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진 세상과 피 터지게 싸우다 온몸이 무너져 떠나는 사랑에게 매달리다 제풀에 지쳐 쓰러져 밤새 몸과 맘이 엉망이 되도록 술을 마신 날 아침 쓰리고 더부룩한 시간 스르르 풀어주는 장어국 한 그릇 내 너가 곁에 있다면 또 무너져도 좋으리 내 너와 더불어 다시 희망을 품을 수 있으리
- 이소리, '장어국이 놓인 아침' 모두
▲ 마악 숨이 깔딱깔딱 넘어가는 사람도 벌떡 일으킨다는 장어
▲ 이 집에 들어서자 캄캄한 어둠 속에 촛불만 서너 개 가물거린다
죽어가는 사람도 벌떡 일으킨다는 장어
마악 숨이 깔딱깔딱 넘어가는 사람도 벌떡 일으킨다는 장어. 아시아의 홈런왕 이승엽 야구선수가 끼니마다 빠지지 않고 먹는다는 스태미너 음식이 장어다. 장어는 단백질과 지방은 물론 비타민A와 철, 인 등이 듬뿍 들어 있어 한창 자라나는 아이들의 성장을 돕는 것은 물론 생식기능과 인체면역력, 피부미용에 특히 뛰어난 보양식이다.
예로부터 경상도 사람들은 입맛과 체력이 떨어지는 환절기 때나 땀을 너무 많이 흘려 어지럼증이 나거나 술을 많이 마신 다음날 아침이면 어김없이 장어국을 보약처럼 끓여 먹었다. 이는 장어가 워낙 기름기가 많고 고단백식품이어서 구이를 해서 먹으면 위에 부담을 줄 뿐만 아니라 소화 또한 잘 되지 않기 때문이다.
더불어 장어국은 남녘 바닷가 사람들에게는 보신탕, 삼계탕, 추어탕과 더불어 최고의 기력회복 음식으로 사랑을 받아왔다. 그런 까닭에 장어가 잘 잡히는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은 바다에서 갓 잡아올린 자연산 장어를 소금물에 담가 해감을 토하게 한 뒤 그대로 삶아 살만 추려내 여러 가지 채소를 넣고 추어탕처럼 국으로 끓여 먹는 것을 즐겼다.
특히 자연산 바닷장어(붕장어)에는 시력회복과 항암 효과가 큰 비타민A가 달걀 10개, 우유 5ℓ에 해당하고, 쇠고기의 300배나 들어 있다. 백과사전에 따르면, 바닷장어는 칼로리가 높으면서도 불포화지방산과 단백질이 듬뿍 들어 있어 성인병 예방과 허약체질, 해독작용, 노화방지에 뛰어난 효과가 있다.
▲ 장어국 장어는 길이 30㎝ 안팎의 자연산 바닷장어가 좋아예
장어로 만든 음식 먹을 때는 복숭아를 먹지 마라?
허준(許浚, 1546~1615)의 <동의보감>에는 "장어는 오장육부를 보하는 음식으로 성기능 회복이나 허약체질에 좋은 음식이며, 허리와 다리를 따뜻하고 강하게 만든다"고 적혀 있다. 정약전(丁若銓, 1758~1816)의 <자산어보>에도 "장어는 맛이 달콤하여 사람에게 이롭다, 오랫동안 설사를 하는 사람은 이 고기로 죽을 끓여 먹으면 이내 낫는다"고 되어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중국 송나라 서현이 지은 <계신록>에는 "과촌(瓜村)이라는 마을에 전염병이 나돌아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기에 이르렀다. 마을에서는 전염병을 막기 위해 병자가 생기면 그대로 관에 담아 강물에 떠내려 보냈다. 그때 강 하류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어부가 환자들에게 장어 고기를 먹여 살려냈다"는 이야기까지 실려 있다.
장어가 전염병에 걸려 죽어가는 사람까지도 살려냈다는 그 얘기다. 이처럼 장어는 예로부터 사람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아주 중요한 보양식이었다. 하지만 장어는 복숭아와 함께 먹어서는 탈이 날 수도 있다. 이는 복숭아에 들어 있는 유기산이 장어의 소화를 방해하기 때문에 같이 먹으면 설사병이 나기도 하기 때문이다.
1970년대 허리춤께, 내가 고등학교에 다니던 그해 여름. 어머니께서 "땀을 많이 흘릴 때는 장어국이 최고"라며, 맛깔스런 장어국을 끓여주셨다. 그때 나는 장어국을 먹기 바로 전, 동무들과 어울려 산복숭아를 제법 많이 따먹은 상태였다. 하지만 설사병은 만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장어국을 먹을 때 복숭아를 조심하라는 것이지 무조건 설사병에 걸린다는 그런 뜻은 아닌 모양이다.
▲ 장어국을 끓이는 방법은 추어탕 끓이는 방법과 거의 같다
▲ 장어국물을 떠서 입에 넣자 얼큰하면서도 시원한 감칠맛이 혀를 끝없이 희롱한다
어제도 장어국밥 드시러 오시더니 오늘도 오셨네
지난 4일(일) 정월 대보름날 오후 2시, 제법 줄기차게 내리는 봄비를 맞으며 여행작가 김정수(36)와 함께 찾았던 마산시 진동면 진동 시장골목 들머리에 있는 한 장어국밥(4000원) 전문점. 이 집은 나그네가 이 지역 가까이 여행을 올 때마다 꼭 들러 진동막걸리 한 통과 장어국밥 한 그릇을 달게 먹고 가는, 일종의 여행지 단골식당이다.
근데, 이 집에 들어서자 캄캄한 어둠 속에 촛불만 서너 개 가물거린다. 낯익은 주인 아주머니에게 "장사 안 해요?"라고 묻자 "오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오늘따라 정전이라예, 이를 우짜지예?" 한다. 나그네가 다시 "막걸리나 한 통 주세요"하자 "전기 고치는 기 좀 걸릴지도 모릅니더" 하며 진동막걸리 한 통을 촛불이 가물거리는 식탁 위에 올린다.
식탁 3개만 달랑 놓인 비좁고도 허름한 식당. 하지만 이 집 장어국밥은 나그네만 그 감칠맛을 느끼는 것만이 아니라 이곳 진동시장 사람들 사이에서도 입소문이 크게 날 정도이니, 음식 맛은 그 식당이 풍기는 겉모습과는 확실히 다른 게 틀림없나 보다. 식당 벽에 걸린 '어제도 오셨드(더)니/ 오늘도 오셨네/ 내일도 오시면/ 얼마나 반가우랴'라는 글씨도 살갑다.
빗방울은 더욱 굵어지고, 금세 전기를 고치러 온다던 한전에서는 소식이 없다. 하지만 주인 아주머니는 주방에 느긋하게 서서 빗줄기만 바라보고 있다. 보름 나물을 안주 삼아 진동막걸리 한 병을 거의 다 비워갈 무렵 갑자기 형광등이 환한 빛을 내뿜는다. 동시에 어둠 속에서 예쁘게 일렁거리던 촛불도 순식간에 빛을 잃는다.
▲ 쌀밥이 아이라 보름밥이라서 우짜지예?
▲ 비린내가 쪼매 난다 싶으모 먹다 남은 청주로 살짝 뿌리모 됩니더
장어국, 얼큰하면서도 시원한 감칠맛 으뜸
"장어는 길이 30㎝ 안팎의 자연산 바닷장어가 좋아예. 장어국을 맛나게 끓이기 위해서는 살아 있는 장어를 소금으로 깨끗이 씻어 끈적거림을 없앤 뒤 머리와 내장을 떼어내고 가마솥에 넣어 우윳빛이 날 때까지 오래 삶아야 하지예. 그라고 비린내가 쪼매 난다 싶으모 먹다 남은 청주로 살짝 뿌리모 됩니더."
이 집에서 장어국을 끓이는 방법은 추어탕 끓이는 방법과 거의 같다. 장어국 두 그릇을 시키자 주인 아주머니가 재빠른 솜씨로 살만 추려낸 장어살과 장어 끓인 뽀오얀 맛국물을 냄비에 부어 된장과 고추장을 푼다. 이어 팔팔 끓는 장어국물에 살짝 데친 봄동과 토란대, 고사리, 머위대, 숙주를 집어넣는다.
이윽고 구수한 장어국 내음이 풍기기 시작하자 주인 아주머니가 송송 썬 대파와 붉은 고추, 매운 고추, 빻은 마늘, 제피가루, 방아잎을 순서대로 넣어 간을 보는가 싶더니 어느새 뚝배기에 장어국을 맛깔스럽게 담아 식탁 위에 올린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구수한 내음의 장어국은 그저 바라만 보아도 침이 꼴깍 넘어간다.
마지막 남은 진동막걸리 한 잔 쭈욱 들이킨 뒤 숟가락에 장어국물을 떠서 입에 넣자 얼큰하면서도 시원한 감칠맛이 혀를 끝없이 희롱한다. 식탁 위에 보름나물과 파김치, 묵은지, 잔멸치볶음 등 밑반찬을 올리며 "쌀밥이 아이라 보름밥이라서 우짜지예?" 하는 아주머니의 걱정 어린 말 따위는 깔끔한 장어국물맛에 절로 사그라진다.
▲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때는 뜨거운 장어국밥 한 그릇 먹어보자
산지에서 갓 잡은 장어로 곧바로 끓이는 싱싱한 맛
오늘따라 장어국 맛이 더욱 구수하고 깊다. 봄비가 추룩추룩 내리고 있어 오스스한 한기를 뜨거운 장어국물이 순식간에 씻어내리기 때문일까. 아니면 하얀 쌀밥 대신 오곡밥을 장어국과 함께 먹고 있기 때문일까. 맞은 편에 앉아 국물을 몇 번 떠먹던 김정수가 찰진 보름밥을 장어국에 말아 몇 번 후루룩거리는가 싶더니 어느새 뚝배기를 깨끗하게 비워낸다.
"이 집 장어국은 어릴 때 제 어머니께서 끓여주시던 바로 그 맛입니다. 특별한 비법이라도 있습니까?" "비법이 따로 있습니꺼? 바닷가에 살다 보니까 싱싱하고 좋은 장어를 구할 수 있고, 재료도 텃밭에서 키운 것을 바로 가져와서 쓰니까 다른 집보다는 아무래도 맛이 싱싱하것지예." "맛이 싱싱하다구요?" '아, 뭐든지 그 자리에서 직접 생산한 것을 곧바로 묵으모 맛이 훨씬 싱싱하더라 아입니꺼."
쓰리고 더부룩했던 속이 순식간에 확 풀리는 뜨거운 장어국밥 한 그릇. 그래. 요즈음처럼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때는 뜨거운 장어국밥 한 그릇 먹어보자. 장어국밥 한 그릇 속에 갑자기 몰아닥친 꽃샘추위가 한풀 꺾이면서 그동안 잃어버린 건강과 잃어버린 맛이 쌍심지를 켠 채 그대의 몸과 마음에 포옥 안기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