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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BC 성서연구 – 제21B강 역대상하 메시야왕국의 대망 -
(81) 구원은 오직 그분의 긍휼하심에 근거합니다 (왕하14:21-29)
지난시간 호기롭게 선전포고를 하고 이스라엘과 맞붙었던 아마샤는 북 이스라엘 요아스에게 사로잡힙니다. 요아스가 비록 우상을 섬기고 있었지만, 그의 눈에도 오늘 아마샤는 내가 손대지 않아도 되는, 그저 들짐승이 짓밟아버릴 악한 가시나무에 불과했던 것이지요? 전쟁의 결과가 어땠다구요? 이스라엘 앞에 유다가 대패하는 것입니다. 삼십만의 군대였습니다. 그들이 아무 것도 해보지 못하고 지는 것입니다. 그 뿐인가요? 자기가 요아스의 손에 사로잡혀 끌려다니면서 자기 눈 앞에서 예루살렘 성벽 200M가 헐리는 것을 봅니다. 또한 자기 백성들이 북이스라엘에 볼모로 포로로 잡혀가는 것입니다. 인질이 잡혀 있으니 남 유다는 어떠한 시도도 행동도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뭔 조그만 조짐을 보이면 볼모로 잡힌 백성들이 고문을 당하거나 죽어나갔던 것이지요. 섣부른 행동을 하나도 할 수 없는 시키는 대로 해야하는 끌려만 다녀야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랬던 아마샤는 어떻습니까? 요아스가 죽은 이후에도 15년을 더 삽니다. 그런데 이 15년이 히스기야가 누린 것과 같은 축복이 아니었습니다.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왕이지만 왕이 아닌 비참한 삶을 살았던 것이지요? 그런 그는 더욱 비참한 말년을 경험합니다. 자기를 죽이려는 반역자의 손에 쫓겨 살아보겠노라고 저 블레셋의 땅까지 도망가봤으나 결국 살해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에 실어오는 것입니다. 왕에 대한 예우가 하나도 없습니다. 죽어서도 짐짝 취급당하는 비참한 왕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 일이 왜 일어났습니까? 아마샤는 통치 초기에 하나님께 정직히 행했지만, 말씀대로 행하고, 말씀대로 행하는 왕이었지만, 감정대로 하지않고, 손해를 마다하지 않으며 말씀을 지켰던 왕이었지만, 어느 순간 교만에 빠져 세일과 에돔의 신상을 들이고, 오늘 그것들에 절하고 분향을 했던 것이지요? 에돔과의 싸움, 그 전쟁 승리의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못하고 우상에게 돌렸던 것입니다. 그런 행위를 바르게 고쳐주려는 선지자를 오히려 위협하고 폭력을 가하려 했던 것입니다. 인간적인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 잘 돌아섰던 왕이, 다시금 하나님을 등지고 돌아섰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왕 요아스가 지적한 대로, 스스로에게 영광을 돌리는 교만에 빠져 이런 비참한 모습으로 생을 마감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한 순간도 내가 판단하면 안됩니다. 내 자존심이, 내 감정이 반응하면 안됩니다. 모든 순간, 하나님께 여쭙는 것입니다. 모든 걸음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 저녁의 말씀을 빌리면, 예수님의 이해와 예수님의 말씀과 같은 길을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생명을 얻어, 좋은 열매를 맺고, 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요. 모든 순간 그분을 붙들고 그분께 호소하고 그분께 매달리는 것, 오늘 그것이 바른 신앙의 모습입니다. 죄를 지었든 짓지 않았든 우리는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불의한 재판관의 이야기를 들려주시며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지요? 누가복음 18장 6-7절입니다.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그러면서 기억해야할 것, 지난 수요일에 한 번 더 말씀드렸지요? 잘 출발한 믿음의 여정일지언정 중간에 인간의 이성이 끼어들면 어떻게 된다구요? 우리의 생애에 비참한 결과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아들을 주실 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내 생각대로 하면 하갈이 사라를 깔보고, 이스마엘이 이삭을 학대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대로 속도를 조절하며 가겠다고 해놓고 숙곳에 우릿간을 지으니, 디나가 강간을 당하고 야곱의 집안이 살인자들의 집안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또한 저 동방박사들이 별을 보고 가던 길을 벗어나 눈에 보이는 저 왕궁으로 들어가니, 아무 죄 없던 유대땅의 저 두 살 아래 사내아이들이 다 죽어야 했던 것입니다. 또한 저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은30에 팔아넘길 계획을 세우고, 결국 자기도 목매어 죽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판단하고 우리가 결정하고 우리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동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성경은 우리 가운데 계속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의 방향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하나님을 붙잡으며, 그분이 주시는 은혜와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좋은 시작만큼 중요한 것은 좋은 과정이요, 좋은 결말입니다.
그래요.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수록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셔서 힘이 생기고 실력이 쌓일수록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고, 구원해주시고 승리케 하시는 역사가 더해질수록 더욱 하나님을 높이는 우리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어리석은 아마샤처럼 내 안에 남아 있는 우상과 내 안에 자라나는 교만을 방치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삶이 끝나기까지 그래서 영원한 생을 시작하기까지 늘 하나님 앞에 서시는 것입니다. 늘 코람데오 하시어 늘 하나님을 붙들고 하나님께 여쭈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서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고 채워주시고 갚아주시고 넘치도록 주시는 은혜를 충만히 누리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평생에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복에서 세상을 향해 돌아서는 어리석은 이가 되어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이 한결같은 충만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의 삶에 가득 임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원래는 이어서, 아마샤의 뒤를 이어 왕이되었던, 웃시야, 아사랴라고도 이름하는 왕에 대해서 말씀을 전해야하는데, 바로 그때 일어났던 북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오늘 저녁에 잠시 생각해보고 이어가도록 해보겠습니다.
그렇게 아마샤와의 전쟁에서 이기고 아마샤를 사로잡았던 저 북이스라엘의 요아스가 저 포로로 잡아온 유다왕 아마샤보다 15년을 먼저 죽고 여로보암왕이 세워지는데, 초대 북이스라엘의 왕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과 구분하기 위해 학자들은 여로보암2세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을 41년을 다스리면서 이스라엘의 영토를 하맛 어귀에서 아라바 바다까지 확장했는데, 읽어보겠습니다.
“유다의 왕 요아스의 아들 아마샤 제십오년에 이스라엘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사마리아에서 왕이 되어 사십일 년간 다스렸으며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모든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종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영토를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으니”(왕하14:23-25)
북이스라엘에 어마어마한 축복이 임하였습니다.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국경을 다 회복할 정도였으니 말이지요. 그런데 오늘 이 일이 왜 일어났는지가 중요합니다. 여로보암은 오늘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행한 왕이 아니었던 까닭입니다. 오히려 악을 행한 악한 왕으로 평가를 받는 왕입니다. 그럼에도 요나 선지자를 통해 말씀해주셨던 것이고, 하나님은 이 여로보암 왕에게 어마어마한 힘과 권력, 부국강병을 주셨던 것입니다. 왜요? 그 이유가 오늘 본문 이렇게 소개합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고난이 심하여 매인 자도 없고 놓인 자도 없고 이스라엘을 도울 자도 없음을 보셨고 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의 이름을 천하에서 없이 하겠다고도 아니하셨으므로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손으로 구원하심이었더라”(왕하14:26-27)
여러분,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 이유를 보세요. 오늘 새벽에도 말씀드렸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니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 긍휼하심이 우리를 건지시고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악한 세상 속에 산다고 포기하시지 않습니다. 그 손을 거두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악한 세상 속에 신음하는 당신의 백성들을 보십니다. 그리고 그 고통, 그 슬픔을 다 헤아려 주십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 죽을 자가 죽는 것도 기뻐하지 않으시는 분, 저들이 모두 살기를 기뻐하시는 분입니다. 또한 오늘도 오래 참으시며 모두가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아무도 도울 자가 없는 이스라엘, 매인자도 없고 놓인 자도 없고 결혼한 사람도 없고 결혼 안한 사람도 없고, 무슨 이야기 입니까? 주석을 찾아보니 이게 왕실이 몰살 당할 때 사용하는 표현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무슨 말이예요? 젊은 사람들로부터 나이든 사람에 이르기까지 다 죽임을 당한 것처럼 고난을 당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상숭배와 배교로 인해 고통당하고 있던 그런 이스라엘을 위해 하나님은 친히 역사해주셨던 것입니다. 저 이스라엘왕, 저 악행을 일삼는 왕, 여러보암 1세 느밧의 아들의 길을 고스란히 밟는 왕을 통해서 오늘 이스라엘의 전성기를 맞게 해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은 아름다운 하늘의 축복이 아닙니다. 여러분 아시다시피 하나님의 극약처방이었던 것입니다. 아무 것도 잘한 것이 없는 이스라엘에 하나님은 어마어마한 복을 주심으로 그 복이 자신들에게서부터 나온 것이 아님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그런 자신들에게 합당하지 않게 주어진 축복을 보면서 두려워 떨며 하나님께로 나오고 돌아올 것을 기대하고 원하셨던 것이지요?
그러나 어떻습니까? 이스라엘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잘해서 복을 받는다고 오늘 비참하게 죽었던 유다왕 아마샤의 착각을 똑같이 반복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어떻게 될까요? 이스라엘에도 들짐승에 의해 짓밟히는 참으로 비참한 결말이 주어지는 것이지요? 그렇게 부강했던 이스라엘이 끝내 돌이키지 않자, 여로보암2세 사후 이스라엘은 30년 만에 멸망하는 것입니다. 북이스라엘이 지도상에서 사라지는 것입니다. 앞으로 북이스라엘 왕은 6명 남았습니다. 6명이서 30년 엎치락 뒤치락 제멋대로 하다가 멸망당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떠세요? 신기하지요?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은 참으로 다양하고 놀라운 것이 많습니다. 우리 하나님을 너무 인과응보의 하나님, 그저 권선징악의 하나님으로 단순하게 도식해서 생각하지 않으시길 축복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인간의 지식에 넘치는 것이었지요? 그 너비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를 헤아려보기조차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요. 우리네 인간의 작은 규칙에 짜 맞출 수가 없는 분, 그러기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십자가로 확증하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신 것이지요? 인간이 만들고 정리해본 그저 하나 두개의 틀로 결코 다 설명할 수 없는 분이 바로 광대하고 전능하신 우리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동일한 이야기가 요한복음 5장에 나옵니다. 38년된 병자를 치유하신 예수님의 이야기가 그것을 이야기 합니다. 그의 구원을 위해 오늘 그가 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믿음과 선행?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은 그를 치료하시지요? 아무런 도울 자가 없는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치료하시는 것입니다. 여전히 원망하고 불평하고 이런 약육강식의 연못을 만들고 절망을 깊게 만드는 분이라고 하나님을 대적했을 그에게 오늘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자리를 들고 일어나 가라” 그 말씀 한 마디에 깨끗이 치료가 되죠.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그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아무 자격없고 죄많은, 늘 불평과 원망과 타인에 대한 미움밖에 없는 자기를 불쌍히 여기셔서 구원을 해주신 예수님을 만났으니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래도 뭔가 내가 저들보다 나은 구석이 있응게 그 수많은 사람 중에 내가 구원을 받은 거지 하며 저들을 멸시하고 나를 높이며 오만해야 합니까? 나는 훌륭해서 왕마저도 일만달란트를 탕감해준 사람, 너희들과는 다르지! 너 같은 것은 백데나리온도 탕감받을 수 없지! 빨리 갚아라, 못갚으면 감옥에가서 죽을 때까지 일해야 될 줄 알아라!
아니지요! 더 겁이 나서 엎드려야지요? 왜 하나님께서 나같은 것에게 이런 감당못할 은혜를 베푸시는지 여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그는 너무 오래 누워만 있다가 일어나서 정신이 멍했는지, 그냥 예수님의 말씀대로 자리를 들고 갑니다. 감사하지도 않았고 자기를 고쳐주신 분이 누구인지도 알지 못한 채 자리를 떠났던 것입니다. 그랬던 그는 오히려 예수님을, 자기로 하여금 안식일을 범하게 만든 주동자로, 저 제사장들에게 고발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오늘 여러분이 씨앗을 뿌린 것이 없는데, 열매가 많이 거두어지셨습니까? 주변도 한번 자세히 보세요. 씨앗을 뿌린 것이 없는데 어마어마한 물질의 복이나 건강의 복이 주어지는 일을 보시면, 우리만큼은 정확히 보시고 이야기 해주실 수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 하나님의 극약처방일 수가 있습니다. 그때마저 돌이키지 않고 그 때마저 하나님께로 나오지 않으면 죽는 것입니다. 내가 잘한 줄 알고 착각하면, 오늘 이스라엘처럼 30년 안에 내 나라가 멸망당하는 것입니다.
38년 된 병자가 그 자리에서 병이 나은 것은 은혜이기도 하지만, 이제는 그 베데스다만 쳐다보던 인생에서 돌아서라 하시는, 여전히 나를 못에 넣어줄 존재하지도 않는 사람이나, 저 물을 움직여 놓고 서로 밀쳐내며 아비규환이 되는 연못을 구경하는 마귀를 의지하고 기다리고 있는 저에게, 예수님께로 나올 것을 예수님을 의지하는 인생이 될 것을 힘껏 초청하시는 마지막 기회이기도 했던 것이지요?
보십시오. 여전히 우상을 숭배하고 앗수르를 기대고 있는 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돌아올 것을 초청하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현재 범죄하고 타락한 이스라엘에 합당하지 않고 걸맞지 않는 복을 주셨던 것입니다. 이들에게만 그러셨을까요? 아뇨, 자세히 돌아보십시오. 오늘 우리에게도 이 어마어마한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선하신 초청앞에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 드리고 있습니까?
성경에는 이 이스라엘과 38년 병자와 전혀 반대의 모습을 보였던 사람이 성경에 소개됩니다. 그게 베드로입니다. 보세요. 배가 잠길 만큼 고기를 잡게 된 베드로가 뭐라고 하지요?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태도 때문에 예수님의 수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삼세번 부인하고 잘못해도 삼세번 용서하시고 다시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사도가 되는 것입니다.
잘한 것 하나없는 우리에게 베푸시는 감당할 수 없는 은혜 앞에서, 오늘도 악한 우리에게 베푸시는 어마어마한 은혜 앞에서, 절대로 교만하지 마시고, 오히려 우리의 죄인됨을 자각하고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서시는 복된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길 축복합니다.
도대체 어느 정도 은혜를 베풀어 주셔야
우리는 하나님 앞에 두려워 엎드릴 수 있을까요?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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