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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 원문보기 글쓴이: 우물가탕자
▲ 양희송 청어람 ARMC 대표 © <뉴스 M / 미주 뉴스앤조이> |
“가나안 성도에 대한 오해와 편견들 ”
가나안 성도라는 표현은 ‘안나가’라는 표현을 거꾸로 해서 생긴 표현이다. 성도들의 교회 이탈 현상을 표현한 것으로, 아마도 신학교 언저리에서 농담처럼 쓰이던 표현이었던 것 같다. 저도 유머러스하고 직관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해 흥미가 생겼다.
가나안 성도는 정확한 숫자는 없지만, 대략 1백만명 정도라고 본다. 개신교를 860만 정도로 추산했을 때, 현재 교회를 출석하고 있지 않는 분들이 약 10%정도라는 것이다. 교회활동에 깊이 개입하지 않고, 축도 전에 나가는 분들도 심정적으로 가나안 성도라고 본다면 그 수는 더욱 늘어날 것이다.
우리가 가나안 성도에 대해 가지는 일반적인 오해와 편견은 다음의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우선, 가나안 성도하면 ‘신앙의 뿌리가 얕아서 쉽게 탈락하는 교회의 주변부’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가나안 성도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교회에 다닌 평균연수가 약 14년이었다. 14년간 교회를 다니면서 아무 일도 안하는 것은 쉽지 않다. 교사나 성가대 등으로 봉사했을 확률이 높다. 이 분들이 과연 교회 주변부에서 탈락한 것으로 봐야할 것인가?
예장 통합 측에서 발표한 흥미로운 통계를 보면 ‘안수집사 숫자가 줄어들고 있다’는 데이터가 있다. 안수집사가 줄고 있다는 것은 전체 교세의 감소현상이 교회 주변부가 아니라, 중심부로부터 발생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즉, 가나안 성도는 주변부가 아닌, 허리역할을 하는 가운데에서 벌어진 현상이 아닌가 생각해볼 수 있다.
또 하나는 ‘이 분들이 습관적으로 교회를 옮긴 분들이 아닌가?’라는 의혹이다. 즉, 가나안 성도를 '교회 쇼핑족'으로 바라보며, ‘이기적 동기를 충족시키기 위해 교회를 떠돌아다니는 사람들 아니냐?’는 의구심을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가나안 성도 2백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한 번도 교회를 옮긴 적이 없다’가 45.2%, 한번 정도 옮긴 숫자를 더하면 60%가 넘는다. 이런 통계자료는 그들을 단순히 '교회 쇼핑족'으로 몰아가기엔 무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편에서는 가나안 성도들을 ‘영적 엘리트’들로 간주하는 시각도 있다. 그들은 깐깐한 사람들이라 한 교회에 진득하게 눌러앉아 있지 못한다는 것이다. ‘개인적인 영성 소비자들이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자신에게 유용한 바깥쪽을 돌아다니면서 한 공동체에 헌신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는 설명들이다.
이런 설명에 일정정도 해당되는 경우도 있겠지만, 한 케이스를 가지고 전체를 설명하면 오류에 빠지게 된다. 쇼핑족은 갑자기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교회쇼핑족’은 교회가 백화점, 명품족이 되고자 하는 흐름과 병행해서 등장한 것이다. 교회가 백화점이 되는 것은 문제 삼지 않고, 성도가 쇼핑족이 되는 것만 야단치는 건 옳지 않다.
적지 않은 가나안 성도들은 ‘교회가 성도들을 소비자로 만들어버리는 사안’에 대해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많다. 정작 교회가 제공하는 서비스를 소비하는 존재는 교회 안에 더 많이 존재한다. 성도들을 소비자적 관점에서 취사적인 소비를 누리도록 유도하는 교회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또한, 교회 안에 있는 분들이 바라보는 시각과 가나안 성도 사이에 인식의 괴리가 크다는 점도 지적할 필요가 있다.
교회 안에 있는 분들은 가나안 성도를 ‘잃어버린 양’으로 생각한다. 특히 목회자들은 “방황하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은가? 그만 돌아오라” 식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가나안 성도들은 자신을
‘Prison Break’ 즉, ‘탈옥’으로 비유하는 경우가 많다.
어떤 탈옥수도 제발로 감옥에 되돌아가는 경우는 없다. 저도 인터뷰를 하다보면 ‘빠져나오기를 잘 하셨습니다’라는 생각이 드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남은 자’와 ‘떠난 자’ 사이의 온도차가 크다. 똑같은 현상을 본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다.
그럼,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를 물어볼 차례이다.
교회를 떠난 사람들은 자기의 일을 ‘사적인 사건’으로 간주하고, 굳이 자신의 이야기를 공동체에 남기거나 주변사람에게 자세히 설명하는 경우가 없다. 하지만 이러한 사적인 경우가 백만이 넘을 경우 이는 명백히 ‘공적인 의미’로 봐야한다. 반면에, 남아 있는 분들은 떠나간 사람들의 스토리를 재구성한다. 떠난 자들의 이야기는 공동체의 방어적인 방식으로 재구성된다.
‘가나안 성도 현상’은 한국교회가 간과할 만한 사안이 아님에도 평가절하되어 있는 현상이다. 저는 떠나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간 사람들의 이유도 모르면서 만들어낸 대안은 설득력이 없다. 이들의 빠져나간 현상을 제대로 주목하는 작업이 중요하다.
“왜 교회를 떠나는가?”
교회를 떠나는 이유는 크게 두 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 우선,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서’, ‘신앙에 대한 회의 때문에’ 등의 신앙적 문제와 씨름하는 과정에서 떠나는 비율이 44%에 이른다.
또한, 비슷한 비율로 목회자와 교인들에 대한 불만 때문에 떠난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즉, 관계에서의 갈등이 가나안 성도 배출에 주요요인이라는 것이다.
일부에선 ‘젊은 층의 교회이탈 보고’를 인용하며, 전 세계적으로 벌어지는 현상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하지만, 서구의 상황과 한국교회의 상황은 같지 않다. 서구교회는 한국교회 상황처럼 교회의 신뢰도가 급격하게 하락한 상황은 아니다. 제도 종교의 기본적인 역할과 신뢰는 어느 정도 존재한다.
하지만, 한국교회는 제도종교로서 신뢰도와 역할이 급속도로 상실하고 있다. 성장 일변도로 달려온 한국교회의 패러다임이 실효를 다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하지 않은 과도기에 있다. 단순히 ‘전 세계적인 젊은 층의 이탈’이나 ‘포스트모던적 현상’으로 보기엔 한국교회의 제한적 취약점이 너무 많다.
▲ 양희송 대표의 발제에이어 황병구 한빛누리 본부장, 김재영 ITS 교수, 김현준 카이로스 대표의 토론이 열렸다. © <뉴스 M / 미주 뉴스앤조이> |
교계나 신학교가 제대로 된 반응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점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성도들이 신앙적으로 의문과 질문이 생기면 답을 구해야 하는데, 신학자들은 자신의 임무를 ‘목회자 양성, 목회자 교육’으로 제약하는 경우가 많다. 사회적 현상에 대해 답을 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통일문제’, ‘동성애 문제’ 등에 대해 자기의 임무라 여기며 책임감을 느끼는 공적신학자들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한기총 같은 단체가 대변을 하는 대표성의 괴리나 위임의 불일치를 많이 보고 있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과 교회 나간다는 것이 동일시되지 않는 시대를 살고 있다. 가나안 성도 현상은 제도 교회를 떠나지만, 신앙을 포기함이 아니라 신앙을 충실히 따르기 위해 떠나는 경우로 볼 수 있다. 신앙을 버리거나, 새로운 신학적 입장을 택해서가 아니라, 신앙을 실천, 확장, 강화하기 위해 교회를 떠나는 새로운 현상이다.
“과연 가나안 성도는 돌아올까?”
그럼, 과연 가나안 성도는 돌아올까? 직관적으로 보면 가나안 성도를 10으로 놓고 본다면, 지금 교회가 가지고 취약점을 보완하면 반응할 것이다. 즉, 개혁, 대안적 교회, 작은 교회 운동 등 교회의 취약점을 상당 정도 개선하고 극복하면 7-8 정도는 반응할 것 같다. 실제로 자기들끼리 공동체를 실험하고 싶어하는 경우도 있다. 대안이나 솔루션이 나온다면, 성과를 내는 만큼 이런 현상을 해소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하지만, 2-3 정도는 개혁이나 솔루션에 의해 쉽게 복귀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청어람이 주로 하는 일은 2-3의 사람들을 위하는 경우가 더 많다. 이들은 ‘제도 교회 안에선 자연스러운 것이, 울타리 밖에 나오면 다 질문이 된다’고 본다. 즉, 이들의 관심은 ‘교회란 무엇인가?’ ‘어디까지가 교회고, 어디까지가 아닌가?’ 등의 교회론부터 ‘예수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등의 구원론에까지 이른다.
가나안 성도의 현상은 우리로 하여금 당연시했던 교회론, 구원론에 대해 새롭게 질문을 던져보게 된다. 우리는 이들의 질문을 손쉽게 봉합하려하기 보다는 예민하게 대응하면서, 당연시 했던 것을 재평가해보고, 좀 더 다듬어진 답을 제공할 수 있는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교회라는 것은 ‘에클레시아’라는 단어로 신약에 등장하는데, 그 용법을 살펴보면 에클레시아를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로 쓰이는 것을 볼 수 있다. 기독교만의 고유명사가 아닌, 그리스·로마 시대 당시 민회나 군대 소집과 같이 ‘목적을 위해 사람을 불러 모았을 때’ 일반적으로 많이 쓰였다.
이 말은, 당대의 에클레시아는 ‘목적을 위해 한시적으로 모이는 것’, 상설조직이나, 영속적인 조직이 아니라, 그것이 모이는 ‘미션’이 중요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오늘의 교회론의 두드러진 특징은 ‘영속성’으로, 무한 증식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다. ‘미션’에 대한 인식이 희박하다. ‘왜 모였지?’에 대한 상호 이해가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 그러다보니 신약이 보여주는 것에 비해 다른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종교개혁을 통해 바뀐 가장 큰 충격은 ‘개인성의 재발견’이라고 생각한다. 루터가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저마다의 신앙양식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을 때, 믿음은 각자의 신앙 양심에 따라 자유롭게 선택해야 하며, 강압으로의 신앙은 안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는 사제주의, 직제 등을 통해 개인성이 억압, 제한되는 경우가 많다. 개인성이 확보되지 않고는 참된 교회를 찾기 어렵다.
아시아의 ‘무교회주의 운동’도 오늘날 가나안 성도가 던지는 ‘신앙의 개인성’에 대한 질문을 한 세기 전에 다 던지고 있다. 일본의 우찌무라 간조나 김교신 선생은 “자신의 신앙을 특정한 사제나 제도에 그렇게 무책임하게 의탁할 수 있느냐?”고 질타하며, “참된 신앙은 성경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는 것이다”고 강조했다.
중세교회의 ‘집단주의적 교회의 이해’,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고, 공동체를 위해 개인이 제한되어야 한다’는 사고에 대해, 종교개혁은 ‘개인에 근거를 둔 신앙’을 소개한 것이다. 제대로 된 공동체는 개개인들이 독자적인 고유함을 유지하면서 함께 할 수 있을 때 공동체가 발생하는 것이다. 전체의 한 부분으로 간주하는 것은 진정한 공동체를 발견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가나안 성도 현상’은 훨씬 더 개신교적인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즉, ‘가나안 성도 현상’은 현재 교회가 얼마나 현실과의 괴리를 보여주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런 맥락 속에서 본다면 가나안 성도라는 존재는 역설적으로 한국교회가 풀어야할 문제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존재이며, 제도 교회 안에 있는 교인들이 스스로 자기 갱신을 위한 좋은 문제를 던져주고 있다. 이제, 우리는 가나안 성도의 목소리를 진지하게 경청할 필요가 있다.
정리: 양재영 기자 / <뉴스 M / 미주 뉴스앤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