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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호산 (方虎山) : 일명 이천부(李天富)
독립투사
1913년 함경도 출생.
만주사변후 흑룡강성 밀산 지역에서 공산당 항일 유격대에 참가하였고 ,
1936년경 공산당만주성위의 추천으로 소련유학, 모스크바 동방대학에서
교육을 받고 1940년경 신강을 경유 연안에 도착하여 동북간부훈련반과
중국공산당 중앙해외사업위원회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일제 패망 후 동북조선의용군 제 1지대(=이홍광지대 이후 독립4사-166사)
정치위원으로 만주 국공내전에 참전하였다. 1949. 7월 166사를 이끌고 입북
조션인민군 제 6보병사단장, 공화국 영웅칭호.
북한군 야전 지휘관 중에서 단순히 싸움의 상수(上手)를 들라하면 우선 꼽히는 사람이 방호산(方虎山, 方鎬山)이다. 일명 이천부(李天富)라고도 하며 1913년생 또는 1916년생으로 함경도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만주사변 후 흑룡강성 백산지역에서 공산당 항일유격대에 참가하였고 1936년 공산당 만주성위의 추천으로 소련에 유학 모스크바 동방대학에서 교육 받고 1940년 신강을 경유 연안에 도착하여 동북간부훈련반과 중공중앙해외사업위에서 교육받았고 일제 패망후 동북조선의용군 제1지대, 동북만주연군 독립4사, 166사의 정치위원으로 국공내전에 참가하는 등 10년 이상 八路軍의 중견지휘관으로 활약하여 戰歷을 높이 평가받았다.
이런 존재였으므로 당연히 김일성 일파로부터 항상 감시와 질투의 대상이었으나 북한군의 증강이 급속히 이루어지는 중 그의 작전지도력과 조직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다.
한국전쟁 개전시 방호산은 북한군 6사단장이었다. 그 6사단의 전신은 동북의용군 제 166사였다. 1949년 7월 166사를 인솔하여 압록강을 건너 신의주에 진주했는데 팔로군 출신들로 상하관계가 양호했던 것이 패주기에도 비교적 선전한 요인의 하나였을 것이다.
방호산의 6사단은 38선을 준비사격 없이 침투 돌파를 기도하였다. 소련군의 전술 독트린에 물들지 않은 것이 연안파 숙장(宿將)으로서의 진면목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개성 공방전 때도 예상 主攻방면의 수비대를 묶어놓고 폐선(廢線)된 철도를 개통하여 개성 시내로 병력을 수송한 기습을 감행했다.
최초로 한강을 도강한 것도 6사단이었다. 대전을 함락시킨 북한군은 최종목표인 부산 공략을 서두르기 위해 일부 병력을 분할하여 전라도에서 진주, 마산 방면으로 우회 측면 공격을 기도했다. 이 임무를 맡은 것이 4사단과 6사단이었다. 여기서도 방호산은 진주 전면의 하동에서 교묘한 매복작전을 성공시켜 1개 대대 규모의 한국군을 궤멸시켰다. 다만 이 때의 전략목표의 최단거리 김천-대구-부산으로 나가는 주공축에 북한군 최정예 4,6사단을 투입하지 않은 것이 결과적으로 한국군 재편성의 여유를 주고 말았다는 비판도 있으나 그것은 방호산의 책임 범위 밖의 것이었다.
한편 일본 아쿠다가와(芥川)賞 후보로 일본 패전 후 북한으로 돌아간 한국인 작가 김사량(金史良)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종군작가로 남하하여 우수한 르뽀따쥬 "바다가 보인다"를 남겼다. 6사단의 마산 침공에도 동행했고 그 상황을 묘사한 작품이 오늘날 일본어로도 읽히고 있다. 김사량은 북한군 패주시 심장 질환으로 원주 부근에서 낙오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일성으로부터 방호산의 통솔이 격찬의 평가를 받은 것은 유엔군의 반격으로 북으로 패주하던 후퇴전에서였다. 빨치산파 지휘관이 "유격대식"이라 하면 듣기는 좋으나 완전히 지리멸렬하여 탈출하는 방법을 택한 까닭에 탈주, 투항자가 속출하여 문자 그대로 운산무소(雲散霧消) 되어버린 것에 비하여 연안파 지휘관은 부대를 유지하면서 후퇴했는데 그 중에서도 방호산의 6사단은 반도 남쪽 점령정책으로 각지에 파견되었던 북한 관리 8000명을 수용하여 지리산에 일시 머물렀다가 10월 말에서 11월에 이르는 동안 산맥을 타고 북으로 돌아왔다.
김일성은 방호산을 격찬하며 일약 군단장으로 임명하는 한편 軍功이 탁월한 장군에게 특별히 수여되는 최고훈장 "이중영웅"을 수여했다.(한국전쟁 중 영웅훈장을 받은 자는 553인이나 이중영웅은 5인에 불과하다) 물론 그 서훈에는 정치적 고려가 작용했다. 중공군의 참전으로 파멸의 구렁텅이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김일성 정권으로서는 붕괴 직전의 체제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적당한 정신적 통일의 지주가 되는 존재 문자 그대로 영웅이 필요했던 것이며 패전의 책임을 뒤집어 쓸 김무정(金武停) 같은 희생양도 필요했던 것이다.
휴전이 되어 전후 부흥이 이루어져 김일성 독재체제가 확립되면서 다음 숙청의 칼끝은 방호산을 향하게 된다. 그러나 방호산은 그런 위기의식 없이 김일성 계열 지휘관의 무능을 비판하며 군부 요직에 연안파를 배치하였고 연안파 거두인 박일우와 자주 접촉하며 反김일성 사상이 점차 스며들었다. 연안파 출신 군인의 우월성을 적극 찬양하며 장평산(張平山) 같은 연안파 장군들과 자주 접촉하며 자파세력의 확대강화에 전력을 경주하였다.
어린이들의 그림책과 교과서에도 올랐던 방호산은 김일성 일파로부터 종파주의자, 개인영웅주의자, 반당분자로 몰리어 하루 아침에 이중영웅의 칭호도 당적도 군직도 박탈 당한채 1954년 제대되어 함경남도 단천 근덕 광산 부지배인으로 좌천된 후 그 이후의 소식은 알려져 있지 않다.(중공으로 망명했다는 기록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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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사단장으로 임명된 방호산(方虎山 : 본명 李天富) 소장은 1913년(일부자료 : 1916년) 함경도에서 출생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 후 흑룡강성 밀산지역에서 공산당 항일유격대에 참가하고, 1936년경 공산당 만주성 위원회의 추천으로 소련에 유학하여 모스크바 동방대학에서 수학하였다. 1940년 소련에서 교육을 수료한 후 연안에 도착하여, 동북간부훈련반과 중공 중앙 해외사업위원회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일제 패망 후 동북조선의용군 제1지대 이홍광 지대, 동북민주련군 독립 제4사, 제166사의 정치위원으로 만주의 국공내전에 참가하였다. 그후 1949년 7월, 제166사단을 인솔하여 신의주로 입북하여, 북한군 제6사단으로 개편하고, 사단장에 임명되었다.
(2) 작전기도 및 전투편성
북한군 제6사단은 6.25전쟁에 참가하기 위하여 1950년 6월 18일 사리원에서 기차로 이동하여 개성북방에 배치되었다. 이 과정에서 제14연대를 제1사단으로 전환하고, 제1사단 예하의 제1연대가 제6사단의 예하부대로 편입되었다. 이에 따라 제6사단은 제13연대를 개성의 정면에 배치하고, 제15연대는 제13연대 우측의 연백군 온천면 일대에 배치하였으며, 제1연대를 예비로 하였다.
이때 제6사단에 부여된 임무는 다음에 제시된 바와 같이 북한군의 반격계획(선제타격 계획) 제1단계 작전계획에 따라 옹진반도를 공격하는 제3경비여단에 제1연대를 배속하고, 사단(-1)은 개성을 향해 공격을 개시하여 이를 점령한 다음, 개성 남쪽의 한강하구에서 김포반도로 도하하여 영등포를 향해 진격하는 것이었다.
(제6사단은 개성을 점령한 후) 첫 째날(6월 25일) 오후 늦게 병력의 일부로 하여금 개성반도의 방비를 강화하게 하면서 하조강리(개성남방 20km 지점)에서 한강을 도하하고, 둘 째날(6월 26일) 아침에 통진-백석현 고개-마곡리 선을 따라 한강의 남쪽 강변에 교두보를 확보하고, 서울의 적 병력이 서남쪽으로 후퇴하는 것을 차단하면서, 한강 남쪽 강변을 따라 영등포로 공격을 확장한다. 병력의 일부는 제물포(인천)를 점령한다.
이상과 같은 계획에 의해 7월 3일, 영등포를 점령함으로써, 제1단계 작전을 마치고, 수원으로 진출한 제6사단은 그들의 제2∼4단계 작전계획에 의해 서해안을 따라 목포와 순천을 점령한 후 남해안을 따라 하동-진주-마산방향으로 진출하게 된다. 이 같은 북한군 제6사단의 제2∼4단계 작전내용은 국군과 유엔군이 파악하고 있는 내용과 큰 차이가 없으나, 제1단계작전 즉, "제6사단이 김포반도를 따라 공격하였다"는 내용은 이제까지 알려졌던 내용과 전혀 다른 내용이다.
김포반도의 공격부대에 대해 국군과 유엔군의 전쟁사는 "북한군 제6사단 예하의 제14연대가 6월 26일 17:00경 김포반도의 조강리 일대로 도하하여 김포반도를 따라 공격하였으며, 제6사단(-1)은 제1사단과 함께 금촌-일산 축선으로 공격하다가 행주일대에서 한강을 도하하여 김포비행장 방향으로 공격하였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라주바예프 보고서'를 비롯한 최근에 발간된 자료에 의하면 "전쟁 초기 북한군 제14연대는 제1사단의 예하부대로 문산-금촌 축선을 따라 기동하였으며, 제1사단과 함께 문산 축선으로 기동한 것으로 알려졌던 제6사단(-1)이 배속된 전차중대와 함께 김포반도에 상륙하여 영등포 방향으로 공격하였다"는 것이다. 한편 옹진반도를 공격하였던 제6사단 예하의 제1연대는 옹진반도 전투가 6월 26일 10:30부로 종료되었음을 볼 때, 제6사단의 본대를 후속 하여 한강을 도하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 같은 제6사단의 김포반도 기동 내용을 종합해 볼 때 6.25전쟁 초기 서울점령 및 서울후방을 차단하기 위한 북한군 제1단계작전의 내용은 전반적인 재검토가 불가피하며, 그들의 작전 기도(企圖) 역시 확연히 달라지는 것이다. 또한 북한군 제2∼4단계 작전시 제6사단이 내륙의 기동로를 이용하지 않고, 서해안과 남해안을 따라 기동하였던 측방 우회기동의 구체적인 작전경과와 그 의의에 대해서도 새롭게 조명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3. 서울 서남부(김포반도-영등포) 축선 우회기동
6.25전쟁이 시작되자 북한군은 국군 제17연대와 제1사단 제12연대가 방어하고 있는 한강북쪽의 옹진반도일대에 정예의 제6사단과 제3경비여단을 투입하여 당일 개성 및 옹진 일대를 점령하였다. 이 지역은 북한군이 문산-행주 축선을 따라 남으로 진출할 경우 자동적으로 고립되어 버리기 때문에 전략·전술적인 측면에서 가치는 크게 떨어지는 곳이었다. 그럼에도 북한군이 이 일대를 우선적으로 점령한 것은, 한강하구를 도하하여 김포반도로 진출하기 위한 도하지점을 확보하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여진다. '라주바예프 보고서'는 북한군 제6사단의 개성지역 전투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6월 25일 새벽 05시 10분부터 30분간에 걸친 포병의 공격준비사격을 실시한 후 대포와 박격포 사격을 동반하여 보병과 전차가 (개성을 향하여)공격으로 전환하였다. ∼중략∼ 보병과 전차는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방어지역 전단의 적 지탱점들을 성공적으로 공격하였다. 아침 6시 20분에는 제15 및 13보병연대들이 개성에서 시가전에 돌입하였으며, 짧지만 격렬한 전투를 벌인 끝에 7시 30분 무렵에 개성에서 적을 완전히 소탕하였다. ∼중략∼ 제6보병사단 예하부대들은 오후 4시 무렵 적을 계속 추격, 율동(개성 서남방 11km)과 송산리(개성 동남방 13km) 선까지 진출하여 최종임무를 완수하였으며, 첫째 날에 한강 북쪽 강변까지 진출하여 영정리와 방책동 전방에서 도하 준비에 착수하였다.
이 같은 계획에 의해 개성 및 김포반도를 공격하였던 제6사단의 주요 장비는 <표1>과 같이 T-34 전차 4대를 비롯한 SU-76자주포 16문 등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표1> 제6사단의 주요장비 현황
자료출처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라주바예프의 6.25전쟁 보고서(제1권)』, 2001, pp. 284∼287.
한편 6.25전쟁이 발발했을 때, 육군본부는 북한군을 문산-의정부 북방에서 저지하기 위해 고심하고 있었으며, 김포반도 일대에는 단 1명의 전투요원도 배치하지 않고 있었다. 김포반도 북방의 옹진과 개성을 연하는 선에 국군 제17연대와 제1사단 제12연대가 배치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김포반도는 한강이 보호해 주는 후방지역이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인식은 근본적인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북한군이 문산-동두천을 연하는 선으로 진출할 경우 한강으로 인해 후방이 차단되는 제17연대와 제12연대는 육군본부가 기대하는 것만큼의 전투력을 발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상황에 따라 김포반도는 곧바로 최전선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이점에 대한 대비책이 사전에 강구되어 있어야만 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육군본부는 전쟁발발 직전까지 김포반도 방어를 위한 어떠한 대책도 강구한 바 없이 전면전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개전(開戰) 하루만인 6월 26일 아침이 되자, 옹진반도와 개성일대가 이미 적의 수중에 들어가 있고, 이어서 임진강 방어선과 의정부가 위협을 받는 상황이 조성되자, 육군본부는 비로소 김포반도의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김포반도의 위기를 실감한 육군본부는 6월 26일 오전, 임시방편으로 김포에 위치하고 있던 남산학교(정보학교)의 기간요원(장교 10명, 사병 30명)을 모체로 '김포지구전투사령부(이하 김포사)'를 황급히 편성하고, 남산학교장을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적의 한강도하와 김포반도 진출을 저지하도록 명령하였다. 이에 따라 보병학교 고급반 학생으로 피교육 중이던 남산학교장 계인주 대령이 급거 귀대하였으며, '김포사' 참모장으로 임명된 남산학교 부교장 최복수 중령과 함께 육군본부에 추가 병력을 요청하였다.
이 결과 26일 밤까지 김포반도에는 <표2>와 같이 장갑차소대, 제12연대 제2대대, 장갑대대, 보국대대, 후보생대대 등 4개대대 규모의 병력이 배치되었으나 이들은 사전에 계획된 부대가 아니고, 임기응변 식으로 축차 투입된 부대였기 때문에 각 부대간의 횡적인 협조가 이루어지지 않아 서로 인접부대 상황을 알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표2> 김포반도에 배치된 아군병력 현황(6월 26일 밤까지)
자료출처 :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한국전쟁(제1권)』, 1977, pp. 660∼676.
이와 같이 임시 혼합 편성된 부대들로 구성된 3개 대대규모의 '김포사'가 정예를 자랑하는 북한군 제6사단의 도하를 저지하기에는 최초부터 무리가 있었다. 그러나 북한군 제6사단의 입장에서 볼 때는 '김포사'의 병력보다는 더 무서운 적이 있었는데, 바로 한강 하구의 자연적인 장애물의 효과였다.
한강하구는 조수의 영향을 받아 하루 2차례씩의 간만조(干滿潮) 현상이 반복되는데, 간만조(干滿潮)가 진행되는 시기에는 1.0m∼1.5m/sec의 격심한 유속(밀물과 썰물)에 의해, 간조(干潮)기에는 노출된 강바닥의 갯벌에 의해 도하가 제한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북한군 제6사단의 도하는 6월 25일 밤∼27일 밤까지 지연되는데, 이 시기가 국군에게는 천우신조와 같은 역할을 했던 것이다. '라주바예프 보고서'는 북한군 제6사단의 한강하구 도하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한강은 진격에 있어 치명적인 장애물이었기 때문에 이 강을 도하하는 데는 충분한 량의 도하 장비와 군관 및 병사들에 대한 교육훈련이 필요하였다. 그러나 적절한 조직력이 부재하고, 도하 장비도 부족했기 때문에 6월 26일 아침 6시 30분 무렵까지도 15보병연대 예하 1개대대 및 제13보병연대 예하 1개대대와 교육대대 및 76mm 야포 2문만이 한강 남쪽 강변으로 도하 할 수 있었다.
제6보병사단 예하부대들은 적의 포격과 공습에도 불구하고, 도하를 계속하여 6월 27일 오전에 제15·13보병연대 주력, 제15연대포병 및 대대포병, 제6사단 포병연대 예하의 2개포대와 제17 군단포병연대 예하 제2포대 등이 한강을 도하하였다. 그 외의 포병, 전차 및 자주포 등은 도하에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후 제6사단 예하부대들의 진격은 서울로부터 투입된 적 제22보병연대 2개대대, 2개의 보병학교 생도대대 및 여타 부대들의 조직적인 저항에 의해 약산리-도이곶을 연하는 선에서 저지되었다. 6월 27일 주간에 시도된 포병의 도하는 적의 수 차례에 걸친 항공공격으로 인하여 계속 지연되었다.
6월 27일 밤부터 28일까지 사단 내 보병과 제13연대 포병 및 대대포병, 사단포병연대 예하의 2개포대, 76mm 자주포 포대, 제17 군단포병연대 예하의 제2포대 및 전차중대 등이 강을 완전히 도하하였다. 6월 28일 여명을 기해 짧은 시간동안 포병 공격준비 사격을 실시한 후에 보병이 전차와 합동으로 적을 공격하여 적을 대곡리, 김포지역으로 퇴각 시켰다.
이상의 기록에서 북한군 제6사단의 김포반도 기동은 한강의 장애물을 극복하지 못함으로써 3일 이상 지연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한강을 극복하지 못한 이유는 자연적인 문제와 아울러 북한군의 훈련 및 도하장비가 부족하였던 점을 들 수 있다. 따라서 당시 북한군의 도하수단을 분석해보는 것도 중요한 사항이 될 것이다.
김일성은 북한군의 전력증강에 박차를 가하고 있던 1949년 4월 28일 쉬띄코프 소련대사를 통해 YAK기 등 100여대의 항공기와 132종의 물자 및 장비를 요청하였는데, 이 중에는 상륙 및 도하작전을 위해 수륙양용 장갑차 6대, 상륙용 보급함정 DSL 12척, BMK(소형보트) 6척 등이 포함되어있었다. 한편 김일성의 요청을 받은 소련은 김일성이 요청한 장비의 거의 대부분을 제공할 것에 동의하는 전문을 1949년 6월 4일자로 보냈다. 이에 따라 북한은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대부분의 장비를 보유하게 되었다.
또한 북한은 1950년 6월 20일 상륙작전용 선박을 추가로 요청하는 전문을 소련에 보냈으며, 소련은 이를 수락한다는 전문을 6월 21일자로 보냈으나, 전쟁 전까지 인도되지 않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데 이 선박들은 도하작전용이 아닌 동해안과 서해안에서 상륙 및 물자의 수송을 위해 필요한 선박이었기 때문에 한강의 도하작전과는 관계가 없는 장비였다. 따라서 북한군은 전쟁 전에 자신들이 계획하였던 소요장비의 대부분을 확보한 것으로 보여진다.
이 결과 북한군은 개전(開戰) 직전까지 2개의 도하대대를 보유할 수 있었으며, 이 중 1개대대를 문산-행주방향으로 한강북단을 따라 기동하는 제1사단에 배속하였다. 그러나 나머지 1개대는 어느 부대 지역에서 운용되었는지를 밝히지 않고 있는데, 당시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제6사단에 배속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북한군은 한강의 도하를 위해 제6사단과 제1사단에 각각 부교대대 1개 대대씩을 배속하였다면, 나름대로, 한강의 도하를 위한 대책을 강구했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이때 '김포사'는 급조된 병력으로, 6월 26일 창설된 이후 7월 3일까지 8일 동안에 <표3>과 같이 5명의 사령관과 예하의 단위부대까지 교체하면서 임무를 수행하였다.
<표3> 일자별 김포사령관과 작전 경과
자료출처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라주바예프의 6.25전쟁 보고서(제1권)』, 2001 ;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한국전쟁(제1권)』, 1977. 발췌 정리
<표3>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당시 '김포사'와 예하부대들은 황급한 상황하에서 임시로 편성된 부대였기 때문에 부대의 지휘체제가 제대로 확립되지 못하여 현지에 적응할 수 있는 여유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지극히 미약한 병력으로, 정예의 북한군 제6사단을 맞이하여 고전을 면치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김포사'의 장병들은 이 같은 난관을 극복하고, 제6사단이 김포반도에 교두보를 확보하는 과정으로부터 김포비행장에 도달하기까지 3일 이상을 지연시킨 결과, 전쟁의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특히 '김포사' 창설시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던 최복수 중령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던 계인주 대령이 전투현장을 무단 이탈함으로써 야기된 지휘공백을 극복하고, 사령관을 대리하여 부대를 효율적으로 지휘하였다. 이 결과 국군 제1사단 등 2개사단 규모가 행주일대에서 한강을 도하하여 철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최복수 중령과 우병옥 중령 등 2명의 사령관이 전사 또는 사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김포사' 장병들은 6월 30일부터 7월 3일까지 4일간에 걸친 오류동 일대의 공방전으로 '한강방어선 유지'에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만약 이때 북한군 제6사단이 '그들의 계획대로 6월 25일 야간에 한강을 도하하여 김포반도에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었다'고 가정(假定)한다면 어떤 상황이 조성되었을까? 북한군이 계획대로 김포반도에 진출하였다면, 그들은 초기의 공격기세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경우 북한군은 6월 26일 오후, 또는 27일까지는 영등포에 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전쟁의 전반적인 상황은 어떻게 발전되었을까? 당시 이승만대통령의 피란이 27일 03시, 한강교 폭파가 28일 02시 30분이었음을 고려할 때 어렵지 않게 유추해 볼 수 있는 문제이다.
결과적으로 '김포사'는 북한군 제6사단을 맞이하여 매우 불리한 입장에 있었음에도 한강의 장애물 효과를 최대로 활용하여 효과적인 방어 임무를 수행함으로써,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김포반도 전투의 의의와 '김포사'가 6.25전쟁 초기작전에 기여한 바를 새삼스럽게 재평가하는 뜻이 여기에 있다.
4. 한반도 서남부(충남-호남-경남) 축선 우회기동
(1) 천안-예산-강경 방향 기동
한강방어선을 돌파한 북한군은 수원-이천-원주를 연하는 선까지 진출함으로써, 그들이 수립한 제1단계작전을 완료하고, 7월 5일을 기하여 제2단계 작전으로 전환하였다. 이 때 제6사단은 제3·4사단을 후속하여 천안에 진입한 이후부터 서해안을 따라 기동하게 되는데, 이 과정을 '라주바예프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950년 7월 11일 오후 4시, 제6보병사단은 부여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집결지(천안일대)로부터 진격을 개시하였다. 제6보병사단 주력은 적으로부터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으면서 7월 12일 아침 6시 무렵 유구리(공주) 지역에 도달하였다. 서해 연안을 따라 예산, 홍성, 서천 방면으로 진격하는 제13보병연대는 예산부근에서 적과 전투를 벌였다. 적 항공기들은 제6사단의 이동 대열을 발견하고 강력한 공격을 가하였다. (항공기의 공격으로 인해) 사단은 야간이 될 때까지 기동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중략∼
제6보병사단은 7월 19일 아침부터 행동을 개시하여 적으로부터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금강(錦江)을 도하하였으며, 개별 경찰부대들을 격파하면서, 남쪽으로 진격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7월 19일 오후 늦게 만경강 지역까지 진출하였다. 제15보병연대는 7월 20일 새벽 3시 무렵 김제를 점령하였다. 제1보병연대는 동산리(이리시 동산동) 지역에서 경찰수비대 200여명을 격파하고, 7월 20일 오전 11시 무렵에는 전주를 점령하였다.
위의 기록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북한군 제6사단은 천안-공주 방향으로 진출하는 제4사단과 천안-유성 방향으로 진출하는 제3사단을 후속하여 서해안 축선의 천안-예산 방향으로 기동하였기 때문에 아군의 저항 없이 순조로운 진출을 계속할 수 있었다. 당시 국군과 유엔군은 방어지역을 분담하여 경부 축선을 기준으로 하여 경부 축선과 서측을 유엔군이 담당하고, 동부 산악지역을 국군이 담당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충남지역을 방어하는 미 제24사단은 7월 8일 천안을 피탈 당하자, 다음방어선으로 금강을 연하는 선을 선정하고, 7월 12일 저녁, 금강 남쪽으로 철수한 다음, 13일 04:00을 기하여 금강을 도하하는 모든 교량과 선박들을 폭파시키고, 금강 남쪽을 따라 하천선 방어에 임하고 있었다. 이때 미 제24사단은 공주 정면에 제34연대를 배치하고, 대평리 정면에는 제19연대를 배치하고 있었으나, 공주의 제34연대는 7월 14일 밤에, 대평리의 제19연대는 16일 밤에 북한군 제4·3사단의 측방우회공격으로 인해 붕괴되자 대전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이 결과 북한군 제6사단은 아군의 저항 없이 금강을 도하하여 남진을 계속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북한군 지도부는 금강과 대전 일대에 강력한 미군 2개사단이 배치된 것으로 판단하고(북한군의 오판임), 7월 12일 공주 유구에 도착해 있던 제6사단의 주력을 전의(조치원 북방) 일대로 전환시킴으로써, 제6사단이 다시 서해안을 따라 공격을 개시할 때까지 약 4일간을 지체하게 됨으로써, 그들의 서측방 기습효과는 반감되었다. 이때의 상황을 '라주바예프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대규모 미군병력(제25보병사단 및 제1기병사단 주력 등)이 대전지역에 전개되자, 제6보병사단은 다음과 같은 임무를 부여받았다. 1개연대로 하여금 서해 연안을 따라 계속 진격하도록 하고, 주력은 군단 제2제대로 전환하여 전의(조치원 서북방 12km) 지역에 집결한다. 7월 13일 야간에 사단 예하부대들은 광정리(조치원 서방 16km)를 지나 산악 소로를 따라 지정된 지역으로 이동하기 시작하였으며, 7월 14일 새벽 5시 무렵 지정된 지역에 집결하였다. 포병 및 자주포의 지원이 없었기 때문에 예산, 천안, 전의를 따라 이동이 이루어 졌다.
제3보병사단 및 제105땅크사단 예하부대들이 대전 서북방에 위치한 금강북쪽 강변으로 진출하자, 전의(全義) 지역에 집결해 있던 제6보병사단은 서해 연안의 해방을 위한 이전의 방향으로 복귀하라는 지시를 받고, 7월 14일 밤 8시부터 이동에 나섰다. 사단은 7월 17일 오후 늦게 강경 북방 2km까지 진출하여, 7월 18일 아침 무렵 강경을 점령하였다.
이 때 만약 북한군 지도부가 대전전투와 관계없이 제6사단으로 하여금 공주 서남쪽의 금강하류를 도하하여 전주-남원 방향으로 신속히 진출하도록 하였다면 어떤 상황이 조성될 수 있었을까? 필자는 그들이 7월 20일 이전까지 순천에 도달할 가능성이 있었으며, 이 경우 국군과 유엔군이 이들에 대한 효과적인 대비책을 강구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본다. 결과적으로 순조로운 진출을 계속하고 있던 제6사단을 공주에서 전의로 역행군(逆行軍)시킨 북한군 지도부의 조치는 천재일우(千載一遇)의 호기를 상실하게 된 결정적인 잘못이었던 셈이다.
(2) 호남을 석권한 북한군 제6사단, 하동으로 진출
7월 19일 금강을 도하한 북한군 제6사단은 당일 이리를 점령한 후 2개 제대로 분진(分進)하였으며, 그중 1개 제대인 제15·13연대는 이리-김제-목포 방향으로, 또 다른 1개 제대인 제1연대는 이리-전주-구례-순천방향으로 계속 진출하였다.
당시 전남·북 지방에는 7월 7일부로 하달된 육본 특명 제11호에 의거 서울북방의 전투에서 해체된 제5·7사단을 재편성하고 있었으며, 동월 8일부로 전남·북편성관구사령부가 설치되었다. 이어서 7월 17일에는 서해안지구전투사령부가 창설되어, 신태영 소장이 사령관에 임명됨으로써, 편성중인 제7사단의 잔여병력인 민기식부대, 고길훈부대(후에 김성은부대로 개편), 이영규부대, 오덕준부대 및 지역 경찰부대 등 가용한 작전요소를 통합지휘하여 호남지역 방어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군산, 전주, 남원, 임실 등 일부지역에만 배치되어 있었다. 또한 대부분이 현지에서 모병한 신병으로 편성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장비 및 탄약의 보급이 열악하였기 때문에 정상적인 전투력 발휘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북한군 제6사단의 상대가 되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 결과 북한군 제6사단은 제1제대인 제13·15연대로 고창(22일 저녁), 영광(23일 새벽)을 점령하였으며, 24일에는 나주를 점령한데 이어, 영광에서 투입된 제13연대로 하여금 목포를 점령하게 하였다. 또한 제2제대인 제1연대는 전주(20일)를 점령하고, 이어서 24일에는 남원과 구례를 점령하였으며, 25일 새벽에는 순천을 점령한데 이어 이날 아침에 여수를 점령하였다. 이때의 과정을 '라주바예프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제6보병사단의) 제15보병연대는 7월 20일 새벽 3시 무렵 김제를 점령하였다. 제1보병연대는 동산리(이리시 동산동) 지역에서 경찰수비대 200여명을 격파하고, 7월 20일 오전 11시 무렵에는 전주를 점령하였다. ∼중략∼ 7월 22일 새벽부터 사단 예하부대들이 진격을 재개하였으며, 7월 22일 저녁 7시 무렵에는 영광방면으로 진격하는 제15보병연대가 고창을 점령하였고, 7월 23일 새벽 4시 무렵에는 영광을 점령하였다. ∼중략∼
제6보병사단장의 결심에 따라 7월 23일 저녁 8시에 사단 제2제대인 제13보병연대가 영광 지역에서 함평-목포 방면으로 투입되었다. 연대는 적과의 접전 없이 성공적으로 진격하였으며, 7월 24일 아침 6시 무렵 차량에 탑승한 선두부대가 목포 점령을 위한 전투를 수행하였다. ∼중략∼
제1보병연대는 1개 포병대대 및 1개 대공포대대와 협동으로 고창지역으로 진출한 후, 동북 방면의 남원으로 진출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연대는 남원을 점령한 후, 그 곳에서 지체하지 않고 동남방향으로 진격하여 7월 24일 오후 늦게 구례를 해방시켰다. ∼중략∼
연대는 짧은 휴식을 취한 후에 진격을 계속하여 7월 25일 새벽 5시 무렵에 순천, 그리고 아침 6시 30분 무렵에는 짧은 시간 동안의 전투를 실시한 후에 여수항을 점령하였다. 항구를 점령한 후 연대는 항구 수비를 위하여 1개 보병대대와 1개 자주포대대를 배치시키고, 남은 병력을 투입하여 하동과 진주 방면으로 진격하였다.
이상의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북한군 제6사단은 7월 26일까지는 호남지방을 석권하고 하동으로 진출하였다. 그런데 북한군 제6사단이 호남지방을 석권하였던 과정을 분석해보면, 그들의 주 타격방향은 이리-전주-남원-순천-하동 방향이 아닌 이리-고창-나주-목포 방향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같은 판단은 이리-순천-하동 방향에는 1개연대를 운용한 반면, 이리-목포 방향에 사단의 주력(2개연대)을 운용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북한군이 하동-진주 방향의 진출보다도 이리-목포까지의 서해안을 우선적으로 점령한 배경은 서해안을 통한 해상보급과 기타 수송을 위한 것으로 보여 진다. 당시 북한군은 계속되는 유엔군의 공중공격으로 전선의 보급추진을 야간에 주민들을 동원한 등짐에 의존하고 있었다. 따라서 전선부대의 보급사정이 극히 열악하여 북한군의 작전 지속력에 결정적인 지장을 초래하고 있던 북한군은 해상에 의한 보급추진을 강구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 같은 판단의 근거로 북한군은 전쟁 직전인 6월 20일, 소련에 보급추진용 선박을 요청하였던 사실 등을 들 수 있다. 이 경우 동해안은 유엔 해군에 의해 해상활동이 극히 제한되었던 반면 서해안은 중국의 해안으로부터 근거리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공산권 국가의 도움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 같은 이유로 북한군 제6사단의 주력은 호남지방의 항구들을 점령하는데 3일 이상을 소모하였으며, 제1연대(-1)가 단독으로 7월 27일 아침에 하동을 점령한 후에야 2개 제대로 분진하여 운용되었던 사단의 주력이 하동에서 합류하게 되었다. 그러나 만약 북한군 제6사단이 이리를 점령하였던 7월 20일, 주력을 이리-목포 방향으로 운용하지 않고, 곧장 이리-전주 방향을 경유하여 남원-순천-하동 방향으로 진출하였다면, 북한군은 늦어도 7월 23일까지는 하동, 또는 진주에 도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같은 가정은 당시 8군의 예측과도 일치하는 부분이다. 또한 북한군 제6사단장 방호산 소장도 진주로 진격함에 있어 예하부대에 "동무들 적은 사기가 저하되고, 전투력이 극도로 약화되어 있다. 위대한 인민군은 진주와 마산을 해방시키고, 적을 포착 섬멸하는 것이다. 진주와 마산을 해방시키면, 적의 목덜미를 누르는 마지막 판국이 될 것이다"라고 호언 장담하였다.
따라서 만약 북한군이 당시 8군의 예측한 것처럼 낙동강 방어선의 기틀을 잡기도 전인 7월 23일경에 하동-진주 방향으로 쇄도하였다면, 낙동강 방어선은 기초부터 흔들리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3) 유엔군의 정보판단과 하동전투
대전전투가 치열하게 진행 중이던 7월 20일, 유엔 공군의 정찰기는 금강 남쪽에서 서해안을 따라 남하 중인 북한군의 대부대를 발견했다. 유엔군 사령부는 이 부대를 북한군 제4사단의 일부로 판단하고 있었다. 그런데 다음날인 21일과 22일에는 비가 내려 정찰기를 띄울 수 없었기 때문에 이미 발견하였던 북한군을 놓치고 말았다. 8군은 당황하여 정보수집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한국측에서 제공하는 첩보는 신뢰하지 않았다. 23일 비가 그치자, 8군은 대대적인 공중정찰을 요청하고, 그 동안 입수된 첩보를 분석하여 이들의 선두가 함양-진주까지 도달하였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으나, 이때까지도 이들이 제4사단의 일부일 것이라는 판단에는 변함이 없었다.
당시 8군은 7월 20일, 미 제24사단이 대전에서 붕괴된 이후 미 제1기병사단과 제25사단을 투입하였으나, 영동과 상주 일대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진주-거창-김천을 연하는 서남 방향에 대해서는 대비책을 강구할 만한 여력이 없었다. 따라서 당시의 판단대로 북한군 제4사단의 일부가 서남 방향에서 쇄도해 온다면 "부산이 직접적인 위협을 받게 될 뿐만 아니라, 추가적인 전투력이 증원될 때까지 축차적인 지연전을 실시한다"는 8군의 구상에 치명적인 위협을 가할 수 있었다.
이 같은 상황에 따라 8군사령관 워커 중장은 궁여지책으로, 대전전투에서 혹독한 피해를 입고 겨우 철수해온 미 제24사단으로 하여금 진주-김천을 연하는 선을 점령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 구간은 직선거리로 100km나 되는 광정면인데 비해 방어하는 제24사단은 대전전투의 피해가 복구되지 않아 전투력 발휘를 기대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그럼에도 서측방 방어 임무를 부여받은 미 제24사단은 제19연대를 진주-함양 선에, 제34연대를 거창에, 제21연대와 사단사령부를 합천에 배치하였다.
이때 진주-함양을 연하는 50Km의 구간에 배치된 미 제19연대의 경우, 600여 명의 전투원과 편제 장비의 35% 수준으로 1개 대대에도 미치지 못하는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또한 연대장 무어(Ned D. Moore) 대령 역시 7월 25일 부임하였던 관계로 현지 실정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상되는 적의 위협은 심각했다. 이에 8군은 제19연대의 전력증강을 위해 오키나와에서 황급하게 추진 배치된 미 제29연대의 제1·3대대를 제19연대에 증원하였다. 이에 연대장 무어 대령은 이 들이 25일 오후, 진주에 도착하자마자, 제1대대를 함양 북방의 안의에 배치하고, 제3대대는 채병덕 소장의 안내에 따라 하동을 공격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런데 제29연대 3대대는 7월 15일 한국으로 출동을 명령받은 후, 20일 본국으로부터 도착한 신병 400여 명을 보충 받아, 영점사격은 몰론 지급 받은 기관총의 격납유도 닦아내지 못한 채, 밤낮없는 강행군으로 7월 25일 오후에 진주에 도착했던 것이다. 따라서 제3대대가 전투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일정기간의 휴식과 훈련이 필수적인 입장이었다. 그러나 긴박한 당시의 상황은 이 마저도 여의치 못했기 때문에 대대장 못트(Horald W. Mott) 중령은 공격보다는 방어를 건의했다. 그러나 연대장 무어 대령의 하동 공격의지는 단호했다.
무어 대령이 굳이 하동을 확보하려 했던 까닭은 한국군 전 총참모장 채병덕 소장의 제안을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채병덕 소장은 총참모장 재임당시 초전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총참모장 직에서 물러난 이후 영남편성관구사령관에 임명되었으며, 7월 25일에는 영남서부지구방위사령관으로 임명받고, 당시 신성모 국방부 장관으로부터 "하동을 필히 확보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에 따라 채 소장은 25일 당일 보좌관 정래혁 중령을 대동하고 하동을 방문하였으나 휘하에는 전투병력이 없었으며, 가용한 병력을 확보할 수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정래혁 중령을 하동에 잔류시켜 두고, 진주로 달려간 채 소장은 미 제19연대장 무어 대령을 만나 하동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이 같은 연유로 무어 대령은 '채병덕 소장이 하동까지 안내를 맡는다.'는 조건으로 공격을 결심했던 것이다.
무어 대령의 명령에 따라 제3대대는 '26일 여명에 하동으로 진격한다.'는 계획을 수립하고, 26일 0시 30분에 진주를 출발했다. 이때 만약 제3대대가 그들의 계획대로 하동을 공격할 수 있었다면, 그들은 북한군보다 한발 앞서 하동에 도착하여 방어상태에서 북한군을 맞을 수 있었다. 그러나 제3대대가 우여곡절 끝에 하동 동쪽 8㎞ 지점의 횡천리에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물어 있었다. 이에 야간행군을 위험하게 생각한 대대장은 횡천리에서 숙영하기로 하였다. 병사들은 24일부터 26일까지 3일간을 한잠도 자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연대로부터 "27일 09:45에 항공기의 공격과 함께 하동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수령한 대대는 27일 08:45경에 숙영지인 횡천리에서 하동고개(적량면 우계리)를 향하여 출발했다. 그리고 09:00경 하동고개의 우계리일대에서 10∼15명의 북한군과 조우했다. 제3대대의 선두부대가 이들을 추격하여 하동고개로 진입한 순간 적의 집중사격이 시작되었다. 고개에 갇힌 대대는 북한군의 포화에 대항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붕괴되었다.
북한군의 사격으로 대대를 안내하던 채병덕 소장은 두부 관통상을 입고 현장에서 전사하였으며, 7월 28일 집계된 피해는 전사 2명, 부상 52명, 행방불명 349명으로 추산되었다. 그 후 9월 말 미 제25사단이 하동을 탈환했을 때, 미군의 시체 313구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한편 이 때의 상황을 '라주바예프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제1)연대는 짧은 휴식을 취한 후에 진격을 계속하여 7월 25일 새벽 5시 무렵에 순천, 그리고 아침 6시 30분 무렵에는 여수항을 점령하였다. 항구를 점령한 후 연대는 항구 수비를 위하여 1개 보병대대와 1개 자주포대대를 배치시키고, 남은 병력을 투입하여 하동과 진주 방면으로 진격하였다.
연대는 7월 27일 아침 9시 무렵 하동 근교에서 포병을 동반하고, 이동 중이던 미군 1개 보병대대 병력과 조우, 적을 격파하였으며, 155mm 곡사포 12문, 박격포 9문, 차량 14대 등을 노획하였다. 연대는 계속해서 섬진강을 도하하여 오전 10시 무렵에 교두보를 확보한 후 하동을 점령하였으며, 7월 28일 오후 늦게 원동(하동 동북방 6km) 지역까지 진출하였으나, 그 곳에서 적의 조직적인 저항에 직면, 사단의 주력이 도착할 때까지 전투를 벌였다.
이같은 과정을 분석해보면 미 제19연대장 무어 대령이 제3대대를 하동으로 진출하도록 명령할 당시인 7월 26일 아침까지는 순천에서 공격해 오는 북한군의 선두가 하동까지는 진출하고 있지 않을 때였다. 따라서 무어 대령의 판단은 신속히 하동으로 진출할 경우 하동을 선점할 수도 있다는 기대를 가질 만도 했다. 또한 당시 8군의 정보판단에 의해 서남부 지방에는 북한군 제4사단이 광범위한 지역에서 기동하고 있기 때문에 하동을 향해 공격해오는 부대의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을 것으로 판단했을 수도 있다.
당시 유엔군 사령부는 적에 관한 첩보획득의 많은 부분을 항공정찰에 의존하고 있었다. 적에 관한 가장 정확한 정보는 지상군에 의해 획득된 포로 신문결과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당시 호남지방에서 지상작전을 담당하였던 국군의 서해안지구전투사령부는 포로획득을 통해 북한군 제6사단의 기동과 관련된 첩보를 비교적 상세히 파악하고 있었다. 또한 7월 20일에는 서해안지구 전투사령관 신태영 소장과 참모장 원용덕 준장이 대구의 육군본부를 방문하여 이 일대의 상황을 상세히 보고하였다. 따라서 8군이 서남부 지역의 적상황을 육군본부에 문의하였다면 보다 용이하게 파악할 수 있었으나 당시 미군들은 한국군의 보고를 신뢰하지 않는 경향이 많았다. "한국군의 첩보는 과장이나 허위가 많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로 인해 채병덕 소장과 미군은 서남부에서 공격해오는 적에 대해 부대규모(1개연대-1), 시기(27일, 09:00경) 등 적에 관한 정보를 명확히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무리한 공격을 감행함으로써, 많은 피해와 패배를 자초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8군은 서남부에서 공격하는 북한군 부대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을 강구하지 못하고, 임기응변적인 임시조치로 피해를 자초하게 되었으며, 신성모 장관이나 채병덕 소장의 '하동 확보를 위한 조치' 역시 당시 상황을 제대로 감안하지 못한 조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신태영 소장 등으로부터 서남부에서 기동하는 북한군에 대해 보다 상세한 상황을 알 수 있었을 것임으로, 그들이 8군 또는 19연대장 등에게 보다 상세한 첩보를 제공하여 주었다면, 8군이 보다 용이하게 서남부에 대한 대비책을 강구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하동으로 공격해오는 북한군은 제1연대의 2개대대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제3대대가 보다 신속히 진출하여 요충지를 선점할 수 있었다면 북한군의 진출을 상당기간 지연시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5) 진주피탈과 미 제25사단의 마산 전용
진주방어를 위해 일본에서 증원된 제29연대의 2개대대를 투입한 8군은 7월 28일까지도 "당면한 적은 북한군 제4사단의 일부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 정도 병력이면 상당기간 동안 진주를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러나 북한군은 7월 29일 오전부터 진주를 향하여 정면공격과 함께 양익포위 공격으로 총공세를 감행하였다. 결국 진주는 7월 31일 06:00경 북한군의 전차 및 자주포 공격으로 함락되고 말았다. 이제 북한군의 목표는 마산이었다. 마산은 경상남도의 중심도시로 인구 15만 명의 상업 및 항구도시이며, 부산의 서측 관문으로 부산까지는 불과 45㎞거리에 있는 전략적 요충이었다. 7월 31일 진주가 함락되자 부산의 관문인 마산방어가 화급(火急)을 요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 때는 미 본토에서 증원병력이 도착하기 직전이었다. 그런데 내일이라도 인민군이 부산에 쇄도한다면 이러한 증원부대를 상륙시킬 항구가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로써, 유엔군과 북한군간의 시간의 싸움 즉, "북한군이 부산을 점령하는 것이 빠른가? 미 본토의 증원군이 부산에 상륙하는 것이 빠른가?"의 경쟁이 시작된 것이다. 부산을 안전하게 방어하려면 우선적으로 마산을 확보해야 했다. 그러나 미 제24사단에게는 그럴만한 힘이 없었다. 이와 같은 상황의 긴박성을 감안한 8군사령관 워커 장군은 7월 30일, 8군의 유일한 예비인 제27연대를 마산에 투입하고, 7월 31일 부산에 상륙할 예정인 제5연대 전투단을 마산에 추가 투입하기로 결정하였다.
7월 31일 아침, 우려하였던 진주가 함락되고, 북한군이 마산방향으로 진출하고 있을 때, 8군은 포로신문과 무선 도청으로 서남부에서 공격하는 북한군은 정예의 제4 6사단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7월 초순 이후 전혀 행방을 알 수 없었던 인민군 제6사단의 위치가 비로소 확인되는 한편 서측방에서 압력을 가해오는 북한군이 1개 사단이 아닌 2개 사단이라는 것이 마침내 밝혀졌다. 이러한 사실은 8군은 물론 유엔군 사령부 및 워싱턴까지도 놀라게 하였다.
"서남부에 진출한 북한군이 2개 사단이다"는 사실은 워커장군으로 하여금 "마산방어의 성패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한다"는 생각을 갖게 하였으며, "미봉책으로는 이 위기를 수습할 수 없다"고 판단하게 하였다. 이 같은 배경에 따라 워커장군은 8월 1일부로 전 전선을 현재의 소백산맥을 연하는 선에서 낙동강 선으로 철수시켜, 병력을 절약하고, 상주에 있는 미 제25사단을 마산 방향으로 전환할 것을 결심하였다.
이에 따라 상주 정면의 미 25사단에 8월 1일 14:00경 "삼랑진으로 이동, 서측방을 향하여 역습할 준비를 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명령을 접수한 제25사단은 갖은 난관을 극복하고, 8월 2일 09:00에 상주를 출발하여 3일 19:30에 목적지인 마산 역에 도착할 때까지 36시간 동안에 240㎞를 이동한 것으로, 제2차 세계대전 중에도 보지 못했던 가장 신속한 기동이었다. 북한군 제6사단의 서남부 기동이 상대의 허점을 찌르는 성공적인 기동이었던 반면, 미 제25사단의 상주로부터 마산까지의 기동은 그 허점을 봉쇄하는 한 수 높은 기동이었던 셈이다. 결국 유사이래 초유의 기동이라고 할 수 있는 미 제25사단의 기동이 위기에 빠진 부산을 구했으며, 나라를 구한 기동이었던 것이다.
5. 결 언
공자(功者)와 방자(防者)를 합하여 20여개 사단 정도가 투입된 전장(戰場)에서, 그것도 1개월 여 기간 동안에 1개사단의 기동(機動)이 전쟁의 승패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4차례의 기회를 갖기는 결코 쉽지 않는 사례이다. 그러나 실제로 6.25전쟁 초기 북한군 제6사단은 김포반도 및 서남부 측방기동을 통해 4차례의 결정적인 찬스를 만들어 냈다.
그 첫 번째 기회는 1950년 6월 25일 개전(開戰) 당일 개성을 점령한 제6사단이 시도하였던 김포반도-영등포 방향의 기동이었다. 그러나 북한군의 시도는 한강의 자연적인 장애물 효과와 더불어, 급편되었던 '김포사'의 선전(善戰)을 극복하지 못함으로써 실패하고 말았지만, 국군의 입장에서는 아찔했던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국군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같은 위기가 있었다'는 사실조차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북한군이 전쟁의 승부수로 계획하였던 제6사단의 김포반도-영등포 기동에 대해 국군과 유엔군의 전쟁사는 북한군 1개연대에 의한 견제공격 정도로 평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북한군의 두 번째 기회는 7월 11일, 천안을 출발한 제6사단이 파죽지세의 진출로 다음날인 12일 아침, 공주 유구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이때 북한군 지도부는 "대전일대에 배치된 미군 2개사단을 우선적으로 격파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제6사단을 조치원 북방의 전의(全義) 일대로 후퇴시킴으로써, 결정적인 기회를 스스로 버리는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이때 만약 북한군 제6사단이 대전일대의 미군을 제3·4사단에 맞기고, 금강하구를 도하하여 신속히 남쪽으로 진출하였다면, 전혀 다른 상황이 조성되었을 것이다.
북한군의 세 번째 기회는 7월 19일 이리를 점령한 제6사단의 주력이 곧장 전주-남원-순천을 경유하여, 하동-진주 방향으로 진출하였을 경우이다. 이 경우 제6사단은 늦어도 7월 23일에는 진주까지 진출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군은 서해안지역의 항구를 평정하는데 집착하여 사단의 주력을 이리-고창-목포 방향으로 투입함으로써, 3일 이상의 시간을 지체하였던 것이다.
4번째의 기회는 7월 31일 진주를 점령한 북한군에게 있었다. 제6사단의 진주점령과 마산 진출은 국군과 유엔군의 낙동강방어선 구상을 뿌리 채 흔들어 버릴 수 있는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위기였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 같은 위기를 맞은 8군은 상주에 배치되어 있던 제25사단으로 하여금 불과 36시간동안에 240km를 기동하여 마산정면에 배치하는 한 수 높은 기동으로 위기를 수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6.25전쟁 초기 북한군 제6사단의 측방기동 사례를 분석하면서 군사작전의 예술성은 '상대방의 주력과 직접 부딪치는 전투적 승리보다는 교묘한 기동으로 상대방의 취약점을 기습하는데 있다.'는 사실을 재인식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따라서 북한군 제6사단의 김포반도 및 서남부 측방기동의 사례는 기동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해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 국방의 현장에서 미래지향적 대비태세를 강구하기 위해 헌신하고 있는 국방 관계관들에게 역사적 교훈을 시사해주는 중요한 사례가 될 것이다.
첫댓글 혁명가님 드래그 잠깐 풀어주시면 안될까요? 너무 귀한 자료라 "남한의 6.25전쟁영웅 친일파 "백선엽"vs 북한의 6.25전쟁영웅 독립투사"방호산" 이렇게 좀 엮어볼려고 하는데.쪽지나 메일 좀 주세요 ^^* 그럼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귀중한 자료 항상 감사합니당
별말씀을...메일 확인하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