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회 사랑하는 자식을 땅에 묻다
전번 시간에는 2007년에 대한민국에 입국한 김영애 여성의 북한에서 교원생활을 하면서 체험한 일들에 대해서 말씀드리는 시간을 가져 보았습니다.
네, 그럼 오늘 이 시간에는 김영애 여성이 북한에서 교원혁명가라는 명칭으로 김정일에게 충성을 바쳤지만 차례진 후과는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해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피터 지는 교육자의 삶을 살아온 김영애 여성에게도 결국 고난의 행군은 그렇게도 사회주의를 지키려고 몸부림친 김영애 여성에게 불행의 씨앗을 가져다주고 말았다고 합니다.
몇 해째 지속되는 고난의 행군으로 김영애 여성은 그처럼 사랑하며 자기 생활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3살배기 자식을 저세상으로 보내는 심장 터지는 순간을 겪은 것입니다.
또 그로 인한 가정불화, 생활에서 고달픔으로 해서 남편과도 이혼을 하게 되는 눈물겨운 사연도 맞이했습니다. 결국 불행은 쌍으로 온다는 속담 그대로였습니다.
김영애 여성은 자기가 자식을 앞세우게 된 사연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시 북한에서는 파라티브스라는 전염병이 나돌았습니다. 이 병에 걸리면 첫 번째에 걸려서는 잘 모르나 두 번 세 번 걸린 사람은 만약 그 사람이 큰 간부였다고 해도 온전한 두뇌가 되지 않기 때문에 간부사업을 못한다는 구설이 나돌았었습니다.
그런데 김영애 여성의 세 살 난 어린 자식이 이 파라티브스라는 못된 병에 걸렸다고 합니다. 먹고 살기도 바쁜 상황에서 어쩌다 보니 아이가 소생할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끝내는 저세상에 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 김영애 여성입니다.
이렇게 되면서 결국 김영애 여성은 큰 충격을 받고 교원생활을 그만두게 되었고 나중에는 그 스트레스로 인하여 남편과도 이혼을 하고 남 동생네 집에 얹혀사는 신세가 되었다고 합니다.
결국 김정일에게 충성한 한 교육자의 운명은 이렇게 보잘것없는 운명의 갈림길에 놓이게 된 셈이었습니다. 김영애 여성은 동생이 여동생도 아니고 남동생이다 보니 올케의 눈치를 보는 것이 정말 힘들었다고 합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가정들에 손님이 한명이 오면 그날식사는 죽 한 그릇을 더 만들려면 물을 부어 멀건 죽물이라도 만들어야 하는 그런 실정 이였습니다.
김영애 여성은 살아남기 위해서 부끄럼도 마다하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이미 자기가 교원생활을 할 때 졸업시킨 제자들을 찾아다니면서 장사도 해보고 별의별 일을 다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나라가 망해 가는데 김영애 여성에게 봄과 같은 재생의 기회가 다시 온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자식을 땅속에 묻어버린 그 괴로움과 어처구니가 없는 그 교원생활에 집착을 하며 가정도 제대로 지키지 못한 그 죄책감에 김영애 여성은 어느 하루 한 순간도 죽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 지지 않은 때가 없었답니다.
눈만 뜨면 사랑하는 자식이 재롱을 부리는 모습이 눈앞에 삼삼하고 고통 속에 죽어가던 그 어린 아이를 지켜주지 못한 엄마로서의 상실감으로 해서 더는 그 세상에서 기대 같은 것을 하면서 살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고 합니다.
눈물 속에 자식에 대한 그리움과 남편에 대한 지나온 추억에 몸부림치던 김영애 여성은 하루하루 동생네 집에서 얹혀사는 것이 죽을 만큼이나 미안하여 드디어 북한 땅을 벗어나 중국에 가기로 결심을 하였다고 합니다.
고난의 행군이 한창 이던 때이다 보니 중국으로 드나드는 사람을 많이 보아온 김영애 여성은 그 길만이 살길이고 다시 일어서자면 돈이 있어야 된다고 강심을 먹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중국에 들어가서 몇 달만 참고 일해서 돈을 벌어 밑천만 장만해 오자고 생각하고 98년에 우연히 서로의 가슴 아픈 생활에 대해서 주고받으며 알게 된 한 아줌마의 도움으로 중국에 들어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김영애 여성은 자기가 두만강을 건너서는 날이 바로 북한의 인민군 창건 절이었다고 하면서 정말 죽을 때까지 잊혀 질것 같지가 않다고 말했습니다.
결국 그 인민군창건절에 김정일이 조국의 관문을 지키라고 총을 쥐어준 인민군이 김영애 여성과 다른 두 사람을 건너보내 준 것입니다.
하기에 지금도 김영애 여성은 그때 이야기를 하면서 그 국경경비대원이 정말 진심으로 고맙다고 웃음 속에 말합니다. 김영애 여성은 자기가 국경을 넘어선 바로 그 순간에 벌써 인생은 달라진 것이나 다름없었다며 모름지기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바로 그날이 자기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고 회고했습니다.
네, 그럼 김영애 여성의 실지 경험을 녹음으로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녹음-
네, 청취자 여러분들도 이런 생활이 과연 북한에서 일어난다는 것이 도무지 믿기지가 않으시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자룻속에 송곳이 감추어지질 않듯이 절대로 거짓이 아닌 우리 탈북자들이 겪은 사실입니다.
네, 그럼 오늘 이야기는 여기서 마치구요, 저는 다음 이 시간에 다시 여러분을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