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우도에 대한 한 가톨릭인의 해설
버나뎃 로버츠/감사의힘 역주
2009년에 동경에 있는 화원花園대학교의 국제적 선 스승인 제프 쇼어는 심우도에 대한 해설을 써서 선학 연구(禅学研究)라는 학술지에 발표하였다. 그는 버나뎃에게 이런 그림들에 대한 그녀의 가톨릭적 이해를 그 잡지에 기고할 수 있는지 물어왔다.
서론 Preface
몇 년 전에 불교에 대해서 무언가를 알고 싶어서, 나는 일련의 그림들이 있는 책을 선택했다. 여정을 그림으로 묘사한다는 생각은 독특하고 즐거운 것으로 나에게 여겨졌다. 그렇지만 불교인의 해석을 읽기 전에 나 자신의 가톨릭적 여정의 용어로서 그 그림들이 이해될 수 있지 않을까 (혹은 어떻게 이해될 지) 그림들을 살펴보았다. 아래는 내가 그 그림들을 어떻게 이해했는가 이다.
서론 Preface 1
1. 황소를 찾아서 (심우; 尋牛) 2
2. 발자국을 발견하다 (견적; 見跡) 3
3. 황소를 발견하다 (견우; 見牛) 4
4. 황소를 붙잡다 (득우; 得牛) 4
5. 황소를 길들이다 (목우; 牧牛) 5
6. 황소에 타고 집으로 귀가하다 (기우귀가;騎牛歸家) 6
7. 황소가 사라지고 사람만 남음 (망우존인;忘牛存人) 7
8. 황소와 사람이 모두 사라짐 (인우구망;人牛俱忘) 7
9. 근원으로 돌아옴 (반본환원;返本還源) 7
10. 속세로 돌아옴 (입전수수;入廛垂手) 8
Note 9
1. 황소를 찾아서 (심우; 尋牛)
신께서 우리를 찾고 계신다. 그분은 우리를 원하신다. 우리가 그것을 모를지 모르지만, 우리는 그분의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확실히 알도록 그분께서는 우리를 끝없이 찾으신다. 우리는 그분의 부르심을 듣고, 심지어 멀리서 그분을 보지만, 우리의 길을 계속간다. 여전히 그분께서는 우리를 쉼없이 찾으시고, 우리는 우리가 미행당하는 것을 안다. 그분이 우리로부터 무언가를 원하심에 틀림이 없지만, 그것이 무엇일까? 어느 누가 신께 무엇을 드리는 것이 가능하기라도 할까?
역주) 무엇을 찾고 있나? 거친 황소여! 가시덤불 속에서, 거친 숲길에서 무엇을 위해서 그리 헤매고 있나? 목동이 잃어버린 황소를 찾네. 이제 그만 힘든 길 그만 두고 돌아 오면 좋으련만, 더 좋은 곳 있으리라 그리 헤매고 있나‥ 지친 황소여!
2. 발자국을 발견하다 (견적; 見跡)
우리의 발자국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것을 보시고, 신은 더 이상 때를 기다리지 않으신다. 천국의 그레이 하운드처럼, 그분은 우리를 추적하신다. 이제 우리의 선택은 무엇일까? 우리는 더 빨리 달리고, 숨으려 해야 할까, 아니면 진짜 황소bull처럼 감연히 돌아서서 그분을 마주하고, 당신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물어야할까?
역주) 내, 너의 가는 길을 아나니, 그곳에 가서 너를 구하리라, 데려오리라. 너의 본래 집으로 너를 다시 오게 하리니. 나와 함께 고향집으로 돌아가게 하리라. 모든 것이 갖추어진 평화로운 그 곳에서 너를 쉬게 하리라. 이제 너의 발자국 따라가서 너를 다시 데려오리라.
3. 황소를 발견하다 (견우; 見牛)
도망가기에는 너무나 가까이 그분께서 계시기에, 돌아서서 그분을 대면하고, 기탄 없이 우리의 질문을 그분께 하는 수 밖에 없다. 그렇지만 결코 계획치 않은 것은 이런 나의 얼굴과 그분의 얼굴의 마주함 이었다. 그저 신의 얼굴을 보는 것은 모든 이의 삶을 - 영원히 - 돌아서게 하는 모든 것이다. 한 순간에 우리는 시력을 잃는다. 그러나 신은 결코 시력을 잃지 않으신다. 그분 홀로 그분께서 창조하셨던 것을 아시며, 우리의 영원한 운명에 대한 그분의 계획을 아시며, 그 “길Way”을 아시고 우리를 그곳으로 데려가실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묻는다. 신께서 이것으로부터 우리가 벗어나게 하는 것이 가능할까? 이제 신께서 창조하셨던 모든 것에 대한 그분의 사랑을 아무도 헤아릴 수 없지만, 여전히 그분께서 요청하시는 모든 것은 우리가 다시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분께서 원하시는 전부이고, 우리에게 계속해서 요청하셨던 전부이다. 그러면 우리의 응답은 무엇인가?
역주) 너 험한 곳에서 수 없이 헤매느라 발이 까지고 넘어져서 온통 지쳐있구나. 내가 너를 간절히 찾으니, 이제 나를 돌아보거라. 이제 헛된 발걸음, 부질 없는 험한 산길 그만 두고 나를 따르거라. 사랑하는 소야, 이제 모든 어리석음을 다 포기하고 우리 집으로 가자. 너의 앞선 형제들이 있는 그곳에 같이가서 기쁨을 나누리라.
4. 황소를 붙잡다 (득우; 得牛)
신을 보았기에, 우리가 사로잡힌 것이 너무나도 기쁘고, 우리를 찾으시는 신 없이 허비했던 모든 시간이 후회스럽다. 많은 애정의 교환과 즐거운 환대로 신속하게 우리는 친구가 된다. 이 시나리오에서 유일한 일시적인 문제는 신께서 갑자기 떠나서 우리에게서 사라지고 우리는 근심스럽고, 그분이 끔찍이도 그리운 때이다. 이제 우리는 스스로를 탐구하고 외로운 밤들을 보내야 한다. 그렇지만 시간이 되면 우리는 이런 부재를 참고 기다리는 것을 배운다; 우리의 신뢰는 흔들리지 않게 되어가고, 또한 우리는 계속해서 더욱 깊은 수준에서 - 심지어 어둠 속에서 그분을 보는 것을 배우고 있다. 그리고 갑작스런 돌아오심과 함께, 그분의 빛과 사랑은 더욱 더 고양된다 - 완전히 기다릴 가치가 있다! 그러나 어느 누가 이런 큰 사랑같은 것에 대한 교환의 필요성을 이해할 수 있을까? 사랑은 결국 동등성을 요구한다 - 불공평한 교환에 있어서는 어떤 행복도 없다. 모든 것을 주고 아무것도 받지 않는 것은 사랑을 혐오하는 것이다 - 사랑치 않는 것이 나으리라. 그러나 우리가 신께 드릴 수 있는 모든 것은 우리가 가진 것이고, 우리가 스스로 만든 것이며, 그것은 신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과는 비교하기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 우리가 신께 드려야만 하는 모든 것은 그분께서 만드신 것 - 우리 자신, 우리의 전 존재 - 이다. 그분께서는 그것을 취하시고, 교환하시고, 심지어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곳까지 재창조하시거나 변형시키신다. 성패 양단 간의 여행이 되는 것은 이런 초자연적인 개조이며, 이것은 신께서 보장하신 것이 됨의 시련이다 - 그것이 그길에 놓여질 수만 있다면 말이다. 이것은 시련중의 시련이다.
역주) 험한 길 멀리도 왔네. 이제 나에게 맡기어라. 내가 너를 인도하리라. 너의 모든 삶을 나에게 다 맡기면, 너는 너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벗어나지 않으리. 다시 험한 길에서 헤매지 않고 나는 너의 등에 타고 길을 인도하리니, 너는 나를 태우고 우리 하나가 되어 가자꾸나.
5. 황소를 길들이다 (목우; 牧牛)
1. 황소Ox는 순한 양이 아니며, 소치기는 좋은 목동이 아니다. 오직 거친 소치기만이 강한 제멋대로인 황소bull를 다룰 수 있다. 신께서 황소bull에게 인장Seal을 새길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신은 아시지만, 오직 이것만이 황소Ox가 영원히 그분 자신의 소유물이라고 그분께 새기도록 할 수 있다. 이 인장은 물론 존재의 깊은 곳까지 황소bull를 지질 것이며, 그의 중심Center을 뚫고서 태울것이며, 그것은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렇지만 시련의 개시의 때에 필름같은 베일이 그의 마음 위에 놓이고, 때가 되면 그 베일을 통해서 신께서 모든 곳에서 보일 수 있다. 처음에는 황소Ox를 거의 눈멀게 했지만 결코 떠나지 않았던 깊은 시각으로 보일 것이다.
2. 이것을 따라서 그의 익숙한 중심Center을 향해서 안쪽으로 바라본 순간에, 빛 대신에 거기에는 바닥없는 블랙홀이 있고, 그것의 시야는 그의 존재의 깊이까지 관통하는 고통스러운 태움burning으로 시작되었다. 이제 단전丹田에는 하나의 불이 있고 황소bull는 거칠어진다. 그의 첫번째 의제는 내면을 결코 다시는 바라보지 않는 것이지만 이제 이것이 회피될 수 있을까? 마침내 그의 용기를 고정하여 그것과 대면하기로 결심하고, 조심스럽게 이 어둔 곳을 바라본다. 비록 그것이 그를 죽이고, 어쨌든 죽는 편이 나을지 모르지만 말이다.
3. 그러나 오 보라, 아래쪽을 바라보니 거기에서 그를 되돌아보는 신의 큰눈Big Eye이 있다! 얼마나 큰 충격인가! 그렇지만 그는 그의 갈길을 안다: 그 구덩이, 신이 계신 그 바닥으로 내려가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가장 밑바닥의 존재로 혐오스런 자기를 통과해서 더 이상 갈 수 없는 지점까지 그리고 결국에는 말뜻을 넘어선 평화를 발견하는 곳까지 그는 여행한다.
4. 이 성스러운 장소, 신의 평화는 우리 주위로 이리저리 여전히 거칠게 요동치는 자아로부터의 피난처이다. 마침내 폭풍우가 점차 가라앉고 중심Center이 밝게 빛나고 꼭대기로 솟아올라서 계속해서 이용가능할 때까지 귀중한 생명을 위한 이 평화에 우리는 매달린다.
5. 그러면 그 둘 사이에 깃들어 있는 영원한 하나임oneness의 확실한 계시가 오고, 그것과 함께 완전히 새로운 사람(황소Ox)이 출현한다.
역주) 영혼의 어둔밤을 지나는 영혼이여, 그 죽음보다 더한 어둔 밤길에 너 힘들어도 내가 너와 함께하네. 깜깜한 어둠 속에서 그저 내가 인도하는 대로 모든 두려움과 불안을 내려놓아라. 너의 영혼이 죽을 것 같아도, 나 너와 영원히 함께 하리니, 이 고통의 밤이 지나서, 새벽이 되면, 너는 새로운 눈을 가진 눈 맑은 영혼이여, 밝은 새벽이 올 때까지 어둠에 익숙해지고 어둠을 즐겨하며 같이 가자. 내가 언제나 너와 함께 너를 인도하리라. 너 사랑하는 나의 아들이여!
아버지, 영혼의 중심에 의식을 집중하고 쓰러질 것 같아도
당신께 모든 것을 다 맡기고 이 어둠을 지납니다. 가끔은 죽을 것 같은 공포가 다가 오지만 아버지가 정하신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두 눈을 부릅뜨고 이 어둔 밤길을 한발 한발 걸어갑니다.
6. 황소에 타고 집으로 귀가하다 (기우귀가;騎牛歸家)
1. 집에 가는 자는 새로운 황소Ox이다. 옛것은 죽었다. 그리고 여기서 완전히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우리가 산다. 황소Ox는 그의 다른 반쪽 - 신God - 으로 보며 황소Ox는 더 이상 스스로를 알아챌 수 없다. 그 둘은 앎과 의지에 있어서 하나이다. 두려움 없는 자유와 흔들리지 않는 평화와 기쁨의 신성의 중심Center과 함께, 그들은 출발해서 그들이 왔던 속세로 돌아간다. 그렇지만 속세는 시험장이고, 흔들리지 않는 중심Center에의 도전이며, 자아(황소Ox)를 손대는 모든 것이 결국에는 그 중심Center 안으로 사라진다. 속세를 헤치고 나아 갈 때, 일어날 수 있는 자아의 모든 양상은 다시는 경험되지 않도록 사라지면서, 신성의 중심Center은 감지하지 못하게 확장한다.
2. 자아가 사라지는 것에 비례해서 신성의 중심Center은 확장한다. 그분은 흥하고 나는 쇠해야 한다. 목동Rider은 황소Ox를 인도하지 않는다. 아무런 고삐도 필요없다. 황소Ox는 목동Rider의 마음을 너무도 잘알기에 목동Rider의 뜻과 방향 - 가장 힘든 것 - 을 짐작할 수 있다.
3. 그리고 그렇게 황소Ox와 소치기Herdsmen 둘은 생의 오르내림을 겪으며 그들의 길을 가고, 언제나 두발을 딛고 선다. 그리고 아무 것도 황소Ox를 손대지 못할 때가 오는데, 더 이상 손댈 무엇도 없다. 자아는 완전히 겪으며 살아졌고, 경험할 그 무엇도 없다. 이제 이것은 온통 선량하고 모험에 찬 삶이고 위대한 삶 이었으니, 신께서 모든 이들이 그분과 함께 하나임oneness 안에서 살도록 의도한 삶이었다.
4. 이제 아무 것도 원함이 없으며, 성취할 것도 없으니, 이 삶에서 더이상 갈 것이 없다. 여기서 부터는 우리의 영원한 천국의 집으로 향할 수 밖에 없다.
역주) 이른 새벽부터 부지런히 걸었네. 돌부리에 넘어지지 않고 숨이 차도 내가 가는 이길이 단 하나의 길이기에, 오 주여. 모든 것을 내맡깁니다. 저는 없습니다. 오직 당신이 길을 아시고, 당신이 저의 궁극적 운명을 아시니, 아버지 저는 모든것을 당신 손에 맡깁니다.
** 완전히 새로운 황소가 된 이후에도 여정은 끝나지 않았으니, 신과의 하나임으로는 족하지 않았다. 이 과정이 저자의 경우에 16년 정도 걸렸다. 속세에서 에고의 잔존을 연소시키고 소진시키는 과정이 그 정도의 시간이 걸렸지만, 대부분의 존재들에게 집으로 돌아가는 과정은 16생 아니 160생 이라도 걸릴 수 있으면 다행이리라. 그러나 저자에게는 오직 단 한 번의 생 안에 모든 것을 마쳐야 하는 절박함과 간절함이 있었다.
7. 황소가 사라지고 사람만 남음 (망우존인;忘牛存人)
황홀경의 침묵 안에서 자아는 이번에는 영원히 사라진다. 처음에는 이것을 몰라서, 그것이 (황홀경 이후에) 평상으로 돌아옴을 기다린다. 이것이 일어날 때,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은 “무언가”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자아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잠시 시간이 걸리지만, 이것을 확인하고 기쁨이 있고, 들려진 짐과 가벼움이 있고, 이제 우리는 날수 있다! 그러나 앗, 목동의 안쪽, 우리의 신성의 중심을 보려는 순간 … 아서라!
역주) 이제 자아의 마지막 흔적도 사라졌으니, 남은 것은 무엇인가? 자아가 그 마지막에 모든 임무를 다하고 본래 무에서 왔으니 무로 돌아갔네. 그 완전한 공의 자리에 과연 또 무엇이 사라졌을까?
8. 황소와 사람이 모두 사라짐 (인우구망;人牛俱忘)
1. 일격에 신성의 중심Center은 몸에서 사라졌다. 신도 또한 사라졌다! 죽은 것은 자아가 아니다. (그것은 그저 눈치채지 못하게 없어졌고, 어느 누가 그것을 신경쓸까?) 오히려 죽은 것은 신이다.
2. 그런데 누가 그런 일을 믿을까? 들어본 적도 없는데.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물론 그것은 이치에 맞는다: 황소Ox와 목동Rider은 떼어놓을 수 없는 하나One이기에 다른편Other은 없다. 그들이 하나로서 산 것처럼, 그렇게 그들은 하나로서 죽는다.
역주) 내가 사라진 그 곳에 신도 사라졌네. 무한한 빈 공간에 생각할 이도 생각할 것도 없네. 그저 펼쳐져 있는 그대로 완벽하여라. 나도 하느님도 없으니 그 무엇이 남아 있으리. 본래 아무 것도 없던 자리이니 본래 그 자리로 돌아왔네. 오 영혼도 신성도 필요없는 이곳에, 존재와 비존재가 그 무엇이란 말인가! 무한한 편재여, 무한한 침묵이여, 무한한 고요함 만이 있구나!
9. 근원으로 돌아옴 (반본환원;返本還源)
1. 이 죽음 너머에 오직 공중의 공(Void of Voids)이 있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신격Godhead, 근원의 알수 없는 본질로의 “돌파”가 있다. 그것은 그분-안에서의-그분인-대로의-신God-as-He-is-in-Himself이며, 더 이상 우리-자아-안에서의-그분인-대로의-신God-as-He-is-in-our-self은 아니다. 이것은 “황폐한 사막”, “버려진 땅”, 신격의 “심연”이다. 그렇지만 신격Godhead의 본질은 인간 존재를 위한 맞춤이 아니며, 사실상 인류 역사에 있어서 이런 공중의 공(Voids of Void)보다 더 나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2. 감각적 인식은 남지만, 마음은 공Void이며, 모든 형상은 공Void이다. 본성에 있어서 신이 없기에 모든 창조는 절대적 공Void이다. 생명이나 존재의 경험, 육체 또는 영혼의 경험, 마음이나 생각의 어떤 경험도 없이, 일어날 수 있는 유일한 질문은 이렇다 : “남아 있는 ‘이것this’의 참된 본성은 무엇인가?” 분명히 무언가 남아있지만, 마음은 단 하나의 개념도 없다. 그 해답은 오직 계시될 수 있으며 - 그리고 그렇게 결국에는 그것이 있다.
역주) 여기가 본래 내 자리였네. 억겁의 세월을 돌아서 다시 돌아왔네. 본래 떠난 적도 없었던 그곳이네. 기억도 그 무엇도 없지만, 여기 나의 근원 내 아버지의 무한의 장엄 세상에서 오직 의식만이 홀로 빛나네.
10. 속세로 돌아옴 (입전수수;入廛垂手)
자, 보라!
죽음으로부터 일어난 이는 누구인가?
그는 우주적 인간, 모든 창조물의 총합 - 그리스도 CHRIST이다!
이제 전능하신 하느님이 아니고서 그 누가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 생각을 했을까? 전능하신 신께서 그것이 일어나도록 하셨다고는 더욱이 아무도 생각하지는 못했으리.
그분의 무한한 사랑 덕분에 그분은 우리인 바가 되셨으니, 우리를 그분 자신인 바로 만들려 하셨도다.
성. 이레네오
역주) 빛이여 영광이여, 성부 아버지시여. 이제 성자 아들이 아버지의 모습 그대로 온 우주의 창조주와 하나가 되었으니,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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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
감사드립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