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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뿐인 극장이 자리 잡고 있은 읍내 장터, 그 극장 옆에 포목상, 예천상회에 푸른 줄이 간 완장을 찬 일련의 청년들이 몰려왔다.
“아제, 계시니껴? 아지메도요?”
청년들이 안방에 둘러앉고 봉순이는 술상을 차렸다.
어린 칠닥이는 호기심으로 그들을 살피며 어머니 주위를 맴돌았고 그런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다보던 청년 한 사람이 인사치레한다.
“야가, 개동이 동생이껴? 엇따, 니 한잔하그라!”
청년은 소주잔을 어린 칠닥이에게 들이밀었고 멋모르는 칠닥이는 그것을 훌쩍 마셔 버린다. 눈에서 불똥이 튀고 콧날이 달아 날 정도로 찡해서 비틀거렸다.
"하 하 어떻노? 그기 니가 살아가야 할 맛인기라."
청년들은 한바탕 웃음으로 통쾌해했으며 어머니는 혼미해져 정신없는 칠닥이를 끌어안아 젖무덤에 꼭 묻었다.
멋모르고 마신 소주 한 모금의 강한 충격을 어머니는 너무나도 익숙한 비릿한 젖 냄새로 다스려 주었다.
한없이 안락한 그곳. 비리면서도 중독되어 찾게 되는 무한하고 아늑한 그런 곳이 어머니의 품이었다.
어머니 무릎을 베고는 귀를 파던 아늑하고 포근한 안락함이여....
4.19 혼란 중에 청년들은 민주당 신 세력을 선전하며 지방의 부호를 방문하면서 정치자금을 모금하러 다니는 중이다. 그들이 팔뚝에 찬 완장이 어린 칠닥이에게는 새로운 호기심이었다.
완장이라,
완장 한 장이 때때로 사람을 특별나게 변형시키기도 한다. 살다 보면 그런 예를 곳곳에서 보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세상, 참 웃긴다는 생각이 들고는 한다.
장례식장 시체실 냉동고에 콘크리트처럼 굳어 있는 칠닥이는 이제는 한기寒氣를 느끼고 있다.
그가 간직해 온 오십 년의 피의 온기는 이제 사라지고 몸뚱이는 딱딱하게 굳어지고 있다.
그 옛날 예천상회에서 소주 한 잔의 충격을 못 이겨 파고든 어머니의 품이 몸서리나게 그리워지는 순간이다.
죽음은,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일까?
태초의 자궁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어머니의 자궁은
그 어머니의 자궁이 잉태하셨고,
그 어머니의 어머니는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가 생산했을 것이다.
그 많은 어머니의 원초는 무엇일까?
막연하지만,
그것은 그냥 흙, 일 것이다.
전지전능하다 할 신神이 지배하는
그냥 흙이다.
흙에서 태어나서
흙을 밟고 살다가
흙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칠닥아, 엄마를 보지 말고 사진기를 봐야 제~ 사진기를”
펑!
번쩍하고 마그네슘 조명기의 빛이 번개 같다.
삼남당 약방의 윤걸이. 솥 전집의 준기, 옹기집의 상수 자전거포의 우복이, 그리고 포목상의 칠닥이. 이렇게 막 다섯 살이 되는 화동花童이 설날을 맞아서 나무로 짠 계단으로 오르는 무영 사진관에서 기념 촬영을 했다.
“야 봐라. 눈이 지 엄마한테 돌아가잖아.”
현상된 사진을 받아 쥔 어머니 봉순이가 칠닥이를 애정 어린 타박 하고 있다.
다른 아이들 눈초리는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반면에 칠닥이는 문 섶에 대기하고 있는 제 엄마가 혹시나 사라질까 해서 눈초리가 돌아가 있는 것이 여실하였다.
소백산 두솔봉 골짜기 홍정골에서 장터 포목상 오부자의 씨받이가 된 어머니 봉순이는 맏아들 개동이를 낳았고 그 밑에 여식, 금자 그리고 셋째가 아들인 칠닥이었다.
이제 아들을 둘씩이나 생산한 봉순이는 오씨 집안에서 확실히 안방마님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닭 전거리가 있는 동부동의 농가農家에는 오 부자의 본처가 할머니를 모시고는 농사일을 관리하고 있고 포목상점에서 한동안 첩살이를 하던 영주 여자는 봉순이가 첫아들을 오 부자에 안기자마자 어디론가 홀연히 떠나버린 것이다.
이제 장터의 극장 옆 예천상회에서는 오 부자를 위시하여 봉순이와 그녀의 어린 2남 2녀, 그리고 이 집안에 살림을 거드는 홍정골 조카 처녀인 정님이가 같이 생활하게 되었다.
극장은 하루에 두 번씩 시끄럽다.
한 번은 낮에의 상영 시간이고 또 한 번은 밤에의 상영시간, 이렇게 하루 두 번씩 상영 전에 앰프 소리가 높은 극장 지붕 꼭대기 철탑 위에서 장터의 전역으로 퍼져서 손님을 끄는 역할로 왕 왕 대는 것이다.
극장에서 길을 건너면 삼남당 약방이 있다. 약방 주인, 윤걸이 아버지는 호리호리하게 마르고 키가 훌쩍 컸다. 반면에 윤걸이 엄마는 부잣집 마님 모양에 걸맞게 뚱뚱하고 넉넉한 풍채인데 부잣집 약방 앞에는 50cc 까만색의 오토바이가 늘 서 있었다. 칠닥이에게는 그 오토바이를 극장 사장 이 이상 씨가 만지작거리며 부러워하던 기억이 흑백영화를 보듯이 재생이 되고 있다. 배가 불룩하니 전형적인 사장님 품새인 이사장이 큰 극장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오토바이 한 대에 집착하는 모습이 지금도 신기롭다.
극장 아래쪽에 붙어 있는 집은 욱준네의 솥 집이다.
욱준이는 그 집안의 장남인 형과 터울이 심해서 열아홉이나 차이가 났다. 욱준이가 국민학생일 때 그 형은 이미 가정을 꾸렸다. 욱준은 나이 차이가 적은 조카와는 형제와 같이 어울리기도 하였다.
“야, 이놈아! 내가 너 아비 나이다!”
제 형보고 형이라 한다해서 성장한 욱준이 친구가 그의 형더러 형님이라고 했다가는 여지없이 떨어지는 불호령을 내려서 자신의 권위를 세우고는 했다. 친구의 형을 보고 형님이라 하지 않으면 아저씨라 해야 할 판이다.
욱준네는 길가에 솥 점방이지만 그 마당 안쪽으로 터가 커서 극장을 지을 때 그 일부를 무상으로 점유하였다. 그 덕으로 욱준이 아버지가 손을 잡아 주면 동네 꼬마들은 극장을 공짜로 들어가기도 하였다. 칠닥이도 종종 그렇게 공짜영화를 보고는 했다. 그뿐 아니라 극장의 스리쿼터 선전차가 영화 선전을 나갈 때는 화물칸에 올라 면 소재지는 물론이고 시골 구석구석을 한 바퀴 돌아오는 호사를 누리기도 하였다.
욱준네 집을 쭉 내려가면 한전韓電이 있는 삼거리가 나오고 오른쪽은 십자 거리와 국민학교로 가는 길이다.
삼거리에서 왼편으로 내려가면 나중에 오 부자가 사들인 양철지붕의 마당 넓은 집이 있고 더 내려가면 동부동을 지나 앞거랑(시냇물)이 흐른다.
극장 바로 위쪽에 바로 자전거포 우복이네다. 공명심이 있는 우복이네 아버지는 전봇대에 올라갔다가 감전이 되어 떨어지면서 다쳐서 다리를 전다.
자전포 길 건너 삼남당 약방 윗집은 과부가 하는 한복집, 강원상회가 있었다. 과부에게는 주워 온 아이라던 낭기라는 여식이 있었는데 더러 과부로부터 빨개 벗겨져서는 울면서 길 복판으로 쫓겨나는 경우가 있고는 하였다.
“요, 망할 년아! 너 에미를 찾아 가그라 아!”
극장 통로에서는 가끔은 그것은 구경거리였고, 칠닥이도 죽은 이 순간에도 그 기억에 생생하다. 강원상회 여주인은 우복이네 안장이 낮은 자전거를 사들여 타고 다녀서 장터에서 여자가 자전거를 타는 이는 그 여자가 유일하였다.
자전거포 윗집이 서울상회, 그 윗집이 칠닥이네 예천상회고 그 바로 윗집은 주막이어서 장날이면 낮이고 밤이고 술꾼들로 분주하기가 이룰 데 없었다. 지금으로 치자면 동네 사방에서 항의가 빗발치겠지만 당시에는 모두 그러니 하고 살았다.
삼남당 약방이나 강원상회는 큰 함석지붕이 씌워진 중앙시장과 어깨를 같이하고 있는데 그 시장 안에는 상수네 옹기집이 있고 상수의 어머니는 항상 돋보기를 끼고 두꺼운 성경책을 들여다보면서 주절거리던 모습이 떠오른다. 상수 아버지는 작고 마른 체격이다. 까까머리를 하고는 당꼬바지를 늘 입고 있었는데 인민군 출신이라는 말도 들었었다. 상수네는 네 형제인데, 전쟁통에 복잡하게 집합한 가족이다. 우선 상수 어머니가 맏이인 인수를 데리고 둘째 광수를 키우는 상수 아버지에게 시집을 와서 셋째 영수와 넷째 상수를 낳은 것이다. 그들의 형제는 성장하여 인수는 해군에, 광수는 육군을 영수는 해병대요, 상수는 공군에서 복무하는 한집안의 형제가 4軍을 섭렵하였다. 인수는 군대를 제대하고 서울 남대문 시장에서 점원으로 고생하다가 독립하여 을지로에서 두 평짜리 와이셔츠 가게, 맨 스톱을 차렸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상수는 맨 스톱에 점원이 되었다. 광수가 군대를 제대하자 인수 형의 소개로 남대문 시장에 점원으로 취직하여 나중에는 그 시장의 상인회 회장이 될 정도로 입지전적인 큰 성공을 한다. 광수가 성공의 가도를 달리며 번창할 즈음에 영수가 제대하여 그 광수 형 밑에서 점원 노릇을 하게 된다. 영수가 남대문 시장에 점원이 되자 고종사촌인 헌영이도 따라서 점원이 된다.
나중에는 영수와 헌영이는 독립하여 점포에 사장까지 되기는 하지만 1997년 외환위기를 계기로 해서 파산을 하고 애초의 점원보다도 못한 처지의 신세로 전락하게 된다.
시장 안 옹기집 위로 건어물포나 생선가게가 즐비한 것이 어물전이다. 어물전 맨 윗집이 백충기네다.
그이는 어물 사업을 포항에까지 진출하여 해산물 사재기로 큰돈을 벌게 된다. 그맘때쯤 국내에서도 냉동시설이 신산업 되어 백춘기는 남보다 앞서 시류를 탄 것이다.
시장이 끝나는 지점에서 더 위로 가면 마곡시장이요, 오른쪽으로 가면 닭 전거리가 있고 그 닭 전거리에 오부자의 본처요 칠닥이로부터는 큰 엄마로 불리는 여자와 칠닥이의 친할머니가 계시는 농가가 있다.
닭 전거리에서 조금만 내려가면 소전거리가 나오고 그곳에서 오 일마다 한 번씩 벅적지근한 거래가 이루어진다. 소전거리를 한참 지나면 중앙선 철길을 만나는데 기차가 건너다니는 철다리길 인근에 오부자의 농토가 있었다. 철길 건널목에 고개를 넘으면 산법 동이다. 산법동 골짜기에 아이들은 먼 길을 걸어서 칠닥이가 다니는 장터 국민학교를 다녔다.
중앙시장에서 왼쪽으로도 상가가 형성되어 있는데 대성상회나 안동상회, 문방구인 학원사도 있었다. 학원사를 좀 지나서 오거리가 나온다. 한쪽은 농협과 십자 거리요, 한쪽은 역전으로 가는 길. 또 한길은 굴다리를 지나 서부동 길이요, 또 한 길은 순흥, 부석으로 가기도 한다. 순흥 부석으로 가는 길에 고개 이름은 잠뱅이재이다. 잠뱅이재를 넘어서도 오 부자는 큰 농토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그 동네가 산골내기다. 산골내기는 한약 재료로 쓰이는 산골이 나는 곳이라 해서 붙여진 골짜기 이름이다.
그 길로는 하루 몇 번씩 버스가 다녔는데 욱준이 아버지가 일제 기아엠 자전차를 타고는 순흥, 부석장을 보러 다니는 길이기도 하였다.
죽어거 누워있는 칠닥이 육체에서 유리된 혼이 과거 자신의 흔적을 되뇌고 있는 중이다.
극장이 있는 중앙시장 거리는 항상 북적거리는 장터였다.
오일장이 돌아오는 날이면 광목으로 천막을 친 장사치들의 난전으로 거리가 메워진다.
서울상회나 예천상회나 장터 또 다른 점포마다 장날에는 가게 앞에도 예외 없이 난전이 펼쳐졌는데, 예천상회 앞 전에는 투박하게 생긴 빨랫비누와 그 비누를 만드는 재료인 양잿물을 파는 장수가 단골로 오고는 했다.
오 일 마다 어디선가 찾아오는 장사치는 장날 새벽에, 큰 도라꾸(트럭)가 커다란 광목 뭉치를 정해진 자리에 줄줄이 떨어트려 놓으면 얼마 후 장돌뱅이들이 우르르 몰려와서는 각자 자기 보따리를 찾아 난전을 펴기 시작한다.
비누 장수는 장준비를 끝내고 포목상 중앙에 자부동(방석)을 깔고 나란히 앉아 손님 맞을 준비를 하는 오부자 부부에게 깍듯이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 나서는, 늘 그러했듯이 포목상 들마루(평상)를 가져다 가게 앞에 깐다. 그것도 모자라면 구석에 세워둔 빈지(가게 덧문)를 이어서는 난전을 마련하고 아까 도라꾸(트럭)가 떨어트린 광목 보따리를 풀어 서는 각종 비누와 양잿물 덩어리를 쏟아 펼친다.
칠닥이는 그 여러 비누 중에서도 주먹만 한 8000번 벌꿀 비누가 좋고도 신기해서 코를 가까이하고는 킁킁대기를 하였다. 이 냄새를 오십 년 후 칠닥이가 경기도 안산에서 죽기 얼마 전에 그의 방으로 침입한 여인의 몸을 통해서 기억해 낸다.
장돌뱅이 사내는 난전의 물건을 만지작거리는 칠닥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한다. 아마 포목상 앞자리를 허용해 준 주인댁 둘째 놈을 귀여워함으로서의 작은 아부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박정희, 근대사에서 그의 이름은 수없이 거론된다.
1917년 음력, 9월 30일생 경북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박성빈(46세) 어머니 백남이(45세) 사이의 오남 이녀 중 막내이다.
1932년 대구 사범학교에 응시하여 전체 1,070명 중에 51등을 한다. 박정희는 사범학교 재학시 형이나 집안의 강요로 결혼하지만, 부부간에 사이는 좋지 않았다. 그는 졸업 당시에는 성적이 뒤처져서 경북의 오지 문경의 보통 학교 교사로 간다. 당시의 월급은 45원이었다. 박정희는 45원 중에, 8원을 하숙비로 쓰고 어려운 학동들의 학비를 대신 내주거나, 용돈을 제외한 반 정도는 고향으로 송금하였다. 교사 시절에는 민족주의적 성향을 보였던 박정희는 특히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높아 게 중에서도 정순옥이라는 여학생과는 만주 군관학교 시절까지 서신 왕래를 하고 그랬다. 박정희가 결국 이 학교를 떠나게 되는데 장학사가 학교를 방문하여 머리 모양이 단정치 못하는 그에게 황민화 정책에 순응하지 않는 처세라 질책을 받았기 때문이다. 장학사가 방문한 날 저녁에 아미라 교장댁 회식이 있었는데 박정희는 장학사 앞에 술상 엎고 과격 행동을 한다. 그 후로 학교를 떠난 박정희는 만주행에 몸을 싣는다. 1940년 4월 만주 군관학교 2기로 입학을 하게 된다. 당시 약관 22세. 일사봉공(一死奉公) 박정희. 라는 혈서를 쓰고 조국을 위해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하겠다는 다짐을 일본 천황에게 바치기도 한다. 응시자 480명 중에 15등의 입학성적을 보여준 박정희는 12명의 한국인 중에 1인이 된 셈이다. 5.16 군사 정변을 반대했던 이한림이 당시 박정희와는 동기 입학생이었다.
만주 군관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박정희는 1942년 일본육사 57기로 편입을 한다. 이때 조선인 식 창시 개명한 다까기 마사오인 박정희는 아예 일본인 식으로 오까미토 미노르로 재차 개명하여 철저하게 내선일체에 앞장선다.
태평양전쟁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온 박정희는 잠시 무위도식을 하다가 집 안에 있는 카메라를 훔쳐 서울로 간다. 카메라는 대구에서 기자 생활을 하던 형 박상희 것이었다. 서울로 가서는 조선경비사관학교에 입학하는데, 이것이 육군사관학교 2기가 되는 것이고, 이때의 동기가 10.26 당시 중앙정보 부장인 김재규이다. 이 해에 10월 대구에서는 쌀 획득 사건인 폭동 사건이 일고 이 사건으로 총에 맞아 그의 형 박상희가 사망한다. 총 136명 희생된 이 사건은 남로당의 지시로 시작된 폭동에 맞서 경찰이 발포하는 바람에 흥분한 민중의 항거로 전국적 규모로 확대 되어 전국에 230만 명 참여하게 되고 결국 미 군정은 계엄령을 선포하게 된다.
한편, 육사를 졸업한 박정희는 춘천으로 배속되는데 그때 그를 찾아오는 이가 이재복이다.
이재복은 죽은 박상희의 친구로 남은 박상희의 가족들을 돌봐주고 있던 은인이기도 하였다. 그런 그가 박정희를 찾아간 것은 그를 포섭하여 남로당으로 입당시키기 위함이다.
1948년 8월 박정희가 소령으로 진급하고 두 달 후 10월 당시에 여수, 순천 사건이 일자 군부에서는 좌익 군인을 숙군하는 작업이 일었다. 악질 친일파 수사관 김창용에게 박정희는 남로당 군인 명단을 모두 고발하였다. 그들은 모조리 총살당한다. 박정희가 유일하게 살아남은 것은 숙군작업을 도왔다는 점, 만주 군관학교의 인맥인 백선엽이나 정일권 등이 구명을 벌인 결과이다.
박정희는 문경 교사 시절에 잠시 보였던 민족주의 성향에서 만주 군관학교로 입학하면서 친일파로 변신을 하였다. 육사를 졸업하고는 남로당에 입당하는 좌익이 되었다가 또 다시 그들을 고발하고 우익으로 옮겨가는 기회주의적인 행동을 하였고 그 과정에서 희생되는 주변 동료들이 많았다.
1949년 군대에서 퇴출당한 박정희는 문관 정보과장으로 월급도 없이 책상만 지키고 있었다. 당시 그의 후임이 이후락이다. 이 무렵에 박정희의 모친이 사망한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터지자 박정희는 장도영, 백선엽, 정일권의 힘으로 50년 7월 14일 육군 소령으로 복직을 하여 육본 전투정보과장으로 근무하게 된다. 그러는 과정에서 김종필, 석정선, 최영택 등 육사 8기와 친교를 맺으며 군사 쿠데타 모의를 공유한다.
박정희는 1950년 12월 12일 대구의 한 성당에서 육영수와 결혼을 한다. 두 번째 부인이다.
육영수는 아내로서 박정희를 극진히 모셨다.
박정희의 쿠데타 이력은 세 번이 이른다.
그 첫 번째가 1960년 3.15부정선거에 반하여 5월 8일에 참모총장 송요찬의 미국 출장을 틈타 쿠데타를 작심하였으나 실패를 한다. 두 번째는 1961년 4.19기념식은 기해 계획했으나 도 다시 실패로 끝난다. 그 세 번째가 1961년 5월 26일에 거행한 5.16 군사 쿠데타이다.
1963년 12월 17일 대한민국 제5대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는 상대 후보 윤보선과 대결에서 470만 표 대 454만 표로 15만 표를 더 얻어 대통령에 당선된다.
한일간 국교 수교를 원했던 대통령이 된 박정희는 일본의 유력 정치인 기시 노부시키를 만났다.
“우리가 군사혁명을 일으킨 것은 일본의 메이지유신 때 지사들이 생각 난 것입니다. 젊은 군인들이라 정치를 모릅니다. 더 더구나 경제는 더 모릅니다. 한국의 기업인들은 국가 관념 없어 일본 의견 듣고 싶습니다."
1964년 6월 4일 대대적인 6.3 항쟁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박정희가 만주 인맥을 동원해서 일본과 국교 정상화를 이루고 1964년 한일협정을 통해 전쟁 배상금으로 받은 3억 달러를 받는데 이는 필리핀보다 적은 금액이었다.
어린 칠닥이가 박정희를 인식한 계기는 1 21사태일 때다.
"이양반, 요번에 식겁 먹었제."
어머니 봉순이가 칠닥이가 보고 있는 어린이 잡지에 번들거리는 표면에 실린 박정희의 사진을 손가락으로 쿡 찌르며 하는 말이다.
1968년 1월 21일 북한의 124부대 소속 무장공비가 청와대의 박정희를 암살하고자 서울에 침투한 사태가 벌어졌다. 대부분이 군경의 합동작전으로 사살되었으나 유일한 생존자는 김신조였다. 칠닥이가 국민학교 4학년 때 일이다.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수다!"
김신조는 기자회견에서 충격적인 발언함으로 모든 사람을 소름 끼치게 하였다.
어린 칠닥이도 몸서리를 쳤다. 임금과 같은 박정희 대통령이 만약 죽는다면 말로만 듣던 6.25 전쟁과 같은 엄청난 비극을 자신도 겪어야 하는가 하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신문에는 어떤 경찰관이 지하도에서 공비를 쫓다가 가슴에 총을 맞았는데 다행히도 윗도리 윗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두꺼운 영어사전에 총탄이 박혀서 목숨을 건졌다는 기사가 실리기도 하였다.
"우와! 통닭이다. 엄마, 우엔 일로 닭글 두 마리나 샀는고?"
"운제 전쟁 나가 다 죽을랑가 모르는데, 먹고 싶은 거나 실컷 묵자!"
언젠가, 개동이가 십자 거리 닭집에서 사 온 밀가루 포대로 만든 누런 봉지에 담긴 기름으로 튀긴 닭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솥에 찐 닭만, 그것도 어쩌다 먹어보는 것이지만 십자 거리에 새로 생긴 닭집에서는 뚜껑이 없는 커다란 가마솥에 그 귀한 식용유를 철철 붓고는 기름을 끓여서 거기에 닭을 튀겨내는 것이다. 일 년에 한 번쯤이나 먹어볼 수 있는가 하는 귀한 음식을 배불리 먹게 된 것은 김신조 덕분이다.
1·21사태 이후 세상은 많이 달라졌다.
같은 해 열 달 후인, 1968년 11월 21일에 17세 이상이 된 전국민에게 열두 개의 숫자로 구성되는 주민등록번호가 부여된다. 향토예비군이 창설되고 육군3사관학교가 새로 생겨났다.
"전체, 차리 엇!"
면내 향토예비군 행사가 칠닥이네 국민학교 교정에서 열리고 있다. 한눈에 봐도 어설프기 짝이 없는 행세로 농사꾼 일색의 모습으로 이른바 예비군이 운동장에 도열해 있고 그들을 지휘하는 자는 진만이네 매형이었다.
"햐아~ 저이는 꺼꾸러 세워놔도 멋있겠다! 야."
"호 호 호 저 머로, 진희 언니 신랑 아이가!"
진만이네 매형은 카키색의 색다른 군복을 몸에 꽉 끼게 입은지라 넓은 어깨와 그 위에 새파란 견장하며 역삼각형으로 내리뻗은 등줄기를 타고 내려온 엉덩이가 빵빵하게 불거지고 그 밑으로 쭉 뻗은 종아리에 눈부실 정도로 반짝거리는 군화를 착용하고는 많은 면민이 지켜보는 중에 오합지졸을 지휘하고 있다.
운동장 빼곡히 광목 천막이 처진 중앙의 조회대 위로 군수와 면장, 처음 보는 중령 계급장을 단 군인이 우뚝 서 있는 행사에 도열된 예비군을 주욱 살피던 지휘관은 차렷 자세의 예비군 무리의 전면 오른쪽으로 삐쩍 삐쩍 발걸음을 옮긴다. 한 사내에 앞에서더니 "똑바로 못하나?" 하면서 그의 명치를 주먹으로 과격을 하였다. 한차례 천하의 어설픈 병사를 군기로 잡고 다시 원위치로 돌아오는 그의 배꼽 아래 버클이 햇볕에 반사되면서 행사를 빛내고 있다.
1.21사태로 당시의 국방장관도 쫓겨나고 군대의 병사복무기간이 6개월 연장이 된다 더불어 청와대가 있는 북한산 일대의 등산로가 대부분 폐쇄되었으며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군사교육이 신설된다.
죽어서 식은 채로 굳어 있는 칠닥이에게 이렇게 옛 기억이 몰려드는 경우는 어떤 것일까. 코끼리는 죽음을 앞두고 태어난 곳으로 한없이 걸어간다지?
죽기 전에도, 죽어서도 되돌아가지 못하는 육신의 아쉬움이 기억으로 달래고 있을 터이지.
귀소본능!
술에 취해 정신이 없다 하더라도 반드시 집으로 기어드는 귀소본능.
장터에서 유일한 극장, 그 극장 앞 삼남당 약방의 옆, 접대부가 있는 주점, 의성옥에서 가창과 장구 소리가 넘치는 창문 아래서 헌이와 승학이 하고 정신없이 딱지놀이를 하고 있는데, 칠닥이를 누군가 뒤에서 어깨를 툭툭 친다.
아버지 오 부자이었다.
칠닥이는 아버지의 자전거 타고, 실려 간 곳이 십자 거리의 31번 중국집이었다.
양쪽으로 밀어서 열리는 고급스러운 문에는 주렁주렁 대나무 발이 걸려 있고 두꺼운 주홍색 옷칠한 탁자에는 벌써 형 개동이가 와서는 기다리고 있었다.
비릿한 냄새. 온통 붉은 천과 금박 장식들, 길고 묵직한 대나무 젓가락, 벽에 걸린 장개석 총통, 한국말로 주문받고 주방에 대고 소리치는 중국말.
"여~ 와라바시 갖다주소!"
중국에서는 젓가락을 와라바시라 하는 모양이다.
오 부자는 자신의 몫은 시키지 아니하시고 두 형제가 입에 시커멓게 장 칠을 하면서 꾸역꾸역 집어삼키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본다.
개동이는 와라바시 싼 포장지를 쪼개서는 넓게 펼치고는 그걸로 입을 닦는다.
"다 먹었으면, 요걸로 요래 접어서 입을 닦으면 되는 기라!"
형은 이미 짜장면을 먹었던 여러 번 경험이 있었다는 듯이 으쓱대면서 칠닥에게 이르는 것이다.
오 부자는 두 아들에게 짜장면을 먹여 주며 그윽한 행복감에 젖는 것이다.
장터에는 중국집이 두 집 있었다.
전화번호가 31번인, 십자 거리의 31번 집. 태춘당약국 앞의 36번 집. 그 중국인 주인을 때때로 중앙시장에 바구니 들고 장 보는 걸 목격되고는 하는데, 어찌나 뚱뚱한가, 칠닥이는 늘 무서워서 가까이 가지 않고 피해 다니고는 하였다.
한 번은 그 뚱보가 영신라사 골목에서 마주쳐서는 불룩 나온 큰 배로 칠닥이를 벽으로 밀어붙여서는 잔뜩 겁을 주고 나서는 쓱쓱 머리를 쓰다듬고는 씨익 웃어 주고는 뒤뚱거리며 사라지던 기억이 차갑게 누워있는 칠닥에게로 되 살아난다.
아마, 살살 피해 다니는 어린이에게 딴에는 장난치고 싶었던 모양이다.
기억의 여행에서 지친 칠닥이는 싸늘한 냉동고에서 잠을 청한다.
한잠, 자자!
죽음 속의 잠이라....
잠 속에서 희미하게 꿈같은 미소가 서려 있다.
“누구지?”
덕기였다.
제덕기!
칠닥이의 기억에서 여태 빠진 이가 제덕기였다.
2004년 겨울은 유난히 눈이 많았던 한 해였다.
눈 많은 변산은 특히 더 했는데 칠닥이는 그 설국雪國의 땅에서 생활을 마감하고자 잠시 떠나 전국을 여행하는 중이다.
전주에서 대구로 대구에서 안동으로, 안동에서 기차로 서울로 향하면서 영주를 지나 물탱크가 아직도 우뚝한 고향 읍내 기차역을 거쳐서 한층 현대화된 무궁화 열차가 소백산을 가파르게 오르는 중에 산 아래 작은 마을 창락, 기억도 아스라한 그 동네가 눈 발치 저 아래쪽에 비취고 있는 것이다.
“덕기놈, 뭐 하고 있을까?”
언젠가 상수로부터 전 해 듣기로는 지 녀석도 차라리 칠닥이처럼 농사나 짓고 살았으면 좋겠다고 했단다.
“농사나? 짜슥아, 농사는 아무나 짓는 줄 아나? 내 꿈이 그건데 그 꿈마저 접자꼬 사방을 돌며 살 곳을 찾아 이렇게 헤매고 있는 거 아이라. 니는 참, 복이 많은 놈인 줄 알았는데.... 아버지 덕에 과수원집 외동아들로, 대학까지 졸업하고 학교 선생도 되고, 결혼도 일찌가이 해서는, 그 복이 적다꼬 너 아부지 과수원 팔아서 관광주유소 차리고, 그 주유소가 주유소를 벌어서 또 하나의 주유소를 사들이고 했다 카두마이, 어째서 망해도, 쫄짝 망해서는 원주서 계란 장사하면서 숨어 산다는 소리가 다 아 들리노 어이?“
창락, 그 과수원 자리에 빛바랜 주유소 건물을 칠닥이는 산맥을 오르는 기차의 차창으로 내려다보면서 찔끔 눈물이 솟았다.
덕기 아버지, 제장로는 오 부자와 함께 포목상을 하던 계원係員이었다.
일찍이 사과 농사에 눈을 뜬 제장로는 희방사 계곡이 가까운 창락에다 점포를 정리하고 과수원을 일궜다. 대구지방에 사과 과목이 노송老松이되기 시작하는 시기부터는 이곳 소백산 자락에 사과 농사를 시작한 이들은 전국적으로 부족한 소비량을 공급하면서 모두 부富를 쌓기 시작하였다. 오 부자가 몰락하는 과정에는 제장로는 부와 함께 기독교계에서도 덕망을 쌓아 크게 성공을 거두는 과정이 되었다. 그랬던 제장로가 아들 덕기가 사업에 실패하여, 야반도주하고 주인이 바뀐 주유소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엉거주춤 지내면서 자신이 세우다시피 한 교회에 갈 차비조차도 없어 노부부가 먼 길을 걸어서 다니는 형편이라는 걸 전해 듣기도 한 칠닥이다.
“세상에서 숨쉬기 시작한 오십 년이 결코, 짧지 않구나!”
이제 시작인 칠닥이의 회상이 얼마나 이어질지, 죽어서도 바쁜 일상이 장례식 삼 일 동안 계속될 것이다.
이어지고 있는 인생이나, 이미 끝난 인생이나 밀가루 분점分點 보다도 더 작은 생명 하나가 사그라지는 과정에 모두 출연하여 함께 같이 춤을 추는 것이다.
죽음은 축제이다.
만화영화 <인어공주>에서 연출한 화려한 색상과 같이.....
영화감독 임권택은 장례식 과정을 영화로 만들고는 제목을 “축제”라 붙였다.
오 부자는 빚에 시달리는 예천상회를 정리하고 빨간 양철지붕의 마당 넓은 집으로 내려앉았다.
그는 오랜 장사치 생활에 지겨움을 느끼게 되었고 이미 장사도 한창때 같지는 않아 부채도 늘어났다. 제장로도 포목 장사를 하다가는 창락으로 과수원을 일궈서 들어앉을 걸 보고는 자신도 그저 조용히 농사나 짓고 살고 싶어졌다. 그러나 수입이 변변치 않은 논농사나 밭농사를 지으면서 집안의 씀씀이는 현찰을 만지는 장사할 때나 마찬가지로 쓰다 보니 예천상회를 팔아서 생긴 돈이 가문 마른논에 물 마르듯 했다. 가게를 팔아서 생긴 현금 구십만 원이 얼마 안 가 사라지고 말았다.
“가게를 너무 싼 값에 처분했던 거 아이껴?”
사 남매였던 칠닥이 형제는 양철지붕으로 와서는 칠 남매로 늘어났고 식구가 늘어나는 만큼 집안의 가세는 급격히 나락으로 떨어지고만 있었다.
“지 아부지 나이가 사십만 되어도... 사십 만...”
봉순이는 빠르게 늙어가는 오 부자를 보면서 한숨을 토하기 시작한다.
1부 3편 끝. 9쪽, 135매.
구 10쪽 144매.
(현대사 : 박정희와 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