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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최부를 닮은 외손자 나덕헌과 유희춘
우리 역사 속에서 가장 유명한 책벌레 아홉 명의 이야기를 모았다는 글 집을 보았다. 그들이 누구일 것이라고 대충 짐작은 했지만 그래도 궁금해 서점에 쪼그리고 앉아 그들을 만났다. 그래도 나는 5명은 맞췄다. 다들 상상들 해보시라. 책 병이 나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던 세자에서 한글을 발명한 세종 대왕, ‘여자애가 책은 읽어서 뭐해?’라는 편견을 딛고 일어선 예술가이자 현명한 어머니였던 신사임당, 조선 시대 한양 최고의 책 사냥꾼으로 불렸던 책 애호가 유희춘, 소설과 사랑에 빠진 소년 허균, 동네 바보에서 최고의 시인으로 거듭난 김득신, 서얼 출신이지만 책 전문가로 벼슬길에 올랐던 이덕무, 조선에서 가장 유명했던 책장수 조신선, 아들들을 위해 유배지에서도 글을 썼던 정약용, 감옥에서도 죄수들을 가르치며 독립 운동을 했던 김구.
4명 까지는 다들 손가락이 꼽아지는데 그 다음부터서 어렵다. 나는 유희춘으로 해서 5명을 안 것이다. 그들 모두는 지극히 성실하며 효를 마음에 담은 것이 최부와 별다르지 않다. 박학다식 말고도 굳센 절의, 밝은 예절, 높은 인격도 또한 모두 책에서 얻는 귀중한 자산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내가 그들을 손으로 꼽다 보니 묘한 심리에 봉착하고 만다. 물론 우연일 테지만 그 9명 중에 적어도 3명은 최부와 인연이 있다. 시대도 틀리고 같은 집안도 아닌데 어찌 그러한지 전혀 뜻밖이고 나도 참 그게 이상하다.
책 바보들과 최부. 우연은 우연으로 끝나지 않으며 책과 배움을 매체로 필연으로 이어지는 것만 같다. 결코 일부러 짜 맞춘 것이 아니다. 최부는 슬하에 세 딸을 두었는데, 표해록과 최부를 세상에 드러내게 한 후손이 첫째 딸의 둘째아들 유희춘이다. 그리고 둘째 딸은 나질과 결혼했는데 이들의 손자들 중에 나덕헌이 있다. 집안의 피는 속일 수 없듯, 최부의 강직한 성정을 후손 대에서도 물려받았는지 유희춘과 나덕헌의 사례를 통해서도 최부의 성품의 일단을 그대로 엿볼 수 있다.
나덕헌부터 이야기를 해 보자. 나덕헌은 1603년(선조 36년) 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관을 거쳐 1624년(인조 2년) 이괄의 난 때 도원수 장만의 휘하에서 종군했다. 안현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워 진무원종공신에 봉해졌다. 또한 외교적 수완이 능해 여러 차례 심양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이후 길주목사를 거쳐 1635년 창성부사, 의주부윤을 역임하고, 1636년 춘신사로 다시 심양에 갔다. 때마침 동지 이확이 심양에 도착했다. 이때 후금의 태종은 국호를 청(淸)이라 고치고 황제를 칭하며 즉위식을 거행했다.
청나라는 조선의 사신인 나덕헌과 이확에게도 경축 반열에 참석하라고 했으나, 하례를 완강히 거부하다가 옷이 찢어지고 갓이 부서질 만큼 구타를 당했다. 태종이 구타와 회유를 거듭해도 이들이 참석을 거부하자 죽이려고 했다. 그러자 청나라 대신이 만류했다."우리는 사신을 죽였다는 말을 듣게 되고, 저들은 인을 행했다는 이름을 얻게 됩니다."청나라가 볼모를 요구하는 국서를 주어 돌려보내기로 하자, 내용을 알기 전에는 받을 수 없다며 받지 않았다.
청나라는 100여 명의 기병으로 이들을 통원보(通院堡)까지 호송했는데, 기병의 호위가 풀리자 통원보의 호인(胡人)에게 국서를 맡기고 귀국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삼사(三司)와 조복양(趙復陽)을 중심으로 한 관학 유생들은 황제참칭(皇帝僭稱)의 국서를 받았다고 이들을 논핵했다. 영의정 김류까지 가세한 조정의 거센 척화론으로 나덕헌은 위기에 몰렸으나, 이조판서 김상헌의 적절한 변호로 극형은 면하고 백마산성(白馬山城)으로 유배되었다. 이후 유배에서 풀려나 삼도통어사로 특진되었지만, 1639년에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이러한 사실이 기록에 남지 않고 그에 대해서는 역적이라는 비난이 만만치가 않았다. 참 억울하고 분통터졌을 나덕헌이다.
이쯤 이덕무가 나선다. 이덕무는 서자 출신으로 정조 대왕 때 서자도 등용을 해 관직을 갖게 된 사람으로 북학파라 하는 박제가, 성대중, 오정근, 유득공, 홍대용 등과 교유하게 되었다. 박제가, 성대중, 오정근은 모두 서자들이었다. 이덕무는 16세에 동지중추부사 백사굉의 딸과 혼례를 올렸다. 이덕무의 부인은 무인으로 유명한 야뇌 백동수의 누이다. 우리는 한 때 TV에서 정조의 보디가드 격으로 무사 백동수라는 프로를 시청한 바 있다. 아무튼 이덕무는 책벌레로 유명하지만 중국청나라에서 글로도 이름을 떨친 사람이다. 그는 또한 연암 박지원을 스승 같이 떠받들고 같이 어울렸다. 그런 그는 청나라에 연행 사절단으로 가서도 책을 열심히 뒤졌던 모양이다.
그런 그는 건륭제(乾隆帝)가 지은 전운시(全韻詩)를 보게 되었다. 건륭 황제의 시는 4언과 5언, 7언의 고체시(古體詩)로, 청나라 역대 황제의 창업과 수성(守成)의 자취를 서술한 것이었다. 장백산(長白山) 천녀(天女)가 붉은 과일을 삼키고 이인(異人)을 낳은 것을 선두로 하여 옹정 황제에서 끝을 맺고 있었다. 옹정 황제는 건륭 황제의 부황이었다.'장백산 천녀가 붉은 과일을 먹고 여진의 시조를 낳았다면, 우리와 한민족이 아닌가?'그 가운데 태종 문황제(太宗文皇帝)를 칭송한 시의 주석이 있어서, 이덕무는 건륭 황제의 시를 관심 있게 읽다가 태종 편에 눈길을 돌렸다."조선은 예의를 구실로 명나라를 섬겨서, 그 나라의 사신인 이확과 나덕헌이 태종에게 절하지 않았다."건륭 황제의 시에는 이확과 나덕헌에 대한 기록이 있었다.
이덕무는 채제공과 심영조, 박제가에게 이 일을 알렸다. 이덕무는 나덕헌의 후손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그 후손을 찾았다. 이때 나덕헌의 후손인 나벽천이 나주에서 한양으로 올라와 나덕헌이 절개를 지킨 이야기를 자세하게 듣고 감격했다. 나벽천은 이덕무에게 절을 하고 대신들을 찾아다니면서 정조에게 보고해 달라고 청했다. 마침내 정조에게 그와 같은 일이 알려졌고, 충렬(忠烈)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지금 나덕헌을 충렬이라 하는 것은 바로 이덕무의 덕이다. 아무튼 이덕무는 책이 좋아 일부러 규장각을 자청한 책 바보였다.
그런데 연암 박지원도 한 건 올린다. 미곶(압록강 지역)지방의 첨사를 지낸 장초의 일기에 “오 학사(吳學士) 달제(達濟)와 윤 학사(尹學士) 집(集)이 정축년(1637년) 4월 19일에 피살되었다.”한 것을 갖고 양가(兩家)가 일기에 의거하여 19일에 제사를 올리었다. 정축은 곧 명(明)의 숭정(崇禎) 10년이었으며, 두 학사가 살해를 당한 때는 청인(淸人)들이 심양(瀋陽)에 있을 때였다. 그리고 홍 학사(洪學士) 익한(翼漢)에 대한 일은 그 일기(日記) 중에 실리지 않았으니, 그 성인(成仁)한 날이 명확히 어느 때인지 알 수 없으므로 역시 두 학사와 같이 19일에 제사를 올리었다. 그런데 연암은 청인이 엮은 청 태종 문황제(淸太宗文皇帝)의 사적을 뒤졌다. 그랬더니 내용이 나왔다.
< “숭덕(崇德) 2년(1637년) 3월 갑진(甲辰)에 조선(朝鮮)의 신하 홍익한(洪翼漢) 등을 죽여서 두 나라의 맹세를 깨뜨리고, 군사를 일으켰으며 물의를 빚어내어 명 나라를 우단(右袒)한 죄를 밝혔다.”>
숭덕은 곧 청 태종의 연호(年號)였으며 3월 갑진은 일간(日干)을 따져 보면 초엿새에 해당되고, 그 중의 등(等)이란 글자가 있음을 보아서 오(吳)ㆍ윤(尹) 두 학사의 죽음도 역시 그와 마찬가지인 3월 초엿새라고 파악된다고 연암은 구외이문에 적어 놓았다.
유희춘은 외할아버지인 최부를 끔찍이 사랑했다. 사실 그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많아도 미암 박물관하면 아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많다. 그런 그의 집안은 조선 4대 사화에 모두 관련이 되는 비극적인 집안이기도 하다. 아마 조선에 4대 사화가 다 관련된 이런 집안도 없을 것이다. 미암의 아버지 성은공 유계린(柳桂麟)은 금남 최부의 맏사위로 적자손도 없는 금남 최부의 제향(祭享) 사자(嗣子)였으나, 무오사화와 갑자사화에서 금남 최부가, 또 갑자사화에서 유계린, 을묘사화에서 장자 유성춘, 을사사화에서 차자 유희춘이 연이어 사화를 맞아 탐진가와 함께 유계린의 선산가도 풍비박산이 되었다.
유희춘만 해도 1546년 문정황후의 수렴청정을 비난하다가 양제역의 벽서 사건으로 저 멀리 두만강 종성에서 19년간의 유배 생활을 했었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조선 건국 이후 2세기 동안 축적되었던 전적(典籍) 문화는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타격을 입었다. 경복궁이 불타면서 고려로부터 전해 내려온 전적과 조선 건국 이후 2세기 동안 생산된 방대한 문헌들이 하루 만에 잿더미가 됐고, 전국 각 지방 관아에서 축적하고 있던 엄청난 양의 목판들도 남김없이 재가 돼 사라졌던 것이다. 실록의 기초 자료가 되는 사초(史草) 역시 한 줌의 쓸쓸한 먼지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자, 이제 무엇으로 실록을 쓸 것인가. ‘미암일기(眉巖日記)’란 책이 있다.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 1513~1577)이 1567년부터 1577년까지 11년 동안 쓴 일기다. 개인의 일기지만, 이 일기는 매우 치밀하고 방대해 마침내 선조실록의 뼈대로 채택된다. 개인의 성실한 하루하루의 기록은 이렇듯 한 시대를 증언하는 자료가 된 것이다
아울러 미암 일기는 금남 최부와 관련한 혈족관계, 금남 집과 표해록의 발간과정, 금남 최부의 제향, 탐진 최씨가의 분묘관리 등의 각종기사가 편린(片鱗)으로 남아있어 선산 유씨 가와 탐진 최씨 가의 밀접한 관계를 소상하게 알 수 있다.
금남 최부의 문집인『금남집』과 기행문인『표해록』에는 찬간자(撰刊者)로서 그의 발문(跋文)이 붙어있다. 다른 것은 놔두고 최부에 대한 그의 집념과도 같은 열정에 대해서만 미암 집을 근거로 밝혀둔다. 그가 어느 정도 독서나 책에 대해 열정적인지도 자연히 알 수 있다. 집안에 이런 사람만 하나 있어도 대들보가 바로 선다. 유배에서 돌아오자 선대의 신주와 함께 각종 문적을 간수하여 왔던 둘째 누님 오매에게서 전달받아 수년간에 걸쳐 그는 이를 정리하였다. 둘째 누나 오매가 간수하여 왔던 금남의 문적외에 각 관아(官衙)의 시정문이나 다른 집안에서 전승하여 왔던 상량문과 비문, 표문 등을 광범위하게 수집하였으며, 이족형인 나중부, 나사선과 함께 교정하였다. 원고가 만들어진 금남집의 발간에 엄청난 비용이 들어가기 때문에 1568년 9월 중앙대관의 동의하에 전라감사로 가 있는 이준민에게 판각을 부탁을 했다.
그러나 판각이 용이하지 않아 지체되다가 1571년 미암이 전라관찰사로 부임하자 48판을 전라도 18읍에 판각을 할당하여 동년 10월에 판각이 끝나 15벌을 인출하여 중앙의 대관들에게 배포하게 된다. 금남집 발간과 함께 금남의 행장을 다듬어 금남집 서두에 첨부한 것이 그렇게 지금에 전하고 있는 것이다. 표해록의 발간에 대하여는 미암일기에서 그 과정을 소상하게 파악할 수 있다. 재사환후 미암은 표해록의 원고를 정리교정하면서 1569년 8월에 발문을 초하고 여러 차례 수정하였다. 표해록의 발간을 위하여 평안도에서 각종 서책을 중점적으로 판각하는 정주목사 윤대용에게 판각을 의뢰하였다. 윤대용은 척족(戚族)인 해남 윤씨였다. 1570년 5월 판각이 끝나자 이를 인출할 종이와 먹을 확보하여 보내고 있다. 그러나 미암이 이듬해 전라관찰사로 내려와 있기 때문에 평안도 정주에서 판각한 표해록의 목판을 해남으로 가져오는 문제가 대두되었다.
평안감사와 황해감사에게 편지를 내어 정주에서 목판을 한강으로 수송하고 이를 다시 나주의 조운선(漕運船)을 이용하여 해남으로 실어오려는 것이다. 그러나 평안감사가 관내의 판목을 타도로 반출할 수 없다는 통지에 따라 목판은 못 오고 대신 종이에 인쇄된 15벌을 보내고 있다. 그리하여 1571년 말 대사헌을 임명받고 서울로 간 미암은 후임 전라감사 이양원에게 표해록을 나주에서 간행하여 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나주에서의 표해록 판각도 지지부진하여 몇 년을 넘기고 말았다. 1573년 10월 미암은 새 전라감사 이중호에게 부탁하여 남원에서 판각을 해 주도록 부탁했다. 1개월 후 판각이 완료되어 이후 수차례에 걸쳐 몇 부씩 인출하여 배포하였다. 1576년 6월 보존용으로 고급지질의 종이로 정하게 인쇄하고 정하게 수장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렇게 표해록의 편집에서 발간배포까지는 근 8년가량 걸린 것이다.
그의 집념 대단하지 않은가. 그는 책을 모으는데도 열정적인데 이는 그의 박물관에 가서 직접 알아보는 것이 좋겠다. 유희춘은 아내인 송덕봉 여사와의 사랑이야기도 큰 일화인데 이 또한 다른 데서 알아보기 바라며 한 가지만 말을 하자면 유희춘은 아마도 미암집을 누가 들여다 볼 것이라고 생각을 안했는지 부인과의 성관계에 대해서도 아낌없이 글을 남겼다. 그런 그가 어디서 접대를 잘 못 받아 임질에 걸렸었는데 당연 아내에게도 전염이 되도록 한 것이다. 당사자인 유희춘은 얼마나 놀랐겠는가. 그가 바로 찾은 사람이 동의보감으로 유명한 허준이다. 글에 허준이 유희춘의 부인을 치료했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유희춘은 허준을 조종에 추천한 적이 있고 허준의 외삼촌이 유희춘의 스승이기도 했다. 우리가 잘 아는 영창대군과 허균, 그런 유희춘은 허균 집안과 관련이 있다. 허균의 부친 허엽은 호가 초당(草堂)으로, 오늘날 유명한 강릉 초당두부의 그 초당이다. 허엽이 초당을 호로 한 것은 그의 처가와 관련된다. 즉 허엽의 두 번째 부인인 강릉김씨 김광철의 딸의 집이 강릉에 있던 데서 유래한 것이다. 허균의 이복형 허성은 이조와 병조판서를 역임하였고, 동복형인 허봉은 바로 유희춘의 문인이며 허균을 가르칠 정도로 학문이 상당히 수준급에 달했던 인물이다.
또한 허균과 동복형제로는 우리에게 여류문인으로 알려진 허난설헌이 있다. 선조는 유희춘이 없으면 허전하여 늘 곁에 두려고 하였다는데 그의 서글서글한 인물됨이 그러 하여서인지 그가 앞장서 집안을 한 묶음으로 모은 덕으로 지금도 나주 나씨 집안 탐진 최씨 집안은 변함없이 정을 돈독히 하고 있다고 한다. 말한 대로 독서 광중 둘은 바로 유희춘과 관련이 있고 나덕헌 외손자는 이덕무와 관련이 있으니 조선 독서광 9명 중 4명이 모두 최부와 관련된 사람들이 아닌가. 거기에 연암 박지원과도 연관이 되는 책장수 조신선도 두세 다리 걸치면 다 연결이 된다. 그러니 조선 팔도 알고 보면 꽤 좁고 다 형제 같은 이웃이며 피를 나눈 형제들이다. 결국 물어물어 찾으면 맨 위에 단군이 나오지 않겠는가. 그런 식으로 가자면 당연 저 만주 땅 사람들은 고구려 사람들이고 다 우리와 같은 동이족에 예맥족으로 앞으로 우리가 큰 뜻으로 품을 사람들이고 땅덩어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