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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소견 없던 십여 세 즈음 어른들로부터 참으로 많은 꾸중을 들었었다. 두 살 터울의 누나와 나, 아우, 또 그 아우 사이에 티격태격하다가 결국 놈들 간에 드잡이만 나면 어른들의 꾸지람은 나에게 집중되었었다. 따지기 잘하고 대들기 잘하였던 조무래기 때의 일이었다. 졸장부라는 꾸중을 들으면 괜히 주눅이 들었는데, 실상 그때는 그게 무슨 말인지는 잘 몰랐었다. 우리 남매들이 자랄 때는 한국동란이 끝나고 십여 년이나 지난 시점이었으나 전쟁의 상처가 아직 남아 있었고, 무슨 일만 터지면 집 가까운 곳 대학교 주변을 군인들이 둘러막곤 하던 때였다. 군대 졸병들을 쉽게 봐왔던 터라. 졸장부란 윗사람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쫄병 정도의 뜻이거니 지레 짐작하고서는, 난 그것밖에 안되나 보다고 생각하면서 무척이나 속상하고 억울하기까지도 했었다. 물론 코흘리개를 면했을까 했을 즈음의 일이다. 그런데 지난 여름 어느 날, 정확히는 지독한 무더위에 바보상자를 통해 장관, 총리후보자들의 청문회를 보면서 하릴없이 지내던 그 즈음의 어느 순간 갑자기, 사십여 년 전 익히 들었던 졸장부라는 단어가 떠오르는 거였다. 졸장부, 굳이 사전을 찾지 않더라도 도량이 좁고 사내답지 못한 이를 지칭하는 말이고, 남자다운 사내, 대장부의 반대말이다. 대학교에 들어간 뒤 필독서로 만난 《맹자》에 대장부, 즉 도량이 넓은 큰 사내를 언급한 것이 꽤 많이 보인다. 맹자, 그 자신도 호연지기를 논한 시원시원한 사람이다. 그 《맹자》를 보면,
경춘이 말하였다. “공손연, 장의가 어찌 대장부가 아니리오. 그들이 한번 성내자 제후들이 두려워 떨었고, 그들이 편안하자 세상이 잠잠하였으니까 말입니다.” 그러자 맹자가 반박한다. “그들이 어찌 대장부입니까? 결국 임금이 시키는 대로 한 것에 불과하니, 이는 부인네들이나 하는 일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대장부란 천하라는 넓은 공간에 머물면서, 천하의 바른 자리에서 당당히 서며, 천하의 대도를 행합니다. 자신의 뜻을 얻어서는 백성들과 함께 하고, 뜻을 얻지 못하였을 때에는 홀로 도를 실천합니다. 부귀도, 빈천도 그를 움직일 수 없고 권력과 힘에도 굴복하지 않는 이런 이를 대장부라고 말합니다.”
즉 장의와 공손연 같은 이는 아무리 큰 권력을 갖고서 한 시대에 대단한 위세를 떨쳤어도 결국 임금이 시킨 대로 하였을 뿐이니 대장부일 수 없다는 말이다. 맹자가 보는 대장부는 권세나 힘 따위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부귀에도 빈천에도 무력에도 굴하지 않는다고 하였고, 힘 있는 사람보다는 그렇지 못한 백성들과 함께 하는 사람이라 한 것이다. 대장부, 큰 사내를 힘주어 말한 맹자는 글자를 달리하여 대인, 큰 사람을 여러 차례 언급하였다.
임금 잘 섬기는 자가 있다. 자기 임금 잘 섬기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는 자이다. 사직을 편안히 하는 자가 있다. 사직을 안정시킴으로써 즐거움을 삼는 자이다. 하늘의 백성인 자가 있다. 자신의 도가 천하에 펼칠 만해진 뒤에 실행하는 자이다. 대인이 있다. 자기를 바르게 하였는데 남이 바르게 되는 자이다.
세상에는 별별 사람이 다 있다. 힘 있는 자에게 잘 보이는 것을 자기 능력으로 아는 자가 있고, 우직하게시리 국가에 충성을 바치는 것을 보람으로 여기는 자도 있다. 맹자의 말대로 하늘의 백성처럼 때가 되어야 자기 뜻을 펼치는 사람이 있는지는 몰라도, 남들의 이목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잇속 차리기에 급급한 사람들이 많은 것은 분명한 일이다. 이런 이들을 언급한 뒤에 맹자는 대인을 말하였다. 대인이란, 자기를 바르게 할 뿐인데, 남이 그를 보고서 스스로 바르게 하는 자라고 한다. 재미있는 말이다. 실상은 남을 의식하지 않았는데, 그를 본 남들이 저절로 교화되는 사람이란다. 어쨌든 바른 사람이 대인이다. 그러면 대인은 어찌해서 그럴 수 있는가?
공도자가 물었다. “모두 같은 사람인데, 누구는 대인이고 누구는 소인이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맹자가 대답하였다. “그 대체(=마음)를 쫓으면 대인이 되고, 소체(=이목)를 따르면 소인이 됩니다.” 공도자가 다시 물었다. “모두 같은 사람인데, 누구는 대체를 따르고 누구는 소체를 따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맹자가 대답하였다. “이목의 기능은 생각하지 않으니, 외물에 가려집니다. 결국 외물이 다른 외물과 교차하면서 거기에 끌려갈 뿐입니다. 마음의 기능은 생각하는 것입니다. 생각하면 얻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지 못합니다. 이것은 하늘이 나에게 준 것이니, 먼저 그 큰 것을 세운다면 그 작은 것이 빼앗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대인입니다.”
소인과 대인, 실상은 신분적 용어이다. 높은 사람이 대인이고, 낮은 사람이 소인인 것이다. 맹자도 대인과 소인을 신분적 의미로 구분하여 말한 적이 있다. 소인은 남에 의하여 부려지는 사람이고, 대인은 남을 부린다는 것이니까, 그게 바로 높은 사람이고 낮은 사람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공도자의 질문처럼 대인이든 소인이든 간에 모두 사람이기는 마찬가지이지만, 양자 간에는 큰 차이가 있다. 자기 마음의 생각을 따르냐 - 즉 생각하면서 사느냐, 아니면 이목의 감각 - 즉 욕심을 따라서 외물에 얽매이느냐의 차이이다. 다시 말해 주체적으로 자기 생각을 갖고 사는가, 자기 주견이라고는 눈꼽만치도 없이 욕망의 노예로 머무르는가의 차이이다. 맹자의 말이 또 있다.
사람의 몸은 귀한 것과 천한 것을 함께 갖고 있고, 큰 것과 작은 것도 함께 갖고 있다. 그러나 작은 것으로 큰 것을 해친다든가, 천한 것으로 작은 것을 해치지 말아야 한다. 작은 것을 기르는 사람은 소인이 되고 큰 것을 기르는 사람은 대인이 된다. - 천하고 작은 것은 입과 배이고, 귀하고 큰 것은 마음과 뜻이다. - 먹고 마시기만을 즐기는 이를 사람들은 천하게 보나니, 작은 것을 추구하다가 큰 것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사람의 욕구 중에 가장 강렬한 것이 무엇인가? 식색 - 음식과 여색 - 이다. 그런데 식색은 배부르고 채워졌다고 하여 충족되지 않는다. 배부르고 나면 늘 배부르고 싶고, 채우고 나면 늘 그러고 싶다. 결국 이를 위하여 사람들은 더 큰 요구를 한다. 재물과 권력. 여기에 더하여 명예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욕심이 많은 사람일수록 재물과 권력과 명예에 꿰일 가능성이 높은 거다. 세속인들 그 누구도 돈과 자리와 명예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맹자는 이게 전부가 아니라고 한다. 도리어 재물과 권력과 명예를 얻는 순간 그것의 포로가 되어 자신에게 그런 것들을 준 더 큰 권력자에게 꿰어 그가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남이 시키는 대로 하는 이, 이게 바로 소인이다. 앞서 대장부는 부귀와 빈천에도 흔들리지 않고 권력과 무력도 굴복시킬 수 없다고 했다. 한 마디로 자유로운 사람인데, 이런 이가 바로 대인이다. 이런 사람만이 최고 통치자 앞에 당당할 수 있다. 꿰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맹자는 말한다.
오직 대인만이 임금의 그른 마음을 바로 잡을 수 있다. 임금이 어질면 어질어지지 않을 사람이 없고, 임금이 의로우면 의롭지 않을 사람이 없으며, 임금이 바르면 바르지 않을 사람이 없나니, 한번 임금을 바로 잡아 나라가 안정된다.
임금의 잘못을 바로 잡아 나라를 편안히 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대인, 큰 사람이다. 부귀도 빈천에도 흔들리지 않고 무력과 권세에도 굴복하지 않으므로, 임금이라는 최고 통치자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고, 그러므로 그 앞에 당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누가 그런 일을 하는가? 다시 《맹자》를 본다.
왕자점이 물었다. “사(士)는 무슨 일을 합니까?” 맹자가 말하였다. “그 뜻을 높입니다.” 왕자점이 다시 물었다,. “무슨 말인가요?” 맹자가 대답하였다. “인의를 높인다는 말입니다. 죄 없는 이를 하나라도 죽이면 어진 이가 아니고, 자기 것이 아닌데도 빼앗으면 의로운 이가 아닙니다. 사는 어디에서 지내는가, 어짊이 그 곳입니다. 사가 갈 길은 어디인가, 의로움이 그 곳입니다. 어짊에서 지내고 의로움을 통하면 대인의 일은 모두 갖추어집니다.”
맹자는 대인의 일을 하는 이로서 사(士)를 주목하였다. 사는 공경대부의 아래 계층으로서 신분적 용어이다. 공경대부는 군왕과 더불어 부조의 직을 자손이 계승하는 세습계층이다. 부조가 물려준 재부와 권세를 계승하는 특권을 가지면서, 동시에 가진 만큼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 그러나 사는 조상에게서 신분은 받았으나 권력이나 직위는 받은 것이 없다. 그러므로 맹자는 대인처럼 자유로울 수 있는 이는 가진 공경대부가 아니라, 물려받은 것이 없는 사라고 한 것이다. 현금의 21세기는 맹자가 살았던 전국시대처럼 눈에 띄는 살육은 적어졌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조직적이고 더욱 무서운 총성 없는 전쟁이 자행되는 아수라의 세상이다. 금세기의 인물 중에는 혹여 자기가 싫으면 부귀나 권력의 힘에도 눌리지 않는 이가 있을런지도 모르겠으나, 빈천, 그 중에도 가난으로부터 자유롭기는 참으로 힘든 일이다. 먹을 것 입을 것은 넉넉해졌으나, 그래도 여전히 나랏님도 가난은 구제하지 못한다. 실상 맹자의 말대로 하였다간 굶어죽기 딱 알맞다. 맹자도 이런 점을 모르지는 않았던 듯하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인이란 적자 - 어린아이 -의 마음을 잃지 않은 자이다.” 적자지심-어린아이의 마음이라고 했다. 순진무구하다는 말일 것이다. 순진무구하니까 부귀는 물론 빈천에도 움직이지 않고 위무에도 굴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이쯤이면 독자들 중에는 웃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범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룻강아지라고 말이다. 굳이 맹자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대장부, 대인은 남자다운 큰 사나이, 큰 사람이다. 맹자에게는 부끄러운 말이지만 지금 세상에 대장부, 대인이란 어림없는 일이다. 하룻강아지라면 모르지만 말이다. 그런데 《맹자》에는 대장부, 대인과 더불어 이런 사람에 대한 소개의 글이 있다. 내친 김에 조금만 더 보자.
옛날의 저자거리에는 사람들이 자기가 가진 물건을 갖고 나와서 자기에게 없는 물건을 바꾸었으니까 유사들은 감독만 하였을 뿐이었다. 그런데 어떤 천장부 하나가, 사방이 잘 보이는 가파른 언덕에 기어 올라가 좌로 우로 두루 살펴보고서는, 저자로 내려와 장터의 이익을 그물에 담듯 거두어 들이니까, 사람들이 모두 그를 천하게 여겼다. 이 때문에 유사가 그를 쫓아가서 세금을 거두기 시작하였던 것인데, 상인들에게 세금을 거두기는 이 천장부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것은 제나라에서 벼슬하던 맹자가 임금으로부터 받은 도성안의 저택도, 만종이나 되는 봉록도 마다하고 벼슬을 버리고 떠나면서 예전 노나라의 권력자 계손씨의 입을 빌려 한 말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방도는 자기가 가진 것과 남이 가진 것을 바꾸어 살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남에 대한 생각은 조금도 없이 세상의 재리를 농단(壟斷=독차지)했던 나쁜 장사꾼과 같은 자가 있다. 그에 대한 소개를 통하여 권세와 더불어 재물을 탐하는 자들을 비판한 것인데, 맹자는 이런 사람들을 천장부 - 비루한 사내 - 라고 하였다. 남의 이목은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잇속만을 차리는 자를 가리키는 것이다. 《맹자》에는 또 다른 사내에 대한 언급이 있다.
제나라에 처첩과 함께 한 집에서 사는 남자가 있었다. 그 남자는 밖에 나가기만 하면 술과 안주를 실컷 마시고 먹고 돌아오는 것이었다. 그 아내가 누구랑 같이 잡수셨냐고 물어보니, 모두 부귀한 이들이었다. 어느 날 그 아내가 첩에게 이르기를 “남편이 나가면 늘 술을 넉넉히 먹고 돌아오시는데, 전부 부귀한 분들과 함께 먹었다고 하는데, 그 중에는 우리 집을 찾아온 분이 단 하나도 없으니 이상한 일이네. 내가 한번 남편의 뒤를 밟아 봐야겠어.”라 하고서, 아침 일찍 집을 나서는 남편의 뒤를 따라다녔다. 그러나 종일토록 도읍 안을 다니면서도 만나서 대화하는 사람 하나 없었고, 끝내는 동쪽 성곽 밖의 공동묘지로 가서 제사를 지내는 사람들을 찾아가 남은 제물을 구걸하여 먹고, 부족하면 다시 다른 곳으로 가서 구걸하여 먹고 마시는 것이었으니, 이것이 그 남자가 배불리 먹고 마셨던 방도였던 것이다. 그 아내가 집에 돌아와 그 첩에게 말하기를, “남편은 우리가 우러러 받들면서 평생을 함께 사는 분인데, 지금 이러구 다니는구려.”라 말하였다. 낙심한 두 여자가 함께 남편을 비난하다가 뜰안에서 울고 있는데, 남편은 아무 것도 모른 체 거들먹거리면서 들어와서는 자기 처와 첩에게 한껏 뽐내는 것이었다.
맹자가 옮긴 이 이야기에는 대장부니, 천장부니 하는 말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남의 초상집에 가서 제사밥이나 구걸해 먹으면서, 모모 유력자와 함께 놀았다고 재고 다니는 이 사람, 그는 누구인가. 이게 바로 비루한 남자, 째째한 남자 아닌가. 아니 비루하다고 하기에도 모자라 불쌍하고 애처롭기까지 하다. 이 험한 세상에 밥술이나 떠먹고 살아가기엔 실상 대장부, 대인은 너무 높고 고고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천장부, 졸장부는 면해야 되는 것 아닌가. 장관, 총리라면 우리 대통령을 도와서 우리 국민들을 이끌어가는 분들인데, 그들의 청문회를 보면서 코흘리개 시절 나의 오래된 기억 속에 있는 어버이의 꾸지람 말씀 중 졸장부가 떠오르고 그 위에 맹자가 말한 천장부가 오버랩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바보상자 속에서 진땀 흘리는 양반들이 내가 아닌데도 나의 마음속에 예전에 그랬듯이 부끄러움이 되살아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의 아버지 어머니는 고인이 되신 지 이미 오래다. 일본 통치기에 태어나 한국동란을 겪고, 부모님 모시고 형제 처자식 먹여 살리기에 평생을 고단하게 사셨던 분들이다. 이 어른 말씀 하나를 떠올리면서 맹자가 말한 대장부, 대인론을 맺으련다. 나의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사람이 이 세상 살면서 재물이나 권력이나 명예나 그 중에 하나를 이루면 충분하다. 셋 중에 둘도 너무 많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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