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게 삶이더라고요. 온전하지 못한 것들이 뒤섞여 있기 때문에 삶에는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는 거더라고요.”
그렇게 삶의 불완전성을 인정하면서 소년은 어른이 되어갔다. 문성식은 시인의 감수성을 가진 화가다. 경북 김천에서 보낸 어린 시절은 풍요로웠고, 그는 유달리 예민한 아이였다. 남다르게 느끼고 남다르게 기억한다. 또 다른 기억이 그림으로 남아 있다. 할아버지는 병마로 야위어만 가셨다. 더 마르기 전에 모습을 남겨놓아야 한다는 할머니의 주장으로 형은 배경막이 되는 천을 들고 서 있고, 사진에 나오는 상의만 갖춰 입고 할어버지는 카메라 앞에 서셨다. 그 사진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모두 알고 있으면서 애써 모르는 척 할머니의 잔소리에 따라 묵묵히 그 일을 했을 뿐이다. 아주 화창하고 쓸쓸했던 어느 봄날의 기억은 작품 <봄날은 간다>에 담겨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에 대한 관심이 가장 크죠. 인간과 인간의 삶, 세계의 알 수 없음, 자연과 우주의 섭리는 늘 신비하게 느껴지죠. 인간의 가장 큰일은 죽는 것이죠. 그것이 영원한 주제일 수밖에 없어요. 그것을 빼고 도대체 무엇에 관해서 노래를 할 수 있겠어요? 제 그림은 제가 보고 경험한 세상의 기록입니다. 그 시대의 공기와 감성, 다양한 인간사의 스펙트럼을 보여주는 것이 제 회화의 가장 큰 과제입니다.”
봄날은 간다_ 종이에 연필, 27×18cm, 2002 |
경제 위기를 겪으면서 하루의 생존에 급급한 사람들의 마음속에서도, 거대 담론을 이야기하기 좋아하는 현대미술에서도 사라진 것을 그는 말하고 있다. 삶에 대한 경외감과 신비감을 느끼고 경탄하는 것이다. 그의 그림은 어쩌면 누구나 보고 누구나 경험하는 바로 그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아니면 안 되는 방식으로 그려지고 있다. 사사로운 삶을 관통하는 어떤 원리를 그는 잘 알고 있다.
삶에 대한 그의 관조는 늘 따뜻하고 애잔하다. “그냥 늙은 사람이 노래하는” 장면을 그린 <노래>라는 작품에서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부르는 노래는 기쁜 노래인지 슬픈 노래인지 알 수가 없다. 그의 말대로 인간이 시간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시간과 노동이 인간의 얼굴을 훑고 지나가면서 볼품없게 만든다. 그러나 문성식은 삶을 견디어낸 사람만이 부를 수 있는 어떤 노래에 귀를 기울인다. 삶은 그저 슬픈 것도, 그저 기쁜 것도 아니다.
6월의 뻐꾸기_ 종이에 연필, 53×38cm, 2002 |
<별과 소쩍새 그리고 내 할머니>에서는 장례식 풍경이, <청춘을 돌려다오>에선 결혼식 뒤풀이 풍경이 펼쳐진다. 흥에 취한 사람들이 까맣고 동그랗게 칠해진 입으로 하늘을 보고 탄원하듯이 “청춘을 돌려달라”고 합창한다. 신랑신부와 아무 상관없는 노래다. 슬픈 장례식이건, 기쁜 결혼이건 누군가에게는 그저 먹고 마시는 떠들썩한 이벤트일 뿐이다. 슬픔과 평온함, 찬란함과 허약함, 아름다움과 우스꽝스러움이 공존하는 세상이다. 헛웃음을 웃게 하는 “인간이라는 동족”에 대한 헛웃음과 연민이 진하게 배어 있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16세기 네덜란드 대가 피터 브뤼겔의 그림을 닮아 있기도 하다.
사용하는 재료에 제한을 두려고 하지는 않지만, 그의 그림은 대부분 연필로 그린 드로잉이다. 미술계 안팎으로는 연필 그림과 유화의 차별이 알게 모르게 존재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재료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미지의 새로움이다. 작가가 얼마나 새롭고 울림을 줄 수 있는 이미지를 창조하는가가 가장 중요하다. 이 점에서 문성식은 성공하고 있다. “미술은 솔직히 하는 것”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내 것이 아닌 것을 내 것인 척하는 태도, 잘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하는 허세를 거두어내고 “살아 있는 현실에서 느꼈던, 마음의 파장을 건드렸던 것들을 오염 없이” 가장 잘할 수 있는 방법으로 기록하기로 결심한다. 그가 선택한 것은 드로잉이라는 가장 소박하고 가장 원초적인 장르였다. 한국예술종합대학을 다니던 당시 미디어아트를 새로운 경향이라고 모두 생각할 때, 일종의 역선택이었던 셈이다.
노래_ 천 위에 젯소 연필, 33.5×24.5cm, 2009 |
올바른 선택이었다. 그는 2005년 25세의 나이로 베니스비엔날레에 우리나라 최연소 작가로 참여했다. 아직 학생일 때였다. 학교에서 드로잉 전시를 했는데 그 작품들을 많은 사람이 좋아해서 당시 베니스비엔날레 커미셔너였던 김선정 큐레이터에게 추천이 되어 국제적인 행사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 후 독일의 보훔미술관, 교토아트센터, 프라하비엔날레 4 등 다양한 국제적인 미술행사에 참여했다. 그리고 2011년에는 국내 최대 갤러리인 국제갤러리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했다. 올해는 두산 레지던시 작가로 선정되어 6월에 뉴욕으로 떠날 예정이다. 서른 셋 작가의 꽉 찬 커리어다. 그만큼 속도가 빨랐으니, 현기증이 날 법도 하다.
무심한 교차_ 장지에아크릴릭, 76×430cm, 2008~2010 |
사실 그를 유명하게 만든 그림은 정원의 초록색 나무를 그린 그림들이었다. 정원은 자연을 인간의 틀로 제한한 것으로, 자연과 인간의 불편한 만남을 떠올리게 한다. 대학 4학년 때부터 3~4년간 이 시리즈를 그려왔다. 그 자체로 매력적인 그림이었지만, 정해진 틀을 반복하는 것은 스스로에게 족쇄를 채우는, 어리석은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품 주문이 밀려 들어오는 상황에서 쉽지 않은 결심이었지만, 과감하게 이 시리즈를 접고 새로운 길을 모색했다.
2011년 국제갤러리 개인전에서는 전혀 다른 그림들을 들고 나타났다. 전시 제목은 <풍경의 초상>이었다. 초상화를 그리듯 풍경을 앉혀놓고 면밀히 들여다보겠다는 생각이었다. 당시 그의 관심사는 질감이었다. 고향에서 서울을 오가면서 본 세종시나 경기도의 파헤쳐진 땅을 보면서 영감을 얻었다. 땅을 무너뜨렸는데 거기에 시간이 쌓였다. “땅이 회화다. 노인의 피부는 너무 아름다운 회화다”라는 생각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 그림이 <무심한 교차>다. 1년 반 그리고 지우기를 반복하면서 그림은 회화적으로도 무거워지고 풍부해졌다. 더불어 그를 가두던 이론의 틀을 벗어 던지고 그는 다시 자연과 인간, 그리고 숲으로 돌아왔다. 사실 지금 한국에서 서른 먹은 화가라는 사람이 어떤 그림을 그릴 것인가에 대한 답이 쉽게 떠오르는 것은 아니란다. 그럴 때마다 그는 원론적인 질문을 자신에게 던진다.
“외국을 다녀오고 나면 우리 풍경이 볼품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죠. 하지만 있는 그대로 우리 자연의 리얼리티를 받아들여야 하죠. 식물이 자기가 뿌리내린 곳에서 양분을 빨아들이고 성장해야지 링거를 맞으면서 자라는 것은 아니잖아요. 내가 한국 사람이고, 된장을 좋아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가질 수밖에 없는 정서, 한국에서만 느낄 수 있는 땅의 질감이 반드시 있을 거예요. 이게 제 작품의 시작점입니다.”
after lunch_캔버스에 아크릴릭, 60×131cm, 2007 |
그는 현실에 관심이 많기 때문에 삶을 잘사는 게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그림을 그리기 위한 삶보다 그는 그냥 삶을 선택했다. 세상 사는 이웃들의 삶을 더 들여다보면서 천천히 걷는, 제대로 된 길을 택하겠다는 말이다. 사실 너무 바쁘고 혹독한 시간들을 따라가다 보니 신체의 리듬도 깨졌다. 최근까지도 그는 스트레스로 인한 귓속의 전정기관 이상으로 고생을 했다. 예민한 감수성은 그를 특별한 예술가로 만들기도 하고, 그를 아프게 하기도 한다.
“좋은 생활 패턴, 그림을 그려내는 좋은 일상을 가지는 것. 이게 내가 가장 바라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 살아 있고, 이 시간들을 잘 쓰고 알차게 사는 것, 좋은 일상에서 예술을 건져 올리는 것을 꿈꿉니다.”
평온하고 단단한 어조로 젊은 화가는 말을 이어 나갔다. 그는 섬세하고 표현력이 풍부한 단어들을 구사했다. 그의 홈페이지를 방문하면 시적인 감수성이 넘치는 그의 에세이를 볼 수 있다. 그를 통해서 좋은 감수성이 한국미술에 수혈될 것 같은 좋은 예감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