐만 아니고 중국의 다른 역사서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姚思廉(요사렴)이란 당나라 학자가 쓴 梁書(양서)에는 신라 법흥왕이 즉위 8년, 서기 521년 중국 강남에 자리잡고 있는 漢族의 나라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친 사정을 기록하면서 신라 임금의 성은 「募(모)」요 이름은 「秦(진)」 이라고 적고 있다. 그 뒤 이연수란 당나라 학자가 편찬한 南史(남사)란 역사책에는 법흥왕의 성을 「募(모)」 이름을 「泰(태)」로 기록하고 있다. 秦과 泰는 글자 모양이 비슷하기 때문에 梁書(양서)의 기록을 南史(남사)에서 옮겨 적다 오기한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중국역사서 通典(통전)에는 법흥왕의 성명을 「慕秦」으로 적고 있다. 梁書와 南史에서는 법흥왕의 성을 「모을 募」로 쓴 데 반해 통전에서는 「사모할 慕」를 쓴 것이 차이점이다. 「사모할 慕」와 「모을 募」는 발음이 같고 글자 모양도 극히 비슷한 탓에 옮겨 적다 혼동이 생긴 것으로 여겨진다. 법흥왕 김원종의 성명이 慕秦≒募秦(모진)이라니… 지금껏 한국의 역사학자들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로 치부해왔다. 이병도 박사는 그의 「삼국사기 역주」에서 「어떤 오해로 인한 것인 듯하다」고 풀이한 바 있다. 그러나 중국 역사서에서 발견되고 있는 「모진」은 법흥왕의 성명이 맞는 것으로 드러났다. 법흥왕의 성을 모(MO)로 적고 있는 사례가 국내 문헌에서도 발견됐기 때문이다. 1988년 경북 울진군 봉평리에서 발견된 「봉평 신라비」는 법흥왕 즉위 11년, 서기 524년에 세운 비석이다. 여기서는 법흥왕을 「牟卽智(모즉지)」로 적고 있으니 牟는 성이요 卽은 이름 智는 존칭이다. 봉평 신라비에는 모두 35명의 이름이 나오는데, 임금 모즉지를 비롯해 葛文王(갈문왕:신라 왕족) 牟心智(모심지), 비문을 적은 牟珍斯利公(모진사리공), 비문을 조각한 牟利智(모리지) 등 4명의 이름이 「牟」로 시작되고 있다. 그렇다면 「牟」를 姓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姓을 쓰지 않고 이름만 기록했다면 이렇게 여러 사람이 같은 글자로 시작할 리 없다. 봉평 신라비의 법흥왕 성명 「牟卽(모즉)」은 중국 역사서의 慕秦≒募秦(모진)과 비교할 때 글자 모양은 다르지만 발음은 「모(MO)」로 동일하다. 삼국시대의 경우 인명이나 지명을 표기할 때 발음이 같거나 비슷한 한자가 넘나들면서 쓰이는 경우가 흔하다. 한 예로 가야를 加耶, 伽倻 또는 加羅(가라), 駕洛(가락) 등으로 다양하게 기록하고 있다. 중국 역사서의 慕秦과 봉평 신라비의 牟卽 또한 이런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다. 결국 중국 역사서와 봉평 신라비가 공통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은 봉평 신라비를 세운 524년까지는 법흥왕이 「미스터 김(Mr. KIM)」이 아니라 「미스터 모(Mr. MO)」였다는 사실이다. 또 법흥왕은 지증왕의 큰아들로서 신라 金씨 왕조의 뚜렷한 자손이니, 결국 법흥왕 이전까지의 신라 金씨 왕들의 姓이 상식과는 달리 「모(MO)」였다고 믿지 않을 수 없다. 사실 법흥왕 때까지 중국 역사서에서 신라 왕의 姓을 金(김)으로 기록한 사례는 없다. 신라 왕의 姓을 金으로 적고 있기는 법흥왕을 뒤이은 진흥왕 때부터이다. 진흥왕이 在位(재위) 25년(서기 564년) 北齊(북제)에 사신을 보냈을 때 중국 역사서 北齊書(북제서)는 신라왕의 성명을 「金眞興(김진흥)」으로 적고 있다. 중국 史書에서 신라 왕의 姓을 金씨로 기록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또 隨書(수서)에서 「수나라 문제 14년(서기 594년, 신라 진평왕 16년) 신라왕 金眞平(김진평)이 사신을 보냈다」고 기록하는 등 564년 이후에는 신라 왕의 姓을 金으로 분명히 적고 있다.
2. 慕씨는 慕容氏 법흥왕의 성씨가 모씨라고 하더라도 慕와 慕容이 직접적인 관련이 없을 수도 있지 않느냐는 반론이 나올 수도 있지만 모=모용으로 볼 수 있는 단서는 충분하다. 첫째 신라로 들어간 모용씨가 혼동을 피해 모씨라는 단성을 썼을 가능성이 있다. 참고로 모용씨는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하나는 慕容(모용)이요 또 하나는 「慕輿(모여)」이다. 모용황의 부하 장수 가운데 慕輿(모여니)란 인물이 고국원왕의 모친과 왕비를 사로잡아갔다는 기사가 삼국사기에 나오는 것을 비롯해 절충장군 慕輿根(모여근)과 慕輿蓋(모여개) 등 「모여」란 성씨를 가진 인물들을 모용씨 왕국에서 여럿 찾아볼 수 있다. 慕輿씨 역시 慕容씨와 비슷한 위치의 귀족이었다. 같은 慕容씨가 漢字(한자)로 성씨를 표기하면서 慕容과 慕輿로 나뉜 데 대해 구구한 억측이 많지만 나는 원래 선비족의 말이 한문으로 꼭 맞아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으로 풀이해 본다. 어쨌든 慕씨의 성을 漢字로 표기하다 보면 「慕容」이 되기도 하고 「慕輿」가 되기도 했으니 혼동의 소지가 있다. 간단히 「慕」로 표기하면 더욱 분명한 성씨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두 글자 複姓(복성)을 한 글자 單姓(단성)으로 쓸 수 있다. 또한 복성을 단성으로 표기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으니 그 예는 백제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수서」 백제조에 나오는 백제의 8대 귀족 성씨 가운데 沙(사)씨는 원래 沙咤(사타) 혹은 沙宅(사택)씨였고, 眞(진)은 眞慕(진모), 木(목)은 木(목협)이라는 복성이었지만 모두 단성으로 표기하고 있다. 복성은 부를 때나 표기할 때나 효율성이 떨어진다. 더구나 당시 신라는 복성이 아니라 단성을 쓰는 문화였다. 朴(박)-昔(석)-李(이)-鄭(정)-孫(손)-薛(설) 등 유력 귀족의 성씨가 모두 단성이었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복성 「慕容」 또는 「慕輿」를 단성 「慕」로 표기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런 일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삼국사기와 중국 역사서, 봉평 신라비를 토대로 할 때 법흥왕은 우리의 상식과 달리 「미스터 모(MO)」였고 이는 慕容씨에서 나왔을 개연성이 충분하다. 또 법흥왕이 분명 신라 中古代(중고대) 金씨 왕실의 嫡統(적통)이었다는 점에서 그 이전의 왕들도 성을 「慕」로 썼을 것이란 결론에 이르게 된다. 중국 역사서에서 신라왕의 성씨를 金(김)으로 적기 시작한 것이 진흥왕 시대부터라고 한다면 법흥왕이나 진흥왕 때 비로소 金씨 성을 썼다고 봐야 한다. 나는 법흥왕이 慕容씨 성을 金으로 바꿨다고 보는데 이 점은 뒤에서 다룬다.
3. 慕容씨 시조신화와 신라(가야) 시조신화의 유사성 慕容씨가 신라 지배층이었다는 또다른 증거로 慕容씨의 시조신화와 신라의 시조신화-건국신화가 유사한 점을 들 수 있다. 다음은 慕容씨의 시조신화다. <乾羅(건라)는 모용외의 12대 조상이다. 어느 날 저녁에 그는 금은으로 된 갑옷과 안장을 한 백마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왔다>(晋書 권108) 우선 乾羅(건라)란 이름이 新羅(신라), 加羅(가라)와 비슷한 점이 예사롭지 않다. 앞서 밝혔지만 선비족은 위대한 추장이나 조상의 이름을 「부족의 명칭」으로 삼는 관습이 있었다. 그렇다면 국호로 삼지 못할 이유가 없다. 新羅(신라)는 「새로운 乾羅(건라)」라고 풀이해보면 딱 떨어진다. 소설적 추리를 발휘하고픈 유혹을 받는 대목이다. 또 乾羅의 신화는 신라 박혁거세의 개국신화와 김알지 천강신화와 유사하다. 하늘에서 사내아이가 든 알이나 금궤짝이 내려오고 백마가 알을 지키고 있다가 하늘로 올라갔다는 내용의 박혁거세 신화와 김알지 설화는 잘 알려져 있어 여기서 재론하지 않겠다. 다만 慕容씨의 시조 신화가 담담하다면 박혁거세 신화와 김알지 설화는 내용이 극적인 차이가 있을 뿐 하늘에서 내려오는 현상, 백마의 출현, 흰색 분위기(흰닭이나 흰말의 등장), 몸통을 금은 갑옷으로 보호한 乾羅와 금 상자(금 알) 속에 보호된 사내아이 등 신화의 모티브가 상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박혁거세 신화는 모용씨와 무관하지 않느냐는 지적을 할 수도 있겠지만 혁거세 신화가 후대에 창작-채록됐을 가능성이 많다. 사실 혁거세 신화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만 나오지 중국 正史書(정사서)에 기록된 사례가 없다. 부여와 고구려, 백제의 시조신화가 일찍부터 중국 역사서에서 발견되는 것과 대조적이다. 아마도 신라 金씨(모용씨) 왕실 내에 「시조 백마 天降 신화」가 전승돼 오다 진흥왕 시절 「國史(국사)」를 편찬할 즈음 개국시조 박혁거세와 金씨 왕실의 조상 김알지 설화에 적당히 배분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덧붙이자면 가야 수로왕의 下降설화도 신라 김알지 설화는 물론 모용씨 시조 乾羅설화와 유사성이 높다.
4. 모용씨 步搖冠과 신라-가야 금관
모용 부족 명칭의 유래에 관련해 모용부의 한 추장이 걸을 때 관의 장식이 흔들리는 것을 좋아해서 부족사람들에게 그런 관, 즉 步搖冠(보요관)을 쓰게 하니 걸을 때 흔들린다는 뜻으로 「步搖」라 했으며, 이 보요가 와전돼 「모용」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모용 부족 기원설로는 별 설득력이 없어 보이지만 모용 부족이 보요관을 즐겨 썼다는 것은 알 수 있다. 걸음을 걸을 때 흔들린 것으로 보아 새 깃이나 나뭇가지 등의 길다란 장식을 달았을 것이다. 여기서 신라·가야의 금관 또는 금동관을 다시 한번 살펴보자. 鳥羽冠(조우관)이나 樹木型 立飾들은 걸음을 걸을 때 흔들리게 돼 있다. 모용부의 큰 특징이 보요관을 착용한 데 있다면 신라와 가야의 관모도 같은 선상에서 파악할 근거가 충분하다. 이밖에도 모용씨의 나라에서 활약한 사람들의 묘에서 발견된 장신구와 유리그릇 등 각종 출토물이 신라와 가야, 나아가 일본의 고분에서 발견되는 것과 유사한 점이 많아 선비족 모용씨가 신라-가야-왜국으로 진출하는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나는 신라 金씨왕 뿐만 아니라 금관가야 金씨왕, 나아가 5세기 초 일본열도에 거대한 고분을 조성하는 왜국왕들도 선비족 모용씨의 일파로 보고 있다. 서기 42년 하늘에서 김해 구지봉으로 首露王(수로왕)이 下降해 155년을 다스렸다는 가락국기 기록은 신화로 본다. 「新撰姓氏錄」(신찬성씨록)이란 일본의 옛 책에는 수로왕으로 보이는 임나(=가야) 임금의 성명을 「牟留知(모류지)」로 적고 있으니 신라 법흥왕의 성명 牟卽智(모즉지)와 통한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필자의 책 「신라 법흥왕은 선비족 모용씨의 후예였다(풀빛출판사)」에 나오니 참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慕容씨가 언제 어떻게 해서 金씨로 성을 바꿨는지 알아볼 차례다. 서기 521년 법흥왕이 사신을 보냈을 때 중국 정사서에서 신라왕의 성을 모(慕, 募)로 적고 있고 그로부터 3년 뒤인 524년 봉평신라비에 법흥왕의 성을 牟(모)로 적고 있다고 할 때 적어도 524년까지는 신라왕의 성이 「慕」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564년 진흥왕이 사신을 보냈을 때 중국측은 왕의 성을 金으로 적고 있으므로 「慕」에서 「金」으로의 성씨 변화가 일어난 때는 524~564년 사이 40년간으로 좁혀진다. 법흥왕 시절일 수도 있고 진흥왕 在位기간일 수도 있다. 그러나 법흥왕은 모진과 김원종 두 개의 성명이 전해지는 반면, 진흥왕은 金으로 시작하는 이름뿐이므로 법흥왕 시절 창씨개명이 단행됐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모(용)씨란 기마민족의 성을 버리고 중국식 金씨 성을 취한 배경은 殉葬(순장)의 금지(법흥왕의 아버지 지증왕 때 일), 율령제 실시, 불교 公認 등을 통해 기마족의 나라 신라를 농경문화민족으로 바꾸고자 했던 법흥왕의 개혁정책에서 찾아볼 수 있다(위에서 든 필자의 책 2부 참고). 모용씨에서 金씨로의 성씨 변화는 엄청난 사건인데 전혀 기록이 없다는 데 대해 의문이 들 수 있다. 이에 대해 나는 법흥왕이 숨지고 6년이 지난 진흥왕 6년 이사부와 거칠부 등 왕실 종친이 주축이 되어 꾸민 「國史(국사)」에 그 혐의를 둔다. 국사는 신라 金씨왕실의 정통성을 반석 위에 두고자 했던 일종의 통치이념서다. 이런 책을 통해 신라 金씨 왕실은 하늘이 보낸 선택된 종족이며 신라 초기부터 대대로 살아온 것처럼 역사를 조작(?)했다고 본다. 「國史」는 그 책이 전해지지 않아 구체적인 내용을 알 길이 없지만 삼국사기 등에 그 기록이 전해졌다고 볼 때 역사 날조의 증거들은 수없이 찾아볼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엉성한 왕의 계보이다.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모용씨≒金씨 세력에 의해 타도된 것으로 짐작되는 마지막 昔씨 임금이 흘해이사금이다. 그는 아버지 昔于老(석우로)가 서기 249년에 죽고 61년이 지난 310년에 즉위하는데 그때부터 46년을 왕위에 있었다고 돼 있다. 昔于老가 살았을 때 『우리 집안을 일으킬 아이다』고 칭찬했다니 아버지 昔于老가 숨질 때 적어도 열 살은 됐을 것이다. 그렇다면 왕위에 오른 310년에 흘해는 70세쯤 됐을 것인데 46년간이나 왕위에 있었다니 선뜻 믿기 어렵다. 내물왕은 미추왕의 조카이자 사위인데 미추왕은 284년에 숨진다. 그 사위 내물왕은 402년에 숨진다. 장인과 사위의 사망 연대가 1백18년이나 차이날 수는 없다. 또 제3대왕과 14대 임금은 둘 다 儒理(유리), 또는 儒禮(유례)로 그 이름이 똑같다. 삼국사기 저자 김부식 조차도 「두 임금의 이름이 같으니 어느 편이 옳은지 모르겠다」고 불평할 정도다. 왜 그럴까? 국사를 편찬한 김씨 왕족이 자신들의 조상이 昔씨 왕실을 몰아낸 사실을 숨기려고 昔씨 임금으로 이어지는 계보 한가운데 미추왕을 끼워넣다 보니 이같은 엉성한 王曆(왕력)이 나왔다고 여겨진다. 즉 성씨를 모(용)씨에서 金씨로 바꾼 법흥왕이 숨진 뒤 얼마 되지 않아 신라 金씨 왕실은 자신들의 뿌리를 감추는 일종의 「알리바이 조작 작업」을 펼쳤으니 바로 국사의 편찬인 것이다. 이 때문에 金씨의 뿌리가 모용씨였다는 사실은 철저히 인멸됐을 것이다. 다만 중국의 몇몇 역사서와 경주에서 머리 떨어진 울진 봉평리의 돌비석 정도에서 김씨의 뿌리가 모(용)씨였다는 단서가 남아 있을 뿐이다.
어쨌든 법흥왕이 모(용)씨 성을 포기하고 金이란 중국식 姓을 채택하면서 기마족의 신라통치는 막을 내렸다. 金씨왕들은 스스로를 기마족이 아닌 농경족의 임금으로 자리매김하고는 유교적 관료체제로 나라를 다스려 나갔다. 그 이후 한국인들은 1천4백년 이상 기마족의 기억을 망각한 채 철저히 농경민족으로 바뀌고 말았다.
(모셔온 글) - 참역사동아리 삼태극 다음까페, cafe.daum.net/mook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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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잉? 이 시간에? 야근이싱가? 金氏에 대한 전모를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