벡스코에서 커피를 맛 보다
무더위가 일찍 찾아왔다.
아는 이 네 명과 함께 부산가톨릭대학교 평생학습원에 갔다. 오늘부터 7월까지 금요일마다 금강경 강해가 있다. 강의는 오전 2시간이며, 오늘은 11시 50분에 마쳤다. 점심은 동래 명륜동 조방낚지로 정했다.
오후엔 김해 수안리에서 수국을 즐기기로 하였지만 나는 그들을 배신(?)하였다. 양심 없는 내 이기심이 어이없는 짓을 했다.
벡스코에서 열린 <부산커피박람회>는 토요일에 끝난다.
‘내일 김해서 벡스코까지 2시간, 오늘 명륜동에서 가면 30분, 수안리 수국은 여러 번 본 적도 있고......오늘 벡스코에 가야겠다‘ 란 생각에 점심 뒤에 나는 일행과 헤어짐을 택했다.
유월의 햇살만 따가웠던 것은 아니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순간 내 이기심이 미워졌지만, 전시장에서 흘러나오는 은은하고 구수한 커피 향에 불편한 마음은 누그러졌다.
이런 커피 전시회는 처음이다. 다 채워지지 않은 작은 컵, 한 모금이면 맛을 음미하기엔 충분하다. ’이게 네가 원하는 맛‘이라고 주장하는 커피를 찾을 수 없었다. 나는 시큼한 맛이 좋다.
자메이카 블루 마운틴, 파나마 게이샤, 하와이안 코나.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는 커피, 그 앞에서 발이 굳었다. 이 매장은 무료로 작은 컵을 주지는 않았다. 다른 커피에 비하여 높은 가격이라 살 마음이 선뜻 들지 않았다. 쩝쩝, 입맛을 다시며 돌아섰다.
배회, 그 시간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발은 자메이카와 파나마로 향했다.
두리번거리며 망설이는 나를 간파한 듯이 사장은 선뜻 5000원을 깎아주겠다고 했다. 나는 신용카드를 힘차게 내밀었다.
블루 마운틴과 게이샤 각 200g씩을 봉지에 담고 건네는 점원이 마실 커피를 주겠다며 상큼하게 웃었다.
"아이스커피로 드릴까요?"
"아뇨. 따뜻한 커피로 주세요."
서른 살인 딸 나이와 비슷한 점원은 밝게 웃으며 말했다.
"선생님은 커피에 진심이네요."
나는 멋쩍게 웃으며 고맙다는 말을 남겼다.
삶이 무엇인지 정답은 없다. 옳다고 여기는 선택만 있을 뿐이다. 뒷날 이 선택이 잘못되었어도 따질 일은 아니다. 뜻대로 되지 않은 선택을 후회한들 되돌릴 수 없고, 우울한 마음만 만들 뿐이다. 그래도 회한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일 것이다.
'커피에 진심인 것처럼 나는 내 삶에 얼마만큼 진심이었을까?'
전시장 밖 햇빛을 보기에 부끄러워 구석을 찾아 맥없이 주저앉았다.
"삶에 진심이네요."
이 나이까지 오면서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을까?
'나는 진심으로 삶을 살기는 살았을까?'
이 생각은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에서 내게 떠나지 않은 화두가 되었다.
젊은 날엔 길을 찾았다. 삶엔 목적이 있다고 여겼다.
하고픈 일과 주어진 현실에서 방황도 하였다. 방황은 잠깐이었다.
주어진 현실은 외면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하고픈 일을 포기하진 않았다. 조율을 하였다.
능력이 뛰어나다고 칭찬을 받지는 못 하였지만 성실한다는 건 인정받았다.
삶이란 내 마음대로 나아가는 게 아니었다. 그리 녹록한 게 아님을 절실히 느꼈다.
좌절할 수밖에 없는 상황은 하고픈 일을 포기하길 강요하였다.
주어진 현실만 택하라고 주문하였다. 비빌 언덕이 없는 나로서는 할 수 없었다.
아쉬움에 뒤돌아보고, 억울함에 현실에서 가끔 도망도 갔다. 무너지는 마음을 잡아야 했다.
주어진 현실에는 책임이나 의무가 아닌 사랑으로 돌보아야 할 가족이 있었다. 무너질 수도 없고 도망갈 수도 없었다. 혹독한 삶에서 버틸 힘은 가족이었다.
젊은 날 내 방황을 멈추게 한 산이 그리웠다. 결혼할 때 아내는 산행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라고 하여서 그렇게 살아왔다. 아내와 딸과 아들은 내가 산에 가는 것을 응원하였다.
산은 기꺼이 나와 벗이 되길 마음을 내주었다.
산, 삶, 정상, 삶의 목적지.
산은 말했다.
’정상은 모든 이가 목적지로 삼지 않아도 다다르는 곳’이라고,
어느 날 우연히 읽은 책, 어느 철학자가 한 말이 머릿속에 머물렀다.
태어남과 죽음, 삶이란 신이 정해준 것이 아니다. 삶이란 우연의 연속일 뿐이다.
삶엔 목적은 없다. 그냥 사는 것이다. 이런 내용이었다.
오래되진 않았다. 어느 해 가을에 합천 해인사를 갔다.
큰절인 해인사와 딸린 암자 여러 곳 가운데 지족암에서 희랑대를 보면서 느꼈던 일이다.
불교에서 지족(知足)과 노자 선생이 말씀하신 뜻은 다를 수 있지만 통할 수도 있다.
지족은 곧 해탈이다. 지족암에서 이 뜻을 안다면 희랑대를 바라보며 환희를 느낄 수 있다.
도가에선 지족은 만족을 뜻한다. 만족은 지금, 존재함에 대한 고마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사회적으로 그럴싸한 직책을 가진 적도 없고, 해외여행을 자유롭게 할 만큼 쌓은 물질도 없다. 나는 매일 눈 뜰 때와 감을 때 하늘을 향해 ‘고맙습니다’라고 말을 한다.
노자는 지족자부(知足者富)라고 말씀하셨다. 지족하는 자는 부자란 뜻이다.
어쩌면 나는 부자다.
김해서 20대 후반에 창업을 하여 성공한 친구가 있다. 연매출 5000억 원 이상을 하는 것으로 안다. 법인인 회사 주식을 빼더라도 굴릴 수 있는 현금도 수십 억 원이 될 것이다.
이런 친구가 나만 보면 내가 부럽다고 한다. 괜한 소리로 들었다. 나는 그 친구가 부럽다.
그 친구는 몸에 이상이 있음을 알았다. 몸이 아프기 전에도 그 친구는 내가 부럽다고 하였다. 10년 흘렀다. 아픈 몸은 더 나빠졌다. 어쩌다 만나면 그 친구는 말한다, 내가 부럽다고.
나는 이제 안다. 그 친구가 왜 나를 부러워하는지를.
그 친구는 존재함에 대한 고마움을 몰랐다. 돈 버는 일 말고도 삶엔 또 다른 것이 있음을 몰랐다. 나는 감사함으로 지족한 삶을 살았다. 떠날 수 있을 때 훌쩍 떠나는 내 자유로움도 그 친구는 부러워했다.
그 친구가 나를 부러워한 까닭을 알지만 나는 아직도 그 친구가 부럽다. 그는 앞만 보고 치열하게 살았다. 나는 그의 치열함이 부러웠던 것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삶엔 정답이 없다.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하는가에는 지혜가 필요하다.
오늘도 도덕경을 폈다.
“그러므로 족할 줄 아는데서 얻는 만족감만이 영원한 만족감입니다.”
(지족지족상족의/ 知足之足常足矣)
-『도덕경』「제46장」중에서. 원전 노자/풀이 오강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