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야쓰시로 신사 제신(祭神) 묘견공주는 김수로왕의 딸이다
일본규주 역사 탐방에 다녀온 많은 한국인들은 야쓰시로신사(八代神社)가 오랜 세월동안 모셔온(?) 묘견공주(妙見公主)가 가야국의 시조 김수로왕의 딸이라는 사실에 주목한다.
김수로왕의 자녀는 10남 2녀가 있는데 하동 칠불암, 가야산 칠불봉 전설과 관련 있는 7왕자가 있고, 또 선견(先見)이라는 왕자도 있었다고 하는데 왕자들 중 선견은 신녀(神女)와 더불어 구름을 타고 떠났다는 것이다. 이 신녀가 바로 선견의 등생 묘건(妙見)이라고 본 것이다. 김수로왕을 이은 2대 거등왕은 떠나간 동생 선견과 묘견이 그리워서 돌섬 바위에 그림을 새겼는데 거등왕이 바닷가 돌섬에 그림을 새긴 것으로 봐서는 선견과 묘건은 바다를 통해 어디로 떠난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가야인의 이주와 일본의 천손범 신보선견과 묘견이 바다를 건너 섬나라로 건너갔듯이, 한반도 남부의 가야인들은 일본 열도와 가장 근접한 곳이라서 가장 이른 시기에, 가장 많은 다수가 큐슈 지역으로 넘어가 자리를 잡았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큐슈지역에는 가야, 가라라는 지명이 지금까지도 많이 남아 있다. 일부 시라의 고향도 가야 지역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김해의 김수로왕 신전인 승선전(崇善殿)에서 나온 ‘김씨왕세계’에는 "선견(先見)이라는 이름의 왕자가 신녀(神女)와 더불어 구름을 타고 떠났기 때문에 거등왕이 강에 있는 들섬의 바위에 올라가 선견왕자를 부르는 그림을 새겼다고 본것이다. 이 때문에 속전(俗傳)하기를 초선대(招仙臺)라고 한다." 는 것이다.
일본의 뿌리가 가야라는 것은 이미 재야사학자이가야국이 해상권을 장악한 해양국가임과 우리 겨레의 핏줄이 고대 일본을 세웠음이 분명하다는 것이 이 책의 골자다. 저자는 70년대 중반 한일의 역사학자들이 외면할 때 중국의 사서인 '삼국지'와 일연의 '삼국유사'를 지도 삼아 자전거로 일본 규슈의 구석구석을 누볐다. 또 허황후의 고향인 인도의 아요디아로 건너가 가야국이 어떠한 위치의 나라였는지 알아내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그는 일연의 삼국유사가 설화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진실임을 믿고 있다. 그래서 그 삼국유사와 중국 삼국지의 한자로 된 역사를 당시 사람들의 생각으로 풀어내려고 애썼다. 특히 일본 역사학자들이 자기들에게 유리하도록 왜곡한 것들을 들춰낸다. 예를 들어 삼국지 위지동이전의 "왜인" 편을 보면 "徒郡至倭 循海岸水行 歷韓國 乍南乍東 到其北岸 拘邪韓國七千餘里 始渡一海 千餘里至對海國" 이라는 글이 있는데 이를 일본인들은 "대방군에서 왜로 가는 데는 해안에서 순(循)하여 수행(水行)하고, 한국을 력(歷)해서 혹은(乍) 남(南)하고, 혹은 동(東)하여 그 북쪽 해안 구야한국에 도착하는 칠천여 리. 이렇게 해서 바다를 넘어 천여 리 대해국에 닿는다"라고 풀이하고 있으나 이는 잘못된 해석임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저자는 '사남사동(乍南乍東)'이란 "잠시 남쪽으로 갔다가 이내 동쪽으로 방향을 꺾는 행로"를 말하기 때문에 만약 서해안을 따라 바닷길로 간다면 남쪽으로는 내려갈 수 있어도 동쪽으로는 꺾을 수 없기 때문에 잘못된 풀이라고 지적한다. 따라서 이의 해석은 "대방군에서 왜로 가려면 바닷가 물길을 따라가다가 한국 땅을 거치게 되는데, 잠시 남쪽으로 갔다가 잠시 동쪽으로 가면 그 북쪽해안인 가라나라에 다다르게 되며, 여기까지가 7천여 리이다. 비로소 한 바다를 건너면 천여 리쯤의 뱃길로 대해국에 이르게 된다"가 되어야 맞다는 것이다. 일본 학자들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역사를 왜곡하고 있음을 통박한 저자의 끈질긴 역사 바로 잡기 노력에 머리가 숙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