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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산경표를 따라서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율
내포문화숲길 1. 1코스 (수덕사-연암산 천장사-한서대입구).
◈ 구간 거리 및 소요시간 : 17.3km(수덕사3km포함) . 6시간 22분(수덕사 1시간 13분 포함 ).
원효 깨달음길 1코스 : 수덕사 주차장-수덕저수지-광천2리 2차선도로-광천저수지-구 45번도로 고개위-
독고개(한치고개버스정류장)-언쟁이고개- 천장사-연암산(440.8m)-각시바위(비녀바위)-임도-대곡2리 한서대입구.
◈ 일시 : 2018. 1. 8(월).
◈ 날씨 ; 춥지 않고 잔뜩 흐림. 저녁엔 눈,비가 오더니 다음날까지 폭설.
◈ 지도.
내포문화숲길 1. 1코스 (수덕사-연암산 천장사-한서대입구). 개념도.
내포문화숲길 1. 1코스 (수덕사-연암산 천장사-한서대입구). 지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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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문화숲길 1. 1코스 (수덕사-연암산 천장사-한서대입구). 지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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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랙.
◈ 일정정리.
07 ; 35. 천안에서 장항선 기차 타고
08 : 25/ 50. 삽교역 도착(7분 연착).역 좌측에 있는 버스정류장에서 수덕사 가는 553번 버스를 탐.
09 : 24. 수덕사 주차장 도착. 버스 종점이라 섯다 가는줄 알았더니 그냥 돌아 나간다. 벨을 눌러야 선다.
대형주차장 입구에 1구간 안내판이 있다.내포길은 대형주차장을 지나 소방서 앞길로 간다.
오랜만에 왔으니 수덕사를 돌아본다.덕숭총림인 큰절이라 돈냄새가 나게 잘 꾸몄다.
10 ; 37. 수덕사를 둘러보고 문화해설사가 타주는 커피 한 잔 마시고 오는데 3km에 1시간 13분 걸렸다.
10 : 44. 수덕저수지. 우측으로 덕숭산을 보며 둑을 건너간다.
10 ; 46. 십자가 표시를 한 묘지들이 앞에 보이는곳에서 좌측으로 들어서
다시 직진 능선이 아니고 좌측으로 나무토막 다리를 건너 묘 3기가 있는 능선위로 올라간다.
10 ; 58. 덕숭산에서 내려온 지능선을 넘어간다.좌우로 산길이 잘 나 있고 표지기들도 보인다.
11 ; 04. 멋진소나무 아래 장의자 2개.광천리와 삼준산조망.
11 ; 09. 쌍수대 500m표지석.우측으로 꺽어 일직선도로를 따라가며 덕숭산과 가야산, 뒷산조망.
11 ; 14. 2차선도로에 광천2리 버스정류장.
우측으로 꺽어 조금 나가 좌측 마을길로 들어가 광천2리 마을회관을 지난다.
11 ; 24. 광천저수지.예산군 덕산면인데 농어촌공사 홍성지사장과 홍성소방서장 안내판이 있다.
뒤로 홍동산을 보고 150여m 올라간 삼거리에선 우측길로 올라간다.
11 : 40. 신45번국도 교각아래. 달제농장,뉴캐슬펜션표지판을 지나며 은근히 힘들게 올라왔다.
오름길은 10여분 더 계속된다.뒤로 광천저수지위에 있는 홍암마을과 올라온 길이 보인다.
11 : 51. 구 45번도로. 표고 240m.우측에 (주)녹수 덕산공장.500~511번 버스정류장.
좌측으로 도로따라 13분을 가는동안 지나는 차는 별로 없고 폐주유소를 지난다.
12 : 01. 예산군과 서산시 경계 표지판과 관광 예산 표지석과 대곡1리(한티고개). 버스정류장.
금북정맥 가야산-뒷산-삼준산, 연암산으로 이어지는 20~30km되는 분,단맥급 산줄기다.
12 : 03. 60여m 내려간 삼거리에서 좌측길로 간다.천장암 2.3km 안내판과 표지석. 내포길 안내판.
독고개 이정표와 해설판. 어제밤에 내린눈으로 내려가는 길이 미끄럽다.
연암산과 산수저수지를 보며 해미터널위를 지나간다.
12 ; 16. 대곡2교 하신길 삼거리. 서산아마레솔바람길 안내판과 천장사 1km 이정표.
계속 세멘길을 따라 가며 내림길이 끝나고 은근한 오름길이 시작된다.
12 : 24/51. 바람기가 없는곳을 찾아 떡과 커피로 점심.눈밑이 얼음판이라 엉덩방아 짛고.
12 : 59. 연쟁이고개 안내판과 정자.표고 260m. 서산 아메라길 안내판과 이정표. 삼준산 1.7km.천장사 0.78km.
좌측 삼준산쪽도 길이 좋다. 우측 능선위로 난 세멘길을 간다.
13 ; 07. 만월정자.천장사 가는길과 연암산으로 직접 올라가는 산길이 갈린다.
세멘길따라 좌측으로 내려가며 봉화산(228.1m)과 신송저수지 ,서해안고속도로가 내려다 보인다.
13 : 18. 천장사(天藏 寺). 경허스님과 삼월 세 제자인 수월,헤월.만공스님이 수행하던 곳이다.
절아래의 화장실 우측 고월정(古月精)뒤 능선으로 오른다. 제법 가파르게 올려챈다.
13 ; 47. 좌측에서 올라오는 능선위에 올라 우측으로 올라간다.
전망좋은 넓은 바위가 있어 날이 좋으면 삼준산과 봉화산, 도비산과 안면도를 보며 쉬어가면 좋겠다.
14 ; 02. 연암산(燕岩山.440.8m). 산불감시 카메라와 이정표(비녀바위 700m.삼준산,장요리 1km. 천장산장요리 500m).
가야산부터 덕숭산.한티고개,뒷산,독고개,삼준이 조망된다.내포길은 정상전에 허릿길로 건너간다.
14 ; 18/20. 정자. 갈 능선과 한서대와 가야산, 원효봉,뒷산과 덕숭산을 둘러보고 바로 아래에 비녀바위.
14 : 22. 각시바위(비녀바위).아랫동네사람들이 산제를 올리는 곳이란다.
14 ; 31. 좌측으로 초록리 하산길을 지난 조망처. 가야산부터 독고개까지와 연암산을 돌아보고
잠시 바위구간을 내려서면 편안한 산길이 이어진다.
14 ; 46. 334.6m전 안부. 능선길이 우측으로 휘어 내려간다.대곡리 하산길까지는 아직 두어개의 봉을 더 넘어야한다.
14 ; 59. 앞봉넘어 연암산성 안내판.좌로 꺽어 내려가 장의자가 있는 앞봉에서 우측으로 내려간다.
15 ; 08. 좌측에서 온 임도따라 우로 꺽어 내려간다.한서대 입구 3.69km. 천장사 3.16km
15 ; 35분에 있는 해미에서 예산가는 511번 버스를 탈수있을까 싶어 부지런히 간다.
15 ; 18. 임도에서 좌측 지름길로 내려섰다. 길은 좋고 한서대입구 2.9km 안내판.
아래동네에 산다는 산책나온 젊은(?)부부를 만났는데 버스 시간은 모른단다.
15 : 30. 돌아온 임도를 다시 만났다.앞은 사방댐. 운동기구들 있고 좌측으로 내려간다.
15 ; 33. 임도에서 좌측 산밑으로 난 수렛길로 간다.내포길 안내판이 있지만 도로따라 가기 쉽다.
15 : 38. 소하천을 건너는 세멘다리를 건너 좌측으로 간다.한서대입구 0.62km.
방금전에 버스 한 대가 우측 해미터널쪽으로 갔다.소하천둑길을 좀더 가다 우측으로 간다.
15 ; 42. 둑길에서 우측 흙길로 들어서 45번 도로로 나간다.
15 : 45. 45번국도. 길건너에 대곡2리 표지석과 원효길 2구간 안내판과 버스정류장.
1코스 끝내고 우측 대곡2리 버스정류장에서 버스시간표를 보니 510, 511 노선이 없다.
다음지도에선 이곳과 좀더 우측의 한서대정문 모두에서 510. 511번버스가 있는데
510.511버스는 시외버스가 서는 한서대정문 정류장에서 서는가 보다.
15 ; 50. 길건너 우측의 한서대정문정류장에서 해미로 가는 시내버스를 탓다.
해미에서 15 ; 43분에 한서대경유 천안가는 버스가 있는걸 몰라서 고생했다.
15 ; 57. 해미 시내버스 터미널에서 내려 물어보니 시외버스는 해미농협앞에 따로 있단다.
16 ; 02/45. 40여분을 한데서 기다려 천안가는 버스타니(8900원) 면단위 정류장마다 들려간다.
19 ; 35. 천안도착. 홍성을 지나며 부터 눈,비가 쏟아지더니 밤새도록 내리고 다음날까지 20cm이상 폭설이 내렸다.
내포문화숲길 전체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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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문화숲길은 가야산을 중심으로 홍성,예산, 당진, 서산등 4개 시군을 돌며
4개 테마에 총 26코스로 총길이는 약 320km쯤 된다.
07 ; 35. 천안에서 장항선 기차타고
08 : 25/ 50. 삽교역도착(7분 연착).
역 좌측에 있는 버스정류장에서 수덕사가는 553번 버스를 탐.
08 : 25/ 50. 삽교역 버스 시간표.
09 : 24. 수덕사 주차장 도착. 버스 종점이라 섯다 가는줄 알았더니 그냥 돌아 나간다. 벨을 눌러야 선다.
대형주차장 입구에 1구간 안내판이 있다.내포길은 대형주차장을 지나 소방서 앞길로 간다.
오랜만에 왔으니 수덕사를 돌아본다.수덕사는 덕숭총림인 큰절이라 돈냄새가 나게 잘 꾸몄다.
09 : 24. 수덕사 주차장에서 본 금북정맥 덕숭산과 원효깨달음길 1코스 안내판.
대형주차장 우측끝 소방서쪽으로 간다.
수덕사 선문. 덕숭산덕수총림수덕사 편액.
선문.일주문. 금강문 사천왕문등 4개의 문을 지난다.
입장료는 대인 3000원. 경로 무료.
삼일동안 닦은 마음은 천년을 가는데
백년을 탐한 재물은 아루아침 이슬같단다.
두 번째 문인 일주문(산문).여의주를 문 용이 조각돼있다.
문화해설사가 상주하고 좌측에 禪미술관과 수덕여관.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본사(本寺)이다.
창건에 대한 뚜렷한 기록이 없어 창건설화가 분분하나,
사기(寺記)에는 백제 말에 숭제법사(崇濟法師)에 의하여 창건되었다고 하며
제30대 무왕 때 혜현(惠現)이 『법화경』을 강론하였고, 고려 제31대 공민왕 때 나옹(懶翁)이 중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설에는 599년(법왕 1)에 지명법사(知命法師)가 창건하였고 원효(元曉)가 중수하였다고 한다.
창건 이후의 상세한 역사는 전하지 않지만, 한말에 경허(鏡虛)가 이곳에 머물면서 선풍(禪風)을 크게 일으켰고,
1898년(광무 2)에 경허의 제자 만공(滿空)이 중창한 뒤 이 절에 머물면서 많은 후학들을 배출하였다.
우리나라 4대 총림(叢林)의 하나인 덕숭총림(德崇叢林)이 있으며, 많은 수도승들이 정진하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국보 제49호)을 중심으로 좌우에 명부전(冥府殿)을 비롯한 백련당(白蓮堂)‧청련당(靑蓮堂)‧염화실(拈花室)‧
조인정사(祖印精舍)‧무이당(無二堂)‧심우당(尋牛堂)‧황하정루(黃河精樓)‧천왕문‧금강문‧일주문(一柱門)‧범종각(梵鐘閣) 등이 있다.
대웅전은 1308년(충렬왕 34)에 건립된 건물로서 건축사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대웅전 안에는 중앙의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약사불, 아미타불의 삼세불이 모셔져 있다.
이 목조삼세불좌상(보물 제1381호)은 만공이 전라북도 남원에 있는 만행산 ‘귀정사(歸淨寺)’로부터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대웅전 앞마당에는 여래탑이라고도 불리는 삼층석탑(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03호)이 있으며,
1936년 대웅전 중수 때 발견된 벽화는 건립 당시의 것으로서 주악공양비천도(奏樂供養飛天圖)‧수화도(水花圖)‧
야화도(野花圖)‧금룡도(金龍圖)‧오선도(五仙圖) 등이 있었으나, 지금은 서까래에 희미하게 금룡도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일주문은 도톰하게 깎은 돌기둥 두 개에 기와지붕을 얹고 있다.
‘덕숭산수덕사(德崇山修德寺)’라고 쓴 현판은 손재형(孫在馨)의 글씨이며,
지붕의 처마에는 붉은 여의주를 문 용이 조각되어 있다.
범종각에는 1973년에 조성된 무게 6,500근의 종이 봉안되어 있다.
이 절의 산내암자로는 정혜사(定慧寺)를 비롯하여 견성암(見性庵)‧금선대(金仙臺)‧환희대(歡喜臺) 등이 있다.
현재 이 절의 말사는 66개이다.
이 가운데 정혜사에는 비구 선원인 능인선원(能仁禪院)이 있으며,
견성암에는 비구니 선원인 제일선원(第一禪院)이 있다.
또 금선대에는 진영각(眞影閣)이 있으며, 진영각 안에는 만공의 영정과 유물이 보관되어 있다.
환희대는 『청춘을 불사르고』를 지은 김일엽(金一葉)이 기거하다가 죽은 곳이며, 견성암 또한 김일엽이 기거하던 곳이다.
이밖에 이 절에서 소장하고 있는 문화재로는 노사나불괘불탱(蘆舍那佛掛佛幀, 보물 제1263호), 만공탑(滿空塔,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81호),
칠층석탑(예산군 문화재자료 제181호), 근역성보관(槿域聖寶館)에 소장된 거문고(예산군 문화재자료 제192호) 등이 있다.
노사나불괘불탱은 1673년(현종 14)에 제작된 괘불로서 노사나불을 단독으로 나타낸 독특한 형식의 그림이다.
적색과 녹색을 주로 사용하고 공간을 오색의 광선으로 처리하여 화려하고 환상적인 느낌을 준다.
만공탑은 만공을 추모하기 위하여 제자들이 세운 탑으로서 구형(球形)의 둥근 돌이 올려져 있는 특이한 부도이다.
조인정사 앞에 세워진 칠층석탑은 화강암으로 만든 탑으로서 지대석 위에 기단 면석 외부로 두드러지게 우주를 표현하고 있는데
면석에는 두께 10㎝ 정도의 사각 테두리가 돌려져 있다.
기단 위에 탑신부의 옥신은 없는데, 그 대신 4개의 정사면체 석재를 주춧돌처럼 놓아 1층 옥개석을 받치도록 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근역성보관(槿域聖寶館)에 소장되어 있는 거문고는 만공이 고종의 둘째 아들인 의친왕 이강으로부터 받은 것으로서
이 거문고에는 이조묵(李祖默)이 새긴 공민왕금(恭愍王琴) 이라는 글씨와 함께 만공의 시가 새겨져 있다.
좌측 禪미굴관.
내려올때 들려보니 아트샆과 개인전을 하고 있다.
금강문.부처님 경호원들이다.
금강저를 가지고 부처님을 경호하는 야차신인 밀적금강(작은사진 우.문 왼쪽에 )과
불법을 수호하는 힘이 코끼리의 백만배가 된다는 나라연금강(사진 좌. 문 오른쪽에).
사천왕문.
나쁜것을 물리치고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광목천왕과 재복부귀를 맡고 도량을 지키는 다문천왕(좌)
백성을 편안케하는 지국천왕과 증장천왕(우).
수덕산 안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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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공기념관앞.
만공스님에 대한 얘기는 천장사에서 찾아보자.
황하정루앞의 코끼리석등.
건물 내부는 성보 박물관
오늘은 시간이 없으니 대충 둘러보고 성보박물관,정혜사. 금선대,견성암,만공탑등은
다음 5구간을 끝내는날 다시 들려 차근차근 둘러 봐야겠다.
황하정루앞의 포대화상.
포대화상(布袋和尙. ~970추정))
명주(明州) 봉화(奉化) 사람, 혹은 정정(長汀) 사람이다.
오대(五代)시대 후량(後梁)의 고승(高僧)으로 성씨와 이름의 출처를 알 수 없다.
단지 스스로 계차(契此)로 일컬었고, 호는 장정자(長汀子)이다.
이 고승은 늘 작대기에 포대, 즉 자루를 메고 다니면서 무엇이든 동냥한 것을 그 속에 담곤 하였기 때문에 그러한 별명을 얻게 된 것이다.
이 포대화상은 배가 나오고 대머리이며 때로는 호탕하게 웃고, 때로는 거칠면서도 선종에 명석하였던 인물로
미륵보살의 현신(現身)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한시각의 <포대화상도>가 현존 유품 가운데 가장 시대가 올라가는 예가 된다.
설탄 한시각은 17세기 조선 화단에 선종화의 영향을 강하게 남긴 화가로 잘 알려져 있다.
통신사의 일원으로 일본을 다녀왔던 경험도 그의 이런 화풍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코끼리석앞의 7층석탑.
만공스님이 건립한 석탑이다.
황하정루에 걸린 선지종찰수덕사(禪之宗刹修德寺) 편액과 덕숭총림(德崇叢林) 편액은 덕수총림 전방장이신 원담 진성스님이 쓰셨다.
叢林 이란
승려들의 참선을 위한 시설인 선원(禪院), 경전 교육 기관인 강원(講院.승가대학 도는 승가대학원),
계율 교육 기관인 율원(律院.율학승가대학원).및 염불원을 갖추고
본분종사인 방장의 지도하에 대중이 여법하게 정진하는 졸합수행도량을 말한다.
우리나라 5대 총림에는 갸야총림 해인사, 영충총림 통도사, 조계총림 송광사, 덕숭총림 수덕사, 고불총림 백양사가 있다.
2012년에 3개 총림(금정총림 동래 범어사.팔공총림 대구 동화사. 쌍계총림 하동 쌍계사)이 추가됐다.
•우리나라의 5대 사찰:부산 범어사, 양산 통도사, 순천 송광사, 구례 화엄사, 합천 해인사
•우리나라의 3보 사찰:불보사찰 통도사, 법보사찰 해인사, 승보사찰 송광사가 있다.
수덕사 안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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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덕사 대웅전- 삼충석탑-금강보탑.좌측은 백련당.
우측 법고각과 청련당(좌).
좌측 범종각과 범종각뒤 무이당,백련당(우).
금강보탑,삼층석탑, 대웅전,백련당(좌), 청련당(우)과 뒤로 덕숭산.
금강보탑.
내려다 본 금북정맥 홍동산과 일월산
법고와 목어.
북을 치는 이유는 땅위에 있는 짐승들을 깨우고 제도하기 위해서이고
목어는 수중생물을 제도하고
운판은 나는 새들을 제도함이요
범종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들을 제도하기 위함이다.
목탁은 목어에서 유래된것으로 그 소리를 듣고 목어의 유래에 얽힌 전설이나
눈을 감지 않는 고기를 연상하여 쉬지않고 정진하라는 경각심을 깨우쳐주기 위함이란다.
수덕사 대웅전앞에 있는 삼층석탑.
수덕사 대웅전.국보 49호다.
수덕사 대웅전.국보 49호다.
국보 제49호. 앞면 3칸, 옆면 4칸에 겹처마와 맞배지붕을 지닌 주심포계 건물이다.
배흘림이 현저한 기둥은 낮고 기둥 사이는 넓어서 안정감을 주며,
헛첨차를 써서 공포가 주두 아래에서 시작되는 백제계 건축양식을 보여준다(→ 백제미술).
마루보와 대들보의 낙차를 크게 두고 우미량을 겹으로 걸어 지붕에서부터
계속된 우미량의 율동미가 소슬합장의 곡선, 이중량의 곡면과 함께 백제계 특유의 우아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1937년부터 4년간에 걸친 해체·수리 작업중에 발견된 묵서명에 의해 1308년(충렬왕 34)에 세워졌음이 확인되었다.
충청남도 지역의 대표적인 건물로서 건축연대가 뚜렷하며 이 시기 목조건물 양식편년의 기준이 되는 것으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보물 1381호인 수덕사 대웅전 목조삼불과 목조연화대좌.
삼불은 1938 만공스님께서 남원 귀정사에서 이운한 목조삼불인데
석가모니불,약사불,아미타불로 현실세계,동방만월세게,서방국락세계를 상징한다.
목조연화대좌는 거의 유일한 고려시대목조연화대좌다.
후불탱화 석가삼불도는 1908(순종2년)에 조성된 것으로
중앙에 석가불, 좌우로 약사불과 아미타불.
보물 1263호인 노사나괘불.1637(조선 현종13년)조성.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하기 위해 법당앞에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는 괘불화로,
설법인을 한 노사나불을 주존을 모셨다.
대웅전 좌측의 관음전.
관음전은 관음보살이 주원융통(周圓融通)하게 중생의 고뇌를 씻어주는 분이라는 뜻에서 원통전(圓通殿)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에서 보살을 모신 당우로 관음전이 많이 세워진 까닭은, 관음이 모든 환란을 구제하는 보살일 뿐 아니라
그의 서원이 철두철미하게 중생의 안락과 이익에 있고, 불가사의한 인연과 신력(神力)으로 중생을 돕기 때문이다.
관음전 내에는 왼손에 연꽃이나 감로병을 들고 연화좌 위에 앉은 관음상을 안치하는 것이 일반적인 통례이나
버들가지를 들고 있는 양류관음(楊柳觀音), 보관 위에 11개의 다른 모습을 가진 십일면관음,
그 밖에 해수관음(海水觀音)·백의관음(白衣觀音)·용두관음(龍頭觀音)·천수관음(千手觀音) 등을 모시기도 한다.
후불탱화(後佛幀畵)로는 양류관음도·백의관음도·천수천안관세음보살도(千手千眼觀世音菩薩圖) 등,
봉안된 관음상의 유형에 따라 봉안하게 된다.
또, 관세음보살의 협시(脇侍)가 되고 있는 남순동자(南詢童子)와 해상용왕(海上龍王)은
조각상으로 봉안하기가 어려우므로 거의가 후불탱화에만 나타나고 있다.
건축구조상 가장 대표적인 것은 보물 제242호로 지정된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태장리개목사(開目寺)의 원통전이 있다.
대웅전 우측의 명부전.
유명계의 심판관인 시왕(十王)을 봉안하고 있으므로 시왕전(十王殿)이라고도 하며,
지장보살(地藏菩薩)을 주불(主佛)로 봉안하고 있으므로 지장전(地藏殿)이라고도 한다.
법당에는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좌우에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을 협시(脇侍)로 봉안하고 있다.
그리고 그 좌우에 명부시왕상을 안치하며, 시왕상 앞에는 시봉을 드는 동자상 10구를 안치한다.
이 밖에도 판관(判官) 2구, 녹사(錄事) 2구, 문 입구에 장군(將軍) 2구 등 모두 29개의 존상(尊像)을 갖추게 된다.
이들 중 주존불인 지장보살은 불교의 구원의 이상을 상징하는 자비로운 보살로
모든 인간이 구원을 받을 때까지 자신은 부처가 되는 것을 미루겠다는 대원을 세웠고,
천상에서 지옥에 이르는 육도(六道)의 중생을 낱낱이 교화시켜 성불하도록 하는 역할을 맡았기 때문에,
명부전은 조상의 천도를 위한 근본 도량으로 널리 이용되고 있다.
또 시왕은 지옥에서 죽은 자가 지은 죄의 경중을 가리는 10명의 왕이며,
일반적으로 대표적인 지옥의 왕이라고 생각하는 염라대왕도 이 10명의 지옥왕 가운데 다섯번째 왕이다.
원래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그날로부터 49일까지는 7일마다,
그 뒤에는 100일·소상(小祥)·대상(大祥)까지 열 번에 걸쳐 각 왕에게 살아 있을 때 지은 선악의 업을
심판받게 된다고 하여 죽은 사람의 명복을 위하여 절에서 재(齋)를 모시게 된다.
이 때 명부전에서 재를 모시게 되는 까닭은, 지장보살의 자비를 빌려
시왕의 인도 아래 저승의 길을 벗어나 좋은 곳에서 태어나게 하고자 하는 데 있다.
명부전에 봉안하는 후불탱화는 소재회상도(消災會上圖)로, 지장보살 뒤에는 지장탱화를 봉안하고
시왕 뒤편에는 명부시왕탱화를 봉안한다.
궁극적으로 이 명부전은 지장신앙과 명부시왕신앙이 결합되어 불교적으로 전개된 법당이다.
명부의 시왕은 일차적으로 불교의 수호신으로 신중신앙(神衆信仰)에 속해 있었지만,
나중에 시왕이 지니고 있던 원래의 모습인 명부 심판관의 성격이 다시 강조됨에 따라 독립된 것이 명부전이다.
우리 나라 사찰에서는 매월 일정한 날에 명부전에서 지장제(地藏祭)를 지내고 있다.
명부전은 일반적으로 대웅전을 향하여 우측 편에 위치하며,
대표적인 것으로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전등사(傳燈寺)의 명부전과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선운사(禪雲寺)의 명부전을 들 수 있다.
대웅전앞 전경.
범종.
환희대 二尼寶塔과 원통보전.
만공스님깨서 창건하고 일엽선사와 경희 효상좌께서 만년에 주석하셨던곳으로
그 법제자들이 수선정진하는 도량이다.일엽선사께서 입적하신 후 孫上佐 송월. 정진 두 스님이 힘을 합하여
기념도량을 정비하고 원통보전을 건립하였다.
원통보전은 덕숭총립 초대 방장이신 혜암선사께서 증명하시고 2대 방장이신 벽초선사께서 터를 잡으시고
3대방장이신 원담선사께서 불사를 직접 진두지휘하여 건축하였다.
월송, 정진 두 스님을 二尼로 하여 기리고자 다보탑을 세우고 二尼寶塔으로 명명했다는 글이다.
환희대 터.
일엽스님이 만년에 주석했던 집터다.
수덕여관.
수덕사 경내에는 시선을 끄는 초가집 한 채가 있다. 일주문에서 선미술관을 지나 좌측에 있는 수덕여관이다.
고암 이응노 화백이 한국전쟁 때 피난처로 사용한 집으로 충청남도 기념물 제103호다.
그는 1959년 프랑스로 건너가기 전까지 이 공간에서 작품활동을 했다.
여관은 정면 5칸이 길에 접해 있으며 반대편으로 각각 6.5칸과 4칸이 ㄷ자형 날개를 이룬다.
이응노 화백이 동백림사건으로 귀국했을 때 고향에서 삼라만상의 영고성쇠를 문자로 새긴 것이 여관 북쪽 귀퉁이에 남아 있다.
그에 앞서서는 일엽스님의 친구인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화가 나혜석이 중이 되겠다고 만공스님을 찾아와
3년을 제자가 되겠다고 조르며 묵었던 집이다.
이응로 선생 사적지.
부도.
맨 좌측이 혜암 현문스님(惠菴. 1884~1985.초대방장), 1984년 100세에 미국에 능안선원설치.
가운데가 벽초 경선스님(碧超.2대방장(1년).1899~1986), 수덕사- 정혜사 1080계단을 설치. 禪農一如思想을 실천
우측이 최고의 禪筆로 수덕사의 많은 편액을 쓰신 원담 진성스님(圓潭.3대방장. 1926~2008)
수덕사 산하 상가들.
10 ; 37. 다시 돌아온 1코스 시작점.대형차 주차장입구다.
수덕사를 둘러보고 문화해설사가 타주는 커피 한 잔 마시고 오는데 3km에 1시간 13분 걸렸다.
주차장을 내려와 화살표 방향으로 간다.
10 : 44. 수덕저수지.
우측으로 덕숭산을 보며 둑을 건너간다.
10 ; 46. 십자가 표시를 한 묘지들이 앞에 보이는곳에서 좌측으로 들어서
다시 직진 능선이 아니고 좌측으로 나무토막 다리를 건너 묘 3기가 있는 능선위로 올라간다
10 ; 58. 덕숭산에서 내려온 지능선을 넘어간다.
좌우로 산길이 잘 나 있고 표지기들도 보인다.
11 ; 04. 멋진소나무 아래 장의자 2개.
광천리와 삼준산(489.4m)조망.
11 ; 09. 쌍수대 500m표지석.
우측으로 꺽어 일직선도로를 따라가며 덕숭산과 가야산, 뒷산조망.
우측에 보이는 산이 가야산이고 금북정맥이 가야산에서 좌측 뒷산으로 와서 우측 아래의 나븐들고개로 해서
아래사진의 덕숭산으로 간다.
덕숭산(좌측 뒤)
11 ; 14. 2차선도로에 광천2리 버스정류장.
우측으로 꺽어 조금 나가 좌측 마을길로 들어가 광천2리 마을회관을 지난다.
11 ; 24. 광천저수지.
예산군 덕산면인데 농어촌공사 홍성지사장과 홍성소방서장 안내판이 있다.
뒤로 홍동산을 보고 150여m 올라간 삼거리에선 우측길로 올라간다.
광천저수지에서 뒤 돌아 본 금북정맥 홍동산(우. 309.4m)
.
150여m 올라간 삼거리에선 우측길로 올라간다.
달제농장앞에서 본 독고개.
11 : 40. 신45번국도 교각아래. 달제농장,뉴캐슬펜션표지판을 지나며 은근히 힘들게 올라왔다.
오름길은 10여분 더 계속된다.뒤로 광천저수지위에 있는 홍암마을과 올라온 길이 보인다.
구 45번도로에 올라서기 전에 뒤 돌아본 모습
광천저수지위에 있는 홍암마을(좌)과 삼준산(우끝뒤)이 보인다.
11 : 51. 구 45번도로. 우측에 덕산 9km,아산48km표지판
표고 240m.우측에 (주)녹수 덕산공장.500~511번 버스정류장.
좌측으로 도로따라 13분을 가는동안 지나는 차는 별로 없고 폐주유소를 지난다.
12 : 01. 예산군과 서산시 경계 표지판과 관광 예산 표지석과 대곡1리(한티고개). 버스정류장.
금북정맥 가야산-뒷산-삼준산, 연암산으로 이어지는 20~30km되는 분,단맥급 산줄기다.
12 : 03. 60여m 내려간 삼거리에서 좌측길로 간다.천장암 2.3km 안내판과 표지석. 내포길 안내판.
독고개 이정표와 해설판. 어제밤에 내린눈으로 내려가는 길이 미끄럽다.
연암산과 산수저수지를 보며 해미터널위를 지나간다
독고개 이정표와 해설판
해미터널을 지나서 뒤 돌아 본 독고개.
12 ; 16. 대곡2교 하신길 삼거리.
서산아마레솔바람길 안내판과 천장사 1km 이정표.
계속 세멘길을 따라 가며 내림길이 끝나고 은근한 오름길이 시작된다.
12 : 24/51. 바람기가 없는곳을 찾아 떡과 커피로 점심.눈밑이 얼음판이라 엉덩방아 짛고.
12 : 59. 흥정 붙이던 연쟁이고개.
가야산-뒷산-해매고개(독고개)에서 올라와 한줄기는 삼준산으로 가고 한줄기는 연암산으로 왔다.
안내판과 정자.표고 260m. 서산 아메라길 안내판과 이정표. 삼준산 1.7km.천장사 0.78km.
좌측 삼준산쪽도 길이 좋다. 우측 능선위로 난 세멘길을 간다.
13 ; 07. 만월정자.천장사 가는길과 연암산으로 직접 올라가는 산길이 갈린다.<작은 그림은 퍼온그림이다>
세멘길따라 좌측으로 내려가며 봉화산(228.1m)과 신송저수지 ,서해안고속도로가 내려다 보인다.
세멘길따라 좌측으로 내려가며 본 연쟁이고개-삼준산능선(우).
천장사(天藏 寺)위치와 연암산.
장요마을에서 올라오는 세멘길이 무척 가파르다.
천장사(天藏 寺)앞이다.
수월선사 기념비와 혜월스님 동굴.
수월대사의 유일한 법문이란다.
“도를 닦는다는 것이 무엇인고하니, 마음을 모으는 거여.
별거 아녀. 이리 모으나 저리 모으나
무얼 해서든지 마음만 모으면 되는겨
하늘 천 따지를 하든지, 하나둘을 세든지, 주문을 외든지,
워쩌튼 마음만 모으면 그만인 겨.
나는 순전히 "천수대비주"로 달통한 사람이여
꼭 "천수대비주"가 이니더라도
"옴마니반메홈"을 혀서라도 마음모으기를,
워찌꺼나 아무리 생각을 안하려고 해도
생각을 안 할수 없을 맨큼 혀야 되는겨.
수월(水月)선사.1855~1928)
자신의 흔적을 세상에 거의 남기지 않은 근대의 고승으로 일자 무식이었다.
하지만 그는 한국 근대 선풍의 중흥조 경허(鏡虛)선사의 맏이로 그의 법을 이어 받았다.
그는 자신을 거의 나타내지 않았고 오직 자비행만 실천하면서 바람처럼 구름처럼 살다 떠났다.
당초 스님은 경허의 친형인 태허(太虛) 성원(性圓)에게 계를 받았다.
후에 경허에게 법을 배워 혜월(慧月)과 만공(滿空)과 더불어 경허가 자랑하는 ‘세 개의 달(月)’ 중 큰 제자다.
수월의 법명은 음관(音觀). 충남 홍성군 신곡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머슴살이를 했다.
그의 성이나 이름도 확실하지 않다. 그 자신도 단 한번도 자신의 신분을 얘기한 적이 없다고 전한다.
그는 29살에 홍성 연암산 천장암(天藏庵)을 찾아 출가해 성원 스님의 제자가 되었지만,
배우지 못한데다 머리까지 둔해 불경을 한 자도 외우지 못했다.
이에 지친 태허 스님이 수월에게 부목과 공양주 소임만 3년간이나 맡겼다.
워낙 머리가 둔해 다른 일을 시킬만 한게 없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그를 바보로 평가하고 함부로 대했다.
33살이던 어느 날 부처님 사시 마지를 가지고 법당에 갔다. 마침 부전스님이 천수경을 외고 있었다.
"나모라 다나다라 야야 나막알약 바로기제 새바라야 모지 사다바야 ....
나모라 다나다라 야야 나막알약 바로기제 새바라야 사바하."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천수경을 듣는 순간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한번 듣고 모두 기억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머리가 나빠 그토록 바보라며 구박만 받았는데 442자인 천수경을 한 번 듣고 다 외우고 만 것이다.
이 때부터 스님은 밥을 짓거나 나무를 하러 가거나 오직 천수경을 외우며 생활했다.
어느 날, 밤늦게 태허 스님이 방앗간 앞을 지나는데 물레방아는 돌아가는데 “쿵 쿵”하는 방앗공이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이상한 생각에 방앗간을 들여다본 태허를 깜짝 놀랐다.
수월이 돌확 속에 머리를 박고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물레방아는 돌아가도 방앗공이는 멈춰 있었다.
태허가 수월을 급히 끌어내자 방앗공이는 ‘쿵’하며 내려왔다.
태허는 느끼는 바가 있어 그날 수월에게 법명과 사미계를 내려 정식으로 출가를 인정했다.
그리고 동생 경허를 법사로 정해주었다.
이날부터 수월은 용맹전진에 들어갔다. 방에 들어간 수월은 문을 걸어 잠그고 천수경을 외우기 시작했다.
하루 이틀 사흘.... 문밖으로 밤낮가리지 않고 천수경 외는 소리만 들려 왔다.
그로부터 7일째 되는 날. 수월이 방문을 박차며 뛰어 나왔다.
"스님, 잠을 쫓았습니다."
일자무식이어서 경전을 읽지도 못하고 신도들의 축문도 써지 못했던 수월은 이날부터 사람이 변해 있었다.
불망념지의 신통력을 얻은 후 부터는 어떤 경전이나 문장도 막히는 게 없었다.
한 번 보고 들은 경전이나 문장은 모두 기억했다.
조계종 종정을 지낸 고암 스님의 회고에 따르면 수월 스님은 4월 초파일 때 신도들이 원하는 바를 축원하기 위해
신도의 가족 상황을 듣기만 하고 법당에서 이름과 순서 하나 틀리지 않고 부처님에게 축원하는 것을 직접 보았다는 것이다.
당시는 대가족제여서 보통 한 가족이 20여명의 이름을 축원했다.
절 신도가 수백명이면 수 천명의 이름을 기억해야 하는데 스님은 이름을 다 기억하셨다고 한다.
수월은 깨달음을 얻고 틈틈이 스승 경허로부터 짚신 삼는 기술을 배웠다.
나중에 수월은 북간도에서 머물 때 수많은 동포들에게 짚신을 삼아주었다.
수월은 평생 울력과 묵언, 하심의 수행에 철저했다. 간혹 큰 절에서 조실로 모셔걌으나 오래 머물지 않았다.
한 동안 스님은 유점사 마하연에서 조실로 계셨다. 그 때 있었던 일이다.
스님은 낮에는 나무를 하고 밤에는 수행에 정진하셨다. 절에서 가꾸는 채소밭이 있는데 맷돼지 피해가 심했다.
그래서 수월 스님이 채소밭을 가꾸고 돌보자 맷돼지와 벌레 들의 피해가 사라졌다고 한다.
어느 날 공양주가 무가 너무 잘 자라 먹음직스럽자 몰래 무를 하나 뽑아 먹다 턱이 빠지고 말았다.
그날 밤 공양주 꿈에 산신이 나타나 꾸짖는 게 아닌가.
“ 그 무를 누가 가꾸는데 감히 함부로 손을 대다니”
공양주는 이튼날 새벽 수월 스님을 찾아가 용서를 빌었다.
수월 스님이 그말을 듣고 산신각으로 올라가 말했다.
“뭐 그깐 일로 그래. 좀 봐주게나”
그러자 공양주의 빠진 턱이 금새 나았다는 것이다.
스님은 경허의 세 달중 상현달이 되어 20여 년간 북간도에 머물면서
나라를 잃고 떠돌던 조선 민초들에게 묵묵히 짚신과 주먹밥을 만들어주며 살았다.
수월은 자비로웠다. 특히 천수경을 좋아해 평생 천수경을 외우면 살았다고 전한다.
스님에 관한 기록은 거의 없다. 오도송이나 열반송도 전해지지 않는다.
그는 북간도에서 작은 초막을 짓고 손수만든 짚신과 주먹밥을 내놓고 오가는 사람들이 가져 가도록 했다는 것만 전해온다.
스님은 겨울이 오기 전 쌓아둔 이삭과 무시래기를 새와 산짐승들에게 나눠 주었다.
수월스님 주변에는 만주 들판의 사나운 짐승들도 순한 모습으로 앉아 있다가 산으로 돌아가곤 했다는 것이다.
스승 경허 선사가 입적하자 세 제자의 반응이 달랐다고 한다. 수월은 크게 웃었다. 혜월은 춤을 추었으며 만공은 울었다.
수월은 스승이 이제 세상 인연을 끊고 극락으로 가셨으니 좋아서 웃었고, 혜월은 극락간 것을 축하하며 춤을 추었다고 한다.
스님은 74세로 입적했다. 개울에서 몸을 정갈하게 씻은 후 짚신을 머리에 이고 열반에 들었다.
스님을 다비하고 다음날 마음 주민들이 현장을 살피기 위해 올라갔더니 남쪽으로 간 발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고 한다.
구한말 스님. 혜월은 혜명(慧明)의 법호이다.
경허선사의 법제자이며, 근대 선풍을 진착시키고, 불교를 중흥시킨 선사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무심도인(無心道人)이었고 천진무구, 그 자체였다고 한다.
원효관련 사찰 통영 안정사 산내암자인 은봉암에는 은봉성석(隱鳳聖石)이 있다.
세 개의 바위로 이루어져 있어 도인이 출현할 때 마다 하나씩 넘어졌는데,
혜월선사가 출현할 때에 그 중 하나가 넘어졌다고 전한다.
혜월스님은 1861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났고, 속성은 신(申)씨였다.
11살 때 예산 정혜사에서 득도하였고 1884년 천장암에서 경허선사로부터 보조국사 지눌의 수심결을 배우면서부터
글공부를 시작, 처절한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 경허선사로부터 인가를 받아
“그대는 남방에 인연이 있으니 남쪽으로 내려가라”는 스승의 분부에 따라
선산의 도리사, 팔공산의 파계사, 울산의 마타암, 통도사의 극락암, 천성산 내원사,
부산 선암사에서 선풍을 크게 드날리고 1937년 부산 금정산 안양암에서 세수 77. 법랍 66세로 입적했다.
많은 일화를 남겼는데 그 중 하나를 소개한다.
스님은 가끔 대중법회를 열고 설법을 하셨는데“나에게는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활인검(活人劍)과 사인검(死人劍), 두 자루의 명검이 있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경상남도 전지역을 관할하고 있던 일본인 헌병대장이 바로 이 명검에 대한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
“스님께서 활인검, 사인검, 명검을 가지고 계신다기에 그걸 구경하러 왔소이다.”
“그러신가. 그럼 보여줄테니 나를 따라 오시게.” 혜월 스님은 섬돌 축대위로 성큼성큼 올라가셨다.
헌병대장도 스님의 뒤를 따라 섬돌 축대 위로 올라갔다.
그 순간, 스님이 느닷없이 돌아서서 헌병대장의 뺨을 후려쳤다.
헌병대장은 순식간에 축대 밑으로 굴러 떨어졌다.
스님이 축대 밑으로 내려와 한 손을 내밀어 헌병대장을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방금 전, 당신의 뺨을 때린 손이 죽이는 칼이요,
지금 당신을 일으켜 세우는 손은 살리는 칼이오.”
헌병대장은 그제서야 크게 깨닫고 스님께 삼배를 올리고 돌아갔다.
혜월스님은 어려서 글공부를 해본 일이 없는 까막눈이었다.
경허선사를 천장암에서 모시고 있던 혜월은 어느 날 경허선사께 글공부를 가르쳐달라고 간청했다.
"뒤늦게 글공부는 무슨 글공부를 하겠다고 그러는가?"
"글 공부 하는데 이르고 뒤늦고가 어디 따로 있겠습니까? 배우면 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어디 한번 배워 보게나."
혜월은 그날부터 경허선사로부터 <수심결>을 배우며 마음 닦는 법과 한문, 두 가지를 한꺼번에 익히게 되었다.
그후 혜월은 불교의 진리가 글자 속에 있지 아니함을 깨닫고 바위 밑에 뚫린 토굴속에 들어가 오직 화두참구에 매달렸다.
때는 엄동설한, 바위굴 속의 돌바닥위에 정좌하고 며칠동안 화두만 들고 있었으니
온몸이 얼음처럼 얼어갔지만 혜월은 몸이 얼어 굳어 가는 것도 잊은 채 참선삼매에 빠져 있었다.
혜월이 바위 밑 토굴에 들어간지 7일째 되던날,
경허선사와 만공이 토굴속으로 들아가보니 혜월의 몸은 이미 얼어서 굳어있었다.
"이것 보게 만공, 혜월의 몸이 얼어 앉은채로 굳어버렸어."
"스님, 날씨가 너무 추워 얼어죽었나 봅니다."
"아니야. 눈빛이 아직 살아 있으니 죽지는 않았어. 어서 가서 따뜻한 물이나 갖고 오게나."
만공이 천장암으로 급히 내려가 더운물을 가져다가 가까스로 혜월을 구했다.
혜월은 짚신 삼는 솜씨가 뛰어나서 남이 한 켤레 삼을 동안에 세 켤레를 너끈히 삼아내는 탁월한 솜씨를 보여주곤 했다.
그리고 틈만 나면 짚신을 삼아서 나뭇가지에 걸어놓고 아무나 필요한 사람이 신도록 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알았다.
아직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채 토굴속에서 참선삼매에 빠져있던 어느 날, 스승 경허선사가 짚단을 토굴 안으로 던져 넣으며 한마디 하셨다.
"내일은 먼길을 떠나야겠으니 짚신이나 한 켤레 삼아 주게나."
혜월은 스승의 분부를 받자 곧바로 짚신을 삼기 시작했다.
그리고 짚신을 다 삼은 후 마지막 손질을 하느라고 나무망치로 짚신을 탁탁 두드렸다.
그 순간, 나무망치 소리에 천하의 문이 활짝 열렸다.
드디어 깨달음의 한순간이 혜월에게 찾아온 것이었다.
혜월은 감격과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경허선사께 달려갔다.
"그대는 대체 참선은 무엇하러 하는가?"
"못에는 물고기가 뛰고 있습니다."
"허면 자네는 지금 어디에 있는고?"
"산꼭대기에 바람이 지나 갑니다."
경허선사는 그 자리에서 혜월이 한 소식 얻었음을 인가하시고 전법 게송을 내린 뒤,
"그대는 남쪽에 인연이 있으니 이 길로 남쪽으로 내려가라"고 일렀다.
그리고 제자가 마지막으로 삼아준 짚신을 신고 천장암을 떠났고, 혜월 또한 그 길로 남쪽으로 향했다.
이것이 스승과 제자의 마지막 이별이 될 줄이야 혜월이 어찌 상상이나 했으랴.
혜월스님이 양산의 내원사에 계실 때의 일이었다.
어느 여름날 스님이 출타하려고 산길을 내려가고 있었는데 계곡 냇물에서 한무리의 아이들이 물고기를 신나게 잡고 있었다.
스님이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아이들이 들고 있는 바구니 안에는 이미 잡아놓은 물고기들이 몇 마리 펄떡거리고 있었다.
"이 물고기들 모두 너희들이 잡은 것이냐?"
"예 스님. 우리들이 잡았심니더."
"그럼 말이다. 이 물고기 모두다 나한테 팔아라."
"예? 아니 물고기를 팔라니요?"
"내가 값을 후하게 쳐줄 것이니, 이 물고기들 다 나한테 팔란 말이다."
"값을 후하게 쳐주신다구요?"
"그래 그래. 그 돈으로 너희들은 사탕이나 사먹으면 그게 더 좋지 않겠느냐?"
혜월스님은 기어이 아이들을 달래 후한 값을 쳐주고 바구니에 담겨있던 물고기를 모두 다 샀다.
그런데 물고기 바구니를 건네 받은 혜월스님은 그 자리에서 물고기들을 냇물에 풀어주었다.
바구니에 갇혀있던 물고기들은 그야말로 이제야 살았다는 듯이 흐르는 물결을 따라 뿔뿔이 흩어져 떠내려갔다.
아이들이 다시 소리를 지르며 물고기를 잡으러 쫓아 내려가더니 여기 저기서 "잡았다. 잡았다." 하며 소리를 질렀다.
"그 물고기 나에게 팔아라."
결국 혜월스님이 돈을 주고 사서 냇물에 풀어주었던 물고기들은 대부분 다시 잡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혜월스님은 이번에도 또 후한 값을 쳐주고 그 물고기들을 모두 다 사서 또 다시 냇물에 풀어 주었다.
그러나 물고기는 또 금방 아이들 손에 붙잡히는 신세가 되었다.
혜월스님은 이번에도 또 돈을 주고 물고기를 사서 냇물에 풀어주었다.
세상에 참 별 이상스러운 스님도 다 있다는 듯, 아이들이 스님을 이상스런 눈빛으로 쳐다보며 물었다.
"스님, 왜 물고기를 돈주고 사서 자꾸 냇물에 풀어 주시는 겁니까?"
"왜는 인석들아, 물고기들이 불쌍해서 그런다."
"불쌍해서요?"
"그래. 헌데 이번에는 또 안잡을거냐?"
아이들은 그제서야 멋쩍은듯, 고개를 가로 저으며 시무룩하게 말했다.
"이자 그만 잡을랍니더."
그리고 아이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고기 잡던 도구들을 챙겨 산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었다.
혜월스님은 그제서야 흡족한 웃음을 지으며 아이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자무식으로 출가득도 했던 스님, 혜월스님은 바로 그런 스님이셨다.
#혜월혜명선사(불교신문)
천장사(天藏 寺)와 7층석탑.
凹자형 집에 가운데가 인법당이고 경허.만공스님방은 저앞쪽 좌측방이다.
탑은 석가모니의 사리를 안치하기 위해 세운 건조물로, 사찰 가람에서 중요한 건축물 중 하나이다.
천장사 칠층석탑의 건립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초기 건립은 천장사의 창건 시기와 큰 차이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탑의 상태는 옥개석과 옥신 및 상륜부 등에서 이질성이 관찰되며,
이것은 무너진 탑의 탑재석을 모아서 다시 건립한 것으로 추정된다.
탑신부의 옥신석에 모서리를 나타낸 점, 옥개석 밑에 2개의 층급 받침을 둔 점 등으로 미루어 재건립 시기는 고려 중기로 추정된다.
천장사(天藏 寺).
안내판은 햇볕에 바래 안보여서 퍼왔다.
좌측집은 스님들 수행처고 그뒤에 산신각이 있다.
우측집이 윗사진 법당.
경허스님과 삼월 세 제자인 수월,헤월.만공스님이 수행하던 방이다.
경허탑은 경허스님 열반 100주년(2012)에 세웠다.
경허스님 열반송 .
(열반송은 고승들이 입적할 때 수행을 통해 얻은 깨달음을 후인들에게 전하는 마지막 말이나 글을 말합니다.
열반게(涅槃偈)·열반송(涅槃頌)·입적게(入寂偈)라고도 합니다).
「 마음 달 홀로 둥굴어 그 빛 만상을 삼켰구나.
빛과 경계 다 공 하였거늘 다시 이 무슨 물건 인고?」
원상을 그려 놓으시고 붓을 던져 버린 후 우측으로 누우시고
암연히 천화(遷化)하시니 임자년 음 4월 25일 이었다.
우리들(혜월.만공)이 예를 갖추어 장례를 올리니
저 산엔 해가 솟고 있었도다.
다시 이 무슨 물건인고? .
경허스님방.
경허스님.
우측은 천장사방에 걸린그림이고 좌측은 퍼온사진.
경허(鏡虛, 1849년 ~ 1912년)는 한국 근현대 불교를 개창한 대선사이다.
1849년 전주 자동리에서 아버지 송두옥(宋斗玉)과 어머니 밀양 박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여산(礪山)으로, 속명은 동욱(東旭)이다. 법호는 경허(鏡虛), 법명은 성우(惺牛)이다.
9세 때 경기도 과천 청계산에 있는 청계사로 출가하였다.
1879년 11월 15일[모호한 표현], 동학사 밑에 살고 있던 진사인, 이처사(李處士)의 한 마디,
'소가 되더라도 콧구멍 없는 소가 되어야지.' 이 한마디를 전해듣고는, 바로 깨달았다.
콧구멍 없는 소(牛無鼻孔處: 우무비공처)는 중국 법안종의 종주 법안(法眼) 선사의 어록에 실려 있는 선어다.
당시 경허의 시봉을 받들던 사미승 원규는 경허의 사제인 학명의 제자였고, 이처사는 사미승 원규의 속가 아버지였다.
1880년 어머니와 속가 형님인 스님이 주지로 있던 연암산 천장암으로 거처를 옮긴다.
천장암은 충청남도 서산시 고북면 장요리 연암산에 있는 도량으로
백제 무왕 34년인 633년 백제의 담화선사가 창건한 천년고찰이다.
경허는 연암산 천장암의 작은 방에서 1년 반동안 치열한 참선을 한 끝에 확철대오하게 되고
"사방을 둘러 보아도 사람이 없구나"라고 시작하는 오도송을 짓는다.
천장암에서 경허의 '삼월(三月)'로 불리는 수월스님과 혜월스님과 만공스님이 출가하여 함께 수행하게 된다.
제자들과 함께 천장암에서 지내다가 개심사 부석사 간월암등지를 다녀오기도 하였는데
이 때 경허스님과 제자들간의 많은 일화가 전한다.
1886년 6년 동안의 보임(保任)을 마치고 옷과 탈바가지, 주장자 등을 모두 불태운 뒤 무애행(無碍行)에 나섰다.
한동안 제자들을 가르치다가, 돌연 환속하여 박난주(朴蘭州)라고 개명하였고,
서당의 훈장이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함경도 갑산(甲山) 웅이방(熊耳坊) 도하동(道下洞)에서
1912년 4월 25일 새벽에 임종게를 남긴 뒤 입적하였다. 나이 64세, 법랍 56세이다. 저서에는 《경허집》이 있다.
경허 선사의 수제자로 흔히 '삼월(三月)'로 불리는 혜월(慧月, 1861년 - 1937년), 수월(水月, 1855년 - 1928년)·
만공(滿空, 1871년 - 1946년) 선사가 있다. 경허는 '만공은 복이 많아 대중을 많이 거느릴 테고,
정진력은 수월을 능가할 자가 없고, 지혜는 혜월을 당할 자가 없다'고 했다.
삼월인 제자들도 모두 깨달아 부처가 되었다. 이들 역시 근현대 한국 불교계를 대표하는 선승들이다.
1904년 7월 15일, 만공스님에게 전법게를 주고서, 천장암을 떠났다.
법자 만공에게 주다수산 월면에게 글자 없는 도장을 부쳐 주고 주장자를 잡아 한 번 치고 이르기를
"다만 이 말소리가 이것이다.라고 하였으니 또 말해 봐라. 이 무슨 도리인가?"
또 한 번 치고 이르기를 "한 번 웃고는 아지 못커라, 낙처가 어디인가.
안면도의 봄물이 푸르기를 쪽과 같도다." 하고 주장자를 던지고 흐음하고 내려오다.
현재, '북송담 남진제'의 두 큰스님의 경우에, 송담스님은 경허(75대)-만공(76대)-전강(77대)-송담(78대)의 계보이고,
진제스님은 경허(75대)-혜월(76대)-운봉(77대)-향곡(78대)-진제(79대)의 계보이다.
1849년 전라북도 전주 자동리 출생
1847년, 경기도 과천 청계산에 있는 청계사로 출가(9세)
1879년 11월 15일, 이처사의 '소가 되더라도 콧구멍 없는 소가 되어야지.' 한마디를 전해듣고 깨달음(31세)
1886년, 6년 동안의 보임(保任)을 마치고 무애행 시작(37세)
1902년, 천장암에서 혜월스님에게 혜월이란 법호와 전법게를 내림(53세)
1904년 7월 15일, 만공스님에게 전법게를 주고 천장암을 떠남(55세)
1912년 4월 25일, 환속하여 훈장을 하다가 열반(64세)
<위키백과에서>
만공스님방.
만공스님.
만공(滿空, 1871년 ~ 1946년 10월 20일)은 조선과 일제 강점기의 승려이자 독립운동가이다.
한국 현대 불교의 대선사로, 석가모니 이래 제76대 조사이다. 속세의 성은 송씨로, 송만공으로도 부른다.
조선총독부의 불교정책에 정면으로 반대하여 조선 불교를 지키려 하였다.
또한 선불교를 크게 중흥시켜 현대 한국불교계에 큰 법맥을 형성하였다.
본관은 여산(礪山)으로, 본명은 도암(道巖)이다. 법명은 월면(月面)이며 만공은 법호이다.
그는 이론과 사변을 배제하고 무심의 태도로 화두를 구할 것을 강조하고 간화선(看話禪)의 수행과 보급에 노력하였다.
제자들에게 무자화두에 전념할 것을 가르쳤다. 1940년대에는 덕숭산에 머무르며 선불교의 진흥을 위해 힘쓰다가
1946년 예산 전월사에서 입적했다. 경허(75대) - 만공(76대) - 전강(77대)으로 법맥이 이어졌다.
춘성은 한때 그의 문하에서 수행하기도 했다.
만공 월면은 1871년(고종 8년) 전라도 태인군 군내면 상일리(지금의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 태흥리 )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송신통(宋神通)이며 어머니는 김씨였다. 본관은 여산으로 본명은 송도암(宋道巖)이다.
법명은 월면(月面)이고 만공은 법호이다. 따라서 월면 스님으로도 불렀다.
1883년 전라북도 김제군 금산사에 올랐다가 어느날 불상을 보고 감동하여 출가를 결심,
그길로 내려와 공주군 동학사에 입산하여 진암(眞巖) 문하에서 행자 생활을 하였다
1884년(고종 20년) 경허(鏡虛, 성우 1849 ~ 1912)의 인도로 서산군 천장사(天藏寺)에서
태허(泰虛)를 은사로 출가하였고, 경허(鏡虛)를 계사하여 사미십계(沙彌十戒)를 받고 득도하였다.
그는 이후 모든 법이 하나로 돌아가니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라는 화두(話頭)를 가지고
홀로 참선에 열중하다가 1895년 아산군 봉곡사(鳳谷寺)에서 새벽 범종을 치는 소리를 듣고 크게 깨달음을 얻었다 한다.
천장암에 돌아와 머무르던 중 1904년(광무 7년) 스승 경허로부터 전법계를 이어받았다.
이후 예산군 덕숭산(德崇山)에 머무르며 금선대(金仙臺)를 짓고 후학을 지도하여 한국 선불교 중흥에 기여했다.
그가 고명하다는 말을 듣고 궁궐에서 상궁과 나인들이 그의 법문을 들으러 찾아오기도 했다.
하루는 만공이 그들에게 노래 하나를 불러주었다.
'앞산에 딱따구린 없는 구멍도 뚫는데 우리 집 그 양반은 있는 구멍도 못 찾네.'라는 것이었다.
나중에 궁인들이 돌아가고 나자 상좌들은 그 뜻을 물으니 내가 부른 그 노래가 바로 법문이라 답하였다.
한참을 생각하던 상좌들은 나중에 은유적으로 풍자한 그 뜻을 이해하였다.
1921년 11월 30일 설립된 선학원 중앙선원
덕숭산 수덕사(修德寺), 정혜사(定慧寺), 견성암(見性庵), 서산 안면도의 간월암(看月庵) 등을 중창하였으며,
1920년대초 선학원(禪學院) 설립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선승들의결사(結社)이자
경제적 자립을 위한 계(契) 모임인 선우공제회운동(禪友共濟會運動)에 참여하였다.
1927년 현양매구(懸羊買拘)라는 글을 지었는데, 임제 32대 사문 만공이라 하여 임제종풍(臨濟宗風)의 계승자임을 선언하였다.
그는 조선총독부의 불교정책에 정면으로 반대하여 조선 불교를 지키려 하였다.
1937년 마곡사(麻谷寺) 주지를 지낼 때 조선총독부 회의실에서 조선총독부 주최로 열린 조선 31본산(本山) 주지회의가 열렸는데
총독부가 조선불교의 일본불교화를 주장하자 이에 호통을 치며 공박하였다.
만공은 당시 회의석상에서 미나미 지로(南次郞) 총독에게 '전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는 말로는 독실한 불자라 하나
조선의 불교를 파괴시켰으므로 교리에 따라 지옥에 떨어질 것이니, 그를 우리가 지옥에서 구하지 않으면
누가 구하겠는가'라며 오히려 그의 명복을 빌어주자며 조롱하였다.
그는 실연후 찾아온 일엽이 승려가 되지 않으리라고 내다봤으나 그가 승려가 되기를 굳게 결심하여 문하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나혜석은 승려가 될 팔자가 아니라며 거절하였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 만공은 다른 승려들과 함께 탁발을 먼 곳까지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고도 하고
걸어서 하루는 걸리는 산을 오를 때였다고도 한다. 시주미를 메고 묵묵히 걸어오던 스님
스님을 비롯한 승려들 혹은 수행하던 스님들이 만공에게 쉬었다 가자고 보채고 졸랐다.
큰스님 쉬었다 가자고 반복하면서 재촉했던 것이다. 해는 이미 서산에 걸렸고
산에 오르려면 멀었는데 계속 젊은 스님들은 쉬었다 가자고 졸랐다.
그때 만공 스님은 어느 밭에서 일하고 있는 여자를 보았다.
순간 만공 스님은 갑자기 밭갈이를 하던 여자를 더듬고 키스를 하였다.
놀란 여자는 비명을 질렀고 그녀의 아버지 또는 남편이 낫을 들고 저 땡초놈 잡으라며 분노하여 쫓아왔다.
놀란 스님들은 그길로 줄행랑을 쳤고 두 시간 만에 산사 또는 산정상 근처에 이르게 되었다.
만공이 스님들더러 다리가 아프냐고 하니 아니오 라고 답하였고, 더우냐 라고 하니까 아니오 라고 답했다 한다.
생애 후반
1940년 5월의 조선총독부의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수행과 참선에만 정진하였다.
1941년 선학원에서 개최한 전국고승법회에서 계율을 올바로 지키고 선(禪)을 진작시켜 한국불교의 바른 맥을 이어갈 것을 강조하였다.
이론과 사변을 배제하고 무심의 태도로 화두를 구할 것을 강조하였으며,
간화선(看話禪) 수행의 보급과 전파에 전력하였다.
그는 또한 제자들에게 무자화두에 전념할 것을 강조하였다.
덕숭산 상봉에 전월사(轉月舍)라는 암자를 짓고 생활하다가 1945년 광복을 맞이하였다.
계속 전월사에서 생활하다가 1946년 10월 20일,
거울을 보며 "만공, 70년 동안 나와 동고동락하느라 수고 많았네"라 중얼거린 뒤 잠들듯이 열반에 들었다.
세수 75세, 법랍 62세로 입적하였다. 사후에 《만공어록 滿空語錄》이라는 책이 편찬되었다.
사후
덕숭산에서 다비하여 유골은 덕숭산금선대 근처에 부도 만공탑을 세웠다.
진영(眞影)은 경허의 진영과 함께 금선대에 봉안되었다
만공스님의 문하에서는 보월(寶月), 전강(田岡), 용음(龍吟), 고봉(古峰), 금봉, 혜암, 춘성, 금오(金烏), 벽초,
금봉, 춘성(春城), 서경(西耕), 혜암(惠庵), 벽초, 원담 등이 있다. 비구니 법희(法喜), 만성(萬性), 일엽 등의 제자가 되었다.
처음으로 전법게를 전한 제자는 수제자인 보월이다. 그러나 보월은 40세로 요절했다.
1924년 12월 보월선사가 죽자 보월선사의 스승인 만공선사(滿空禪師)가 1925년 2월 덕숭산 정혜사(定慧寺)에서
건당식(建幢式:스스로 일가를 이루는 법회)을 베풀어주고 금오선사에게 전법게(傳法偈)를 주었다
덕숭산맥 아래 德崇山脈下무늬 없는 인(印)을 지금 전하노라.
今付無文印보월은 계수나무에서 내리고 寶月下桂樹금오는 하늘 끝까지 날아가네. 金烏徹天飛
<백과사전에사>
수덕사 정혜사옆에 있는 만공탑.
산신각에서 본 삼준산.
연암산은 아래로 내려가 우측 화살표 방향으로 오른다.
화장실앞 연암산 오름길 초입에 있는 경허스님 오도송.
13 : 18. 천장사(天藏 寺). 경허스님과 삼월 세 제자인 수월,헤월.만공스님이 수행하던 곳이다.
절아래의 화장실 우측 고월정(古月精)뒤 능선으로 오른다. 제법 가파르게 올려챈다.
좌측 돈대윗집이 법당,맨앞에 보이는 건물은 화장실인데 안은 현대식.
절아래의 화장실 우측 고월정(古月精)뒤 능선으로 오른다. 제법 가파르게 올려챈다.
천장사(天藏 寺)와 부도.
오름길에 뒤 돌아 본 연쟁이 고개.
13 ; 47. 좌측에서 올라오는 능선위에 올라 우측으로 올라간다. 삼준산(좌).
전망좋은 넓은 바위가 있어 날이 좋으면 삼준산과 봉화산, 도비산과 안면도를 보며 쉬어가면 좋겠다.
서해안 고속도로,봉화산,신송(고북)저수지.
천수만, 도비산,안면도방향.
연암산(燕岩山.440.8m) 정상부근에서
좌측 뒷산, 덕숭산(뒤). 독고개(가운데), 뒤로 홍동산,봉수산. 우측이 연쟁이고개.
연암산(燕岩山.440.8m) 정상부근에서
좌측이 연쟁이 고개. 가운데 큰산, 가운데 앞쪽 하얀 눈이 있는곳이 천장사.
연암산(燕岩山.440.8m) 정상부근에서
봉화산과 신송저수지.
연암산(燕岩山.440.8m) 정상부근에서 가야산(678.2m)과 우측으로 원효봉(604.7m).
14 ; 02. 연암산(燕岩山.440.8m). 산불감시 카메라와 이정표(비녀바위 700m.삼준산,장요리 1km. 천장산장요리 500m).
가야산부터 덕숭산.한티고개,뒷산,독고개,삼준이 조망된다.내포길은 정상전에 허릿길로 건너간다.
.내포길은 정상전에 허릿길로 건너왔다.
14 ; 18/20. 정자에서 뒤 돌아 본 연암산.
갈 능선과 한서대와 가야산, 원효봉,뒷산과 덕숭산을 둘러보고 바로 아래에 비녀바위.
정자앞에서 본 갈 능선.
14 : 22. 각시바위(비녀바위).아랫동네사람들이 산제를 올리는 곳이란다.
14 ; 31. 좌측으로 초록리 하산길을 지난 조망처.
가야산부터 독고개까지와 연암산을 돌아보고
가야산-원효봉과 한서대.
한티고개 아래의 흉물스런 채석장과 뒷산(449.1m). 우측긑이 독고개.
뒤 돌아 본 연암산.
잠시 바위구간을 내려서면 편안한 산길이 이어진다.
14 ; 46. 334.6m전 안부.
능선길이 우측으로 휘어 내려간다.대곡리 하산길까지는 아직 두어개의 봉을 더 넘어야한다.
뒤 돌아 본 연암산.
14 ; 59. 앞봉넘어 연암산성 안내판.
좌로 꺽어 내려가 장의자가 있는 앞봉에서 우측으로 내려간다.
15 ; 08. 좌측에서 온 임도따라 우로 꺽어 내려간다.한서대 입구 3.69km. 천장사 3.16km
15 ; 35분에 있는 해미에서 예산가는 511번 버스를 탈수있을까 싶어 부지런히 간다.
15 ; 18. 임도에서 좌측 지름길로 내려섰다. 길은 좋고 한서대입구 2.9km 안내판.
아래동네에 산다는 산책나온 젊은(?)부부를 만났는데 버스 시간은 모른단다.
15 : 30. 돌아온 임도를 다시 만났다.
앞은 사방댐. 운동기구들 있고 좌측으로 내려간다.
15 ; 33. 임도에서 좌측 산밑으로 난 수렛길로 간다.
내포길 안내판이 있지만 도로따라 가기 쉽다.
가야산-석문봉-일락산능선과 대곡2리마을이 보인다.
15 : 38. 소하천을 건너는 세멘다리를 건너 좌측으로 간다.한서대입구 0.62km.
방금전에 버스 한 대가 우측 해미터널쪽으로 갔다.소하천둑길을 좀더 가다 우측으로 간다.
15 ; 42. 둑길에서 우측 흙길로 들어서 45번 도로로 나간다.
15 : 45. 45번국도.
길건너에 대곡2리 표지석과 원효길 2구간 안내판과 버스정류장.
1코스 끝내고 우측 대곡2리 버스정류장에서 버스시간표를 보니 510, 511 노선이 없다.
다음지도에선 이곳과 좀더 우측의 한서대정문 모두에서 510. 511번버스가 있는데
510.511버스는 시외버스가 서는 한서대정문 정류장에서 서는가 보다.
지나온길과 멀리 연암산.
우측 대곡2리 버스정류장에서 버스시간표를 보니 510, 511 노선이 없다.
다음지도에선 이곳과 좀더 우측의 한서대정문 모두에서 510. 511번버스가 있는데
510.511버스는 시외버스가 서는 한서대정문 정류장에서 서는가 보다.
해미 시내버스시간표.
해미 시외버스시간표.
출처: http://yul6629a.tistory.com/ [산경표를 따라서]
첫댓글 역사와 수려한 지세를 확인할 수 있는 내포문화숲길을 시작하셨군요.
충청도 양반의 고장답게 볼거리도 풍성합니다.
금북정맥 시절 가야산, 덕숭산 지나며 잠시 들렀던 수덕사의 모습도 상세히 조명하셨구요.
역사에 얽힌 유래담도 흥미롭습니다.
이어지는 안전하고 즐거운 여정을 빕니다.