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리산전우회 서신
“당백” 의무대 조병장입니다.
7971부대125야전공병대대 복무하였던 추억이 그리워 그시절 사진을 보면서 기억했수다.
대전 김종덕전우! 익산 김근태전우! 부천 김만일전우! 전화로나마 그시절을 추억할수 있게 해주어 감사하다우.
김만일전우는 한국철도공사에서 한평생 같이 근무하였건만 근무분야가 달라 만나지 못한 아쉬움속에 같은날 퇴직동기가 되었구먼.
삶의 여로에서 오고 가는길에 김만일전우 만날 수 있다면 즐겁겠네.
김만일전우 건강과 행운을 비오!
대전의 김종덕전우는 마음만 먹으면 상면할수 있는 가까이 있는거리에 있으니 기회 한번 만들어 만났으면 좋겠소.
익산의 김근태전우는 가까운시일에 만나겠지요.
인천의 행정과 안영한전우는 전화한번 통화하고 연락이 않되여
끊기었소다.
세월은 화살처럼 흘러가고 황혼의 계절에 무심한 세월을 탓하랴.
가리산의 풍광은 아름다웠건만, 그시절 힘든 병영생활에 경치 좋은줄 모르고 시간은 흘러갔지요.
험준한 가리산 고개에서 차량전복으로 수송부 서창근전우의 사망한 사고가 있었으며 시신처리 하느라 화장장에 갔던일도 생각이 난다구.
가리산1중대 1소대 전우님들 황혼의 시절에 즐거운 시간되시고 행복을 기원드립니다.
2019.12.13
당백 가리산 조병장입니다.
1972-1975진다리와 가리산을 기억하다.
5016-7971부대125야전공병대대-3
가리산 7971부대의 추억
1973-1975년 설악산 남쪽에 있는 남설악산 가리산 중턱에 자리잡은 7971부대를 기억에 떠올리며 자유인 인생 나그네는 추억에 젖다.
가리산리에 바라다 보이는 삼형제봉 주걱봉 가리봉코스가 험준한 남설악산이다.
가리산 중턱의 옛 복무하였던 125공병대대는 없어지고 그곳에는 1983년 3군단 예하의 5689부대 703불사조 특공연대가 창설되였다.
가리산 등산하는 길은 3군단 안가리산리의 703특공연대 입구 우측으로 올라가는 길(안가리산 가는길 지당골)이 있다.
인제에서 특공연대 가는 버스코스는 인제터미널-인제중학교-덕적리(산중턱)-장승고개-굴아우-특공연대 버스정류소에서 하차, 가리산1교 다리를 건너 좌측 오르는 길이 특공연대 방향이고, 우측은 안가리산 가는 방향(가리산 등산 방향)이다.
⇒가리산에서는 피나무바둑판사건이 있었다.
그시절 가리산에는 둘레가1m 2m되는 피나무 박달나무 거목들이 많아, 가리산 군대생활하던 장병들은 제대기념으로 가리산 피나무 바둑판이 인기가 대단하여 가지고 가는 시절이 있었다
.
피나무 바둑판은 결이 곱고 연하여 바둑판으로 조각하기가 좋아 부대의 목공장인들이 피나무바둑판을 정성껏 만들면 제대기념품으로 최고의 인기였다.
자유인 나그네 가리산 조병장도 1975년 피나무바뚝판을 구하여 화물로 집으로 보내었는데, 한번은 1중대 창고에 들러 피나무바둑판이 있었기에, 말하자면 쎄비하여 위병소 밖 옷수선집에 맡겨놓았으니 1중대 소대장이 어떻게 의무대 조병장이 가져간줄 알고 난리가 난적 있었지.
소대장도 기념으로 집으로 보내고자 피나무바둑판을 소대원에 부탁하여 만들었겠지만, 조병장 잽싸게 창고에 있는 것을 살알짝 쎄비했으니 뿔따구 많이 났겠지.
몇일 지난후 나를 불러서 몽둥이로 팰라고 하기에 도망을 쳐 모면한적 있수다.
사실은 가리산 산중에서 아름드리 피나무를 가져와 바둑판을 만들어 반출하는 것은 불법이고 말고지.
여기까지만 그시절 피나무바뚝판사건 야그하는거여!
말하자면 더 헐 야그가 있는데 보안부대까지 알게 되야 소대장 직분이 날라갈수도 있을뻔 한사건이었지.
솔직허니 반세기가 흘러간 지금에사 고백하나이다.
시가 좋아 “가리산전우회”에서 올린 글을 옮겨 왔네요.
○ 125야공대 2중대 일반하사 만기전역(1976.4.9일 ~ 1979년 1.19일)
그리움 / 燕馬 金 宗 賢
살아생전 힘들어도
하늘보다 높은인연
한사코야 가는청춘
벌나비로 살아날아
나고죽음 세상살이
바램인들 백년쯤을
돌고도는 해와달이
억만년이 다되어도
꼿꼿하던 내젊음을
멎어주고 싶었으리
지구촌 70억 모두가 긍정적인 힘으로 어려움을 이겨내며 준비된 100살까지 거뜬하게 노력, 체력, 재력으로 행복한 희망에너지 주춧돌이 되어 하하호호 어깨동무하며 신명나는 삶을 꾸려 나가시길 염원하며 모든 분에게 서시를 띄웁니다.
☛버스교통편(703특공대 가리산리)
⇒익산에서 동서울가는 버스
●7:30부 약 1:00간격
●운행시간 약 3:00
●요금 : 일반 14,700원 우등19,100원
⇒동서울터미널 인제가는 버스
●6:30부터 약50분간격으로 인제행 버스가 있다.
●운행시간 1:30-2:00
●요금 16,500원
⇒동서울터미널 현리가는 버스
●8:15부터 약2:30분간격으로 현리행 버스가 있다.
●운행시간 2:10
●요금 16,500원
⇒인제에서 현리코스(윗길, 특공연대경유)
인제터미널-인제중학교-덕적리(산중턱)-장승고개-굴아우-특공연대-대목리-가리산리-쌍다리-귀둔리(귓뚠)-진다리-현리
●인제에서 특공연대까지 약18km
●특공연대에서 현리까지 약27km
남설악산 가리산(1,518m)
설악산의 남쪽에 있다하여 남설악산 가리산은 최고봉인 가리봉과 주걱봉 삼형제봉 등이 모두 바위로 이루어져 산세가 험준하기 이를데 없다.
가리산은 5689부대 특공연대(옛125공병대대 자리) 버스정류소하차, 가리산1교를 건너 우측으로 오르는 코스가 있다.
가리산리(苛吏山里)
강원도 인제군 인제읍에 있는 리(里)이다. 동쪽으로 점봉산 자락이 펼쳐져 있고, 가리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가리산리 천이 마을을 지나 흐르고 있다. 가리산리는 산간 고지대이다. 자연마을에는 대목이, 굴아우, 안 가리산, 젓바치, 하우현 등이 있다. 대목이는 가리산 동쪽에 있는 마을로 대목이 고개 밑에 위치하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굴아우는 마을에 있는 산에 바위 굴이 많이 있다는 데서 유래되었다. 하우현(下雨縣)은 하우고개 밑에 있는 마을인데, 하우고개에는 젓바치에서 덕적동으로 넘어가는 큰 고개로 옛날에 두 사람이 싸우고 원님에게 소송을 하러 가다가 이 고개에서 화해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가리산리는 가리산 아래에 있다 하여 가리봉 또는 가리산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자유인 인생 나그네는 가리산 7971부대 125공병대대 들어가는 입구가 많이 변해 있어 비교 해 보기로 하였다.
내가 복무하였던 7971부대 125공병대대는 없어지고, 5689부대 703특공연대 불사조부대가 창설되여 있었다.
특공연대 버스정류소에서 내리면 가리산1교를 지나 좌측으로 오르면 불사조부대로 들어가게 되어있다.
2006년 엄청난 폭우로 덕산리 덕적리 가리산리에 산사태로 인한피해가 발생하였고, 특공연대 입구 들어가는 교량도 유실되여 새로 설치하였다.
가리산 부대들어가는 입구 다리에서 찍은 사진이군요!⇓
김종덕전우가 올려놓은 사진을 가지고 왔수다.
좌측에 취사병 손상병 다음이 이발병 서상병 다음이 중대1종계 우측에 본인(김종덕) 사진뒤편 부대입구 다리....
가리산 추억을 느끼고 싶은 마음에 김종덕전우 감사하우.
자유인 나그네 조병장도 옛 군시절 가리산의 추억이 그리워 가리산을 찾아 보았으며, 지금은 이다리의 모습도 많이 변해 있으리요.
추억을 느낄수 있는 귀한 사진을 남겨주어 그시절 가리산의 입구의 추억을 느낄수 있다니 즐겁지 않겠는가. 김종덕전우 다시한번 꾸뻑!
위병소 앞 7971부대 간판을 추억하여 김종덕전우가 올려놓은 사진을 가져왔음⇓
사진에 김근태전우님 사진이 선명하네구랴.
김종덕전우님 때문에 김근태전우와 통화를 할수 있었음을 감사드리고 추억할수 있어 다시한번 감사하구먼.
가리산 유격훈련장 부근 좌로부터 나(조동화) 강경일전우(진안이 집) 우측 두사람은 유격대 조교임⇓
가리산 유격중대 앞 막사이구먼.
강경일전우는 35사단 훈련소에서 춘천에서 2주간 후반기교육 강원도 인제 현리 가리산까지 군 동기생 아니었던가!
강경일전우 진안이 집이었던 군동기생의 인연을 사회에서는 망각하고 지내었으니 세월이 원망스럽소.
가리산 유격대 훈련장에서 구급낭을 멘 위생병은 나(조동화)입니다.⇓
긴급 응급환자 발생시 조치하라고 파견 나간 것 같소이다.
호랑이 담배피던 이야기 같은데 구급낭속에 별약이나 들어 있다고, 겨우 소독약, 소화제, 해열진통제, 핀센트, 압박붕대, 무좀약 상처에 바르는 연고등이 고작이었지요.
의무대 위생병 조병장 부대에서 선망의 대상이었으리라.
군시절 제대말년이 되면 포경수술이 유행처럼 하던 때가 있었는데 의무대 위생병들이 하루에 두어명씩 하곤했다.
남자로서 결혼하기전에 포경수술을해야제.
그래야 남자구실을 제대로 할수 있제.
의무대 조병장은 음경귀두부를 보기싫게 울뚱불뚱 해주던 시절이 생각이 나는구먼.
울뚱불뚱 미웁게 해주면 여인네가 좋겠지.
유격훈련장 내려오는 언덕에서 김종덕전우이시군요.⇓
가리산 유격중대 훈련장(간부교육대)이 보이는군요.
위병소 앞 가리산 7971부대 간판을 추억하여 안영한전우님 사진을 가져와 올렸음⇓
7971부대의 위병소 앞 “7971부대의 간판” 추억이 새롭구먼
감사하우!
나(조동화)와 중대전우(누구인지 알려주시길 희망합니다)가 설악산에 오르다. ⇓
당시 동경사에 파견나간 중대가 있었기에 시간을 내어 설악산 흔들바위를 지나다.
옛 7971부대가 있던자리에 5689부대 불사조부대 위병소가 있다.⇓
절대충성 절대복종 구호가 보이는구먼.
5689부대 불사조부대 간판이 보인다.
특공부대 앞 버스정류소가 보인다.⇓
한계령⇒옛 오색령(920m)
옛 오색령 “한계령”은 '소등라령', '바드라재', '오색령' 등으로 불리다가 1968년 공병부대가 한계령 도로공사를 인제 쪽에서 시작하면서 인제군 북면 한계리의 이름을 따 한계령이라 하게 되었다.
한계령은 그 이전만 해도 주로 오색령으로 불리었다.
한계령에는 한계령 휴게소와 설악산 한계령 코스 입구(한계령 탐방 지원 센터)가 있다.
한계령 남서쪽에는 필례 약수가 있으며, 남동쪽에는 오색 약수와 오색 온천, 북쪽에는 설악산 국립 공원 서북 능선이 있다.
⇒오색령 유래
조선영조때의 지리학자인 이중환의 저서 택리지에서는 백두대간 장원도 지역의 이름난 령 여섯 개를 꼽았는데 함경도와 강원도우ㅏ 경계의 철령 그 아래의 추지령 금강산의 연수령 설악산의 오색령(한계령)과 그 아래의 대관령 백봉령이 있었다고 한다.
그 중 으뜸으로 알려진 오색령(한계령)은 오색 한계령 점봉산을 이은 삼각형의 한축이 되는 산마루 고개이며, 원래 이름은 오색령이었다.
자유인 인생나그네 한국철도공사에서 기관사로 봉직하며 한시대가 흘러가다.⇓
무사고 40만km 돌파를 기념하여 서울역에서 출발전 사진을 남기다.
서울역 앞 대우빌딩이 보인다.
세월은 붙잡을수 없어 운용팀장으로서 한국철도공사의 마지막 근무일, 떠나는길이 아쉬워 교번현황판 승무원 교번명찰을 만지고 있구먼.⇓
2020 새해가 달랑 달력한장 남겨놓고 무수히 흘러간 세월의 시공에서, 자유인 인생 나그네의 모습이라요.⇓
이시절 은퇴하여 은둔속으로 들어간 친구들이 한둘이 아닌데, 사람들이 자유인 나그네를 청원경찰로 알고 있으니 기분이 좋구먼.
그도 그럴것이 호신용진압봉과 가스총 벨트를 허리에 차고 근무하는 것은 어찌보면 위엄있게 보이기도 한다네.
사람들은 이 나그네에게 고만조만 일좀하지, 또 어떤사람은 제복 입은 품위가 멋지다고 보기가 좋네요 그럽디다.
잠바하나 걸치고 할일없이 그낭 시내를 걷는것보다는, 제복을 입고 고객님들에 좋은 인상으로 대할수 있는것도 자유인 나그네의 행복이올시다.
자유인 나그네의 행복이란 아주 단순하다.
할 일이 있고, 갈 곳이 있다는 것이제.
감사 하면서 삶을 살아가야제.
나의 초년인생 경험담
1970년 鐵道에 入門하여 40여년을 철도에 젊음을 불사르고, 무엇하나 만족스럽게 이룩 한 것 하나 없이 흘러간 歲月!
1970년2월20일 목포기관차사무소 기관조사 초임발령으로 사회 초년생이 되어 목포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당시 철도는 증기기관차(영국의 조지스티븐슨 1829년발명)의 운행에서 디젤전기기관차로 동력이 바뀌어가는 과정에 있었으며, 목포-광주간을 운행하는 몇 개열차는 증기기관차사업이 있었으므로 신규발령된 기관조사에게는 증기기관차승무로 지정되어 기관사1인 본무기관조사1인 보조기관조사1인 3명이서 하는 근무형태로 기관사는 운전만담당하고 기관조사는 교대하여 석탄을 투척하여 증기를 가열시켜 증기기관차가 움직이므로 석탄을 투척하는 작업이 기술이 필요하기도 하지만 힘을 쓰는 작업이었기에 어려운 작업이었다.
칙칙폭폭, 철컹철컹 한밤의 정적을 깨며 기적소리를 직접울리면서 달렸던 추억어린 시절이 있었음을 추억삼아 이야기 해보았습니다.
시골의 어른들은 기차소리에 깨어 많은 자손을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허구한 이야기는 아닐것이요, 그래도 인정있고 살기가 좋았던 시기는 그때 그옛날이 좋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순천철도국 목포기관차사무소 기관조사의 사회초년생은 2년6개월의 반복되는 임무후 1972.8.29. 군에 입대, 전주 35사단에서 6주간 훈련을 마치고 후방기 교육을 춘천에서 2주간의 훈련후 강원도 인제 현리 공병부대 의무실 위생병으로 자대 배치되었다.
군생활중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35사단 훈련병때 모악산KBS송신소 건설 작업시 모악산아래에서 세멘 한포대씩 등에 메고 정상까지 오르던일이 가장 내인생에서 힘들었던 일이었답니다.
자유인 趙東和는 黃金萬能主義의 核家族 개인주의 세상에서 옛시절의 인정은 찾아볼수 없고 하루면 수도없는 갖가지 사건사고 홍수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속에 나자신도 예외가 될수 없듯 바쁜일상으로 어영부영 하루가 흘러간다.
자유인 조동화 그는 누구인가?
전쟁의 포성이 한창인 6.25 시대에 태어나, 인생의 삶이 무엇인가 고뢰하며 즐거운 인생을 꿈꾸고자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쉼없이 흘러가는 세월속에 지나온날들이 아쉬움만 가득하지만 흘러보낸 세월은 다시오지 않기에 지나간 시간들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고, 무상한 삶의 여정을 자연에 순응하며, 오직 한번의 인생 소중한 시간을 즐겁게 살기 위하여 나날이 최선을 다하자.
인간의 삶이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이 세상에 왔으니 삶에 이유가 없고, 그냥 태어났으니 사는것이다.
인간의 삶이란 정답이 없는 것이 정답인 것 같다.
정답없는 인생, 내가 하고자 하는것 하면서 행복 느끼며 살면 그것이 행복아닐까 생각해본다.
조동화의 벗님들!
자유인 조동화의 신조는 삶의 여로에서 이세상 살아가는 것이 모두가 “부질없다” 하면서 그냥 하루 하루 최선을 다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다.
그누가 속세를 가리켜 잠깐의 꿈속세상이라 했던가?
인생은 한조각 뜬구름 같은것이며 자연에 순응하며, 오직 한번의 인생 소중한 시간을 즐겁게 살자.
오늘 해야 할일이 있다면 바로 시행하고, 평범한 일상이 나에게 가장 소중한 행복의 자원임을 꼭 기억하며 사리라.
과거는 지나갔고 내일은 나의 날이 아닐수도 있기 때문이다.
행복이 뭐 별거 있습니까? 그냥 내가 하고 싶을거 하면 그게 행복입디다.
고맙고 감사합니다.
사는일
사는 일이 너무 바빠
봄이 간 후에야 봄이 온 줄 알았네
청춘도 이와 같아
꽃만 꽃이 아니고
나 또한 꽃이었음을
젊음이 지난 후에야 젊음인 줄 알았네
인생이 길다 한들
천년만년 살 것이며
인생이 짧다 한들
가는 세월 어찌 막으리
봄은 늦고 여름은 이른
칠월과 같은 사람들아
피고 지는 이치가
어디 꽃 뿐이라 할까...
-익산역 서부역 선상 통로의 액자에 있는 글이 좋아 옮겨옴-
인간의 진정한 행복(happiness)이란 무엇인가?
안병욱 교수는 행복이란
첫째는 낙천적 인생관이다.
인생의 모든 것을 밝게 긍정적으로 보고 기쁜 마음으로 살아가는 생활 태도다.
인생은 마음가짐이 가장 중요하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이 세상의 모든 일은 마음가짐에 달렸다.
극락과 지옥은 내 마음 속에 있다.
감사와 기쁨의 눈으로 인생을 보면 모두 즐겁고 기쁘다.
둘째는 사랑이다.
사랑은 인생의 주성분이다.
인간의 주성분은 사랑으로 되어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아무도 없고,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을 때, 우리는 견딜 수 없는 허무주의와 고독감과 절망감에 빠져 살아갈 수가 없다. 인간은 빵만으로 사는 동물이 아니고 사랑을 먹고 사는 동물이다.
셋째는 보람있는 일이다.
산다는 것은 일하는 것이요, 일 하는 것은 사는 것이다. 일을 하되, 보람있는 일을 해야 한다. 자기가 하는 일에 아무 보람을 못 느낄 때, 인생은 참을 수 없는 고역으로 변한다.
건강, 돈, 명예, 성공, 신앙,지혜, 자유도 물론 중요하지만, 행복의 핵심적 요소는 아니다.
부자의 대부분은 불행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낙천적 인생관, 사랑, 보람있는 일.
3가지 행복관을 가지고 살면 행복하다.
중국속담에 행복은
할 일이 있는 것,
바라볼 희망이 있는 것,
사랑할 사람이 있는 것, 이 세가지다.
할 일이 없다는 것, 아침에 눈을 떠도 갈 곳이 없다는 것,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다는 것만큼 비참한 사실은 없을 것 같다. 죽을때까지 일을 놓지 않는 사람이 건강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일은 행복의 필수조건 중 하나다. 존 록펠러 3세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행복으로 가는 길에는 두 가지 단순한 원칙이 있다. 먼저, 당신이 관심 있고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라. 그 일을 찾았다면 당신이 가진 에너지, 야망, 능력 등 모든 영혼을 쏟아 부어라."
행복( happiness)은 어디에!
독일의 철학자 칸트(1724.4.22-1804.2.12)는
" 인간 행복의 3가지 조건으로
첫째 어떤 일을 할 것,
둘째 어떤 사람을 사랑할 것,
셋째 어떤 일에 희망을 가질 것'이라고 했다."
그 세 가지를 충족할 수 있다면 행복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으로 일생을 보낸 대철학자가 제시한 행복의 세 가지 조건이 범인들이 쉽게 생각할 수 있는 평범한 과제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우선 놀라게 되고, 그러면서도 오늘날 우리가 처한 상황이 이 세가지 조건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하고 있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놀라게 된다.
➡노동뒤의 휴식은 순수한 기쁨 행복의 원천
노동 뒤의 휴식이야말로 가장 편안하고 순수한 기쁨이다.- 칸트
근로는 매일을 풍부하게 하며, 휴식은 피곤한 나날을 더욱 값있게 한다. 뿐만 아니라 근로 뒤의 휴식은 높은 환희 속에 감사를 불러일으킨다. -보들레르
휴식은 단순히 일을 중단하고 노는 것이 아닙니다. 좀 더 많은 일을 좀 더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재충전의 기회가 바로 휴식이라는 사실을 우리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휴식과 행복은 그대가 바라는 것, 그러나 그것은 오직 근로의 결과에서 얻을 수 있다'- 토마스 A. 캠피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