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송 전형필은 어떤 사람인가
올 해는 간송 전형필 선생 탄생 100주년 되는 해입니다. 간송
전형필 선생님은 많은 분께서 알고 계시듯이 자기의 전 재산을
받쳐 일본으로 반출되는 우리 문화재를 사들여 시들어 가는
민족 문화의 위대함을 지켜낸 분이십니다. 또 어렵게 모은 문화
재를 널리 많은 사람들과 같이 연구하고 알리고자 한국 최초의
사립미술관인 보화각(현 간송미술관 전시실)을 설립하였습니다.
간송미술관은 그런 전형필 선생님의 유지를 받들어 일년에 두
번(5월, 10월) 특별 무료 기획전시회의 개최하는데 이번 5월
전시회가 70회가 되니 기획전시를 시작한지도 벌써 35년이
되었습니다. 문화재에 특별히 관심이 없는 분들이라도 한번쯤
을 들어보셨을 간송미술관 기획전은 간송 전형필 선생님의
유지를 받들어 언제나 무료관람입니다.
저 개인적으로 옛 그림에 대해 본격적인 관심을 갖게 된 계기도 바로 간송미술관 기획전을 통해서
입니다.
특히 올 해는 간송 탄생 100주년 특별전으로 소장품 중 지정 문화재(국보와 보물)와 간송미술관을
대표하는 작품들이 대거 전시되어 전시회 첫날 개장시간 10시부터 50m 이상 입장을 위해 줄을
서는 풍경이 연출되기도 했습니다..
<간송미술관 입구 – 탄생 100주년 기념 전시회 첫날>
미술관은 성북 초등학교 정문과 맞데고 있는데(오른쪽 방향에 성북초교 정문이 있다)
그 이유는 원래 북단장 땅의 일부를 간송이 성북초등학교 부지로 기증했기 때문입니다.
간송 선생님의 삶을 살펴보면 정말 이러한 이야기가 맞는 이야기구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
니다. 어떻게 막대한 재산을 소유하게 되었는지, 어떻게 문화재 수집이란 생각을 갖게 되었는지,
일제시대와 6.25 전쟁 속에서 주요 미술품을 어떻게 지켜냈는지를 알게 되면 한마디로 기적이고
하늘의 뜻 아니라면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첫 번째 기적은 어떻게 간송에게 그 많은 재산이 생기게 되었는가 입니다.
간송 전형필은 1906년 7월 26일 서울 종로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 종로4가 일대는 ‘배우개’라는
이름으로 부렸는데 전형필이 태어난 배우개 양반댁은 종로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간송의 선대는 장사를 천하게 여기던 시절 양반으로서 상업에 일찍 눈을 떠 배우개의 상권을
하나씩 넓혀나가면서 모은 재력으로 전국 각지의 농지를 계속 구입하여 간송의 증조부인 계훈
시절에 수만 석을 추수하는 갑부가 되었습니다.
<1925 을축년 간송생부 옥포공 회갑연시>
1925년은 여름에 을축년 홍수라고 불리우는 대규모 물난리가 났으며 이로 인해
대흉년으로 간송가도 추수를 받기는 커녕 소작인들의 기근을 구제하여야 했던 해이다.
그래서 회갑연도 가족끼리 모여 조촐하게 치루어졌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아름다운 것에 대해 유달리 많은 관심을 보였던 이성과 감성이 둘 다 잘 발달
되어 주위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어린 간송은 슬픔이 사람을 키우듯 말수가 적어지고 생각이
많은 소년으로 변해갔습니다.
그 후 간송은 휘문보고를 입학하였고 집안의 대를 위해 18살에 결혼도 합니다. 당시 미술교사였던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인 고희동 선생을 만난 것도 그 시절이었습니다. 그 무렵 간송에게
남모르게 서적을 구입하는 취미를 갖기 시작하는데 처음에는 특별한 의미가 없는 그냥 취미
수준이었습니다.
어째든 간송은 고등학교 시절에 이미 양가 집안 도합 10만석의 추수가 가능한 땅과 재산을 상속
받을수 있는 유일한 집안 종손이 되어버린 간송은 서양화를 전공하였지만 조선에 들어와 민족
문화의 말살을 안타까워 동양화로 전환한 춘곡 고희동 선생을 만나면서 그 운명적 인생의 장이
시작되었습니다.
1926년 휘문고등학교를 졸업한 간송은 곧바로 도교 와세다 대학 법학과에 입학했습니다. 당시
식민지 백성으로서 일본 유학생활은 깊은 갈등과 절망감을 맛보는 시기였습니다.
특히 초등학교 시절 종로 모퉁이에서 3.1 만세 운동을 가슴 뛰며 지켜보았던 간송으로서는 항쟁의
의식이 남달랐기에 나라를 빼앗기 처지에서 대학생활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라는 고뇌가 언제나
그를 괴롭혔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입술을 깨물며 학업에 열중하는 한편 고서점에서 책을
구입하며 스스로를 위로하곤 했습니다.
그러던 중 고서점에서 책을 고르고 있던 간송은 일본학생에게 식민지인 조선인에게도 그런 게
의미가 있느냐는 식의 조롱을 받게 되는데 그때 망국노의 설움을 뼈저리게 느끼게 됩니다. 그
일이 얼마나 분했으면 나중에 그 당시 분위기를 고스란히 회고 할 만큼 아픈 경험이었습니다.
대학교 3학년 방학을 맞이하여 고향에 돌아온 간송은 잊을 수 없는 은사인 춘곡 고희동 선생을
만나 울분을 토하며 서로를 위안하던 중 춘곡 선생의 소개로 운명적인 인물을 만나게 되니 그가
바로 독립선언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인 위창 오세창 입니다.
아..위창 오세창, 추사 김정희 학문의 적통을 이어받은 당대 최고의 감식안이자 서예의 대가.
간송으로서 그 와의 만남은 인생에서 자신의 사명을 깨닫게 되는 중요한 만남이었습니다. 특히
그의 저서인 [근역서화징]을 보며 문화재에 대한 안목과 올바른 관점을 배우며 위창에게 직접
글씨와 서화를 배우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간송은 문화재란 그것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주체성과 정신적 가치가 깃든 일종의
유산이기에 우리 문화재란 우리 민족의 정신이 함축된 유산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그러한
문화재가 일본에게 빼앗기는 것은 민족혼의 말살이며 민족에게 미래가 점점 없어지는 것임을
확실히 알게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간송은 위창에게 무엇을 해야 할지 깨우쳐주셔서 감사하다는 고백을 하게 되는데
당대 최고 노학자인 위창은 20대 초반의 간송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너무 많은 책임을 지워 미안
하다고 말하며 스승과 제자를 뛰어넘는 인간적 관계를 맺게 됩니다.
<보화각 상량 기념사진> 왼쪽부터 청천 이상범, 월탄 박종화, 춘곡 고희동,
석정 안종원, 위창 오세창, 간송, 박종목, 심산 노수현, 이순황
간송이 위창을 만나 문화재 수호의 뜻을 세울 무렵 간송의 가정에는 또 한번의 슬픔이 찾아옵니다. 홀로된 형수가 세상을 떠나고 이듬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납니다. 이렇게 해서 어른이라고는
어머니 한 분만 남아 십만 석의 재산을 상속 받은 청년가장이 됩니다. 간송집안은 부유하다고
해서 돈을 함부로 쓰는 집안이 아니 였으며 어려서부터 허튼 곳에서는 한 푼도 쓰지 않도록 교육
받아왔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 간송은 본격적으로 문화재 공부와 수집에 몰두하는데 당대 최고의
감식안인 위창이 뒤에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1934년 7월 간송은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성북리에 있는 양옥과 그 주변 땅을 사들였고 그 집을
‘북단장’ 이라 이름 붙이고 1938년 윤 7월 5일에 드디어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관인 보화각을
건립하여 상량식을 치룹니다.
<보화각 전경> 건물 분위기나 주변의 모습이 지금과는 많이 다릅니다.
동경대 건축과를 나온 박길용이 보화각을 설계했습니다
바로 북단장과 보화각이 지금 간송미술관 입니다.
1938년은 일제의 폭압정치와 민족문화 말살 정책이 극에 달할 때였고 동시에 대동아전쟁의
와중이었습니다. 양권(糧券)이 없는 사람은 밥을 굶을 정도로 어려운 시기에 보화각을 짓는
공사는 조선 최대의 사건이었습니다. 간송이 보화각을 세운 것은 일제에 대한 문화적 저항의
표시였습니다.
<간송 전형필 생전모습> 어렵게 수집한 문화재를 보면서 어떤 감회를 가지셨을까?
청화백자철사진사국화문병(국보294호) 높이 42.3 . 목이 길지만 풍만한 몸체가 눈부시게 하얀색이고 그 흰 비단에 수를 놓은 듯 진사(붉은 색 광석에서 빼낸 안료)와 철사(장석을 주성분으로 산화철을 섞어 만든 흑갈색 물감)로 들국화가 그려져 있으며 푸른 청화 안료로 금방 날아 가버릴 듯한 나비가 새겨진 보기 드문 명품은 그렇게 우리 민족의 품에 안식을 찾은 것입니다.
천학매병을 구입하기 위해 판 대구지역 5천석 지기 땅이 지금의 시가로 4천억 정도 한다니 가격산정이 불가능 할만도 합니다. [훈민정음]과 더불어 영원히 해외반출이 불가한 문화유산입니다. 한가지 안타까운것은 뒷쪽 보이지 않는 부분이 조금 깨져있다는 점입니다. 도굴꾼들이 쇠꼬챙이로 땅을 찍어보는 과정에서 생긴 상처입니다.
<괴산외사리부도> 6.25 사변 때 파손되어 또다시 각 부재가 흩어진 것을 1964년 2월 3일 간송의 대기일을 맞는 날에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렀다. 화강암재의 8각 원당형 부도로서 4장의 장방형 판석으로 짜여진 지대석위에 놓여졌다.
<삼층석탑> 앙련이 꼭 촛불같다. 3층의 옥개석 중 반전되는 일부분이 훼손되어 안타까움을 주고 있으나, 전체적으로 아담하면서 따뜻한 느낌을 주는 석탑이다. 상륜부는 하나의 돌로 구성된 노반과 복발만이 남아 있고, 그 이상의 것은 소실된 상태이다. 이 삼층석탑은 탑신의 초층 옥신이 2층과 3층에 비해 지나치게 커 보이고, 옥개받침이 3단인 점 등 양식상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 작품으로 추정할 수 있다.
<훈민정음 원본> 국보 지정 논란 때마다 국보 1호로 재지정 되어야 한다는 논란을 일으키는 훈민정음. 조선왕조신록과 더불어 세계 기록 문화유산으로 지정 되어 있다. 해례가 붙어 있어서 ‘훈민정음 해례본’ 또는 ‘훈민정음 원본’이라고도 한다. 전권 33장 1책의 목판본이고 국내 유일본이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훈민정음은 세종 25년(1443)에 왕이 직접 만들었으며, 세종 28년(1446)에 반포한 것으로 되어있는데, 이 책의 발견으로 그 사실이 증명되었다. 또한 한글의 제작원리도 확연하게 드러났는데 구강 원리를 기초로 창제 되었음이 증명되었다.
당시 1942년도는 전황이 나날이 고조되어 일본이 극도로 예민한 시기였고 조선어학회 사건이 일어난 해입니다. 일제가 우리말을 금지하자 조선어학회는 서둘러 우리말 사전을 편찬하려 하다가 한글학자 33인이 체포돼 모진 고문을 당했고 역사를 연구하는 연구 모임인 진단학회가 강제 해산되었던 해입니다. 그런 시절에 훈민정음이 나타나다니.. 일본인이 이 사실을 알면 어떨지 명약관화한 일입니다. “책 주인이 일천 원을 불렀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 돈 구하러 가는 길입니다” 간송은 그의 손을 잡고 천천히 말했습니다. “나와 여러 번 거래해봐서 아시겠지만 물건은 제 값을 주고 사야지요” 그리고 선뜻 일만 일천 원을 전해주면서 “책 주인에게 일만 원을 전하세요. 그리고 일 천원은 수고 비로 받으세요” 이렇게 해서 훈민정음(국보70호)은 일제 치하에서 무사히 보존 될 수 있었습니다. 그 가치를 정확히 알고 있는 간송이 아니었으면 그 누가 그렇게 큰 돈을 내어 투자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 후 간송은 세종 때 발간한 동국정운(국보 71호)과 거문고 악보인 금보(보물283호)등을 구입하는데 하늘이 보우하지 않았다면 어찌 이러한 유물들이 일제 치하에 살아 남았겠습니까… 이밖에도 아궁이 속에서 건져낸 혜원 신윤복의 [해악전신첩]등 여러 이야기가 있지만 너무 길어져 줄이도록 하겠습니다. 이야기가 점점 종착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다음편에는 6.25 전란을 이겨낸 기적적인 이야기와 더불어 제가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왜 제가 간송의 이야기를 시작했는지 저의 속마음을 말입니다.
참고문헌 :[간송문화] 41호- 간송선생 평전
[간송문화] 51호- 간송이 문화재 수집하던 이야기
[간송문화] 55호- 간송 전형필과 위창 오세창
[간송문화] 70호- 간송 전형필
[간송선생님이 다시찾은 우리문화유산이야기] 한상남 도서출판 샘터
[위창 오세창] 이승연 도서출판 이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