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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獄中衆生救出布施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見有衆生이 處在牢獄黑闇之處하야 杻械枷鎖로 檢繫其身하야 起坐不安하고 衆苦競集호대 無有親識하며 無歸無救하야 裸露飢羸에 酸劇難忍하고 菩薩이 見已에 捨其所有一切財寶와 妻子眷屬과 及以自身하야 於牢獄中에 救彼衆生을 如大悲菩薩과 妙眼王菩薩하고 旣救度已하야는 隨其所須하야 普皆給施하야 除其苦患하야 令得安隱然後에 施以無上法寶하야 令捨放逸하고 安住善根하야 於佛敎中에 心無退轉이니라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於牢獄中에 救衆生時에 以諸善根으로 如是廻向하나니 所謂願一切衆生이 究竟解脫貪愛纏縛하며 願一切衆生이 斷生死流하고 昇智慧岸하며 願一切衆生이 除滅愚癡하고 生長智慧하야 解脫一切煩惱纏縛하며 願一切衆生이 滅三界縛하고 得一切智하야 究竟出離하며 願一切衆生이 永斷一切煩惱結縛하고 到無煩惱無障碍地智慧彼岸하며 願一切衆生이 離諸動念思惟分別하고 入於平等不動智地하며 願一切衆生이 脫諸欲縛하야 永離世間一切貪欲하고 於三界中에 無所染着하며 願一切衆生이 得勝志樂하야 常蒙諸佛이 爲說法門하며 願一切衆生이 得無着無縛解脫心하야 廣大如法界하고 究竟如虛空하며 願一切衆生이 得菩薩神通하야 一切世界에 調伏衆生하야 令離世間하고 住於大乘이니라 是爲菩薩摩訶薩의 救度牢獄苦衆生時에 善根廻向이니 爲令衆生으로 普入如來智慧地故니라
"불자들이여, 보살마하살이 만일 어떤 중생이 캄캄한 옥(獄) 가운데 있어서 쇠고랑과 수갑과 칼과 쇠사슬로 몸을 구속하여 앉고 일어나기에 불편이 막심하고 고통이 그지없는데, 친지도 없고 의지할 데도 없고 구해줄 이도 없으며 헐벗고 굶주리고 고초를 참지 못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보살이 보고 나서는 모든 가졌던 재물과 처자와 권속과 자기의 몸까지 버리어 옥중에 들어가 그 중생을 구호하되, 마치 대비(大悲)보살과 묘안왕(妙眼王)보살처럼 하며, 이미 구호해 주고는 그가 요구하는 대로 베풀어 주어 고통과 환란을 없애고 편안함을 얻게 하느니라.
그런 후에는 법보(法寶)를 보시하여 그로 하여금 방일을 떠나고 선근에 머무르며 불법(佛法) 가운데서 퇴전하지 않게 하느니라. 불자들이여, 보살마하살이 옥중에서 중생을 구출할 때에 모든 선근으로 이렇게 회향하느니라.
이른바 ‘원컨대 일체중생이 탐욕의 속박에서 끝가지 해탈하여지이다.’라고 하느니라.
‘원컨대 일체중생이 생사의 흐름을 끊고 지혜의 언덕에 올라지이다.’라고 하느니라.
‘원컨대 일체중생이 어리석음을 멸하고 지혜를 생각하게 하여 모든 번뇌의 속박에서 해탈하여지이다.’라고 하느니라.
‘원컨대 일체중생이 삼계의 속박을 멸하고 온갖 지혜를 얻어 끝까지 벗어나지이다.’라고 하느니라.
‘원컨대 일체중생이 모든 번뇌의 결박을 끊고 번뇌도 없고 장애도 없는 지혜의 저 언덕에 이르러지이다.’라고 하느니라.
‘원컨대 일체중생이 여러 가지 흔들리는 마음과 생각하고 분별함을 여의고, 평등하고 동요하지 않는 지혜에 들어가지이다.’라고 하느니라.
‘원컨대 일체중생이 욕심의 속박을 벗고 세간의 모든 탐욕에서 벗어나 삼계(三界)에 물들지 말아지이다.’라고 하느니라.
‘원컨대 일체중생이 좋은 뜻을 얻어 부처님들의 말씀하는 법문을 받들어지이다.’라고 하느니라.
‘원컨대 일체중생이 집착도 없고 속박도 없는 해탈의 마음을 얻어 법계와 같이 광대하고 허공과 같이 구경(究竟)하여지이다.’라고 하느니라.
‘원컨대 일체중생이 보살의 신통을 얻고 모든 세계에서 중생들을 조복하여 세간을 떠나서 대승(大乘)에 머물게 하여지이다’라고 하느니라.
이것이 보살마하살이 옥중에서 고통 받는 중생을 구원할 때에 선근으로 회향하는 것이니, 중생들로 하여금 여래의 지위에 들게 하려는 연고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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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중중생구출보시(獄中衆生救出布施): 옥중에서 중생을 구출하는 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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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수록 어려운 보시가 나온다. 보관을 보시한다든지 상투 위의 값진 보석을 보시한다든지 하는 것은 아직 내 몸이 아닌 바깥 것을 보시하는 것이다. 여기는 그런 상황과 또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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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불자야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보살 마하살이
견유중생(見有衆生)이: 어떤 중생이
처재뇌옥흑암지처(處在牢獄黑闇之處)하야 : 뇌옥 감옥소 아주 캄캄한 그런 곳에 처해 있어서
추계가쇄(杻械枷鎖)로: 손목에 채우는 쇠고랑이나 발목에 채우는 것 목에 세우는 칼 이런 추계가쇄로
검계기신(檢繫其身)하야: 그 몸을 검속하고 묶어서, 보문품에도 나오는 말들이다.
기좌불안(起坐不安)하고 : 앉을래야 앉을 수가 없고 누울래야 누울 수가 없으며 불편하기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옛날에 역적에 준하는 큰 죄인에게 씌우는 칼들을 썼을 때 기좌가 불안하고
중고경집(衆苦競集)호대: 여러가지 고통이 다투어서 모인다. 고통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목도 불편하고 다리도 불편하고 팔도 불편하고 앉을 수도 없고 설 수도 없는 여러 고통이 다투어서 모이되
무유친식(無有親識)하며: 친히 아는 사람이 없다. 왕이나 장관 같은 사람을 평소에 잘 알았으면 이런 고통을 피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것도 없다. 그리고
무귀무구(無歸無救)하야: 어디 돌아갈 때도 없고 누가 구제해 주는 사람도 없어서
나로기리(裸露飢羸)에: 온 몸이 헐벗고 다 찢어져서 드러나고, 주리고 그 헐벗음에
산극난인(酸劇難忍)하고: 지극한 고초가 참기 어려운 것을 보고 저 위에 견(見)자를 여기 새긴다. 그러한 것들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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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菩薩)이: 보살이
견이(見已)에: 보고 나서는, 그러한 상황을 당하는 사람을 보살이 보고 나서는
사기소유일체재보(捨其所有一切財寶)와 : 일체 재보와 그리고
처자권속(妻子眷屬)과: 처자 권속과
급이자신(及以自身)하야 : 자기자신까지도 다 버려서
어뇌옥중(於牢獄中)에: 뇌옥 중에 있는
구피중생(救彼衆生)을 : 저 중생을 구제한다. 출처가 분명히 밝혀진 것은 아닌데 이런 형식의 보살들을 여러 명 소개한다.
여대비보살(如大悲菩薩)과 : 대비보살과
묘안왕보살(妙眼王菩薩)하고: 묘안왕보살과 같이 하고. 아마 과거에 대비보살이라고 하는 보살, 그리고 묘안왕보살이라고 하는 보살들이 죄받는 중생들을 대신해서 이런 고초를 받은 경우가 있었던 걸로 보여진다.
기구도이(旣救度已)하야는: 이미 그들처럼 그 죄인을 구제하고 제도하고 나서는
수기소수(隨其所須)하야 : 다시 그가 필요한 것을 따라서
보개급시(普皆給施)하야: 필요한 모든 것들을 베풀어 준다. 뭐가 필요하겠는가? 음식이 필요하고 마실 것이 필요하고 옷이 필요하고 잠자리가 필요하고 약도 필요할 것이다. 의식주 문제 그리고 치료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전부 베풀어 주어서
제기고환(除其苦患)하야: 그 고통과 환란을 제해 주어서
영득안은연후(令得安隱然後)에: 편안하게 한 연후에
시이무상법보(施以無上法寶)하야 : 무상법보로써 보시한다. 여기에 내가 별을 세 개 쳐놓았다. 내가 자주 하는 이야기다. 요즘 우리 불교인들이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을 많이 하는데 참 좋은 일이다. 그런데 도와 준 것보다 천 배 만 배 우수한 불법을 보시해야 할 텐데 그것은 그만 놓쳐버리고 만다. 여기는 이렇게 무상법보를 보시한다고 해놓았다. 그러한 보시로써 고통과 환란을 전부 제해 주고 그 사람을 편안하게 한 연후에 무상법보로써 보시해서
영사방일(令捨放逸)하고: 그로 하여금 방일을 버리게 하고 열심히 공부하게 한다. 수행하게 한다는 말이다.
안주선근(安住善根)하야 : 선근에 안주해서
어불교중(於佛敎中)에: 불교 가운데서
심무퇴전(心無退轉)이니라: 마음에 퇴전함이 없게 할지니라. ‘영득안은연후(令得安隱然後)에 시이무상법보(施以無上法寶)하야 영사방일(令捨放逸)하고 안주선근(安住善根)하야 어불교중(於佛敎中)에 심무퇴전(心無退轉)이니라’여기에 밑줄을 긋기 바란다. 아주 중요한 내용이다.
늘 이야기 하는 부분이다. 근래에 불자들이 종단도 마찬가지로 급식운동을 많이 하고 우물도 파주고 아프리카에 가서 학교를 지어준다든지 생명운동을 해서 어려운 환자에게 수술비를 대주고 의료수술을 하게 해주는 등 좋은 일을 많이 한다.
그런 일들을 한다고 소문난 사람들도 있고 소문이 안난 사람도 많다.
그것은 그 자체로써 아주 훌륭한 보살행이고 불교가 해야 할 일들이다. 그런데 여기 이야기 했듯이 사람들을 구제하는 일들을 하고 나서는 반드시 무상법보로써, 부처님의 위대한 가르침으로써 그들을 깨우치게 하고, 불교 중에 심무퇴전하게 해줘야 한다. 불교가운데서 마음에 퇴전함이 없게 해야 된다.
우리 부처님은 어디 가서 밥 한 그릇 보시한 적이 없는데 저토록 오랜 세월 인류의 존경을 받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무상법보로써 우리들을 깨우쳐 주었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진리의 가르침으로써 우리를 깨우쳐준 것이다.
거기에 더해 의식주 문제를 해결해 주고 의료문제나 교육문제를 해결해 주고 우물도 파주고 하면 더 좋고 금상첨화다.
지난 번에도 내가 소개 했지만 급식운동을 하면서 작은 명함 봉지를 만들어서 명함에 부처님 말씀을 한 두 구절 쓰고 커피도 한 개 넣고 초콜렛도 하나 넣어서 식사를 하고 돌아갈 때 주는 것이다. 그러면 가서 커피도 타먹을 수도 있고 명함에 있는 부처님 말씀 두어 마디도 읽어볼 수가 있다.
부처님 말씀이 적힌 명함을 함부로 버릴 수도 없을 것이고 버리더라도 그것은 그 사람 의 몫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렇게라도 부처님 법을 전하는 일이다.
그런 이야기를 지난 번에도 했는데 참고해서 우리가 다 그렇게 해야 된다.
불자들이 하는 모든 일들은 불법을 전하자고 하는 일이다. 급식 활동이 참 좋은 일이지만 거기에 더해서 부처님 법까지 전하면 정말 바람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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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어뇌옥중(於牢獄中)에: 감옥 속에 있는
구중생시(救衆生時)에: 중생들을 구제할 때에
이제선근(以諸善根)으로: 모든 선근으로써
여시회향(如是廻向)하나니: 이와 같이 회향하나니, 감옥속에 있는 중생들을 구제할 때에
소위원일체중생(所謂願一切衆生)이 : 소위 원 일체중생이
구경해탈탐애전박(究竟解脫貪愛纏縛)하며 : 구경에 탐애전박을 해탈하게 하기를 원한다.
탐애전박, 그야말로 탐욕과 애욕이 우리를 속박하고 얽어 묶고 꼼짝 못하게 한다. 그것을 해탈하게 해서
원일체중생(願一切衆生)이: 일체중생이
단생사류(斷生死流)하고 : 생사의 흐름을 끊고
승지혜안(昇智慧岸)하며: 지혜의 저 언덕에 오르기를 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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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일체중생(願一切衆生)이: 일체중생이
제멸우치(除滅愚癡)하고: 우치를 제멸해서, 탐욕 다음에 생사의 흐름을 끊는 것, 그 다음에는 어리석음을 제멸하는 것 그래서
생장지혜(生長智慧)하야 : 지혜를 생장시켜서
해탈일체번뇌전박(解脫一切煩惱纏縛)하며: 일체 번뇌의 전박 해탈하기를 원하며
원일체중생(願一切衆生)이: 일체중생이
멸삼계박(滅三界縛)하고: 삼계의 속박을 멸하고
득일체지(得一切智)하야: 일체지를 얻어서
구경출리(究竟出離)하며 : 구경에 출리하기를 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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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일체중생(願一切衆生)이: 일체중생이
영단일체번뇌결박(永斷一切煩惱結縛)하고: 번뇌의 결박을 영원히 끊어버리고
도무번뇌무장애지지혜피안(到無煩惱無障碍地智慧彼岸)하며 : 번뇌가 없고 장애가 없는 지위 그리고 지혜의 피안에 이르기를 원하며
원일체중생(願一切衆生)이: 일체중생이
이제동념사유분별(離諸動念思惟分別)하고: 모든 생각이 많이 움직이는 것과 사유하는 분별을 떠나고
입어평등부동지지(入於平等不動智地)하며: 부동지지에 들어가기를 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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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일체중생(願一切衆生)이: 일체중생이
탈제욕박(脫諸欲縛)하야: 욕심의 속박을 다 벗어나서
영리세간일체탐욕(永離世間一切貪欲)하고: 일체 세간의 일체 탐욕을 영원히 떠나고
어삼계중(於三界中)에: 삼계 가운데서
무소염착(無所染着)하며 : 염착하는 바가 없기를 원한다. 예불을 할 때 귀의불 양족존(歸依佛 兩足尊) 귀의법 이욕존(歸依法 離欲尊) 이라고 한다. 팔만사천 법문 가운에 왜 하필이면 ‘이욕’이라고 한마디만 대표로 들었을까? 물론 짧게 이야기 하려면 뭔가 한 마디 밖에 말할 수 없겠지만 이욕은 욕심을 떠나는 것이다. 귀의법이욕존. 팔만사천 법문은 이욕으로써 대표한다. 욕심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고 욕심 때문에 투쟁이 일어나고 욕심 때문에 모든 문제가 일어난다. 세상이 어지러운 것은 다 욕심 때문이다.
그래서 옛날에 고승들이 예불문을 만들면서 귀의법이욕존이라고 했다. 팔만사천 법문 중에 무슨 한마디로써 대표가 될 수 있을까 얼마나 고민했겠는가? 그런데 그것을 이욕이라는 두 글자로써 표현했다. 욕심을 떠나는 것이 법이다.
다음으로는 귀의승 중중존(歸依僧 衆中尊)이 나오는데 왜 중중존이냐? 투쟁을 화합하고 화목해서 조화를 이루는 단체이기 때문에 중중존이다.
원일체중생(願一切衆生)이: 일체 중생이
득승지락(得勝志樂)하야: 수승한 뜻의 즐거움을 얻어서
상몽제불(常蒙諸佛)이: 항상 모든 부처님을 위하여
위설법문(爲說法門)하며: 법문 받기를 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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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일체중생(願一切衆生)이: 일체중생이
득무착무박해탈심(得無着無縛解脫心)하야 : 무착 무박 해탈심을 얻어서 집착도 없고 속박도 없는 해탈의 마음을 얻어서
광대여법계(廣大如法界)하고: 광대하기가 법계와 같고
구경여허공(究竟如虛空)하며: 구경에 허공과 같기를 원하며
원일체중생(願一切衆生)이 : 일체중생이
득보살신통(得菩薩神通)하야: 보살신통을 얻어서
일체세계(一切世界)에: 일체세계에서
조복중생(調伏衆生)하야: 중생을 조복해서
영리세간(令離世間)하고: 세간을 떠나게 하고
주어대승(住於大乘)이니라: 대승에 머물기를 원할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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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보살마하살(是爲菩薩摩訶薩)의 : 이것이 보살마하살의
구도뇌옥고중생시(救度牢獄苦衆生時)에: 감옥에서 고통받는 중생을 구제할 때 하는
선근회향(善根廻向)이니: 선근 회향이니라.
위령중생(爲令衆生)으로: 그것은 중생으로 하여금
보입여래지혜지고(普入如來智慧地故)니라 : 여래 지혜의 땅에 널리 들어가게 하기 위한 까닭이니라. 이렇게 아주 간단하게 그 까닭을 소개했다.
(30) 捨身代命布施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見有獄囚가 五處被縛하야 受諸苦毒하며 防衛驅逼하야 將之死地하야 欲斷其命에 捨閻浮提一切樂具와 親戚朋友하야 悉將永訣하고 置高碪上하야 以刀屠割하며 或用木槍하야 竪貫其體하며 衣纏油沃하야 以火焚燒하는 如是等苦가 種種逼迫하고 菩薩이 見已에 自捨其身하야 而代受之를 如阿逸多菩薩과 殊勝行王菩薩과 及餘無量諸大菩薩이 爲衆生故로 自捨身命하야 受諸苦毒이니 菩薩이 爾時에 語主者言호대 我願捨身하야 以代彼命호리니 如此等苦를 可以與我호대 如治彼人하야 隨意皆作하라 設過彼苦를 阿僧祇倍라도 我亦當受하야 令其解脫이니 我若見彼의 將被殺害하고 不捨身命하야 救贖其苦면 則不名爲住菩薩心이니 何以故오 我爲救護一切衆生하야 發一切智菩提心故라하나니라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自捨身命하야 救衆生時에 以諸善根으로 如是廻向하나니 所謂願一切衆生이 得無斷盡究竟身命하야 永離一切災橫逼惱하며 願一切衆生이 依諸佛住하야 受一切智하야 具足十力菩提記莂하며 願一切衆生이 普救含識하야 令無怖畏하야 永出惡道하며 願一切衆生이 得一切命하야 入於不死智慧境界하며 願一切衆生이 永離怨敵하고 無諸厄難하야 常爲諸佛善友의 所攝하며 願一切衆生이 捨離一切刀劍兵仗諸惡苦具하고 修行種種淸淨善業하며 願一切衆生이 離諸怖畏하고 菩提樹下에 摧伏魔軍하며 願一切衆生이 離大衆怖하고 於無上法에 心淨無畏하야 能爲最上大師子吼하며 願一切衆生이 得無障碍師子智慧하야 於諸世間에 修行正業하며 願一切衆生이 到無畏處하야 常念救護諸苦衆生이니라 是爲菩薩摩訶薩의 自捨身命하야 救彼臨刑諸獄囚時에 善根廻向이니 爲令衆生으로 離生死苦하고 得於如來上妙樂故니라
"불자들이여, 보살마하살이 옥에 갇힌 어떤 죄수가 다섯 군데[五體] 결박을 지고 고통을 받다가 옥졸에게 끌리어 사형장에 나아가 목숨을 끊으려 할 적에, 남섬부주의 모든 즐거움을 버리며, 친척과 동무들과 모두 영원히 이별하고, 형틀 위에 놓여 칼로 자르며, 창으로 그 몸을 찌르며, 옷으로 싸고 기름을 부어 불로 태우나니, 이와 같은 갖가지 고통이 핍박함을 보느니라.
보살이 보고 나서 스스로 몸을 버려서 대신 사형을 받으려 하기를 마치 아일다(阿逸多)보살과 수승행왕(殊勝行王)보살과 그 외에 한량없는 다른 큰 보살들이 중생을 위하여 스스로 목숨을 버리고 고통을 대신 받듯이 하느니라.
보살이 그때에 옥주(獄主)에게 말하기를 '내가 몸을 버려서 저 사람의 목숨을 대신하려 하니, 저러한 고초를 나에게 주며 저 사람에게 처벌할 것을 나에게 하라. 설사 저 사람이 받을 고통보다 아승지 곱이 더 심하더라도 내가 또한 당연히 받고 저로 하여금 죄에서 벗어나게 하리라. 내가 만일 저 사람이 사형 받을 것을 보고도 생명을 버려서 대신 받지 않으면, 보살의 마음에 머문 이라고 할 수 없느니라. 왜냐하면 나는 일체중생을 구호하기 위하여 온갖 지혜에 나아갈 보리심을 발한 연고이니라' 라고 하느니라.
불자들이여, 보살마하살이 스스로 자기의 생명을 버려서 중생을 구호할 때에 이런 선근으로 이와 같이 회향하느니라.
이른바 ‘원컨대 일체중생이 끊어지지 않고 끝까지 이르는 생명을 얻어 일체 횡액과 핍박을 길이 여의어지이다.’라고 하느니라.
‘원컨대 일체중생이 부처님을 의지하여 있으면서 온갖 지혜를 받고 십력과 보리의 수기(授記)를 구족하여지이다.’라고 하느니라.
‘원컨대 일체중생이 중생들을 두루 구호하여 공포심이 없고 나쁜 갈래에서 영원히 벗어나게 하여지이다.’라고 하느니라.
‘원컨대 일체중생이 모든 생명을 얻고 죽지 않는 지혜의 경계에 들어가지이다.’라고 하느니라.
‘원컨대 일체중생이 원수와 대적을 아주 여의고 액난이 없어 부처님과 선지식의 거두어 주심을 받아지이다.’라고 하느니라.
‘원컨대 일체중생이 모든 칼과 창과 병장기와 고통거리를 여의고 갖가지 청정한 선업(善業)을 닦아지이다.’라고 하느니라.
‘원컨대 일체중생이 모든 공포를 떠나고 보리수 아래서 마군을 항복받아지이다.’라고 하느니라.
‘원컨대 일체중생이 대중을 두려워하는 공포를 여의고 위없는 법에 두려움이 없는 청정한 마음으로 가장 높은 큰 사자후를 하게 하여지이다.’라고 하느니라.
‘원컨대 일체중생이 장애 없는 사자의 지혜를 얻고 모든 세간에서 바른 업(業)을 수행하여지이다.’라고 하느니라.
‘원컨대 일체중생이 두려움 없는 경지에 이르러 모든 고통받는 중생을 구호하기를 항상 염원하여지이다.’라고 하느니라.
이것이 보살마하살이 자기의 생명을 버려서 사형장에 다다른 모든 죄수를 구호할 때에 선근으로 회향하는 것이니라. 중생들로 하여금 생사의 고통을 여의고 여래의 가장 묘한 낙(樂)을 얻게 하려는 연고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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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대명보시(捨身代命布施): 몸을 버려서 죽음을 대신하는 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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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옥중에 있는 중생의 고통을 대신 받고,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버려서 어떻게 하더라도 그들을 구출해내는 것에 대한 내용이 나왔다. 여기는 몸을 버려서 생명을 대신하는 보시다. 한 걸음 더 나아간 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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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 보살마하살이
견유옥수(見有獄囚)가 : 감옥에 갇히 죄수가, 옥수는 감옥에 갇힌 죄수를 말한다.
오처피박(五處被縛)하야: 오체가 속박함을 입어서, 오처는 오체와 같다.
수제고독( 受諸苦毒)하며: 여러 가지 심한 고통을 받으며
방위구핍(防衛驅逼)하야 : 옥정에게 끌려서 형장에 나아간다. 구핍은 옥정에게 끌려서 억지로 방위를 받는다는 말이다. 옥정에게 끌려서 형장에 나아가서
장지사지(將之死地)하야 : 죽는 데까지 이르러서. 앞으로 사지에 이른다는 말은 죽게 된다는 말이다.
욕단기명(欲斷其命)에 : 그 생명을 그 목숨을 끊고자 함에
사염부제일체락구(捨閻浮提一切樂具)와 : 염부제에 있는 모든 즐길거리를 다 버리고
친척붕우(親戚朋友)하야 : 친척과 벗과
실장영결(悉將永訣)하고 : 다 영원히 이별하고, 죽게 되면 그 사람들과는 영원히 이별이다.
치고침상(置高碪上)하야 : 높은 다듬이돌 위에 놓여져서, 섬돌 침(碪), 고침상, 높은 다듬이돌 위에 놓아서 형을 집행하는 상황이다.
이도도할(以刀屠割)하며: 칼로써 자르게 까지 되었으며, 그렇게 할 때 칼로 베기도 하지만
혹용목창(或用木槍)하야 : 혹은 목창으로써 찔러서 죽이기도 하고
수관기체(竪貫其體)하며: 그 몸을 세로로 꿰뚫기도 하며
의전유옥(衣纏油沃)하야: 천을 둘둘 감아서 기름을 부어 화장을 시킨다. 연비할 때도 손가락에 기름을 묻힌 천을 감아서 불태우듯이 한다. 여기는 온몸에 기름 묻힌 천으로 둘둘 감아서
이화분소(以火焚燒)하는 : 불로써 태우게 하는
여시등고(如是等苦)가 : 이와 같은 등등의 고통이
종종핍박(種種逼迫)하고 : 가지가지로 핍박하는 것을 보고서. 저 위에 견(見)자를 여기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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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菩薩)이 : 보살이
견이(見已)에 : 그러한 상황을 보고 나서는
자사기신(自捨其身)하야: 스스로 자기 몸을 버려서
이대수지(而代受之)를 : 내가 대신 받겠다, 저사람 풀어 주라고 하는 것이다.
경전에 소개를 했는데 실제로
여아일다보살(如阿逸多菩薩)과: 아일다 보살
수승행왕보살(殊勝行王菩薩)과 : 수승행왕보살
급여무량제대보살(及餘無量諸大菩薩)이: 그리고 그 나머지 한량없는 모든 대보살들이
위중생고(爲衆生故)로: 중생을 위한 까닭에
자사신명(自捨身命)하야 : 스스로 자기의 신명을 버려서
수제고독(受諸苦毒)이니 : 여러가지 고통과 독한 어려움을 다 받음과 같이 할지니. 그런 아일다 보살 수승행왕보살 그리고 나머지 한량없는 모든 보살이 중생을 대신해서 몸을 버려서 하는 것과 같이 할지니, 위에 여(如)자가 나왔다.
보살(菩薩)이 : 보살이
이시(爾時)에 : 그 때에
어주자언(語主者言)호대 : 주관하는 사람, 형 집행을 담당하는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다.
아원사신(我願捨身)하야: 내가 이 몸 버리기를 원한다. 그래서
이대피명(以代彼命)호리니: 저 사람의 목숨을 대신하고자 한다. 그렇게 고하는 것이다. 저 사람의 고통을 대신하고 목숨도 대신하고자 하니
여차등고(如此等苦)를 : 이와 같은 여러 가지 고통들을
가이여아(可以與我)호대 : 전부 나에게 주어라. 저 사람에게 고문하고 때리고 핍박하고 심지어 목숨까지 빼앗는 그런 것을 나에게 다 주되
여치피인(如治彼人)하야 : 저 사람을 다스리는 것과 똑같이 해서
수의개작(隨意皆作)하라 : 마음대로 때리려면 때리고 죽이려면 죽이고 불로 태우려면 태우고 목창으로 위에서부터 아래로 찌르려면 찌르고 알아서 하라. 수의개작하라.
이런 말을 우리가 만나는 것만 해도 큰 선근이다.
‘아 세상에 이런 보살이 있었는가.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이러한 이야기가 경전에 있단 말인가’ 이렇게 감동하고 넘어가는 것만 해도 큰 선근이다.
그런데 그 내용은 섬찟한 일이고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싶다. 그럴 수 있는 이야기만 하면 경전이 아니다. 특히 대승경전은 그렇다. 그럴 수 없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경전이다. 다른 아함부 경전이나 소승경전 초기경전들은 전부 그럴 수 있는 내용들 상식적인 내용들만 이야기 해놓았다. 그런데 대승경전은 그럴 수 없는 이야기가 수두룩하다. 거의가 다 그렇다. 거기에서 우리가 감동을 받고 조금이라도 심성이 달라지는 것이다. 심성이 달라지라고 하는 의도도 있지만, 실제로 그런 사실들도 있었다. 당시 화엄경을 편찬하는 분들은 그런 상황을 다 들어서 알고 있고 보아서 알고 있었다는 믿음을 가지고 우리가 경을 대해야 한다. 그것이 신심이다.
주관하는 사람에게 말하기를 “내가 나의 몸을 버려서 저 사람의 목숨을 대신하고자 원하노니 이와 같은 고통을 가히 나에게 주어라. 저 사람을 다스리듯이 해서 수의개작하라 마음대로 다 지어라. 팔을 자르던지 다리를 자르던지 목을 베든지 어떤 방법이든 하고 싶은 대로 다하라”고 한다. 또
설과피고(設過彼苦)를 : 설사 저러한 고통 보다 지나가기를
아승지배(阿僧祇倍)라도 : 아승지 보다도 아승지의 배를 지나가는 고통을 나에게 준다 하더라도
아역당수(我亦當受)하야 : 나는 또한 마땅히 다 그것을 받아서
영기해탈(令其解脫)이니 : 그 사람으로 하여금 내가 해탈하게 하겠다. 그 중생을 내가 그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고 싶다. 이런 말을 우리가 듣기만 해도 감동이다.
아약견피(我若見彼)의: 내가 만약 저 사람의
장피살해(將被殺害)하고 : 장차 살해 입는 것을 보고
불사신명(不捨身命)하야 : 내 몸과 목숨을 버리지 아니해서
구속기고(救贖其苦)면 : 그 고통을 내가 구제하거나 대신 받지 않게 된다면
즉불명위주보살심(則不名爲住菩薩心)이니: 그것은 보살의 머문 마음이 아니다. 보살심이 아니며 그것은 보살이라고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하이고(何以故)오 : 무슨 까닭이냐
아위구호일체중생(我爲救護一切衆生)하야 : 나는 일체 중생을 구호해서
발일체지보리심고(發一切智菩提心故)라하나니라 : 일체 지혜의 보리심을 발하고자 하는 까닭이다. 진정한 보살의 마음은 이런 것이다. 이 대목이 참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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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자사신명(自捨身命)하야 : 스스로 자기 신명을 버려서
구중생시(救衆生時)에 : 일체 중생을 구호할 때에
이제선근(以諸善根)으로 : 모든 선근으로써
여시회향(如是廻向)하나니: 이와 같이 회향하나니
소위원일체중생(所謂願一切衆生)이: 소위 원 일체 중생이
득무단진구경신명(得無斷盡究竟身命)하야: 단진이 없는 최고의 신명을 얻어서, 구경가는 신명을 얻어서 구경이라는 말이 잘나오는데 여러 가지로 쓰인다.
영리일체재횡핍뇌(永離一切災橫逼惱)하며: 일체 재횡 핍뇌를 영원히 떠나기를 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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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일체중생(願一切衆生)이 : 일체 중생이
의제불주(依諸佛住)하야 : 모든 부처님의 머무는 데 의지해서
수일체지(受一切智)하야 : 일체 지혜를 받아서
구족십력보리기별(具足十力菩提記莂)하며: 십력보리기별 구족하기를 원하며, 십력보리 기별은 바로 불지(佛地)다. 부처의 지위다. 십력은 부처님이 가지고 있는 열 가지 힘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보리기별 구족하기를 원하며. 수기(受記)라는 말을 자주 쓰는데 수기 할 때의 기(記)자의 온전한 용어가 바로 기별이다.
초(艸) 두 밑에 이별할 별(別)자 이건 불교에서만 쓰는 별(莂)자다.
유교에서는 이 글자가 없어서 쓰지 않으며 나온 적도 없다. 기별은 불교에만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이 글자를 하나 만든 것이다. 그래서 기별이라는 낱말을 쓰는데 부처라고 하는 것을 보증하는 것이다. 앞으로 성불 할 것을 보증한다. 경전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만 이면에 깔려 있는 뜻을 드러내서 말하자면 ‘본래 부처다’ 라고 하는 사실을 기별보증하는 내용이다. 법화경에는 그런 이야기가 수두룩하게 나온다.
처음에는 한 사람 두 사람에게 수기를 주었다가 나중에는 5백명에게 한꺼번에 같은 이름으로 수기를 주고 이천 명도 같은 이름으로 수기를 준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똑같은 이름으로 무성의하게 주는 수기가 어디 있겠는가? 사실은 무성의하게 줘도 상관없는 것이 수기다. 모든 사람이 본래로 부처라고 하는 사실은 너무나도 평범한 사실이고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법화경을 잘 연구해 보면 그런 내용이 확연히 드러난다.
원일체중생(願一切衆生)이 : 일체중생을
보구함식(普救含識)하야 : 함식 널리 구제해서
영무포외(令無怖畏)하야 : 두려움이 없게 해서
영출악도(永出惡道)하며: 영원히 악도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며
원일체중생(願一切衆生)이 : 일체 중생이
득일체명(得一切命)하야 : 일체 명을 얻어서
입어불사지혜경계(入於不死智慧境界)하며: 불사 지혜의 경계에 들어가기를 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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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일체중생(願一切衆生)이 : 일체중생이
영리원적(永離怨敵)하고 : 영원히 원적을 떠나고
무제액난(無諸厄難)하야 : 모든 액난이 없어서
상위제불선우(常爲諸佛善友)의 : 항상 모든 부처님과 선우의
소섭(所攝)하며 : 섭수하는 바가 되기를 원한다. 제불선우의 소섭 얼마나 훌륭한 일인가. 제불선우의 섭수하는 바가 되기를 원하며
원일체중생(願一切衆生)이 : 일체중생이
사리일체도검병장제악고구(捨離一切刀劍兵仗諸惡苦具)하고 : 도니 검이니 병이니 장이니 하는 이런 아주 몹쓸 도구를 다 떠나 버리고
수행종종청정선업(修行種種淸淨善業)하며 : 종종 청정 선업 수행하기를 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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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일체중생(願一切衆生)이 : 일체 중생이
이제포외(離諸怖畏)하고 : 모든 두려움을 떠나고
보리수하(菩提樹下)에 : 보리수 하에서
최복마군(摧伏魔軍)하며 : 마군 항복받기를 원한다.
부처님의 생애를 그린 팔상도에 보면 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이 있다. 그것이 바로 부처님의 성도(成道)를 의미하는 것이다. 팔상도에는 성도했다는 말이 없고 나무 아래서 마구니의 항복을 받은 그림만 나온다. 마구니의 항복을 받으면 끝이다. 구름이 다 걷혔다면 이미 태양은 드러난 것이다. 여기 최복마군 하는 것은 성도했다는 뜻이다. 성도하기를 원하며
원일체중생(願一切衆生)이 : 일체중생이
이대중포(離大衆怖)하고 : 모든 큰 여러 가지의 두려움을 떠나고
어무상법(於無上法)에 : 마음이 청정해서
심정무외(心淨無畏)하야 : 두려움이 없어서
능위최상대사자후(能爲最上大師子吼)하며: 가장 높은 사자후 되기를 원한다. 부처님이 되기를 원한다. 표현을 여러 가지로 상세하게 해서 그렇지 궁극에 가서는 전부 부처님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일체중생이 부처님이 되기를 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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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일체중생(願一切衆生)이 : 일체중생이
득무장애사자지혜(得無障碍師子智慧)하야 : 장애없는 사자 지혜, 부처님 지혜를 얻어서
어제세간(於諸世間)에 : 모든 세간에
수행정업(修行正業)하며: 정업을 수행하기를 원하며
원일체중생(願一切衆生)이 : 일체중생이
도무외처(到無畏處)하야 : 두려움이 없는 곳에 이르러서
상념구호제고중생(常念救護諸苦衆生)이니라: 항상 모든 고통 받는 중생들을 구호하기를 원할지니라
시위보살마하살(是爲菩薩摩訶薩)의 : 이것이 보살마하살의
자사신명(自捨身命)하야: 스스로의 신명을 버려서
구피임형제옥수시(救彼臨刑諸獄囚時)에 : 저 형벌 받는 모든 감옥에 갇힌 중생들을 구제할 때
선근회향(善根廻向)이니 : 하는 선근회향이니
위령중생(爲令衆生)으로: 중생으로 하여금
이생사고(離生死苦)하고: 생사의 고통을 떠나고
득어여래상묘락고(得於如來上妙樂故)니라: 여래의 가장 미묘한 낙 얻기를 위한 까닭이니라. 요는 그렇다. 이런 것을 보시할 때 이러이러한 회향을 한다.
정행품에도 있었듯이 결국은 선용기심(善用其心)이다. 그 마음을 중생을 위해서 잘 쓰는 것이다.
보살은 자나 깨나 중생이 화두이기 때문에 중생을 위해서 그 마음을 쓰는 것이다.
우리 대승불교는 무엇이 화두냐 하면 중생이 화두다. 특히 고통 받는 중생은 더 강력한 화두다. 인과의 이치를 모르는 중생들은 더 무거운 화두다. 어떻게 하더라도 인과의 이치를 깨우쳐주는 것이 우리의 과제다. ‘이것이 대승불교가 선불교와 다른 화두다’라고 강력하게 주장해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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令得安隱然後에 施以無上法寶하야 令捨放逸하고 安住善根하야
於佛敎中에 心無退轉이니라..
善用其心~~
혜명화 님! 수고하셨습니다.._()()()_
@一眞華 네 감사합니다^^
나무 대방광불화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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