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조잘해서인가 곰살스런 일을 즐겨 하는 편이다. 마누라 표현을 빌리자면 뚝딱이다. 물건을 정리하다 보면 기성품이 아귀에 맞지않아 나무를 사다 그 공간에 딱 맞는 맞춤형 거치대를 만들면서 허구헌날 씨끄럽게 뚝닥 대다보니 지겹다고 비난하며 내뱉는 아내의 힐난성 원망이다.
그래도 제잘난 멋에 사는게 인생이니 개의치 않고 뚝딱대고 있다.그런데 만들어진 결과물을 보면 내가 보아도 이건 아니지 싶기도 하다.
자재를 언제 쓸지 몰라 모아둔 폐자재 더미에서 골라 쓰고 있으니 주변의 색상과는 전혀 조화롭지 못하고 만들어진 결과물도 그 엉성함이 도를 넘어서고 있기 때문이다.
겨우 위안을 삼는 일은 이 세상에 하나 밖에 없다는 유일한 물품?
이는 이십여 년이 넘는 현상소 일을 하며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취미 아닌 취미생활이다. 기계를 배치하며 공간을 활용하다보면 그곳에 딱 맞는 물품을 만들 수 밖에 없었고 만들어진 가구는 시의적절하게
잘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런 취미가(?) 자연적으로 집으로 이어졌고 그 휘황찬란한 업적은(?) 집안 곳곳을 장식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각종 도구를 무슨 가보처럼 수집하는 취미가 생겼을 정도다.
서울에는 나와 같은 사람이 많아서인지 대로를 걷다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게 유혹하는 이동식 마차 기계상들이 참 많다. 둘러보며 사지는 않더라도 꼭 한마디라도 쓰임새를 물어보아야 적성이 풀릴 정도다.
금년초 현상소를 접으며 이삿짐을 집으로 옮기는 과정에 곳곳에서 나오는 각종도구가 그렇게 많은지
나 스스로도 놀랐다. 중복되는 도구도 많았지만 버릴 마음은 추호도 없다.
나와 같은 취미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면 공감하는 바가 적잖을 것이다. 작은 나사못 하나가 없어
나중 사면 되지 하고 몽땅 쓰레게통에 버렸던 걸 얼마나 후회했는지 말이다.
작업 하다보면 못이며 톱,드릴 폐나무 정말 쓰레기가 산더미처럼 싸인다.널부러진 쓰레기를 그냥
버리게 되면 얼마 안있어 후회할 일이 생기게 되다보니 다 쓰고 난 폐자재를 한 곳에 모아둔다.
가구가 굴곡진 장소에 놓일 때 균형을 맞추는 방법은 바로 이 모아둔 나무 쓰레기에서 줏어온 작은
나무 토막이다. 이렇다 보니 뭉텅거려 쓰레기통에 버릴 마음이 생기겠는가 말이다.
그러나 이와같더라도 꼭 폐자재를 모아두는 넓은 공간은 있어야 하고 그 자체가 꼴불견이니 해결하는 방법에 후회가 드는건 꼭 뒤따르는 추임새와 같다,
어쨋거나 나는 어느 곳에 가든 이와 같은 창고가 있어야 하고 그 창고에는 나의 미래 사용처에 대응하는 보물들이 비밀화원처럼 차곡차곡 쌓아놓아아야만 한다.
이런 나를 얼마 전 반장님이 목수라고 소개하는걸 들은 적이 있다. 애써 변명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에 걸맞는 실력까지 겸했다면 부끄럽지 않겠다.
시골집에 살며 생활의 불편을 스스로 고치며 사는 모습을 보고 칭찬을 에둘러 표현했지 싶다.
그런데 곰곰 생각해 보면 나의 피에 목수의 피가 흐르긴 하나보다. 만일 어떤 물품을 만들 때 그것이 누가 시킨 일이라고 마음 먹으면, 그러니까 일이라고 생각하면 싫증이 날법한데 만들 때는 하나도 피곤하지 않으니 신기한 일이긴 하다.
공간을 재고 그곳에 들어갈 나무를 모우고 자로 선을 긋고 톱질하여 나사 못을 찾아 드릴로 붙들어 매고 합판을 톱으로 잘라 막으면 멋진 가구가 탄생한다.
이 만드는 과정은 시간과는 상관없이 나의 집중하는 묵상시간이다. 오직 결과만을 기대하며 여러번 시행착오를 거치는 동안 나의 예리한 집중력은 몰아지경에까지 다다른다.
그러나 타고난 실력이 그만저만 해서인지 집중력과는 상관없이 결과물은 신통찮다. 서두에 언급하였듯 세상에 하나 밖에 없다는 위안만 남았다.
한국인은 예로부터 손재주를 타고났다. 그래서 무엇이든 잘 만든다. 지금 세계의 열번 째 손가락을 웃도는 기술강국이 괜한 흰소리가 아니다. 세계가 보는 예리한 시선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우리들 자신들이 느끼는 자조적 엽전의식은 언제쯤 바뀔까.
분석해 보면 초정밀을 다루는 정밀 수치 제어와 지금의 주먹구구식 제작과의 괴리 때문이 아닐까.
우리는 '대충'이라는 단어에 익숙해 있다. 예를 들어 1m의 나무를 자르라면 99~101cm가 대충이라는
범위에 든다. 서구인은 즉각 이 주문에 밀링 선반 톱날수치를 100cm에 맞추고 오차없이 100cm를 기계의 도움으로 자르지만 한국인은 톱을 들고 1m를 선으로 긋고 자르기 시작한다.
손으로 자르다보니 시각차로 인해 처음은 100cm로 시작하고 나중 결과는 101cm로 변한다.
서구인 시각은 불합격이지만 한국인 시각은 오케이다.대충의 범주에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대로라면 당연히 서구식 시각을 가져야 하고 나도 그렇게 살아왔다. 취미 생활을 하며 '자로 잰 듯이' 결과물을 만들려 노력했음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 나는 한국인의 문화가 참 좋다고 생각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삼차원 공간을 평면 자로 재다보니 어쩔 수 없이 이 '대충'의 범주가 참 효율적임을 여러번 느꼈기 때문이다.
만약 공간보다 1cm만 넘으면 그 가구는 들어가지 못하고 새로 제작하여야 한다. 그럴 때 느끼는 안타까움은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럴 때 그 엉성한 제작 기술은 쉽게 다시 제작하게 한다.
엉뚱하기는 하지만 이도 이 '대충'의 범주에 있기 때문이지 싶다.
이 대충의 범주에 들어 안타깝게 만든 일이 오늘 일어났다.
작년 초 이사와 일 년을 지내다 보니 이게 아니다 싶어 삐걱대는 마루를 어떡해야 하나 고민한 적이 있다. 집이 위치한 앞도로에 잦은 포장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점점 낮아져 50cm가량 밑으로 가라앉았기에 비라도 올양이면 배수가 안되어 집안이 홍건하게 질퍽거렸고 해결책으로 자동양수기를 설치하여 물을 몰아냈었다. 그렇지만 마루 밑의 습기는 쉽게 나가지 않았던 모양이다.
고민하다 예의 '자로 잰 듯이'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합판을 사다 습기로 삐걱대는 마루를 덮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지었는지 정방형 마루 면적이 마름모꼴이라는걸 발견해 내었고 많은 시행착오 끝에 말끔하니 덮을 수 있었다.(아시다시피 합판의 규격은 서구식 완전한 정방형이다.)
그 위에 깨끗한 장판을 깔고 또 그 위에 두꺼운 방열포를 덮었다. 한치의 오차없는 결과물을 내자 쾌재를 불렀음은 말할 나위가 없었고 기쁨의 노래를 불렀었다.
먼저 집을 방문했던 손님들이 변화된 모습을 보고 칭찬을 아끼지 않아 더 고무되었다.
그렇게 또 일 년을 보내고 난 올 봄부터 마루에 변화가 왔음을 지날 때마다 느끼게 되었고 급기야 어제 신부님 가정방문이 있던 날 마루를 건너던 에피파니아 수녀님의 비명 소리를 듣기에 이르렀다.
마루가 푹 주저앉았기에 그렇다.
완벽하다고 스스로 칭찬을 해대고 나서 겨우 일 년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 완벽이란 말의 사전적 의미가 모난 데가 없는 구슬을 일컫는다.가뜩이나 둥근 모습이 모나지 않은 판에 원을 구성한 곡선이 막힘이 없는 모습을 뜻한다면 이 말이 얼마나 남용되었을까.
안되겠다 싶어 팔을 걷어부쳤다. 막상 뚜껑을 열어보고나서 말문이 막혔다. 마루 밑 습기가 빠져나가야 하는데 합판으로 덮은데다 습기가 차단되는 장판을 덮고 그 위에 방열 스티로폼까지 덮었으니 작년 여름 내내 습기와 열기로 인해 마루 밑 공간은 썩어 있었고 마루를 지탱하는 나무까지 삭아버렸다.
삭은 나무에서는 보기에도 징그러운 곰팡이가 온 마루 밑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것도 모른채 마루를 지나다녔으니......
이제 도전의식이 생겼다. 나무가 썩는다면 받침목을 시멘트 블록으로 하면 된다. 생각이 거기에 미쳤다.
그러나 갑자기 대공사를 벌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일단 주저앉은 곳만 임시처방하고 나중에 전면 교체를 계획하였다. 주저앉은 곳만 다시 공사를 하는 데도 반나절이 지났다.
겨우 주저앉은 몇군데를 시멘트 블록으로 쌓고 그 위에 전처럼 방열 스티로폼을 덮었다. 잠시 앉아 쉬며 생각해 보았다. 시골집이다보니 공간 틈틈히 쥐가 설치고 있었다.
그런데 가만 역추적하여 보니 어느 틈엔가 쥐가 보이지 않기에 그것마저 공사의 성공으로 오인하였단걸 깨닫게 되었다.
쥐가 사는 환경마저 이르지 못한 불결한 곳이 되어버린 것이다.
대충 막음을 하고 나서 해결 방안을 모색해 보니 공기의 유통을 원할하게 하는 구멍을 몇개 뚫어 놓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환경이 복원되어 쥐가 들락거리는 공간이 된다 할지라도 현재 내가 생각해 내는 가장 과학적 방법이 아닐까 믿고 싶어진다.
고인물과 닫힌 공간의 공기는 썩는다.
이 평범한 진리를 이제야 느끼는 아쉬움이 마음을 휘젓는다. 우리가 무엇인가 배운다는건 이처럼 앞으로 일어날 잘못됨을 미리 예방하는데 있다.
지금이라도 그걸 알았으니 아주 늦지는 않았다고 믿고 싶지만 한 시간 후에,한 달 후에,일 년 뒤에 일어날 실패도 모른 채 당장 기쁨에 겨워 '완벽'이라고 자찬한 그런일은 여러번이라 이제는 조심해야 하는 부분에 '완벽'도 슬며시 끼워놓아야 할듯 싶다.
첫댓글 공부 많이 하시는구나.
헌집수리란 말이있지요.
헌집은 수리하고 돌아서면 또 여기 또여기해서 끝이없다는거지요.
그나 저나 수녀님 꾀놀라셨겠구나.
본채가 그리됬다는 모양인데...
어쩐다냐.? 확 띁어고칠순없고...
그리 저리 조심하며 사는수밖에~~~~~~~
일상의 일들이 수필의 주제가 되고
라 만상이 당신 마음에 업되어 당신께 머무르는 시각과 공간에의,
주변
미의 창출을 위한 그래서 붓을 잡는 당신의 여유로운 생활을 부러움의 눈으로 바라봅니다.
게다가 맛갈나는 담백한 음식 솜씨하며..........
고운 글 주워 담고 싶습니다. 수필 등단쪽으로 가닥을 잡으심이.......
수필의 제목부터가 완벽. 이 글을 대충 읽으려니 완벽하지 못한 것 같아 차근 차근 읽다보니, 이게 아침 기도가 됐어요. 필립보가 수필가의 재능을 가지고 있는줄은 잘알고 있었고 어느 酒席에서 필립보를 자랑한 적이 있는데 역시로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