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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정(山頂)을 향한 투쟁 그 자체가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우기에 충분하다. 행복한 시지프를 마음속에 그려보지 않으면 안 된다." "The Struggle itself […] is enough to fill a man’s heart. One must imagine Sisyphus happy.".
“시지프 신화”의 본질적인 주제는 ‘삶이란 의미가 있는 것인가’에 대한 명증하고 필연적인 궁금함이다.
그러므로 이는 자살에 대한 문제와의 명증한 대면이다.
이를 덮고 있는 역설을 통해 얻어진 근본적이면서도 확실한 그 답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만약 신을 믿지 않을지라도, 자살은 합당치 않다.
프랑스인과 유럽인의 재앙 한가운데에 있었던 1940년도에 쓰인 이 책은 허무주의의 한계 안에서도 허무주의의 탈피를 위한 의미를 찾는 것이 가능하다고 분명히 말한다.
내가 썼던 모든 책에서, 나는 이 방향을 추구하길 시도해왔다.
비록 “시지프 신화”가 죽음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을지라도, 내게 있어 이것은 사막 한가운데에서도 나를 삶과 창작으로 이끄는 원동력의 집약인 것이다. –알베르 카뮈, 1955년 3월, 파리. 부조리 철학여기서의 부조리는 "논리적으로 맞지 않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신분으로 넘을 수 없는 불가능의 세계를 뜻하는 쪽에 가깝다.
이 에세이에서 말하는 부조리는 다음과 같다.
이 세계에서 명확한 무엇인가를 찾으려는 우리의 노력은 세계의 침묵 앞에 번번히 좌절당하고는 한다. 때문에 우리는 과연 인생은 살아갈 가치가 있는 것인가에 대한 회의에 빠지고는 하는 것이다.
이 에세이는 그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인생이 살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나 자신, 이 세계, 그리고 그 둘 사이에서 고군분투하는 ‘부조리’뿐이라는 것이다.
이 부조리뿐만이 세계와 우리를 연결 지어주는 매듭이며 우리는 깨어있는 의식 속에서 부조리를 각성할 수 있다.
알베르 카뮈는 오늘날 부조리 철학의 대표적인 작가이자 철학가로 여겨지나, 그는 부조리주의의 창시자가 아니다.
카뮈는 <시지프 신화>를 출판한 이후 점차 부조리에서 관심이 멀어졌고 부조리주의 철학자로 계속 여겨지는 것을 후회했다고 한다.
1943년 7월에서 1944년 7월까지 익명의 독일인 친구에게 보낸 <독일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카뮈는 부조리에 대한 이러한 생각의 변화를 나타내고 있다. 집필과정<시지프 신화>의 구상은 카뮈의 <작가수첩>에 1936년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부조리’ ‘명철한 의식’ ‘무상의 유희’ ‘힘과 선’ ‘ 허영을 경계할 것‘ ’인내력을 기를 것‘ ’성자: 침묵할 것, 행동할 것, 사회주의. 수련과 실현. 근본적으로는 영웅적 가치‘ 그리고 뒤이어 <시지프 신화>의 구상에 대한 실천계획이 나타나 있다.
철학적 작품 : 부조리. 문학적 작품 : 정복이라는 표상 아래 힘, 사랑, 그리고 죽음. 그 두 작품 속에 각각의 톤을 존중하면서 두 가지 장르를 혼합할 것. 언젠가 의미를 부여하는 책을 한 권 쓸 것. 또한 “죽음과 철학의 에세이- 말로, 인도”라는 기록으로, 부조리를 죽음과 관련시켜 구체화했음을 알 수 있다. <시지프 신화>의 구상과 관련하여 1938년 카뮈는 사르트르의 <구토>에 관한 서평을 썼는데, 이 글은 사실상 <시지프 신화>의 초안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부조리에 대한 구체화된 서술을 담고 있다. 실제로 <시지프 신화>의 어느 대목에서 사르트르의 작품이 직접적으로 언급되기도 한다. 카뮈는 실제로 <시지프 신화>의 집필을 1939년 9월에 시작했으며, 1940년 초에 소설 <이방인>과 <시지프 신화>를 동시 집필한다. 그해 5월 1일에 <이방인>을 완성하였으며 같은 해 9월 <시지프 신화>의 제 1부를 완성한다. 그리고 1941년 2월 책을 완성한다. 이 책의 제목은 본래 <부조리> 였지만 이 대신 <시지프 신화>로 제목을 바꿨다. 그리고 1942년 10월 16일, 갈리마리의 에세이 총서 제 12권으로 (초판 2750부) 출간되었다. 부조리의 추론제1부인 부조리의 추론은 부조리와 자살, 부조리의 벽, 철학적 자살, 부조리한 자유의 4개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1부에서는 먼저 삶을 지속할만한 가치가 있는가, 즉 자살에 대한 고찰이 먼저 이루어진다. 과연 죽음에 이를 정도로 고집해야 할 사상은 존재하는가에 대한 문제부터 시작하여 사람들이 자살을 선택하는 이유, 반대로 사람이 삶을 지속해 나가는 이유 등을 살핀다.
우리가 살아가는 가장 첫째 이유는 습관이다. 습관 속에서 하루하루 우리는 죽음을 향한 미래로 가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살아나갈 가치가 있는 것일까? 부조리는 과연 죽음을 명하고 있는가? 이 문제들이 바로 부조리의 추론이라 일컫는 것들이라 할 수 있다. 여기까지 이른 사람들은 사유의 사막에 다다라 자살을 택하거나 혹은 철학적 자살을 택하고는 한다.
하지만 참다운 노력은, 이 사막에 남아 집요함과 통찰을 가지고 사투를 이어나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부조리의 철학을 가진 자라면 그 믿음에 따라야 하고, 부조리 사이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후의 장에서는 부조리가 우리와 세계의 매듭이며 이 사이에서 우리가 가진 것은 스스로의 명증성과 부조리에 대한 명확한 인식뿐임을 밝힌다.
또한 실존철학에서 권하고 있는 도피, 신과 내세에 관한 믿음 혹은 희망들은 비약일 뿐이며, 이런 비약들은 결국 부조리를 회피하는 것이다.
마지막 부조리한 자유 장에서는 우리가 부조리를 외면할 때 부조리는 죽는 것이고, 부조리를 지탱하고자 한다면 부조리가 해소되어서도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루하루 비극적 운명에 반항하며 부조리를 지속시켜 나가야 하기에, 자살은 답이 될 수 없다.
부조리한 인간제2부인 부조리한 인간은 돈 후안주의, 연극, 정복의 3개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파트의 중요한 물음은 이것이다. “부조리의 인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카뮈는 돈 후안, 배우, 정복자의 예를 들어 부조리한 삶의 모습에 대해 이야기한다. 부조리한 창조제3부인 부조리한 창조는 철학과 소설, 키릴로프, 내일 없는 창조의 3개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에서는 부조리 예술에 대한 내용을 다룬다. 예술은 부조리의 피난처가 아니며, 예술작품 그 자체가 부조리의 한 현상이라고 말한다. 또한 부조리의 작품은 명철한 사고를 기반으로 하며, 예술과 철학은 분리된 것이 아님을 밝힌다.
두번째 장인 ‘키릴로프’에서 카뮈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작가일기>, <카라마조프가의 형제>, <악령> 을 분석한다. 고찰 끝에, 이 작품들은 부조리함을 그려내지만 결국 철학적 자살에 도달하거나 희망으로 비약해 진정한 부조리의 작품이 되는 것에는 실패했다는 답을 내린다.
3부의 결론은 앞에서 요구했던 반항, 자유, 다양성을 부조리한 창조에도 반영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지프 신화카뮈는 이 마지막 장에서, 그리스 신화의 시지프 이야기를 통해 부조리한 영웅의 끊임없는 투쟁을 그려내고 있다.
시지프는 신의 노여움을 사 크고 무거운 돌을 끊임없이 산 정상으로 밀어 올려야 하는 형벌을 받은 인물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무용한 노동만큼 가혹한 형벌은 없다고 생각한 신들의 결정이었다.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 바위를 산 정상으로 밀어 올리면, 바위는 다시 아래로 굴러 떨어져버린다.
다시 바위를 옮기기 위해 산 아래로 걸어 내려가는 시지프의 모습은, 오늘날의 노동자들의 삶과도 비슷하다.
그러나 이러한 운명이 비극적인 것은 그의 의식이 깨어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알베르 카뮈는 시지프의 모습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카뮈는 오이디푸스의 신화 또한 인용하여 비극적인 운명에도 불구하고 종래엔 “만사가 다 잘되었도다” 라고 말한 오이디푸스의 말에 찬사를 보낸다. 이는 우리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신, 즉 비극적 운명에 복종하지 않고 살아남아 삶을 체험해 나가는 인간의 강한 투쟁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시지프 또한 굴러떨어진 바위를 향해 돌아가는 투쟁을 통해 자신의 운명, 그리고 벌을 내린 신의 의지보다 한 차원 강해지는 것이다. 부록 : 프란츠 카프카의 작품 속에 나타난 희망과 부조리이 부록 안에서는 프란츠 카프카의 <심판>, <성(成>, <변신>등의 작품에서 나타난 부조리의 상태에 대한 묘사에 대한 것을 다루고 있다.
카프카는 일상적인 것을 통해서 비극을 표현하고 논리적인 것을 통해 부조리를 표현한다. (본문 중) 다만 카프카는 부조리를 논리적으로 잘 표현했음에도 불구하고, 종래에 희망을 부여하여 결국 부조리의 상태를 이어가는 것에 실패했다.
이것은 본래 <시지프 신화> 초판에서는 ‘도스토예프스키와 자살’에 대한 장으로 대치되어 있었다. 이 연구는 1943년 아르발레트 L’Arbalete지에 미리 발표된 바 있다. |
The gods had condemned Sisyphus to ceaselessly rolling a rock to the top of a mountain, whence the stone would fall back of its own weight. They had thought with some reason that there is no more dreadful punishment than futile and hopeless labor.
신들이 시지프스에게 벌을 내리는데, 그것은 계속해서 바위를 산 위로 올리는 굴려서 올리는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서 바위는 제 무게 때문에 다시 떨어져 내려갑니다. 신들은 쓸모가 없고 희망이 보이지 않는 이 벌이야말로 가장 끔찍할 것이라고 나름대로 생각을 해낸 것이죠.
If one believes Homer, Sisyphus was the wisest and most prudent of mortals. According to another tradition, however, he was disposed to practice the profession of highwayman. I see no contradiction in this. Opinions differ as to the reasons why he became the futile laborer of the underworld. To begin with, he is accused of a certain levity in regard to the gods. He stole their secrets. Aegina, the daughter of Aesopus, was carried off by Jupiter. The father was shocked by that disappearance and complained to Sisyphus. He, who knew of the abduction, offered to tell about it on condition that Aesopus would give water to the citadel of Corinth. To the celestial thunderbolts he preferred the benediction of water. He was punished for this in the underworld. Homer tells us also that Sisyphus had put Death in chains. Pluto could not endure the sight of his deserted, silent empire. He dispatched the god of war, who liberated Death from the hands of the conqueror.
누가 호메로스를 믿는다면 시지프스는 인간 중에서 가장 현명하고 분별력이 뛰어난 인물입니다. 그러나 다른 전설에 의하면 그는 노상강도 짓을 하길 원했다고 합니다. 이점에 대해선 반박할 것이 없군요. 왜 그가 하계(下界)의 쓸데없는 노동일을 하는 사람이 되었는가에 대허선 의견이 분분합니다. 먼저, 신에게 경거망동하게 행동을 했다고 해서 그를 비난하죠. 시지프스는 신들의 비밀을 훔쳤습니다. 아소포스의 딸인 아이기나를 제우스가 납치합니다. 딸의 아버지는 딸이 없어지나 천근같은 걱정과 충격에 휩싸여서 시지프스에게 불만을 토로합니다. 이 납치사건을 알게된 시지프스는 아소포스가 물을 고린도 성에게 제공한다는 조건하에 그 사실을 귀뜸 해주겠다고 말합니다. 시지프스는 천상의 번개보다도 물의 은총을 더 좋아했습니다. 그는 하계에서 이러한 죄명으로 벌을 받게 됩니다. 호메로스는 시지프스가 저승사자 타나토스를 묶은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계의 왕 하데스는 황폐하고 썰렁한 제국을 더 이상 볼 수 없었습니다. 하데스는 전쟁의 신 아레스를 파견하여 그가 저승사자 타나토스를 정복자의 손에서 풀려나게끔 만들었다.
It is said also that Sisyphus, being near to death, rashly wanted to test his wife's love. He ordered her to cast his unburied body into the middle of the public square. Sisyphus woke up in the underworld. And there, annoyed by an obedience so contrary to human love, he obtained from Pluto permission to return to earth in order to chastise his wife. But when he had seen again the face of this world, enjoyed water and sun, warm stones and the sea, he no longer wanted to go back to the infernal darkness. Recalls, signs of anger, warnings were of no avail. Many years more he lived facing the curve of the gulf, the sparkling sea, and the smiles of the earth. A decree of the gods was necessary. Mercury came and seized the impudent man by the collar and, snatching him from his joys, led him forcibly back to the underworld, where his rock was ready for him.
거의 죽음에 임박한 시지프스는 또한 무모하게도 아내의 사랑을 시험하고 싶어했습니다. 그는 아내에게 아직 땅속에 묻히지 않는 자신의 시체를 광장 한 가운데로 내던지라고 명령합니다. 시지프스는 하계에서 깨어납니다. 그리고 거기서, 인간의 사랑에 크게 벗어나는 명령에 화가 나서 하데스로부터 지상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서 아내를 벌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가 이 지상의 모습을 다시 보게 되고 물과 햇빛과 온기 있는 돌과 바다를 보고 좋아하게 되자 더 이상 어둠의 지옥 속으로 내려가길 원하지 않게 됩니다. 돌아오라는 말이나 분노와 같은 징조나 경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수년간 만(灣)의 굴곡과 거품이 이는 바다 및 지상의 미소와 맞닥뜨리면서 즐겁게 살았습니다. 신의 명령은 불가피했습니다. 헤르메스가 내려와서 이 건방진 녀석(시지프스)의 멱살을 잡고서 그에게서 인생의 낙을 빼앗아가는군요. 그리고 나서 어거지로 그를 끌고 하계로 내려갑니다. 거기서 위에서 말한 바위가 그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You have already grasped that Sisyphus is the absurd hero. He is, as much through his passions as through his torture. His scorn of the gods, his hatred of death, and his passion for life won him that unspeakable penalty in which the whole being is exerted toward accomplishing nothing. This is the price that must be paid for the passions of this earth. Nothing is told us about Sisyphus in the underworld. Myths are made for the imagination to breathe life into them. As for this myth, one sees merely the whole effort of a body straining to raise the huge stone, to roll it and push it up a slope a hundred times over; one sees the face screwed up, the cheek tight against the stone, the shoulder bracing the clay-covered mass, the foot wedging it, the fresh start with arms outstretched, the wholly human security of two earth-clotted hands. At the very end of his long effort measured by skyless space and time without depth, the purpose is achieved. Then Sisyphus watches the stone rush down in a few moments toward that lower world whence he will have to push it up again toward the summit. He goes back down to the plain. It is during that return, that pause, that Sisyphus interests me. A face that toils so close to stones is already stone itself! I see that man going back down with a heavy yet measured step toward the torment of which he will never know the end. That hour like a breathing-space which returns as surely as his suffering, that is the hour of consciousness. At each of those moments when he leaves the heights and gradually sinks toward the lairs of the gods, he is superior to his fate. He is stronger than his rock.
여러분은 벌써 그가 부조리의 영웅이라는 것을 아셨을 겁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고문을 통해서나 자신의 삶에 대한 열정만큼이나 부조리한 영웅이죠. 그는 신을 조롱하고, 죽음을 꺼렸고, 삶에 대한 열정을 가진 결과로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는 그러한 지상의 빈곤한 언어로는 형용할 수 없는 벌을 받게 됩니다. 이것은 지상에 대한 열정의 희생임이 분명합니다. 하계의 시지프스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군요. 신화라는 것이 상상력의 발동으로 거기에 숨을 불어넣는 것이니까요. 이 신화에 대해서 말하자면 사람들은 단순하게 한 인간의 육체가 거대한 바위를 들어올려서 그것을 굴려서 수백 번 비탈로 올라가려고 용을 쓰는 모습만을 보실 겁니다. 그 모습이란 게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얼굴, 바위와 가까이 맞닥뜨려진 볼, 진흙 덩어리를 맨 어깨와 족쇄가 채워진 발, 그리고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 기지개를 펴는 팔과 온전히 인간적인 든든함을 보여주는 진흙더미가 묻은 두 손일 것입니다. 하늘 없는 공간과 깊이가 없는 시간만으로 측정이 가능한 영겁의 노력 끝에 마침내 시지프스의 목적이 달성이 됩니다. 그리고 나서 시지프스는 바위가 순식간에 아래로 빨리도 떨어져 내려가는 것을 봅니다. 거기서 다시 그는 바위를 밀고 올라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는 돌을 올리기 위해서 아래의 평지로 내려갑니다. 그렇게 다시 돌아가면서 쉬는 동안에 시지프스는 나의 관심을 끄는군요. 코에 닿을 듯이 가까이 있는 바위를 나르려고 고생을 하는 얼굴은 이미 바위 덩어리가 되어버렸군요. 시지프스라는 그 남자는 끝도 알 수 없는 영겁의 고통 속으로 무겁게 그러면서 계산된 발걸음으로 다시 내려가는 것이 보입니다. 숨을 돌릴 수 있는 여유와 같은 휴식 시간은 고통처럼 반드시 다시 찾아옵니다. 그 휴식시간은 의식이 깨어있는 순간이 되기도 합니다. 그가 언덕바지를 떠나는 매 순간마다, 거짓말쟁이 신들에게로 내려가는 순간마다 그는 자신의 운명보다 뛰어난 인물이죠. 그는 바위보다도 강한 인물입니다.
If this myth is tragic, that is because its hero is conscious. Where would his torture be, indeed, if at every step the hope of succeeding upheld him? The workman of today works every day in his life at the same tasks, and this fate is no less absurd. But it is tragic only at the rare moments when it becomes conscious. Sisyphus, proletarian of the gods, powerless and rebellious, knows the whole extent of his wretched condition: it is what he thinks of during his descent. The lucidity that was to constitute his torture at the same time crowns his victory. There is no fate that cannot be surmounted by scorn.
이 신화가 비극적이라면, 그것은 이 신화의 영웅의 의식이 깨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 걸음 한 걸음마다 꼭 이루고 말겠다는 희망이 그에게 있다면 도대체 고통의 고문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오늘날 직장에서 일을 하시는 직공들은 살아가면서 같은 일만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운명 또한 부조리하다고 할 수 있죠. 그러나 흔치는 않지만 운명을 인식하고 있을 때면 이 운명은 비극적으로 되고 맙니다. 신들의 무산계급인 시지프스는 힘도 없고, 반항적입니다. 그는 자신의 비참한 조건을 모두 알고 있습니다. 조건이란 아래로 내려가는 도중에 생각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자신의 고통과 같은 고문을 만들어내는 깨어있는 정신은 최후에 승리를 안겨줍니다. 멸시는 어떠한 운명이라도 극복할 수 있죠.
If the descent is thus sometimes performed in sorrow, it can also take place in joy. This word is not too much. Again I fancy Sisyphus returning toward his rock, and th sorrow was in the beginning. When the images of earth cling too tightly to memory, when the call of happiness becomes too insistent, it happens that melancholy rises in man's heart: this is the rock's victory, this is the rock itself. The boundless grief is too heavy to bear. These are our nights of Gethsemane. But crushing truths perish from being acknowledged. Thus, Oedipus at the outset obeys fate without knowing it. But from the moment he knows, his tragedy begins. Yet at the same time, blind and desperate, he realizes that the only bond linking him to the world is the cool hand of a girl. Then a tremendous remark rings out: "Despite so many ordeals, my advanced age and the nobility of my soul make me conclude that all is well." Sophocles' Oedipus, like Dostoevsky's Kirilov, thus gives the recipe for the absurd victory.
그래서 가끔씩 슬픔에 차서 아래로 내려오면, 이러한 하강은 기쁨 속에서도 일어납니다. 이 단어는 지나친 표현이 아니죠. 다시 전 시지프스가 바위 쪽으로 돌아가는 것을 머리 속으로 그려봅니다. 그러면 슬픔이 시작이 됩니다. 지상의 이미지라는 것들은 지나치게 추억에 의존하고 행복을 찾아오는 곳이 너무 눈에 띄게 보일 때면 사람들의 가슴 한 쪽에서는 침울함이 발생하죠. 이 침울함이란 것은 바위가 인간에 대한 승리가 아니라, 그 바위 자체를 말합니다. 끊임없는 슬픔은 정말로 견디어 낼 수가 없습니다. 고난의 동산에서 지새는 밤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무엇인가를 인식하는 순간에 그 궤멸 적인 진실은 사라집니다. 그래서 오디프스는 처음부터 운명을 인식하지 않고 운명에 굴복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비극은 시작이 되죠. 그러나 동시에 맹목적으로 애타게 그와 세상을 연결하는 유일한 끈이란 것이 여인네의 차가운 손아귀라는 것을 알게됩니다. 그러면 거대한 말소리가 쩡쩡 울려 퍼지죠: 수많은 고난 속에서도 고령과 고귀한 영혼 덕택에 난 만사가 태평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그래서 도스토예프스키의 키릴로프 처럼 고대 아테네의 시인 소포클레스의 오디프스는 부조리한 승리를 하는데 있어서 필요한 비책을 제공합니다.
Ancient wisdom confirms modern heroism.
One does not discover the absurd without attempting to write a manual of happiness. "What! by such narrow ways--?" There is but one world, however. Happiness and the absurd are two sons of the same earth. They are inseparable. It would be a mistake to say that happiness necessarily springs from the absurd discovery. It happens as well that the feeling of the absurd springs from happiness. "I conclude that all is well," says Oedipus, and that remark is sacred. It echoes in the wild and limited universe of man. It teaches that all is not, has not been, exhausted. It drives out of this world a god who had come into it with dissatisfaction and a preference for futile sufferings. It makes of fate a human matter, which must be settled among men.
행복에 이르는 입문서를 쓰려는 노력을 해야만 삶의 부조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왜 그러한 옹색한 방법을 택하란 말인가? 그러나 세상은 오지 하나. 행복과 부조리라는 것은 같은 지상이 낳은 두 명의 아들과 같습니다. 그 두 아들은 불가분의 관계죠. 행복이 꼭 부조리를 발견하는 것에서부터 기인한다고 말하면 큰 실수입니다. 오디프스는 "내 결론은 만사가 태평하다"라고 말합니다. 사실 그 말은 고귀합니다. 그 말은 인간들이 살고 있으면서 거칠고 한정이 되어있는 이 우주에서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그 말은 또한 우리 모두는 아직 전에도 그렇지 않았지만, 아직 지칠 대로 지치지 않았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 말은 또한 만족하지 못하면서 의미 없는 고통을 바라면서 그 말의 결론에 이른 한 신(神)을 이 세상에서 몰아내기도 합니다. 이 말은 운명을 인간의 것으로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즉 그것은 인간들끼리 서로서로 해결해야만 하는 운명입니다.
All Sisyphus' silent joy is contained therein. His fate belongs to him. His rock is his thing. Likewise, the absurd man, when he contemplates his torment, silences all the idols. In the universe suddenly restored to silence, the myriad wondering little voices of the earth rise up. Unconscious, secret calls, invitations from all the faces, they are the necessary reverse and price of victory. there is no sun without shadow, and it is essential to know the night. The absurd man says yes and his effort will henceforth be unceasing. If there is a personal fate, there is no higher destiny, or at least there is but one which he concludes is inevitable and despicable. For the rest, he knows himself to be the master of his days. At that subtle moment when man glances backward over his life, Sisyphus returning toward his rock, in that silent pivoting he contemplates that series of unrelated actions which becomes his fate, created by him, combined under his memory's eye and soon sealed by his death.
모든 시지프스의 즐거움은 이 안에 있습니다. 그에겐 자신의 운명이 있습니다. 바위가 바로 그것이죠. 마찬가지로, 자신의 고통을 성찰하게 되면 부조리한 인간은 모든 우상을 잠재우죠. 갑자기 침묵으로 복원된 이 우주에서, 수없이 많이 이상하게 여기는 작은 목소리들이 지상에서 일어나고 있죠. 그 모든 얼굴에서 보이는 무의식적이고 비밀스런 부름과 초대는 필요한 패배이자 승리의 대가입니다. 그림자가 있어야 태양이 있듯이 밤을 인식해야만 합니다. 부조리한 인간은 승인을 하고 나서, 그후로 자신의 노력은 쉬지 않고 계속됩니다. 개인적인 운명이 있다면 더 고귀한 숙명은 존재하지 않거나 최소한 하나의 운명은 있겠죠. 그것은 자신이 판단 건데 비열하지만 숙명적인 것이죠. 남아있는 숙명을 위해서라도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됩니다. 자신의 삶을 조망하는 미묘한 순간에 시지프스는 자신의 바위 쪽으로 돌아갑니다. 이렇게 조용히 선회하는 동안에 그는 연속적으로 연관성이 없는 행동들이 자신의 운명이 되고, 자신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자신이 보는 기억의 인식하에 합쳐지고, 자신의 죽음에 의해서 곧 봉해지게 되는 것을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Thus, convinced of the wholly human origin of all that is human, a blind man eager to see who knows that the night has no end, he is still on the go. The rock is still rolling.
I leave Sisyphus at the foot of the mountain! One always finds one's burden again. But Sisyphus teaches the higher fidelity that negates the gods and raises rocks. He too concludes that all is well. This universe henceforth without a master seems to him neither sterile nor futile. Each atom of that stone, each mineral flake of that night-filled mountain, in itself forms a world. The struggle itself toward the heights is enough to fill a man's heart. One must imagine Sisyphus happy.
산기슭에서 전 시지프스를 떠납니다. 누구나 자신의 무거운 짐을 다시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시지프스는 신을 부정하고 바위를 들어올릴 수 있는 고귀한 충정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는 만사가 태평하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앞으로 주인 없는 이 우주는 그에게도 불모의 땅이거나 하찮은 곳이 아닙니다. 그 바위의 원자 하나와 밤으로 그윽한 산의 광물 조각 하나 그 자체가 이 세상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고원을 향한 투쟁 자체는 인간의마음을 가득 채우기에 넉넉해 보입니다. 누구나 시지프스가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